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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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세권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활동한 사업가이자 민족운동가이다. 1888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나,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하이면 면장을 지냈다. 1920년 건양사를 설립하여 경성에서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도시한옥을 대량 건설, 북촌 한옥마을을 개발했다. 또한 조선물산장려운동, 조선어학회 등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재정적으로 지원했으며, 일제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196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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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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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정세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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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88년 4월 10일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고성군 |
사망일 | 1965년 9월 14일 |
매장지 | 대전현충원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2. 생애
정세권은 1888년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태어났다.[1] 12세에 진주 백일장에서 장원했고, 진주사범학교 3년 과정을 1년 만에 수료했다. 1905년 참봉에 제수되었고, 1910년 하이면 면장이 되었다. 저축계 발족, 방풍림 조성 등 생활 환경 개선에 힘쓰며 전국 우수 면장에 선정되었으나, 1912년 면장에서 사임했다. 1919년 경성으로 이주하여 1920년 9월 9일 건양사를 설립했다.
한일병합 이후 경성의 급격한 도시화와 주택난 속에서, 정세권은 조선인 주거지 확보를 위한 주택 건설 사업을 시작했다. 가회동(북촌)을 비롯하여 익선동, 봉익동, 창신동 등지에 대규모 한옥 단지를 조성했다. 특히, 전통 한옥에 근대적 생활양식을 접목한 개량 한옥(도시 한옥)을 보급하였다.[2] 1929년 《경성편람》에 따르면, 정세권은 매년 300여 가구의 주택을 신축하였다고 한다. 1934년에는 '건양주택'이라는 개량한옥 브랜드를 런칭하여 주택의 질을 높였다. 빈민층을 위한 주택 판매 제도(년부, 월부) 및 중개업을 실시하여 주택 구매 문턱을 낮추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건축자재 값이 상승하자, 정세권은 주택 건설을 중단하고 주택 임대 사업으로 전환하였다.[2] 1930년대 왕십리, 행당동, 뚝섬 일대의 토지를 대량 매입하여 일부 지역을 개발하기도 했다. 정세권의 부동산 개발은 단순한 이윤 추구를 넘어, 일제에 의해 잠식당하는 조선인의 주거 공간을 확보하고 민족 자본을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건축왕 정세권은 일제강점기에 자수성가한 사업가로서 조선인을 위한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신간회, 조선물산장려운동, 조선어학회 등에 참여하며 언론인 안재홍, 국어학자 이극로와 동지적 관계를 맺었고, 이는 정세권의 일생과 사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낙원동 300번지에 조선물산장려회 회관을 지어 기증하고 재정을 담당했으며, 화동 129번지에 조선어학회 회관을 지어 기증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정세권의 민족운동 참여는 고문을 받고 뚝섬의 토지 35000평을 강탈당하는 등 일제의 방해와 탄압을 무릅쓴 것이었고, 이후 그의 사업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45년 이후 정세권 일가는 행당동에 거주하였다.[3] 한국 전쟁 발발 이후 1950년 9월 28일 비행기 폭격으로 다리를 크게 다쳐, 1.4 후퇴 때 가족만 부산과 제주도로 피란하고 정세권은 왕십리에 머물렀다.[3] 1950년대 말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로 혼자 낙향하였으며, 1965년 9월 14일 사망하였다.
2. 1. 생애 초반
1888년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태어났다.[1] 12세에 진주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고, 진주사범학교의 3년 과정을 1년 만에 수료하였다. 1905년 참봉에 제수되었고, 1910년 하이면 면장이 되었다. 저축계 발족, 방풍림 조성 등 생활 환경 개선에 힘쓰며 전국 우수 면장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1912년 면장에서 사임하였다. 이후 한동안 하이면에서 생활하다 1919년 경성으로 이주하였으며, 1920년 9월 9일 건양사를 설립하였다.2. 2. 부동산 개발
한일병합 이후 경성의 급격한 도시화와 주택난 속에서, 정세권은 조선인 주거지 확보를 위한 주택 건설 사업을 시작했다. 가회동(북촌)을 비롯하여 익선동, 봉익동, 창신동 등지에 대규모 한옥 단지를 조성했다. 특히, 전통 한옥에 근대적 생활양식을 접목한 개량 한옥(도시 한옥)을 보급하였다.[2] 1929년 《경성편람》에 따르면, 정세권은 매년 300여 가구의 주택을 신축하였다고 한다.1934년에는 '건양주택'이라는 개량한옥 브랜드를 런칭하여, 주택의 질을 더욱 높였다. 또한 빈민층을 위한 주택 판매 제도(년부, 월부) 및 중개업을 실시하여, 주택 구매의 문턱을 낮추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건축자재 값이 상승하자, 정세권은 주택 건설을 중단하고 주택 임대 사업으로 전환하였다.[2] 그는 1930년대 왕십리, 행당동, 뚝섬 일대의 토지를 대량 매입하여 일부 지역을 개발하기도 했다.
