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흠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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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흠례는 1523년에 태어나 1585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1549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나주 판관, 황해도 신계 현령 등을 거치며 임꺽정 세력 토벌에 기여했고, 이후 여러 도의 수군절도사, 병마절도사, 부사 등을 역임했다. 말년에는 탄핵을 받아 면직되기도 했으나, 묘지석 발견을 통해 그의 생전 행적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흠례는 황해도 지역에서 활약하던 임꺽정 세력을 진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557년(명종 12) 신계현령 재직 중 임꺽정의 무리를 많이 생포하였고, 1560년(명종 15)에는 봉산군수로 임명되어 봉암읍에서 임꺽정군 일파를 크게 이겼다. 임꺽정의 측근 서림은 이흠례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부인 언양 김씨(彦陽金氏, ? - 1579년)는 김수증(金壽增)의 딸로, 위열공 김취려의 후손이다.[4] 언양 김씨와의 사이에서 딸만 6명을 두었고, 아들은 없었다.[4] 이흠례가 사망할 당시 여섯 딸은 모두 출가한 상태였다.[4]
[1]
문서
김양감의 장남 김광계의 9대손
2. 생애
2. 1. 가계와 초기 생애
1523년에 태어났으며 생일은 미상이다.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4대손으로, 증조부는 낙안군 이밀(혹은 이녕), 할아버지는 청원정과 청원부수를 지낸 청원정 이목, 아버지는 금양부정 이경이고, 어머니는 신인 진천송씨로 성균관생원 송옹의 딸이다. 중종은 10촌 사종형이고, 인종과 명종은 11촌 조카뻘이 된다. 친할머니 파평윤씨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증 영돈녕에 추증된 윤삼산의 딸이며, 우의정 영원부원군 윤호의 누이였다.
친할머니 파평윤씨는 성종의 제3계비 정현왕후의 고모였고, 그는 할머니쪽을 통해서는 부계 9촌 삼종숙인 성종과는 내재종숙간의 가까운 인척관계였고, 외가 쪽로는 중종과 6촌간이 된다.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아버지 금양부정 이경식의 대에 끝났다.
그는 금양부정 이경의 다섯째 아들로 위로는 형 이숭례, 이원례, 이창례, 이승례 및 인동장씨 사헌부감찰 장경량에게 출가한 누이가 1명 있다. 아버지 금양부정 이경의 본부인은 남양홍씨로, 이경은 경력 홍효정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숭례를 얻었으나, 남양홍씨가 일찍 죽어 다시 진천송씨로 성균관생원 송옹의 딸과 재혼하여 아들 넷과 딸 1명을 얻었다.
그는 10세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진천송씨와 형제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어린시절부터 호탕하고 굳센 성품이었으며, 희희(嬉戱)를 즐겨하여 남다른 특징을 지녔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놀이를 근절하였다. 성인이 되어서는 독서를 즐겨하고 대의(大義)를 우선시 여겨 붓을 잡았다. 또한 뜻을 낮추어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고, 의리를 소중하게 여겼다. 김취려의 12대손이자 고려 숙창원비의 친정아버지 김양감의 10대손 호군 김수증(金壽增)의 둘째 딸 언양김씨와 결혼하였으나, 아들을 두지 못하고, 딸만 6명을 두었다.
2. 2. 관직 생활과 군사 활동
1549년(명종 5)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관직을 시작했다.[2] 1551년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거상하였다. 복직 후 전라도판관을 거쳐 1554년 나주판관(羅州判官)으로 부임했다.[2] 1555년 나주판관 재직 중 왜구가 호남 해안가를 침입했을 때, 의병을 모아 왜구 토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2]
이후 방어사(防禦使)를 역임했고,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에 제수되었다.[2]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등지에서 임꺽정의 일파가 횡행하자, 1557년 신계현령(新溪縣令)으로 임명되어 임꺽정 일파 체포 작전을 전개하여 많은 수를 생포했다.[2] 1557년 신계의 도적 오연석(吳連石) 일당의 퇴로를 파악하고 이들을 체포하여 황해도관찰사가 조정에 이를 보고했다.
1558년 황해도관찰사가 그가 임꺽정의 무리를 다수 잡은 것을 보고하여 상을 받았다.[3] 1560년 봉산군수(鳳山郡守)로 임명되어 임꺽정군의 일파를 크게 격파했다.[3] 같은 해 11월 임꺽정의 측근 서림이 이흠례를 암살하려다 포도청에 적발되기도 했다.[3] 1560년(명종 15) 11월에는 임꺽정의 무리와 교전하다가 후퇴한 일로 12월 초 사헌부로부터 탄핵당했지만 명종이 듣지 않았다.[3] 1561년(명종 16) 당상관으로 승진했다.[3]
1562년(명종 17) 6월에 청홍도수군절도사(淸洪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3] 그해 11월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가,1563년 충청도수군절도사, 1565년(명종 20)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다.[3] 그뒤 경상우도수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경원부사(慶源府使)와 김해부사(金海府使)를 역임하고, 인산첨사(麟山僉使)를 역임했다. 그후 첨지중추부사 겸 내금위장(內禁衛將), 사복장(司僕將), 우림위장의 3장을 겸하다가 오위도총부 내승(內乘)을 거쳐 오위장이 되었다.
