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문 (17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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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석문은 1713년에 태어나 1773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1739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으며, 평안도 추파진 권관 재직 중 백성의 횡포를 보고 벼슬을 버렸다.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는 임오화변 때 세손을 보호하려다 영조의 명을 거부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채제공의 추천으로 훈련원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사후 여러 차례 증직되었으며, 그의 집은 응와종택으로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석문은 1713년(숙종 39년) 10월 10일 경상북도 성주군 유동방 대포리(현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에서 태어났다. 호는 돈재, 별호는 북비이다. 선조들은 대대로 성주읍내에 거주하였으나, 1721년(경종 1년) 아버지 이이신이 대산리 내 현재의 응와종택 주변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거주하게 됐다.[1]
이석문은 1773년 10월 경상북도 개령(開寧) 부이역(扶桑驛) 백련암(白蓮庵) (현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부상리) 왼쪽 산기슭 동쪽 언덕에 묻혔다. 묘비문은 운곡 이의발(雲谷 李羲發)이 작성했다.[1]
2. 생애
1739년(영조 15년) 권무과와 정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744년 3월 1일 춘삼삭 능마아강 시강에 불참하여 병조의 탄핵을 받았다. 김상로, 홍계희 등이 그를 만나보려 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이 일로 평안도 강계군 추파진 권관으로 발령되었다. 추파진 권관 재직 중 직속상관의 횡포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1]
1750년(영조 26년) 무신 겸 선전관에 제수되었다가 삼수진 신방구비만호로 승진했다. 그해 사도세자의 발탁으로 어모장군 행무신겸 선전관에 기용되었고[1], 금부도사가 되었다. 1756년 3월 12일 강계군 추파진만호로 임명되었고, 김상로, 홍계희 등이 병마절도사직을 제의했으나 거절했다. 이후 선략장군 행군자감주부로 강등되었다.[2]
1762년(영조 38년) 음력 윤 5월 13일,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자, 이석문은 어린 세손을 돕고자 입궐하려 했으나 수문장들이 저지했다. 이석문은 세손을 등에 업고 수문장들을 밀친 뒤 세손을 궁으로 들여보냈다. 세손은 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3]
영조는 이석문에게 뒤주에 큰 돌을 올리라고 명했으나, 이석문은 죽더라도 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1762년 5월 14일, 이석문은 삭탈관직 당하고 의금부로 끌려가 곤장 50대를 맞고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 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지어 바치고 낙향하였다.[3]
이후 북비라 하는 집에 은거하며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읽었다.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뜻에서 여닫이 문을 북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1770년(영조 46년) 채제공의 건의로 훈련원주부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죽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성주군 유동방(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421번지)에 집을 짓고 북쪽 방향으로 사립문을 냈다.[1]
1773년 한개마을 정침에서 사망하자, 채제공은 직접 경상도 감영을 찾아 그의 장례식을 지원했다. 1795년(정조 19년) 손자 이규진이 성균관 제과에 선발되자 정조는 이규진을 만나 '너의 조부가 세운 공이 가상하다 아직까지 너의 집에 북녘으로 낸 문이 있느냐'며 북비 대문의 일을 물어보았다.[1]
2. 1. 어린 시절
이석문은 1713년(숙종 39년) 10월 10일 경상북도 성주군 유동방 대포리(大浦里, 현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에서 아버지 이이신(李爾紳)과 첨사 송원기의 딸 야성송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는 돈재, 별호는 북비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월봉 이정현(月峯 李廷賢)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통덕랑을 역임한 이수성(李壽星)이며, 할아버지는 이달한(李達漢)이다.[1]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성주읍내에 거주하였다. 그러다 성주읍내에 역참이 들어서고 말과 역을 관리하는 중인들이 모여들자, 양반이 살 곳이 못된다며 대산리로 이주했다. 1721년(경종 1년)에 아버지 이이신이 대산리 내 현재의 응와종택 주변으로 이주하여, 이후 그곳에서 거주하게 됐다. 그의 집 건너편에는 옥구현감, 이조좌랑, 이조정랑, 사헌부 관원, 영해부사(寧海府使) 등을 역임한 사촌 이석구(李碩九)가 있었다. 사촌 이석구는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학파 학자의 문인이었으나 뒤에 노론으로 당을 바꾸었다.[1]
일찍이 전양군 이익필(全陽君 李益馝)이 이석문의 재주를 높이 사 그를 추천하였다.[1]
2. 2.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1739년(영조 15년) 권무과(勸武科)에 급제하고, 그해 정시 무과(庭試武科)에 병과(丙科) 22위로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1742년(영조 18년) 부장(部將)이 되었다가 1744년 3월 1일 춘삼삭 능마아강(能麽兒講) 시강(試講)에 불참하여 병조의 탄핵을 받았다. 같은 해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1747년 다시 부장(部將)에 임명되었다. 김상로, 홍계희 등이 그를 만나보려 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이 일로 평안도 강계군 추파진(楸坡鎭) 권관으로 발령되었다.