정세권의 부동산 개발은 단순한 이윤 추구를 넘어, 일제에 의해 잠식당하는 조선인의 주거 공간을 확보하고 민족 자본을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할 수 있다.
2. 3. 민족운동 참여
건축왕 정세권은 일제강점기에 자수성가한 사업가로서 조선인을 위한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대 최고 지식인들과 교류하였고, 민족자본가로서 민족운동에 재정적으로 기여하였다. 특히 일제에 맞서 신간회, 조선물산장려운동, 조선어학회 등에 참여하며 형성된 언론인 안재홍, 국어학자 이극로와의 동지적 관계는 정세권의 일생과 사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은 초기 민족운동 명망가들의 관념적인 계몽운동 차원에서 정세권의 참여로 실물 경제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정세권은 낙원동 300번지에 조선물산장려회 회관을 지어 기증하며 조선물산장려회의 재정을 담당하였다. 이극로의 열정적 활동에 감명받아 화동 129번지에 조선어학회 회관을 지어 기증하였고 재정적으로 조선어학회를 지원하였다. 물산장려운동은 정세권의 참여를 분기로 흥망성쇠가 갈렸고, 갖은 고초를 무릅쓰고 참여한 조선어학회 운동은 해방 후 최초의 한국어사전인 한글학회 큰 사전 간행이라는 성과를 남겼다. 민족자본가 정세권의 민족운동 참여는 실제 고문을 받고 뚝섬의 토지 35000평을 강탈당하는 등 일제의 방해와 탄압을 무릅쓴 것이었고, 이후 그의 사업 역시 쇠락의 길에 빠졌다.2. 4. 말년
1945년 이후 일가는 행당동에 거주하였다.[3] 한국 전쟁 발발 이후 1950년 9월 28일 비행기 폭격으로 다리를 크게 다쳐, 1.4 후퇴 때 가족만 부산과 제주도로 피란하고 정세권은 왕십리에 머물렀다.[3] 1950년대 말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로 혼자 낙향하였으며, 1965년 9월 14일 사망하였다.3. 정세권의 업적과 의의
정세권은 '건축왕'으로 불리며 경성의 부동산 지도를 재편하고 도시 규모를 바꾼 인물이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부동산 개발업자로서, 한옥 대단지를 조성하여 조선인의 주거 공간을 확보하고 주거 문화를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2]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맞서 선동 개발을 시작으로 북촌(가회동, 삼청동)과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 경성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조성하여 조선인들의 주거지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2]
그는 주택 건설뿐만 아니라 빈민층을 위한 주택 판매 제도와 중개업까지 담당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민족 운동에도 헌신했다.[2]
3. 1. 주거 문화 개선
정세권은 전통 한옥에 근대적 생활양식을 반영한 개량 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하여 조선인의 주거지를 확보하고 주거 문화를 개선하는 데 공헌하였다. 1920년대 경성은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주택 문제가 심각했으며, 일본인들이 도시를 점유하면서 조선인들은 주거 공간을 잃어 가고 있었다. 이에 정세권 등 조선계 건설업자들은 민간 주택 건설 사업에 진출하여, 넓은 토지를 쪼개 작은 규모의 한옥을 대량 공급함으로써 조선인의 주거 지역을 확보하였다.[2]정세권은 가회동 31번지(현재의 북촌 한옥마을)를 비롯하여 익선동, 창신동 등지에 대규모 도시 한옥 단지를 개발하였다. 그는 1929년 《경성편람》에서 매년 300여 가구의 주택을 신축하였다고 밝혔으며, 1934년에는 '건양주택'이라는 새로운 개량 한옥 브랜드를 만들기도 하였다.[2] 또한 빈민층을 위해 주택을 년부 또는 월부로 판매하는 제도를 마련하고, 건양사가 중개업까지 담당하게 하였다.[2]
3. 2. 민족 자본 육성
정세권은 부동산 개발로 번 돈으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민족 운동을 이끌었다.정세권은 조선물산장려운동 초기에 참여하여 이 운동이 실물 경제 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낙원동 300번지에 조선물산장려회 회관을 지어 기증하고 재정을 담당했다.[1] 조선어학회에도 참여하여 화동 129번지에 회관을 짓고 재정 지원을 했다.[1]
조선물산장려운동은 정세권의 참여를 기점으로 흥망이 갈렸고,[1] 조선어학회 운동은 해방 후 최초의 한국어 사전인 한글학회 큰 사전 간행으로 이어졌다.[1]
