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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17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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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현상(1770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70년 경기도 영평군(현 포천시 일동면)에서 태어났다. 1798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80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이후 교서관 교리, 규장각 검서관 등을 역임했으며, 1811년 조선통신사의 제술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는 일본 문인들과 교류하며 시문을 주고받았고, 저서로 《역대언사》, 《태화문집》 등이 있다. 1822년 문천군 군수로 재직 중 사망했으며, 사후 증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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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1770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현상 (李顯相)
출생일1770년 6월 14일
출생지조선 경기도 영평군 일동면 기산리 (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사망일1822년 7월 14일
사망지조선 함경남도 문천군 군내면 북일리 문천군 관아
사망 원인병사
거주지조선
국적조선
별명자(字)는 상지(相之), 호(號)는 태화(太華)
종교유교 (성리학)
학력
학력 사항1800년(정조 24) 별시문과 병과 급제
직업
직업문신, 시인, 화가, 외교관, 통역관, 번역가
가족 관계
배우자풍양조씨
자녀이학령
이기녕
이봉녕
이인녕
딸 우계이씨
부모아버지 이한운, 어머니 밀양박씨
친척외조부 박성희, 장인 조기영, 사위 한석동, 사위 한용관, 매부 이준수, 매부 장현손, 손자 이재명

2. 생애

1798년(정조 22년) 생원시에 3등으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1] 1799년(정조 23) 6월 18일 정조명정전에서 유생에게 친히 주관하는 전시에 진사 조석정(曺錫正) 등과 함께 합격하고, 왕명으로 직부전시(直赴殿試)명을 받아 바로 과거시험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14] 1800년(정조 24년) 3월 22일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 23위로 급제하였다.[2] 1800년(정조 24년) 4월 13일 승문원에서 이문문신(吏文文臣)을 추가 선발할 때 한사람으로 선발되어[18], 이문문신(吏文文臣)이 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년) 12월 27일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가 되고,[17] 1801년(순조 1) 2월 23일 봉상시참봉(奉常侍參奉), 3월 7일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을 거쳐[19] 7월 6일 교서저작(校書著作)이 되었다.[23] 1802년(순조 2년) 2월 22일 교서관박사(校書博士)가 되었다가 그 해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거쳐 그 해 10월 4일 봉상시주부(奉常侍主簿) 등을 역임했다. 1803년(순조 3년) 9월 6일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가 되었다. 1804년(순조 4년) 규장각 검서관을 거쳐 교서관교리가 되고, 4월 12일 어떤 이유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순조가 명단을 보고 수단자에서 삭제, 석방되었다.[24] 1804년(순조 4) 7월 19일 성정각(誠正閣)에서 교서교리로 그 달의 윤대관이 되었다.[25] 8월 1일 성균관전적을 거쳐 1805년(순조 6) 다시 교서관교리에 임명되었다. 1806년 다시 교서관 교리가 되었다. 그 뒤 춘추관 기주관이 되고, 규장각 검서관, 교서관 정자, 봉상첨정(奉常僉正) 등을 지냈다.

1806년(순조 6년) 4월 1일 성정각(誠正閣)에서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로 그 달의 윤대관(輪對官)이 되고, 그날의 윤대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하여 추고받았다.[29] 이후 호조정랑(戶曹正郞)을 거쳐 아버지 이한운의 상으로 사직, 부친의 3년상을 탈상한 뒤 복직하였다. 1808년(순조 8년) 9월 12일 교서관교리,[30] 1809년(순조 9년) 봉상시첨정이 되었다. 1909년 3월 13일 봉상시첨정 겸 사헌부집의(奉常侍僉正兼司憲府執義)에 제수되었다. 1810년(순조 10)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이현상은 1770년(영조) 6월 14일 경기도 영평군 일동(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는 노인직으로 중추부동지사를 지낸 이성석(李聖錫)이고, 아버지는 승사랑과 통덕랑을 지내고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된 이한운(李漢雲)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동지중추부사 박성희(朴聖希)의 딸이다. 할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오음 윤두수(梧陰 尹斗壽)의 5남 방어사 윤간(尹旰)의 5대손 윤응화(尹應和)의 딸이다. 1768년(영조 35년)생 설도 있다.

