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창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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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수창(1929-2013)은 의성 출신의 화가로, 일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후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경주예술학교에서 손일봉을 사사했다. 안동사범학교와 안동교육대학, 안동대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국내외에서 여러 차례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의 화풍은 '닦아내기' 기법과 투명, 불투명을 넘나드는 필선을 특징으로 하며, 특히 노년기에는 안동 도산면 가송리 풍경을 그린 '녀던길' 시리즈를 통해 '예인으로서의 학(學)'이라는 부제를 얻었다. 그는 지역 화단의 토대를 다졌으며, 1985년 국민훈장 목련장, 1994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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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창 (화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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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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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수창 |
출생일 | 1929년 2월 9일 |
사망일 | 2013년 6월 24일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화가, 교수 |
분야 | 서양화 |
학력 | 1948년 경주예술학교 1회 졸업 1966년 서라벌예술대학 미술학 1979년 계명대학교 대학원 미술학 석사 |
주요 작품 | 퇴계오솔길 연작 |
웹사이트 | 이수창 공식 웹사이트 |
출생과 사망 | |
출생지 | 경상북도 의성군 (일제강점기 한국) |
2. 생애
이수창(1929~2013)은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광복 후 귀국하여 18세에 경주예술학교에 입학하여 화가 손일봉에게 그림을 배웠다.[3][5] 학창 시절에는 동기생인 박기태와 교류하며 함께 작가의 길을 준비했다.[5]
1954년 안동사범학교 교사로 부임하며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3][5] 1962년 학교 폐교 후 잠시 대구 경북고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1965년 안동교육대학(현 안동대학교)이 설립되면서 교수로 부임하여 정년까지 후학 양성에 힘썼다.[3][5]
화가로서는 국내에서 4회, 해외에서 5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5] 특히 1981년부터 2년간 일본 쓰쿠바 대학 교환교수 및 도쿄 예술대학 객원교수로 재직하며 5차례의 개인전을 여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5] 노년기에는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풍경을 담은 '녀던길' 연작을 발표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5] 2013년 세상을 떠났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이수창은 1929년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은 누나가 살던 일본에서 보냈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미술학교 진학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아 귀국했다. 18세가 되던 해, 남한 최초로 설립된 경주예술학교에 입학하여 평소 존경하던 화가 손일봉에게 그림을 배웠다.[3]학창 시절에는 동기생인 박기태와 함께 사생을 다니는 등 예술가로서의 길을 함께 준비했으며, 작품에 대한 생각과 기법을 공유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스승 손일봉의 화풍과 예술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아, 자연의 겉모습보다는 본질을 중요하게 여기고 수채화를 주요 표현 방식으로 삼는 등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려 노력했다.
