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밀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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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밀은 촉한 시대와 서진 시대를 거쳐 활동한 인물로, 효심이 지극하고 학식이 풍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촉한에서 관직을 수행했으며, 동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외교적 능력을 발휘했다. 위나라의 촉 정복 이후에는 여러 차례 관직 제안을 받았으나, 할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거절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서진 시대에는 사마염의 부름을 받아 세마(洗馬)가 되었으나, 할머니를 향한 효심을 담은 상소 '진정표'를 올려 감동을 주기도 했다. 이후 온현 현령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으나, 말년에는 불우한 시기를 겪었다. 그는 유교와 도교에 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여섯 아들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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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한의 외교관 - 등지
등지는 삼국 시대 촉한의 외교 및 군사 인물로, 유비의 신임을 받아 요직을 두루 거치며 오나라와의 동맹을 재건하여 촉한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했으며, 검소하고 청렴한 삶을 살다가 251년에 사망했다.
이밀 (촉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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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이밀은 삼국시대 촉한과 서진 시대에 활동했던 문신이자 학자이다. 그는 현재의 쓰촨성 펑산 현인 첸웨이 군 우양(犍為郡 武陽) 출신으로,[1]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으며 지극한 효행으로 유명했다.[3][4][5][7][10][11] 학문에도 뛰어나 『좌전』과 사서오경 등에 능통했다.[8][9]
촉한에서는 익주 종사, 상서랑, 대장군 주부, 태자 세마 등을 역임했으며,[12] 동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13][16]
촉한 멸망 후 서진의 사마염이 그를 태자 세마로 불렀으나, 연로한 할머니 봉양을 이유로 고사하며 올린 진정표(陳情表)는 그의 효심과 문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로 후대에 높이 평가받았다.[19][20][21][22] 할머니 사후 서진 조정에 출사하여 온현 현령 등을 지내며 치적을 쌓았으나,[24][27][28]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유력 가문들의 미움을 사 한중군 태수로 좌천되었다.[34] 이에 불만을 품고 지은 시가 문제가 되어 결국 관직에서 파면되었고,[35] 태강 8년(287년) 64세(동아시아식 나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35][36] 그의 아들들 또한 재능이 뛰어나 육룡(六龍)이라 불렸다.[52]
2. 1. 촉한 시대
이밀은 현재의 쓰촨성 펑산 현인 첸웨이 군 우양(犍為郡 武陽) 출신이다.[1] 그의 할아버지 이광(李光)은 주티(朱提) 태수였다.[2] 이밀은 태어난 직후 아버지를 여의었고,[3] 어머니는 재혼하여 어린 시절 할머니 유(劉)씨의 손에서 자랐다.[4][5][7] 그는 일찍 부모님과 헤어진 슬픔으로 큰 병을 앓기도 했으나,[6] 할머니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7]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으며, 교주에게 가르침을 받았다.[8] 이밀은 『좌전』을 깊이 공부했고, 사서오경을 비롯한 여러 고전에도 능통했다. 그는 재치 있고 사려 깊으며 뛰어난 언변을 지녔다.[9]이밀은 특히 할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널리 알려졌다. 할머니가 병석에 누웠을 때는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슬퍼했고, 음식과 약을 직접 맛본 후에야 드릴 정도였다.[10][11] 그는 고향에서 관직 제안을 받았으나 사양했다. 이후 촉한 조정에 나아가 익주 종사, 상서랑, 대장군 주부, 태자 세마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12]
이밀은 동오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한번은 오나라 군주 손권이 촉나라의 말 보유량에 대해 묻자, "나라에서 쓸 만큼 충분하고, 백성들도 필요에 따라 쓰고 있습니다."라고 재치 있게 답했다.[13] 또 다른 방문에서는 손권과 신하들이 형과 아우 중 어느 쪽이 더 나은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손권은 자신이 손견의 차남임을 염두에 두고 아우가 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지만, 이밀은 "원컨대 형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이유를 묻자, "형이 되면 그만큼 부모님을 더 오래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여 좌중의 감탄을 자아냈다.[14][15] 이밀은 여러 차례 촉한의 사신으로 활약하며 오나라 관리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16]