그의 고조부 이상우(李商雨)는 문과 급제자였지만, 이상우의 양부 이영구와 양조부 이규(李規), 이여추(李汝樞)는 모두 후대에 세계가 실전되어 우계이씨 족보에서 누락되었다. 1910년 이후에 편찬된 족보에서 이상우는 생가 쪽 족보에 편입되었다. 고조부 이상우의 생가쪽 증조부인 이희헌(李希憲)은 선조~인조 때의 한의사이며, 임진왜란 직후 허준선조의 명으로 의서들을 저술, 편찬할 때 의서인출감교관으로 의서들의 영인과 발행을 감독했다. 이상우의 본생가 친조모는 전주이씨 충정공 이홍주의 서녀였다. 이상우의 생모 전주이씨는 세종대왕의 왕자 영해군 당의 6대손 승의랑, 진용교위를 지낸 이집(李鏶)의 딸인데, 이집은 영해군 당의 5대손 가선대부 이숙명(李俶命)의 서자였다. 고조부 이상우는 아버지쪽 먼 친척인 이영구의 양자가 되었다.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동(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근처에 살던 그의 가계는 고조부 이상우가 먼 친척 이영구의 양자가 되면서 광주군에서 영평군(현, 포천시 일동면, 이동면 일대)으로 이주했다.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박성희(朴聖希)이고, 참판 박상빈(朴尙彬)의 증손이다. 그런데 밀양박씨 규정공파 송월당파 족보에 의하면 박상빈의 동생 박상철(朴尙哲)의 손자 박재영(朴在榮)의 사위가 이한운으로 나타난다.

2. 2. 유년 시절 및 수학

이현상의 할아버지 이성석사부(士夫)로 분류되었으며[4][5], 일성록승정원일기에 기록이 남아있다. 이성석 대에 한성부 북부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아버지 이한운은 늦은 나이에 음보(蔭補)로 관직에 올라 장사랑과 승사랑을 역임했고, 최종 관직은 통덕랑이었다. 형제자매로는 인조 때의 정승 충정공 이홍주(李弘胄)의 서손자 이지백(李知白)의 후손에게 출가한 누이와, 옥성부원군 장만(張晩)의 후손 장현손(張顯孫)에게 출가한 누이가 있었다.

어려서 가학을 수학하다가 소년기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어느 성리학자에게 글을 배웠다. 아버지 이한운을 따라 한성부 종로방 세심대(洗心臺) 근처로 이주하였다. 1795년 3월 7일 정조가 주관한, 경모궁(사도세자) 결혼 50주년 기념 시회에 이현상과 아버지 이한운이 유학 자격으로 초청되어 갱운에 참여했다.[6] 이후 송원 김이택(松園 金履澤)의 문하생이 되었으며[7], 기원 유한지(綺園 兪漢芝), 취미 신재식(翠微 申在植)[7], 유당 김노경(酉堂 金魯敬)과 친구로 교류하였다.[8] 이후 풍양조씨 조기영(趙基永)의 딸과 결혼하였다.

유학(幼學)으로 사부학당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며, 정조가 친히 주관하는 강목 등 사서육경 강독에 참여하였다. 1794년(정조 18) 10월의 응제에서 중학제교수(中學製敎授) 윤익렬(尹益烈)과 함께 삼상(三上)을 받았다.[11] 1798년(정조 22) 식년과(式年科) 생원시에 3등으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사부학당에 들었다. 1798년 12월 10일 정조가 친히 성균관에서 태학생들에게 주관한 친시에 응시하고 3등을 하였다. 이때 효종의 고사를 본받아 《시경 (詩經)》 鹿鳴에 나오는 아유가빈(我有嘉賓)이라는 구절을 새긴 은배(銀杯)를 하사받았다.[12] 1799년 3월 28일 정조가 태학에서 초계문신과 유생을 대상으로 한 응제에 응시하여, 참가자 전원에게 정조의 명으로 은배시집 1권을 받았다.[13] 1799년(정조 23) 6월 18일 정조명정전에서 유생에게 친히 주관하는 전시에 진사 조석정(曺錫正) 등과 함께 합격하고, 왕명으로 직부전시(直赴殿試)명을 받아 바로 과거시험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14] 정조가 친히 전강한 전시 중 부(賦)에서 삼중(三中)을 받았다.[15]

