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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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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농은 몽골 제국, 원나라, 북원, 청나라 시대에 걸쳐 존재했던 직위로, 특히 몽골 제국 시대에는 무칼리가 전군 조농으로 임명되었다. 원나라에서는 조정의 대신직을 겸임했으며, 북원 시대에는 카간 다음의 권위를 지니기도 했다. 청나라 시대에는 오르도스의 맹장이 조농직을 겸임했다. 조선에서는 지농이 사람의 이름으로 오해되기도 했다. 조농은 칭기즈 칸의 후손이나 가까운 친족이 임명되었으며, 오르도스 부족장의 칭호로 세습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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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논
지리 정보
개요
유형몽골의 작위
칸에 대한 관계칸의 친척
다른 이름진왕, 친왕, 제농, 길낭
상세 정보
설명조논은 몽골의 작위 중 하나이며, 칸의 친척에게 주어졌다. 원나라의 진왕(晉王)에 해당하며, 친왕(親王)으로도 불렸다. 청나라 시대에는 내몽골의 이커자오맹(伊克昭盟)에 속한 오르도스의 수장이 세습하는 작위였다.
역사적 맥락조논은 칸의 친척에게 주어진 작위로, 원나라의 진왕(晉王)과 유사한 지위를 가졌다.
작위의 세습청나라 시대에는 오르도스의 수장이 세습하는 작위가 되었다.
어원'조논'이라는 단어는 문헌에 따라 제농(濟農) 또는 길낭(吉囊)으로도 표기되었다.

2. 몽골 제국 시대

칭기즈 칸몽골 제국을 세울 때 무칼리를 전군 조농(ᠴᠢᠨᠦᠩmon)으로 임명했다. 원나라 시대의 조농은 조정의 대신직을 겸임하는 직위였다. 원나라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조농은 쿠빌라이 카안의 아들 노무간이었고, 그의 뒤를 이어 친킴의 아들이자 노무간의 조카인 카말라가 조농이 되었다. 카말라는 1292년부터 팔백궁의 능묘를 지키는 일도 겸하였다.

제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한 쿠빌라이 카안은 광대한 영토를 세 아들에게 나누어 통치하게 했다. 옛 금나라 영토(키타이)는 친킴에게, 옛 서하 영토(탕구트)는 망갈라에게, 그리고 노무간에게는 몽골 제국의 본거지인 몽골리아를 맡기는 '3대 왕국' 체제를 구축했다. 이것이 대원 울루스(원나라)의 기본 체제가 되었다. 그러나 노무간은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그의 가계는 끊겼고, 대신 친킴의 장남 카말라가 진왕(晋王)에 봉해져 몽골리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진왕은 몽골리아를 총괄하는 역할 외에도 선대 황제들의 제사를 지내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이슬람 역사가 라시드 웃딘의 『집사』( جامع التواريخ)에는 카말라가 '칭기즈 칸의 대오르도'가 있는 부르칸 칼둔 지역을 관리하며 선대 황제들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칭기즈 칸의 대 오르도'는 현재 몽골 헨티주에 위치한 아우라가 유적으로 추정되며, 발굴 조사를 통해 제사 유적이 확인되었다.

훗날 진왕에서 황제위에 오른 예순 테무르는 진왕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쿠빌라이 카안은] 나의 자애로운 할아버지 카말라를 진왕에 봉하시고, 칭기즈 칸의 네 개의 대 오르도를 통솔하게 하셨으며, 군대와 말, 몽골 국토 전체를 맡기셨다."

진왕의 지위는 카말라에서 아들 예순 테무르에게, 다시 그의 아들 파드마갸르포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천력의 난으로 인해 카말라의 직계 후손은 단절되었고, 파드마갸르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새로운 진왕은 임명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칭기즈 칸의 4대 오르도를 통괄하는' 진왕이라는 칭호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북원 시대에 조농은 카간의 신하로서 칭기즈 칸의 후손 중에서 임명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카간과 가까운 남성 친족이 임명되었고, 점차 카간 다음가는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후에는 오르도스 부족의 지도자가 조농직을 맡게 되었다. 1433년 톡토아부카 타이순 칸은 자신의 동생 아그바르진 지농을 조농으로 임명했다.

청나라 시대에는 오르도스 지역 익자오맹의 맹장이 조농직을 겸임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지농'이라는 직책명을 사람의 이름으로 잘못 알기도 했다.[1] 명나라의 일부 기록에서는 오르도스의 콩타이지이자 우익 3만호를 다스리던 지농 군빌리크 메르겐을 '길낭'(吉囊)으로 표기하면서 길낭 또는 지농이 사람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3. 원나라 시대

