윤극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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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극영은 1903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 동요 작곡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1922년 일본에서 색동회를 조직하고, 1920년대에 '반달', '고드름', '설날' 등 다수의 동요를 작곡했다. 1926년에는 한국 최초의 동요 작곡집인 《반달》을 출판했다.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음악 활동을 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노래동무회'를 조직하고 동요 작곡 및 아동 문화 운동에 힘썼다. 주요 작품으로는 《반달》, 《설날》, 《고기잡이》 등이 있으며, 1956년 소파상, 1970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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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요 작곡가 - 홍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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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해송은 일제강점기 및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이자 언론인으로, 방정환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여 아동문학 운동을 전개했으며, 광복 후에는 작품을 통해 사회상을 비판하는 등 대한민국 아동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 윤극영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윤극영 |
| 로마자 표기 | Yun Geuk-yeong |
| 출생일 | 1903년 9월 6일 |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
| 사망일 | 1988년 11월 15일 |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 활동 시기 | 1922년~1987년 |
| 직업 | 테너 성악가 바이올리니스트 동요 작사가 동요 작곡가 동요 편곡가 지휘자 아동문학 아동문화운동가 극작가 |
| 장르 | 서양 고전 음악 대한 민족 동요 음악 |
| 종교 | 개신교 |
| 배우자 | 오인경 |
| 가족 | 자녀는 3남 1녀 아버지 윤희구(유교 성리학자) 고종사촌 형 심우섭(언론인) 고종사촌 형 심명섭(개신교 목사) 고종사촌 형 심훈(소설가) |
| 기타 | |
| 민족 | 해평 윤씨 |
2. 생애
한성부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중 1922년 도쿄에서 색동회 조직에 참여하며 동요 작곡 활동을 시작했다.[8][1] 1923년 〈반달〉, 〈고드름〉, 〈설날〉 등 30여 편의 동요를 작곡했으며[8], 1924년 서울에서 다리아회를 조직하여 아동 문화 운동을 펼쳤다.[3][1] 1926년에는 한국 최초의 동요 작곡집 《반달》을 출판했다.[8]
같은 해 만주 용정으로 이주하여 약 10년간 교사로 재직하며 '우산셋이 나란히', '고기잡이' 등 다수의 동요를 만들었다.[1] 이후 일본, 하얼빈 등지에서 활동하다가[1] 8·15 광복 후 1947년 월남하여 서울에서 ‘노래동무회’를 조직하고 동요 보급에 힘쓰며 100여 곡을 추가로 작곡했다.[8][1] 동요 외에도 서울신석초등학교, 고명중학교 등의 교가를 작곡했으며[8], 1987년 은퇴 후 이듬해인 1988년 11월 15일 향년 86세로 별세했다.[8]
2. 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1903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1년 중퇴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음악학교와 동양음악학교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전공하였다.[1]2. 2. 색동회와 다리아회 활동
1922년 일본 도쿄에서 어린이 문화 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했다.[8] 1923년에는 소파 방정환, 마해송 등과 함께 색동회를 정식으로 결성했으며, 같은 해 〈반달〉, 〈고드름〉, 〈설날〉을 비롯하여 30여 편의 동요를 작곡했다.[8] 1924년에는 동요 단체인 ‘다리아회’(달리아회)를 조직하여 한국어 동요들을 보급했다.2. 3. 만주와 일본에서의 활동
1921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퇴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음악학교와 도요 음악학교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공부했다.[1] 1923년 도쿄에서 방정환, 마해송 등과 함께 어린이 문화 운동 단체인 ‘색동회’ 창립 동인으로 참여하여[1][8], 본격적으로 한국어 동요 창작을 시작했다.[1] 같은 해 7월 서울에서 열린 전조선소년지도자대회에 참가하여 「동요에 대한 실재론」(童謡に対する実在論일본어)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기도 했다.[1]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1924년 서울로 돌아와 동요 단체인 ‘다리아회’를 조직하고[3][1] 아동 문화 운동과 함께 동요를 널리 보급하는 데 힘썼다.[1]
1926년 1월에는 피아니스트 오인경과 함께 만주 용정으로 가서 약 10년간 머물렀다. 그곳에서 동흥중학교, 광명중학교, 광명고등여학교의 음악 교사로 일하며[1] '제비 남매', '우산셋이 나란히', '고기잡이' 등 많은 동요를 작곡했다.[1]