다시 충청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가 1573년(선조 6) 8월 24일 충청도 수사로 재직 중 욕심많고 비루하며 소행이 거칠고 망령되다는 이유로 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받았고 면직되었다.[3] 1576년(선조 9)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있을 때, 관아의 권속을 함부로 데리고 갔다 하여 사헌부가 탄핵, 해직을 청하였지만 선조가 거절하였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잘 받들었다. 이후 경상우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가 신병이 깊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2. 3. 지방관 근무와 논란
이흠례는 황해도에 있을 때 임꺽정의 무리를 여럿 잡아, 임꺽정의 책사 서림(徐林) 등이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3] 1562년 1월 의금부에서 임꺽정의 무리들을 공초할 때 나온 진술에 따르면, 임꺽정과 대장장이 이춘동(李春東)이 봉산군수로 재직 중이던 이흠례를 죽이려 한 이유는 이흠례가 신계현령(新溪縣令)으로 있을 때 임꺽정의 무리를 많이 체포했기 때문이었다.[3]
1562년(명종 17) 6월 청홍도수군절도사(淸洪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 그해 11월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가, 1563년 충청도수군절도사, 1565년(명종 20) 임기만료로 체직되어 돌아왔다가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임명, 배사하고 부임하였다. 그뒤 경상우도수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경원부사(慶源府使)와 김해부사(金海府使)를 역임하고, 인산첨사(麟山僉使)를 역임했다. 그후 첨지중추부사 겸 내금위장(內禁衛將), 사복장(司僕將), 우림위장의 3장을 겸하다가 오위도총부 내승(內乘)을 거쳐 오위장이 되었다.
다시 충청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가 1573년(선조 6) 8월 24일 사간원으로부터 욕심많고 비루하며 소행이 거칠고 망령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고 면직되었다. 1576년(선조 9) 김해부사(金海府使) 재직 시에는 관아의 권속을 함부로 데리고 갔다 하여 사헌부가 탄핵, 해직을 청하였지만 선조가 거절하였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잘 받들었다. 이후 경상우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가 신병이 깊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85년 8월 11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2. 4. 사망과 사후
이흠례는 1585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처음 장례는 간소하게 치렀다가 뒤에 운구하여 경기도 시흥군 신길리 서해좌사향(西亥坐巳向)에 묻혔다. 그의 족보에는 자세한 행적이 전하지 않고 1900년 혹은 1902년 무렵에 편찬한 효령대군 금양부정파 족보에서도 그는 간략하게 수사(水使)로만 등재되었다. 한때 그의 이름이 이흠(李欽)으로도 알려졌었다. 그의 묘소는 오랫동안 실전되었으나, 후일 1999년 9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 458-6번지(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방로47길 27)에서 발견되었으며, 분묘를 발굴함과 동시에 청자로 된 지석(誌石) 5매도 같이 발견되었다. 그의 묘터에서 발견된 묘지석은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지석이다. 지석이 발견되면서 생전 그의 행적이 알려지게 되었다. 맨 마지막에 발견된 5번째 청자지석은 지석 상단부분이 깨져서 일부 내용이 망실되었고, 지석을 쓴 이의 이름부분도 사라졌다.
시신은 언제 이장되었는지는 알려져있지 않으나, 초장지인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 458-6번지(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방로47길 27)에서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율석리 선산으로 이장되었다. 이흠례 묘지석은 2001년 7월 1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3. 임꺽정과의 관계
1557년 이흠례는 신계의 도적 오연석 일당을 체포하여 황해도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했고, 1558년 황해도 관찰사는 이흠례가 임꺽정의 무리를 다수 잡은 계본을 올려 상을 받았다. 하지만 1560년 11월에는 임꺽정의 무리와 교전하다가 후퇴한 일로 12월 초 사헌부로부터 탄핵당했지만 명종이 듣지 않았다. 이러한 이흠례의 활약으로 임꺽정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민간인의 피해도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4. 가족 관계
묘지명 작성 당시 셋째 사위 유대경(兪大儆)은 생원, 다섯째 사위 윤백원(尹百順)은 진사였다.[4]
여섯째 사위는 능성인 구면(具六+勉)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이랑을 지냈다.[4] 둘째 사위는 구사인(具思言+刃)으로, 봉사를 지낸 능창위 구한(具澣)의 아들이었다.[4] 넷째 사위는 홍탁(洪鐸)으로, 직장을 지냈다.[4]
중종과는 아버지쪽으로는 10촌이지만, 중종에게는 외가 쪽으로, 이흠례에게는 할머니 쪽으로 서로 6촌간이 된다.[4] 외조카딸의 남편인 이간(李幹)과는 부계쪽으로는 9촌간이 된다.[4]
장인 김수증(金壽增)은 김양감의 장남 김광계의 9대손이고, 장모는 전주 이씨로 사직 이식(李植)의 딸이다.[4]
5. 평가
참조
[2]
문서
투옥 및 석방 이유 미상
[3]
문서
대동야승
[4]
문서
효령대군 후손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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