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녕 (1793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봉녕은 1793년에 태어나 1871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그는 1826년과 1836년 두 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사행단의 수행원으로 다녀왔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 학자들과 교류하며 시문을 주고받았다. 1842년 하양 현감, 1846년 영천 군수를 역임하며 지방관으로 활동했고, 1851년에는 의금부 형방도사로 추국에 참여했다. 저서로는 《분서집》과 《분서고》가 있다. 그의 손자인 이휘선은 대한제국에서 평리원 검사를 지냈다.

이봉녕 (1793년)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역사 평론가 - 안드레이 란코프
    안드레이 란코프는 러시아 출신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유학 후 현재 국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북한의 정치, 사회, 역사, 특히 권력 구조와 주민 생활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NK News, 코리아타임스 등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Korea Risk Group의 이사로 활동하는 등 북한 관련 연구 및 대중 활동을 활발히 이어가는 북한학 전문가이다.
  • 역사 평론가 - 이현상 (1770년)
    이현상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시인으로, 1800년 문과 급제 후 규장각 검서관, 교서관 교리 등을 역임하며 왕실 행사 참여 및 서적 관리에 힘썼고, 1811년 조선통신사 제술관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외교 활동을 펼쳤으며, 『태화문집』과 『역대언사』를 남겼다.
  • 번역가 - 이응준 (조선)
    이응준은 조선 후기의 역관으로, 1850년 역과에 급제하여 외교 문서를 처리하고 태극기를 제작했으며, 강화도 조약 및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에 참여했다.
  • 번역가 - 이유녕
    이유녕은 1816년 태어나 1890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이문학관, 비변사 낭청, 돈녕부 도정 등을 역임했으며, 아들의 현달로 가선대부 내부협판에 추증되었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이봉녕은 1793년(정조 17년) 9월 21일 경기도 영평군 일동면 기산리(현,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현상이고, 어머니는 풍양 조씨(豊壤趙氏)로, 승지와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조성보(趙聖輔)의 6대손이며 승사랑 조기영(趙基永)의 딸이다. 5대조 이상우(李商雨)는 포천에 살던 먼 일가인 이영구(李英久)의 양자로 입양되었지만, 생가 7대조 할머니이자 이상우의 생조모인 전주 이씨는 재상 이홍주(李弘胄)의 측실 소생 서녀였다.

1826년(순조 26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동지부사 자제군관으로 임명되어 처음 청나라를 방문했다. 이후 1833년(순조 33년)과 1836년(헌종 2년)에도 각각 부사와 동지사사은사 신재식의 수행원으로 청나라를 방문했다. 이 과정에서 왕희손(汪喜孫), 왕균(王筠), 이장욱(李璋煜), 황작자(黃爵滋), 예인원(倪印垣) 등 다양한 청나라 인사들과 교류했다. 특히 황작자와는 시문을 주고받았는데, 이는 《상간편 (相看編)》이라는 책으로 엮어져 간행되기도 했다. 또한, 이봉녕은 청나라 북경에서 《연대묵연 (燕臺墨緣)》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1842년(헌종 8) 하양현감을 시작으로 1846년 영천군수를 지냈으며, 1847년에는 경상감사의 건의로 영천군수에 유임되었다. 1849년1850년에는 경상좌병영의 군사 점검 및 암행감찰을 통과했고, 1851년에는 어영청에서 지방 수령 적임자로 추천받았다. 같은 해 의금부 형방도사로서 권택하, 채희재 등 관련자들의 추국, 형문, 형벌 집행에 참여했다.

1859년(철종 10)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에 임명되었다가 뒤에 다시 돈녕부판관이 되고, 9월 16일 이조의 구전정사로 사재감주부 김현익(金顯翼)과 직을 바꿔 다시 사재감주부가 되었다. 1860년 음력 윤 3월 11일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가 되었다. 그해 8월 19일 고양군수(高陽郡守) 겸 양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楊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로 나갔고, 1861년(철종 12) 5월 16일 지평현감(砥平縣監) 겸 광주진관병마절제도위(廣州鎭管兵馬節制都尉)로 부임하였다. 1864년(고종 1) 2월 고양군수양주진관으로 부임하였다가 그해 6월 4일 사직하였다.