2. 3.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이현상은 1798년(정조 22) 생원시에 3등으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1] 1799년(정조 23) 6월 18일 정조명정전에서 유생에게 친히 주관하는 전시에 진사 조석정(曺錫正) 등과 함께 합격하고, 왕명으로 직부전시(直赴殿試)명을 받아 바로 과거시험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14] 1800년(정조 24년) 3월 22일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 23위로 급제하였다.[2] 1800년(정조 24년) 4월 13일 승문원에서 이문문신(吏文文臣)을 추가 선발할 때 한사람으로 선발되어[18], 이문문신(吏文文臣)이 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년) 12월 27일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가 되고,[17] 1801년(순조 1) 2월 23일 봉상시참봉(奉常侍參奉), 3월 7일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을 거쳐[19] 7월 6일 교서저작(校書著作)이 되었다.[23] 1802년(순조 2년) 2월 22일 교서관박사(校書博士)가 되었다가 그 해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거쳐 그 해 10월 4일 봉상시주부(奉常侍主簿) 등을 역임했다. 1803년(순조 3년) 9월 6일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가 되었다. 1804년(순조 4년) 규장각 검서관을 거쳐 교서관교리가 되고, 4월 12일 어떤 이유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순조가 명단을 보고 수단자에서 삭제, 석방되었다.[24] 1804년(순조 4) 7월 19일 성정각(誠正閣)에서 교서교리로 그 달의 윤대관이 되었다.[25] 8월 1일 성균관전적을 거쳐 1805년(순조 6) 다시 교서관교리에 임명되었다. 1806년 다시 교서관 교리가 되었다. 그 뒤 춘추관 기주관이 되고, 규장각 검서관, 교서관 정자, 봉상첨정(奉常僉正) 등을 지냈다.

1806년(순조 6년) 4월 1일 성정각(誠正閣)에서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로 그 달의 윤대관(輪對官)이 되고, 그날의 윤대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하여 추고받았다.[29] 이후 호조정랑(戶曹正郞)을 거쳐 아버지 이한운의 상으로 사직, 부친의 3년상을 탈상한 뒤 복직하였다. 1808년(순조 8년) 9월 12일 교서관교리,[30] 1809년(순조 9년) 봉상시첨정이 되었다. 1909년 3월 13일 봉상시첨정 겸 사헌부집의(奉常侍僉正兼司憲府執義)에 제수되었다. 1810년(순조 10)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다.

2. 4. 조선 통신사 제술관과 일본과의 교류

1810년(순조 10년) 12월 12일 봉상시첨정(奉常侍僉正)으로 이듬해에 파견되는 조선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에 선정되었다.[32] 1811년 1월 10일 이조의 건의로 시행한 구전정사(口傳政事)에서 통신사 제술관에 재선정되었다.[33]

1811년(순조 11년) 통신사행의 사신으로는 정사 죽리 김이교(金履喬), 부사에 남진 이면구(南霞 李勉求), 제술관(製述官)은 이현상, 정사 서기는 청산 김선신(淸山 金善臣), 종사 서기는 백옹 이명오(泊翁 李明五)가 참여하였다.[34] 1811년 2월 12일 통신사를 따라 부산과 쓰시마섬을 거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현상은 이때 "에도 문사들과의 교유를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었음을 토로하였고[35], 이때 만난 일부 일본 문인들 중 일부와는 귀국 후에도 꾸준히 편지, 서신, 시문을 주고 받았다.

