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등처행중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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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동등처행중서성은 1280년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 설치한 기구이다. 고려와 요동을 관할하며 침략 준비를 담당했으며, 1281년 일본 원정 실패 후 해산되었다가 1287년 재설치되었다. 이후 세 차례의 일본 원정은 실패했지만, 정동등처행중서성은 고려 통치 기구로 기능했으며, 고려 국왕이 장관을 맡는 것이 관례였다. 이 기구는 고려 왕실의 변질과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고려는 원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심양왕과의 관계에서 정치적 문제를 겪었으며, 공민왕 대에 이르러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혁을 추진했으나, 권문세족의 반발과 홍건적의 침입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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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등처행중서성 | |
---|---|
개요 | |
국가 | 원나라 |
존속 기간 | 1287년 ~ 1368년 |
수도 | 다이도 |
정치 체제 | 행정 기관 |
역사 | |
설립 | 1287년 |
폐지 | 1368년 |
주요 인사 | |
수장 | 승상 |
언어 | |
공용어 | 몽골어, 한어 |
2. 변천
고려는 원나라와 강화하여 복속된 후, 원나라의 강요로 일본 정벌에 참여했다. 원나라는 고려를 통해 일본에게 조공을 받기를 원했고, 남송 공략을 위한 전략으로 고려와 일본을 이용하려 했다.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원정이 이루어졌으나 모두 실패했다. 김방경은 고려군 중군장으로 참전했으나 1차 원정은 실패했고, 2차 원정은 태풍으로 실패했다. 이 원정으로 고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특히 농민들은 새로운 동원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원나라의 간섭으로 고려 왕실은 크게 변질되었다. 원종은 임연 부자를 제거하고 삼별초의 대몽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원나라의 힘을 빌렸다. 왕권 강화를 위해 원나라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들였고, 그 소생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 즉 속국(屬國)이 되었다.[1] 이후 역대 왕들은 세자 시절 볼모(독로화, 禿魯花)로 북경에 머물렀고, 몽골식 이름, 변발 등 몽골풍을 따랐다.[1]
원나라 황제는 고려 왕을 즉위시키거나 폐위시켰고, 사형하거나 귀양 보내기도 했다.[1] 고려 왕은 원나라의 일개 제후가 되었고, 왕실의 격도 낮아졌다.[1] 왕은 묘호에 '조(祖)'나 '종(宗)'을 붙일 수 없었고, 대신 '왕(王)'자를 사용했으며, 원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해 '충(忠)'자를 덧붙였다. '짐(朕)'은 '고(孤)'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선지(宣旨)'는 '왕지(王旨)'로 격하되었다.[1]
관제도 축소, 개편, 폐합되었는데, 충렬왕 때 3성(三省)은 첨의부로 통합되고, 도병마사는 도평의사사로 개칭되었다. 이부(吏部)·예부(禮部)는 전리사(典理司)로, 호부(戶部)는 판도사(版圖司), 병부(兵部)는 군부사(軍簿司), 형부(刑部)는 전법사(典法司)로 바뀌었고, 공부(工部)는 폐지되었다. 충선왕은 관제 복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
원나라는 정동행성을 이용하여 고려를 직·간접으로 간섭했으나, 고려 군신의 반대로 그 효과는 크지 않았다. 원나라는 고려 영토에 쌍성총관부, 동녕부를 설치하고,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했지만, 고려는 쌍성총관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후에 되찾았다.
원은 고려에 금, 은, 포백(布帛), 곡물, 인삼, 해동청 등 경제와 관련된 여러 물품을 조공으로 요구했고, 심지어 처녀와 환관도 요구하였다.[1] 특히 해동청 징발을 위해 설치된 응방은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다.[1] 이로 인해 고려 농민은 고려와 원나라 양쪽에 의무와 책임을 이중으로 부담해야 했고, 결국 유민이 되어 소극적으로 반항하기도 했다.
원나라와 사이에 야기된 새로운 정치 문제는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심양왕과의 관계였다. 고려 왕족을 심양왕으로 임명한 것은 그 지방에 거주하는 고려인을 통제하는 데 편리할 뿐만 아니라 고려를 견제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 결과 고려 왕과 심양왕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였다.
