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술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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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갑술환국은 1694년 숙종이 남인을 축출하고 소론을 등용하면서 노론을 일부 복귀시킨 사건이다.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의 당파를 번갈아 기용했으며, 인현왕후 복위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갑술환국 이후 인현왕후가 복위하고 희빈 장씨가 강등되었으나, 소론은 희빈 장씨를 옹호하며 정치적 갈등이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무고의 옥, 신임사화, 이인좌의 난 등의 사건이 발생하며 당쟁이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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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환국은 1680년 숙종 때 서인이 유악 사건과 삼복의 변을 계기로 남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으로, 서인이 요직을 차지하며 조선 정계가 서인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 허목 - 권시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권시는 효종 때 공조좌랑으로 등용되어 승정원 승지, 한성부 우윤 등을 역임했으나, 상복 문제 당쟁으로 파직 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고 사후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 도산서원에 배향되었다.
갑술환국 | |
---|---|
갑술환국 | |
발생 시기 | 1694년 (숙종 20년) |
원인 | 남인의 복평군 옹립 모의 사건 관련 |
주요 내용 | 서인 노론의 재집권, 남인의 몰락 |
결과 | 탕평책의 시행 계기 마련 |
배경 | |
정치적 상황 | 기사환국 이후 남인 정권의 불안정 |
숙종의 심경 변화 | 인현왕후 폐위 및 장희빈 처분에 대한 후회 |
전개 과정 | |
복평군 옹립 모의 사건 | 남인 강경파의 복평군 옹립 시도 |
서인의 반격 | 김춘택 등 소론과 노론의 연합 공세 |
남인의 실각 | 숙종의 결정으로 남인 세력 축출 |
주요 인물 | |
서인 | 김춘택, 한중혁 등 |
남인 | 민암, 오정위 등 |
왕족 | 복평군 |
결과 및 영향 | |
서인 재집권 | 노론 중심의 정국 주도 |
남인 몰락 | 정치적 기반 상실 및 숙청 |
탕평책 논의 시작 | 당쟁의 폐해를 인식하고 탕평책 구상 |
2. 배경
갑술환국의 원인은 기록이 불분명하여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고 의견만 분분하다. 일설에는 숙종이 인현왕후를 복위하기 위해 벌인 것으로 정의하지만, 이는 인현왕후의 입장에서 쓰여진 소설 인현왕후전과 야사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승정원일기》 등 정사에 기록된 사실과 비교하면 허구임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숙종이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에 대한 애정 변화로 환국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특정한 원인 없이 두 여인의 당파를 번갈아 기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2. 1. 정치적 배경
갑술환국의 원인은 기록이 불분명하여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고 의견만 분분하다. 일설에는 숙종이 인현왕후를 복위하기 위해 벌인 것으로 정의하지만, 이는 인현왕후의 입장에서 쓰여진 소설 인현왕후전과 야사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승정원일기》 등 정사에 기록된 사실과 비교하면 허구임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숙종이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에 대한 애정 변화로 환국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특정한 원인 없이 두 여인의 당파를 번갈아 기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2. 2. 인물 간의 갈등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의 갈등은 왕실 내 권력 다툼의 핵심이었다. 숙종은 두 여인을 번갈아 기용하며 당파 간의 경쟁을 유도했다. 장희재 등 희빈 장씨 측근들의 권력 남용은 남인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켰다.3. 과정
숙종 20년(1694년) 3월 23일, 민암이 한성 내 노·소론가의 자제들이 재물을 모아 환관·폐인(嬖人)[2]과 척가(戚家)[3]에게 뇌물을 써서 거짓말과 허위의 풍문(風聞)을 만들어 내어 조신(朝紳)을 헐뜯고 인심(人心)을 불안하게 하여 음험하게 간악한 짓을 시행하려는 계획을 만든다는 함이완의 내부고발이 있음을 아뢰었다.[4] 숙종은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의금부에서 조사토록 하고 엄한 형벌을 쓰라고 명하였다.[4] 3월 25일, 왕비 장씨(희빈 장씨)의 오라비인 우윤 겸 포도대장 장희재가 소론과 친분이 있어 왕래해온 것을 사죄하며 사직서를 제출하였지만 숙종은 곡절이 있을 테니 작은 일에 불안해하지 말라며 위로했다.[5] 장희재의 뇌물수수 혐의는 26일 국문 과정에서 무죄판결되었다.
