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당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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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이당쟁은 당나라 후기에 일어난 정치적 다툼으로, 821년 이종민의 과거 부정 사건을 계기로 시작되어 약 40년간 지속되었다. 이 사건은 우승유를 중심으로 한 우당과 이덕유를 중심으로 한 이당 간의 권력 투쟁으로 전개되었으며, 황제의 지지, 환관 세력의 개입, 그리고 유주 사건과 같은 정치적 사건들을 겪으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이 당쟁은 당나라의 쇠퇴와 사대부 계층의 부상에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역사학에서도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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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당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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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우이당쟁 (牛李黨爭) |
시기 | 당나라 중기, 8세기 말 ~ 9세기 중반 |
성격 | 관료 집단 간의 정치적 갈등 |
주요 인물 | 이덕유 (李德裕, Yi Deogyu) 우승유 (牛僧孺, U Seungnyu) |
배경 | |
원인 | 안사의 난 이후 번진 세력 확장, 중앙 정부 약화 |
전개 | |
시작 | 현종 (당) 말년, 이림보 (李林甫, Yi Rimbo)와 양국충 (楊國忠, Yang Gukchung)의 권력 다툼 |
심화 | 헌종 (당) 대, 과거 시험 출신 관료 vs. 명문 귀족 출신 관료 간 대립 |
주도 세력 | 우당 (牛黨, U-dang): 우승유 중심, 과거 출신 관료 지지 이당 (李黨, Yi-dang): 이덕유 중심, 명문 귀족 출신 관료 지지 |
쟁점 | 관료 임용, 재정 정책, 대외 관계 등 |
결과 | |
영향 | 당나라 정치 부패 심화, 사회 혼란 가중 |
종결 | 선종 (당) 대, 이덕유 실각 이후 우당 세력 우세 |
한계 | 근본적인 문제 해결 실패, 당나라 멸망의 간접적 원인 제공 |
2. 전개 과정
당나라에서 귀족 세력의 최고봉은 후한 이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산동 귀족이었고 그 중에서도 최씨·노씨·이씨·정씨 등 사성(四姓)이 으뜸이었다. 그 다음은 선비족을 모체로 하여 수나라와 당나라의 황실이 된 관롱집단이었다. 문벌귀족들은 관료 인사를 관장하는 상서성 이부를 장악하여 과거제를 통해 관직 생활을 시작한 관료들의 중앙 정계 진출을 방해하고 있었다.
현종 때 일어난 안사의 난은 당나라의 국력을 크게 소모시켰고 각 지방에서 절도사들이 반독립 상태로 할거하도록 만들었다. 헌종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고자 두황상, 무원형, 이길보 등의 주도로 조정에 반항적인 번진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강경책을 추진했고 일정 성과를 거두어 당나라는 일시적으로 중흥을 맞이했다.
808년(원화 3년) 진사과에 합격한 우승유, 황보식, 이종민 세 사람은 과거의 논제에 대해 당시의 실정을 비판하는 내용을 답으로 적어냈다. 재상[18] 이길보와 환관들은 헌종에게 읍소하여, 세 사람은 과거에 합격하고도 중앙에 등용되지 못하고 벽소를 받아 지방으로 발령받았다.[19]
814년(원화 9년) 이길보가 사망하자 배도가 후임 재상직에 올랐다. 당시 재상직에 있던 이봉길은 배도와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배도는 번진을 무력으로 진압해야 한다는 강경책을 펼쳤지만 이봉길은 번진과의 타협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격렬하게 대립했고 결국 이봉길은 재상직에서 물러났다.
820년(원화 15년) 헌종이 왕수징, 양수겸에게 암살당하고 목종이 옹립된다. 이후 우승유는 고부랑중·지제고에서 어사중승이 되었고, 이길보의 아들 이덕유는 한림학사가 되었다. 이종민은 812년(원화 7년) 감찰어사가 되었는데 이후에도 직위를 유지했다.
우승유의 할아버지는 수나라 때 복야였던 우홍인데, 우승유의 가문은 관롱집단의 말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반면 이종민은 태종의 동생인 정왕 이원의의 후손으로 관롱계에서도 최상위에 있었다. 이덕유는 산둥 사성 중 하나인 조군 이씨[20] 출신으로 귀족 중에서도 최고의 가문이었다.
