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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등처행중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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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양등처행중서성은 원나라가 만주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행정 구역이다. 1269년 동경행성으로 시작하여 북경행성을 거쳐 1287년 요양행성이 설치되었으며, 원나라 멸망까지 유지되었다.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및 한반도 북부 지역을 관할했으며, 만호제를 통해 수렵 민족을 통치했다. 요양행정은 몽골 왕족, 한국의 홍씨 가문, 그리고 몽골 귀족 간의 균형을 이루며 만주 지역을 통치했고, 명나라의 만주 지배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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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등처행중서성
개요
유형원나라의 행중서성
존속 기간1271년 ~ 1368년
이전몽골 제국
이후북원
요양성의 원나라와 만주
요양성 내의 원나라의 만주
수도이저우
역사
주요 사건우리양카이 공략 (1387년)
정치
정치 체제원나라 계층 구조
대표
대표(정보 없음)
대리(정보 없음)
언어 및 종교
공용어(정보 없음)
종교(정보 없음)
기타
통화(정보 없음)

2. 역사

몽골 제국이 금나라를 정복한 후, 원나라 초기에는 금나라의 행정 제도를 따라 만주 지역에 노도원수부(路都元帥府)를 설치하여 군사 및 민정 업무를 함께 관할했다. 쿠빌라이 칸이 즉위하면서 군사 기구와 민정 기구가 분리되었고, 선무사(宣撫司), 선위사(宣慰司), 행중서성 등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1269년(지원 6년), 현재의 요양시에 동경행성(東京行省)이 처음 설치되었으나, 곧 행정 중심지가 북경으로 옮겨지며 북경행성(北京行省)으로 개칭되었다. 이는 훗날 요양행성의 전신이 된다. 북경행성은 1278년 폐지되고 북경선위사(北京宣慰司)로 개편되었다. 이러한 행성의 설치와 폐지는 요동 지역의 통제를 강화하려는 쿠빌라이 칸과 지역 기득권을 지키려는 옷치긴 왕가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4]

1286년(지원 23년), 북경선위사의 건의로 동경행성이 다시 설치되었으나, 이는 옷치긴 왕가를 비롯한 동방 왕족들의 반발을 사 나얀의 난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4] 1287년 쿠빌라이 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얀의 난을 진압한 후, 같은 해 10월에 요양행성이 최종적으로 설치되어 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요양행성은 금나라의 부(府)·주(州)·현(縣) 제도를 기반으로 했지만, 전쟁 등으로 인한 인구 감소로 속현의 수는 크게 줄었다. 또한 일반적인 주현제 외에 여진족 등 수렵 민족을 통치하기 위한 만호제(萬戶制)가 병행되었다는 특징이 있다.[1] 행정 운영에는 몽골 귀족뿐 아니라 고려 출신 홍다구를 비롯한 홍씨 가문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2] 쿠빌라이 칸은 반란 이후 고려 왕실, 지역 몽골 귀족, 만주 내 한인 공동체 등 다양한 세력 간의 균형을 통해 지역 안정을 꾀했다.[3]

14세기 동안 만주 지역은 비교적 안정되었으나, 원 조정은 여전히 행정 감찰을 위해 특별 사절을 파견하는 등 중앙 통제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한편 원나라는 군사 원정을 통해 사할린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정동원수부(征東元帥府)를 설치하기도 했다. 1368년 홍건적의 난으로 원나라가 멸망한 후, 만주 지역은 잠시 북원의 통치 하에 놓였다. 이후 나하출이 세력을 형성했으나 1387년 명나라의 공격으로 항복하면서 만주는 명나라의 통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2. 1. 설치 이전

몽골 제국1211년부터 금나라를 공격하여 1234년까지 만주를 포함한 화북 지역 대부분을 정복하였다.[1] 원나라가 성립된 직후에는 옛 금나라의 행정 기구를 따라 북경부(北京府) 등 노도원수부(路都元帥府)를 설치하여 만주 지역의 군사적 진압과 민정 사무를 함께 처리하였다. 쿠빌라이 칸이 즉위한 이후에는 선무사(宣撫司), 선위사(宣慰司), 행성(行省) 등이 설치되면서 군사 기구와 민정 기구가 점차 분리되었다.