3월 26일, 한중혁, 김춘택 등이 체포되었다.[6] 이 중, 이시도가 '한중혁(소론) 부자(父子)가 남인을 제거할 목적으로 남인의 삼대장(三大將: 훈련 도감·수어영·금위영)이 종실 의원군을 왕으로 세울 역모를 꾸민다고 무고하려고 했다. 한중혁은 이 계획을 동평군이 알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다고도 했다.'고 거짓 토설을 하니, 숙종은 분개하여 이시도를 더욱 엄히 고문할 것을 허가하고 국청을 확대시킨다.[6] 이 과정 중, 피의자들이 효종의 딸이자 숙종에겐 고모가 되는 숙안공주·숙명공주·숙휘공주가 노론의 대표인 김춘택과 손을 잡고 환국 도모에 동참했음을 내세우자, 민암을 위시한 남인이 세 공주를 엄히 다스릴 수밖에 없음을 상소하여 숙안공주 자매는 물론 숙종의 여동생인 명안공주의 유가족조차 화(죽음)를 피하기 어려워졌다.[7]
3월 29일, 유생 김인이 고변서를 올려 신천 군수(信川郡守) 윤희와 훈국 별장(訓局別將) 성호빈 등이 반역(反逆)을 도모하는데 장희재도 참여하였으며, 민암·오시복·목창명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직접 들은 것과 장희재가 1693년에 숙빈 최씨(당시 숙원)의 외숙모 일가에게 돈을 주고 회임 중인 최씨를 독살토록 사주하는 것을 자신이 목격했다고 고발했다.[8] 이에, 민암·장희재 등이 숙종에게 억울함을 토로하였으며 숙종은 김인의 고변이 허황되어 믿지 않는다며 이들을 위로했다.[9]
그러나 다음날인 4월 1일[10], 숙종은 돌연 집권 여당인 남인을 정계에서 전면 축출하고 야당으로 밀려 있던 소론의 집권 체제로 다시 전환하되 기사환국 때 정계에서 축출시켰던 노론을 일부 복관하여 남인의 감찰 수사역을 전담시키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고 한다.[11] 이는 1689년 기사환국 때와 흡사한 형태이다. 단, 차이가 있다면 1689년엔 남인이 노론의 감찰 수사를 맡아 보복성 처단을 하는 과정에서 소론이 노론에 대한 온건 처벌을 주도하다가 결국 남인이 집권 여당으로 전환되고 소론은 야당으로 밀려나는 결과가 됐던 것에 반해 이 갑술환국 후에는 1701년 신사환국이 있기까지 소론 정권이 유지됐다는 것이다.[13]
이 기사환국으로 영의정 권대운 등의 남인이 파직되었으며, 영의정에는 남구만이, 좌의정에는 박세채가, 우의정에는 윤지완이, 이조판서에는 유상운이, 호조판서에는 이세화가, 예조판서에는 윤지선이, 병조판서에는 서문중이, 형조판서에는 박태상이, 공조판서에는 신여철이 제수되었는데 이 중 호조판서로 임명된 이세화와 공조판서로 임명된 신여철만 노론이고 나머지는 전원 소론이다.