2. 2. 서진 시대
위나라의 촉 정복 이후, 서부 전선을 담당하던 등애는 이밀의 명성을 듣고 그를 주부(主簿)로 초빙했다.[17] 그러나 이밀은 할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으며, 조위와 지방 정부의 다른 관직 제안도 모두 사양했다. 대신 그는 학문에 전념하며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18]서진의 초대 황제 사마염이 태시 3년(267년) 아들 사마충을 태자로 책봉했을 때, 그는 이밀을 불러 태자세마(洗馬)로 임명했다. 여러 차례 조서가 내려오고 군과 현에서도 압력을 가했지만, 이밀은 연로한 할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부임을 거듭 사양했다.[19][20] 그는 사마염에게 할머니에 대한 자신의 절절한 심정을 담은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바로 후세에 진정표(陳情表)로 알려진 글이다.[21] 사마염은 이 글을 읽고 "이밀은 헛된 명성을 가진 자가 아니구나"라고 감탄하며 그의 효심에 감동했다. 황제는 이밀에게 노비 두 명을 하사하고, 그가 속한 군현에 명하여 할머니의 생활을 돌보도록 지시했다.[22][23]
할머니 유씨가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을 마친 후, 이밀은 다시 낙양으로 부름을 받아 태자세마(洗馬)에 임명되었다.[24] 그는 장화를 만나 유선을 어떤 인물에 비견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밀은 제나라 환공이 관중을 등용하고 외세에 저항했으나 말년에 권력을 잃었던 것처럼, 유선 역시 제갈량을 등용하고 위나라에 맞섰으나 결국 황호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며 유선을 제 환공에 비유했다.[25] 장화가 제갈량의 가르침이 너무 이상적이어서 현실과 동떨어진 부분이 있지 않았냐고 묻자, 이밀은 제갈량의 가르침은 우임금과 고요의 논의처럼 심오하지만, 그 표현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명료했다고 답했다. 또한 제갈량은 논쟁에서 상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뛰어났기에 그의 가르침이 명료하게 전달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덧붙였고, 장화는 그의 답변에 동의했다.[26]
이후 이밀은 상서랑(尚書郎)을 거쳐 허난성 온현의 현령(溫縣令)으로 부임했다.[27] 그는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면서도 엄격하고 명확한 행정으로 명성을 얻었다.[28] 거평후 양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사마염은 친척을 후계자로 삼았으나 그가 제때 장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이밀은 관리를 보내 이를 알리고 장례 행렬을 준비하도록 조치했다.[29]
온현은 사마씨 가문의 본관이 있는 곳이어서 황족들이 지날 때마다 물품을 요구하여 관리와 백성들이 고통받았다. 이밀이 부임한 후 한 사마씨 친척이 또다시 물품을 요구하자, 그는 한 고조가 패현을 방문했을 때 아무런 폐를 끼치지 않고 예를 갖추었던 고사를 들어 정중히 거절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후 황족들은 감히 현에 물품을 요구하지 못하게 되었다.[30] 이밀의 통치하에서 온현은 인근 현의 도적들조차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 되었고, 도적을 쫓는 관리들조차 현의 경계를 넘지 않았다.[31] 농서왕 사마태는 이밀을 깊이 존경하여 친분을 맺었으나, 다른 유력 가문들은 그의 공정함과 청렴함을 두려워했다.[32] 이밀은 현령으로서 직무를 성실히 수행했지만, 자신의 재능이 작은 현을 다스리는 데 쓰이는 것에 불만을 품고 다른 이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일이 상부에 보고되었으나, 그의 뛰어난 업무 능력 덕분에 문책받지는 않았다.[33]
이밀은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국의 중정(中正, 구품중정법 참조)이 되었다. 그는 강직한 성품 탓에 권세가들에게 아부하지 않아 순(荀)씨, 장(張)씨 등 유력 가문의 미움을 샀다. 이 때문에 재능에도 불구하고 승진하지 못하고 한중군 태수(漢中太守)로 좌천되었다. 많은 사마씨 황족들은 이 인사가 부당하다고 여겼으며, 이밀 자신도 중앙 관료가 될 기회를 잃었다고 생각하여 원한을 품었다.[34] 사마염이 그를 위해 송별 연회를 열었을 때, 이밀은 연회 말미에 조정의 결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 이에 사마염은 크게 노하여 그의 임명을 취소하고 관직에서 파면했다. 1년 후, 태강 8년(287년) 이밀은 64세(동아시아식 나이)의 나이로 자택에서 사망했다.[35][36] 그의 아들들은 모두 재능이 뛰어나 육룡(六龍)이라 불렸다.[52]
