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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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晉)은 266년부터 420년까지 존속한 중국의 왕조로, 서진(266-316)과 동진(317-420)으로 구분된다. 사마씨가 조위를 찬탈하여 건국했으며, 서진은 삼국 시대를 통일했으나, 팔왕의 난과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으로 멸망했다. 이후 사마예가 강남에서 동진을 건국하여 문벌 귀족 정치를 펼쳤고, 북방과의 전쟁, 대규모 남하로 인한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동진은 환현의 찬탈, 유유의 집권 과정을 거쳐 420년 유송에 의해 멸망했다. 이 시기 도교와 불교가 융성했으며, 비수 전투, 팔왕의 난 등이 주요 사건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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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위진)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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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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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 기간 | 266년 ~ 420년 |
이전 국가 | 조위 |
이후 국가 | 유송 |
수도 | 낙양 (266년 ~ 311년) 장안 (312년 ~ 316년) 건강 (317년 ~ 420년) |
공용어 | 고대 중국어 |
종교 | 불교 도교 중국 민간 신앙 |
통화 | 중국 동전 문 |
현재 국가 | 중국 몽골 북한 베트남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국가 원수 칭호 | 황제 |
주요 지도자 | 무제 (266년 ~ 290년) 민제 원제 (318년 ~ 323년) 공제 (419년 ~ 420년) |
주요 관직 | 승상 |
역사 | |
건국 | 266년 |
중국 통일 | 280년 |
동진 시작 | 317년, 화이 강 이남으로 이동 |
멸망 | 420년, 유송에 양위 |
면적 | |
280년 (서진 최대) | 3,100,000 km² |
347년 (동진 최대) | 2,800,000 km² |
2. 역사
삼국 시대 말, 사마의를 필두로 한 사마씨 가문은 조위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사마사와 사마소는 조위의 섭정으로서 권력을 강화했다. 263년, 사마소는 촉한을 멸망시키고 진왕(晉王)에 봉해졌다. 265년 사마소가 죽고 사마염이 진왕위를 계승, 조위를 멸망시키고 진(서진)을 건국하였다.[6]
266년, 사마염은 조환에게 선양을 강요받아 진나라를 건국하고 무제가 되었다.[9] 280년, 무제는 동오를 정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삼국 시대를 종식시켰다.[9]
무제 사후(290년), 황위 계승 분쟁으로 팔왕의 난이 발생했다. 이 내전으로 왕조는 약화되었고, 304년에 오호 십육국 시대가 시작되며 혼란은 커졌다. 311년 영가의 난으로 회제가, 316년 장안 함락으로 민제가 처형되면서 서진은 멸망했다.[6]
이후 진 황실 생존자들과 한족들은 남쪽으로 이주했다. 취안저우의 진강은 이들의 정착 과정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317년, 사마예는 건강(난징)에서 진나라를 재건하고 원제로 즉위, 동진(東晉) 시대가 시작되었다.[6]
동진 시대는 문벌 귀족 정치가 절정에 달했다. 황제 권한은 제한적이었고, 낭야 왕(王)씨, 태원 사(謝)씨, 진류 환(桓)씨, 초 유(庾)씨 등 귀족 가문들이 국정을 통제했다. "왕도와 진 원제가 함께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이 통용되었다.[7]
동진은 북방 영토 회복을 위해 여러 차례 북벌을 시도했다. 383년 비수 전투에서 전진에 승리하여 황하 이남 영토를 회복하기도 했다.[6] 그러나 왕족 간 갈등과 잦은 왕위 계승 분쟁은 북벌 지지를 약화시켰다.[6]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 중, 한족들이 남쪽으로 이주하며 남부 귀족 가문들과 갈등을 겪었다. 이주민과 남부 주민 간 경쟁은 진(晉) 국내 정치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6]
403년, 환온의 아들 환현이 환초를 건국했으나 곧 유유에게 전복되었고, 유유는 안제(사마덕종)를 복위시켰다.[6] 419년, 유유는 사마덕종을 살해하고 사마덕문을 공제로 옹립했다. 420년, 공제는 유유에게 선양했고, 유유는 유송을 건국했다. 이듬해 사마덕문은 살해되었다.[6]
2. 1. 서진 (266년 ~ 316년)
삼국 시대 동안, 사마씨는 조위에서 사마의를 필두로 고평릉 사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사마사, 사마소로 이어지는 섭정으로 사마씨의 지배는 더욱 공고해졌다.사마소는 촉한을 정복하고 진왕(晉王)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사마염은 266년 조환에게 선양을 강요받아 진나라를 건국하고 무제가 되었다. 280년, 무제는 동오를 정복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삼국 시대를 종식시켰다.