2. 1. 발단
현종 때 일어난 안사의 난은 당나라의 국력을 크게 소모시켰고 각 지방에서 절도사들이 반독립 상태로 할거하도록 만들었다. 헌종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고자 두황상, 무원형, 이길보 등의 주도로 조정에 반항적인 번진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강경책을 추진했고 일정 성과를 거두어 당나라는 일시적으로 중흥을 맞이했다. 하지만 무력에 의존한 번진 토벌은 국가 재정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고 번진을 진압하기 위해 만든 신책군의 군권을 환관이 거머쥐면서 조정 내에서의 환관의 세력이 강해졌다.[18]808년(원화 3년) 진사과에 합격한 우승유, 황보식, 이종민 세 사람은 과거의 논제에 대해 당시의 실정을 비판하는 내용을 답으로 적어냈다. 재상[18] 이길보와 환관들은 헌종에게 읍소하여, 세 사람은 과거에 합격하고도 중앙에 등용되지 못하고 벽소를 받아 지방으로 발령받았다.[19]
814년(원화 9년) 이길보가 사망하자 배도가 후임 재상직에 올랐다. 당시 재상직에 있던 이봉길은 배도와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배도는 번진을 무력으로 진압해야 한다는 강경책을 펼쳤지만 이봉길은 번진과의 타협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격렬하게 대립했고 결국 이봉길은 재상직에서 물러났다.
820년(원화 15년) 헌종이 왕수징, 양수겸에게 암살당하고 목종이 옹립된다. 이후 우승유는 고부랑중·지제고에서 어사중승이 되었고, 이길보의 아들 이덕유는 한림학사가 되었다. 이종민은 812년(원화 7년) 감찰어사가 되었는데 이후에도 직위를 유지했다.
우승유의 할아버지는 수나라 때 복야였던 우홍인데, 우승유의 가문은 관롱집단의 말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반면 이종민은 태종의 동생인 정왕 이원의의 후손으로 관롱계에서도 최상위에 있었다. 이덕유는 산둥 사성 중 하나인 조군 이씨[20] 출신으로 귀족 중에서도 최고의 가문이었다.
2. 2. 당쟁의 발전
이덕유는 자신의 아버지가 우승유의 무리에게 비판받았던 사실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821년(장경 원년) 이종민이 과거를 주관하면서 부정을 저지르자 이를 기회로 이종민을 실각시켜 지방으로 좌천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사건으로 40년에 걸친 우이당쟁이 일어나게 되었다.[3]822년(장경 2년) 이봉길이 재상직에 복귀했고 배도와 이덕유는 각각 지방으로 전출되었다. 그리고 823년(장경 3년) 이봉길의 지원으로 우승유는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4] 824년(장경 4년) 목종이 붕어하고 경종이 즉위하자 우승유는 악주자사·무창절도사가 되어 지방으로 부임했다. 이후 이봉길은 이신 등 자신의 정적을 차례로 제거하고 그 자리를 자신의 파벌로 채워 조정을 장악했다.
826년(보력 2년) 경종이 환관 유극명에게 암살당하고 왕수징에 의해 문종이 옹립되었다. 그 해에 배도가 재상으로 복귀했는데 이봉길은 이를 막고자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배도는 재상직에서 물러났다. 829년(대화 3년) 배도는 이덕유를 중앙에 끌어들여 병부시랑이 되도록 했고 이후 그를 재상으로 천거했다. 하지만 재상 이종민이 이에 반대했고 배도와 이덕유를 지방으로 쫓아냈다. 같은 해 이종민은 우승유를 중앙으로 불렀고 곧 재상이 되었다.