1269년(지원 6년), 현재의 중국 요령성 요양시에 동경행성(東京行省)이 처음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훗날 요양등처행중서성의 전신이 된다. 그러나 곧 행정 중심지인 성회(省会)가 북경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북경행성(北京行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북경행성은 1278년(지원 15년)에 폐지되고 북경선위사(北京宣慰司)로 개편되었다.

동경행성 설립 초기 책임자는 무칼리의 후예인 두련가 국왕(頭輦哥國王)이었으나, 그의 통치 과정에서 여러 불법 행위가 문제가 되어 1274년(지원 11년) 중서우승상 염희헌(廉希憲)이 평장정사(平章政事)로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칭기즈 칸의 막내동생 테무게 옷치긴의 후손으로서 요동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옷치긴 왕가의 타가차르를 견제하려는 중앙 정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4] 실제로 행성의 설치와 폐지가 반복된 배경에는 요동 지역에 대한 중앙 통제를 강화하려는 쿠빌라이 칸과, 이 지역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옷치긴 왕가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자리 잡고 있었다.[4]

1286년(지원 23년), 북경선위사였던 이레그 사칼(亦力撒合)의 건의로 동경행성이 다시 설치되었으나, 이는 옷치긴 왕가를 중심으로 한 동방 왕가들의 불만을 증폭시켜 이듬해 나얀의 난이 발발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4]

행정 구역 편제는 기본적으로 금나라 시기의 부(府)·주(州)·현(縣) 체제를 기초로 하였으나, 전쟁 등으로 인한 인구 감소의 영향으로 예속된 현의 수는 이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또한, 일반적인 주현제 외에도 여진족과 같은 수렵 민족들을 통치하기 위한 군사·행정 단위인 만호제(萬戶制)가 유지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원나라, 약 1294년

2. 2. 설치와 변천

원 왕조는 성립 직후 옛 왕조의 행정기구를 답습해 북경부(北京府) 등 노도원수부(路都元帥府)를 설치하고 만주 지역의 진압 및 민정 사무를 행하였다. 쿠빌라이 칸이 즉위한 뒤 선무사(宣撫司), 선위사(宣慰司), 행성(行省) 등이 설치되고, 군사기구와 민정기구가 분리되었다.

1269년(지원 6년)에 현재의 중국 요령성 요양시에 동경행성(東京行省)을 설치하였으나, 곧 성회(省会, 행정 중심지)가 북경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북경행성(北京行省)으로 개칭하였다. 이것이 요양행성의 전신이다. 북경행성은 1278년(지원 15년) 폐지되고 대신 북경선위사(北京宣慰司)로 개편되었다. 동경행성 설립 초기에는 칭기즈 칸의 공신 무칼리의 후예인 두련가 국왕(頭輦哥國王)이 그 책임자로 행성의 사무를 처리하였으나, 많은 불법행위가 문제가 되어 1274년(지원 11년) 중서성 우승상 염희헌(廉希憲)이 평장정사(平章政事)가 되어 두련가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는 칭기즈 칸의 막내동생 테무게 옷치긴의 후손으로써 요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옷치긴 왕가의 타가차르에 대한 견제에서 나온 조치이기도 했다. 행성의 잦은 철폐와 재설치는 요동 지역을 통치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쿠빌라이 칸과 요동 지역에서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옷치긴 왕가의 반발 및 대립과 관련이 있었으며, 이러한 갈등은 1286년(지원 23년)의 세 번째 행성 설치 시도 이후 나얀의 난으로 이어졌다.[4]

1286년(지원 23년) 북경선위사 일리사카(亦力撒合)의 건의로 다시 동경행성이 설치되고, 행성을 옷치긴 왕가의 속령과 가까운 함평부(咸平府, 현재 요령성 개원현)로 옮겼다. 그러나 이 동경행성은 다시금 5개월 만에 폐지되었다. 이듬해인 1287년(지원 24년) 4월, 나얀은 동방의 여러 왕가와 일부 서방 여러 왕가들을 규합해 난을 일으켰다(나얀의 난). 난은 2개월 뒤 시라무렌 강 부근에서 쿠빌라이 칸이 직접 지휘하는 군에 나얀이 사로잡혀 처형되면서 일단락되었으나, 카다안(哈丹) 등 잔당의 저항은 1292년 압록강 부근에서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에 패퇴할 때까지 5년이나 이어졌다. 나얀이 쿠빌라이 칸에게 잡혀 죽은 뒤인 1287년(지원 24년) 10월에 다시금 요양행성이 설치되었고, 이후 폐지되는 일 없이 원 왕조 멸망까지 사용되었다.

