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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재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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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희재는 조선 시대 인물로,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의 오빠이다. 1680년 무과에 급제하여 내금위에 배속되었으며, 장희빈이 왕비가 된 후 병조참판, 병조판서까지 올랐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1701년 장희빈 사사 후 군기시 앞에서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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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재 (조선)
기본 정보
한글장희재
한자張希載
로마자 표기Jang Hui-jae

2. 생애

장희재의 생애 전반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부족하다. 그는 1680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1683년에는 종6품 관직에 있었다. 이후 누이인 희빈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고 1689년 왕비에 오르면서, 장희재 역시 병조참판, 병조판서 등 고위 관직으로 빠르게 승진하였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 세력이 실각하고 희빈 장씨가 후궁으로 강등되면서 그의 정치적 입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 숙빈 최씨 독살 미수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희빈 장씨의 오빠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 결국 그는 제주도유배되었다.

1701년, 인현왕후가 사망한 후 발생한 무고의 옥에 연루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같은 해 누이 희빈 장씨사사된 후 참수형에 처해졌다.

2. 1. 출신 및 초기 관직

흔히 인현왕후전영조 시대 이후 쓰인 기록에서는 장희재를 장안의 한량으로 묘사하며, 누이인 희빈 장씨 덕에 과분한 자리에 오른 인물로 그리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시장 바닥의 건달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장안'은 단순히 수도 한성을 의미했고, '한량'은 무관이나 무과 응시생을 문관 측에서 다소 낮춰 부르던 말이었다.[2]

실제로 장희재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680년(숙종 6년)에는 무관의 요직으로 꼽히던 내금위 소속이었으며,[3] 1683년(숙종 9년)에는 종6품 포도부장을 지냈다.[4] 같은 해 3월, 선조의 딸인 정명공주의 잔치에서 맡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현왕후의 외척인 민정중에게 질책을 받기도 했다.

1689년(숙종 15년) 2월에는 원자(훗날의 경종)의 외척이라는 이유로 종6품 군자감 주부로 제수되었다.[5] 이러한 기록들을 볼 때, 장희재가 누이 덕분에 출세했다는 통념과는 달리, 오히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의 지지를 받던 인현왕후 측으로부터 견제를 받아 승진에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2. 2. 관직 활동과 갑술환국

(장옥정 왕자 생산 후)의금부 경력, 오위도총부 경력1689년
(장옥정 왕비 책봉 후)훈련원 부정 (종3품), 훈련원 정 (정3품), 어영청 중군 (정3품), 금위영 중군 (정3품), 수어청 중군 (정3품), 병조 참의 (정3품), 승정원 좌부승지 (정3품), 내금위장 (정3품), 금군 별장 (종2품), 포도대장 (종2품), 수어사 (종2품), 금위대장 (종2품), 동지의금부사 (종2품), 한성부 좌윤 (종2품), 훈련대장 (종2품)1692년총융사 (종2품)1694년 이전한성부 좌윤 (재임), 포도대장 (재임)1694년
(갑술환국 직후)한성부 좌윤 (최종 관직)



그는 병조참판 후보에도 올랐으며, 1694년 갑술환국 직전에는 한성부판윤과 병조판서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함이완의 무고 사건으로 인해 다시 한성부 좌윤으로 임명되었고, 잠시 정승 후보로까지 언급되었으나 곧이어 발생한 갑술환국으로 인해 관직을 잃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의 최종 관직은 한성부 좌윤이었다.[6]

갑술환국으로 인해 남인 세력이 실각하면서 장희재는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구만을 비롯한 소론 대신들이 세자(경종)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강력히 반대하면서 사형 대신 제주유배되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유배 명령이 내려진 직후, 숙빈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다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으나 무고함이 밝혀졌다. 이후에도 자신의 아버지 장형의 묘비를 스스로 훼손하고 남에게 덮어씌우려 했다는 혐의를 받는 등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1701년 8월,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무고(巫蠱)했다는 혐의가 제기되었다. 이로 인해 9월 23일 장희재에게 사형 명령이 내려졌고, 25일에는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하는 비망기가 내려졌다. 남구만을 중심으로 한 소론과 일부 노론 대신들의 반대로 형의 집행이 잠시 미루어졌으나, 결국 10월 8일 승정원을 통해 희빈 장씨에게 자진 명령이 다시 내려졌고, 10월 10일 그녀의 자진이 공식 발표되었다.

