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토리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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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오토리섬은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길이 3km, 폭 1km의 길쭉한 섬으로, 안산암질 화산쇄설암으로 이루어져 침식에 취약하다. 북쪽의 이오다케 화산체와 남동쪽의 구스쿠 화산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1903년과 1959년의 분화로 주민들이 이주했다. 1967년 이후 무인도가 되었으며, 과거 류큐 왕국 시대부터 유황 채굴이 이루어졌다. 현재는 구메지마정에 속해 있으며, 섬 주민들은 구메지마에 '토리시마'라는 집락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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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오토리섬 - [지명]에 관한 문서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 |
| 면적 | 2.50 km² |
| 해안선 길이 | 7.3 km |
| 최고점 | 212 m |
| 최고봉 | 방위 |
| 위치 | 동중국해 |
| 군도 | 류큐 열도 |
| 국가 | 일본 |
| 현 | 오키나와현 |
| 군 | 시마지리군 |
| 정 | 구메지마정 |
| 좌표 | 27°52′27″N 128°13′35″E |
| 기타 | |
| 일본어 이름 | 硫黄鳥島 (이오토리시마) |
| 리터럴 | 유황 새 섬 |
2. 지리
이오토리섬은 동중국해에 있는 화산섬으로, 도쿠노 섬에서 서쪽으로 약 65km, 구메 섬의 북동쪽 약 200km 지점에 위치한다.[12] 오키나와 제도의 최북단이지만[13], 지리적으로는 아마미 제도에 가깝다.[14] 날씨가 매우 맑은 날에는 도쿠노시마 섬 서쪽 해안에서도 이오토리섬을 볼 수 있다.
류큐 왕국 시대에는 하쿠치토 아래 설치된 "하쿠토토리방"이 이오토리섬을 관할했다.[23] 1879년(메이지 12년) 오키나와현, 1896년(메이지 29년) 시마지리군, 1904년(메이지 37년) 구시카와 마기리, 1908년(메이지 41년) 구시카와 촌 오아자로 "이오토리 섬"이 되었으며[24], 한 섬으로 한 글자를 구성한다.[25] 2002년(헤세이 14년) 4월 1일 구시카와 촌은 나카자토 촌과 합병하여 구메지마 정이 되었다.[26]
과거에는 ''''토리 섬''''[16], ''''모토토리 섬''''[17], ''''류큐 토리 섬''''[18], ''''오키나와 토리 섬''''[19] 등으로 불렸다. "이오토리 섬"이라는 명칭은 1935년(쇼와 10년) 기노시타 기세이의 논문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후 널리 퍼졌다.[20] 구메 섬 북동쪽 해상에 위치한 토리 섬(구메토리 섬)[14][21]과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20]
2. 1. 지형과 지질