박기태에 이어 1954년 안동사범학교 미술 교사로 부임하며 안동과 인연을 맺었다. 1962년 안동사범학교가 폐교되자 잠시 대구 경북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겼으나, 1965년 안동교육대학이 설립되면서 교수로 다시 안동으로 돌아왔다. 이후 안동대학교 등에서도 미술 교육자로 활동했다.[3]
2. 2. 교육 및 작품 활동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술학교 진학을 준비하던 중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5] 18세에 남한 최초로 설립된 경주예술학교에 입학하여 평소 존경하던 화가 손일봉에게 가르침을 받았다.[5] 학창 시절에는 동기생인 박기태와 함께 사생을 다니며 작가로서의 길을 함께 준비했다.[5] 이수창은 스승 손일봉의 회화론, 특히 자연의 외관보다 실체를 중시하고 수채화를 주요 방법론으로 삼는 점을 따르고자 노력했다.[5]1954년, 박기태에 이어 안동사범학교 교사로 부임하며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3][5] 1962년 안동사범학교가 폐교되자 잠시 대구 경북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가, 1965년 안동교육대학(현 안동대학교 예술체육대학 미술학과)이 설립되면서 교수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했다.[5] 또한 김미숙, 권영호, 유시원, 박기태, 이상길 등 지역 화가들과 함께 미술 그룹 "향미회"를 공동으로 창립하여 활동했다.[3]
화가로서 이수창은 국내에서 4회, 해외에서 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5] 특히 해외 전시는 1981년부터 2년간 일본 쯔꾸바 대학(梵波大學) 교환교수 및 동경예술대 객원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 집중적으로 개최되었다.[5] 이 시기(1982년~1983년)에 한국문화원, 도쿄의 서긴자화랑 등에서 다섯 차례 전시를 열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5]
그의 화풍은 초기에는 스승 손일봉의 영향 아래 투명과 불투명 기법을 가리지 않고 재질감까지 활용하는 특징을 보였다.[5] 그러나 1980년대 초 일본 객원교수 시절에는 투명 수채화 기법에 더 집중하며 변화를 보였다.[5] 미술평론가 서성록은 이 시기 화풍이 이전보다 현대적(모던)해졌으며, 붓을 가볍게 사용하여 색감이 풍부해지고 세부 묘사가 꼼꼼해지는 등 기법상의 변화가 나타났다고 평가했다.[5]
1994년 2월 25일에는 화집을 발간하며, 교직과 화업을 병행하는 것에 대한 오랜 마음고생을 겸손하게 토로하기도 했다.[5] 그는 화집 서문에서 "화집을 낼만한 그림은 되지 못하고 내어야할 나이만 되었다"며, 교단을 떠나면서 비로소 작품 활동에 전념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5]
노년기에는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풍경을 그린 '녀던길' 연작을 제작했는데, 이는 그의 수채 풍경화 중 백미로 꼽힌다.[5] 2000년대에 들어 70대의 나이로 500년 전 유학자 퇴계 이황의 발자취가 남은 가송리 풍광을 그리며, 선비다운 정신을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었다.[5] 이 연작은 '예인으로서의 학(學)'이라는 부제를 얻으며 그림을 통해 인문학적 성과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5] 서성록은 이수창 회화의 핵심을 '관조의 정신'으로 보았으며, 이는 단순히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 자연과 감응하고 정신세계와 융합되는 깊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해석했다.[5] 그의 풍경화는 단순한 묘사를 넘어선 직관적인 표현으로, 진경산수화의 현대적 변용이라는 평가도 받는다.[5]
2. 3. 녀던길 시리즈와 예술적 성취
이수창의 예술 세계는 특히 1980년대 초 일본에서의 활동과 노년기의 '녀던길' 시리즈에서 두드러진 성취를 보여준다. 1981년부터 2년간 일본 쓰쿠바 대학 교환교수 및 도쿄 예술대학 객원교수로 재직하며 다섯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 시기는 이수창에게 가장 왕성한 창작 활동기였다. 미술평론가 서성록은 이 시기 이수창의 화풍이 투명 수채화 기법에 더 집중하면서 이전보다 모던해졌다고 평가했다. 기존에 붓을 눌러 채색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붓을 가볍게 튕기듯 사용하는 기법상의 변화를 보였고 색감은 더욱 풍부해졌으며 세부 묘사도 꼼꼼해졌다. 형태의 윤곽과 세부 처리가 명확해지고 세필을 활용한 기교가 늘어난 점 역시 긍정적인 변화로 평가받았다.[5]1994년 2월 25일에는 화집을 발간하며 그간의 작업을 정리했다. 그는 화집 서문에서 교직과 화업을 병행하며 어느 한쪽에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고, 교단을 떠나 화업에 더욱 전념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는 주로 밤 시간을 활용해 작업했으며, 밤의 고요함 속에서 창작에 몰두하는 것을 선호했다.
