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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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후담은 1702년 경기도 교하(현 파주시 교하동)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그는 남인 계열로 이익의 문인이 되었으며, 성리학과 실학을 연구했다. 특히 서학(천주교)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서학변》을 저술하여 천주교의 교리를 비판했다. 그는 영혼 불멸, 사후 세계, 창조론 등을 비판하며 유교적 가치관을 옹호했으며, 1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서학 비판은 후대에 천주교 배척의 논리적 근거가 되었으며, 이익의 학문을 계승하여 남인 학맥을 이었다.
신후담은 1702년 2월 8일 경기도 교하군 교하(현 경기도 파주시 교하동)에서 태어났으며, 일설에는 한양 낙선방(樂善坊)의 외갓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신승선과 신수근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감을 지내고 증 예조참판 겸 제학에 추증된 신구중(愼龜重)이고, 어머니는 허목과 윤휴의 문인인 이서우(李瑞雨)의 손녀이며 참봉 이정관(李正觀)의 딸 우계이씨(羽溪李氏)이다. 국조인물지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우계이씨가 검은 말(驪馬)이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그를 낳았다고 한다.[2]
신후담은 이익의 문하에서 서양의 신문물, 과학 및 의술 정보를 접했으나, 이후 그리스도교 비판에 집중했다. 그는 《서학변》에서 서학이 유학의 정신을 부정하고 사회 윤리와 정치의 기반을 흔든다고 우려했다.[13] 기독교 교리가 사회를 부정하고 흔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보았다.
2. 생애
아버지 신구중은 신승선의 둘째 형인 신승복의 7대손 신지일의 아들이지만, 아들이 없는 16촌 아저씨 신휘오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경기도 교하 출신으로,[2] 어느 시점에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호는 이로(耳老)였다가 말년에 연로(淵老)로 고쳤으며, 하빈(河濱), 돈와(遯窩), 금화자(金華子), 하빈 노인(河濱老人) 등의 별호가 있다.
남인 집안 출신으로, 권대운 가문과 교류가 잦은 청남파였다. 5세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6세 때부터 박세흥(朴世興)을 선생으로 모시고 공부하였다. 10세 때에는 《사략》과 《통감(通鑑)》을 다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였으며, 이익의 문인이 되어 허목, 유형원, 이서우, 이익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안정복에게는 동문수학한 선배였다.
청소년기에 노장사상에 심취하였으나 17세 때 《성리대전》을 읽게 되면서부터 성리학으로 기울었다. 허목과 송시열 등의 저서를 모두 탐독했는데 허목의 사상에 호감을 보였고, 이익에게 배우면서 실학으로 옮겨갔다.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1723년(경종 3년) 증광과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을 포기하고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다가 23세에 다시 이익을 찾아가 그의 학통을 이었다.[3] 스승 이익으로부터 천주교 사상의 존재를 접하고 경계할 것을 당부받았다. 안정복만큼 스승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칠극》, 《천주실의》 등 한역서학서를 탐독하고 성서와 천주교 관련 서적도 완독하며 기독교 교리를 비판했다.[3]
23세에 정도전의 《불씨잡변》을 본받아 천주교와 하느님관에 대한 반박론인 《서학변 (西學辨)》을 저술했다. 《서학변》 집필 전 한자로 번역된 구약성서, 신약성서를 탐독, 검토했다. 《서학변》에서 현실의 삶도 모르면서 사후세계를 논하는 것과 인간에게 죄를 짓고도 하느님/하나님만 믿으면 죄가 사라지는지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다.[3] 기독교의 영혼 불멸론, 사후세계를 불교 사상의 짜깁기이자 혹세무민으로 보았다. 1724년 이익에게 마테오 리치에 대해 질문했고, 이익은 "그의 학문은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비록 유교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 도달한 바를 논하면 성인이라 할 수 있다"고 답했다.[3]
1728년(영조 4)부터 활발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이익을 찾아가거나 편지를 통해 유교 경전 해석 등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주로 《중용》과 《역경》 연구에 힘썼으며, 기존 학자들의 연구와 해석도 확인, 검토하였다. 1734년 《주역》에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붙인 《주역상신편》(周易象新編) 7권을 완성하였고, 1742년에는 《중용》에 주해를 단 《중용해》(中庸解)를 저술하였다.
이익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서양의 신문물과 과학 문명, 서양 의술, 천주교 등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생애 후반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과 오류 지적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밖에도 손자병법 등 병가(兵家) 서적도 틈틈이 탐독하여 병가 쪽 지식도 있었다.
1744년 부친상을 당했다. 1745년 (영조 21년) 10월 10일 이익관, 이순관에 연관된 외삼촌 이색(李穡)이 나주 괘서 사건으로 의금부에서 형문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신후담은 이색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가 소환, 한성부 숙장문에서 영조의 친국 국문을 받았다.[9] 나주 괘서 사건의 가담자로 지목받은 이색은 자신은 가담하지 않았다며 부인하다가 고문을 받던 중 사망했다. 신후담은 이색의 시신을 거둬서 장사를 치른 일로, 괘서 사건 관련자 권두령(權斗齡)과 접촉 여부를 추궁당했다. 그러나 의금부 조사에서 단지 자신의 외삼촌이기 때문에 장례를 치렀을 뿐이라 답하여[9], 별다른 처벌이나 불이익은 받지 않았다.
