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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17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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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상호는 1702년에 태어나 1801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인물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손가락을 잘라 할아버지의 병을 치료하고, 부모의 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렀으며, 영조, 정조, 스승의 국상 기간 동안 슬픔을 표현했다. 1790년 정조 때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99세에 숭정대부 행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사후 그의 효행이 알려져 정려되었으며, 강원도 울진군에 묘소가 있다. 삼척에는 그의 효행을 기리는 망곡단, 충효정려문 등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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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1702년)
기본 정보
이름이상호
출생1702년
사망1762년 (향년 60세 ~ 61세)
묘소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산55-2
가족 관계
아버지이이명
어머니안동 김씨
배우자정부인 평산 신씨
자녀5남
관력
봉호오흥군

2. 생애

이상호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와 조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15세에 할아버지 금석이 병으로 눕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소생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부모의 묘를 이장하고 6년간 시묘살이를 했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단 것을 먹지 않았다. 영조, 문효세자, 정조의 국상에는 예를 다했고, 스승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6년간 소복을 입고 근신하였다.[1]

1790년(정조 14년) 6월 24일 정조가 경외의 고령자들에게 관직을 내릴 때, 이상호와 1820인에게 첨지중추부사가 임명되었다.[1] 99세에 노인직으로 숭정대부 행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1801년 사망하였다. 행장과 묘갈명은 강필효가 지었다.

2. 1. 출생과 가계

1702년(숙종 27) 4월 23일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이천리(理川里, 현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이천리) 수리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 금석(今碩)이고, 아버지는 증 가선대부 한성부좌윤에 추증된 구징(九徵)이고, 어머니는 삼척김씨로 김한주(金漢冑)의 딸이다. 이순우(李純祐 또는 李純佑)의 17대손이며, 원덕면 이천리에서 살았다. 이름이 전하지 않는 스승에게서 글과 학문을 수학하였다.

2. 2. 효행

천성이 충효에 지극하여 15세 때 할아버지 금석이 병석에 눕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 드려 기적적으로 소생시켰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살림에도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으나 상을 당하였다. 조실부모(早失父母)의 지극한 슬픔으로 시묘(侍墓)살이 3년 만에 부친의 묘를 모친의 묘소로 옮기고 다시 3년을 추위, 더위, 비바람을 감수하고 묘를 수묘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사망하자 이후 단 것을 먹지 않고 애도하는 마음으로 일관했다 한다.

영조의 국상에 3년, 문효세자의 국상에 거실 좌측에 단(壇)을 쌓고 3년간 삼년상을 하였고, 정조의 국상을 당하여 거실에 빈소를 차리고 소복을 입었으며, 또 스승이 돌아가시자 3년간 마음속의 상을 입고 6년간 소복을 입고 근신하였다. 그가 영조, 정조의 국상 때 망곡하던 곳에는 망곡유허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평평한 사각 백석이고 숭정대부 신효자 이상호 망곡유허비(崇政大夫 臣 孝子 李尙虎 望哭 遺墟碑)라 새겨져 있다.

2. 3. 국상 참여

영조와 정조의 국상 때 이상호가 망곡하던 곳에는 망곡유허비가 세워졌다.[1] 영조의 국상에는 3년, 문효세자의 국상에는 거실 좌측에 (壇)을 쌓고 3년간 삼년상을 하였고, 정조의 국상을 당하여 거실에 빈소를 차리고 소복을 입었다.[1] 또 스승이 돌아가시자 3년간 마음속의 상을 입고, 6년간 소복을 입고 근신하였다.[1] 비문은 평평한 사각 백석이고 숭정대부 신효자 이상호 망곡유허비(崇政大夫 臣 孝子 李尙虎 望哭 遺墟碑)라 새겨져 있다.[1]

2. 4. 관직

1790년(정조 14년) 6월 24일 정조가 경외의 고령자들에게 관직을 내릴 때, 이상호와 1820인에게 첨지중추부사가 임명되었다.[1] 99세에 노인직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使)의 벼슬을 받았다.

2. 5. 사망

1801년(순조 1) 12월 20일에 99세로 사망했으며, 행장과 묘갈명은 해은 강필효가 지었다.