조선통신사 행렬도


마츠자키 고도(松崎慊堂)


3월 12일에 부산포를 떠나 윤3월 29일 쓰시마에 도착했다. 외교관 외에도 막부의 허가를 받은 고가 세이리(古賀精里)와 그의 문하생 구사바 하이센(草場佩川), 히구치 시센(樋口淄川) 등이 학술교류 목적으로 통신사 일행을 만났다. 고가와 그의 문하생들은 정사 김이교, 부사 이면구, 제술관 이현상, 서기 김선신, 이명오, 반인 정문철, 역관 현식 등과 만나 시문을 필담으로 주고받았다. 6월 21일 쓰시마의 통신사 숙소에서 이현상과 청산 김선신 등이 고가 세이리 일행과 만나서 주고받은 시문집은 이면구 등에 의해 《왜한시문집 (倭韓詩文集)》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고가 세이리의 수행원인 구사바 하이센(草場佩川)과도 시문을 주고받았다. 이때 그는 조선에서 출발하기 직전 김조순(金祖淳)에게 받은 부채를 선물로 증정하였다. 이때 이현상은 '하이센 족하는 해상의 귀인이라, 이를 증정하오니 그 정 잊지 말라(今、佩川足下を見るに、乃ち海上の高人なり。 此れを以て奉呈せん。幸いに領して情において忘るること勿れ。)' 하였다. 이현상은 자신이 가져온 인장 2개를 선물한다. 이때 이현상은 조선에서 가져온 서화들 역시 그에게 선물하였다. 자신이 차고 있던 소지품 중 일부를 풀어 한조각 심정을 영원히 잊지 말라며 하이센에게 선물로 주었다. 구사바 하이센은 이를 戊戌文草에 기록하였다.

1811년 6월 27일 쓰시마에서 배편으로 출발, 7월 2일 부산포에 도착했다. 귀국 후 1811년(순조 11년) 8월 4일 심규로(沈奎魯)의 건의로, 통신정사 부호군 김이교, 통신부사 부사직 이면구 이하 일본 조선 통신사 참여자들을 시상할 때, 제술관으로 참여한 이현상 역시 우직(右職)으로 승진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8월 4일 정조의 왕명으로 우직에 제수되었다.[36] 1811년 8월 13일 승문원판교(判校)를 거쳐 1811년 10월 1일 교서관판교(校書館判校)로 그 달의 윤대관이 되었다.

이후 1811~1812년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새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의 쇼군 취임을 축하한다는 이유로 통신사(通信使)가 파견될 때 제술관으로 김이교, 이면구 등을 수행하여 쓰시마섬에 다녀왔다.[37] 이때 쓰시마섬에서의 시문창화를 교류하는 석상에서 코가 세이리(古賀精里)의 청으로 특별히 일본 화가 타니 분초(谷文晁)의 그림 산수도(山水圖)에 찬을 썼다. 타니 분초의 다른 그림 부사산도(富士山圖)에는 추사 김정희가 찬하였다.[38]

귀국 이후로도 그는 마츠자키 고도(松崎慊堂) 등의 일본 문인들과 편지 서신을 주고받았다. 조선 통신사의 체류기간 중 그는 일본의 불교승려와 시문을 주고받기도 했다.

사신은 아니었으나 일본의 유학자 미야케 기쓰엔(三宅橘園)이 쓰시마섬을 찾아와 이현상, 서기 김선신(金善臣, 서기 이명오(李明五) 등을 만나 필담으로 시문을 주고받았다. 미야케 기쓰엔은 막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 개인의 자격으로 쓰시마에 가서 통신사 일행을 찾아서 이현상과 김선신, 이명오 등을 만나 필담으로 시문을 주고 받았다. 이는 미야케 다치요시(三宅威如斎)에 의해 1812년 《계림정맹 (鷄林情盟)》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39] 후지모토 렌(藤本廉) 등도 찾아와 교류, 후지모토의 시를 조선에 소개하기도 했다.[40]