3. 1. 무고와 고변
3. 2. 숙종의 결단과 환국
1694년 4월 1일[10], 숙종은 돌연 집권 여당인 남인을 정계에서 전면 축출하고 야당으로 밀려 있던 소론의 집권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를 '''갑술환국'''이라고 한다.[11] 기사환국 때 정계에서 축출되었던 노론 일부도 복권되어 남인에 대한 감찰 및 수사를 담당하게 되었다.[11] 숙종은 기사환국 당시 집권당이었던 노론을 축출하고 소론을 집권당으로 세우면서, 경신환국 때 축출되었던 남인을 복권하여 노론의 감찰 수사를 전담시켰었다.[13]이 환국으로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민암 등 남인의 주요 인사들이 파직되었다.[11] 남구만이 영의정에, 박세채가 좌의정에, 윤지완이 우의정에 임명되는 등 소론 인사들이 대거 등용되었다.[11] 호조판서에 임명된 이세화와 공조판서에 임명된 신여철만이 노론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소론이었다.[11]
4. 원인
갑술환국의 원인은 기록이 불분명하여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고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37] 일설에는 숙종이 인현왕후를 복위하기 위해 벌인 것으로 정의하지만, 이는 인현왕후의 입장에서 쓰여진 소설 인현왕후전과 야사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승정원일기》 등 정사에 기록된 사실을 순차적으로 비교하면 허구임을 알 수 있다.[37]
인현왕후전에서는 갑술환국의 원인을 숙종이 희빈 장씨의 간악함을 견디지 못해 오랜 기간 그리워했던 인현왕후를 복위하기 위해 벌인 것이라고 묘사한다. 이문정이 쓴 수문록 역시 희빈 장씨의 요악함에 질려 기사환국 직후부터 왕후 교체를 후회해온 숙종이 숙빈 최씨를 매질하여 죽이려는 것을 목격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에서 쫓아내기 위해 환국을 일으킨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37] 그러나 정사의 기록을 날짜순으로 분석하면 숙종이 인현왕후를 복위하기 위해 환국을 벌였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으며, 인현왕후의 복위를 전후하여 보인 숙종의 행적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숙종이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에 대한 애정 변화로 환국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왕권 강화를 위해 두 여인의 당파를 번갈아 기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5. 여파
숙종은 갑술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한 직후인 4월 2일, 폐비(廢妃: 인현왕후)를 언급하거나 왕세자의 신위에 위협이 되는 발언을 하는 자는 대역죄로 다스리겠다고 선포하여 왕비를 교체할 마음이 없음을 확고히 밝혔다.[14] 이는 숙종이 인현왕후 복위를 염두에 두고 환국을 일으켰음을 시사한다. 4월 11일, 숙종은 장희재를 직권남용 죄로 삭탈관직하고 체포하는 동시에,[19][20] 폐비 민씨(인현왕후)의 거처를 서궁(西宮)으로 즉시 옮기고 호위를 붙이도록 명하였다.[21][22]
다음 날인 4월 12일, 숙종은 폐비 민씨(인현왕후)를 왕비로 복위시키고, "국모가 둘일 수 없다"는 조선의 국법을 들어 왕비 장씨(희빈 장씨)를 옛 작호(희빈)로 강등하라고 명하였다.[23] 민진원은 개인 저서 단암만록에서 숙빈 최씨가 숙종에게 장희재의 독살 시도를 눈물로 호소하여 성공하였다고 기록했다.[24]
인현왕후 복위와 희빈 장씨 강등에 대해 노론과 소론은 강경하게 대립했다. 노론은 인현왕후의 복위를, 소론은 희빈 장씨를 왕비로 둔 채 인현왕후를 폐서인 상태로 별궁에 모시는 것을 각각 목표했기 때문이다.