그는 1836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절 때 수행한 신재식(申在植), 현풍현감, 풍기군수 등을 지낸 소북계열인 남상교(南尙敎) 등과 교류하였다. 황작자와 주고받은 서신 중 조선의 역사를 설명한 한 소책자에서 그는 조선의 역사는 단군 왕검에서 시작된다 하였고 성리학의 법통은 퇴계 이황의 뒤를 율곡 이이가 정통을 계승하였다고 보았다.

저서로는 《분서집 (汾西集)》과 미간행 유고 《분서고 (汾西稿)》 등이 있다. 1871년(고종 8) 5월 5일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내곡동(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서 사망했다.

2.1. 출생과 가계

1793년(정조 17년) 9월 21일 경기도 영평군 일동면 기산리(현,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현상이고, 어머니는 풍양 조씨(豊壤趙氏)로, 승지와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조성보(趙聖輔)의 6대손이며 승사랑 조기영(趙基永)의 딸이다.

이봉녕의 5대조 이상우(李商雨)는 포천에 살던 먼 일가인 이영구(李英久)의 양자로 입양되었지만, 이봉녕의 생가 7대조 할머니이자 이상우의 생조모인 전주 이씨는 재상 이홍주(李弘胄)의 측실 소생 서녀였다. 이상우의 생모 전주 이씨 역시 서출로, 그 친정아버지 이집은 영해군 이당의 5대손 가선대부 이숙무의 서자였다.

이상우의 양부 이영구와 양조부 이규(李規), 이여추(李汝樞)는 모두 후대에 세계가 실전되어 우계이씨 족보에서 누락되었다. 1910년 이후에 편찬된 족보에서 이봉녕의 5대조 이상우는 다시 생가 쪽 족보에 편입되었다. 생가쪽 8대조는 이희헌으로, 선조~인조 때의 한의사이며, 임진왜란 직후 허준선조의 명으로 의서를 저술, 편찬할 때 의서인출감교관으로 의서들의 영인과 발행을 감독했다.

증조부 이성석포천시 일동면 기산리에서 한성부 북부로 이사왔고, 할아버지 이한운은 1795년 무렵 한성부 종로방 세심대로 이사왔다.

어머니 풍양 조씨는 승사랑 조기영(趙基永)의 딸이며, 승지와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한 조성보(趙聖輔)의 6대손이다. 그러나 어머니 풍양 조씨의 5대조 조상만(趙尙萬)은 6대조 조성보의 서자였다. 조기영은 승사랑을 역임했는데, 2016년 경매에 나왔던 이일녕(李馹寧, 뒤에 인령(麟寧))의 과거 시험 답안지에 외조부 승사랑 조기영 본 풍양으로 기록되었다.

형제로는 형 이학령(李鶴寧), 이기령(李騏寧)과 동생 이인녕이 있었다. 이학령은 익증(翼增)이라는 아들을 두었지만 모두 일찍 죽었고, 둘째 형 이기령은 단양으로 이주하여 1861년(철종 12년) 76세의 고령에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고, 후에 노인직으로 자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다. 동생 이인녕은 승문원 이문학관과 군직, 돈녕부도정 등을 역임했다. 그밖에 우계 이씨 족보에는 실전되었으나, 풍양 조씨 한산군파의 족보 기록에는 누이 1명이 있어 청주 한씨 한석동(韓奭東)에게 출가한 누이가 1명이 전한다. 1827년의 족보에 수록되었으나 뒤에 실전된 또 다른 누이는 청주 한씨 한용관(韓容觀)에게 출가했는데, 주부 한상홍(韓象洪)의 아들이다.

2.2. 사행길 수행원

이봉녕은 1826년(순조 26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동지부사 자제군관으로 임명되어 처음 청나라를 방문했다. 이후 1833년(순조 33년)과 1836년(헌종 2년)에도 각각 부사와 동지사사은사 신재식의 수행원으로 청나라를 방문했다.