이오토리섬은 북서쪽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뻗은 길쭉한 섬으로 길이는 약 3km, 폭은 약 1km에 이른다. 북쪽 유황산 화산체엔 섬내 최고봉 방위[80]("호이노산"[81], "토리노토코야기노산"이라고도 한다.)와 유황산이, 남단에는 구스크 화산체의 "마에산"이 우뚝 솟아있다. 섬 전체 암석의 대부분은 안산암질로 침식에 취약한 화산쇄설암으로 이루어져, 섬 주위는 파식으로 해식애로 덮여 있다[82]. 동부 해안에서 관찰하면 다양한 쇄설물로 줄무늬로 보이며 해안의 모래사장은 화성암 유래 검은색을 띤다[82]. 구스크 화산체의 중앙에 있는 "구스쿠"와 섬 북서단에 위치한 "후츠야산"은 지하에서 밀어올린 용암으로 형성된 산이다[83]. 또한 마그마가 틈새로 관입하여 생긴 암맥이 섬 남부에서 보이고, 안에는 주위가 깎여 암맥이 삼각형 형상으로 노출된 바위가 존재한다[84]. 섬 주변의 산호초는 전체적으로 발달하지 않았다[85].2.5km2[2]의 이 섬은 안산암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연결된 화산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쪽의 구스쿠 화산(グスク火山, "성 화산")은 두 봉우리의 중앙에 위치한 용암 돔이다. 북쪽의 이오다케 화산(硫黄岳火山, "유황 봉우리 화산")은 분화구에 작은 유황 호수가 있는 성층 화산이다. 섬의 최고점은 212m로, 이오다케 화산에 속하며, 구스크 화산의 최고점은 마에다케(前嶽)로 189.3m이다.[5]
2. 2. 화산 활동
이오토리섬은 북서쪽의 이오다케 화산체와 남동쪽의 구스쿠 화산체 두 개로 구성되어 있으며[34], 지질학에서는 섬 전체를 "이오토리섬 화산"이라고 부른다[35]。화산 분화 예측 연락회는 화산 활동도의 등급을 A에서 C까지 3단계로 평가하며[36], 2007년 말 현재 이오토리섬은 "등급 B"로 분류되어 있다[37]。이오토리섬은 규슈의 아소산, 사쿠라지마에서 토카라 열도로 이어지는 기리시마 화산대의 최남단에 속하며, 약 수만 년 전 플라이스토세 후기에 화산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38]。이오다케 화산은 화산 활동이 활발하여, 남서쪽으로 향한 높이 약 100m의 절벽에서 항상 유황을 포함한 분기를 내뿜고[39], 절벽 아래에는 유백색을 띤 화구호가 보인다[38]。구스쿠 화산은 이오다케에 비해 화산 활동이 온화하지만, 산체는 섬의 3분의 2를 차지한다[40]。두 개의 외륜산과 중앙 화구구를 가진 3중식 화산으로, 바깥쪽 외륜산의 직경은 약 1.5km에 이른다[34]。
다음 표는 이오토리섬의 분화 활동 기록을 나타낸다. 과거에 여러 차례 분화에 따른 강회, 폭발, 지진이 발생했다. 1903년에는 큰 폭발과 지진으로 유황 채굴자를 제외한 섬 주민 전원이 구메섬으로 이주했으며, 1959년에도 분화로 인해 전 섬 주민이 섬 밖으로 이주했다. 1967년에도 분화로 인해 임시 채굴 인부들이 철수했으며, 그 이후로 무인도가 되었다[18][41]。2015년에 기상청과 제11관구 해상보안본부가 실시한 화산 조사에서는 이오다케에서 소량의 분기가 관측되었지만, 구스쿠 화산에서는 관측되지 않았다[42]。
| 발생 시기 | 화산 활동·피해 |
|---|---|
| 1631년 | 분화. 사망자 다수[43]。 |
| 1664년 | 분화, 지진. 『구요』에는 1명 사망으로 기록. |
| 1796년 11월경 | 분화로 인한 강회. 섬 주민은 사전에 토쿠노 섬으로 피난. 화산재는 오키노에라부 섬까지 도달하여, 당지 농작물에 피해. 다음 해, 바질 홀이 이오토리섬 부근을 탐사했을 때, 이미 분화는 진정되었다고 한다. |
