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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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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창은 흉년이나 춘궁기에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곡식을 비축하고 대여하는 제도로,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각국에서 운영되었다. 한국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유사한 제도가 존재했으며, 고려 시대에 흑창으로 시작하여 성종 때 의창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나, 관리의 부정부패와 사창의 등장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중국의 의창은 수나라 때 시작되어 역대 왕조에 계승되었으나, 남송 이후 쇠퇴했다. 일본에서는 다이카 개신 때 도입되어 율령에 규정되었으나, 율령제 쇠퇴와 함께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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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창
의창
로마자 표기Uichang
종류구휼 제도
기원수나라
설치 시기고구려 시대
목적흉년에 대비하여 곡식을 비축하고 백성을 구제
상세 정보
고려 시대전국 각지에 설치, 운영
조선 시대초기: 유명무실
후기: 활성화, 운영 주체 다양화 (관 주도, 향촌 자치, 사창 등)
운영 방식평상시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이자를 붙여 회수
문제점관리 소홀, 부정부패, 횡령 등으로 제 기능 상실
의의
사회 안전망백성들의 생활 안정에 기여
공동체 의식 함양백성들의 상부상조 정신 고취
현대적 의미사회 복지 제도의 효시
민간 차원의 자발적 구호 활동의 모범

2. 한국의 의창

한국의 의창은 수나라에서 시작된 제도로, 삼국 시대부터 빈민 구제 제도가 있었다. 춘궁기에 곡식을 나누어 주고 추수 때 거둬들이는 진대법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고려 태조고구려진대법을 계승하여 흑창(黑倉)을 설치했다. 흑창은 백성에게 흉년이나 춘궁기 등 비상시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되갚게 하는 제도였다. 성종 5년(986년)에는 흑창을 의창(義倉)으로 이름을 바꾸고 여러 지방에 설치했다.

2. 1. 연원

의창은 본래 수나라에서 시작된 것인데, 한국에도 삼국 시대부터 빈민구제 제도가 있어 춘궁기에 곡식을 나누어 주고 추수 때 거둬들이는 일이 있었다. 대표적 사례로 '진대법'을 꼽는다.

고려 태조 때 설치한 빈민 구제 기관인 흑창(黑倉)은 고구려의 진대법을 계승한 제도이다. 흑창은 백성에게 흉년이나 춘궁기를 비롯한 비상시에 곡식을 나누어 주고 곡식을 거두는 가을에 되갚게 하는 제도이다. 성종 5년(986년)에 흑창을 의창(義倉)으로 바꾸어 여러 지방에 설치하였다.

초기에는 경(京)·외(外)에 상평창을 두고 이를 실시하였으나, 뒤에는 경도(京都)에서만 행해지다가 없어졌다. 그 후에는 환곡을 조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상례였다.

2. 2. 운영 및 변천

의창은 곡물 가격 안정을 위한 조적(糶糴)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조적은 흉년에 곡물 가격이 오르면 관에서 비싸게 포(布)를 구매하여 곡물 가격을 낮추고, 풍년에 곡물 가격이 내리면 싸게 포를 팔아 곡물 가격을 올리는 정책이었다.

처음에는 관곡(官穀)을 주로 사용했으나, 1023년(현종 14)부터는 일반 백성에게서 양곡을 충당하여 구호 기능을 강화했다.

무신 집권기까지 활발히 운영되었으나, 무신 집권과 외침으로 쇠퇴했다. 공민왕 때 다시 설치되어 창왕은 양광도(楊光道)에 설치했고, 1391년(공양왕 3)에는 개경(開京) 5부(五部)에도 설치했다.

조선은 고려 제도를 계승하여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운영을 활성화했다. 의창은 나중에 환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392년(태조 1) 설치 당시에는 이자 없이 대여했으나, 1417년(태종 17)에는 총량이 415만 5,401섬 2말에 달했다. 그러나 대여 수수료, 자연 손실 등을 보충하기 위해 연 1~2할의 이자를 징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백성의 낭비와 관리 소홀로 재고량이 줄어 국고 고갈을 초래했다. 세종 때는 승려에게서 정전(丁錢)을 징수하거나, 토지 몰수, 향리(鄕吏) 위전(位田) 폐지, 어염세(魚鹽稅) 양곡 징수, 사창(社倉) 설치 등 대책을 마련했다. 1451년(문종 1)에는 국가 재정 궁핍과 지방의 환곡 요구 증가로 의창 보조 기구인 사창(社倉)을 촌락에 독립적인 구호기관으로 설치하여 경상도에서 먼저 실시했다. 사창 이식은 1섬(15말)에 3말이었고, 의창 이식은 10말에 2되로 고정하여 균형을 맞췄다. 1461년(세조 7) 사창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사창은 원곡 대여와 이식 취득으로 처음에는 원곡 감소를 막았으나, 점차 진휼 기관이 아닌 국가적 고리대 기관으로 변질되었다.

사창 원곡이 관리 소홀로 감소하자 사창 반대론이 제기되었다. 1470년(성종 1) 사창은 시행 20여 년 만에 호조의 제의로 폐지되었다.

원래 의창은 환곡 정책에서 나온 것으로 이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재고량 부족으로 이자를 붙이면서 구호기관에서 대여기관 성격을 띠게 되었다. 특히 의창 관리들이 아전(衙前)이나 지방 부호(富豪)와 결탁하여 사리사욕을 채워 백성들의 부담이 커지는 폐단이 심각했다.

3. 중국의 의창

중국에서 의창은 주례의 사도 속인 조에서 가 "위적법"을 실시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기록상 명확한 것은 개황 8년(585년)에 도지상서 장손평이 정의한 것이다. 제후로부터 민중까지 일정액의 조(粟)·기장(黍)을 납부하게 하여 주현에 설치된 의창에 납입하게 한 것이다. 이후 역대 왕조에 계승되었다. 천보 8년(747년)에는 전국에 총 의 비축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정 및 재정으로의 유용 등으로 인해 남송 이후에는 쇠퇴했다.

4. 일본의 의창

다이카 개신 때 의창이 도입되고, 다이호 율령으로 정해져 친왕을 제외한 전 인민이 그 빈부에 따라 납입했다.[1] 율령제가 쇠퇴하면서 의창도 쇠퇴했지만, 에도 시대부터는 유교의 영향으로 여러 번에 걸쳐 의창을 만들기도 하였다.[1] 하지만 메이지 정부 성립 후에 그 대부분이 정부에 접수되어 부족한 국가 재정을 메우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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