2. 3. 유주 사건
831년(대화 5년) 이른바 유주 사건이 일어났다. 토번이 안사의 난 당시 당나라가 혼란할 때 수도 장안을 점령한 적이 있었는데 곽자의의 활약으로 이를 몰아낸 적이 있었다. 이후 두 나라는 화약을 맺었다. 그런데 경종 연간에 이르러 토번의 영토였던 유주의 장관(長官)이 당나라에 귀순을 요청해왔다. 이덕유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우승유는 이로 인해 토번과의 화약이 깨질 우려가 있다며 반대했다. 이러한 의견 대립은 두 사람의 사이를 더욱 멀게 했다.[1]결국 유주의 귀순을 받아주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당시 황제였던 당 문종은 이 결정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조정에서도 우승유의 결정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잇따랐다. 결국 832년(대화 6년) 우승유는 재상직을 내놓았고 다음 해에 이덕유가 재상직에 복귀했다. 이덕유는 곧바로 이종민을 비롯한 우당 세력을 조정에서 모두 몰아냈지만 다음 해에 이종민이 다시 재상이 되어 이덕유가 쫓겨나고 말았다.[1]
조정이 이처럼 우당과 이당으로 갈라져 권력 다툼을 하니 문종은 "하북의 적을 진압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조정 내의 붕당을 잠재우는 것은 어렵구나"라며 탄식했고 당쟁에 염증을 느낀 문종은 우당에도 이당에도 속하지 않는 이훈과 정주를 중용했다. 이후 이훈과 정주는 문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우당과 이당 모두를 조정에서 몰아냈다.[1]
2. 4. 감로의 변과 회창폐불
835년 (대화 9년), 이훈과 정주는 구사량을 필두로 한 환관 세력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환관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을 감로의 변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문종은 환관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8] 문종은 "짐은 가노(환관)에게 제어당하고 있다"고 탄식했다.감로의 변 이후에도 우당과 이당은 재상 자리를 놓고 다툼을 이어갔다. 840년(개성 5년) 문종이 죽고, 문종은 이성미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구사량은 문종의 동생 이전을 황제로 옹립했다. 이로 인해 이성미의 황위 계승을 지지했던 우당의 이각과 양사복은 재상직에서 쫓겨나고, 이덕유가 다시 재상이 되었다.
841년(회창 원년) 이각과 양사복이, 843년(회창 3년) 우승유가, 844년(회창 4년) 이종민이 지방으로 쫓겨났다. 846년(회창 6년)에는 이종민을 봉주에 유배보냈고, 848년(대중 2년) 이종민이 사망했다.
우당이 몰락한 뒤, 이덕유는 재상으로서 전권을 휘두르며 내정과 외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842년(회창 2년) 폐불을 상주했고, 845년(회창 5년)부터 본격적인 폐불(회창폐불)이 시작되었다.[4] 또한 842년부터 843년까지 회흘 토벌에 성공했다.
2. 5. 종결
846년 무종이 붕어한 뒤 환관 마원지에 의해 선종이 즉위했다. 선종은 이덕유가 전권을 휘두르는 것을 싫어하여 지방으로 쫓아냈다. 이후 우당의 백민중이 재상이 되었다. 847년(대중 원년) 백민중은 이당을 조정에서 모두 쫓아냈지만, 다음 해에 우승유가, 그다음 해에 이덕유도 사망하면서 우이당쟁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14]우당이 집권하면 이당을 배제하고, 이당이 집권하면 우당을 배제하는 당쟁이 계속되는 동안 정책도 계속 뒤바뀌어 국정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당쟁이 끝난 뒤에도 조정에서는 환관과 관료 간의 대립이 심해져 혼란은 끊이지 않았고, 874년(건부 원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 혼란은 극에 달했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조정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조정 내에서의 싸움은 더 이상 정치 권력을 둘러싼 쟁탈전의 성격을 가지지 못하고 주전충을 비롯한 번진 세력의 대리 전쟁으로 변질되었다.
3. 주요 인물
구분 | 인물 | 주요 활동 및 특징 |
---|---|---|
우당 (우승유 파) | 우승유 | 수나라 우홍의 후손. 관롱집단 말단. 이종민과 함께 우당을 이끎. |
이종민 | 당 태종 동생 이원의 후손. 관롱집단 최상위. 우승유와 함께 우당을 이끎. | |
이봉길 | 우당의 주요 인물. 배도, 이덕유와 대립. | |
양사복 | 이덕유에 의해 재상직에서 쫓겨남. | |
이각 | 이덕유에 의해 재상직에서 쫓겨남. | |
백민중 | 당 선종 때 재상 역임. | |
이당 (이덕유 파) | 이덕유 | 산동 사성 중 하나인 조군 이씨 출신. 귀족 중 최고 가문. 이당을 이끎. 아버지 이길보가 우승유에게 비판받은 것을 원망. |
배도 | 이봉길과 대립. |
3. 1. 우당 (우승유 파)
우당(牛黨)은 당나라 후기에 이덕유를 중심으로 하는 이당(李黨)에 대립하여 당쟁을 벌인 정치 파벌이다. 우당의 주요 인물로는 우승유[2][5], 이종민[2][5], 이봉길[2][5], 양여사(楊汝士)[5], 양사복[15], 이각[15], 백민중[5] 등이 있다.우승유는 수나라 때 복야를 지낸 우홍의 후손으로, 그의 가문은 관롱집단의 말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반면, 이종민은 당 태종의 동생인 정왕 이원의의 후손으로 관롱집단의 최상위에 속했다.
