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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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학자는 일본 시코쿠 출신으로, 한국으로 이주하여 고아 구제 시설인 공생원에서 봉사하며 3,000여 명의 고아를 돌본 인물이다. 1938년 공생원 원장이었던 윤치호와 결혼하여 공생원을 운영하였으나, 남편이 한국 전쟁 중 실종된 후에도 공생원을 지켰다. 1963년 한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국민장을, 1967년 일본 정부로부터 남수포장을 받았으며, 1968년 사망 후 목포시 최초의 시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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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학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윤학자 |
원어 이름 | 田内 千鶴子 |
출생일 | 1912년 10월 31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고치현 고치시 |
사망일 | 1968년 10월 31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전라남도 목포시 |
성별 | 여성 |
직업 | 교육인, 사회사업가 |
종교 | 개신교 |
배우자 | 윤치호 |
자녀 | 2녀 2남 |
수상 | 한국 문화훈장 국민장, 일본 남수포장(藍綬褒章) |
기타 정보 | |
로마자 표기 | Tanouchi Chizuko |
2. 생애
고치현 고치시 와카마츠에서 태어났다.[1] 1938년,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윤치호와 결혼하며 '윤학자'라는 이름을 얻었다.[3] 남편과 함께 고아 구제를 위해 공생원에서 일했으며, 한국 전쟁 중 남편이 행방불명된 후에도 홀로 3,000여 명의 고아를 돌보며 헌신했다.
이러한 공로로 196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고, 1967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남수포장을 받았다. 1968년 목포시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목포시 최초의 시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져 3만여 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현재 공생원은 장남 전내기가 원장으로 있다.
그의 생애는 한일 합작 영화 사랑의 묵시록으로 제작되기도 했다.[4] 2012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고향인 고치시에서 열렸고,[1] 2015년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 백건우 피아노 리사이틀이 산토리 홀에서 열렸을 때 전내기의 아들도 참석했다.
2. 1. 초기 생애
1912년 10월 31일 일본 시코쿠 고치현 고치시 와카마쓰초에서 외딸로 태어났다.[5][1] 7세 때인 1919년 조선총독부 목포부청 하급관리인 아버지의 근무지에 따라 양친과 함께 조선으로 이주하였다.[6][7]1931년 목포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목포정명여학교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였다. 1936년부터 고등여학교 은사의 소개로 고아 구제 시설인 공생원 봉사를 제안받아 봉사활동을 하였다.[7] 공생원에서 음악과 일본어를 가르치는 봉사를 하던 그녀는 공생원 원장이었던 윤치호와 1938년 10월 15일 결혼하였다.[8][3]
2. 2. 윤치호와의 결혼과 공생원 활동
1936년부터 목포고등여학교 시절 은사의 소개로 고아 구제 시설인 공생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7] 공생원에서 음악과 일본어를 가르치며 봉사하던 중, 공생원 원장이었던 윤치호를 만나 1938년 10월 15일 결혼하였다.[8][3] 결혼 후 남편 윤치호와 함께 공생원을 운영하였으며, 슬하에 2녀 2남을 낳았다.[5]2. 3. 한국 전쟁 이후의 헌신
1951년 1월, 한국 전쟁 중 남편 윤치호가 광주의 전남도청으로 식량 지원을 요청하러 갔다가 행방불명되었다.[8][3] 남편이 사라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홀로 공생원을 지키며 고아 구제에 헌신하여, 3,000여 명의 고아를 보호하고 양육했다.[3] 이러한 공로로 1963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상하였다.[9] 1967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藍綬褒章|남수포장일본어을 받았다.[7] 1968년 5월 8일에는 전라남도지사가 수여하는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9]1968년 10월 31일 별세하였다. 장례는 목포역 광장에서 목포시 최초의 시민장으로 치러졌으며, 3만여 명의 목포 시민이 모여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10][3] 현재 공생원은 장남 전내기가 원장으로 운영하고 있다.[3]
1995년에는 윤학자와 윤치호 부부의 생애를 다룬 한일 합작 영화 사랑의 묵시록(일본어 제목: 愛の黙示録일본어)이 제작되었다.[4] 주인공 윤학자 역은 일본 배우 이시다 에리(石田えり일본어)가, 남편 윤치호 역은 배우 길용우가 맡았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정치인들의 과거사 관련 발언 등으로 인해 한일 관계가 경색되었고, 문화체육부는 제작사가 일본 회사라는 이유 등으로 국내 상영 불허 결정을 내렸다. 이로 인해 영화는 한국에서 상영되지 못하고 1997년 8월 30일 일본에서만 개봉되었다.