이밀의 효행은 『진서』 효우전(孝友傳)에 기록되었으며, 그가 지은 진정표는 『문선』 등 여러 문집에 수록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진정표는 촉한 제갈량의 『출사표』, 당나라 한유의 제십이랑문(祭十二郎文)과 함께 중국 문학사상 삼대 명문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사후 약 900년이 지난 남송 시대에 이르러, 촉한정통론을 내세운 주희의 주자학이 관학(官學)이 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주희 등은 이밀이 진정표에서 서진을 섬기면서 정통 왕조인 촉한을 "위조(僞朝, 거짓 조정)"나 "망국(亡國, 망한 나라)" 등으로 표현한 것을 두고 불충(不忠)하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성리학적 관점은 이후 왕조에도 영향을 미쳐 이밀의 평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3. 평가 및 일화
창거는 《화양국지》에서 이밀의 전기를 쓰며 "재능이 뛰어나 다른 사람을 능가한다"고 평가했다.[37]
이밀은 유교와 도교의 교리, 중용, 인, 의를 논하는 《술이론》(述理論) 10편을 저술하여 깊은 호평을 받았다.[38][39] 또한 고전 해석 등 다양한 주제로 다른 이들과 논쟁했으며, 많은 사람이 그의 논리적인 추론에 감탄했다.[40] 풍자적인 장례식 찬사에 답하여 20편 이상의 시와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41]
수량, 이상, 진수가 서로의 장단점에 대해 논쟁했을 때, 이밀은 그들의 공과 과를 공개적으로 평가하며 "나는 세상을 홀로 서서 풍경을 나의 밭으로 삼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42]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재가하자, 할머니 유씨 손에서 자랐다. 촉한에서는 학문과 효행으로 명성을 얻어 익주의 종사, 상서랑, 대장군 주부, 태자세마 등을 역임했다.
사신으로 오나라에 갔을 때, 손권(손견의 차남)이 형제간 우열에 대해 "남의 형이 되는 것보다 동생이 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자, 이밀은 "원컨대 남의 형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반박했다. 이유를 묻자 "형이 되면 그만큼 부모님을 더 오래 모실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여 오나라 군신들을 감탄하게 했다.
서진의 초대 황제 사마염이 태시 3년(267년)에 그를 초빙했으나, 이밀은 아흔이 넘은 할머니를 봉양해야 했기에 낙양으로 갈 수 없었다. 그는 칙명을 거역할 수도 없어 고뇌하다,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아 진정사표(陳情事表)라는 상주문을 올렸다. 이에 감동한 사마염은 주와 현에 명하여 이밀과 할머니를 후하게 보살피도록 했다.
이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상을 마치자, 사마씨의 출신지인 온현의 현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황족들의 횡포를 억제하며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 이후 익주 대중정(구품관인법 참조)에 임명되어 관료 인선에도 관여했으나, 장화의 미움을 사 한중군의 태수로 좌천되었다. 결국 옛 촉한 왕조를 찬양했다는(이는 곧 진 왕조를 비방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혐의로 관직에서 쫓겨났다.
태강 8년(287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들은 모두 뛰어나 '육룡'(六龍)이라 불렸다.[52]
이밀의 효행은 『진서』 효우전에도 기록되었으며, 『진정사표』는 『문선』 등 여러 문집에 실려 촉한의 제갈량이 쓴 『출사표』, 당의 한유가 쓴 『제십이랑문』과 함께 '천하삼절문'(天下三絶文)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사후 약 900년이 지난 남송 시대에 이르러, 촉한 정통론을 내세운 주희의 주자학이 관학(官學)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비슷한 경력을 가진 『삼국지』의 저자 진수와 마찬가지로, 이밀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진정사표』에서 역적 왕조인 서진에 아첨하고 정통 왕조인 촉한을 '위조'(僞朝)나 '망국'(亡國) 등으로 표현한 것이 불충(不忠)이자 불의(不義)로 지적된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인해 남송 이후 역대 왕조에서 이밀은 비판과 폄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4. 가족
이밀에게는 "육룡(六龍)"이라고 불린 여섯 명의 유명하고 뛰어난 아들이 있었다.[43][52]
- 이사(李賜): 장남으로, 자는 종석(宗碩)이다. 별가(別駕)로 일했고 수재로 추천되었으며 문산태수(汶山太守)를 지냈으나, 임명되기 전에 사망했다.[44] 사마월, 동해왕(東海王)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종종 신선하고 혁신적인 스타일의 시를 교환했다.[45][46]
- 이흥(李興): 차남으로, 자는 준석(雋碩)이다. 시적 재능으로 유명했으며 태부(太傅)의 보좌관으로 일했다.[47] 나중에 군대에 들어가 유홍을 따라 형주의 융중으로 갔는데, 그곳 제갈량의 옛 거처에 도착했을 때 유홍의 명으로 제갈량을 기리는 비석의 내용을 작성했다. 이 글은 칭찬을 받았으며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48]
- 이성석(李盛碩): 영포태수(寧浦太守)를 지냈다.[49]
이밀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도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가면서 할머니 유씨(劉氏) 손에서 자랐다.