1745년 겨울 다시 체포되어 국문을 당했으나 별 혐의점이 없어 풀려났다. 1747년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친 뒤 호서(湖西)의 성리학자들을 방문했다가 조령(鳥嶺)을 넘어가, 포헌 권덕수(逋軒 權德秀) 등을 방문하여, 성리설(性理說)과 도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고 고금 인물의 처신과 잘잘못에 대해 토론하였다.
신후담은 서학을 사학(邪學)이라고 단정하고 유학(儒學)을 옹호하였다. 그는 서학이 겉으로는 유교를 돕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유교를 배척한다고 보았다.[11] 그는 학문을 하는 목적이 자신의 이익이나 천국에 가는 것에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탐구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진정으로 배우고자 한다면 사사로운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학문 그 자체를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후담은 기복신앙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학문과 지식을 독점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학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보았다.
시신은 경기도 용인군 수진면(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손곡 계좌(蓀谷 癸坐)에 매장되었다가 2020년 5월 23일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의 금병산에 자리한 용강공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스승인 성호 이익보다 먼저 사망하여, 이익이 그의 묘비문을 지었다.[14]
그의 문하생들과 안정복의 문인들은 남인 내 천주교에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공서파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노론에 의해 신서파 남인이 숙청당한 뒤에도 조선 말까지 정치세력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 힘은 미약하였다.[14] 그는 소설에도 필재(筆才)가 뛰어나 《속열선전》(續列仙傳) 등 한문 소설을 남기었고, 그 밖에 주요 저서로는 《하빈집》(河濱集) 등이 있다.[14]
2. 1. 출생과 가계
1702년 2월 8일 경기도 교하군 교하(현, 경기도 파주시 교하동)에서 태어났으며, 일설에는 한양 낙선방(樂善坊)의 외갓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부원군 신승선과 신도공 신수근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감을 지내고 증 예조참판 겸 제학에 추증된 신구중(愼龜重)이고, 어머니는 허목과 윤휴의 문인인 이서우(李瑞雨)의 손녀이며 참봉 이정관(李正觀)의 딸 우계이씨(羽溪李氏)이다. 국조인물지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우계이씨가 검은 말(驪馬)이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그를 낳았다고 한다.(夢驪馬入室而有 身而生)[2]
아버지 신구중은 통덕랑(通德郞)으로 1727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종묘서령, 현감을 거쳐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아버지 신구중은 신승선의 둘째 형인 신승복의 7대손 신지일의 아들이지만, 아들이 없는 16촌 아저씨 신휘오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경기도 교하 출신이었으나[2], 어느 시점에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한성부로 상경한 시점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승정원일기 영조 15년 3월 14일자 기사에는 집은 교하로 나타나고, 사마방목의 진사시 합격 기록에는 거주지가 경(京, 서울)으로 나타난다.
호는 이로(耳老)였다가 말년에 연로(淵老)로 고쳤으며, 하빈(河濱), 돈와(遯窩), 금화자(金華子), 하빈 노인(河濱老人) 등의 별호가 있다. 그의 아호 하빈노인은 교하(交河)에 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의 누이 중 1명은 윤씨와 결혼했으나 일찍 죽자, 신후담은 그의 어린 딸 넷을 데려와서 길러 늦지 않게 결혼시켰고, 다른 매부(妹夫)는 가난하고 병이 있으며 의지할 데가 없는 이가 있자, 그를 데려와 함께 살았다. 그는 또한 선조의 행적을 찾아 빠짐없이 기술하여 〈숭인록(崇仁錄)〉이라 이름 짓고, 방계(傍系)의 일가(一家)로서 특별한 행적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조사, 기록하여 상고할 수 있게 하였다.
2. 2. 초기 생애와 학문
신후담은 남인으로, 그의 집안은 권대운 가문과 교류가 잦은 청남파였다. 5세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6세 때부터 박세흥(朴世興)을 선생으로 모시고 공부하였다. 10세 때에는 《사략》과 《통감(通鑑)》을 다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였으며, 12세 때에는 불교의 《능엄경》을 읽고 잘 이해하였다고 한다. 뒤에 이익의 문인이 되어 허목, 유형원, 이서우, 이익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순암 안정복에게는 동문수학한 선배였다.
12세 되던 해에 어려운 책이라도 읽을 수 있게 되고, 주변에서 《능엄경(楞嚴經)》을 가져다주자 구두(句讀)를 떼고, 척계광의 책 《병학지남(兵學指南)》을 누군가에게 받아서 직접 베껴 쓰기도 하였다.
청소년기에 이르러 처음에는 노장사상에 심취하였으나 17세 때 《성리대전》을 읽게 되면서부터 성리학으로 기울었다. 그 뒤 허목과 송시열 등의 저서를 모두 탐독했는데 허목의 사상에 호감을 보이게 되고, 이는 그의 문하인 이익에게 배우면서 실학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된다. 아버지 신구중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그로부터 종증조부 신무에게 배운 학문과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의 학문을 접하였다. 신무는 관설 허후에게 배웠고, 허후는 정구의 문인이자, 장현광의 문인이었다. 나중에는 다시 성호 이익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도 학문을 배웠다. 이익의 문하에서 안정복을 만나 그와도 가깝게 지냈다.