2012년에는 윤학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그의 고향인 일본 고치현 고치시에서 열렸다.[1] 2015년 3월에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하여 산토리 홀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리사이틀이 열렸으며, 이 자리에는 전내기의 아들도 참석했다.
2. 4. 수상 및 서거
1963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9] 1967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남수포장(藍綬褒章)을 받았다.[7] 이듬해인 1968년 5월 8일에는 전라남도지사가 주는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하였다.[9]1968년 10월 31일, 윤학자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목포역 광장에서 목포시 최초의 시민장으로 치러졌으며,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10]
3. 사후
1968년 목포시에서 사망했다. 목포시에서는 시민장을 치렀고, 3만 명이 참석했다.
3. 1. 추모 사업
현재 공생원은 장남 전내기가 원장으로 있다.장남 전내기의 생애는 『사랑의 묵시록』이라는 제목으로 한일 합작 영화로 제작되었다.[4] 2012년에는 윤학자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가 전내기의 고향인 고치현 고치시에서 개최되었다.[1]
2015년 3월에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하여 산토리 홀 대홀에서 백건우의 피아노 리사이틀이 열렸다. 이 리사이틀에는 전내기의 아들도 참여했다.
3. 2. 영화 '사랑의 묵시록'
1995년 윤학자와 남편 윤치호 부부의 생애를 그린 한일합작영화 사랑의 묵시록( 愛の黙示録|아이노 모쿠시로쿠일본어 )이 제작되어 완성되었다.[4] 하지만 당시 일본 정치인들의 과거사 관련 망언 등으로 인해 대일 감정이 악화되었고, 제작사가 일본 회사라는 이유로 문화체육부로부터 상영 불가 판정을 받아 한국에서의 상영이 무산되었다. 결국 1997년 8월 30일 일본에서만 정식으로 상영되었다. 주인공 윤학자 역은 일본 배우 이시다 에리가 맡았으며, 남편 윤치호 역은 배우 길용우가 연기했다.3. 3. 한일 관계에서의 의의
일본인으로서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이라는 격동의 시기 속에서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헌신한 윤학자의 삶은 한일 관계에 있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국경을 넘는 인도주의적 활동은 양국 간의 역사적 아픔 속에서도 화해와 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윤학자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여받았다.[9] 이는 당시 한일 관계를 고려할 때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또한 1967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남수포장(藍綬褒章)을 받아[7], 그의 헌신이 양국 모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1995년에는 윤학자와 남편 윤치호의 생애를 다룬 한일 합작 영화인 사랑의 묵시록(일본어 제목: 愛の黙示録)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일부 정치인들의 과거사 망언 등으로 대한민국 내 반일 감정이 고조된 상황이었고, 제작사가 일본 회사라는 이유 등으로 문화체육부의 상영 불가 판정을 받아 한국 내 개봉은 무산되었다. 영화는 1997년 일본에서만 정식으로 상영되었다.
2015년 3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 도쿄의 산토리 홀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리사이틀이 열렸는데, 이 자리에는 윤학자의 장남인 전내기 공생원 원장의 아들도 참석하여 한일 우호의 의미를 더했다.
참조
[1]
웹사이트
〝木浦の母〟の精神永遠に 田内さん生誕100年行事開幕
http://203.139.202.2[...]
2012-11-09
[2]
서적
朝鮮を愛し、朝鮮に愛された日本人
祥伝社
2013-06-10
[3]
뉴스
「悪巧みする連中は撲滅を」 安倍首相特使の発言が物議
http://www.chosunonl[...]
2017-06-11
[4]
웹사이트
映画.com
https://eiga.com/mov[...]
株式会社エイガ・ドット・コム
2024-05-14
[5]
웹인용
"[이웃 품은 신앙一家 (中) ‘한국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 고향 고치 앞바다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11-03-30
[6]
웹인용
"[한국기독역사여행] 조선총독부 관리 딸이 사랑한 '거지 대장' 전도사"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17-02-25
[7]
웹인용
"[목포] 죽을 때까지 고아 돌본 일본인, 진심은 통했다"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19-04-13
[8]
웹인용
"[이웃 품은 신앙一家 (下) ‘거지 대장’ 전도사 윤치호] 공생원 83년… 4000 아이들 양육하다"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11-04-06
[9]
웹인용
윤학자 여사 별세 고아 사업 이바지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68-11-02
[10]
웹인용
전남도 51년만에 日지자체와 자매결연한 배경은?
https://news.naver.c[...]
《뉴스1》
201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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