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궁지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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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궁지쟁은 오나라 손권 시대에 황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를 둘러싸고 벌어진 권력 다툼이다. 손권은 장남 손등의 죽음 이후 손화를 태자로, 손패를 노왕으로 봉했으나, 두 아들의 세력 다툼이 심화되었다. 육손을 비롯한 신하들이 손화를 지지하고, 전종 등이 손패를 지지하며 파벌이 형성되었으며, 손노반의 참언으로 암투가 격화되었다. 결국 손권은 손화를 폐위하고 손패에게 자결을 명하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으며, 이로 인해 오나라는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 사건은 권력 승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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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궁지쟁 | |
|---|---|
| 개요 | |
| 발생 시기 | 삼국 시대 |
| 관련 국가 | 오 |
| 원인 | 후계자 선정 갈등 |
| 주요 인물 | 손권 손화 손패 노왕 전종 오찬 양축 제갈각 보즐 주거 육손 고담 장소 반준 여대 주환 손준 등윤 손량 |
| 배경 | |
| 손권의 후계자 문제 | 손권의 후계자 결정 지연 및 번복 |
| 손화와 손패의 경쟁 | 손권의 두 아들 손화와 손패 간의 치열한 후계 경쟁 |
| 대신들의 파벌 형성 | 대신들이 손화와 손패를 지지하는 파벌로 나뉘어 갈등 심화 |
| 전개 과정 | |
| 손화와 손패의 세력 다툼 | 손화와 손패가 서로를 모함하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 함 |
| 대신들의 암투 | 대신들이 각자 지지하는 왕자를 위해 암투를 벌임 |
| 손권의 심경 변화 | 손권이 후계 결정을 번복하며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듦 |
| 육손의 간언 | 육손이 손권에게 간언하여 상황을 개선하려 노력 |
| 결과 | |
| 손화 폐위 및 손패 자살 | 손권이 손화를 폐위시키고 손패에게 자살을 명함 |
| 많은 대신들의 숙청 |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대신들이 숙청되거나 처벌받음 |
| 오나라 정치의 혼란 | 이 사건으로 인해 오나라 정치가 크게 혼란해짐 |
| 손량 즉위 | 손량이 즉위하지만,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됨 |
| 영향 | |
| 오나라 국력 약화 | 이 사건은 오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 |
| 내부 분열 심화 | 오나라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켜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 |
| 삼국 시대 후반의 정세에 영향 | 삼국 시대 후반의 정세 변화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침 |
2. 발단
황룡 원년(229년)에 황위에 오른 손권은 황태자로서 장남이자 총명하기로 알려진 손등을 세웠지만, 손등은 적오 4년(241년) 5월에 3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병상에 있던 손등은 유서에서 셋째 동생 손화가 다음 태자가 되도록 추천했고, 손권도 이에 따라 이듬해 적오 5년(242년) 정월에 손화를 태자로 세웠다. 같은 해 8월에 이복 동생 손패를 노왕에 봉했는데, 처음에는 이 두 사람을 거의 동등하게 대우했지만, 가신단의 불만으로 손권은 별도의 궁을 설치하고 각각에 막료를 붙였다. 손패는 태자와 태자의 지지자들에게 원한을 품었다.
적오 6년(243년) 11월, 19년간 승상 직을 맡았던 고옹이 사망했다. 이듬해 적오 7년(244년) 정월, 오의 명장으로 알려진 육손이 승상에 임명되었지만, 형주 통치라는 기존 직무는 그대로였기에 수도 건업은 승상 부재라는 상황이 되었다. 또한, 궁중에서도 손권의 딸인 손로반(전종의 부인이기도 함)과 손화의 생모인 왕부인의 불화가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그 왕부인은 손권의 총애를 받는 비였지만, 그 신분은 어디까지나 부인(측실)이었다. 반숙 (후의 황태자의 어머니)처럼 정식 후로 존중받지는 못했다.
2. 1. 초기 권력 구조
3. 전개
손화(孫和)와 손패(孫覇) 간의 불화가 심화되자, 손권(孫權)은 두 사람과 신하들의 왕래를 금지했으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후 노왕파(魯王派) (손패파)는 태자 폐립의 움직임을 강화했고, 태자파(太子派) (손화파)는 이를 막으려 했다. 또한 손패는 여러 신하들의 말에 따라 태자 폐립에 스스로도 의욕을 보였다.