그러나 무제 사후, 황위 계승 분쟁으로 팔왕의 난이 발생하여 왕조는 약화되었다. 304년 오호 십육국 시대가 시작되며 혼란은 더욱 커졌고, 311년 영가의 난과 316년 장안 함락으로 회제와 민제가 연이어 처형되면서 서진은 멸망했다. 이후 진 황실 생존자들과 한족들은 남쪽으로 이주했다.
2. 1. 1. 건국 배경
삼국 시대 동안, 사마씨는 조위 왕국 내에서 사마의를 필두로 두각을 나타냈다. 사마의는 조위의 섭정이었고, 249년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왕국 내에서 조씨의 권력을 능가하기 시작했다.[1] 251년 사마의가 사망한 후, 그의 장남 사마사가 섭정직을 이어받아 조위의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유지했다.[1] 255년 사마사가 사망한 후, 그의 동생 사마소가 섭정이 되었다.[1] 사마소는 반란과 불만을 진압하여 사마씨의 이익을 더욱 증진시켰다.[1]263년, 사마소는 촉한을 정복하고 유비의 아들 유선을 사로잡도록 조위 군대를 지휘하여 삼국 중 하나의 멸망을 알렸다.[2] 그의 행적은 그에게 황제 다음으로 달성 가능한 마지막 지위인 진왕(晉王)의 칭호를 수여했다.[2] 그는 조상들의 고향이 하남성 온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 칭호를 받게 되었는데, 이곳은 주나라 시대 진의 영토였으며, 섬서성의 진강을 중심으로 했다.[2] 사마소의 왕위 찬탈 야망은 드러났지만, 그는 찬탈 시도를 하기 전에 265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사마염에게 기회를 넘겨주었다.[2]
2. 1. 2. 성립
266년, 사마염은 조환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진나라를 건국하고 무제가 되었다.[9] 무제는 조환이 진류왕으로 명예롭게 살도록 허락했고 황제의 의례로 그를 장례했다. 280년, 무제는 동오를 정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삼국 시대를 종식시켰다.[9]2. 1. 3. 쇠퇴
무제가 290년에 사망하자, 황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으로 팔왕의 난이 발생했다. 이 내전으로 왕조는 크게 약화되었고, 304년에 오호 십육국 시대가 시작되면서 더 큰 혼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311년에는 한의 군주 유총이 낙양을 공격하는 영가의 난이 발생하여, 회제가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회제의 뒤를 이은 민제 또한 316년 장안(현재의 시안)이 한(전조) 세력에 의해 점령당했을 때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서진의 멸망을 알렸다.[6] 진 황실의 생존자들과 화북 평원에서 온 많은 한족들은 중국 남부로 도망쳤다. 이 난민들은 취안저우의 진강의 이름처럼 그들이 이주한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2. 2. 동진 (317년 ~ 420년)
삼국 시대 말, 사마의를 필두로 한 사마씨 가문은 조위에서 큰 권력을 장악했다. 사마의의 뒤를 이은 사마사와 사마소는 조위의 섭정으로서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263년, 사마소는 촉한을 멸망시키고 진왕(晉王)에 봉해졌다. 265년 사마소가 죽고 그의 아들 사마염이 진왕위를 계승, 조위를 멸망시키고 진(서진)을 건국하였다.[6]290년 무제(사마염) 사후, 왕위 계승 다툼으로 팔왕의 난이 일어났다. 이 내전으로 서진은 크게 약화되었고, 304년 오호 십육국 시대가 시작되면서 혼란은 더욱 커졌다. 311년 한의 유총이 낙양을 함락하고 회제를 처형했으며, 316년 장안이 함락되고 민제가 처형되면서 서진은 멸망했다.[6]
이후 진 황실 생존자들과 화북 평원에서 온 한족들은 중국 남부로 도망쳤다. 이들은 정착한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취안저우의 진강은 이들의 정착 과정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2. 2. 1. 건국
317년, 사마예는 건강(지금의 난징)에서 진나라를 재건하고 원제로 즉위하여 동진(東晉) 시대가 시작되었다.[6] 북방의 십육국들은 사마예의 정통성을 부인하며 동진을 '낭야'라고 부르기도 했다.2. 2. 2. 문벌 귀족 정치
동진 시대는 문벌 귀족 정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황제의 권한은 제한적이었고, 낭야 왕(王)씨, 태원 사(謝)씨, 진류 환(桓)씨, 초 유(庾)씨 등 강력한 이민 귀족 가문들이 국정을 통제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왕도와 진 원제가 함께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이 흔히 통용되었다.[7] 진 원제가 조회를 열 때 왕도를 곁에 앉도록 초대하여 함께 신하들의 축하를 받게 하려 했지만, 왕도는 이를 거절했다고 전해진다.[8]2. 2. 3. 북방과의 전쟁