808년 (원화 3년), 우승유, 황보식, 이종민은 진사과에 합격했으나, 당시 실정을 비판하는 답을 적어 재상 이길보와 환관들의 읍소로 중앙에 등용되지 못하고 지방으로 발령받았다.[18][19]
820년 (원화 15년), 당 헌종이 왕수징, 양수겸에게 암살당하고 당 목종이 즉위하면서 우승유는 고부랑중·지제고에서 어사중승으로 승진했다. 이종민은 812년 (원화 7년)에 감찰어사가 된 이후 직위를 유지했다.
821년 (장경 원년), 이종민이 과거 부정 사건으로 지방으로 좌천되면서 40년에 걸친 우이당쟁이 시작되었다. 823년 (장경 3년), 이봉길의 지원으로 우승유는 재상에 올랐으나, 824년 (장경 4년) 당 경종 즉위 후 악주자사·무창절도사로 지방에 부임했다.
826년 (보력 2년), 당 경종이 유극명에게 암살당하고 당 문종이 옹립된 후, 829년 (대화 3년)에 우승유는 이종민의 추천으로 재상에 복귀했다.
831년 (대화 5년), 토번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우승유는 유주의 귀순을 반대하는 등 이덕유와 대립했다. 832년 (대화 6년), 조정의 비판이 잇따르자 우승유는 재상직을 내놓았다.
835년 (대화 9년), 감로의 변 이후에도 우당과 이당은 재상직을 번갈아 차지하며 싸움을 이어갔다. 840년 (개성 5년), 당 문종 사후 당 무종이 즉위하면서 우당의 이각과 양사복이 재상직에서 쫓겨나고 이덕유가 다시 재상이 되었다.
843년 (회창 3년), 우승유는 지방으로 쫓겨났고, 846년 (회창 6년) 이종민은 봉주에 유배되었다가 848년 (대중 2년) 사망했다.
846년 (회창 6년), 당 무종 사후 당 선종이 즉위하고, 우당의 백민중이 재상이 되었다. 848년 (대중 2년) 우승유가 사망하고, 849년 (대중 3년) 이덕유마저 사망하면서 우이당쟁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3. 2. 이당 (이덕유 파)
이덕유(李德裕)는 아버지 이길보(李吉甫)가 우승유(牛僧孺) 등에게 비판받은 것을 원망하였다. 장경 원년(821년) 이종민(李宗閔)이 과거 시험에서 부정을 저지르자, 이덕유는 이를 기회로 이종민을 공격하여 지방으로 좌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40년에 걸친 우이당쟁(牛李黨爭)이 시작되었다.[2]장경 2년(822년)에 이봉길(李逢吉)이 재상으로 복귀하자, 배도(裴度)와 이덕유는 각각 지방으로 전출되었다. 대화 3년(829년) 배도는 이덕유를 중앙으로 불러 병부시랑으로 임명하고, 더 나아가 재상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먼저 재상이 되어 있던 이종민이 이에 반대하여, 이덕유와 배도는 지방으로 쫓겨났다.[2]
대화 5년(831년)에 유주 사건이 일어났다. 토번이 안사의 난 때 혼란을 틈타 수도 장안을 함락시킨 적이 있었는데, 당나라가 체제를 정비한 뒤 화약을 맺었다. 이때 토번 측 영토였던 유주의 장관이 당나라에 귀순을 신청해 왔다. 이덕유는 이를 받아들이도록 조정에 상소를 올렸지만, 우승유는 "유주 하나 때문에 토번과의 화약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이를 물리쳤다. 이로 인해 이덕유는 더욱 우승유를 원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화 6년(832년) 문종은 유주를 잃은 것을 후회하게 되었고, 우승유가 유주를 포기한 것에 대해 비판이 잇따랐다. 이로 인해 우승유는 재상에서 물러났고, 대화 7년(833년) 이덕유가 재상으로 복귀했다. 재상이 된 이덕유는 이종민 등 우당(牛黨) 세력을 조정에서 모두 몰아냈다.[2]
개성 5년(840년) 문종이 붕어하고, 무종이 즉위하자 우당(牛黨)의 이각·양사복은 재상에서 쫓겨나고, 대신 이덕유가 재상이 되었다. 회창 원년(841년)에는 이각·양사복을, 회창 3년(843년)에는 우승유를, 회창 4년(844년)에는 이종민을 각각 지방으로 내쫓았다. 또한 회창 6년(846년)에는 이종민을 봉주로 유배보냈고, 이종민은 그 2년 후인 대중 2년(848년)에 사망했다.[2]
