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용 (18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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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원용은 1891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시대에 활동한 기업인이다. 강화양조 주식회사 대표이사, 히카리 모터스, 히카리 택시, 이천자동차 주식회사 등 여러 회사의 임원 및 주주를 역임했다. 1940년 창씨개명하여 '하타니 겐페이'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44년 10월 25일 사망했다.
대한제국 말기 관료이자 교육 사업가였던 이민선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설립한 초지보통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공립여수보통학교, 진도공립보통학교, 해남공립보통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교육계에 종사했다.
2. 생애
교직을 떠난 후에는 기업 경영에 뛰어들어, 형 이원황, 6촌 동생 이원찬 등 친인척과 함께 강화양조 주식회사를 비롯하여 이천자동차, 히카리 모터스, 히카리 택시, 대륙상공 등 여러 회사의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며 일제강점기 동안 기업가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 정책에 따라 羽谷源平|하타니 겐페이일본어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기업 활동을 계속하다가 1944년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는 교육자에서 시작하여 일제강점기 경성부를 중심으로 활동한 기업가로 이어진다.
2. 1. 가계와 초기 활동
아버지는 인천부 주사, 인천감리서 주사, 외부주사, 안산군 군주사를 지낸 이민선이고, 어머니는 경주 배씨로 배영선(裵永善)의 딸이다. 아버지 이민선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1906년 5월 시흥군 와리면 초지리(현 안산시 상록구 초지동)에 초지보통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다. 생 조부는 이재성(李在星)이고, 양 조부는 그의 형 이재응(李在應)이다. 이는 이재성의 차남인 아버지 이민선이 세 번 결혼하고도 딸만 낳은 큰아버지 이재응에게 양자로 입양되었기 때문이다.
고조부는 조선 순조 때 조선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태화 이현상이며, 증조부는 순조 때 청나라에 파견된 신재식(申在植)의 자제군관으로 연경을 방문했던 분서 이봉녕(李鳳寧)이다. 이상우의 8대손에 해당한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이민선 | 전 관료, 초지보통학교 설립자 |
어머니 | 경주 배씨 | 배영선(裵永善)의 딸 |
생조부 | 이재성(李在星) | |
양조부 | 이재응(李在應) | 생조부의 형 |
고조부 | 이현상 | 조선통신사 수행원 |
증조부 | 이봉녕 | 신재식의 자제군관 |
친형 | 이원황 | 강화양조 공동 경영 |
이복형 | 이원형(李源馨) | |
이복형 | 이원흥 | 대한제국 말기 전라북도 관찰사부 주사 |
친동생 | 이원종 | 면협의원, 초지리 구장 |
매제 | 이천응 | 강화양조 이사 |
6촌 동생 | 이원찬 | 강화군수, 김포군수, 서울특별시의회 시의원, 강화양조 전무이사 |
1906년(광무 10년) 5월, 아버지 이민선이 안산군 와리면 초지리에 세운 초지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08년(융희 2년) 1월 25일, 1907학년도 제2기 시험에서 고등부 우등생 중 한 명으로 뽑혔다.[1] 같은 해 3월 30일에 치러진 초지보통학교 졸업시험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당시 졸업시험 우등생은 형 이원황과 이원용 두 명이었고, 급제자로는 송하영(宋夏永), 이복형 이원형(李源馨) 등이 있었다.[2]
1911년에는 공립여수보통학교 본과 부훈도(公立麗水普通學校本科副訓導)로 재직했다. 같은 해 7월 5일 공립여수보통학교 본과 부훈도 사무취급(公立麗水普通學校本科副訓導事務取扱) 겸 촉탁(囑託)으로 정식 임명되었으며, 월 수당 15원을 받았다.[3] 이후 여수보통학교(후일의 여수서초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1912년 진도공립보통학교로 옮겨 부훈도로 1917년까지 재직했다. 1913년 9월 19일에는 경성부 종로구 예지동에 거주할 당시, 종로구 종로 4정목 102번지에 살던 김윤식(金潤殖, 당시 23세)이 그의 집에서 물감 15원어치를 훔치다 발각되어 검사국으로 압송되는 사건이 있었다.[4]
1918년에는 해남공립보통학교(후일의 해남동초등학교) 부훈도로 부임하여 1919년까지 근무했다. 1919년 3월 15일, 조선공립보통학교 부훈도로 임명되어 급8급봉을 받게 되었으나[5], 같은 날 바로 의원면직하였다.[5] 이후 1923년에는 고령공립보통학교의 훈도로, 1924년에는 같은 학교의 교원촉탁(敎員囑託)으로 활동했다. 교직 생활 이후에는 경성부 종로구 훈정동 118번지로 이주하여 생활했다.