노년기에 접어들어 제작한 '녀던길' 시리즈는 이수창 수채 풍경화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2000년대에 들어 70대의 화가는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의 풍경을 그렸는데, 이는 500년 전 그곳을 거닐었던 유학자 퇴계 이황의 발자취를 따르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시리즈는 이수창이 선비 정신을 흠모하고 이를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예인으로서의 학(學)'이라는 부제가 붙기도 했으며, 그림을 통해 인문학적 성찰을 담아낸 성과로 평가된다. '녀던길' 시리즈에서는 이전의 격정적이고 분방했던 필선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성인의 뒷모습처럼 이상향으로 관객을 인도하려는 듯한 염원이 담겨 있다. 자연의 모습이 감상자의 인성에 스며드는 듯한 경험을 제공하는데, 이는 현란한 묘사가 아닌 생기 넘치는 본질, 즉 작가의 직관을 통해 포착된 풍경이다. 이러한 이수창만의 독특한 풍경 해석은 진경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시도라고도 볼 수 있다. 서성록은 이수창 회화의 근간을 '관조의 정신'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단순히 눈을 즐겁게 하는 표면적인 감상이 아니라 자연과 깊이 교감하고, 그것이 작가의 정신세계와 하나로 통합되는 경지를 의미한다.[5]
이수창 스스로도 예술에 대한 신념을 글로 남겼다. 그는 "최고의 예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언제 어디서든, 걸작으로 칭송받는 모든 예술 작품은 두 가지 공통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예술 작품과 그 내용에 대한 예술가의 태도가 꾸준히 근면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술가의 생각이 감상자에게 명확하게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3]
이러한 생각은 그의 예술 세계 전반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즉, 작품을 대하는 예술가의 성실하고 꾸준한 태도('근면함')와 작품이 감상자에게 불러일으키는 의미 있는 울림('의미 있는 반응')을 평생에 걸쳐 강조한 것이다.[3]
3. 기법
이수창 회화의 주요 기법적 특징은 '닦아내기'와 리듬감 있는 필선 운용이다.[5] 이는 그의 독창적 화풍의 기반이 된다. 그는 수채화 재료의 한계를 넘어 표현을 추구했으며, 이는 '자보루지'나 '와트만지' 같은 특정 화지 선택과도 연관된다.[5]
그의 기법은 자연의 본질, 즉 '진경성(眞景性)'을 포착하려는 노력과 연결된다.[5] 평론가 서성록은 이를 '무인산수' 등으로 평가했으며[5], 작가 스스로도 보이는 사실 너머의 진실성을 중요시했다.[5] 강렬한 표현주의적 외곽선과 필력을 중시하는 화풍 또한 특징적이며[5], 이는 '안동수채화'의 맥락과도 닿아있다.[5] 비교적 큰 규격의 종이를 선호하여 힘 있는 화면을 구성하고, 대상의 '묘사'보다 '느낌' 전달에 집중했다.[5] 이는 예술가의 "근면함"과 작품을 통한 "의미 있는 반응"을 추구한 그의 예술 철학과도 연결된다.[3]
3. 1. 닦아내기 기법과 재료의 활용
이수창 예술의 두드러진 기법적 특징은 ‘닦아내기’ 방법과 투명·불투명을 넘나들며 리듬을 만들어내는 필선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그의 회화 곳곳에 스며들어 독창적인 화법을 형성한다. 이는 그가 즐겨 사용했던 화지(畫紙)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90년대 이전까지는 주로 '자보루지'와 '와트만지'를 사용했다. '자보루지'는 한 면에 붉은 기운이 도는 마분지의 일종으로, 중성지(中性紙)여서 불투명 화법에 적합했다. 이 종이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화가 권진호의 작품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 '와트만지'는 가장 두꺼운 종류로, 최소 300g 이상의 황목지(荒木紙)를 사용했다.그의 특징적인 '닦아내기' 기법은 향토색 짙은 소재를 다룬 작품들에서 잘 나타난다.