숙종의 복위 명령에 병조판서 서문중은 이조참판 박태상 등과 함께 인현왕후가 왕비로 더 오래 있었지만, 왕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가 더 귀하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25] 정원은 조정 백관과 신중한 공론을 거쳐 결정할 때까지 명을 받들 수 없다고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25]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언쟁이 이어지던 중,[26] 4월 16일, 우의정 윤지완, 공조판서 신익상 등 소론의 대표 인물들이 단체로 사직상소를 올렸다.[27] 엿새 후인 4월 17일,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였던 남구만이 '이미 왕명은 내려졌고, 자식이 어미(國母)의 죄를 논하며 도로 쫓아내라 마라 의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고 소론을 중재하여 인현왕후 복위로 결론지어졌다.[28] 그러나 남구만은 노론의 비위를 거슬렀고, 이후 인현왕후 복위를 반대했던 소론 대신들을 보호하고 장희재 제거를 방해하여 노론의 당적으로 규정되었다.[29]
1694년 6월 1일, 인현왕후는 즉위식을 통해 왕비로 복위했다.[30] 그러나 소론의 창시자인 윤증은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를 동등하게 높이고 호칭했으며,[31] 우의정 윤지완은 희빈 장씨에게 왕후에 준하는 작위를 만들어 예우할 것을 청하고 수년 동안 인현왕후에게 왕후의 예를 올리지 않았다.[32][33][34] 서문중 박만정 등 소론은 희빈 장씨에게 왕후에 준하는 새로운 작위를 만들어 올릴 것을 상소하고, 공사(公事) 중에도 희빈 장씨를 후궁의 작호로 부르지 않고 모처(某處)라고 돌려 불렀다.[35] 이러한 배경은 1701년 무고의 옥의 원인이 되었고, 기사환국 당시 희빈 장씨와 간계를 꾸며 인현왕후를 폐비시킨 남인이 다시 출척되고 정조 즉위 전까지 정계에서 사라지게 만들었으며,[36] 희빈 장씨의 무죄 혹은 경형을 주장했던 소론 역시 노론에 의해 역당의 무리로 규정되어 중형을 받고 정계에서 축출될 뻔했다.[36] 이후 소론은 왕세자(경종)를, 노론은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며 경쟁했으며, 이는 경종 때의 신임사화와 영조 때의 이인좌의 난 등의 계기가 된다.
5. 1. 인현왕후 복위와 희빈 장씨 강등
숙종은 갑술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한 직후인 4월 2일, 폐비(廢妃: 인현왕후)를 언급하거나 왕세자의 신위에 위협이 되는 발언을 하는 자는 대역죄로 다스리겠다고 선포하여 왕비를 교체할 마음이 없음을 확고히 밝혔다.[14] 이는 숙종이 인현왕후 복위를 염두에 두고 환국을 일으켰음을 시사한다. 4월 11일, 숙종은 장희재를 직권남용 죄로 삭탈관직하고 체포하는 동시에,[19][20] 폐비 민씨(인현왕후)의 거처를 서궁(西宮)으로 즉시 옮기고 호위를 붙이도록 명하였다.[21][22]다음 날인 4월 12일, 숙종은 폐비 민씨(인현왕후)를 왕비로 복위시키고, "국모가 둘일 수 없다"는 조선의 국법을 들어 왕비 장씨(희빈 장씨)를 옛 작호(희빈)로 강등하라고 명하였다.[23] 민진원은 개인 저서 단암만록에서 숙빈 최씨가 숙종에게 장희재의 독살 시도를 눈물로 호소하여 성공하였다고 기록했다.[24]
인현왕후 복위와 희빈 장씨 강등에 대해 노론과 소론은 강경하게 대립했다. 노론은 인현왕후의 복위를, 소론은 희빈 장씨를 왕비로 둔 채 인현왕후를 폐서인 상태로 별궁에 모시는 것을 각각 목표했기 때문이다.