요양행성은 금나라가 사용했던 부(府)·주(州)·현(縣)을 기초로 설치되었으나, 전쟁 등으로 인한 인구 감소로 속현의 수는 이전에 비해 대폭 감소되었다. 또한 주현제 외에도 수렵민족인 여진족을 통치하기 위한 만호제(萬戶制, 투먼)가 유지되었다는 특징이 있다.[1] 14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요양행성의 수도는 의주(懿州)에 위치했다.[2]

요양행성의 운영은 순수한 문민 행정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동북아시아 엘리트의 일원으로서, 고려홍씨 가문은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요양 등처행중서성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홍다구는 몽골 왕자 나얀과 카단이 패배한 후 1287년에 행정을 이끌었다. 카단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개경을 공격했을 때, 원나라 중서성은 홍다구를 특별히 임명하여 요하 동쪽 지역을 진정시키고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홍다구의 동생과 아들은 나중에 1290년대와 1300년대 동안 그의 자리를 맡았다. 또한 도르지와 같은 몽골 귀족들도 만주에서 일반 행정의 고위직을 역임했다.[2]

나얀과 카단의 반란 이후 이 지역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쿠빌라이 칸의 노력은 몽골 통치 하의 만주의 복잡한 특성을 반영한다. 요양행성의 설립은 만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그의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는 또한 고려의 홍다구와 같은 충성스러운 인물들을 만주 행정부의 고위직에 임명했다. 마지막으로, 쿠빌라이 칸은 나얀의 친척들이 그의 토지와 특권을 유지하도록 신중하게 허용했다. 원 조정은 개별 구성원에게 맞서야 할 때에도 몽골 귀족 전체의 충성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고려 왕위, 지역 몽골 귀족, 만주의 한인 공동체 지도자, 그리고 자신의 조정의 이익을 균형 있게 유지하여 북동 지역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3]

14세기 동안, 원 조정과 만주의 제왕들 사이에는 공개적인 군사적 갈등이 없었다. 요양행정은 이전 수십 년보다 더 많은 지역 통제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원나라는 여전히 만주의 관리들을 지원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특별 사절을 파견하여 사찰을 실시할 필요성을 느꼈다. 요약하면, 몽골 조정은 자체적인 이익, 중국인, 중심적인 지역 행정, 그리고 이 지역의 몽골 왕족 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원사(元史)에 따르면, 원나라는 몽골의 사할린 침략을 통해 사할린을 침략하여 구위(骨嵬, Gǔwéi)를 군사적으로 제압했고, 1308년까지 사할린의 모든 주민이 원나라에 복종했다. 아무르강 하류와 사할린 주변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정동원수부(征東元帥府)라는 군사 기관이 설립되었다. 예순 테무르 사망 후 두 개의 수도의 전쟁으로 알려진 원나라의 내전 동안, 만주와 동몽골에 주둔한 몽골 왕족과 고위 몽골 관료들은 전쟁의 양쪽 편에서 싸웠다. 1368년 명나라에 의해 몽골 원나라가 무너뜨려진 홍건적의 난 이후, 만주는 한동안 몽골에 근거지를 둔 북원의 몽골 통치하에 있었다. 1362년부터 만주에 있던 원나라 관리인 나하출은 이 지역의 몽골 부족에 대한 패권을 차지했다. 1387년 명나라는 나하출을 공격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파견했다. 이 작전은 나하출의 항복으로 종결되었고, 만주는 명나라의 통치 하에 놓였다.

2. 3. 원나라의 통치 방식

몽골 제국만주를 정복한 후 기존의 금나라 통치 구조를 해체했지만, 즉시 강력한 중앙 집권적 통제를 확립하지는 않았다. 대신 지역 안정을 유지하면서 경제적 및 군사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유동적인 통치 체제를 개발했다. 쿠빌라이 칸원나라를 세우면서 만주는 공식적으로 원의 영토가 되었고, 1269년에는 요양 등처행중서성이 설치되어 만주 지역과 북동부 한반도 일부까지 관할하게 되었다.[4]

행정 체계는 기본적으로 금나라의 부(府)·주(州)·현(縣) 제도를 계승했지만, 오랜 전쟁으로 인한 인구 감소 때문에 실제 운영되는 속현의 수는 이전 시대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또한 기존의 주현제 외에도, 여진족과 같은 수렵 민족 집단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만호제(만호 단위의 군사·행정 조직)를 병행하여 운영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만주 지역의 다양한 민족 구성을 고려한 통치 방식이었다.