작품명 | 크기 | 제작 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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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종가 | 91cmx73cm | 1987년 |
고택녹은(古宅綠隱) | 91cmx73cm | 1988년 |
충효당 | 75.5cmx57cm | 1990년 |
탑골의 봄 | 90.5cmx73cm | 1990년 |
이러한 방법은 사물의 효과를 극대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수창만의 독자적인 화법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고택 풍경은 단순히 건물의 외형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사유(思惟)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수창은 지역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토포그래피적인 접근 방식을 터득했으며, 소재와 제재(題材)를 신중하게 선택함으로써 지역에 대한 애정을 작품에 담아냈다. 이러한 점은 진경정신을 수채화로 구현하려는 시도로 연결되며, 안동이라는 지역의 유교적 풍토와 자연환경이 그의 물그림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평론가 서성록은 이수창의 그림에 대해 '무인산수(無人山水)'라고 평했다. 그림 속에 점경인물(點景人物) 하나 없지만, 화면 밖에서 그 풍경을 마주한 화가의 경외감이 느껴진다는 의미이다. 서성록은 이수창의 화론에서 그가 부분보다는 전체를 강조하고 세밀한 기교(細技)를 배척하는 경향을 진경성(眞景性)의 추구로 보았다. 또한 서양화의 기본적인 틀인 사실성에서 다소 벗어나 있지만, 이를 서양화를 동양화의 수법으로 해소한 것으로 이해했다. 즉, 이수창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사실의 진실성'이 아니라 '자연의 진실성', 바로 '진경성'의 추구였던 것이다. 이수창 자신도 "자연 속에 내재된 추상을 끄집어내는 것이 구상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회화론을 밝힌 바 있다.
이수창의 창조성은 수채라는 재료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이를 통해 독자적인 회화 세계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의 작품에서는 투명과 불투명의 경계가 허물어져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특히 초창기 야수파적 화풍에서는 자보루지라는 재질 위에 강렬한 붓놀림으로 형태의 본질만을 구축했으며, 세부 묘사를 생략한 귀납적 표현이 두드러진다. 이는 재료의 물성이나 화면 효과에 치중하는 '화면중심 화풍'과는 달리, 작가의 기질과 필력을 중시하는 '필력중심 화풍'에 해당한다. 이러한 경향은 소위 '안동수채화'라고 불리는 양식적 특징과도 연결된다. 화가 손일봉이 "최고의 기교란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듯이, 기교가 겉으로 드러나기보다는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야 한다는 관점과 상통한다.
이수창의 풍경화에서 나타나는 형태를 둘러싼 외곽선은 표현주의적인 효과와 더불어 단번에 그은 듯한 강렬함을 선사한다. 이러한 선의 느낌은 그의 친구였던 화가 박기태가 자신의 작품에 응용했다고 두 사람의 제자인 조광래는 회고했다. 박기태는 1970년대 후반부터 인물화에서 엄격했던 형태감을 날렵한 선으로 풀어내기 시작했으며, 이는 한국 수채화, 특히 인물화 분야에서 개성적인 기법으로 자리 잡았다.