칭기즈 칸이 몽골 제국을 건립할 때 무칼리를 전군 조농으로 임명한 바 있다. 원나라 시대의 조농은 조정의 대신직을 겸임하는 직위였으며, 원나라 문헌에 등장하는 첫 조농은 쿠빌라이 카안의 아들 노무간이었다. 그 뒤를 이어 친킴의 아들이자 노무간의 조카인 카말라가 임명되었다. 카말라는 1292년 팔백궁의 능묘를 지키는 일을 겸임하였으며, 이후 진왕(晉王)에 봉해져 몽골리아와 칭기즈 칸오르도를 관장하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3. 1. 진왕(晉王)

제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여 제위에 오른 쿠빌라이는 광대한 영토를 세 명의 적자에게 분할하여 통치하게 했다. 구 금나라 영토(키타이)는 친킴이, 구 서하 영토(탕구트)는 망갈라가, 노무간은 몽골 제국의 본령(몽골리아)을 관리하는 '3대 왕국' 체제가 대원울루스의 기본 체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중 노무간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했기 때문에 북안왕가는 단절되었고, 대신 친킴의 장남 카말라가 '진왕(晉王)'에 봉해져 몽골리아를 통치했다.

'진왕'은 기본적으로 몽골리아를 통괄하는 존재로 여겨졌지만, 그 외에도 선제의 제사를 지내는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집사』에는 카말라가 '칭기스 칸의 대오르도'가 있는 부르칸 칼둔을 통괄하며, 그곳에서 선제의 초상화를 걸고 향을 피웠다는(선제의 영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 '칭기스 칸의 대 오르도'는 현재 몽골 헨티주에 위치한 아우라가 유적에 해당하며, 아우라가 유적에서는 발굴 조사 결과 제사가 행해졌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진왕'의 역할을, 후에 진왕에서 황제위에 오른 예순 테무르는 '我仁慈甘麻剌爺爺根底、封授晋王、統領成吉思皇帝四個大斡耳朶、及軍馬、達達国土都付來([쿠빌라이 카안은] 나의 자애로운 카말라 에치게를 봉하여 진왕을 수여하고, 칭기스 칸의 네 개의 대 오르도를 통괄하게 했으며, 군·말·몽골 국토를 모두 위임했다)'라고 표현했다.

진왕위는 카말라에서 그의 아들 예순 테무르에게, 예순 테무르에서 그의 아들 파드마갸르포에게 계승되었지만, 천력의 난으로 카말라의 적통은 끊어졌고, 파드마갸르포를 마지막으로 진왕으로 새롭게 봉해지는 자는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칭기스 칸의 4대 오르도를 통괄하는' 진왕이라는 칭호에 대한 외경심은 그 후에도 오래도록 남았다.

4. 북원 시대

북원 시대의 조농은 카간의 주요 관원이었다. 초기에는 칭기즈 칸의 황금 씨족 중 후손 중에서 임명되었으나, 점차 카간의 가까운 남자 친족이 맡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농의 권위는 카간 다음가는 수준으로 높아졌다. 오르도스 부족의 족장이 조농직을 맡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이는 이후 오르도스 부족과 지농에서 자세히 설명된다. 1433년 톡토아부카 타이순 칸이 자신의 동생 아그바르진 지농을 조농으로 임명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4. 1. 오르도스 부족과 지농

북원 시대의 조농은 카간의 관원이었다. 초기에는 칭기즈 칸의 후손 중에서 임명되었으나, 나중에는 카간의 가까운 남자 친족이 임명되었다. 점차 조농은 카간 다음가는 권위를 지니게 되었고, 오르도스 부족의 족장이 조농직에 임명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1433년 톡토아부카 타이순 칸은 자신의 동생 아그바르진 지농을 조농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오이라트의 에센에게 옹립되었던 타이순 칸의 동생 악바르지는 북원 시대에 처음으로 "지논" 칭호를 사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악바르지 지논과 그의 아들 하르구추크는 타이순 칸과 에센이 대립할 때 타이순 칸을 배신하고 에센 편에 섰으나, 결국 부자 모두 에센에게 살해당했다.

하르구추크의 아들 바얀 몽케는 에센의 위협을 피해 할하부의 보라이 등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성장한 바얀 몽케는 만두울 칸으로부터 '''보르후 지논'''이라는 칭호를 받고 오르도스 지방으로 들어가 유력한 제후가 되었으며, 이는 에도 알려졌다. 이 시기에 칭기즈 칸의 묘(廟)도 오르도스 지방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오르도스 시 에제 호로 기에 있는 칭기즈 칸 묘는 과거 아우라가 유적의 후신으로 여겨진다.

