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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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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1대 달라이 라마 케둡 갸초는 1838년 티베트 동부에서 태어나 1842년 라사의 포탈라궁에서 즉위했다. 그의 재위 기간 중 티베트는 도그라 전쟁과 네팔-티베트 전쟁을 겪었으며, 내정에서는 섭정 체제와 권력 다툼으로 혼란을 겪었다. 17세에 급사하였으며, 그의 죽음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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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달라이 라마
기본 정보
제11대 달라이 라마, 삼예의 우체에 있는 벽화
존칭존자 제11대 달라이 라마
재임 기간1842년–1855년
선임자최취림 갸초
후임자틴레이 갸초
티베트어མཁས་གྲུབ་རྒྱ་མཚོ་
와일리 표기mkhas grub rgya mtsho
라싸 발음 (IPA)kʰɛtʂup catsʰɔ
중국어 간체凯珠嘉措
좡위 핀인Kaichub Gyaco
아버지체왕 돈드룹
어머니융드룽 부트리
출생일1838년 10월 9일
출생지캄 지방, 가르탕 사원, 청나라 티베트
사망일1855년 3월 1일
사망지라싸, 포탈라 궁, 청나라 티베트
참고 문헌

2. 출생과 즉위

1838년 티베트 동부 캄 지방에서 케둡 갸초가 태어났다. 그는 1841년에 10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로 인정받았으며, 판첸 라마에게 '케둡 갸초'라는 승명을 받았다.[7][10][11] 11대 달라이 라마가 태어난 캄 지방의 갈탈은 7대 달라이 라마가 망명 생활을 했던 곳으로, 중앙 티베트와 동부 변방 지역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9] 케둡 갸초는 1842년에 포탈라궁에서 11대 달라이 라마로 즉위하였다.[7][10]

2. 1. 환생자 탐색과 인정

1837년, 10대 달라이 라마 추르티 갸초가 21세의 젊은 나이로 서거하였다.[7] 공식적으로는 건강이 좋지 않아 병사했다고 한다.[7][9] 그러나 섭정 체몽린 옹완 장벨 추르티의 내정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섭정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9]

10대 달라이 라마 서거 후, 환생자를 찾는 과정이 진행되었다.[7] 1838년 11월, 티베트 동부 캄 지방의 북부 갈탈에서 11대 달라이 라마가 될 아이가 태어났다.[7] 아버지는 체탕 돈둡, 어머니는 윤둔 부티이다.[7]

1841년, 이 아이가 11대 달라이 라마로 인정받았다.[7] 당시 판첸 라마였던 템파이 니파는 이 아이에게 삭발 의식을 거행하고 "케둡 갸초"라는 승명을 수여했다.[7][10][11]

2. 2. 승명 수여와 즉위

판첸 라마 7세 빳덴 뗀빠이 니마는 1841년, 11대 달라이 라마로 인정받은 아이에게 삭발 의식을 거행하고 "케둡 갸초(མཁས་གྲུབ་རྒྱ་མཚོ།|케둡 갸초bo)"라는 승명을 수여했다.[7][10][11] 1842년 5월 25일, 케둡 갸초는 세 살의 나이로 라사포탈라궁 "황금의 자리"에서 11대 달라이 라마로 정식 즉위하였다.[7][10]

3. 짧은 재위와 혼란스러운 정국

11대 달라이 라마의 재위 기간 동안 티베트는 시크 왕국에 예속된 카슈미르 지방의 도그라 세력과 도그라 전쟁(1841-1842)을, 남쪽의 네팔 왕국 고르카 왕조와 네팔-티베트 전쟁(제2차 굴카 전쟁)을 치렀다. 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 패배와 태평천국의 난으로 티베트를 지원할 여력이 없어, 동아시아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10][12] 티베트 내부에서는 11대 달라이 라마 즉위 당시 섭정이었던 체몽린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는 등 내우외환의 상태에 있었다.

3. 1. 도그라 전쟁 (1841-1842)

1841년, 시크 왕국에 예속된 카슈미르 지방의 도그라 세력이 졸라왈 싱(Zorawar Singh) 장군의 지휘 하에 티베트 서부 갈리(Garli) 지역을 침공하면서 도그라 전쟁이 발발하였다.[10][12] 초기 티베트군은 갈(Gar)과 르톡(Rutok)의 시가지를 점령당하고 라다크에서 패배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으로 인해 티베트에 원군을 파병할 수 없었다.[10]

티베트 정부는 도그라의 침입에 맞서 수르칸 체텐 돌제(Surkan Tsewang Dorje)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대응하였다. 티베트군은 졸라왈 싱을 전사시키며 우세를 점하기도 하였으나, 영국과의 접촉으로 근대화된 시크 왕조 군대의 강력한 무기에 다시 패배하였다.[10][13]