추파진 권관 재직 중 직속상관인 평안도 병마절도사와 안주진관 병마사가 공물로 바칠 인삼을 채취한다는 핑계로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리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1750년(영조 26년) 1월 무신 겸 선전관(武臣兼宣傳官)에 특별 제수되었다가, 같은 해 4월 삼수진(三水鎭) 신방구비만호(神方仇非萬戶)로 승진하여 변방으로 갔다. 그해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에게 특별 발탁되어 어모장군 행무신겸 선전관에 기용되었고[1], 금부도사가 되었다.
1756년 3월 12일 강계군 추파진만호(楸坡鎭萬戶)로 임명되어 그해 4월 28일 다시 변방으로 발령받았다. 이때 김상로, 홍계희 등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시의(時議)를 따르면 병마절도사직을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그는 "나는 영남에 사는 사람이라 시의같은 것은 알지 못한다."라며 거절했다.
이후 선략장군 행군자감주부로 강등되었다.[2] 강등 원인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2. 3. 임오화변과 항거
1762년(영조 38년) 음력 윤 5월 13일,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 명하자, 이석문은 어린 세손(훗날의 정조)을 돕고자 입궐하려 했으나 수문장들이 저지했다. 같은 날 설서 권정침과 사서 임성도 세손을 모시고 궁에 들어가려 했으나 수문장에게 거절당했다. 이석문은 세손을 등에 업고 수문장들을 밀친 뒤 세손을 궁으로 들여보냈다. 세손은 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때 권정침, 이이장, 임성, 윤숙, 임덕제 등이 땅에 머리를 찧고 울며 세자의 억울함을 호소했다.[3] 영조는 분노하여 권정침을 참형에 처하려 했으나, 이석문은 선전관 홍화보와 함께 이를 의로운 행동으로 여겨 왕명을 거부했다.[3]
어린 세손은 곧 끌려나갔고, 이석문은 엎드려 울며 물러나지 않았다. 영조는 이석문에게 뒤주에 큰 돌을 올리라고 명했으나, 이석문은 죽더라도 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1762년 5월 14일, 이석문은 삭탈관직 당하고 의금부로 끌려갔다. 영조는 의금부에서 직접 이석문을 국문한 뒤 곤장 50대를 가하고 도성 밖으로 쫓아냈다. 이 일로 이석문은 모든 벼슬살이 도구를 버리고,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지어 바치고 낙향하였다.