2. 3. 성리학과 실학 연구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1723년(경종 3년) 증광과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을 포기하고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다가 23세에 다시 이익을 찾아가 그의 학통을 이었다.[3]
스승 이익으로부터 천주교 사상의 존재를 접하고 경계할 것을 당부받았다. 안정복만큼 스승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칠극》, 《천주실의》 등 한역서학서를 탐독하고 성서와 천주교 관련 서적(영언려작, 천주실의, 직방외기)도 완독하며 기독교 교리를 비판했다.[3]
23세에 정도전의 《불씨잡변》을 본받아 천주교와 하느님관에 대한 반박론인 《서학변 (西學辨)》을 저술했다. 《서학변》 집필 전 천문략, 곤여도설, 영언여작, 천주실의, 직방외기 등의 서적과 한자로 번역된 구약성서, 신약성서를 탐독, 검토했다. 《서학변》에서 현실의 삶도 모르면서 사후세계를 논하는 것과 인간에게 죄를 짓고도 하느님/하나님만 믿으면 죄가 사라지는지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다.[3]
1723년 진사시에 '우감온공비'라는 시로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1725년 건강 악화로 요양하며 실천윤리에 힘쓰며 《소학》에 관심을 갖고 <소학차의>를 저술했다.[3]
기독교의 영혼 불멸론, 사후세계를 불교 사상의 짜깁기이자 혹세무민으로 보았다. 1724년 이익에게 마테오 리치에 대해 질문했고, 이익은 "그의 학문은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비록 유교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 도달한 바를 논하면 성인이라 할 수 있다"고 답했다.[3] 평소 이익이 관심을 두었던 역사학과 지리학에도 몰두했다.[4]
이익의 제자들 중 신후담과 안정복은 천주교의 천지창조설과 영혼불멸설을 비판하며 서학을 배척했으나, 홍유한·권철신·정약전·이벽 등은 천주교에 귀의했다.[5]
2. 4. 학문, 저술 활동
신후담은 건강이 회복되자 1728년(영조 4)부터 다시 활발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익을 찾아가거나 편지를 통해 유교 경전 해석 등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주로 《중용》과 《역경》 연구에 힘썼으며, 기존 학자들의 연구와 해석도 확인, 검토하였다.
1734년 4년간 연구해온 《주역》에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붙인 《주역상신편》(周易象新編) 7권을 완성하였고, 1742년에는 《중용》에 주해를 단 《중용해》(中庸解)를 저술하였다. 그는 《중용》이나 《역경》을 연구한 결과, 장절(章節)에 대해서는 주자와 견해를 달리하였다.
이익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서양의 신문물과 과학 문명, 서양 의술, 천주교 등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생애 후반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과 오류 지적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밖에도 손자병법 등 병가(兵家) 서적도 틈틈이 탐독하여 병가 쪽 지식도 있었다.
1739년 단경왕후의 친정아버지이자 신후담의 8대조 신수근이 영조의 특명으로 복권되자, 이를 기념하여 이와 관련된 영조의 발언과 백성들의 송덕(頌德)을 뽑아서 합하여 한 권의 책 《소은(昭恩)》을 만들었다.
1742년 단경왕후의 사적을 기록, 정리한 《온릉지(溫陵誌)》 2권을 편찬하였다. 그해 6월 28일 아버지 신구중을 통해 승정원도승지 이익정(李益炡)에게 제출하여 영조에게 올렸다.[8]
2. 5. 부친상과 투옥, 석방
1744년 부친상을 당했다. 상중이던 1745년 (영조 21년) 10월 10일 이익관, 이순관에 연관된 외삼촌 이색(李穡)이 나주 괘서 사건으로 의금부에서 형문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신후담은 이색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가 소환, 한성부 숙장문에서 영조의 친국 국문을 받았다.[9] 나주 괘서 사건의 가담자로 지목받은 이색은 자신은 가담하지 않았다며 부인하다가 고문을 받던 중 사망했다. 신후담은 이색의 시신을 거둬서 장사를 치른 일로, 괘서 사건 관련자 권두령(權斗齡)과 접촉 여부를 추궁당했다. 그러나 의금부 조사에서 단지 자신의 외삼촌이기 때문에 장례를 치렀을 뿐이라 답하여[9], 별다른 처벌이나 불이익은 받지 않았다.
이때 신후담은 고향에 있었고, 동생 신후함(愼後咸)이 권두령(權斗齡)을 만난 일로 서인 사간원사간 윤지태(尹志泰) 등의 탄핵을 받고 원지로 유배되었다.
1745년 겨울 다시 체포되어 국문을 당했으나 별 혐의점이 없어 풀려났다. 1747년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친 뒤 호서(湖西)의 성리학자들을 방문했다가 조령(鳥嶺)을 넘어가, 포헌 권덕수(逋軒 權德秀), 병곡 권구(屛谷 權榘), 눌은 이광정(訥隱 李光庭), 강좌 권만(江左權萬), 청벽 이수연(靑壁 李守淵) 등을 방문하여, 성리설(性理說)과 도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고 고금 인물의 처신과 잘잘못에 대해 토론하였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괘시도설(卦蓍圖說)을 지었으며, 팔괘도(八卦圖)에 속한 설이 모두 28개이고 시도(蓍圖)에 속한 설이 모두 16개였다. 그림들 아래에 모두 논평하는 글을 달았고 또 그 아래에 〈서괘별의(序卦別義)〉를 지어 부록으로 붙였으며 상(上)ㆍ하(下) 편(編)으로 만들었다.
2. 6. 천주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
신후담은 서학을 사학(邪學)이라고 단정하고 유학(儒學)을 옹호하였다. 그는 서학이 겉으로는 유교를 돕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유교를 배척한다고 보았다.[11]
그는 학문을 하는 목적이 자신의 이익이나 천국에 가는 것에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탐구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진정으로 배우고자 한다면 사사로운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학문 그 자체를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후담은 기복신앙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학문과 지식을 독점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학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보았다.