작품의 크기 면에서도 이수창은 수채화로서는 비교적 큰 91cmx73cm(유화 캔버스 30호 F형 크기) 규격의 종이를 즐겨 사용했다. 그는 이 크기를 가장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규격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작품에 시원스러운 느낌을 더하는 요인이 되었다. 1994년 '안동미술협회전'에 출품했던 전지(全紙) 규격의 풍경화는 당시 전시장의 다른 유화 작품들을 압도할 만큼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감상평은 "굵은 터치와 맑은 색조. 호기 넘치는 하늘의 파노라마. 역광 속에 녹아있는 탁색의 정감. 절제된 바다의 호수 같은 표정. 아, 필력의 후련함!"과 같았다. 이수창의 화면은 거친 선들로 가득 차 율동감을 주지만, 그 무질서함 속에서도 질서정연함이 느껴지는 역설적인 특징을 지닌다. 그는 세밀한 '묘사'를 거부하는 대신 대상에서 받은 '느낌'을 포착하는 데 집중한다. 아무리 복잡하게 아른거리는 물결이라도 몇 개의 둔탁한 선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으며, 이는 서성록이 언급한 '진경'의 경지와 맞닿아 있다.[5]
이수창은 자신의 글에서 걸작의 요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3]
: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언제 어디서든, 걸작으로 칭송받는 모든 예술 작품은 두 가지 공통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예술 작품과 그 내용에 대한 예술가의 태도가 꾸준히 근면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술가의 생각이 감상자에게 명확하게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3]
이러한 생각, 즉 예술가의 "근면함"과 작품을 통한 "의미 있는 반응"의 추구는 이수창의 예술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가치로 평가된다.[3]
3. 2. 진경성의 추구
평론가 서성록은 이수창의 그림에 점경인물이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화면 밖에서 그 풍경을 마주한 화가의 경외감이 느껴진다고 평가하며 이를 '무인산수'라고 불렀다. 서성록은 이수창의 화론에서 그가 세부적인 부분보다는 전체적인 구도에 중점을 두고 세밀한 기교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경향을 '진경성(眞景性)'의 추구라고 해석했다. 또한 그의 작품이 서양화의 기본적인 틀인 사실주의에서 다소 벗어나 있지만, 이는 서양화 기법을 동양화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결과라고 이해했다. 이수창 스스로도 중요하게 여긴 것은 '사실의 정확한 재현'이 아니라 '자연 본연의 모습', 즉 '진경성'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자연을 겸허하게 바라보고자 합니다. 산의 능선, 나뭇가지, 풀잎 하나하나의 형상에는 자연의 법칙이 내재되어 있다고 봅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이러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려고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자연 형상을 변형, 왜곡시킬 때는 조형적인 필연성이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라고 덧붙였다. 그의 회화 철학은 "자연 속에 내재된 추상을 끄집어내는 것이 구상이다."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이러한 진경성에 대한 추구는 그의 독특한 기법과 재료 선택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수채 물감이라는 재료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투명함과 불투명함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깊이 있는 회화적 표현에 도달했다. 특히 '닦아내기' 기법은 '탑골종가'(1987), '고택녹은(古宅綠隱)'(1988), '충효당'(1990), '탑골의 봄'(1990)과 같이 향토색 짙은 고택 풍경을 그린 작품들에서 사물의 질감과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그만의 독창적인 화법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1990년대 이전까지는 한쪽 면에 붉은 기운이 도는 마분지인 '자보루지'나 두께가 300g 이상 되는 두꺼운 '와트만지'를 주로 사용했는데, 이는 그의 불투명 화법과 강렬한 붓 터치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했다. 