고가 세이리(古賀精里)와 그의 문인인 구사바 하이센(草場佩川), 히구치 시센(樋口淄川) 등을 대동해 쓰시마를 찾아왔다. 고가 세이리 일행은 정사 김이교, 부사 이면구, 제술관 이현상, 서기 김선신, 이명오 등과 성리학 학문에 관한 의견을 주고 받았다. 고가 세이리 일행과 주고 받은 담론집은 1811년 《대례여조 (對禮餘藻)》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2. 5. 생애 후반

1812년(순조 12) 6월 12일 교서관 판교로 그 달의 윤대관이 되고, 그해 9월 22일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1813년(순조 13) 6월 4일 신창현감(新昌縣監)에 제수되어 부임[41], 신창현감 홍주진관 병마절제도위(洪州鎭管兵馬節制都尉)로 나갔다. 6월 6일 사간원, 사헌부에서 이조낭관을 통해 계를 올려 그의 인사 서경(人事 署經)이 부당하다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신창현감 재직 중 그해 11월 30일 어머니 밀양박씨의 상(喪)으로 장계를 올려 사직하였다. 바로 충청도관찰사 조정철(趙貞喆)이 장계(狀啓)를 올려 그의 모친상사를 통보하고 사직처리되었다.[42]

3년상 탈상 후 복직, 1818년(손조 18년) 8월 7일 성균관전적, 이후 겸 양현고주부(養賢庫主簿)을 거쳐 이듬해 4월 1일 교서관판교가 되고, 1819년(순조 19년) 6월 25일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으로 부임하였다. 그해 다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성균관전적(行成均館典籍) 겸 양현고주부가 되고, 1819년(순조 19년) 일본에 통신사가 파견될 때 제술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820년(순조 20년) 귀국 후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가 12월 18일 행문천군수(行文川郡守)에 임명되고[43] 12월 20일 겸춘추관(兼春秋官), 안변진관 병마동첨절제사(安邊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겸임했다. 만년에는 1800년대 후반부터 자신의 집안 족보 편찬 등 문중 행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태화문집 (太華文集)》, 역사서인 《역대언사 (歷代言事)》 12권 61책 등이 있고, 그림으로는 서제 묵죽도(畵題 墨竹圖) 등 소수가 전한다. 1822년 6월 15일 함경감사 이면승(李勉昇)이 올린 지방관 근무성적에서 가끔 타당하지 않게 처리하나, 그 자신은 속되지 않게 처신한다(措或失宜政自不俗)고 보고하였다.[44] 1822년(순조 22년) 6월 24일 부인 풍양조씨가 사망했고, 같은 해 7월 14일 그도 문천군 군내면 북일리(北一里) 아산정(衙山亭) 동남쪽, 문천 관아에서 재직 중 사망했다. 시신은 영평군 일동면으로 운구되었다.

3. 사후

그의 시문과 글씨는 정리, 재간행되지 못하고, 조선 멸망 후 가계가 몰락하면서 일부만이 전한다. 그밖에 일본에 조선통신사 제술관으로 있을 때 일본의 관료, 유학자, 승려들에게 선물로 준 친필 필적 몇개가 일본에도 전한다. 사후 증 통정대부 예조참의추증되었다가 다시 아들 이기녕이 노인직에 올라 1876년(고종 13년)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가증(加贈)되었다.

문보의 이재명 편
3번째 칸에 그의 이름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영평군 동면 백아리(白鵝里, 현 포천시 일동면 백아리) 상정동(上井洞) 계좌(癸坐)에 부인 풍양조씨와 합장되었다. 뒤에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118번지 가족묘 건좌(乾坐)로 이장되었다.