1931년 5월 31일, 경기도 강화군 부내면 신문리 205-206번지에 설립된 강화양조(江華釀造) 주식회사의 주주이자 이사로 선임되어 기업 경영에 참여했다.[6] 당시 회사 대표는 친형인 이원황(李源璜)이었고, 전무이사는 6촌 동생 이원찬(李源讚)과 이근호(李根鎬)가 맡았다. 이원용은 매제 이천응(李天應)과 함께 공동 이사였으며, 감사는 노상기(盧相基)와 이정원(李貞媛), 지배인은 장길환(張吉煥)이었다.
2. 2. 기업 경영 활동
이원용은 일제강점기 동안 여러 기업의 설립과 경영에 활발히 참여하였다.1934년 9월 10일, 그는 이천응 등과 함께 경성부 종로구 종로 4정목에 이천자동차 주식회사(利川自動車)를 설립하고 회사 지배인이자 주주가 되었다.[7] 이후 1937년 5월 22일 회사가 청산될 때는 청산인 중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8]
1937년에는 자동차 관련 사업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2월 15일 경성부 장사동에 설립된 자동차 수리 및 부품 판매 회사인 ヒカリモータース|히카리 모터스일본어의 설립에 참여하여 취체역(取締役, 이사)으로 선임되었고,[9][10] 같은 달 2월 27일에는 히카리택시주식회사 설립에도 참여하여 이사 겸 지배인을 맡았다.[11][12]
같은 해 4월 1일에는 강화양조의 지배인 이사로 임명되었으며, 7월 31일에는 강화양조주식회사의 대표이사 취체역으로 선임되어 경영 전면에 나섰다.[13] 그는 강화양조의 주요 주주 중 한 명이기도 했다.[17]
1939년에는 사업 영역을 더욱 확장했다. 2월 27일 대륙상공주식회사(大陸商工株式會社)의 임원 변동 과정에 관여하였고,[14] 같은 해 11월 27일에는 이 회사의 대표취체역으로 선임되었다.[15] 또한, 6월 30일에는 대광산업주식회사(大光產業株式會社)의 감사로 선임되기도 했다.[19] 이 시기에도 그는 히카리 모터스와 강화양조의 임원직을 계속 유지하며 여러 기업 경영에 관여하였다.[16][18]
2. 2. 1. 강화양조
1937년 4월 1일 강화양조 지배인 이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31일 열린 강화양조주식회사(ja) 주주 정기총회에서 기존 대표이사 취체역이었던 이원황, 이원찬과 감사역 이정원이 해임되고, 이원용이 신임 대표이사 취체역으로 선임되었다. 이때 이정원은 신임 취체역, 이명규(李明圭)는 신임 감사역으로 선임되었고, 김근호(金根鎬)는 취체역으로 재선임되었다.[13]1939년 3월 1일 기준으로 강화양조의 주식 200원을 소유한 대주주의 한 사람이었으며, 같은 날 대표이사로 다시 선출되었다.[17] 당시 다른 대주주로는 6촌 이원찬(500원), 누이 이정원(370원), 매부 이천응, 이명규(각 200원) 등이 있었다.[17] 1939년 6월 30일 임기가 만료된 강화양조주식회사 임원을 새로 선임할 때, 이원용은 취체역으로 중임되었다. 이천응, 이정원 역시 취체역으로, 이명규는 감사로 중임되었다. 이는 6월 26일 이원영(李源瑛)이 경성지방법원 강화출장소에 등기 신고한 내용이다.[18]
2. 2. 2. 히카리 모터스
1937년 2월 15일 경성부 장사동 23번지 1정목에 자동차 수리, 정비, 자동차 부품 교체 및 부품 판매를 하는 ヒカリモータース|히카리 모터스일본어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당시 훈정동 118번지에 거주하던 이원용은 이천응, 이원찬, 노상기(盧相基), 김성운(金成雲), 연제홍(延濟鴻)과 함께 취체역(取締役, 이사)으로 선임되었다. 감사역(監査役)으로는 신현구(申鉉九), 이상호(李鎬湘)가 선임되었다.[9] 같은 날 히카리 모터스의 중역 이사 중 한 명이 되었다. 당시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10]직책 | 이름 |
---|---|
이사 | 이원찬(李源讚), 이원용(李源用), 노상기(盧相基) |
감사 | 신현구(申鉉九), 이원영(李源瑛) |
지배인 | 이명규(李明圭) |
1939년 3월 1일 주식회사 히카리 모터스의 이사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23일 주식회사 히카리 모터스(株式會社ヒカリモータース)의 대표취체역 이천응, 취체역 이원용, 이원영이 중임되었고, 7월 3일에는 감사역으로 소완규(蘇完圭)가 중임되었다.[16]
2. 2. 3. 히카리 택시
1937년 2월 15일 경성부 장사동 1정목 23번지에 자동차 수리, 정비, 부품 교체 및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히카리 모터스(ヒカリモータースjpn) 설립에 참여하였다. 당시 훈정동 92-2번지에 살던 이천응, 훈정동 9번지에 살던 이원찬, 노상기(盧相基), 김성운(金成雲), 연제홍(延濟鴻)과 함께 취체역(이사)에 선임되었다.[9] 감사로는 신현구(申鉉九)와 이호상(李鎬湘)이 선임되었다. 이때 이원용은 훈정동 118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같은 날 히카리 모터스의 중역 이사가 되었으며, 다른 이사로는 이원찬(李源讚), 노상기(盧相基)가, 감사로는 신현구(申鉉九), 이원영(李源瑛)이, 지배인으로는 이명규(李明圭)가 임명되었다.[10]1937년 2월 27일에는 히카리택시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했다. 회사 설립 공고와 함께 주주 모집 공고가 나갔는데, 1주당 가격은 20KRW였으며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에도 광고가 게재되었다고 한다. 이 회사의 이사로는 이천응, 이정원, 노상기(盧相基)가, 감사로는 신현구(申鉉九), 이두용(李斗鎔)이 있었고, 대표는 이천응이었다.[11] 같은 날, 이원용은 택시 및 운수 창고업, 여객 대절 자동차 영업을 하는 히카리택시주식회사의 이사 겸 지배인으로 임명되었다.[12]