2. 1. 일본 원정
고려가 원나라와 강화하여 복속된 후, 원나라의 강요로 일본 정벌에 참여하게 되었다. 원나라는 고려를 이용하여 일본에게 조공을 받기를 원했으며, 남송 공략을 위한 전략으로 고려와 일본을 이용하려 했다.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원정이 이루어졌으나 모두 실패했다. 1차 원정에서 고려의 김방경은 중군장으로 참전했으나 실패했고, 2차 원정은 태풍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러한 원정은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특히 농민들은 새로운 동원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었다.
2. 1. 1. 제1차 일본 원정
고려가 원나라와 강화하여 복속된 후 처음 겪은 시련은 일본 정벌이었다. 원나라는 일찍부터 고려를 통해 일본에게 조공을 받기를 원했다. 한편으로는 남송 공략을 위한 전략으로, 해상을 이용해 송나라와 교류가 잦았던 고려와 일본을 활용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제1차 원정이 있었다. 고려의 김방경은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원군과 함께 출정하였으나, 이 원정은 실패하였다. 1281년(충렬왕 7년)의 제2차 원정 또한 태풍으로 인해 실패했다. 두 차례의 원정은 고려에 큰 피해를 입혔고, 이로 인해 동원된 농민들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2. 1. 2. 제2차 일본 원정
1274년의 1차 원정에 이어 1281년(충렬왕 7년)에 제2차 원정이 이루어졌으나, 이 역시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였다.[1] 두 차례에 걸친 원정은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특히 농민들은 새로운 동원으로 인해 형언하기 어려운 참상을 겪었다.[1]2. 2. 고려 왕실의 변질
원나라의 간섭으로 고려 왕실은 크게 변질되었다. 원종은 임연 부자를 제거하고 삼별초의 대몽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원나라의 힘을 빌렸다. 왕권 강화를 위해 원나라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들였고, 그 소생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 즉 속국(屬國)이 되었다.[1] 이후 역대 왕들은 세자 시절 볼모(독로화, 禿魯花)로 북경에 머물렀고, 몽골식 이름, 변발 등 몽골풍을 따랐다.[1]2. 2. 1. 원나라의 내정 간섭
원나라 황제는 고려 왕을 즉위시키거나 폐위시켰고, 사형하거나 귀양 보내기도 했다.[1] 고려 왕은 원나라의 일개 제후가 되었고, 왕실의 격도 낮아졌다.[1] 왕은 묘호에 '조(祖)'나 '종(宗)'을 붙일 수 없었고, 대신 '왕(王)'자를 사용했으며, 원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해 '충(忠)'자를 덧붙였다.[1] '짐(朕)'은 '고(孤)'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선지(宣旨)'는 '왕지(王旨)'로 격하되었다.[1]2. 2. 2. 왕실 권위 격하
원나라로 인해 고려 왕실은 크게 변질되었다. 원종은 원나라의 힘을 빌려 임연 부자를 제거하고 삼별초의 대몽 항쟁을 진압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원나라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들였고, 그 소생의 아들을 왕으로 삼아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 즉 속국(屬國)이 되었다. 이후 역대 왕들은 세자 시절 볼모(독로화, 禿魯花)로 북경에 머물렀고, 몽골식 이름, 변발, 의복을 착용하고 몽골어를 사용했다. 원나라 황제는 고려 왕의 즉위, 폐위, 사형, 귀양 등을 결정했다.[1]고려 왕은 독립국 통치자가 아닌 원나라 제후가 되었고, 왕실의 격도 낮아졌다. 왕은 '조(祖)'나 '종(宗)' 대신 '왕(王)'자를 붙인 묘호를 사용했고, 원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담아 '충(忠)'자를 덧붙였다. '짐(朕)'은 '고(孤)'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선지(宣旨)'는 '왕지(王旨)'로 격하되었다. 왕위 폐립(廢立)은 원나라에 의해 좌우되었다.[1]