요양행성의 운영은 단순히 몽골인이나 한인 관료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는 고려 출신인 홍다구를 비롯한 홍씨 가문이 행성 운영에 깊이 관여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나얀과 카단의 반란이 진압된 후, 홍다구는 1287년 쿠빌라이 칸의 신임을 받아 행성의 책임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요동 지역 안정화에 기여했다.[2] 그의 동생과 아들 역시 대를 이어 행정 요직을 차지했다. 이와 함께 도르지와 같은 몽골 귀족들도 행정 고위직을 역임하며, 요양행성이 다양한 배경의 인물들이 참여하는 복합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보여준다.[2]

쿠빌라이 칸은 나얀의 난 이후 만주 지역의 질서를 회복하고 통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고려 왕실, 지역의 몽골 귀족, 만주 내 한인 공동체 지도자, 그리고 원 조정 자체의 이해관계를 신중하게 조율하며 균형을 맞추려 했다.[3] 반란에 가담했던 나얀의 친족들에게도 일정한 지위와 특권을 유지하도록 허용했는데, 이는 몽골 귀족 전체의 충성심을 확보하려는 현실적인 조치였다.[3]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원 조정과 만주 지역 몽골 왕족 간의 대규모 군사적 충돌은 줄어들었고, 요양행성은 이전보다 강화된 지역 통제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원 조정은 여전히 만주 지역의 행정관들을 지원하고 감시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특별 사절을 파견하는 등, 중앙 정부, 지역 행정, 몽골 왕족, 그리고 기타 주민 집단 간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한편, 원나라는 군사 원정을 통해 사할린의 원주민인 '구위'(骨嵬, Gǔwéi)를 복속시켰으며(몽골의 사할린 침략), 1308년경에는 사할린 전역을 영향력 아래 두었다. 이 지역과 아무르강 하류 일대를 관리하기 위해 정동원수부(征東元帥府)라는 별도의 군사 기구를 설치하기도 했다.

2. 4. 몽골의 사할린 침략

원사에 따르면, 원나라의 공식 역사인 몽골의 사할린 침략에서 몽골은 사할린을 침략하여 骨嵬|구위zho(Gǔwéi)를 군사적으로 제압했다. 1308년까지 사할린의 모든 주민이 원나라에 복종했다. 아무르강 하류와 사할린 주변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정동원수부(征東元帥府)라는 군사 기관이 설립되었다.

3. 지리



요양등처행중서성은 현재의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 중국 동북부 지역과 헤이룽강 유역, 우수리강 동쪽의 동해 연안 지역을 관할했다. 더 나아가 원나라고려 영토였던 한반도 북부에 동녕부쌍성총관부를, 제주도에는 탐라군민총관부를 설치하여 요양행성의 관할 아래 두었다.

4. 하부 행정구획

5. 현대적 의의

원나라 시기 만주 지역 통치의 한 형태였던 요양행성(요양 등처행중서성)은 과거 만주 지역의 복잡한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몽골 제국은 요양행성을 설치하여 만주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했으며, 이 과정에서 몽골 귀족뿐 아니라 고려의 홍씨 가문과 같은 지역 엘리트들이 행정에 참여하기도 했다.[2] 이는 당시 만주가 다양한 민족과 세력의 이해관계가 얽히는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요양행성을 포함한 만주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일로만 그치지 않고, 이후 일본 제국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우는 등 침략 행위를 벌이는 역사적 배경과 연결된다. 여러 세력이 각축을 벌였던 만주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근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목표가 되는 한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요양행성의 설립과 운영, 그리고 그 소멸 과정은 현대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구도와 여전히 남아있는 민족 간의 갈등 및 영토 문제 등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참조

[1]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2] 서적 Empire's Twilight: Northeast Asia Under the Mongols
[3] 서적 Empire's Twilight: Northeast Asia Under the Mongols
[4] 논문 몽골제국시기 옷치긴 왕가의 세력기반과 그 변화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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