이덕유는 내정·외정에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다. 회창 2년(842년)에 폐불을 상주하여, 회창 5년(845년)부터 본격적인 폐불이 시작되었다(회창의 폐불). 또한 진사(進士)파가 당을 만드는 온상이 된다고 생각된 "정방(呈榜)·곡강연(曲江宴)"을 폐지했다. 외정에서는 회창 2년(842년)부터 회창 3년(843년)에 걸쳐 회흘을 토벌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회창 6년(846년) 무종이 붕어한 후, 선종은 이덕유의 전횡을 싫어하여 이덕유를 지방으로 쫓아냈다. 대중 3년(849년)에 이덕유도 사망하면서 당쟁은 종결되었다.[2]
4. 연구
근대 역사학의 입장에서 우이당쟁을 처음 연구한 이는 중국의 천인커이며, 이후 첸종몐, 도나미 마모루 등의 학자들이 연구를 이어갔다. 우이당쟁 연구에 자주 사용되는 원사료는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이다. 이 세 서적은 모두 동시대 사료를 취사선택하여 편집했지만, 각각의 입장에 따라 서술에 차이를 보인다.[27][28][29][24]
이 외에도 수많은 연구가 발표되었지만, 아직 다수 학자의 지지를 받는 통합적인 학설은 나오지 않아 혼돈 상태에 놓여 있다. 원사료를 바탕으로 한 이론 전개는 풍부하지만, 석각문 등의 연구가 아직 불충분하여 새로운 방향의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4. 1. 초기 연구
근대 역사학의 입장에서 처음으로 우이당쟁을 연구한 이는 중국의 천인커이다. 천인커는 1944년 우당을 진사파의 신흥 세력으로, 이당을 명경파의 산동 귀족으로 그 성격을 규정했다. 우당 내에 구 사족이 존재하고 이당 내에 진사 출신이 있지만 주류는 아니며 무주 이래 힘을 키워온 신흥 세력과 전통적인 귀족 세력 간의 다툼이 우이당쟁이라고 결론내렸다.[21]1957년 첸종몐은 천인커의 학설을 강하게 비판했다. 첸종몐은 우이당쟁의 '우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우승유와 이덕유가 아니라 우승유와 이종민을 가리키며, 이덕유의 입장에서 우당을 비판하는 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덕유는 당파가 없었고 소위 이당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우이당쟁이 신흥 진사 세력과 전통 귀족 세력 간의 싸움이 아니라, 같은 사족 계급 내에서 붕당과 사리(私利)를 일삼는 세력과 비교적 공정함을 가진 세력 사이의 싸움이었다고 규정했다.[24]
첸중몐의 비판은 기존 천인커 주장의 결점을 정확히 지적하여 이후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첸중몐은 이덕유를 지나치게 편들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덕유가 당파를 가지지 않았다는 주장은 후세 연구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지 못했다.
일본에서 우이당쟁을 연구한 첫 학자는 1962년 도나미 마모루였다. 도나미는 우당과 이당의 출신에 큰 차이가 없으며 이것이 당쟁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는 첸중몐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이덕유는 "지금 조정의 절반은 당인이다"(이는 이덕유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므로 당인은 곧 우당을 말한다)라고 했는데, 과거 합격자만으로 조정의 절반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도나미는 붕당의 주요 인사가 지방으로 좌천되었을 때 지역 유지를 끌어들임으로써 파벌을 만들고 확대하는데 일정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았다.[26] 도나미의 주장은 과거에만 주목했던 기존의 연구에서 지방 유지라는 새로운 시각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졌다.
이에 대해 쓰키야마 지사부로는 지역 유지를 끌어들인 것이 우당과 이당이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의 일부이긴 했으나 형성 요인까지는 되지 못하며, 두 붕당의 대립의 근간은 과거 출신과 문벌 귀족의 대립이라고 했다.