이 과정에서 이봉녕은 왕희손(汪喜孫), 왕균(王筠), 이장욱(李璋煜), 황작자(黃爵滋), 예인원(倪印垣) 등 다양한 청나라 인사들과 교류했다. 특히 황작자와는 시문을 주고받았는데, 이는 《상간편 (相看編)》이라는 책으로 엮어져 간행되기도 했다. 또한, 이봉녕은 청나라 북경에서 《연대묵연 (燕臺墨緣)》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2.2.1. 1826년 동지사 수행

1826년(순조 26년) 10월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冬至使)의 동지부사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임명되어, 부사 신재식(申在植)의 수행원으로 홍양후(洪良厚), 신태희(申泰羲)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왕희손(汪喜孫), 왕균(王筠), 월정(月汀) 또는 약정(篛汀) 이장욱(李璋煜) 등을 만나보았다. 1827년 3월 귀국하였다.

이후 이장욱과 교류하다가 어느 시점에 연락이 끊어졌는데, 이장욱은 1831년(순조 31년) 청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된 홍석주(洪奭周)의 사위이자 자제군관 겸 타각군관(打角軍官)으로 파견된 한필교(韓弼敎)에게 김노경(金魯敬), 청산 김선신(淸山 金善臣), 홍군 일능(洪君 一能, 홍양후), 이군주경(李君周經, 이봉녕) 등의 안부를 물었다 한다.

2.2.2. 1833년, 1836년 사행

1833년(순조 33년) 부사를 따라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836년(헌종 2년) 10월 16일에는 동지사사은사 신재식의 수행원으로 임백연(任百淵) 등과 함께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청나라 학자 황작자(黃爵滋), 예인원(倪印垣) 등과 시문을 주고받았다. 신재식과 이봉녕 외 5명이 황작자와 주고받은 시문은 《상간편 (相看編)》으로 정리, 간행되었다. 특히 예인원은 신재식과 이봉녕을 따로 찾기도 했다. 이봉녕은 청나라 북경에서 《연대묵연 (燕臺墨緣)》을 선물로 받아왔다.

2.3. 관료 생활

이봉녕은 1842년(헌종 8) 하양현감을 시작으로 1846년 영천군수를 지냈으며, 1847년에는 경상감사의 건의로 영천군수에 유임되었다. 1849년1850년에는 경상좌병영의 군사 점검 및 암행감찰을 통과했고, 1851년에는 어영청에서 지방 수령 적임자로 추천받았다. 같은 해 의금부 형방도사로서 권택하, 채희재 등 관련자들의 추국, 형문, 형벌 집행에 참여했다.

2.3.1. 지방관 근무

1842년(헌종 8) 8월 29일 하양현감에 임명되었는데, 9월 21일에 하직인사를 하고 출발하였으나, 병으로 10월 7일에 임지에 도임, 경상감영에 보고하였다. 늦은 부임이 문제시 되었으나 발병으로 인한 것이 참작되어 면책되었다. 1846년 음력 윤5월 2일 영천군수에 임명되고, 1847년(헌종 13) 5월 18일 경상감사 김공현(金公鉉)의 건의로 영천군수에 유임되었다. 같은 날 경상감사 김공현은 가뭄이 극심하여 상경중이던 지방관 상주목사, 영천군수, 용궁, 비안현감 등을 임지로 돌려보내고, 신임 지방관의 빠른 부임을 건의하여 윤허받았다.

1849년 3월 11일 경상좌병영에서 각 군현 진(鎭)의 속오군(束伍軍) 및 주진(主鎭) 군병 현황 점검 때 통과하였다. 1850년(철종 1) 2월 경상좌병영의 각 군현 암행감찰을 받았는데, 역처(役處) 취점, 공역(公役), 군액(軍額) 결원 여부, 기계(器械) 완비, 각 진(鎭)의 영장(營將) 및 수령(守令) 점검에서 이상없이 통과하였다.

1851년(철종 2) 1월 15일 어영청에서 지방 수령(守令)에 적합한 3인 중 한 명으로 추천받았다.