4. 저서 및 작품


  • 역대언사 (歷代言事) 12권 61책 (1804년)
  • 서제 묵죽도(畵題 墨竹圖) (1811년)
  • 태화문집 (太華文集)

5. 가족 관계

고조부는 이상우(1648/1652 - 1741)이다. 증조부는 이익수(李益壽)이다. 조부는 이성석(1714년 11월 17일 ~ 1799년 1월 12일)이고, 조모는 해평 윤씨(1713년 3월 1일 ~ 1785년 3월 6일)로 윤응화(尹應和)의 딸이자 오음 윤두수의 5남 윤간(尹旰)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이한운(李漢雲, 1735년 6월 22일 ~ 1806년 6월 8일)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1735년 6월 12일 ~ 1813년 11월 27일)로 동지중추부사 박성희(朴聖希)의 딸이다. 외조부는 박성희(朴聖希)이다.

누이 우계 이씨의 매부는 이준수(李晙秀)로, 부친은 이언복(李彦復)이며 충정공 이천 이홍주 7대손이자 이지백의 5대손이다. 이준수의 외조카는 이광악(李光岳)이다. 또 다른 누이 우계 이씨의 매부는 장현손(張顯孫, 음찰방, 인동 장씨)으로, 옥성군 장만(張晩) 후손 장석호(張錫祜)의 아들이다. 장현손의 외조카로는 장사필(張思弼)·장사덕(張思德)·장사복(張思福)이 있고, 외조카사위는 이장운(李章運, 참봉)과 황원식(黃元植, 무과)이다.

부인은 풍양 조씨(1767년 4월 1일 ~ 1822년 6월 24일)로 조기영(趙基永)의 딸이다. 처증조부는 조계(趙啓), 처조부는 조진수(趙鎭洙)이다. 장인은 조기영(趙基永, 1737년 ~ ?)이고, 장모는 무안 박씨로 박성민(朴聖民)의 딸이다.

아들 이학령(李鶴寧)과 며느리가 있었으나 요절했고, 손자 이익증(李翼增)도 요절했다.

아들 이기령(李麒寧, 1786년 9월 6일 ~ 1876년 2월 13일)과 며느리 의령 남씨(1785년 8월 29일 ~ 1847년 3월 14일) 사이에서 손자 이재항(李在恒, 1810년 4월 19일 ~ 1853년 10월 29일)·이재삼(李在三, 1814년 1월 12일 ~ 1873년 4월 17일)·이재홍(李在弘, 1817년 8월 4일 ~ 1873년 1월 10일)을 두었다. 손자 이재항의 첫 부인은 달성 서씨(1807년 1월 2일 ~ 1826년 4월 22일)로 서유설(徐有說)의 딸이자 약봉 서성의 후손이며, 두 번째 부인은 여흥 이씨(1808년 5월 20일 ~ 1886년 12월 26일)로 이지환(李枝煥)의 딸이자 회재 이언적의 후손이다. 손자 이재삼의 부인은 한산 이씨(1813년 6월 28일 ~ 1877년 5월 24일)로 오위장 이운영(李雲英)의 딸이다. 손자 이재홍의 첫 부인은 문화 류씨(1815년 8월 3일 ~ 1835년 6월 14일)로 감찰 류지태(柳持泰)의 딸이고, 후처는 김씨(金氏), 삼처는 평양 조씨이다. 이기령의 손녀사위는 남준희(南俊熙, 본관은 의령)·조한영(趙漢永, 평양인)·임백한(任百漢, 본관은 풍천)이다. 남준희는 군수 남상순(南象淳)의 아들이고, 자는 남상설(南相說, 문과)이며, 딸은 이창익(李昌翼, 부사)에게 출가했다. 임백한의 부친은 춘상(春常)이고, 자는 임오준(任午準, 군수)이다.