특히 초기 야수파적 경향의 작품에서는 자보루지 위에 거침없는 붓질로 대상의 본질적인 형태만을 잡아내며,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전체적인 인상을 강조하는 표현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의 풍경화에서 대상을 둘러싸는 외곽선은 표현주의적인 강렬함과 함께 단번에 그은 듯한 '일획'의 힘을 느끼게 한다. 이는 인위적인 기교나 과장된 효과보다는 자연스러움, 즉 '물맛'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와 연결된다. 이는 그의 스승인 손일봉이 "최고의 기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안에 감춰진 듯 자연스럽게 작동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수창은 고택 풍경 등을 통해 단순히 보이는 모습 너머의 내면적인 의미를 담아내고자 했으며, 안동이라는 지역의 유교 문화와 자연 환경을 중요한 소재로 삼아 그곳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했다. 이는 한국 전통 진경정신을 현대적인 수채화로 구현하려는 시도로 평가받는다. 그는 또한 수채화로서는 비교적 큰 크기인 '91x73cm'(유화 캔버스 30호 F 규격) 종이를 즐겨 사용했는데, 이는 그의 작품에 시원하고 호방한 느낌을 더하며 힘 있는 필력을 강조하는 효과를 주었다. 1994년 '안동미협전'에 출품했던 풍경화(전지 규격)는 굵직한 터치와 맑은 색감, 힘찬 필력으로 전시 공간을 압도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이수창의 화면은 때로는 거칠어 보이는 선들 속에서도 조화로운 질서를 유지하며,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기보다는 그로부터 받은 '느낌'을 포착하는 데 집중한다. 이는 서성록이 언급한 '진경'의 경지에 다가서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5] 이수창은 그의 글 중 하나에서 "최고의 예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언제 어디서든, 걸작으로 칭송받는 모든 예술 작품은 두 가지 공통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예술 작품과 그 내용에 대한 예술가의 태도가 꾸준히 근면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술가의 생각이 감상자에게 명확하게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3]
이러한 생각은 이수창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일종의 코드가 된 듯하다. 이수창이 평생을 통해 끊임없이 강조해 온 것은, 예술가가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근면함"과 작품에 대한 "의미 있는 반응"이다. 앞서 언급한 주장은 그의 작품을 광범위하게 설명하는 "개요"에 가깝고, 그의 작품을 자세히 탐구하는 "세부 사항"은 아니다.[3]
4. 안동화단 활동
이수창은 안동 지역 화단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998년에는 '경북수채화협회'의 전신인 '영남수채화작가회'의 창립을 이끌고 고문을 맡았다.[5]
그는 예술가로서의 면모 외에도 선비나 스승과 같은 역할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배움과 가르침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5] 경주예술학교 재학 시절, 스승 손일봉이 친일 및 좌익 논란으로 교장직에서 물러나는 어려움 속에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수창은 당시를 회고하며 "손일봉 · 주경 선생께 배울 것이 많았기 때문에 끝까지 학교를 다녔다"고 말했으며,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5]
1950년대와 1960년대 젊은 시절에는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는 표현주의적 경향이 강한 작품을 선보였다. 당시 안동 작가들이 즐겨 사용했던 '자보루지'라는 재료의 특성을 살린 불투명 기법이 주를 이루었다.[5] 훗날 월간미술 김복기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는 "요즘 내 작품은 너무 얌전하다"고 자평하며, 대학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에게 미술의 기본을 강조하다 보니 자신의 그림마저 교과서처럼 될까 봐 늘 경계한다고 밝혔다.[5]
이수창의 교육 경력은 1954년부터 시작되었다.[3]
4. 1. 향미회 활동
이수창은 김미숙, 권영호, 유시원, 박기태, 이상길 등과 함께 미술 그룹 "향미회"를 공동으로 창립했다.[3]5. 개인사