숙종의 복위 명령에 병조판서 서문중은 이조참판 박태상 등과 함께 인현왕후가 왕비로 더 오래 있었지만, 왕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가 더 귀하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25] 정원은 조정 백관과 신중한 공론을 거쳐 결정할 때까지 명을 받들 수 없다고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25]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언쟁이 이어지던 중,[26] 4월 16일, 우의정 윤지완, 공조판서 신익상 등 소론의 대표 인물들이 단체로 사직상소를 올렸다.[27] 엿새 후인 4월 17일,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였던 남구만이 '이미 왕명은 내려졌고, 자식이 어미(國母)의 죄를 논하며 도로 쫓아내라 마라 의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고 소론을 중재하여 인현왕후 복위로 결론지어졌다.[28] 그러나 남구만은 노론의 비위를 거슬렀고, 이후 인현왕후 복위를 반대했던 소론 대신들을 보호하고 장희재 제거를 방해하여 노론의 당적으로 규정되었다.[29]
6월 1일, 인현왕후는 즉위식을 통해 왕비로 복위했다.[30] 그러나 소론의 창시자인 윤증은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를 동등하게 높이고 호칭했으며,[31] 우의정 윤지완은 희빈 장씨에게 왕후에 준하는 작위를 만들어 예우할 것을 청하고 수년 동안 인현왕후에게 왕후의 예를 올리지 않았다.[32][33][34] 서문중 박만정 등 소론은 희빈 장씨에게 왕후에 준하는 새로운 작위를 만들어 올릴 것을 상소하고, 공사(公事) 중에도 희빈 장씨를 후궁의 작호로 부르지 않고 모처(某處)라고 돌려 불렀다.[35] 이러한 배경은 1701년 무고의 옥의 원인이 되었고, 기사환국 당시 희빈 장씨와 간계를 꾸며 인현왕후를 폐비시킨 남인이 다시 출척되고 정조 즉위 전까지 정계에서 사라지게 만들었으며,[36] 희빈 장씨의 무죄 혹은 경형을 주장했던 소론 역시 노론에 의해 역당의 무리로 규정되어 중형을 받고 정계에서 축출될 뻔했다.[36] 이후 소론은 왕세자(경종)를, 노론은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며 경쟁했으며, 이는 경종 때의 신임사화와 영조 때의 이인좌의 난 등의 계기가 된다.
5. 2. 노론과 소론의 대립
갑술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한 숙종은 폐비 민씨(인현왕후)를 언급하는 자와 왕세자의 신위에 위협이 되는 발언을 하는 자는 대역죄를 묻겠다고 선포하여 왕비를 교체할 마음이 없음을 확고히 했다.[14] 그러나 숙종은 곧 장희재를 직권남용 죄로 삭탈관직하고 체포하였으며,[19][20]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왕비 장씨(희빈 장씨)를 옛 작호로 강등시켰다.[23]인현왕후의 복위와 희빈 장씨의 강등에 대해 노론과 소론은 강경히 대립했다.[26] 노론은 인현왕후의 완전한 복위를 주장한 반면, 소론은 희빈 장씨를 왕비로 둔 채 인현왕후를 별궁에 모시는 방안을 지지했다.[25]
병조판서 서문중은 인현왕후가 희빈 장씨보다 더 오래 왕비로 있었으나 왕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가 더 귀하다는 뜻을 주장했다. 우의정 윤지완을 비롯한 소론의 대표 인물들은 단체로 사직상소를 올리기도 했다.[27]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였던 남구만이 '이미 왕명은 내려졌고, 자식이 어미(國母)의 죄를 논하며 도로 쫓아내라 마라 의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고 소론을 중재하여 결국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으나, 남구만은 노론의 비위를 거슬렀고,[28], 이후 인현왕후 복위를 강력히 반대했던 소론 대신들을 보호하고 노론이 장희재를 제거하는 데 번번히 방해를 한 탓에 남구만 역시 노론의 당적으로 규정되고 만다.[29]
인현왕후는 1694년 6월 1일 왕비로 복위했지만,[30] 소론의 창시자인 윤증은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를 동등히 높이고 호칭했고,[31] 윤지완은 희빈 장씨에게 왕후에 준하는 작위를 만들어 줄 것을 청하고 수년이 넘도록 인현왕후에게 왕후의 예를 올리지 않았다.[33][34] 서문중 등 소론은 연이어 희빈 장씨에게 왕후에 준하는 새로운 작위를 만들어 올릴 것을 상소했다.[35] 이러한 상황은 이후 무고의 옥의 배경이 되었으며, 무고의 옥은 인현왕후의 당파인 노론이 일시적으로 정권을 독점케 했다. 이후 소론은 왕세자(경종)를 지지하고 노론은 연잉군(영조)을 지지하여 경쟁하게 되었으며, 이는 경종 때의 신임사화와 영조 때의 이인좌의 난 등의 계기가 된다.