여러 신하들은 둘로 갈라져, 손화 측에는 육손·제갈각·고담·주거·등윤·시적·정밀[14]·오찬·굴황·진정·진상[15]·장순[16]·장휴[17]·고승[18]·고제[19]·육윤[20] 등이 가담했고, 손패 측에는 전종·보즐·손홍·여대·여거[14]·손준[16]·전기·오안·손기·양축[21]·제갈작[22] 등이 붙었다. 특히 손노반은 손화의 생모 왕 부인과 불화하여 궁중에까지 암투를 확산시켰다.
육손은 여러 차례 손화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리고 건업에 올라가 손권을 직접 설득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노왕파가 손권에게 참언하였다. 특히 양축은 육손에 관한 20개조 혐의 사항을 고발하고 손권은 육손에 대해 문책 사자를 수차례 보냈다. 이후 노왕파의 참언이 심화되어 태부 오찬이 처형되고 고담(육손의 조카), 장휴 등 태자파의 핵심 인사들이 차례로 좌천(혹은 유배)되었다. 적오 8년(245년) 2월, 육손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화병이 나 죽었다.
이어 적오 9년(246년) 9월의 인사개편으로 전종이 우대사마, 보즐이 승상이 됨으로써 노왕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적오 10년(247년) 정월에 전종이, 5월에 보즐이 잇따라 사망하자 다시 사태가 복잡해진다. 하지만 손화파는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고, 다시 두 세력이 경쟁하여 사태는 완전히 수렁에 빠진다.
3. 1. 양측 세력
노왕파(손패파)는 태자 폐위 공작을 개시하고, 태자파(손화파)는 이를 막기 위한 공작을 개시하였다. 손패는 군신들의 말에 따라 태자 폐위에 스스로도 의욕을 보였다.[14] 군신들은 둘로 갈라져, 손화 측에는 승상 육손, 시상독 제갈각, 태상 고담, 표기장군 주거, 회계태수 등윤, 평위장군 주적, 상서 정밀,[14] 태부 오찬, 상서복야 굴황, 무난독 진정, 오영독 진상,[15] 장순,[16] 우림도독 장휴,[17] 경하독 고승,[18] 편장군 고제,[19] 상서선조랑 육윤,[20] 공주 손노육(주거의 아내) 등이 가담했다. 손패 측에는 대사마 전종, 표기장군 보즐, 중서령 손홍, 진남장군 여대, 월기교위 여거,[14] 무위도위 손준,[16] 전기(전종의 차남), 오안(오경의 손자), 손기, 양축,[21] 기도위 제갈작(제갈각의 장남),[22] 공주 손노반(전종의 아내) 등이 붙었다.[2] 특히 손노반은 손화의 생모 왕 부인과 불화하여 궁중에까지 암투를 확산시켰다.[3][4][5][6][7][8]육손은 여러 차례 손화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리고 건업에 올라가 손권을 직접 설득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노왕파가 손권에게 참언하였다. 특히 양축은 육손에 관한 20개조 혐의 사항을 고발하고 손권은 육손에 대해 문책 사자를 수차례 보냈다.[9] 이후 노왕파의 참언이 심화되어 태부 오찬이 처형되고 고담(육손의 조카), 장휴 등 태자파의 핵심 인사들이 차례로 좌천(혹은 유배)되었다. 적오 8년(245년) 2월, 육손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화병이 나 죽었다.[10]
이어 적오 9년(246년) 9월의 인사개편으로 전종이 우대사마, 보즐이 승상이 됨으로써 노왕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적오 10년(247년) 정월에 전종이, 5월에 보즐이 잇따라 사망하자 다시 사태가 복잡해진다. 하지만 손화파는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고, 다시 두 세력이 경쟁하여 사태는 완전히 수렁에 빠진다.
3. 2. 암투의 심화
손노반은 손권에게 손화와 왕 부인에 대한 참언을 하여 손권의 총애가 식게 만들었다.[2][3][4][5][9] 손화 모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손노반은 손권이 병이 들자, 손화가 장휴의 저택에 초대받았던 것을 이용하여, "손화는 기도를 하지 않고 아내의 친정에서 모의를 꾸미고 있다"라고 참언했으며, 그의 어머니인 왕부인도 손권이 병든 것을 기뻐하고 있다고 참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부인이 근심으로 인해 죽자, 손권의 손화에 대한 총애도 줄어들었다.양축은 육손에 대한 20개조 혐의를 제기했고,[9] 이로 인해 육손은 문책을 받고 결국 화병으로 245년에 사망했다.[9] 『오록』에 따르면, 양축이 몰래 손패의 입적을 적극적으로 권했고, 손권은 동의했지만, 밀담의 내용이 손화에게 알려졌다. 두려워진 손화가 육윤을 통해 무창(武昌)의 육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때문에 육손은 상소를 올려 손권을 간했다. 손권이 밀담 내용을 누설한 자를 찾으려 하자, 육윤은 손화를 보호하려 양축이 밀담을 누설했다고 무고했다. 결국 양축은 육윤과 함께 감금되었다. 양축은 혹독한 취조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누설했다고 답하여 처형되었다고 한다.