2.3.2. 의금부 형방도사 근무

1851년 10월 6일 이봉녕은 형방도사로서 권택하와 어느 노파에 대한 추국에 참여했다. 10월 7일에는 채희재, 기덕우, 최치각의 추국에 참여했다.

10월 20일에는 채희재, 고변인 고성욱, 혐의자 기덕우의 대질심문과 채희재, 기덕우, 최치각, 김응도, 유희균 등에 대한 형문에 참여했다. 10월 23일에는 유염신 추국, 채희재와 정치상의 대면 신문, 그리고 기덕우, 최치각, 김응도 등에 대한 추국 및 형벌 집행에 참여했다. 이날 채희재에게는 장 1대, 정치상에게는 장 5대, 나머지 인물들에게는 각 장 3도를 쳤다. 10월 24일에는 정치상, 채희재, 기덕우, 최치각, 김응도, 정득현에 대한 형문 및 형벌 집행에 참여했다. 각 인물에게 장 5도에서 9도까지 차등을 두어 형벌을 집행했다.

11월 4일에는 유기균, 유희균, 최치각 관련 형문에, 11월 5일에는 최치각, 유기균, 정득현, 유희균 관련자 형문에 참여했다. 11월 6일과 11월 7일에는 최치각, 정득현 관련 신문 및 최치각 추국에 별형방도사로 참여했다. 11월 8일 최치각 관련 추국에는 형방도사로 참여했다.

2.4. 생애 후반

1859년(철종 10) 9월 15일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에 임명되었다가 뒤에 다시 돈녕부판관이 되고, 9월 16일 이조의 구전정사로 사재감주부 김현익(金顯翼)과 직을 바꿔 다시 사재감주부가 되었다. 1860년 음력 윤 3월 11일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가 되었다. 그해 8월 19일 고양군수(高陽郡守) 겸 양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楊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로 나갔고, 1861년(철종 12) 5월 16일 지평현감 김홍남(金鴻男)과 상환 보직변경되어 지평현감(砥平縣監) 겸 광주진관병마절제도위(廣州鎭管兵馬節制都尉)로 부임하였다.

1861년 7월 21일 정언 이만기(李晩耆)의 상소 내용을 규탄하는 임백연(任百淵), 이만용(李晩用), 장악원정 이한영(李漢永) 등의 연명상소에 공동 서명하였다. 1862년 6월 13일 경기도 도사(都事) 이규하(李奎夏)의 지방관 포폄에서 公納無愆一可反三을 이유로 근무고과 상(上)을 받았다. 1862년 12월 20일 지평현감에서 면직되었다.

1864년(고종 1) 2월 고양군수양주진관으로 부임하였다가 그해 6월 4일 사직하였다.

그는 1836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절 때 수행한 신재식(申在植), 현풍현감, 풍기군수 등을 지낸 소북계열인 남상교(南尙敎) 등과 교류하였다. 이 중 신재식은 그의 아버지 이현상과도 교류하였는데, 1804년(순조 4)에 아버지 이현상이 편찬한 《역대언사》의 발문을 써주기도 했다. 그밖에도 청나라에 두 번째로 다녀올 때 만난 중국인 황작자(黃爵滋), 예인원(倪印垣) 등과도 편지서신을 주고받으며 시문과 간찰, 성리학 등에 관련된 주제를 주고받았다. 황작자와 주고받은 서신 중 조선의 역사를 설명한 한 소책자에서 그는 조선의 역사는 단군 왕검에서 시작된다 하였고 성리학의 법통은 퇴계 이황의 뒤를 율곡 이이가 정통을 계승하였다고 보았다.

저서로는 《분서집 (汾西集)》과 미간행 유고 《분서고 (汾西稿)》 등이 있다. 1871년(고종 8) 5월 5일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내곡동(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서 사망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내곡동(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북쪽 산 자좌(子坐), 헌인릉 인근에 부인 광주이씨와 합장되었다.

대한제국 때 평리원 검사, 판사를 역임한 이휘선은 그의 여섯째 아들 이재명의 아들이고, 인천부주사, 인천감리서 주사, 안산군 군주사를 지내고 시흥에 사립 초등학교 초지초등학교를 세운 이민선도 봉녕의 손자였다.