1936년 서울로 잠시 돌아와 음악 활동을 하다가 같은 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1] 1937년에는 일본에서 극장 가수로 활동하며 예술단 창립을 시도하기도 했다.[1] 1940년에는 서울과 간도를 거쳐 하얼빈으로 가서 하얼빈예술단 창립을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했다.[1] 1941년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역마차 사업을 하는 한편, 간도성협화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1] 이후 다시 하얼빈에서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1]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만주 지린성 용정과 중화민국 허베이성 톈진 등지에 머물렀다.[8] 1946년 용정에서 경비대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복역 중 보석으로 풀려났다.[1] 1947년 톈진에서 손수레를 끌며 월남하여 서울로 돌아왔고, ‘노래동무회’를 조직하여 동요 보급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8][1]
2. 4. 해방 이후 활동
1945년 8·15 광복 당시 만주 지린성 룽징과 국민정부 시대 중화민국 허베이성 톈진에 머물렀다.[8] 1946년 용정에서 경비대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복역 중 보석되었다.[1] 1947년 톈진에서 손수레를 끌고 월남하여 '노래동무회'를 조직했으며, 동요 100여 곡을 작곡했다.[8][1] 동요 외에도 서울신석초등학교와 고명중학교의 교가를 작곡하였다.[8]1987년에는 어린이의 심성 계발과 순화를 목적으로 동화, 동요, 그림, 연극 등의 활동을 추진하는 단체인 동심문화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며[3], 같은 해 은퇴하였다.[8] 이듬해인 1988년 11월 15일 향년 86세로 별세했다.[8] 사후 동심문화원은 반월문화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서울미래유산 제1호인 윤극영 가옥의 관리자가 되었다.[1]
3. 작품 및 평가
그는 홍난파·박태준과 함께 동요 작곡계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8] 대표작으로 《반달》, 《설날》, 《고기잡이》, 《기찻길 옆 오막살이》 등이 있다.
3. 1. 주요 작품
그는 홍난파, 박태준과 함께 동요 작곡계의 개척자로 평가받는다.[8] 대표작으로는 《반달》, 《설날》, 《고기잡이》, 《기찻길 옆 오막살이》 등이 있다.가장 유명한 작품은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로 시작하는 1924년작 《반달》이며, 한국 최초의 창작 동요로 알려져 있다.[3][4] 이 외에도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로 시작하는 《설날》[4], 《할미꽃》, 《고기잡이》, 《꾀꼬리》, 《옥토끼노래》 등의 창작 동요를 발표했다. 또한 《고드름》, 《따오기》 등 기존 동요에 곡을 붙이는 등 동요 보급 운동을 펼쳤다. 그는 점층법을 이용한 동요 창작을 통해 초창기 아동문학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1]
《반달》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동요 중 하나이다. 1950년대 초, 베이징에서 조선족 음악가 부자에 의해 중국어로 번역 및 편곡되었고, 1979년에는 30년간 애창된 곡으로 인정받아 小白船|샤오바이추안중국어이라는 제목으로 중국 전국 공통 음악 교과서에 수록되었다.[1]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 곡을 연주할 때 "조선족 동요"라고만 소개하고 작곡가 윤극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문제가 되기도 한다.[5][6]
3. 2. 저서
주요 저서로는 한국 최초의 동요곡집 『반달』(1925년)과 『윤극영 111곡집』(1963년) 등이 있다.[1]3. 3. 평가
그는 홍난파·박태준과 함께 동요 작곡계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8] 대표작으로 《반달》, 《설날》, 《고기잡이》, 《기찻길 옆 오막살이》 등이 있다.가장 유명한 작품은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로 시작하는 1924년의 《반달》이며, 한국 최초의 동요라고도 불린다.[3][4] 그 외에도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로 시작하는 《설날》[4], 《할미꽃》, 《고기잡이》, 《꾀꼬리》, 《옥토끼노래》 등의 창작 동요를 발표했고, 《고드름》, 《따오기》 등의 동요에 곡을 붙이는 등 동요 보급 운동을 펼쳤다. 점층법을 이용한 동요 창작을 통해 초창기 아동문학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1]
《반달》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서도 유명한 동요 중 하나이다. 1950년대 초, 베이징에서 조선족 음악가 부자에 의해 중국어로 번역·편곡되어, 1979년 30년간의 애창곡으로 小白船|샤오바이추안중국어이라는 제목으로 중국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음악 교과서에 수록되었다.[1] 참고로, 이 곡은 중국에서 연주될 때 "조선족 동요"라고만 소개하고 작곡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5][6]
4. 수상
1956년 제1회 소파상을 받았다.[1] 1963년에는 서울교육대학교에서 제정한 ‘훌륭한 선생님’으로 추대되었고,[9][1] 1970년에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1]
5. 경력
1903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921년 중퇴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음악학교와 도요 음악학교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공부했다.[1]
1923년에는 방정환, 마해송 등과 함께 색동회(세크톤회) 창립에 참여하여 한국어 동요 창작을 시작했다. 같은 해 7월 서울에서 열린 전조선소년지도자대회에 참가하여 '동요에 대한 실재론'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관동대지진 이후인 1924년 서울로 돌아와 동요 단체인 ‘다리아회’를 조직하여[3] 아동 문화 운동과 동요 보급에 힘썼다.