1939년 3월 1일에는 히카리택시 주식회사의 이사 겸 지배인이 되었다. 같은 날 주식회사 히카리모터스의 이사로도 선임되었다. 3월 23일에는 주식회사 히카리모터스(株式會社ヒカリモータースjpn)의 대표취체역 이천응, 취체역 이원용, 이원영이 중임되었고, 7월 3일에는 감사역으로 소완규(蘇完圭)가 중임되었다.[16]
2. 2. 4. 이천 자동차
1934년 9월 10일 이천응 등과 경성부 종로구 종로 4정목 49번지에 이천자동차 주식회사(利川自動車)를 설립하고 회사 지배인이 되었다.[7] 동시에 그는 이천자동차주식회사의 주주의 한 사람이었다. 1937년 5월 22일 이천자동차주식회사 주주들이 모여 회사 청산을 결의하였고, 당시 훈정동 92번지에 살던 이천응과 훈정동 118번지에 살던 이원용이 청산인으로 선임되었다.[8]이원용은 자동차 관련 사업에도 관여했다. 1937년 2월 15일 경성부 장사동 23번지 1정목에 자동차 수리, 정비, 부품 교체 및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히카리 모터스(ヒカリモータース) 설립에 참여하여 취체역에 선임되었다.[9] 이때 이천응(훈정동 92-2번지 거주), 이원찬(훈정동 9번지 거주), 노상기(盧相基), 김성운(金成雲), 연제홍(延濟鴻) 등도 취체역으로 함께 참여했으며, 감사는 신현구(申鉉九)와 이상호(李鎬湘)였다. 당시 이원용은 훈정동 118번지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히카리 모터스의 중역 이사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이사로는 이원찬(李源讚), 노상기(盧相基)가 있었고, 감사는 신현구(申鉉九), 이원영(李源瑛), 지배인은 이명규(李明圭)였다.[10]
같은 해 2월 27일에는 히카리택시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했다. 이 회사는 택시 및 운수 창고업, 여객 대절 자동차 영업을 목적으로 했으며, 회사 설립 공고와 함께 주당 20원의 주주 모집 공고가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에 게재되었다. 이사로는 이천응, 이정원, 노상기(盧相基) 등이 참여했고, 감사로는 신현구(申鉉九), 이두용(李斗鎔)이 있었으며 대표는 이천응이었다.[11] 이원용은 이날 히카리택시주식회사의 이사 겸 지배인으로 임명되었다.[12]
1937년 4월 1일에는 다시 이천자동차 주식회사의 지배인이 되었으며, 같은 날 강화양조 지배인 이사에도 임명되었다. 이후 이원용은 자동차 사업 외에도 여러 회사에서 임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7월 31일 강화양조주식회사(江華釀造株式會社) 정기 주주총회에서 신임 대표이사 취체역으로 선임되었고[13], 1939년 2월 27일에는 대륙상공주식회사(大陸商工株式會社)의 감사역 이원영(李源瑛), 이원종(李源琮) 선임에 관여했으며[14], 같은 해 11월 27일에는 동 회사의 대표취체역에 선임되었다.[15] 1939년 3월 1일에는 히카리택시 주식회사의 이사 지배인이자 주식회사 히카리모터스의 이사가 되었고[16], 같은 날 강화양조의 주식 200원을 소유한 대주주로서 대표이사로 선출되었다.[17] 1939년 6월 30일 임기 만료된 강화양조주식회사 임원 개선 시 취체역으로 중임되었고[18], 같은 날 대광산업주식회사(大光產業株式會社)의 감사로 선임되기도 했다.[19]
2. 2. 5. 대륙상공
1939년 2월 27일 대륙상공주식회사(大陸商工株式會社)에서 신현구(申鉉九), 이두용(李斗鎔)이 퇴임하고, 같은 날 감사역에 권농동 141번지에 사는 이원영(李源瑛), 관훈동 66번지에 사는 이원종(李源琮)을 선임하였다.[14] 이후 대륙상공주식회사는 취체역이었던 그를 11월 27일 대표취체역에 선임하였다.[15]2. 3. 창씨개명과 사망
일제강점기 말기 창씨개명 정책이 시행되었으나 한동안 개명하지 않던 그는 1940년 7월 30일부로 羽谷源平|하타니 겐페이일본어로 창씨개명하였다. 8월 1일 이천응(李天應)은 山本天應|야마구치 텐응일본어, 이정원(李貞媛)은 山本貞媛|야마구치 히온일본어으로, 8월 10일 이원영(李源瑛)은 羽溪源瑛|하나티 겐에이일본어로 각각 개명하였다.[22]창씨개명 이후에도 기업 활동을 이어갔다. 1941년 3월 25일 대륙상공주식회사에서 이천응, 이정원 등과 함께 중역으로 중임되었다.[21] 같은 해 5월 16일에는 조선신보사 강화지국 창간 축하 광고를 강화양조주식회사 羽谷源平|하타니 겐페이일본어의 명의로 게재했다.[23] 1941년 9월 30일에는 인천조선주판매주식회사의 감사역으로 김진갑(金晉甲)과 함께 선임되었다.[20] 1941년 11월 7일 강화양조의 대표이사 및 히카리모터스의 이사로 각각 재선임되었다.