5. 3. 정치적 혼란의 지속
갑술환국으로 정권이 교체된 후에도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다. 숙종은 폐비 언급을 금지하고, 장희재를 처벌하는 등 왕권 강화를 시도했다.[14][18][20] 그러나 인현왕후 복위와 희빈 장씨 강등을 두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했다.[23] 소론은 희빈 장씨에게 왕후에 준하는 예우를 주장하며, 인현왕후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 등 갈등이 계속되었다.[31][33][34][35]1701년 인현왕후 사망 후 무고의 옥이 발생하면서 남인은 다시 몰락하고, 노론이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다.[36] 이 사건을 계기로 남인은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으며,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36] 소론은 왕세자(경종)를, 노론은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며 대립했고,[36] 이는 신임사화, 이인좌의 난 등으로 이어졌다.[36]
6. 평가
6. 1. 더불어민주당 관점
6. 2. 역사적 의의
참조
[1]
웹사이트
갑술환국
http://www.doopedia.[...]
2018-06-10
[2]
문서
폐인(嬖人)은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을 일컫는 단어로 폐총·폐희를 쓰기도 한다. 당시 시점에선 [[숙종 (조선)|숙종]]의 유일한 후궁이었던 [[숙빈 최씨]]를 지목한다.
[3]
문서
왕실의 내외척을 가리키는 단어로, 실록의 당일 기사에선 [[장희재 (조선)|장희재]]만 지목했지만 해당 사건의 모든 관련 기사에는 숙종의 세 고모(숙안, 숙명, 숙휘)들이 함께 등장한다.
[4]
실록
《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3월 23일(신유) 1번째기사
[5]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숙종 20년 3월 25일 (계해) 원본356책/탈초본18책 (16/20)
[6]
실록
《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3월 26일(갑자) 2번째기사
[7]
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일(무진) 2번째기사
[8]
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3월 29일(정묘) 1번째기사
[9]
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3월 29일(정묘) 3번째기사
[10]
문서
1694년은 윤달 탓에 음력 29일이 3월의 마지막 날이다.
[11]
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일(무진) 1번째기사~5번째기사
[12]
문서
노소분당의 1차적 원인은 경신환국(1680년)의 배경에 대한 의혹 및 무차별 학살에 가까운 남인 사냥에 대해 불편함을 느껴 남인의 구명 운동 및 온건처벌을 주도했던 일부 서인 산당 당원들(이후 소론으로 전환)이 허새의 옥사(1681년)를 통해 의혹(외척 김석주(구 서인 한당)와 산당 당수 송시열의 결탁)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하고 실망한 것에 있다. 즉, 남인에게 있어 소론은 자신들을 실각시켜 정권을 뺏아갔던 적당 서인 산당의 일부이긴 하나 자신들의 구명 운동 및 온건 처벌을 주도해줬던 존재였고, 노론은 원수였다.
[13]
문서
무고의 옥에 수사지휘권을 일임 받은 것이 노론으로, 이때 수장이 [[인현왕후]]가 죽기 전에 후임 왕비로 내정했던 [[영빈 김씨]](당시 귀인)의 내당숙인 [[이세백]](당시 좌의정)이었다. 당시 소론은 인현왕후의 복위 사태 이래 희빈 장씨를 지지하여 왔기에 무고의 옥에 대한 의혹 및 희빈 장씨에 대한 구명 운동으로 숙종과 대립하여 당수 및 주요인물들이 파직되거나 유배되는 등 일시적으로 정계에서 밀려났고, 결국 장씨가 자진하자 대거 사직하였기에 노론이 일시적이나마 집권당으로 등극했다.
[14]
문서
《숙종실록》에는 음력 4월 1일 기사로 기록되어 있고, 《승정원일기》에는 4월 2일 기사로 기록되어 있다.