1926년 1월에는 피아니스트 오인경과 함께 만주 용정(龍井)으로 가서 동흥중학교, 광명중학교, 광명고등여학교에서 약 10년간 음악 교사로 근무했다. 이 시기에 '제비 남매', '우산 셋이 나란히', '고기잡이' 등 많은 동요를 작곡했다. 1936년 서울로 돌아와 잠시 음악 활동을 하다가 같은 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7년에는 극장 가수로 활동하며 예술단 창립을 시도했다. 1940년에는 서울과 간도(間島)를 거쳐 하얼빈으로 가서 하얼빈예술단 창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41년 용정으로 돌아와 역마차 사업을 했으며, 간도성협화회 회장을 지냈다. 이후 다시 하얼빈에서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광복 후 1946년 용정에서 경비대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복역 중 보석으로 풀려났다. 1947년 천진(天津)에서 손수레를 끌고 남한으로 돌아와 '노래동무회'를 조직했다.[1]
1987년에는 어린이 문화 활동을 지원하는 동심문화원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나, 1988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3] 그가 살던 윤극영 가옥은 서울미래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동심문화원을 계승한 반월문화원에서 관리하고 있다.[1]
| 연도 | 내용 |
|---|---|
| 1903년 | 한성부 출생 |
| 1917년 | 경성고등보통학교 입학 |
| 1921년 | 경성법학전문학교 중퇴 |
| 1921년 이후 | 일본 유학 (도쿄 음악학교, 도요 음악학교에서 성악, 바이올린 전공) |
| 1923년 | 색동회 창립 동인 참여, 전조선소년지도자대회 강연 |
| 1924년 | 동요 단체 다리아회 조직 |
| 1926년 ~ 1936년 | 만주 용정에서 음악 교사 근무, 다수 동요 작곡 (제비 남매, 우산 셋이 나란히, 고기잡이 등) |
| 1936년 | 서울 귀환 후 일본 재도일 |
| 1937년 | 일본 극장 가수 활동, 예술단 창립 시도 |
| 1940년 | 하얼빈에서 예술단 창립 시도 (실패) |
| 1941년 | 용정 귀환, 역마차 사업, 간도성협화회 회장 역임 |
| 1946년 | 용정에서 체포 및 수감, 보석 |
| 1947년 | 남한 귀국, 노래동무회 조직 |
| 1987년 | 동심문화원 설립 및 운영 |
| 1988년 | 사망 (향년 85세) |
6. 학력
참조
[1]
웹사이트
윤극영(尹克榮)
https://encykorea.ak[...]
2023-10-29
[2]
웹사이트
[해평윤씨] 윤극영(尹克榮)
https://www.sungssi.[...]
한국뿌리문화보존회, 한국성씨총연합회
2018-08-02
[3]
웹사이트
寄稿 韓国初の童謡、尹克栄作「半月」…朴燦鎬 韓国大衆音楽研究会会員
https://www.mindan.o[...]
2014-05-07
[4]
웹사이트
[단독] [오늘의 세상] 윤극영 '반달' 원곡은 "푸른 하늘 은하수" 아닌 "푸른 하늘 은하물"이었다
https://www.chosun.c[...]
2012-05-05
[5]
웹사이트
조선족 민요로 소개된 우리 동요 ‘반달’…中 또 왜곡?
https://news.kmib.co[...]
2020-10-26
[6]
웹사이트
'반달'이 중국 민요?…中 예능까지 번진 '역사왜곡' 논란
https://m.hankookilb[...]
2020-10-26
[7]
뉴스
「반달 할아버지」尹克榮 선생 "모두들 童心으로 살면 社會 밝아져요"
경향신문
1984-04-12
[8]
간행물
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의 서양음악가/작곡가/윤극영
글로벌 세계 대백과
[9]
뉴스
童心과 함께 산 平生
동아일보
1988-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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