2. 7. 생애 후반
시신은 경기도 용인군 수진면(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손곡 계좌(蓀谷 癸坐)에 매장되었다가 2020년 5월 23일 그의 아버지가 모셔져 있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의 금병산에 자리한 용강공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스승인 성호 이익보다 먼저 사망하여, 성호 이익이 그의 묘비문을 지었다.[14]
후일 그의 후손의 요청으로 향산 이만도가 행장을 썼다. 신후담의 행장은 《향산집(響山集)》 권16에 수록되어 있다.[14]
그의 문하생들과 순암 안정복의 문인들은 남인 내 천주교에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공서파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노론에 의해 신서파 남인이 숙청당한 뒤에도 조선 말까지 정치세력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 힘은 미약하였다.[14]
그는 소설에도 필재(筆才)가 뛰어나 《속열선전》(續列仙傳), 《태평유기》(太平遺記), 《홍장전》(紅粧傳) 등 한문 소설을 남기었고, 그 밖에 주요 저서로는 《하빈집》(河濱集), 《역통의》(易通義) 등이 있다.[14]
3. 사상과 신념
신후담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주장이 편견이며, 특정인에게만 은총을 내리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15] 안자경은 신후담이 기독교를 비판한 원인이 종교의 정치적 목적을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익은 천주교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보았지만, 신후담은 천주교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11]
신후담은 마테오 리치가 태극이나 리(理)의 궁극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 반박했다. 그는 상제와 태극의 관계를 성인과 도덕의 관계로 비유하며, 태극은 이치로서 자리가 없으므로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고 설명했다.[24]
신후담은 주자학을 배격하지 않으면서도 선진유학(先秦儒學)에 몰입하여 유교 경서를 통해 실천적 학문을 추구했다. 그는 유교 사상의 우월성을 확신하고 실학의 실천 방법을 정통 유학에서 찾았기 때문에 서양 문물 유입과 사회 변화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정도전의 《불씨잡변》을 읽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혼, 사후세계, 천당, 지옥론은 불교의 허위, 혹세무민, 협박과 같다고 보았다.
그는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성인과 현자의 글은 만 번 정도 읽어야 비로소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30]"고 하였다. 그는 최대한 많이 읽어야만 그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3. 1. 기독교 비판
신후담은 《하빈문집》, 《서학변》, 《상사신편》, 《역통의》, 《온릉지》 등의 저서를 통해 기독교(서학)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3. 1. 1. 기독교 비판의 원인
신후담은 자신의 저서인 《하빈문집》, 《서학변》, 《상사신편》, 《역통의》, 《온릉지》, 《내교》, 《유의》, 《소은》 등을 통해 기독교(서학)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3. 2. 영혼, 사후세계에 대한 비판
신후담은 영혼과 사후세계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의 작품들에서 이러한 관점을 찾기는 어려우며, 관련 자료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
3. 3. 영혼에 대한 관점
신후담과 관련된 영혼에 대한 관점은 전해지는 기록이나 설화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신후담이 등장하는 여러 문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3. 4. 태극과 도덕성의 개념
신후담은 초기에 스승 이익의 문하에서 서양의 신문물, 과학 문명, 서양 의술 정보를 접하였다. 그러나 이후 과학 문명, 의술 정보보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보를 접하면서 그리스도교 비판과 오류 비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각종 천주교 관련 서적 외에도 성서의 한자 번역본을 입수하여 내용을 분석했다.
《서학변》에서 신후담은 '서학이 유학의 정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당시 사회 윤리와 정치의 사상적 기반을 부정하는 것이며, 결국 한 문화의 뿌리를 뽑아놓겠다는 것이다.'라고 우려했다.[13] 공서파들은 천주교 포교가 갖는 정치적 함의에 매우 민감했다.[13]
신후담은 '그들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오로지 천상의 복일 뿐이다. ..... 이것은 윤리를 경멸하고 도리를 어기며 사사로운 이익을 찾는 데 머무르는 것이니, 어찌 심히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14]'라며 공리공담으로 평하였다. 이어 '오호라, 이른바 배운다는 사람이 지성(至誠)을 근본으로 삼지 않고 먼저 이익을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는 군자라고 할 수 없다.[14]'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를 사회를 부정하고 흔드는 게 목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도 편견이고,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편애라고 주장했다. 그는 "천주된 자가 널리 천하의 모든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 중에서 사사롭게 사랑함이 있어서 혹은 은총을 내려 주기도 하고 혹은 내리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우(公祐)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우(特祐)로서 천상의 참된 복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천주가 편벽되어 공평하지 못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15]
3. 5. 인신 동일론
안자경은 신후담이 기독교를 비판한 원인을 종교가 갖는 정치적 목적을 파악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이익이나 신후담, 안정복은 모두 천주교의 중심 교리인 원죄설, 천당지옥설, 처녀잉태설, 신 강림설, 예수부활설 등에 대해 비판적이었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익은 천주교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고 보며 이단에 대해서 허용적이고 호의적이었던 반면, 신후담과 안정복은 천주교를 공부하고 나서 천주교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는데, 이는 종교와 정치의 관련성에 대한 관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고 본다.[11] 한우근은 천주교에 대한 이익의 허용적 입장을 "현실적으로 국민의 생활이 ...... 극도의 곤궁에 달하게 되는 그 이유가 정치의 잘못에 있는 것이지 이단의 폐해 때문은 아니라"고 본 데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한다.[16] 이에 반해 신후담과 안정복은 철학이나 종교가 갖는 정치적 함의를 제대로 간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1]
3. 6. 창조론 비판
신후담은 천주교와 하느님 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서학변》에서 현실의 삶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사후세계를 논하는 것을 비판하고, 하느님만 믿으면 죄를 지어도 모든 죄가 사라지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17]
신후담은 그리스도교의 영혼불멸설이 사람들을 현혹하는 거짓 궤변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천주실의를 읽고 그리스도교 교리가 '천국, 지옥의 설로 사람들을 겁주어 유혹[17]'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천국과 지옥을 일종의 공갈, 협박으로 해석했다.