동진은 서진 멸망 이후 잃어버린 북방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여러 차례 북벌을 시도했다. 354년부터 369년까지 환온이 이끈 원정이 대표적이다.[6] 383년에는 비수 전투에서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진에게 큰 승리를 거두어 황하 이남의 영토를 회복하기도 했다.[6]이후 유유가 409년부터 416년까지 북방 국가들을 격파하여 잃어버린 영토 일부를 다시 회복했다.[6] 그러나 비수 전투와 같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왕족 간의 갈등과 잦은 왕위 계승 분쟁은 북벌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켰다. 진 조정의 지원 부족은 환온의 북벌 실패의 주요 원인이었다.[6] 또한, 왕돈과 소준 장군의 반란을 포함한 내부 군사적 위기는 동진의 국력을 약화시켰다.[6]
2. 2. 4. 남쪽으로의 대규모 이주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 중에 화북 평원에서 온 많은 수의 한족들이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남부 지역 귀족 가문들과 갈등을 겪었다. 이주민과 남부 지역 주민들 간의 경쟁은 진(晉)의 국내 정치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6]이를 위해 "이주민 사령부"와 "백적"이 특별히 만들어졌다. 남중국 귀족은 이 이주민들의 후손으로 형성되었다.[9] 특히 강남 지역에서, 천사도와 북중국 귀족은 진(晉) 왕조 시대에 남중국 귀족을 제압했다.[10]
북부의 인구 감소와 북중국인의 남중국 이주로 인해 남중국의 인구가 북중국을 넘어섰다.[11][12] 북중국에서 남쪽으로의 서로 다른 시기의 귀족 중국인 이주 물결은 각기 다른 귀족 가문 집단을 만들어냈다.[13]
2. 2. 5. 멸망
403년, 명장 환온의 아들 환현이 진(晉)의 왕위를 찬탈하고 환초를 건국했다. 그러나 환현은 곧 유유에게 전복되었고, 유유는 안제(사마덕종)를 복위시켰다.[6] 손은, 노순의 난과 서촉의 교종 독립 등 문민 행정은 쇠퇴하였다. 419년, 유유는 사마덕종을 살해하고 그의 동생 사마덕문을 공제로 옹립했다. 420년, 공제는 유유에게 선양했고, 유유는 유송을 건국했다. 이듬해 사마덕문은 살해되었다.[6] 북쪽에서는 16국 시대의 마지막 국가인 북량이 439년 북위에 멸망하면서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3. 정치와 인구
남부 지역 귀족 가문들은 종종 북부에서 온 이주민들과 갈등을 겪었다. 이로 인해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주민과 남부 지역 주민들 간의 경쟁이 진(晉)의 국내 정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의흥의 주(周)씨 가문()과 오흥의 심(沈)씨 가문()은 큰 타격을 입었다. 다양한 북부 이주민 가문들 간에도 갈등이 있었으나, 이는 사실상 세력 균형을 이루게 했고, 어느 정도 황제의 통치에 이롭게 작용했다.
동진 시대에 남쪽으로 이동한 대규모의 북부 한족들을 위해 "이주민 사령부"가 만들어졌다.[9] 남중국 귀족은 이 이주민들의 후손으로 형성되었다.[9] 특히 강남 지역에서, 천사도와 북중국 귀족은 진(晉) 왕조 시대에 남중국 귀족을 제압했다.[10] 북부의 인구 감소와 북중국인의 남중국 이주로 인해 남중국의 인구가 북중국을 넘어섰다.[11][12] 북중국에서 남쪽으로의 서로 다른 시기의 귀족 중국인 이주 물결은 각기 다른 귀족 가문 집단을 만들어냈다.[13]
3. 1. 교인(僑人)과 백적(白籍)
오호의 난으로 북부 주민 8명 중 1명이 남쪽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교인'(, '기탁된 사람들')이라고 불렸으며, 당시 남쪽 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했다. 난민들이 도착 전에 겪었던 물질적 손실을 고려하여, '조'()세와 기타 부역에서 면제되었다. 흰 종이로 묶인 호적은 '백적'(), 노란 종이로 묶인 호적은 '황적'()이라고 불렀다. 위기가 진정되면서, 이러한 우대 정책은 점차 백성들에게 무거운 부담으로 여겨졌고, 토착민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토단'은 동진에게 점점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13]3. 2. 망명 행정 구역
동진은 망명자들을 위한 거점 역할을 하는 세 가지 행정 구역, 즉 교주(僑州, '주'), 교군(僑郡, '군'), 그리고 교현(僑縣, 망명 현)을 설치했다.[6] 이러한 망명 행정 구역은 실제 영토를 소유하지 않은 명목상의 존재였으며, 망명 정부와 같았다. 그러나 동진이 북방 영토에 대한 정통성을 주장하는 일종의 선언으로서 중요성을 지녔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하는 난민들의 향수를 달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6]원제, 명제, 성제 통치 기간 동안 망명 행정 구역은 회수 남쪽과 장강 하류 평원에 집중되었다.[6] 처음에는 건강에 망명 낭야군이 설치되었지만,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320년경에는 건강에 망명 회덕현이 설치되었다.[6] 『송서』에 따르면:[6]
> 진(晉) 영가의 난 이후, 유(幽), 기(冀), 청(青), 병(并), 연(兗)주와 서주(徐州)의 회북(淮北) 유민들이 회수를 건너왔으며, 일부는 장강을 건너 진릉군(晉陵郡) 경계에 머물렀다... 또한, 회남(淮南)에 있던 유민들을 진릉(晉陵)의 여러 현으로 이주시켰으며, 강남으로 이주하거나 강북에 머물렀던 사람들을 위해 망명 군현을 설치하여 다스렸다. 서주와 연주의 치소는 강북으로 옮겨졌으며, 강북에는 망명 유, 기, 청, 병 사주가 설치되었다.