| 1829년 12월 1일 | 분화에 따른 화산 폭발. 유황 광구의 대부분이 소실되고, 섬 주민은 토쿠노 섬으로 피난. 화산재는 가케로마 섬까지 닿는다[44]。 |
| 1855년 | 2, 3개월에 1번꼴로 분화. 이오토리섬 내 농작물에 피해. |
| 1868년 | 2월 또는 3월에 분화했지만, 세력이 작았고, 강회도 적었다고 한다. |
| 1903년 3월 - 8월 | 3월 15일경부터 연기가 시작, 4월에는 울림과 강회가 종종 발생했다. 5월 3일경에 분화가 최고조에 달했고, 8월경까지 화산 활동은 지속. 섬 주민 대부분은 구메섬으로 이주하고, 채굴 인부가 잔류. |
| 1934년 | 5월경에 분기를 확인. 구스쿠 화산 북쪽에 3곳의 분기공이 형성. 7월 2일 간사이의 신문사가 이오토리섬의 분화를 보도했지만, 오보였다. |
| 1959년 6월 8일 | 이오다케 화구에서 연기 발생, 상공 약 3,000m까지 상승. 화산탄과 강회 등의 화산 활동은 약 1개월간 지속, 섬 주민 전원을 나하 등으로 이주[33]。 |
| 1967년 11월 25일경 | 연기 다량 발생으로, 유황 채굴자는 섬 밖으로 피난. 그 이후, 이오토리섬은 무인도의 상태이다[18]。 |
| 1968년 7월 18일경 | 항해 중이던 어선이 분화를 목격. 강회를 확인. |
| colspan=2 | |
이오토리섬은 해저 화산 분출물 퇴적으로 형성되었으며, 대륙과 연결된 적이 없어 동식물 종류가 적다. 바람, 새, 유목 등에 의해 운반되거나 사람이 들여와 번식한 것으로 추정된다.[46] 섬에는 인위적으로 반입되어 야생화된 쥐와 염소가 서식하고, 작은 도마뱀과 섬 휘파람새, 검은해오라기, 물수리가 관찰된다. 곤충으로는 부전나비, 달팽이, 개미, 거미 등이 있다. 식물은 유황악 화산에는 거의 없지만, 구스크 화산은 녹음으로 덮여 있다. 말바니케이, 샤샨보 등의 관목과 하치조우스스키, 억새, 띠 등이 자라며, 류큐 소나무, 시콰사, 담배 등도 발견된다.[40][48][49]
3. 생태
3. 1. 동물
이오토리섬에는 인위적으로 반입되어 야생화된 쥐와 염소가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파충류는 소형 도마뱀만이 발견되었으며, 섬 내에 살무사는 서식하지 않는다. 조류는 섬 휘파람새만이 번식하며, 그 외에 검은해오라기와 물수리가 날아든다. 곤충 등은 부전나비(대형 호랑나비는 확인되지 않음), 달팽이, 개미, 거미 종류가 서식하고 있다.[47]
3. 2. 식물
현재도 분기 활동을 하고 있는 이오토리섬의 유황악 화산에는 식물이 거의 자라지 않지만, 구스크 화산 전체는 녹음으로 뒤덮여 있다.[40] 오키나와현에서는 섬 내에만 분포하는 말바니케이와 현 내에서 서식지가 제한적인 샤샨보 등의 관목이 자라고 있다. 유황악 화구벽에는 하치조우스스키가 군생하고 있을 뿐이다. 집락 유적의 평탄지에는 억새, 띠 등이 섞여 자라는 초원이 펼쳐져 있다. 또한, 사람이 심은 류큐 소나무와 시콰사, 그리고 과거 섬 주민들이 재배했던 것으로 보이는 담배도 찾아볼 수 있다.[48][49]
4. 역사
이오토리섬은 류큐 왕국 시대부터 유황 산지로 알려져 명나라와의 무역에서 중요한 품목이었다.[12] 1534년의 『사류구록』에는 "유황산", 『해동제국기』에는 "조도", 서보광의 『중산전신록』에는 "토리오신마"로 기록되어 있다.[50]
1664년 최초로 기록된 분화가 발생하여 한 여성이 사망했다.[7] 1903년 3월부터 8월까지는 분화와 지진으로 인해 모든 주민이 구메섬으로 일시 이주했다가, 1958년 6월까지 영구 이주했다. 이후 섬은 무인도가 되었고, 1968년 7월에 다시 분화가 있었다.