[15]
문서
숙종의 고종형으로 [[숙안공주]]의 아들이자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의 이모부이다. [[기사환국]] 후, [[이사명]]과 함께 [[동평군]]을 시역죄로 무고하려고 했었던 사실이 발각되어 체포됐다가 [[심권]]과 [[이징명]] 등의 증언으로 인해 1687년 처질녀인 영빈 김씨와 함께 [[조사석]]과 [[희빈 장씨]]의 모친에 대한 거짓 추문을 만들어 퍼트린 장본인이란 사실이 드러나 결국 영빈 김씨는 폐서인이 되었고 [[홍치상]]은 다른 여죄(무고 3차례)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홍치상의 아들인 [[홍태유]]가 아비를 구명하기 위해 죄를 전가하려고 했던 [[심정보]]([[숙명공주]]의 아들, 영빈 김씨의 다른 이모부)는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유배되었다가 1692년 병에 걸린 [[숙명공주]]의 요청으로 특별히 방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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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4대신인 [[이이명]]([[김만중]]의 사위)의 형이자 [[이건명 (조선)|이건명]]의 사촌형으로, [[경신환국]] 때 [[김석주]]·[[민정중]]·[[김만중]]과 함께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을 주도하였으며, 이 과정 중에 간계를 서슴지 않았기에 [[남인]]의 원한을 받았다. [[기사환국]] 후 [[오시수]]를 무고 살해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국문되다가, 숙종9년에 전쟁 발발을 언급한 거짓 왜서와 조작된 증언으로 남인 척살 및 병권 장악을 꾀하였던 것이 드러나고 인척인 [[홍치상]]과 함께 종실 [[동평군]]을 시역죄로 무고하려 했던 사실이 추가로 발각되었다. 뒤이어 사돈인 김만중이 1687년 대내에서 숙종을 조롱했던 조사석의 추문이 [[홍치상]]에 의해 만들어져 이사명이 김만중에게 전달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처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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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의 언니의 시숙이자 인현왕후의 외사촌오빠인 [[송병문]]([[송준길]]의 손자)의 장인이고 [[김제겸]]([[김수항]]의 손자. [[김창집]]의 아들)의 처조부이다. 숙종실록보궐정오에 수록된 "민진후(閔鎭厚)가 그(李翔)의 인척(姻戚)이란 이유로 사정(私情)에 끌려서 금령(禁令)도 마음에 두지 않고 곧바로 신설(伸雪)을 청하였으므로, 공의(公議)가 놀라워하였다." 문구는 이들의 관계가 특별했음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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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숙종 20년 4월 1일 (무진) 원본356책/탈초본18책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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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청죄인 [[이시도]]가 유배형을 받고 밤중에 장희재의 집에 종복 4명을 동행하고 찾아가 칼을 들고 장희재의 암살을 꾀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장희재는 이를 관청에 알리지 않고 이시도를 포청으로 보내 형벌을 써서 배후를 묻게한 후 조용히 방면해주었다. 풀려난 이시도는 즉시 [[사헌부]]로 출두하여 유배를 떠나기 전에 인사를 하려고 장희재의 사가에 들렀는데 장희재가 위로하며 송별주를 대접하기에 얻어마시다가 별안간 장희재에게 가슴을 얻어맞고, 죄없이 끌려가 형장을 맞은 탓에 발가락이 부러졌음을 고발했다. 이를 조사한 후 승정원이 숙종에게 사건을 보고하여 이시도는 유배를 떠나야 할 죄인이 포도대장의 집에 장정을 데리고 가 암살을 꾀한 죄로 다시 해부에 체포되어 엄히 국문케 하였으며, 장희재는 이시도의 범행을 국가에 고발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풀어준 것과 사사로이 형벌을 가한 죄로 임시면직의 처분을 받았다가 4월 8일 장령 유집일의 주장으로 포도대장직에서 파직되었다. 4월 11일, 숙종이 돌연 이시도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며 유배를 가야 할 이시도에게 형장을 쓴 죄를 물어 장희재에게 유배형을 내리고 [[의금부]]로 긴급 압송했다.