일진일퇴의 상황 속에서 티베트 정부는 샤타 완추크 겔포(Shabta Wangchuk Gyalpo) 장군과 우짱(Ü-Tsang) 지역의 병력을 지원군으로 파견하여 반격을 강화하였다. 11대 케둡 갸초(Kedrup Gyatso)가 즉위한 1842년, 티베트는 갈리를 탈환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라다크의 중심 도시 레(Leh)에서 조정이 이루어지면서 분쟁이 종식되었다.[10][12][14]

3. 2. 티베트 정부의 위기와 섭정 체제

11대 달라이 라마 재위 기간 티베트는 서쪽으로 시크 왕국에 속한 카슈미르 지방의 도그라 세력과 도그라 전쟁을, 남쪽으로 네팔 왕국의 고르카 왕조와 네팔-티베트 전쟁을 치렀다.[10][12] 그러나 청나라는 아편전쟁 패배와 태평천국의 난으로 티베트를 지원할 여력이 없었고, 이는 동아시아에서 청나라의 영향력 약화로 이어졌다.[10][12]

티베트 내부에서는 11대 달라이 라마 즉위 당시 섭정이었던 체몽린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체몽린은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에게만 허용된 복장을 하고, 각샤(내각)를 무시하며 라사 삼대 사원 중 데푼 사원과 간덴 사원을 소홀히 대하고 자신의 출신 사원인 세라 사원을 우대했다.[15][16] 10대 달라이 라마의 죽음에도 체몽린의 암살설이 제기되었다.

1844년, 섭정 체몽린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반란으로 번지면서 티베트는 위기를 맞았다.[15] 티베트 정부와 대사원들은 청나라 도광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도광제는 암반(주장대신)으로 기선을 파견했다.[15] 기선은 섭정과 대사원 간의 불화를 확인하고 체몽린을 폐위, 유형시키고 각샤의 권력을 회복시켰다.[15] 세라 사원의 일부 승려들이 반발했지만 곧 진압되었다.[15] 기선은 어린 11대 달라이 라마를 보좌하기 위해 7대 판첸 라마 템파이 니파에게 섭정직을 요청했고, 1844년 9월부터 약 8개월간 판첸 라마가 티베트를 통치했다.[15] 그러나 이 혼란 속에서 도그라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샤타 완추크 겔포가 실권을 잡았다.[17]

3. 3. 네팔-티베트 전쟁 (1855-1856)

1852년부터 1853년에 걸쳐 티베트와 네팔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18] 티베트의 부를 부러워한 고르카 왕국은 1855년 티베트 정부에 최후 통첩을 보냈고, 이에 맞서 카샤, 섭정, 암반이 남부 국경 지대에 장교를 파견했으며, 칙명 대신 샤타 완추크 겔보도 이에 합류했다. 이 사건은 네팔-티베트 전쟁으로 이어졌다.[17] 전투는 티베트의 패전으로 이어졌고, 1856년 1월 이후 샤타 대신을 중심으로 네팔과의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태평천국의 난으로 혼란스러운 청나라는 강화 회의에 단순한 참관인으로만 참가할 수 있었다.[17] 타파탈리 조약에 의해 티베트는 영토는 잃지 않았지만, 고르카 왕국의 속국이 되었고, 네팔에 매년 10000INR의 조공을 바쳐야 했다.[17][19] 또한 티베트는 네팔인의 티베트 내 치외법권을 인정해야 했다.[20]

4. 달라이 라마 11세의 죽음

1855년, 섭정 라덴 투르크는 11대 달라이 라마에게 권력을 이양했으나,[21] 이는 불과 11개월에 불과했다.[21] 11대 달라이 라마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티베트 국민의 지지 덕분에 짧은 재위 기간 동안 티베트의 종교 및 정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전해진다.[7] 그는 또한 『원숭이와 새의 이야기』라는 저서를 남겼는데, 이는 18세기 티베트와 네팔 사이의 전쟁(청-네팔 전쟁, 제1차 고르카 전쟁)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22]

1856년 1월 31일, 그는 라사의 포탈라궁에서 17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그의 죽음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21] --

11대 달라이 라마의 죽음으로 라덴 섭정이 2기(1856년-1862년)를 역임하게 되었고, 곧바로 12대 달라이 라마를 찾는 일이 시작되었다.[21] 이후 라덴 섭정과 샤타 칙명 대신이 권력을 놓고 다투면서 티베트는 다시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21]

앞서 언급했듯이 9대부터 12대까지의 네 명의 달라이 라마는 모두 요절했는데, 김무비사생은 그의 저서 『티베트 잠행 10년』(1958년판)에서 성인이 되기 전에 급사한 10대, 11대, 12대 세 사람은 독살에 의한 죽음이라고 추정하고 있다.[23][24]