마테오 리치는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며 죽을 때 소멸하는 것은 신체의 혼일 뿐 백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신후담은 혼은 형체에 의지해 있는 것이고, 형체가 없어지면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라며 반박했다.[18]
신후담은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사후에 천당에 간다는 보장이 없으며, 하느님을 믿어야만 천당에 갈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영언려작의 서문에 나타난 '천상에 변함없이 있는 복'이란 개념이 사람이 죽은 뒤 영혼이 불멸하여 선한 사람이 천당에 오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19]
신후담은 천당과 지옥을 논하는 것을 공허한 공론으로 보았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그리스도교의 태도와 유교의 당당한 사생관을 대비시켰다.[20]
그는 사후세계가 현실을 망각하거나 현실에서 이탈하려는 행동이라고 보았다. 유교가 일상의 규범인 사친, 사군을 가르치는 반면, 천주교는 하늘의 복만을 추구하여 일상의 도리를 저버리게 한다고 비판했다.[21] 그는 사후에도 인간의 영혼이 지각능력이나 감각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그러한 기능이 없다면 천국과 지옥의 즐거움과 고통을 느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신후담은 천주교에서 인간의 영혼이 생혼과 각혼을 내포하고 있다가 죽은 뒤에는 영혼만 불멸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그는 생혼과 각혼을 쓰지 않으면 영혼이 불멸하더라도 소멸된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며, 혼의 가장 기본적 기능을 지각이나 의지로 보고 죽음과 더불어 혼의 기능이 정지된다고 보았다.[22] 또한 사후 세계의 실용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사후 세계와 천당, 지옥이 현실 생활에 어떠한 이익을 주는지 질문했다.
3. 7. 기독교와 불교 비교
그는 영혼은 육체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천주교에서 영혼은 인간의 바깥으로 드러난 형체의 모상인 외모가 아니라, 인간의 안에 존재하는 실체의 모상인 체모라고 한 데 대해, 신후담은 "형체가 있은 다음에 혼이 있는 것이지, 먼저 혼이 있고 이 혼의 모상에 의지하는 것이 형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여, 혼이 체모(體模)가 될 수 없다고 부정하였다.[23] 그는 영혼이 실제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이 죽으면 소멸하여 느낌, 자각을 할 수 있는가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혼이 신체적인 것을 초월한 존재로 보는 종교의 입장과 달리, 신체적인 것에 의존하는 존재라고 보는 성리학적 인식을 따른 것이다.[23]
사람이 먼저 태어남에는 먼저 형체가 있고 그 다음에 양기가 와서 붙어 혼이 된다고 하고, 혼은 형체의 기와 이질적인 실체가 아니라 기의 한 요소라고 하여, 혼의 독립적 실체성을 거부하였다.[22]
그는 영혼의 존재가 실체 규명이 불가능, 불분명하며 죽은 뒤에 혼은 흩어지고, 몸은 땅에 들어가 썩어서 소멸한다고 보았다. 신후담은 주역의 귀신생사설을 근거로 "사람이 태어남은 음(精)과 양(氣)가 모여서 개체를 이루고 죽게 되면 혼은 날아가고 백은 내려가서 흩어져 변하게 되니, 변하게 되면 존재하는 것도 없어진다.[19]"고 하였다. 따라서 사후에 어떤 자각을 하거나 느낀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영혼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다른 세계에 가서 복과 안녕을 누린다는 것은 허황된 공상으로 봤다.