1929년 의성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은 누나가 살던 일본에서 보냈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술학교에 진학했으나,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했다. 18세가 되던 해, 남한 최초로 설립된 경주예술학교에 입학하여 평소 존경하던 화가 손일봉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학창 시절에는 동기생인 박기태와 함께 사생을 다니는 등 예술가로서의 길을 함께 준비하며 작품 방법론까지 공유했다. 이수창은 특히 스승 손일봉의 회화론에 깊은 영향을 받아, 자연의 외형보다는 실체를 중시하고 수채화를 주요 기법으로 삼는 등 스승을 따르려 노력했다.[5]
1954년, 박기태에 이어 안동사범학교 교사로 부임하며 안동과 인연을 맺었다. 1962년 안동사범학교가 폐교되자 대구 경북고등학교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가, 1965년 안동교육대학교가 설립되면서 교수로 다시 안동으로 돌아왔다.[5]
이수창은 국내에서 4회, 해외에서 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해외 전시는 1981년부터 2년간 일본 쓰쿠바 대학 교환교수(동시에 도쿄 예술대학 객원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 집중적으로 개최되었다. 약 5개월 간격으로 다섯 차례나 전시를 열었을 정도로 이 시기는 그에게 화가로서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1982년에는 주로 한국문화원에서, 1983년에는 긴자의 서긴자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다.[5]
그의 화풍은 투명 수채와 불투명 수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며, 재질감까지 중요한 기법으로 활용하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1980년대 초 일본 대학 객원교수로 있던 2년 동안은 투명 수채화 기법에 더 집중했는데, 미술평론가 서성록은 이 시기 화풍이 이전보다 현대적으로 변모했다고 평가했다. 붓을 눌러 칠하는 방식에서 가볍게 튕기며 화지를 다루는 방식으로 변화했으며, 색감이 풍부해지고 세부 묘사가 더 꼼꼼해졌다는 것이다. 형태의 윤곽과 세부 처리가 뚜렷해지고 세필을 이용한 기교가 늘어난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5]
1994년 2월 25일에는 화집을 발간하며 겸손한 소회를 남겼다. "화집을 낼만한 그림은 되지 못하고 내어야할 나이만 되었다. 초년부터 이 나이가 되도록 교단과 화업에 양발을 놓고 살면서, 그 어느 쪽도 미흡한 채 늘 마음고생만 해왔다. 이제 교단을 떠나면서 여태 충실치 못했던 지금까지의 작품들을 추린다는 구실로 감히 이 책을 낼 결심을 했다. 이로써 여력을 한곳에 모우려 한다." 그는 교직 생활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며 작업에 온전히 전념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마음고생'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5]
노년기에는 안동 도산서원 인근 가송리의 풍경을 그린 '녀던길' 시리즈를 제작했는데, 이는 그의 수채 풍경화 중 백미로 꼽힌다. 2000년대에 들어 70대의 화가가 500년 전 유학자 퇴계 이황의 발자취를 따라 그린 이 시리즈는, 이수창 자신도 성현을 흠모하며 선비다운 정신을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의지를 보여준다. 이 시리즈는 '예인으로서의 학(學)'이라는 부제를 얻으며 그림을 통해 인문학적 성과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그림 속 가송리 풍경은 격정적인 필선이 차분히 가라앉고 이상향으로 인도하는 듯한 염원을 담고 있으며, 자연의 모습이 감상자의 인성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서성록은 이수창 회화의 바탕을 '관조의 정신'으로 보았는데, 이는 단순히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 자연과 교감하고 정신세계와 융합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해석했다.[5]
이수창의 삶과 예술은 유몽영에서 언급된 '중은(中隱, 시끄러운 속세에 숨어 삶)'의 삶을 연상시킨다. 그는 중앙 화단에서 크게 조명받기보다는 안동이라는 지역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 교직을 박차고 서울로 올라가 그림으로 승부를 걸었던 동료 박기태와 달리, 이수창은 분수를 지키고 겸손함을 중시하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중은의 삶에 만족했다. 이는 중앙 집중적인 한국 사회에서 지방 국립대학 교수직이 상대적으로 한직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장조의 『유몽영』에 나오는 "능히 세상 사람이 바삐 여기는 것을 등한히 하는 자만이 바야흐로 세상 사람이 등한히 여기는 것을 바삐 할 수 있다(能閒世人之所忙者, 方能忙世人之所閒)"는 구절처럼, 그의 화풍은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난 여유와 깊이를 느끼게 한다.[5]