우이당쟁 연구에 자주 사용되는 원사료는 『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이다. 이 세 서적은 모두 동시대 사료를 취사선택하여 편집되었지만, 『구당서』는 이당의 입장을 많이 반영했다는 지적을 받으며,[27] 『신당서』는 『구당서』보다 더욱 이당의 입장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28] 『자치통감』은 비교적 중립적이라는 평가를 받지만,[29] 첸중몐을 비롯한 일부 학자는 우당에 편향적이라는 주장을 펼쳤다.[24]
이 외에도 수많은 연구가 발표되었지만, 아직 다수 학자의 지지를 받는 통합적인 학설은 나오지 못하여 혼돈 상태에 놓여 있다. 원사료를 바탕으로 한 이론 전개는 풍부하지만, 석각문 등의 연구가 아직 불충분하여 새로운 방향의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4. 2. 일본의 연구
일본에서 우이당쟁을 처음 연구한 학자는 1962년 도나미 마모루였다. 도나미는 우당과 이당의 출신에 큰 차이가 없으며 이것이 당쟁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는 첸종몐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이덕유는 "지금 조정의 절반은 당인이다"(이는 이덕유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므로 당인이란 곧 우당을 말한다)라고 했는데, 과거 합격자만으로 조정의 절반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도나미는 붕당의 주요 인사가 지방으로 좌천되었을 때 지역 유지를 끌어들임으로써 파벌을 만들고 확대하는데 일정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았다. 도나미의 주장은 과거에만 주목했던 기존의 연구에서 지방 유지라는 새로운 시각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졌다.[26]쓰키야마 지사부로는 지역 유지를 끌어들인 것이 우당과 이당이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의 일부이긴 했으나 형성 요인까지는 되지 못하며, 두 붕당의 대립의 근간은 과거 출신과 문벌 귀족의 대립이라고 했다.
우이당쟁을 연구할 때 자주 연구되는 원사료는 『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이다. 이 세 가지 서적은 모두 동시대의 사료를 취사선택하여 편집된 것이지만, 『구당서』는 이당의 입장을 많이 반영했다는 지적을 받으며,[27] 『신당서』는 『구당서』보다 더욱 이당의 입장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28] 『자치통감』은 비교적 중립적이라는 평가지만,[29] 첸중몐을 비롯한 일부 학자는 우당에 편향적이라는 주장을 펼쳤다.[24]
4. 3. 사료 비판
근대 역사학의 관점에서 우이당쟁을 처음 연구한 사람은 중국의 천인커이다. 천인커는 1944년 우당을 진사파의 신흥 세력으로, 이당을 명경파의 산동 귀족으로 규정했다. 그는 우당 내에 구 사족이 존재하고 이당 내에 진사 출신이 있지만 주류는 아니며, 무주 이래 힘을 키워온 신흥 세력과 전통적인 귀족 세력 간의 다툼이 우이당쟁이라고 결론내렸다.[21]1957년 첸종몐은 천인커의 학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우이당쟁의 '우이'가 일반적으로 우승유와 이덕유를 일컫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는 우승유와 이종민을 말하는 것이며, 이덕유의 입장에서 우승유와 이종민의 우당을 비판하는 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덕유는 당파를 가지지 않았고 소위 이당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첸종몐은 우이당쟁이 신흥 진사 세력과 전통 귀족 세력 간의 싸움이 아니라, 같은 사족 계급 내에서 붕당과 사리(私利)를 일삼는 세력과 비교적 공정함을 가진 세력 사이의 싸움이었다고 규정했다.[24]
첸중몐의 비판은 천인커 주장의 결점을 정확히 지적하여 이후의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첸중몐은 이덕유를 지나치게 편들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덕유가 당파를 가지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은 후세의 연구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지 못했다.
일본에서 우이당쟁을 연구한 첫 학자는 1962년 도나미 마모루였다. 도나미는 우당과 이당의 출신이 큰 차이가 없으며 이것이 당쟁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는 첸중몐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이덕유는 "지금 조정의 절반은 당인이다"(이는 이덕유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므로 당인이란 곧 우당을 말한다)라고 했는데, 과거 합격자만으로 조정의 절반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도나미는 붕당의 주요 인사가 지방으로 좌천되었을 때 지역 유지를 끌어들임으로써 파벌을 만들고 확대하는데 일정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았다.[26] 도나미의 주장은 과거에만 주목했던 기존의 연구에서 지방 유지라는 새로운 시각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졌다.
이에 대해 쓰키야마 지사부로는 지역 유지를 끌어들인 것이 우당과 이당이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의 일부이긴 했으나 형성 요인까지는 되지 못하며, 두 붕당의 대립의 근간은 과거 출신과 문벌 귀족의 대립이라고 했다.