관제도 축소, 개편, 폐합되었는데, 충렬왕 때 3성(三省)은 첨의부로 통합되고, 도병마사는 도평의사사로 개칭되었다. 이부(吏部)·예부(禮部)는 전리사(典理司)로, 호부(戶部)는 판도사(版圖司), 병부(兵部)는 군부사(軍簿司), 형부(刑部)는 전법사(典法司)로 바뀌었고, 공부(工部)는 폐지되었다. 충선왕은 관제 복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
2. 3. 왕조의 유지
원나라는 정동행성을 이용하여 고려를 직·간접으로 간섭했으나, 고려 군신의 반대로 그 효과는 크지 않았다. 또한 원나라는 고려 영토에 쌍성총관부, 동녕부를 설치하고,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했지만, 고려는 쌍성총관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후에 되찾았다.2. 4. 조공 요구
원은 고려에 금, 은, 포백(布帛), 곡물, 인삼, 해동청 등 경제와 관련된 여러 물품을 조공으로 요구했고, 심지어 처녀와 환관도 요구하였다.[1]2. 4. 1. 응방 설치와 폐단
원은 고려에 금, 은, 포백(베와 비단), 곡물, 인삼, 해동청 등 경제와 관련된 여러 물품을 요구했고, 심지어 처녀와 환관까지 요구하였다. 특히 해동청 징발을 위해 널리 설치된 응방은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다.[1] 이로 인해 고려 농민은 고려와 원나라 양쪽에 의무와 책임을 이중으로 부담해야 했고, 결국 유민이 되어 소극적으로 반항하기도 했다.[1]2. 4. 2. 농민 경제 파탄
원은 여러 명목을 붙여 고려에 금, 은, 포백(布帛), 곡물, 인삼, 해동청(海東靑) 등 경제와 관련된 물품들을 징수하였고, 심지어 처녀와 환관(宦官)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해동청 징수에 응하기 위해 널리 설치된 응방(鷹坊)은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다. 이로 인해 농민은 고려와 원나라에 이중으로 의무와 책임을 부담해야 했다. 그 결과 농민은 유민이 되어 소극적으로 반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 고려의 귀족은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유민을 모아 경작시켰다.2. 5. 심양왕
원나라와 사이에 야기된 새로운 정치 문제는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심양왕과의 관계였다. 고려 왕족을 심양왕으로 임명한 것은 그 지방에 거주하는 고려인을 통제하는 데 편리할 뿐만 아니라 고려를 견제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 결과 고려 왕과 심양왕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것은 원나라가 바라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 그 목적을 달성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원나라의 고려 정책에서 주목해야 할 점의 하나이다.3. 원나라로부터 주권 회복과 개혁 추진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원 세력을 축출하면서 개혁은 본격화되었다. 공민왕은 정방을 혁파하여 인사 행정을 정상화하고 신흥 사대부들을 기용하였다. 또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토지 겸병과 양민의 불법적인 노비화를 시정하는 개혁에도 착수하였다. 1356년에는 기철 등의 부원 세력들이 처단되고 정동행성의 이문소가 혁파되었으며, 쌍성총관부 지역이 무력으로 수복되었다. 또한 원나라의 압력으로 변경되었던 관제가 3성·6부 등 본래 관제로 복구되었다. 공민왕은 이처럼 원나라에 맞서는 한편,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새로 일어난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친명 정책을 추진하였다.[1]
친원 세력은 축출되었지만, 토지 겸병과 양민의 불법 노비화 등을 상대로 한 개혁은 권문세족의 반발로 실패했고, 이 시기에 고려는 홍건적의 침입(1359년, 1361년)과 원나라의 침공(1363년)을 격퇴해야 했다.[1]
1365년 공민왕은 신돈을 기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권신들이 정권에서 축출되고 신흥 사대부 출신들이 대거 기용되었다. 또한 재설치된 전민변정도감이 활성화되어 권문세족이 탈취한 토지들이 원 주인에게 반환되고 노비에서 양민으로 해방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나, 신돈이 권문세족들의 반발과 자신의 실책으로 제거당하고 공민왕마저 시해당하여(1374)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1]
3. 1. 초기 개혁 시도 (충선왕, 충목왕)