5. 평가 및 영향

19세기 중반, 11대 달라이 라마의 재위 기간은 티베트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로 평가된다. 비록 14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시기 티베트는 안팎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시크 왕국에 예속된 카슈미르 지방의 도그라 세력과의 도그라 전쟁, 네팔 왕국 고르카 왕조와의 네팔-티베트 전쟁 등 외부 세력과의 전쟁이 연이어 발생했다.[10][12]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으로 혼란스러웠던 청나라는 티베트를 지원할 여력이 없었고,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10][12]

내부적으로도 11대 달라이 라마 즉위 당시 섭정이었던 체몽린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어나는 등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1845년 섭정직은 라덴 투르크에게 이양되었다.[15]

1849년, 11세가 된 11대 달라이 라마는 7대 판첸 라마에게 승려 서약을 받았다.[7] 1852년부터 1853년까지는 티베트와 네팔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18] 1855년 고르카 왕국은 티베트에 최후 통첩을 보냈고, 네팔-티베트 전쟁이 발발했다.[17] 티베트는 전쟁에서 패배했고, 타파탈리 조약을 통해 영토는 지켰지만 고르카 왕국의 속국이 되어 매년 10000루피의 조공을 바치고, 네팔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해야 했다.[17][19][20]

1855년, 섭정 라덴 투르크는 11대 달라이 라마에게 권력을 이양했지만, 11개월 만에 11대 달라이 라마는 포탈라궁에서 17세의 나이로 급사했다.[21] 그의 죽음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21]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11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종교 및 정치 지도자로서 역할을 수행했으며, 『원숭이와 새의 이야기』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7][22] 이 책은 18세기 청-네팔 전쟁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22]

11대 달라이 라마의 사망 이후, 라덴 섭정이 다시 섭정직을 맡았고(1856년-1862년), 12대 달라이 라마를 찾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21] 그러나 라덴 섭정과 샤타 칙명 대신 간의 권력 다툼으로 티베트는 다시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었다.[21]

일부 학자들은 9대부터 12대까지 달라이 라마들이 모두 요절한 것에 대해 독살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23][24]

참조

[1] 웹사이트 His Holiness the Eleventh Dalai Lama, Khedrup Gyatso http://www.dalailama[...] The Office of His Holiness The Dalai Lama 2012-07-16
[2] 간행물 Life and times of the Eighth to Twelfth Dalai Lamas 1982
[3] 서적 Tibetan Civilization Stanford University Press 1972
[4] 간행물 The Eleventh Dalai Lama, Khendrup Gyatso 2011
[5] 서적 The Fourteen Dalai Lamas: A Sacred Legacy of Reincarnation Clear Light Publishers
[6] 문서 ダライ・ラマ(ཏཱ་ལའི་བླ་མ་) は、チベット仏教ゲルク派の高位のラマであり、チベット仏教で最上位クラスに位置する化身ラマの名跡である。その名は、大海を意味するモンゴル語の「ダライ Далай,ཱ་ལའི」と、師(上人)を意味するチベット語の「ラマ བླ་མ་」とを合わせたものである。
[7] 웹사이트 歴代ダライ・ラマ法王 http://www.tibethous[...]
[8] 문서 ガンデンポタンとは、1642年にダライ・ラマを国主としてチベットに成立したダライ・ラマ政権の行政機関のことである。
[9] 문서 デエ, 今枝訳(2005)pp.179-185
[10] 문서 『チベットの歴史と宗教』(2012)pp.73-75
[11] 문서 「ギャツォ རྒྱ་མཚོ་」とはチベット語で「海」をあらわす語で、モンゴル語の「ダライ Далай」に相当する。
[12] 문서 デエ, 今枝訳(2005)pp.185-187
[13] 문서 スルカン将軍の勇戦は長い間チベット西部住民の語り草となった。
[14] 문서 調停により、双方の友好関係と国境を確認し、通商の援助などについて合意した。ここにおいてチベットは単独で国際問題を解決したこととなる。
[15] 문서 デエ, 今枝訳(2005)pp.187-189
[16] 문서 カシャは、ダライ・ラマ7世が1751年に発足させた、チベットにおける内閣制度。大臣がそれぞれの責任範囲内でダライ・ラマを補佐し、大臣の合議で政治的決定をおこなう。この制度は現在でも利用されている。
[17] 문서 デエ, 今枝訳(2005)pp.189-190
[18] 문서 デエ, 今枝訳(2005)p.394
[19] 문서 チベットからネパールへの年貢は1953年までつづけられた。
[20] 문서 小松原(2005)p.202
[21] 문서 デエ, 今枝訳(2005)pp.191-194
[22] 문서 Stein(1972)p.269
[23] 문서 木村(1958)
[24] 문서 木村同書(1982年版)では58年版より婉曲的な表現が用いられ、有力貴族間の権力争いの犠牲になった可能性が高いと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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