명제 통치 시기에는 망명 패군, 청하군, 하비군, 동광군, 평창군, 제음군, 복양군, 광평군, 태산군, 제양군, 노군이 설치되었다.[6] 강회(江淮)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과 침략으로 더 많은 난민들이 장강 남쪽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면서 망명 회남군이 설치되었다.[6]
그러나 이러한 실행은 정책이 수립된 것보다 더 복잡했다. 몇몇 실제 현은 망명 군의 관할 하에 있었다.[6]
몇몇 망명 행정 구역은 오늘날에도 중국에서 유지되고 있다. 예를 들어, 당도현은 원래 방부시 지역에 위치했지만, 현재 위치에 망명 당도현이 설치되었고, 후자가 전자를 대체하여 지명을 물려받았다.[6]
3. 3. 토단(土斷) 정책
토단(土斷)은 이토단(以土斷)의 약칭으로, 현재 거주지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분류하여 등록한다는 의미이다. 서진 시대부터 시행된 고대 호구제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었다.[17] 이 용어는 진서에 수록된 위관(魏觀)과 이충(李充)의 전기에 처음 기록되었다.[17]> 이제 구역이 동일한 규율을 따르고 대화(大化)가 시작되려 하니, 신 등은 마땅히 모든 말법(末法)을 모두 제거하고, 고대의 제도를 따르며, '''이토단'''을 시행하여, 공경 이하 모든 사람들이 현재 거주하는 곳을 기준으로 삼고, 다시는 다른 토지에 소속된 객이나 먼 곳에 있는 자가 없도록 해야 한다.[17]
> 그러나 위(魏)나라의 쇠퇴로 인해 인물들이 흩어져 조정에 정해진 관직이 없고, 사람들은 정해진 거처가 없으며, 낭리(郎吏)는 군부에 축적되고 호걸과 권세가들은 도읍에 모여 있어, 상황이 뒤섞여 고대와 같지 않습니다. 구품(九品)이 이미 폐지되었으므로, 먼저 이주를 허용하고 서로 병합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한 공거(貢擧)의 법을 명확히 하여 국외에서 남용되지 않도록 하면, 관대(冠帶)의 무리는 분리되지 않고 스스로 균등해질 것이며, 곧 '''토단'''의 실현이 될 것입니다.[18]
이 두 사람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을 수 있지만, 동진과 남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4. 사회와 문화
진(위진) 시대에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 종교가 발전했다. 분열과 혼란은 고통을 다루는 데 초점을 맞춘 불교가 대중화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4. 1. 종교
도교와 불교는 진(위진) 왕조 시대에 중요한 종교였다. 민간 도교는 이단으로 여겨졌지만, 천사도와 같은 민간 종파는 여전히 은밀히 소중히 여겨졌고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4. 1. 1. 도교
진(晉)나라 시대에 도교는 양극화되었다. 진나라 황제들은 도교도들을 가혹하게 탄압했지만, 황건적의 난 당시 후한 말기에 도교가 사용되었던 방식을 고려하여 이를 이용하려 시도하기도 했다.[19] 이 시대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많은 상인, 소규모 토지 소유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도교에서 위안을 찾았으며, 주요 가문과 군 장교들 또한 도교를 받아들였다. 갈홍은 황제에 대한 충성을 도교적 미덕으로 강조하며, 반역자는 결코 도교에서 말하는 불멸자가 될 수 없다고 가르쳤다.[19] 이는 도교가 황실에 더 쉽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4. 1. 2. 불교
진(晉)나라는 중국 대승 불교의 중요한 시기였다. 축법호의 286년 ''법화경'' 번역은 구마라집의 5세기 번역 이전 가장 중요한 번역이었다. 동진에는 1,768개의 불교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20]도교는 중국에서 화학과 의학을 발전시킨 반면, 대승 불교는 철학과 문학에 기여했다.
5. 역대 황제 및 연호
(동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