정세권은 민족 운동 참여로 인해 일제로부터 고문을 당하고 뚝섬의 토지 35,000여 평을 강탈당하는 등 탄압을 받았으며,[1] 이후 그의 사업은 쇠락했다.[1]
3. 3. 도시 경관 형성
정세권은 1920년대 선동 개발을 시작으로 가회동과 삼청동 일대의 북촌,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 경성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조성하였다. '건축왕'이라 불리며 경성의 부동산 지도를 다시 그리고 도시의 규모를 바꾸었다.[2]정세권은 토지를 매입하여 대규모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며 도시 개발과 주택 공급을 담당하는 근대적 개발업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부동산 개발업자라고 할 수 있다. 정세권은 시대를 읽는 사업가의 통찰력과 기획력으로 경성 전역의 부동산 개발을 주도하였다.[2]
정세권은 전통 한옥에 근대적 생활양식을 반영한 개량한옥을 대량 공급하며 조선인의 주거지를 확보하고 조선인의 주거문화를 개선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는 부동산 개발로 자수성가한 민족자본가로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 운동의 재정을 담당하며 일제에 맞선 민족운동가였다.[2]
한일병합 이후 경성에는 근대식 건물과 거리가 만들어지고, 총독부는 근대적 도시 계획을 기획하며 경성을 디자인하고 있었다. 급속한 도시화 과정을 거치며 인구가 과밀해져 경성은 도시 문제, 주거 문제에 휩싸였다. 일본인들이 이주하며 도시를 점유하여, 1910년대 중반 경성은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청계천 남쪽과 조선인이 다수인 청계천 북쪽으로 양분된 상태였다.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청계천 남쪽 지역이 급증한 일본인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총독부는 정부 기관을 국공유지에 먼저 입지시킨 뒤 일본인을 진출시키는 방식으로 청계천 북쪽으로의 일본 세력 확장을 주도하였다. 이에 조선인의 영역을 지키고자 정세권 등 조선계 건설업자는 민간 주택 건설 사업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기존 귀족이 소유하였던 넓은 토지나 택지를 쪼개 여러 채 작은 규모의 한옥을 대량 공급함으로써 조선인의 주거지역을 확보하였으며,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밀려나면서 고유의 주거지역과 주거방식을 잃어버리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한옥 집단지구에 공급된 한옥은 전통한옥의 구조를 ㅁ자 안에 집약하고, 부엌과 화장실을 신식으로 개선하는 등 근대적인 편리함과 생활양식을 반영한 도시한옥(개량한옥)이었다.[2]
정세권은 가회동 31번지를 대규모 도시한옥 단지로 개발하였는데, 이곳은 현재 북촌 한옥마을이 되어 있다. 익선동 166번지와 33번지는 각각 누동궁과 완화군의 사저를, 창신동 651번지는 조병택의 대저택을 매입하여 개발하였다. 그 밖에 1920년대 말까지 체부동 163번지, 계동 99·101번지, 재동 54번지, 봉익동 11번지 등의 지역에도 한옥을 건설하였다. 그는 1929년 《경성편람》에서 매년 300여 가구의 주택을 신축하였다고 밝혔다. 또 한옥을 더욱 개선하여 1934년에는 ‘건양주택’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개량한옥 브랜드를 만들고 건설하였다.[2]
정세권은 주택 건설뿐만 아니라 빈민층을 위하여 년부 또는 월부로 주택을 판매하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건양사로 하여금 중개업까지 담당하게 하였다. 1937년의 중일전쟁 이후 건축자재 값이 상승하여 이전과 같은 채산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정세권은 신규 주택 건설을 중단하고 주택 임대 사업을 개시하였다. 1930년대 일본인 세력 확장이 왕십리 방향으로 이루어지자, 현재의 하왕십리, 행당동, 뚝섬 일대 토지를 대량으로 매입하였으며, 이 가운데 일부 지역을 개발하였다.[2]
참조
[1]
뉴스
나는 어게 成功하얏나 (五)
http://211.43.216.33[...]
매일신보
1936-05-21
[2]
뉴스
戰時下의經營百態 - 建築業鄭世權氏談
http://211.43.216.33[...]
매일신보
1939-01-06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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