희빈 장씨가 죽은 후, 장희재는 한양으로 압송되어 10월 29일 군기시 앞에서 참형인 복주(伏誅)[7]를 당했다. 노론 측에서는 처벌이 부족하다고 주장하여, 11월에는 그의 시신이 다시 능지처사되는 비극을 맞았다. 장희재 사후, 아버지 장형의 신위와 제사는 매형인 김지중과 그의 아들에게 재산 일부와 함께 한시적으로 맡겨졌다.

2. 3. 유배와 죽음

1694년 갑술환국의 여파로 인해 장희재는 사형당할 위기에 몰렸으나, 당시 세자(경종)에게 미칠 영향을 염려한 영의정 남구만소론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로 목숨을 건져 제주에 유배되었다. 유배령이 내려진 직후에는 숙빈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지만 무고함이 밝혀졌다. 그 이후에도 스스로 아버지 장형의 묘비를 훼손했다는 자작극 혐의를 받는 등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1701년 8월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누이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무고(巫蠱) 혐의가 제기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같은 해 9월 23일 장희재에게 사형 명령이 내려졌고, 25일에는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하는 비망기가 내려졌다. 남구만을 비롯한 소론 대신들과 일부 노론 대신들까지 사형 집행에 반대하여 즉시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0월 8일 승정원을 통해 희빈 장씨에게 공식적인 자진 명령이 내려졌고, 10월 10일 희빈 장씨의 자진 사실이 발표되었다.

희빈 장씨가 죽은 후, 장희재는 한양으로 압송되어 1701년 10월 29일 군기시 앞에서 처형(복주, 伏誅)당했다.[7] 이후 11월에는 처벌이 부족하다는 노론 측의 강경한 주장에 따라 그의 시신은 능지처참되었다. 장희재 사후, 아버지 장형의 신위와 제사는 자형(매형)인 김지중과 그 아들에게 재산 일부와 함께 한시적으로 맡겨졌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생몰년 및 기타
아버지장형(張炯)1623년 ~ 1669년, 사후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으로 추증
어머니파평 윤씨(坡平 尹氏)1626년 ~ 1698년,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 장형의 후처
부인김씨(金氏)
여동생장희빈(張禧嬪)1659년 ~ 1701년, 숙종(조선)의 후궁, 경종(조선)의 생모, 사약을 받고 사망
매제숙종(조선)1661년 ~ 1720년, 조선 제19대 국왕
외조카경종(조선)1688년 ~ 1724년, 조선 제20대 국왕
외조카이성수(李盛壽)1690년, 요절


4. 관련 작품

(내용 없음)

4. 1. 드라마

wikitext

작품명방송사연도배우
장희빈MBC1981년~1982년김동현
인현왕후MBC1988년이덕화
장희빈SBS1995년길용우
장희빈KBS2002년~2003년정성모
신비한TV 서프라이즈MBC2004년한경일
KBS HDTV 문학관 -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KBS12007년선동혁
동이MBC2010년김유석
장옥정, 사랑에 살다SBS2013년고영빈
대박SBS2016년백승현


참조

[1] 기록 승정원일기 숙종 27년(1701년) 11월 2일 기록
[2] 서적 단암만록 http://yoksa.aks.ac.[...]
[3] 역사기록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22일 을해 3번째기사
[4] 역사기록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5] 역사기록 승정원일기 333책 (탈초본 17책) 숙종 15년 2월 11일 기유 5/26 기사
[6] 문서
[7] 문서 형벌을 받아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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