3. 8. 이(理)의 존재에 대한 관점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에서 천주(하느님)를 유교 경전의 '상제'나 '천(하늘)'과 일치시키면서 송나라 성리학의 태극이나 리(理)의 궁극적 실재성을 부정하였다.[24]
신후담은 상제에게는 제사를 드리지만, 태극에게는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어, 태극이 만물의 시조가 될 수 없다는 마테오 리치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신후담은 "태극이란 그 이치는 실재 존재하지만 그 자리는 비어 있다. 상제가 하늘에서 주재하여 정해진 자리가 있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공경하는 의례를 베풀 수 있는 곳이 없다."고 하였다. 즉, 상제는 주재하는 역할과 하늘에 있는 자리를 갖추고 있지만, 태극은 이치로서 자리가 없으므로 '이치'(理)와 '자리'(位)라는 조건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24]
신후담은 상제(하늘)와 태극의 관계를 성인과 도덕의 관계로 비유하였다. 그는 "사람이 요, 순, 공자, 맹자를 높이는 것은 그 도덕이 높고 두텁기 때문이나, 도덕을 높이 받드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다."고 하였다.[24] 즉, 성인에게는 실제 자리가 있어 제사를 드리지만, 도덕은 자리가 없으니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24] 신후담은 태극과 도덕성은 존재하고 작용하지만, 모양이 정해진 어떤 형태, 형상화된 존재는 아니기에 태극과 도덕을 존경하거나 숭배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태극과 도덕 그 자체는 형태가 없지만, 도덕적인 인간은 존경받는다고 보았다. 그는 도덕성은 인간의 내면에서 작용하고 영향을 주지만, 도덕성이 그 자체로 어떤 형상을 하거나 스스로 움직여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덕, 도덕성이라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마테오 리치는 리(理)가 인심이나 사물에 있다는 것은 리가 사물의 뒤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사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하여, 리(理)를 사물의 속성으로 규정하였다.[25] 이에 대해 신후담은 "리와 사물은 애초에 기르고 나누어 두 가지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니, 이제 이것으로 理가 사물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옳지만, 만약 이 사물에 앞서서 이 사물이 되는 리가 없다고 하면, 이 사물이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랴?"라고 하여, 리는 사물에 내재하면서 사물의 존재 근원이라고 보았다.[25] 그는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도, 그 이전에 살던 인간에게는 도덕성과 판단력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이는 인간이 없어도 존재하는 개념이라고 보았다.
3. 9. 독서에 대한 관점
그는 태극의 허령불매(虛靈不昧)한 자기자각성으로서의 심(心)은 천지의 심이고 성인의 심이며, 이것이 상제라고 보았다. 이 심에서는 천(天)과 인(人)이 하나이다. 신후담은 서학(西學)이 인간과 신을 별개의 실체로 놓는 것은 이와 같은 인간 심의 허령한 본성을 간과하기 때문이라고 본다.[26]
아니마의 학문(천주교의 영혼론)은 심성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 아니며, 하늘과 사람이 꼭 맞아 들어가는 묘함을 살피지 못한 것이다.|아니마의 학문(천주교의 영혼론)은 심성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 아니며, 하늘과 사람이 꼭 맞아 들어가는 묘함을 살피지 못한 것이다.중국어 [26]
그는 인간의 마음이 곧 신의 마음이고 성인의 마음이며, 인간의 정신을 수양해야 되는 이유를 인간과 신이 동일한 존재라는 것에서 도출해냈다. 그는 젊어서 안정복을 만나 독서하는 방법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때 그는 "성인과 현자의 글은 만 번 정도 읽어야 비로소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30]"고 하였다.
그는 독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비유했다. "백 아름쯤 되는 나무를 베고자 한다면 반드시 큰 도끼로 찍은 다음에야 나무를 얻을 수 있다. 성현의 말이 담고 있는 의미와 이치는 큰 나무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다. 그러므로 반드시 많이 읽은 후에야 대략이나마 그 뜻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은 독서의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하고, 한두 번 대충 훑어본 다음 스스로 안다고 한다. 그러나 글의 참 뜻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자그마한 낫으로 큰 나무를 베다가 겨우 나무껍질을 벗겼을 뿐인데, 나무를 모두 베었다고 중단하는 것과 똑같은 행동이다.[30]" 그는 최대한 많이 읽어야만 그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3. 10.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에 대한 비판
그는 하느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는 구약성서의 내용이 허황되다고 비판했다. 신후담은 집이 저절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수가 제작해야 만들어지는 것처럼, 천지개벽도 이와 같은 비유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천지는 태극(眞)에 근원하고 음양(實)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자연의 생성질서를 반론으로 제시하였다.[27] 여기서 신후담은 상제(하느님)도 천지가 형성된 다음에 생겨나 주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사람이 태어난 다음에 육신을 주제하지만 마음이 육신을 제작할 수는 없는 것처럼, 하느님도 천지가 창조된 후에 나타나 세상을 주재하는 것이라고 비유하며 창조설을 거부하였다.[27]
3. 11. 교육에 대한 관점
신후담은 기독교가 영혼불멸론, 천국, 지옥을 불교와 동일하거나 불교의 아류로 보았다. 그는 천주교 교리에서 말하는 천당지옥설과 정령불멸설은 유교에는 없는 불교의 설이라 지적하였다. 그는 "천주교가 불교와 다른 것이 무엇인지, 우리 유교와 같은 것은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다.[28]"고 하였다. 그리스도교 비판에 앞서 그는 삼봉 정도전의 《불씨잡변》을 읽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영혼이나 사후세계, 천당 지옥론은 불교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허위, 혹세무민으로 보았다.
