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재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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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희재는 조선 시대 인물로,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의 오빠이다. 1680년 무과에 급제하여 내금위에 배속되었으며, 장희빈이 왕비가 된 후 병조참판, 병조판서까지 올랐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1701년 장희빈 사사 후 군기시 앞에서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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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빈 - 희빈 장씨
희빈 장씨는 조선 숙종의 총애를 받은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로, 뛰어난 미모와 숙종 시대의 당쟁 속에서 왕비까지 올랐으나, 결국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 장희빈 - 장현 (조선)
장현은 조선 시대 역관으로, 희빈 장씨와 장희재의 백부이며, 역과에 장원 급제하여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올랐고, 소현세자를 수행하여 청나라 사정을 파악하고 효종의 북벌 정책을 지원하는 등 활약하며 부를 축적했으나, 환국 정치 속에서 유배와 복직을 반복하는 삶을 살았다. - 1701년 사망 - 인현왕후
조선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는 여흥 민씨 가문 출신으로 서인 명문가 딸이었으나 희빈 장씨와의 갈등 속에 폐위되었다가 복위 후 건강 악화로 34세에 사망했으며, 그녀의 삶은 권력 다툼 속 희생으로 평가받고 소설 등 다양한 작품에서 재해석되고 있다. - 1701년 사망 - 희빈 장씨
희빈 장씨는 조선 숙종의 총애를 받은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로, 뛰어난 미모와 숙종 시대의 당쟁 속에서 왕비까지 올랐으나, 결국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 1651년 출생 - 다카쓰카사 노부코
다카쓰카사 노부코는 도쿠가와 마사코를 고미즈오 천황의 중궁으로 삼는 데 관여하고, 도쿠가와 쓰나요시와 결혼하여 에도 성 오오쿠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일화를 남겼으며, 쓰나요시 사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 1651년 출생 - 장 바티스트 드 라 살
프랑스 사제이자 교육자인 장 바티스트 드 라 살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 헌신하며 현대 교육 시스템의 기초를 다졌고, 사범학교 설립, 학년별 교육과정 도입 등 혁신적인 교육 정책으로 교육자의 수호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장희재 (조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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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 장희재 |
한자 | 張希載 |
로마자 표기 | Jang Hui-jae |
2. 생애
장희재의 생애 전반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부족하다. 그는 1680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1683년에는 종6품 관직에 있었다. 이후 누이인 희빈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고 1689년 왕비에 오르면서, 장희재 역시 병조참판, 병조판서 등 고위 관직으로 빠르게 승진하였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 세력이 실각하고 희빈 장씨가 후궁으로 강등되면서 그의 정치적 입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 숙빈 최씨 독살 미수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희빈 장씨의 오빠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 결국 그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701년, 인현왕후가 사망한 후 발생한 무고의 옥에 연루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같은 해 누이 희빈 장씨가 사사된 후 참수형에 처해졌다.
2. 1. 출신 및 초기 관직
흔히 인현왕후전 등 영조 시대 이후 쓰인 기록에서는 장희재를 장안의 한량으로 묘사하며, 누이인 희빈 장씨 덕에 과분한 자리에 오른 인물로 그리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시장 바닥의 건달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장안'은 단순히 수도 한성을 의미했고, '한량'은 무관이나 무과 응시생을 문관 측에서 다소 낮춰 부르던 말이었다.[2]실제로 장희재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680년(숙종 6년)에는 무관의 요직으로 꼽히던 내금위 소속이었으며,[3] 1683년(숙종 9년)에는 종6품 포도부장을 지냈다.[4] 같은 해 3월, 선조의 딸인 정명공주의 잔치에서 맡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현왕후의 외척인 민정중에게 질책을 받기도 했다.
1689년(숙종 15년) 2월에는 원자(훗날의 경종)의 외척이라는 이유로 종6품 군자감 주부로 제수되었다.[5] 이러한 기록들을 볼 때, 장희재가 누이 덕분에 출세했다는 통념과는 달리, 오히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의 지지를 받던 인현왕후 측으로부터 견제를 받아 승진에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2. 2. 관직 활동과 갑술환국
(장옥정 왕자 생산 후)(장옥정 왕비 책봉 후)
(갑술환국 직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