아들 이봉령(李鳳寧 1793년 9월 21일 ~ 1871년 5월 5일)과 며느리 광주 이씨(1791년 1월 4일 ~ 1860년 1월 14일) 사이에서 손자 이재승(李在升, 1809년 10월 13일 ~ 1853년 4월 16일)·이재응(李在應)·이재긍(李在兢, 1818년 11월 2일 ~ 1876년 윤 5월 11일)·이재성(李在星, 1823년 11월 9일 ~ 1867년 6월 9일)·이재흥(李在興)·이재명(李在明, 1830년 11월 20일 ~ 1891년 5월 14일)을 두었다. 손자 이재승의 첫 부인은 연안 이씨(1808년 10월 1일 ~ 1829년 4월 23일)로 이정계(李鼎季)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은 전주 이씨(1810년 8월 23일 ~ 1879년 윤 3월 24일)로 이진방(李鎭邦)의 딸이다. 손자 이재성의 부인은 해주 오씨(1819년 9월 7일 ~ 1879년 8월 24일)로 진사 오언용(吳彦鏞)의 딸이자 좌랑 명철(命哲)의 손녀이고 추탄 오윤겸의 후손이며, 외조부는 무안 박씨 박겸빈(朴謙彬)이다. 손자 이재명의 부인은 동래 정씨(1829년 12월 5일 ~ 1901년 10월 12일)로 장사랑 정기홍(鄭基弘)의 딸이다.

아들 이인령(李麟寧, 1800년 8월 28일 ~ 1883년 11월 5일, 다른 이름은 일녕(馹寧))과 며느리 양주 조씨(1799년 ~ 1849년) 사이에서 손자 이재만(李在晩)과 손녀 우계 이씨를 두었다. 손녀사위는 류본영(柳本英)이다.

딸 우계 이씨의 사위는 한석동(韓奭東, 청주 한씨)이다. 또 다른 딸 우계 이씨의 사위는 한용관(韓容觀, 청주 한씨)이다.

첩에게서 얻은 자녀에 대한 기록은 없다.

6. 기타


  • 조선통신사 제술관으로 방문 시 일본측 인사들에게 봉정한 친필서예 등이 일부 현재 일본내에 전하고 있다.
  •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덕현(德峴) 간좌(艮坐)에 조부 이성석 내외의 합장묘가 있고, 그 아래 인좌에 아버지 이한운, 어머니 밀양 박씨의 묘소가 있다. 그의 후손들 중 다시 광주군 언주면 일대로 이주하여 일부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원동 철곡 이복남 묘소 오른쪽 언덕 술좌, 그밖에 시흥군 안산군자면 초지리 가덕곡 양좌, 강남구 신원동 유좌, 신좌, 내곡동 자좌 등 이전 집성촌인 구 광주군 근처에 묘소가 있다.
  • 그의 시 일부는 이명오의 《박옹시초 (泊翁詩鈔)》 권5 시편에 일부 수록되어 있다.
  • 1811년 대마도 체류 중 미야케 이조사이(미야케 이조사이/三宅威如齋일본어) 등과 주고받은 필담 모음집인 <계림정맹 鷄林情盟>에 그와 미야케가 주고 받은 증답시가 수록되었다. 또한 미야케 이조사이의 호 기쓰엔(橘園)을 이현상이 지은 것이라 한다.
  • 영남읍지(嶺南邑誌) 제12권의 유곡도선생안에는 그의 부임일, 이임일 기록은 없고 이름만 간략히 실려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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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李顕相:文科及第者 http://people.aks.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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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적 국조문과방목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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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간행물 시수 김용묵 등 부과 및 석방 일성록 180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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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간행물 내각일력 1805-11-27
[27] 간행물 내각일력 1805-11-30
[28] 간행물 선조 지장 감인 각신 시상 일성록 1805-11-30
[29] 간행물 이유원 등의 처벌 및 추고 일성록 1806-04-01
[30] 간행물 경희궁 방문 및 행사 일성록 1809-09-18
[31] 간행물 윤대관 소견 일성록 1810-08-05
[32] 서적 동사록
[33] 간행물 통신사 종관 구전 정사 시행 명령 일성록 181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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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문서 일성록 순조 20년(1820) 12월 18일(경자) 1820-12-18
[44] 문서 일성록 1822년 6월 15일 182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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