그는 그리스도교 자체가 '불교의 자질구레한 설을 주워 모아서 오히려 불교를 배척하는 명목을 삼으니, 마테오 리치 등은 유교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불교의 역적이다.[28]'라 하였다. 마테오 리치가 제시하는 천주교의 입장이 유교와 일치를 주장하지만 유교와 다르고, 불교를 배척하지만 불교와 같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천주교의 '천당지옥설'과 '영혼 불멸설'과 더불어 '동정을 지킴'과 '세속(세상)과 인연'을 끊음은 불교와 같고, 천주교에서 세상 사람을 교화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것은 불교의 '권선'(權善)과 같고, 천주교의 미사첨례는 불교의 정례(丁+貞禮)와 같고, 천주교에서 세간의 복락(福樂)을 버리고 산골짝에 은둔하여 수도하는 것은 불교의 출가와 같고, 천주교에서 죄를 뉘우치는 의례는 불교의 참죄와 같다고 하는 등, 천주교와 불교가 서로 유사한 점을 열거하였다. 그만큼 그는 천주교 교리의 전반적 성격을 불교와 동일시하였다.[28] 그는 현실에서 죄를 짓고도 처벌받지 않는 악인들이 처벌받지 않고 잘 먹고 잘사는 것은 분노할 일이지만, 죽어서 이들이 처벌받는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 못한다며 사회정의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신후담은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 "대부분이 불교의 남은 부스러기들을 본받아서 서술하였으니, 그 식견의 비루함이 불교보다 열등하다" 하고, "이런 설명들은 불교보다도 더더욱 천박하니 어찌 사람을 속일 만 하겠는가? 스스로 그 허황됨을 드러낼 따름이다."라고 하여, 천주교를 불교의 아류로서 불교보다 더욱 열등한 것이라고 규정하였다.[28] 일부 남인은 보유론을 주장하여, 기독교의 교리가 유교를 보완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남인 내 신후담과 그의 문하생들은 사후세계관, 천국, 지옥, 영혼의 존재 등은 불교나 미신, 혹세무민, 협박이라며 반박하였다.
줄리오 알레니는 서양의 초등교육, 중학교 과정, 고등학교 과정의 교육을 한자로 의역해서 동양에 소개하였다. 또한 대학교 과정을 설명, 의과 대학, 치과, 교육과, 윤리학과 등이 있다고 설명했다. 알레니가 치과(治科)라고 설명한 것은 치아 치과가 아닌 정치학, 행정학, 법학 등을 소개한 것이었다.
알레니는 직방외기를 통해 서양의 교육 제도를 설명했고, 신후담은 이 부분도 비판하였다. 신후담은 이런 서양의 교육 제도가 도덕적 교양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두는 교육과는 어긋난 것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32] 또, 의학이란 일종의 기술에 속하는 것으로, 다른 분야와 함께 논할 것이 아니라고도 지적하였다.[32]
3. 12. 여성, 아이 교육
그는 부인들과 어린아이들은 다루기가 어렵다고 했으나, 여성,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내교(內敎)》, 《유의(幼儀)》를 직접 지어 집안의 여성과 아이들을 직접 가르쳤다. 《내교(內敎)》와 《유의(幼儀)》는 《소학》을 참고로 하여 지었다.
3. 13. 복고적 원시유학
그는 젊어서 안정복을 만나 독서하는 방법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때 그는 "성인과 현자의 글은 만 번 정도 읽어야 비로소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30]"고 하였다.
예를 들면, 백 아름쯤 되는 나무를 베고자 한다면 반드시 큰 도끼로 찍은 다음에야 나무를 얻을 수 있다. 성현의 말이 담고 있는 의미와 이치는 큰 나무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다. 그러므로 반드시 많이 읽은 후에야 대략이나마 그 뜻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은 독서의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하고, 한두 번 대충 훑어본 다음 스스로 안다고 한다. 그러나 글의 참 뜻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자그마한 낫으로 큰 나무를 베다가 겨우 나무껍질을 벗겼을 뿐인데, 나무를 모두 베었다고 중단하는 것과 똑같은 행동이다.[30]"라고 하였다. 그는 최대한 많이 읽어봐야만 그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신후담은 주자학을 배격하지 않으면서도 주자를 넘어 복고적 선진유학(先秦儒學)에 몰입한 인물로, 유학 경서(經書)를 통해 실득(實得)을 발견하고 동시에 그것을 실천한다는 태도를 취했다는 점에서 한마디로 궁경실학자(窮經實學者)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주자의 우주관과 중화주의적 지리관(地理觀)을 부분적으로 수용, 고수하는 시각을 보였다. 그런가 하면 그는 유교 사상의 우월성을 확신하여 실학의 실천 방법을 정통유학에서 찾았기 때문에, 18세기 후반 서양 문물의 유입과 사회 변화에 대해서도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4. 영향력
그는 이익의 대를 이은 일세의 석학으로 많은 영향을 후세에 끼쳤는데, 특히 그의 서학서에 대한 비판은 장차 천주교에 대한 배척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1]
이황을 이은 남인의 맥은 허목을 거쳐 이익, 신후담, 안정복 등으로 이어졌었다.[12] 신후담은 인간과 천주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인간이 천주를 알 수 없다고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천주에 대한 불가지성(또는 불가시성)을 주장하면서도 그들 자신만은 하느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설파한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보았다.[31] 그는 이러한 기독교의 교리를 오만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다른 지역의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인간의 지혜가 신에 미칠 수 없으므로 다 인간의 헛된 생각이고 미신일 뿐이라고 간주하면서, 유독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서만 하느님을 바로 안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독한 독단이며 자기모순이라는 것이다.[31]
眞光|진광중국어(초자연의 빛)은 리(理) 위에 있다고 이미 말하니 리로써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리로 따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어떻게 그것의 유무를 증험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의 말대로 사람의 지견(知見)이 미치지 않는 것이라면 서양 선비들도 틀림없이 사람이어서 그 알지 못하기는 분명히 우리와 마찬가지일 텐데, 오히려 억지로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리로 따질 수 없는 것은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것일 텐데, 입으로는 말하고 글로 써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설을 믿게 하고 그 도를 따르고자 원하니, 그 역시 딱한 일이다.[31]
유교 외에도 불교나 도교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으며 어느 한가지 만이 진리는 아니라는 허목의 보편적 진리 사상 측면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구원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또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복을 찾는다는 것도 허황된 생각으로 보았다. 자칫 현실문제를 회피, 외면하는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도 봤다.