1298년 충렬왕에게서 선위를 받은 충선왕은 즉위 교서를 통해 인사 행정과 토지 겸병 문제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 의지를 천명하였다. 충선왕은 정방을 폐지하고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하여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관제를 전반적으로 개정하였다. 그러나 부원 세력이 중심이 된 기득권 세력의 책동과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해 충선왕이 폐위되고 충렬왕이 다시 즉위하면서 개혁 정치는 실패하고 관제 개혁도 원점으로 돌아갔다.[1]1344년 충목왕 즉위 후에는 개혁 전담 부서인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어 개혁이 추진되었으나, 1347년 이 역시 부원 세력의 방해와 원나라의 간섭으로 실패하였다.[1]
3. 2. 신흥 사대부의 성장
중앙 조정의 정치가 표류하는 동안, 사회에서는 새로운 사회 주도층인 신흥 사대부(신흥 양반)층이 성장하고 있었다. 가중되는 수탈 속에서 농민들의 자구 노력이 이어지는 가운데, 신흥 사대부들은 새로운 농서(農書) 편찬 등을 통해 농업 기술 발전에 기여했고, 이는 농업 생산력 증가로 이어졌다. 지방에 생활 기반을 둔 소호족 지주층이었던 신흥 사대부들은 이러한 농업 생산력 증가를 통해 새로운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들은 선대가 지방 향리 출신인 경우가 많았으며, 과거에 급제하거나 군공(軍功)을 쌓아 문무품 관리직을 획득하였다. 또한, 사상적으로는 신유학(新儒學), 즉 주자학의 소양을 갖춘 지식층이었다. 이들은 점차 중앙에 진출하여 세력을 확대하였고, 사회 문제 개혁을 열망하였다.[1]3. 3. 공민왕의 개혁 정치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원 세력을 축출하면서 개혁은 본격화되었다. 공민왕은 정방을 혁파하여 인사 행정을 정상화하고 신흥 사대부들을 기용하였다. 또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토지 겸병과 양민의 불법적인 노비화를 시정하는 개혁에도 착수하였다. 1356년에는 기철 등의 부원 세력들이 처단되고 정동행성의 이문소가 혁파되었으며, 쌍성총관부 지역이 무력으로 수복되었다. 또한 원나라의 압력으로 변경되었던 관제가 3성·6부 등 본래 관제로 복구되었다. 공민왕은 이처럼 원나라에 맞서는 한편,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새로 일어난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친명 정책을 추진하였다.친원 세력은 축출되었지만, 토지 겸병과 양민의 불법 노비화 등을 상대로 한 개혁은 권문세족의 반발로 실패했고, 이 시기에 고려는 외적의 침입을 격퇴해야 했다.
3. 3. 1. 홍건적의 침입과 격퇴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퇴한 홍건적(紅巾賊)이 고려에 침입하였다.[1] 1363년 원나라의 침공도 물리쳤지만, 이 사건은 공민왕이 개혁을 추진하는 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1]3. 3. 2. 신돈의 등용과 개혁 좌절
1365년 공민왕은 기득권층과 연결되지 않은 한미한 출신의 승려 신돈(辛旽)을 기용하여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하였다. 권신들이 정권에서 축출되고 신흥 사대부 출신들이 대거 기용되었다. 또한 재설치된 전민변정도감이 활성화되어 권문세족이 탈취한 토지들이 원 주인에게 반환되고 노비로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양민으로 해방되기 시작했다.[1] 그러나 신돈이 권문세족들의 반발과 자신의 실책으로 제거당하고 공민왕마저 의문의 시해를 당하여(1374) 개혁도 실패로 끝났다.[1] 이처럼 공민왕의 내정 개혁은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신흥 사대부들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세력을 키움으로써 다음 단계 개혁의 기초가 되었다.[1]3. 4. 개혁의 의의와 한계
공민왕 대의 개혁 정치는 권문세족의 반발과 신돈의 실각, 공민왕의 시해로 실패로 끝났다.[1]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신흥 사대부들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세력을 키움으로써 다음 단계 개혁의 기초가 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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