5. 고완(高玩)
고완(高玩)은 이밀과 같은 시기에 촉군(蜀郡; 현재의 청두, 쓰촨)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자는 백진(伯珍)이었다. 그는 어릴 때 태상(太常) 두경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는 미묘한 재주와 깊은 지식, 그리고 간결함과 청렴함을 지키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고완은 이밀과 명성이 동등하다고 여겨졌으며, 촉한 정부에서 비슷한 지위를 차지했다.[50]
조위가 진(晉)에게 선양한 후, 고완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고, 곡양령(曲陽令)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사치스러운 경비 없이 혼자 새 임지로 갔으며, 현(縣)에서 환영 사절단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조정에 소환되어 태사령(太史令)으로 재직했다. 떠날 때 그는 환송하는 이들에게 현 경계를 넘지 말라고 요청했고, 조정은 이를 칭찬했다. 조정에서 그를 어떻게 잘 활용할지 논의하던 중, 고완은 갑자기 사망했다.[51]
참조
[1]
화양국지
李宓,字令伯,犍為武陽人也
[2]
화양국지
祖父光,朱提太守
[3]
화양국지
父早亡
[4]
화양국지
母何更行,見養祖母
[5]
진서
李密,字令伯,犍為武陽人也,一名虔。父早亡,母何氏醮
[6]
진서
密時年數歲,感戀彌至,烝烝之性,遂以成疾
[7]
진서
祖母劉氏,躬自撫養,密奉事以孝謹聞
[8]
진서
有暇則講學忘疲,而師事譙周,周門人方之游夏
[9]
화양국지
治《春秋左傳》,博覽《五經》,多所通涉。機警辨捷,辭義響起
[10]
화양국지
事祖母以孝聞。其侍疾,則泣涕側息,日夜不解帶,膳飲湯藥,必「自」〔過目嘗〕口
[11]
진서
劉氏有疾,則涕泣側息,未嘗解衣,飲膳湯藥必先嘗後進
[12]
화양국지
本郡禮命,不應。州辟從事,尚書郎,大將軍主簿,太子洗馬
[13]
화양국지
奉使聘吳。吳主問蜀馬多少。對曰:「官用有餘,民閒自足。」
[14]
화양국지
吳主與群臣汎論道義,謂:「寧為人弟。」宓曰:「願為人兄。」裴引此下有矣字。吳主曰:「何以為兄?」
[15]
화양국지
宓曰:「為兄供養之日長。」吳主及群臣稱之
[16]
진서
少仕蜀,為郎。數使吳,有才辯,吳人稱之
[17]
화양국지
大同後,征西將軍鄧艾聞其名,請為主簿
[18]
화양국지
及書招欲與相見,皆不往。以祖母年老,心在色養,拒州郡之命。獨講學,立旌授生
[19]
화양국지
武帝立太子,徵為洗馬。詔書累下,郡縣〔相〕逼「遣」
[20]
진서
蜀平,泰始初,詔徵為太子洗馬。密以祖母年高,無人奉養,遂不應命
[21]
진서
乃上疏曰:臣以險釁,夙遭閔凶,生孩六月,慈父見背,行年四歲,舅奪母志。祖母劉湣臣孤弱,躬親撫養。臣少多疾病,九歲不行,零丁辛苦,至於成立。既無伯叔,終鮮兄弟,門衰祚薄,晚有兒息。外無期功強近之親,內無應門五尺之童,煢煢孑立,形影相弔。而劉早嬰疾病,常在床蓐。臣侍湯藥,未嘗廢離。自奉聖朝,沐浴清化,前太守臣逵,察臣孝廉,後刺史臣榮,舉臣秀才。臣以供養無主,辭不赴命。明詔特下,拜臣郎中,尋蒙國恩,除臣洗馬。猥以微賤,當侍東宮,非臣隕首所能上報。臣具以表聞,辭不就職。詔書切峻,責臣逋慢,郡縣逼迫,催臣上道,州司臨門,急於星火。臣欲奉詔賓士,則劉病日篤;苟徇私情,則告訴不許。