5. 평가
신후담은 근기(近畿) 지역에 거주하면서 평생 학문 탐구에 힘써 18세기 문학, 사상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현실적인 좌절과 몸이 아픈 어려움을 이겨내고 20대 초반부터 꾸준히 학문에 매진하여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으며, 1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한국 문학, 사상사에서 손꼽히는 다독가이자 저술가 중 한 명으로, 현재 100여 권 중 절반 정도의 저술이 남아 있다.
향산 이만도는 신후담이 인륜을 저버린 예수를 물리쳤다며, 앞을 내다보는 안목과 도를 지킨 공로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만도는 "저 야소(예수)가 인륜을 저버린 것과 이마두(마테오 리치)가 이치를 그르친 것은 진실로 대중을 미혹시키기에 부족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괴상망측하기 때문에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 항상 그 해독에 걸려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하늘의 벌이 아직 내려지기 전에 공(신후담)이 홀로 변론하여 물리쳤으니, 공이 앞을 내다본 안목과 도를 지킨 공로가 또한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6. 저서
(저서 관련 내용 없음)
7.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기타 |
|---|---|---|
| 친할아버지 | 신지일(慎之逸) | 1653년 ~ 1703년 12월 16일, 신구중의 생부, 신승복의 7대손 |
| 친할머니 | 교하노씨(交河盧氏) | ? ~ ?년 4월 25일, 노필득(盧必得)의 딸 |
| 백부 | 신만적(慎萬迪) | |
| 중부 | 신만길(慎萬吉) | |
| 숙부 | 신만중(慎萬重) | |
| 양할아버지 | 신휘오(慎徽五) | 1660년 10월 20일 ~ 1716년 5월 18일, 신구중의 양부, 신승복의 동생 신승선의 7대손 |
| 양할머니 | 파평윤씨(坡平尹氏) | 1654년 7월 15일 ~ 1696년 4월 15일, 통덕랑 윤횡의 딸 |
| 양할머니 | 전주이씨(全州李氏) | 1680년 10월 20일 ~ 1756년 1월 29일, 이대년(李大年)의 딸 |
| 양고모부 | 최시걸(崔時傑) | 강릉인 |
| 아버지 | 신구중(慎九重) | 1682년 11월 10일 ~ 1744년 7월 27일 |
| 어머니 | 우계 이씨(羽溪李氏) | 1681년 3월 20일 ~ 1760년 4월 9일 |
| 동생 | 신후팽(慎後彭) | |
| 동생 | 신후은(慎後恩) | 초명 신후함(愼後咸), 1715년 - ? |
| 부인 | 동복오씨(同福吳氏) | 1699년 5월 29일 ~ ?년 7월 21일, 오상억(吳尙億)의 딸, 오정원 증손녀 |
| 아들 | 신려(慎儷) | 1730년 5월 10일 ~ 1804년 3월 7일 |
| 며느리 | 전주이씨 | ? ~ 1819년 4월, 이기홍(李基弘)의 딸 |
| 손자 | 신세사(慎世師) | 1749년 ~ ?년 11월 6일 |
| 손부 | 문화류씨 | ? ~ ?년 2월 15일, 류잠의 8대손 백화암 류박(百花庵 柳璞)의 딸 |
| 부인 | 경주정씨(慶州鄭氏) | ? ~ ?년 1월 1일, 정일(鄭鎰)의 딸 |
| 아들 | 신풍(慎?) | |
| 아들 | 신승(慎昇) | 1748년 ~ ? |
| 아들 | 신신(慎信) | 1749년 ~ 1837년 1월 1일 |
| 며느리 | 창녕성씨 | ? ~ ?년 4월 6일, 생원 성일주(成日柱)의 딸 |
| 사위 | 정광성(鄭光星) | |
| 사위 | 조삼규(趙參逵) | |
| 외할아버지 | 이정관(李正觀) | 1655년 ~ 1705년 |
| 외삼촌 | 이번(李番) | |
| 외삼촌 | 이내(李來+田) | |
| 외삼촌 | 이색(李嗇) |
참조
[1]
웹사이트
신후담:마리아사랑넷
http://mariasarang.n[...]
[2]
문서
승정워일기 영조 15년 기미(1739) 3월 14일(경신) 17번째 기사, 소대를 행하여 이세필의 〈왕조례〉에 관하여 논의하고 《대학연의보》를 진강하였다
[3]
서적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4]
서적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5]
서적
주머니 속의 한국사
가람기획
2003
[6]
문서
승정원일기 영조 15년 기미(1739) 3월 14일(경신) 12번째기사, "신귀중을 군직에 붙이고 대령하게 하라는 전교"
[7]
문서
승정원일기 영조 15년 기미(1739) 3월 14일(경신) 17번째기사, "소대를 행하여 이세필의 〈왕조례〉에 관하여 논의하고 《대학연의보》를 진강하였다"
[8]
문서
영조실록 영조 18년 임술(1742) 6월 28일(을묘) 3번째 기사, "이익정이 단경 왕후가 가례를 올린 데에 대해 아뢰다"
[9]
문서
영조실록 62권, 1745년(영조 21년, 청 건륭 10년) 11월 3일 경오 4번째기사, "숙장문에 나아가 권두령, 이용발, 신후담, 신후함 등을 국문하다"
[10]
서적
한국 철학의 맥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
[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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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학사
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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