류큐 처분 후 1882년(메이지 15년) 기근으로 오키나와현은 섬 주민들에게 구메섬 이주를 권장했으나 거부되었다.[58] 1888년(메이지 21년)에는 유황 상납 면제 청원이 수리되어 일본에서 유일하게 납세 의무가 없는 섬이 되었다.[59] 1903년(메이지 36년) 유황 채굴 갱 폭발 후, 일본 정부 등의 권고로 주민들은 집단 이주를 결정, 구메지마에 "토리시마"라는 새로운 집락을 형성했다.[43]
구메섬 이주 후에도 일부 주민이 다시 이오토리섬에 거주했다. 전전에는 국책 회사에 의한 유황 채굴이 이루어져 인구가 600명에 달했고, 소학교, 진료소, 역소도 설치되었다.[68][69] 그러나 1959년(쇼와 34년)과 1967년(쇼와 42년) 분화로 인해 주민들이 완전히 이주하면서 무인도가 되었다.[18]
4. 1. 류큐 왕국 시대
이오토리섬은 수 세기 동안 류큐 왕국의 주민들에 의해 유황이 채굴되었고[1], 중국 제국에 공물로 사용되었다.[6] 섬으로의 정착 시기는 불분명하며, 14세기 후반의 찰도왕통 이전으로 추정된다.[50] 1376년(홍무 9년)에 중산왕 찰도가 유황 4천 근을 명나라에 진공한 것이 시작으로, 많을 때는 1년에 4척 총 7만 근을 조공했다.[52] 이오토리섬에서 채굴된 유황은 현재의 나하시 토마리(泊)까지 운반되었으며, 숭원사 서쪽에 위치했던 "유황창"에 보관되었다.[53]1609년 류큐 침공으로 사쓰마 번은 요론섬 이북의 섬들을 영토로 삼았지만, 중국과의 진공 무역을 존속시키기 위해 이오토리섬을 류큐 왕국의 영토로 존치시켰다.[50] 토마리지두 아래에 설치된 "토마리취방"이 이 섬을 관할했으며[23], 섬 주민 대표는 섬 내의 공납 관리와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57] 섬 주민은 매년 유황 1만 6천 근과 도르래 조개 800장을 상납하는 대신 부역 면제와 쌀을 지급받았다.[50] 1666년에는 지급미가 증량되었고, 1742년에는 노로의 식량도 두 배로 지급되었다.[44] 이러한 우대 정책으로 섬 밖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와 인구가 증가했다.[44] 그러나 이오토리섬은 화산섬이라 나무가 없고 물은 빗물에 의존해야 했으며, 가뭄으로 갈수에 시달렸다.[44]
4. 2. 근현대
이오토리섬은 수 세기 동안 류큐 왕국의 주민들에 의해 유황이 채굴되었고[1], 중국 제국에 공물로 사용되었다.[6]최초로 기록된 분화는 1664년으로, 당시 한 여성이 화산 붕괴로 사망했다.[7] 1903년 3월부터 8월까지 일련의 분화와 지진으로 모든 주민이 임시로 220km 떨어진 구메섬으로 이주했으나, 1958년 6월까지 영구적으로 이주하였다. 마지막 정착지에는 86명의 주민이 살았다. 그 이후 섬은 무인도가 되었다. 1968년 7월에 또 다른 분화가 있었다.