臣之進退,實為狼狽。伏惟聖朝以孝治天下,凡在故老,猶蒙矜恤,況臣孤苦尪羸之極。且臣少仕偽朝,曆職郎署,本圖宦達,不矜名節。今臣亡國賤俘,至微至陋,猥蒙拔擢,寵命殊私,豈敢盤桓,有所希冀!但以劉日薄西山,氣息奄奄,人命危淺,朝不慮夕。臣無祖母,無以至今日;祖母無臣,無以終餘年。母孫二人,更相為命,是以私情區區不敢棄遠。臣密今年四十有四,祖母劉今年九十有六,是臣盡節于陛下之日長,而報養劉之日短也。烏鳥私情,願乞終養。臣之辛苦,非但蜀之人士及二州牧伯之所明知,皇天后土,實所鑒見。伏願陛下矜湣愚誠,聽臣微志,庶劉僥倖,保卒餘年。臣生當隕身,死當結草
[22]
화양국지
宓上疏,疏在本傳。武帝覽之,曰:「宓不空有名也。」嘉其誠款,賜奴婢二人。下郡縣供其祖母奉膳
[23]
진서
帝覽之曰:「士之有名,不虛然哉!」乃停召
[24]
진서
後劉終,服闋,復以洗馬徵至洛
[25]
진서
司空張華問之曰:「安樂公何如?」密曰:「可次齊桓。」華問其故,對曰:「齊桓得管仲而霸,用豎刁而蟲流。安樂公得諸葛亮而抗魏,任黃皓而喪國,是知成敗一也
[26]
진서
次問:「孔明言教何碎?」密曰:「昔舜、禹、皋陶相與語,故得簡雅;《大誥》與凡人言,宜碎。孔明與言者無己敵,言教是以碎耳。」華善之
[27]
화양국지
及祖母卒,服終,徙從尚書郎為河內溫令
[28]
화양국지
敷德陳教,政化嚴明
[29]
화양국지
大傅鉅平侯羊公薨,無子,帝令宗子為世子嗣之,不時赴喪。宓遣戶曹齎移、推轂遣之
[30]
화양국지
中山諸王每過溫縣,必責求供給。吏民患之。宓至,中山王過縣,徵芻茭薪蒸。宓牋引「高祖過沛,賓禮老幼。桑梓之供,一無煩費擾。伏惟明王,孝思惟則,動識先戒;本國望風,式歌且舞;誅求煩碎,所未聞命。」後諸王過,不敢煩溫縣
[31]
화양국지
盜賊發河內餘縣,不敢近溫。追賊者不敢經界
[32]
화양국지
隴西王司馬子舒深敬友之。而貴勢之家憚其公直
[33]
진서
出為溫令,而憎疾從事,嘗與人書曰:「慶父不死,魯難未已。」從事白其書司隸,司隸以密在縣清慎,弗之劾也
[34]
진서
密有才能,常望內轉,而朝廷無援,乃遷漢中太守,自以失分懷怨
[35]
화양국지
宓去官,為州大中正。性方亮,不曲意勢位者,失荀、張指,左遷漢中太守。諸王多以為冤。一年去官,年六十四卒
[36]
서적
Jin Shu vol. 88
[37]
서적
Huayang Guo Zhi vol. 11. 01
[38]
서적
Huayang Guo Zhi vol. 11. 09
[39]
서적
Huayang Guo Zhi vol. 11. 09
[40]
서적
Huayang Guo Zhi vol. 11. 09
[41]
서적
Huayang Guo Zhi vol. 11. 09
[42]
서적
Huayang Guo Zhi vol. 11. 09
[43]
서적
Huayang Guo Zhi vol. 11. 09
[44]
서적
Huayang Guo Zhi vol. 11. 09
[45]
서적
Huayang Guo Zhi vol. 11. 09
[46]
서적
Jin Shu vol. 88
[47]
서적
Huayang Guo Zhi vol. 11. 09
[48]
서적
Jin Shu vol. 88
[49]
서적
Huayang Guo Zhi vol. 11. 09
[50]
서적
Huayang Guo Zhi vol. 11. 09
[51]
서적
Huayang Guo Zhi vol. 11. 09
[52]
서적
華陽国志
四庫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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