[20]
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1일(무인) 8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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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선조 (조선)|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유폐되었던 경운궁(慶運宮: 현 덕수궁)이다.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된 후 [[권대운]]을 비롯한 [[남인]]과 [[소론]]이 한때 국모였던 이를 여염에 두는 것은 왕실의 체모를 깎는 것이라 하여 폐황후를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도록 선처했던 [[송 인종]]의 고사대로 별궁에 두고 의식(衣食)을 궁에서 책임지도록 하여야 한다고 수차례 상소하였으나 숙종의 완강한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갑술환국이 발생하고 열흘 째인 1694년 4월 9일, 숙종은 돌연 송 인종의 고사를 들어 폐비 민씨를 서궁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을 허가하고 수직 한 명을 붙여주었다.
[22]
실록
《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1일(무인) 3번째기사
[23]
실록
《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2일(기묘) 6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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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장희재가 숙빈 최씨의 외사촌 형부인 해성에게 돈 50냥을 주고 최씨의 외숙모 봉영을 입궁시켜 최씨(당시 숙원)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게 하여 독살토록 사주했다는 김인의 고변과 최씨의 증언은 윤5월 2일 [[소론]] 측의 강경한 주장으로 압송된 최씨의 외숙모 일가의 심문 결과, 봉영이 최씨의 출산 당시 입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과 궁에는 허가되지 않은 외부 음식을 들일 수 없어 고변대로의 실행이 불가능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회임 중인 왕의 유일한 후궁을 독살하기 위해 후궁에게 빌붙어 생계를 연명하던 유일한 친지에게 주었다는 단돈 50냥은 인정(人情)은 접어두고 시세와 비교해도 도저히 계산이 맞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지적으로 모두 허위임이 밝혀졌다.
[25]
실록
《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3일(경진) 2번째기사
[26]
문서
《숙종실록》에는 누락된 내용으로 《승정원일기》 4월 12일 ~ 4월 16일까지의 기사에 수록되어 있다.
[27]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숙종 20년 4월 16일 (계미) 원본356책/탈초본18책
[28]
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7일(갑신) 1번째기사
[29]
문서
남구만은 인현왕후의 인척으로, 인현왕후의 사촌올케 남씨([[민정중]]의 맏며느리. [[민진장]]의 처)가 남구만의 사촌누이이다.
[30]
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6월 1일(정유) 3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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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10월 3일(정유) 5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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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윤지완은 [[민진원]]의 장인 [[윤지선 (문신)|윤지선]]의 아우로, 인현왕후의 둘째 올케의 숙부이다.
[33]
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윤5월 27일(계사) 2번째기사
[34]
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28권, 21년(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3월 30일(신묘) 3번째기사
[35]
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 29권, 21년(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8월 3일(임진)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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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영조 말년에 남인도 관직을 받았으나 정조가 즉위하였을 당시 5품 이상의 남인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던 만큼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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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은 [[영빈 김씨]]의 외재종동생으로, 영빈 김씨의 외조부인 [[이정영]]의 아우 [[이장영]]의 손자이다. 영빈 김씨의 외사촌아우이자 [[이문정]]의 재종형제인 [[이진유]] 형제가 왕세제 책봉을 반대하고 [[신임사화]] 때 [[노론]]4대신을 처형할 것을 가장 앞에서 주장했던 장본인이었기에 [[영조]] 즉위 후 노론의 집중 공격으로 가문이 몰락할 뻔 하였으나 이정영이 경신대출척 때 [[김석주]] [[민정중]]과 뜻을 함께 했던 노론계였고, 영조의 즉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던 영빈 김씨의 외가인 덕분인지 당사자인 이진유 형제만 벌을 받았을 뿐이다. 본명이 [[이진정]]이었던 이문정은 가문의 돌림자인 진(眞)을 문(文)으로 바꾸고 이진유 형제가 간사하여 오래전부터 상종하지 않았음을 피력하며 희빈 장씨를 악녀로 묘사하고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영웅으로 미화한 [[수문록]]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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