류큐 왕국 시대에는 하쿠치토 아래에 설치된 "하쿠토토리방"이 이오토리 섬을 관할했다.[23] 1879년(메이지 12년)에 오키나와현, 1896년(메이지 29년)에 시마지리군, 1904년(메이지 37년)에 구시카와 마기리, 1908년(메이지 41년)에 구시카와 촌의 오아자로 "이오토리 섬"이 되었다.[24] 2002년 4월 1일에 구시카와 촌은 인접한 나카자토 촌과 합병하여 구메지마 정이 되었고[26], 2015년 1월 현재에도 이오토리 섬은 이 정에 속한다.[27]
1376년 (홍무 9년)에 중산왕 찰도가 유황 4천 근을 명나라에 진공한 것이 시작으로, 많을 때는 1년에 4척 총 7만 근을 조공했다.[52] 이오토리섬에서 채굴된 유황은 현재의 나하시의 토마리(泊)까지 운반되었으며, 숭원사의 서쪽에 위치했던 "유황창"에 보관되었다.[53]
1609년에 류큐에 침공한 사쓰마 번은 요론섬 이북의 섬들을 영토로 삼았지만, 중국과의 진공 무역을 존속시키기 위해 이오토리섬을 류큐 왕국의 영토로 존치시켰다.[50] 섬 주민은 유황 1만 6천 근과 摺貝(도르래 조개) 800장의 상납 의무를 부여받았지만, 대신 부역 면제와 쌀이 지급되었다.[50]
류큐 처분 후 1882년(메이지 15년)에 발생한 기근으로, 오키나와현은 섬 주민들에게 구메섬으로의 이주를 권장했지만, 제안은 거부되었다.[58] 1888년(메이지 21년)에 섬 주민들은 유황의 상납 면제를 정부에 청원하여, 유황의 판매 수익으로 생활 보조에 충당하는 대책을 마련했고, 수리되어 일본에서 유일하게 납세 의무가 없는 섬이 되었다.[59]
1903년(메이지 36년)4월에 유황 채굴 갱이 폭발하면서, 일본 정부, 오키나와현, 지진조사회 등은 현지 조사를 한 결과, 섬 주민들에게 집단 이주를 촉구했다.[58] 같은 해 12월 19일에 345명[65], 다음 해인 1904년(메이지 37년)2월 11일에 유황 채굴원 93명을 제외한 203명을 이오토리섬에서 철수시키고[66], 당시 구메지마 구시카와 간마리 오타의 나카도마리 해안 부근으로 이주하여, "토리시마"라는 이름의 집락을 신설했다.[43]
구메섬으로 이주 후에도, 42가구가 이오토리섬에 다시 입주했다.[33] 전전에는 국책 회사에 의한 유황 채굴이 이루어졌고, 인구는 600명에 달했으며, 소학교, 진료소, 역소도 설치되었다.[68][69] 그러나, 1959년(쇼와 34년)의 분화로 인해 전 섬 주민 21가구 85명[44]은 나하와 구메섬으로 이주[33], 1967년(쇼와 42년)에도 분화로 인해 출가해서 섬에 온 채굴원들도 철수하면서, 그 이후로는 완전한 무인도가 되었다.[18]
5. 구메지마의 '토리시마' 집락
섬 주민들은 구메지마의 5곳 이주 후보지 중에서 선정하여[72], 심사 결과에 따라 구시카와간절 오타촌 자 나카도마의 바바 및 그 주변으로 결정했다[73]。 이주를 받아들인 구시카와간절의 각 마을은 섬 주민들의 이주를 환영했다[74]。 그곳은 소철과 아단이 무성한 황무지였지만, 인근 주민들이 개척하여 가옥을 건축했다[33]。 이주한 아동 91명은 구시카와 심상소학교에 편입되었으며, 증원에 따라 황새치섬에서 운반된 자재로 교사를 증축했다[66]。 이 집락으로 건너간 섬 주민들은 처음에는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고, 다이쇼 말기까지 가다랑어 어업을 했다[75]。 이 시기부터 새섬 집락의 항구에 나하를 왕복하는 기선에 화객 운반을 하는 전마선이 드나들기 시작했고, 그 후 구메지마섬 내에서 교통의 요충지로서 상점과 여관이 입지했으며, 1969년(昭和|쇼와일본어 44년)에 같은 집락 동해안의 매립지에 상업 지역이 형성되었다[75]。 1967년(昭和|쇼와일본어 42년)에 오타의 일부에서 "새섬"으로서 대자가 분리되었다[75]。
집락 서쪽에 위치한 "나나타키 신사"는 황새치섬의 7개의 우타키에서 채취한 모래를 항아리에 담아 그것들을 합사하고, 매년 이주 기념일인 2월 11일에 예제를 거행하고 있다[33][76]。 이 신사의 경내에는 황새치섬으로부터의 이주를 기념한 비가 건립되어 있다[77]。 새섬 집락의 방언은 구메지마나 오키나와 본도 중남부에서 사용되는 방언과 다르며[78], 도쿠노시마의 방언과의 공통점이 많아[79], "언어의 섬"을 형성하고 있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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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の火山防火体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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