1942년 6월 22일에는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강화양조주식회사의 인허가 등기를 경성지방법원 강화출장소에 다시 제출했다.[22] 1942년 9월 1일에는 인천부 용강정 23-3에 있던 주류회사 인천조선주판매(주)의 감사로 위촉되었고,[24] 같은 날 대광산업(주)의 이사 및 강화양조의 대표이사로도 재선임되었다.[25]
사망 시점에 대해서는 기록 간에 차이가 있다. 조선총독부 관보 1944년 12월 4일자에는 조선초탄판매가공주식회사의 취체역(이사)이던 羽谷源平|하타니 겐페이일본어가 1944년 10월 25일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6] 그러나 같은 해 12월 12일자 관보에는 강화양조주식회사 취체역 겸 대표취체역이던 羽谷源平|하타니 겐페이일본어가 1944년 10월 19일에 사망하여, 10월 20일자로 山本貞媛|야마구치 젠요일본어(이정원)가 후임으로 선임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27]
3. 가족 관계
1943년 3월 5일 수원여자고등학교 합격자 명단에 羽谷炳順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 인물은 이원용의 일족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28]
4. 같이 보기
- 이원용 (1889년) - 같은 시대의 왕족 출신 문신
- 이원용 (1904년) - 1904년생 영화배우, 영화제작자
참조
[1]
뉴스
安校經識
황성신문
1908-01-25
[2]
뉴스
草校卒業
대한매일신보
1908-12-02
[3]
간행물
敍任及辭令
조선총독부 관보
1911-07-07
[4]
뉴스
물감을 훔치고
매일신보
1916-11-12
[5]
간행물
敍任及辭令
조선총독부 관보
1919-03-18
[6]
서적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37년판)
東亞經濟時報社
1937
[7]
서적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37년판)
東亞經濟時報社
1937
[8]
간행물
商業及法人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37-05-22
[9]
간행물
商業及法人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37-06-01
[10]
서적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東亞經濟時報社
1939
[11]
간행물
商業及法人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37-06-25
[12]
서적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東亞經濟時報社
1939
[13]
간행물
商業及法人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37-09-28
[14]
간행물
商業及法人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39-12-27
[15]
간행물
商業及法人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39-12-27
[16]
간행물
商業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41-08-16
[17]
서적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39년판)
동아경제시보사
1939
[18]
간행물
商業及法人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39-08-05
[19]
간행물
商業及法人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39-10-09
[20]
간행물
商業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41-11-25
[21]
간행물
商業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42-01-09
[22]
간행물
商業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42-07-30
[23]
뉴스
광고, 祝江華支局發展, 江華釀造株式會社
조선신문
1941-05-06
[24]
서적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42년판)
東亞經濟時報社
1942
[25]
서적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42년판)
東亞經濟時報社
1942
[26]
간행물
商業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44-12-04
[27]
간행물
商業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44-12-12
[28]
뉴스
기쁨의 合格者 - 水原公立高等女學校
매일신보
1943-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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