2. 4. 은퇴와 만년
그는 북비라 하는 집에 은거하였다. 벽에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붙이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소리내어 읽었다. 사촌 이석구가 건너편에 살았는데, 훗날 김상로, 홍계희 무리가 이석구의 집을 방문할 때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가자 이들을 피하고자 문을 뜯어 북쪽으로 여닫이문을 냈다고도 하고,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뜻에서 여닫이 문을 북쪽으로 옮겼다고도 한다. 어느 무관들이 홍인한, 정후겸과 친분이 있음을 자랑하자, 그는 이들을 도둑이라며 일축하고 내쫓았다. 그는 한개마을 서쪽 시냇가에 집을 짓고 돈재라 하였으며, 물을 끌어와 연못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다.[1]
1770년(영조 46년) 채제공이 병조판서에 등용되자 채제공의 건의로 영조는 그를 다시 훈련원주부로 임명하고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뜻을 굳게 가져야 하는데 뜻이 구차하게 굴복된다면 무엇이 그 사람에게 귀하겠습니까? 나는 태평한 시대에 살면서 무공도 세우지 못하였고 사헌부를 드나들며 간신을 베어 대의를 밝히기를 청하지도 못했으니 저의 뜻은 끝내 펼 수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초야에 묻혀 편안히 쉬면서 유유자적하겠습니다'라며 거절하였다. 영조는 병조판서 채제공, 이지억 등을 통해 여러번 편지를 보내, 한성에 올라오면 승진을 약속했지만 그는 모두 거절하였다.[1]
그는 죽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성주군 유동방(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421번지)에 집을 짓고 북쪽 방향으로 사립문을 냈다. 그는 무괴심(無愧心),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이라는 글을 짓고 평생 은거하였다. 만년에 그는 북쪽으로 옮긴 문을 향해 절하며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1]
1773년 한개마을 정침에서 사망하자, 채제공은 직접 경상도 감영을 찾아 그의 장례식을 지원하고, 수백 명의 인파가 문상하였다. 후에 1795년(정조 19년) 그의 손자 이규진이 성균관의 제과에 선발되자 정조는 이규진을 특별히 불러 입시하게 하고, 직접 이규진을 만나 '너의 조부가 세운 공이 가상하다 아직까지 너의 집에 북녘으로 낸 문이 있느냐'며 북비 대문의 일을 물어보았다.[1]
3. 사후
이후 의정부영의정 채제공이 경연에서 북비의 존재를 수소문했고, 정조는 성균관 시험에 합격한 이석문의 손자 이규진을 특별히 불러 북비에 대한 사연을 묻고 주자백서선(朱子書百選)을 상으로 내렸다.[1]
1899년(광무 3년) 고종은 이석문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성주군수를 보내 그의 가묘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6대손 이기진(基澈)에게 특별히 효릉참봉직을 제수하였다.[1]
3. 1. 추증과 가증
1849년(헌종 15년) 음력 윤 4월 13일 훈련원정에 증 어모장군으로 증직되었다.[1] 1865년(고종 2년) 1월 30일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고,[1] 1871년(고종 8년) 1월 13일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다시 추증되었다.[1] 같은 해 1월 병조참판 겸 의금부동지사 훈련원도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1]
3. 2. 문화재 지정
1774년(영조 50년) 후손들이 이석문이 성주 대산리에 지은 집을 개축했고, 1821년(순조 21) 사헌부장령 이규진이 정침과 사랑채를 새로 짓고 북비문 안쪽 맞배집을 서재로 고쳤다. 이 집은 후대에 응와종택이라는 이름으로 1983년 6월 20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1] 이석문의 집인 북비고택, 증손 이원조 고택, 사촌 대산동 교리댁 등이 있는 한개마을은 대한민국 시대에 민속마을이자 국가민속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되었다.[1]
3. 3. 신도비 건립
1909년(융희 3) 10월에 후손들이 돈재고택 근처에 신도비인 돈재이공신도비를 세웠다. 신도비문은 면우(俛宇) 곽종석이 지었고, 글씨는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썼다.
참조
[1]
문서
그의 어모장군 임명 교지를 비롯, 그의 집안 교지는 후손들이 보존,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에서 소장하다가 후일 한국학진흥원에 기증되었다.
[2]
문서
1750년(영조 26) 1월의 교지에는 어모장군 무신겸선전관에 임명되었으나, 1849년 윤4월, 헌종이 내린 교지에는 선략장군 행훈련원 주부 이석문을 어모장군 훈련원정으로 추증한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날짜는 불확실하나 어느 시점에 강등된 것으로 추정된다.
[3]
서적
수당집 (修堂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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