태자파 핵심 인물들(오찬, 고담, 장휴 등)이 처형되거나 좌천되었다.[17][18] 246년 인사개편으로 전종(우대사마)과 보즐(승상)이 임명되어 노왕파가 주도권을 잡았으나,[21] 247년과[21] 249년에 각각 사망하면서 다시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
4. 결과
250년, 손권은 손화를 폐위하고 남양왕으로 강등시켰으며, 손패에게는 자결을 명하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23] 노왕파 핵심 인물들인 전기, 오안, 손기, 양축 등은 주살되었다.[23] 손화 폐위에 반대한 굴황, 표기장군 주거 등은 형벌을 받거나 좌천되었고, 이 과정에서 중서령 손홍의 모함으로 주거는 자결했다. 손권은 막내아들 손량을 새 황태자로 책봉했다.
4. 1. 이후의 혼란
태원 2년(252년) 4월에 손권이 죽은 뒤 대장군 제갈각(그는 손화파였지만 246년 인사개편 때도 실각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일설에는 손패파와 통하고 있었다고도 한다)과 무위장군 손준(전 손패파)이 권력을 고스란히 잡게 되었다.[23] 처음에는 제갈각이 실권을 잡았으나, 그는 253년 6월 위나라 원정을 대실패하고 실각했다.[23] 동년 8월 손준은 쿠데타를 일으켜 제갈각을 잡아 죽이고 실권을 쥔 뒤, 손화에게 트집을 잡아 신도군으로 강제이주시키고 그를 자살케 했다.[23]오봉 원년(254년)에는 손화파의 행동이 활발해지고, 손등의 아들인 손영이 손준 암살에 실패하여 자살했다.[23] 그리고 손준이 죽은 뒤 권력은 종형제 손침에게로 넘어갔다.[23] 이듬해 왕돈 등이 손침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태평 3년(258년), 손침은 손량을 폐하고 손휴를 제위에 올리는데 이번에는 손휴가 손침을 주살한다.[23] 이렇게 내분은 계속 이어지고, 그 사이에 위나라는 촉나라를 병합해 버린다.
5. 영향
이궁지쟁은 오나라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24] 손화파에 가담했던 호족들, 특히 장소 일문과 고옹 일문이 큰 타격을 입었다.[24]
이 정치 투쟁에는 강남 호족들의 주류와 비주류 간의 갈등도 얽혀 있었다.[24] 본래 강남은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호족의 힘이 강한 지역이었다. 군사적으로 특출난 세력을 가진 손씨 가문을 맹주로 하는 연합 왕국과 같은 형태로 성립된 것이 오나라였다.[24] 이처럼 복잡한 정치적 배경을 가진 오나라가 내부에서 분열되어 복잡한 파벌을 형성하면서, 본래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까지 정쟁을 유발하게 되었다.[24]
위의 등애는 "손권이 붕어한 후, 오나라의 명가·호족은 새로운 조정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사병을 소유하고, 군세를 믿는다면, 독립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11][12][13] 배송지는 이 사건에 대해 손권이 혼란의 원인을 만들어 스스로 일족에게 화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24]
두 궁궐 사건으로 실각한 강남 호족이 많았기 때문에, 이 사건은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된 행동이라는 지적도 있다.[11][12][13]
6. 평가
배송지는 이 사건에 대하여, 손권이 한 번은 손화를 세웠다가 손패를 총애해 혼란의 원인을 만들어 스스로 일족에게 화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24] 원소와 유표가 각각 원상과 유종을 총명하다고 여겨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것과 비교하면, 손권의 어리석음이 더욱 심하다고 비판했다.[24]
현대적 관점에서는 이궁지쟁을 권력 승계 과정의 투명성과 적법 절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사적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7. 한국 정치에 주는 교훈
7. 1. 더불어민주당의 관점
7. 2. 국민의힘에 대한 비판적 관점
참조
[1]
문서
呉では皇太子の宮殿を「南宮」と称した
[2]
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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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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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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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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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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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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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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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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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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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志
[12]
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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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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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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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손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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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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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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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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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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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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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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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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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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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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