1881년(고종 18년) 8월 ~ 9월 한성에서 발생한 안기영의 옥사 때, 그의 생전 그의 집에 문객으로 있던 강화(江華) 사람 이철구(李哲九)의 이름이 의금부 채동술(蔡東述)의 공초에 언급되었다. 그러나 당시 그는 이미 사망자였고 별 혐의점이 없어 그에게는 영향이 가지 않았다.

1907년(광무 10) 7월 8일 손자 이휘선(李徽善)이 가선대부 행평리원검사에 올랐으므로, 의법전(依法典)에 따라 증 정3품 통정대부 규장각부제학(贈 正三品 通政大夫奎章閣副提學)에 추증되었다.

3. 저서

* 분서집
* 분서고 (2권, 미간행 유고)

4. 가족 관계

👆
좌우로 밀어서 보기
관계 || 이름 || 출생일 || 사망일 || 비고
할아버지이한운(李漢雲)1735년 6월 22일1806년 6월 8일
할머니밀양 박씨1735년 6월 12일1813년 11월 27일동지중추부사 박성희(朴聖希)의 딸
아버지이현상(李顯相)1770년 6월 14일1822년 7월 14일
어머니풍양 조씨1767년 4월 1일1822년 6월 24일승사랑 조기영(趙基永)의 딸
이학령(李鶴寧)
이기령(李麒寧)1786년 9월 6일1876년 2월 13일
동생이인녕(李麟寧)1800년 8월 28일1883년 11월 5일다른 이름은 일녕(馹寧)
누이우계이씨매부 청주한씨 한석동(韓奭東)
누이우계이씨매부 청주한씨 한용관(韓容觀)
부인광주이씨1791년 1월 4일1860년 1월 14일장사랑 이세복(李世福)의 딸, 외조부 한양인 조선(趙鐥)
아들이재승(李在升)1809년 10월 13일1853년 4월 16일초명 계증(棨增)
며느리연안이씨1808년 10월 1일1829년 4월 23일이정계(李鼎季)의 딸
며느리전주이씨1810년 8월 23일1879년3월 24일임영대군 예천부수 이언형(醴川副守 李彦亨) 8대손 이진방(李鎭邦)의 딸
양손자이교선(李敎善)
아들이재응(李在應)1812년 12월 10일1878년 3월 28일초명 참증(參增)
아들이재긍(李在兢)1818년 11월 2일1876년5월 11일초명 후증(後增)
며느리전주이씨1850년 3월 16일효령대군강성정 이견손(江城正 李堅孫) 9대손 이용구(李龍九)의 딸, 외조부 동래정씨 성균관전적 정완(鄭浣)
며느리진주류씨이재긍의 후처
아들이재성(李在星)1823년 11월 9일1867년 6월 9일
며느리해주오씨1819년 9월 7일1879년 8월 24일진사 오언용(吳彦鏞)의 딸, 조부 좌랑 명철(命哲), 추탄(楸灘) 오윤겸의 후손, 외조부 무안박씨 박겸빈(朴謙彬)
손자이돈선(李敦善)
아들이재흥(李在興)
아들이재명(李在明)1830년 11월 20일1891년 5월 14일
며느리동래정씨1829년 12월 5일1901년 10월 12일장사랑 정기홍(鄭基弘)의 딸, 정태화의 장남 정재대 7대손
손녀사위이규재연안인
손자이휘선(1865년 7월 4일 ~ ?)
처부이세복(李世福)광주인, 부 택(澤), 조부 지건(志健)
장모한양조씨조선(趙鐥)의 딸


이봉녕의 가계는 서얼 출신이 많았다. 그의 5대조 이상우(李商雨)는 포천의 먼 일가 이영구(李英久)에게 입양되었으나, 이상우의 생조모 전주이씨는 재상 이홍주(李弘胄)의 측실 소생 서녀였다. 이상우의 생모 전주이씨 역시 서출이었으며, 친정아버지 이집은 영해군 이당의 5대손 이숙무의 서자였다. 또한, 어머니 풍양조씨의 5대조 조상만(趙尙萬)은 6대조 조성보의 서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