3. 사후

이상호의 묘는 강원도 울진군 북면 주인리 (현,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주인리) 장재산(長在山) 북서방 건좌(乾坐)에 안장되었고 묘비가 있다. 묘비문은 해은 강필효(海隱 姜必孝)가 지었다. 1801년(순조 1년) 그의 충효가 조정에 알려져 포상 논의 끝에 정려되었고,[2] 1817년(순조 17) 정려문이 세워졌으며, 그해 9월 면암 최익현이 글을 지었다.

3. 1. 정려와 복호

1801년(순조 1년) 그의 충효가 조정에 알려져 포상 논의 끝에 정려되었다. 1814년(순조 14) 8월 24일 강원도 삼척의 유학 김상록(金尙祿) 등이 상언을 올려, 본부의 고 학생 이상호(李尙虎)의 효행에 대해 정려해 주기를 청하여 예조가 보고했고 순조가 윤허하였다.[2] 1816년(순조 16) 6월 8일 각 지역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릴 때 강원도의 유생들이 예조에 상소를 올려, 그는 효행으로 복호(復戶)의 명을 받았다.[3] 1817년(순조 17) 여름에 정려문을 세우고 그해 9월 면암(勉菴) 최익현이 글을 지었다.

3. 2. 묘소

묘소는 강원도 울진군 북면 주인리 (현,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주인리) 장재산(長在山) 북서방 건좌(乾坐)에 안장되었고 묘비가 있다. 묘비문은 해은 강필효(海隱 姜必孝)가 지었다. 고향과 먼 곳에 묘를 쓴 이유는 알려진 것이 없다. 옥천부원군 이녹후의 13대손이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증조부이웅(李雄)1634년 ~ ?
조부이금석(李今碩)생몰년 미상
조모평해 황씨(平海黃氏)생몰년 미상
백부이구만(李九萬)1679년 7월 9일 ~ ?
숙부이구연(李九淵)1692년 12월 28일 ~ 1744년 6월 8일
이구징(李九徵)1683년 12월 28일 ~ ?
삼척 김씨(三陟金氏)1690년 7월 15일 ~ 1787년 12월 17일, 김한주(金漢胄)의 딸
부인전주 이씨(全州李氏)1694년 2월 9일 ~ 1784년 12월 12일, 이귀문(李貴文)의 딸


5. 유적

삼척시 원덕읍 이천2리 수리동부락 근처에는 그의 숙모인 삼척김씨의 효부각이 있다. 삼척김씨는 병석에 누운 시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하늘에 쾌유를 빌었다. 그러다 침을 놓고 붕어를 달여드리니 얼마 뒤 시아버지가 병이 나았다고 한다. 1689년 효부정려를 받았다.[4]

5. 1. 삼척 망곡단

그가 영조정조대왕의 국상을 당했을 때 망곡을 하던 삼척시 원덕읍 이천2리 뒷산인 천자산 자락 터에 훗날 단을 세우고 망곡단이라 하고, 유허비가 세워졌다.[4]

영조와 문효세자의 국상 때 그가 단을 쌓고 곡을 한 곳으로, 19세기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이천2리에 망곡유허비가 세워졌다.[4]

5. 2. 충효정려문과 정려비

삼척시 원덕읍 이천2리 수리동 부락, 이천2리 마을회관 우측에는 이상호 충효정려문과 충효정려비가 있다. 현재는 충효문을 옮겨 충효비각 울타리로 쓰고 있다. 정려비문의 비문은 면암 최익현이 짓고 썼다.[4]

참조

[1] 간행물 일성록 1790년(정조 14년) 경술 6월 24일 계유 12번째기사 1790-06-24
[2] 간행물 일성록 순조 14년 갑술(1814) 8월 24일(임오) 07번째기사 1814-08-24
[3] 간행물 순조실록 19권, 1816년(순조 16년, 청 가경 21년) 6월 8일 병진 2번째기사 1816-06-08
[4] 뉴스 600살 노송 보며 늦여름 시린 물길에 발 담가볼까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1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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