그는 장대한 체격에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으며, 느긋하고 부드러운 말투를 가졌다. 제자들을 큰 소리로 꾸짖는 법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예술 단체를 결성할 때도 '협회'나 '작가회' 같은 명칭보다는 예술 자체를 즐기는 의미를 담은 '요수회(樂水會)'나 '영수회(嶺水會)' 등을 선호했으나, 젊은 작가들이 다른 이름을 원하면 자신의 제안에 크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에서 그의 인품과 예술관을 엿볼 수 있다.[5]
이수창은 안동 시내 구시장 내 백화점 건물에서 거주하며 4층 옥상 가건물을 작업실로 사용했다. 작품 운반이 불편했음에도 이곳을 고수한 이유는 병치레가 잦았던 아내가 이곳을 떠나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 폐교(서후면 이송천리 송강초등학교)를 임대해 조성한 경북 북부 최초의 작가촌인 솔밤작가촌 시절에 잠시 1층 작업실을 사용한 경험이 있다. 솔밤작가촌은 그가 제자들을 위해 앞장서 추진했던 일이기도 하다. 그는 안동이 전통문화에 치우쳐 현대 문화예술이 위축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지역 기관들이 매년 지역 작가의 작품을 꾸준히 구매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안동 미술계는 이수창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받으며, 그의 뜻을 기억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5]
6. 학력
손일봉의 지도로 경주 예술학교에서 공부했다.[3]
7. 기관 경력
기간 | 기관 및 직책 |
---|---|
1950 – 1951 | 의성공업중학교 교사 |
1951 – 1953 | 영천중고등학교 교사 |
1954 – 1963 | 안동사범학교 교사 |
1963 – 1965 | 경북고등학교 교사 |
1965 – 1978 | 안동교육대학 교수 |
1979 – 1994 | 안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과 교수 |
1980 – 1991 | 경북도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운영위원 |
1981 – 1983 | 일본 쓰쿠바 대학 예술학부 객원교수 |
1981 – 1983 | 일본 도쿄 예술대학 미술학부 객원교수 |
1984 | 전국대학미술전람회 서양화분과 심사위원장 |
1987 – 1991 |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안동지부장, 한국수채화작가회 회원, 한국미술협회 회원 |
1993 | 국립안동대학교 예술대학장 |
1994 | 국립안동대학교 명예교수, 경상북도 문화상 심사위원 |
이수창의 교육 경력은 1954년에 시작되었다.[3] 그는 김미숙, 권영호, 유시원, 박기태, 이상길 등과 함께 "향미회"라는 미술 그룹을 공동으로 창립했다.[3]
8. 개인전
9. 단체전
연도 | 전시명 | 장소/기관 | 도시/국가 |
---|---|---|---|
1956 | 박기태-김인수-이수창 3인전 | 스쿨서점 | 안동 |
1975 | 한국 수채화창작가협회 창립전 | 미술회관(안국동) | 서울 |
1980 | 경상북도 미술대전 초대작가 | 대구 | |
1984 | 신라미술대전 초대작가 | 경주 | |
1984 – 2012 | 한국 수채화작가회전 (총 34회 참가) | 동방플라자 등 | |
1985 | 한국 수채화작가회전 | 일본주재 한국문화원 | 동경, 일본 |
1987 | 한국 수채화작가회전 | 주 프랑스 대한민국 문화원 및 프랑스 5개 도시 순회전 | 프랑스 |
1990 | 현대미술초대전 | 국립현대미술관 | 과천 |
1991 | 경상북도 미술대전 초대작가 | 대구 | |
1991 | 신라미술대전 초대작가 | 경주 | |
1997 | 오늘의 한국 수채화 10인 초대전 | 서울 갤러리 | 서울 |
10. 훈포장
11. 저술
12. 방송 및 언론
- 1991년 월전미술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월간미술》 7월호에 '이수창, 자연을 형상화하는 넉넉한 여유'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 1992년 2월 2일 한국방송공사(KBS) 《TV미술관》에서 '풍경속의 자화상 – 서양화가 이수창'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Biography of Lee Su-Chang
http://www.leesuchan[...]
2021-07-08
[2]
웹사이트
LEE Su Chang Studio - YouTube
https://www.youtube.[...]
2021-11-22
[3]
웹사이트
Traces of "True Scenery" : Paintings made by Professor LEE Su Chang
http://www.leesuchan[...]
2021-11-22
[4]
URL
http://www.leesuchan[...]
[5]
문서
중은의 삶을 실천했던 화가 이수창의 예술세계, 송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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