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막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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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영희 막달레나는 19세기 초 조선에서 순교한 천주교 신자이다.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와 고모의 영향을 받아 신앙을 갖게 되었으나, 이교도와의 결혼을 강요받자 이를 거부하고 가출했다. 한양으로 간 이영희는 세 명의 교우들과 함께 자수하여, 혹독한 형벌과 고문에도 신앙을 지키다 1839년 7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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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막달레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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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영희 막달레나 |
출생일 | 1809년 |
사망일 | 1839년 7월 20일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출생지 | 경기도 봉천 |
사망지 | 서울 서소문 |
직업 | 순교자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매장지 | 절두산 천주교성지 |
2. 생애
이영희는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 허계임 막달레나, 언니 이정희 바르바라, 고모 이매임 테레사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나 아버지는 이를 반대했다. 아버지가 이교도와의 결혼을 강요하자, 동정을 지키며 신앙생활에 전념하고자 했던 이영희는 집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가족들에게 호랑이에게 해를 입은 것처럼 꾸몄으나, 나중에는 오해가 풀려 아버지로부터 한양에 머무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후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이영희는 세 명의 동료 교우들과 함께 포도청에 자수했다.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극심한 형벌과 고문을 겪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다. 1839년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다른 일곱 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1세였다.
2. 1. 출생과 가정 환경
이영희는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1] 그녀의 어머니 허계임 막달레나와 언니 이정희 바르바라, 고모 이매임 테레사는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1] 하지만 아버지는 천주교 신앙을 강하게 반대하는 비신자였기에, 가족들은 아버지 몰래 신앙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1]아버지가 이영희를 비신자와 결혼시키려 하자, 동정을 지키며 신앙에 헌신하고자 했던 그녀는 이를 거절하고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1] 어느 날, 그녀는 집에서 일하던 어린 천주교 신자 하녀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여기가 한양까지 30리라 들었는데, 길을 알지 못한다. 내일 아버지께서 서울로 가신다 하니, 네가 그분을 따라가며 길에 흔적을 남겨주면 내가 그 흔적을 따라가겠다."[1]
가출 당일 밤, 이영희는 낡은 옷으로 갈아입고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 집을 나섰다. 집 근처 숲으로 들어가 스스로 상처를 내어 피를 흘리고, 그 피를 땅과 자신의 옷에 묻힌 뒤 옷을 찢어 길에 뿌려 마치 호랑이에게 해를 당한 것처럼 꾸몄다.[1]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한양으로 떠나자 하녀와 이영희는 그 뒤를 따랐고, 이영희는 한양에서 고모 이매임을 찾아가 모든 사정을 설명했다.[1]
한편 고향 집에서는 사라진 이영희를 찾느라 온 가족이 소란스러웠고, 특히 어머니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이영희의 삼촌 중 한 명이 숲에서 그녀가 남긴 핏자국과 찢어진 옷을 발견하고는, 이영희가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다고 생각하여 한양에 있는 이영희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실신하기까지 했다.[1] 이 모든 일의 진실을 아는 이는 고모 이매임뿐이었다. 아버지는 사냥꾼들을 고용해 딸을 해친 호랑이를 잡으라고 명하기도 했다.[1]
3개월이 지난 후, 어머니 허계임은 딸이 무사하다는 사실과 가출의 전말을 알게 되었고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남편이 이유를 묻자, 어머니는 딸의 뜻을 꺾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버지는 즉시 한양으로 달려가 고모 집에서 무사히 지내는 딸을 만나 크게 기뻐하며, 더 이상 결혼을 강요하지 않고 한양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1]
2. 2. 신앙 결심과 가출
이영희는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허계임 막달레나와 언니 이정희 바르바라, 고모 이매임 테레사는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지만, 아버지는 천주교를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몰래 신앙 생활을 해야 했다.아버지가 이교도와의 결혼을 강요하자, 동정을 지키며 살기를 원했던 이영희는 이를 거절하고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이영희는 집에서 일하는 어린 천주교 신자 하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여기서부터 한양까지 30리라고 들었는데 길을 잘 모른다. 내일 아버지께서 서울로 가시니, 너는 아버지를 따라가면서 길에 표시를 남겨다오. 내가 그 표시를 보고 따라가겠다."
가출하기로 한 날 밤, 이영희는 낡은 옷으로 갈아입고 원래 입던 옷을 챙겨 집을 나섰다. 집 근처 숲으로 들어가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어 피를 땅과 옷에 묻히고, 그 옷을 찢어 길에 뿌려 마치 호랑이에게 변을 당한 것처럼 꾸몄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한양으로 떠나자 하녀와 이영희는 그 뒤를 따랐다. 한양에 도착한 이영희는 고모 이매임 테레사를 찾아갔고, 남루한 행색에 놀란 고모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했다.
한편, 고향 집에서는 사라진 이영희를 찾느라 온 가족이 소란스러웠고, 특히 어머니는 크게 슬퍼했다. 이영희의 삼촌 중 한 명이 숲에서 피 묻은 옷 조각들을 발견하고는 이영희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고 생각했다. 그는 급히 한양으로 가서 이매임의 집에 있던 이영희의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아버지는 충격으로 실신하기까지 했다. 당시에는 고모 이매임만이 진실을 알고 있었다. 이영희의 아버지는 사냥꾼들을 고용해 딸을 해친 호랑이를 잡으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3개월이 지난 후, 이영희의 어머니는 딸이 살아있다는 사실과 가출의 전말을 알게 되었고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남편이 "당신은 이제 덜 슬퍼하는군요. 나에게 자초지종을 말해보시오. 나는 그 애의 뜻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라고 말하며 묻자, 어머니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버지는 즉시 한양으로 올라가 이매임의 집에서 무사한 딸을 만나 크게 기뻐했다. 그는 딸에게 더 이상 결혼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한양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2. 3. 한양에서의 생활과 체포
아버지가 강제로 결혼시키려 하자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이영희는 집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천주교 신자인 어린 하녀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가 한양으로 가는 길을 몰래 따라갔다. 이때 자신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묻힌 옷을 찢어 길에 뿌려두었다.한양에 도착한 이영희는 고모 이매임 테레사를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한편 고향 집안에서는 사라진 이영희를 찾느라 소동이 벌어졌다. 숲에서 피 묻은 옷가지를 발견한 가족들은 그녀가 호랑이에게 변을 당했다고 생각했고,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충격으로 실신하기도 했다. 몇 달 후, 어머니 허계임 막달레나가 진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아버지도 딸의 뜻을 존중하여 더 이상 결혼을 강요하지 않고 한양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이영희는 세 명의 독실한 교우들과 함께 포도청에 자수했다. 그들은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극심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결국 사형을 선고받은 이영희는 1839년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다른 일곱 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1세였다.
2. 4. 순교
이영희는 독실한 천주교 교우 세 명과 함께 포도청에 자수하였다. 그들은 모두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차례 극심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음에도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영희는 1839년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다른 교우 일곱 명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31세였다.3. 시복 · 시성
이영희 막달레나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으며,[2]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3. 1. 시복
이영희 막달레나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2]3. 2. 시성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2] 이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집전한 미사 중에 103위 시성식이 거행되었고, 이를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참조
[1]
웹인용
한국 천주교 절두산 순교성지 성인 유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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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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