우이당쟁 연구에 자주 사용되는 원사료는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이다. 이 세 가지 서적은 모두 동시대의 사료를 취사선택하여 편집된 것이지만, 『구당서』는 이당의 입장을 많이 반영했다는 지적을 받으며,[27] 『신당서』는 『구당서』보다 더욱 이당의 입장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28] 『자치통감』은 비교적 중립적이라는 평가지만,[29] 첸중몐을 비롯한 일부 학자는 우당에 편향적이라는 주장을 펼쳤다.[24]
이 외에도 수많은 연구가 발표되었지만, 아직 다수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통합적인 학설은 나오지 못하여 혼돈 상태에 놓여 있다. 원사료를 바탕으로 한 이론 전개는 풍부하지만, 석각문 등의 연구가 아직 불충분하여 새로운 방향의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4. 4. 현대적 의의
근대 역사학의 관점에서 우이당쟁을 처음 연구한 사람은 중국의 천인커이다. 1944년 천인커는 우당을 진사파의 신흥 세력으로, 이당을 명경파의 산동 귀족으로 규정했다. 그는 우당 내에 옛 귀족이, 이당 내에 진사 출신이 존재하지만 이는 주류가 아니며, 무주 이후 성장한 신흥 세력과 전통 귀족 세력 간의 다툼이 우이당쟁이라고 결론내렸다.[21]1957년 첸종몐은 천인커의 학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우이당쟁의 '우이'가 일반적으로 우승유와 이덕유를 가리킨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우승유와 이종민을 의미하며, 이덕유의 관점에서 우당을 비판하는 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덕유는 당파가 없었고, 이당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이당쟁이 신흥 진사 세력과 전통 귀족 세력 간의 싸움이 아니라, 같은 사족 계급 내에서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붕당 세력과 비교적 공정한 세력 간의 싸움이었다고 규정했다.[24]
첸종몐의 비판은 천인커 주장의 결점을 정확히 지적하여 이후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첸종몐 역시 이덕유를 지나치게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덕유가 당파를 가지지 않았다는 주장은 후대 연구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다.
일본에서 우이당쟁을 처음 연구한 학자는 1962년 도나미 마모루였다. 도나미는 우당과 이당의 출신에 큰 차이가 없어 당쟁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는 첸종몐과 유사한 내용이었다. 이덕유는 "지금 조정의 절반은 당인이다"(여기서 당인은 우당을 의미한다)라고 했는데, 과거 합격자만으로 조정의 절반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도나미는 붕당의 주요 인사가 지방으로 좌천되었을 때 지역 유지를 끌어들여 파벌을 만들고 확대하는 데 일정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보았다.[26] 도나미의 주장은 과거에만 주목했던 기존 연구에 지방 유지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쓰키야마 지사부로는 지역 유지를 끌어들인 것이 우당과 이당이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의 일부였지만, 붕당 형성 요인은 아니며, 두 붕당 대립의 근간은 과거 출신과 문벌 귀족의 대립이라고 주장했다.
우이당쟁 연구에 자주 사용되는 원사료는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이다. 이들은 모두 동시대 사료를 취사선택하여 편집한 것이지만, 『구당서』는 이당의 입장을 많이 반영했다는 지적을 받고,[27] 『신당서』는 『구당서』보다 더 이당 쪽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28] 『자치통감』은 비교적 중립적이라는 평가를 받지만,[29] 첸중몐 등 일부 학자는 우당에 편향적이라고 주장했다.[24]
수많은 연구가 발표되었지만, 아직 다수 학자의 지지를 받는 통합적 학설은 나오지 않아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원사료를 바탕으로 한 이론 전개는 풍부하지만, 석각문 등의 연구가 아직 불충분하여 새로운 방향의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5. 영향
위진남북조 시대는 문벌귀족의 시대로, 귀족들은 가문과 혈통을 기반으로 관료 조직의 요직을 독점하고 있었다. 수 문제는 과거제를 실시하여 시험으로 관료를 등용하는 제도를 시작해 귀족들을 견제하고 황제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에는 여전히 귀족의 세력이 강고하여 과거제를 통한 신임 관료들의 정계 진출은 억제되었다.[1]
중국의 역사에서 문벌귀족의 전성기는 위진남북조 시대였으며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도 그 영향력은 여전했으나 안사의 난을 계기로 퇴조하기 시작했고 주전충에 의해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 십국 시대가 시작하면서 이들은 멸망하고 본격적으로 사대부 계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문벌귀족이 쇠퇴하고 신흥 사대부 계급이 진출하는 데에는 우이당쟁도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1]
천인커는 우이당쟁을 신흥 세력과 문벌귀족의 싸움으로 인식했고 우당이 승리하면서 신흥 세력이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사관에 기반한 것으로 현대 사학계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현대 학계에서는 우당과 이당의 싸움이 출신 성분의 차이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다수설이다. 세부적으로는 이덕유는 진보적·적극적인 성향을 가졌고 우승유는 보수적·현상유지적 성격을 가졌는데 이덕유가 우승유를 배척하려 했다는 이론과, 붕당 간의 대립은 결국 대지주라는 배경을 가진 관료 내부의 권력 다툼에 불과했다라는 시각이 대립하고 있다.[1]
현대 중국 사학계는 우당과 이당 중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를 논하는 경향이 강하며 당쟁 이후 신흥 세력이 진출하게 된 요인으로서의 언급은 강하지 않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통제에 의한 정치·문화적 상황도 반영되었다고 이해해야 한다.[1]
5. 1. 정치적 영향
우당이 집권하면 이당을 배제하고 이당이 집권하면 우당을 배제하는 당쟁이 계속되면서 정책도 계속 뒤바뀌어 국정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1] 당쟁이 끝난 뒤에도 조정에서는 환관과 관료 간의 대립이 심해져 혼란은 끊이지 않았고, 874년(건부 원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 혼란은 극에 달했다.[1]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조정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조정 내에서의 싸움은 더 이상 정치 권력을 둘러싼 쟁탈전의 성격을 가지지 못하고 주전충을 비롯한 번진 세력의 대리 전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1]5. 2. 사회적 영향
위진남북조 시대 이래로 문벌귀족들은 가문과 혈통을 기반으로 관직을 독점해왔다. 수 문제는 과거제를 통해 이를 견제하려 했으나,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에는 귀족의 세력이 여전히 강했다. 후한 이래 전통을 자랑하는 산동 귀족 중 최씨·노씨·이씨·정씨 등 사성(四姓)이 으뜸이었고, 선비족 출신의 관롱집단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은 관료 인사를 담당하는 상서성 이부를 장악하여 과거 출신 관료들의 중앙 정계 진출을 막았다.[1]중국의 역사에서 문벌귀족의 전성기는 위진남북조 시대였고, 안사의 난을 계기로 퇴조하여 오대 십국 시대에 멸망하고 사대부 계층이 등장했다. 우이당쟁도 문벌귀족이 쇠퇴하고 신흥 사대부 계급이 진출하는 데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1]
천인커는 우이당쟁을 신흥 세력과 문벌귀족의 싸움으로 보고 우당의 승리가 신흥 세력 진출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사관에 기반한 것으로 현대 사학계에서는 비판받고 있다. 우당과 이당의 싸움이 출신 성분의 차이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다수설이다. 이덕유는 진보적·적극적 성향, 우승유는 보수적·현상유지적 성격을 가졌는데 이덕유가 우승유를 배척하려 했다는 이론과, 붕당 간의 대립은 결국 대지주라는 배경을 가진 관료 내부의 권력 다툼이라는 시각이 대립한다.[1]
현대 중국 사학계는 우당과 이당 중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를 논하는 경향이 강하며, 당쟁 이후 신흥 세력이 진출하게 된 요인으로서의 언급은 약하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통제에 의한 정치·문화적 상황도 반영된 결과이다.[1]
5. 3. 문화적 영향
중국의 역사에서 문벌귀족의 전성기는 위진남북조 시대였으며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도 그 영향력은 여전했으나 안사의 난을 계기로 퇴조하기 시작했고 주전충에 의해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 십국 시대가 시작하면서 이들은 멸망하고 본격적으로 사대부 계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문벌귀족이 망하고 신흥 사대부 계급이 진출하는 데에는 우이당쟁도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1]천인커는 우이당쟁을 신흥 세력과 문벌귀족의 싸움으로 인식했고 우당이 승리하면서 신흥 세력이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사관에 기반한 것으로 현대 사학계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세부적으로는 이덕유는 진보적·적극적인 성향을 가졌고 우승유는 보수적·현상유지적 성격을 가졌는데 이덕유가 우승유를 배척하려 했다는 이론과 붕당 간의 대립은 결국 대지주라는 배경을 가진 관료 내부의 권력 다툼에 불과했다라는 시각이 대립하고 있다.[1]
따라서 현대 중국 사학계는 우당과 이당 중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를 논하는 경향이 강하며 당쟁 이후 신흥 세력이 진출하게 된 요인으로서의 언급은 강하지 않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통제에 의한 정치·문화적 상황도 반영되었다고 이해해야 한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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