보르후 지논은 만두울 칸 사후 유력한 칸 후보였으나, 당시 실권자였던 태사(太師) 이스마일에게 살해당했다. 대신 그의 아들 바투 몽케가 다얀 칸으로 즉위했다. 다얀 칸은 자신의 아들 울루스 볼라트를 지논으로 삼아 오르도스부를 직접 통치하려 했지만, 당시 오르도스부를 다스리던 만드라이 아칼라크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다얀 칸은 군대를 모아 만드라이 등을 토벌하는 다란 테리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 후, 울루스 볼라트의 동생인 바르스 볼라트가 '사인 아라크 지논'이라는 칭호를 받고 오르도스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바르스 볼라트 이후 '지논'은 오르도스 부족장의 세습 칭호로 자리 잡았으며, 청나라 시대까지 오르도스부의 권위 있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청나라 때에는 오르도스 익자오맹(鄂爾多斯 伊克昭盟)의 맹장(盟長)이 조농직을 겸임하거나 임명되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지농을 직책이 아닌 사람의 이름으로 오해하기도 했다.[1] 명나라의 일부 사서에서도 오르도스의 콩타이지이자 우익 3만호의 지농이었던 군빌리크 메르겐을 길낭(吉囊)으로 표기하면서, 길낭이나 지농이 사람 이름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5. 청나라 시대

청나라 때에는 오르도스의 익자오맹의 맹장이 조농직을 겸직, 임명되었다.

6. 조선과의 관계

조선에서는 '지농'이라는 직책을 사람의 이름으로 오해하여 받아들였다.[1] 이는 명나라의 일부 사서에서 오르도스의 콩타이지이자 우익 3만호의 지농이었던 군빌리크 메르겐을 길낭(吉囊)으로 표기하면서, '길낭' 또는 '지농'이 사람 이름처럼 알려지게 된 영향도 있다.

7. 역대 지농

칭기즈 칸몽골 제국을 건립할 때 무칼리를 전군 조농으로 임명한 것이 기록상 나타나는 초기 사례이다.[1]

원나라 시대의 조농은 조정의 대신직을 겸임하는 직위였으며, 북원 시대에는 카간 다음가는 권위를 지닌 관직으로 오르도스의 족장이 주로 임명되었다. 청나라 때에는 오르도스의 익자오맹 맹장이 조농직을 겸직하였다.

한편, 조선이나 명나라에서는 조농(지농)을 직책명이 아닌 사람의 이름으로 오해하기도 했다.[1]

아래는 역대 주요 진왕(지논, 제농)의 목록이다.

이름재위 기간비고
카말라1292년 ~ 1302년쿠빌라이의 차남 친킴의 장남
예순 테무르1302년 ~ 1323년카말라의 차남, 이후 황제 즉위 (원 태정제)
파드마갈포1324년 ~ 1328년예순 테무르의 차남
아크바르지 진왕1439년 ~ 1452년아자이 태자의 차남, 타이순 칸의 동생
에센 타이시1453년오이라트의 지도자, 칸을 칭함
바얀 몽케 보르후 진왕1468년? ~ 1470년?아크바르지의 손자, 다얀 칸의 아버지
울루스 볼라트 진왕1508년다얀 칸의 차남
바르스 볼라트 사인 아라크 진왕1512년 ~ 1531년다얀 칸의 삼남
군빌리크 메르겐 진왕1532년 ~ 1542년바르스 볼라트의 아들
노얀다라 진왕1543년 ~ 1574년군빌리크 메르겐의 아들
보쇼크트 진왕 칸1576년 ~ 1624년노얀다라의 손자 (부얀 바토르 홍타이지의 아들)
세렌 에르데니 진왕 칸1626년보쇼크트의 장남
린첸 세첸 진왕1627년 ~ 1649년보쇼크트의 차남


7. 1. 원나라

원나라 시대의 조농은 조정의 대신직을 겸임하는 직위였다. 원나라 문헌에 등장하는 첫 조농은 쿠빌라이 카안의 아들 노무간이었으며, 그 뒤를 친킴의 아들이자 노무간의 조카인 카말라가 이었다. 카말라는 1292년 팔백궁의 능묘를 지키는 일을 겸임하기도 했다.

제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한 쿠빌라이 카안은 광대한 영토를 세 명의 적자에게 나누어 통치하게 하는 '3대 왕국' 체제를 구축했다. 이에 따라 옛 금나라 영토(키타이)는 친킴이, 옛 서하 영토(탕구트)는 망갈라가, 그리고 몽골 제국의 본령(몽골리아)은 노무간이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무간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친킴의 장남 카말라가 '진왕(晋王)'에 봉해져 몽골리아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진왕'은 기본적으로 몽골리아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동시에 선대 황제들의 제사를 지내는 중요한 임무도 수행했다. 『집사』에 따르면, 카말라는 칭기즈 칸의 '대 오르도'가 있는 부르칸 칼둔 지역을 통괄하며 선제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칭기스 칸의 대 오르도'는 현재 몽골 헨티주에 위치한 아우라가 유적으로 추정되며, 발굴 조사를 통해 제사 흔적이 확인되었다.

훗날 진왕에서 황제위에 오른 예순 테무르는 진왕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쿠빌라이 카안께서는 나의 자애로운 할아버지 카말라를 진왕으로 봉하시고, 칭기즈 칸의 네 개의 대 오르도를 통괄하게 하셨으며, 군대, 말, 몽골 국토를 모두 위임하셨다."

진왕의 지위는 카말라에서 아들 예순 테무르에게, 다시 그의 아들 파드마갸르포에게 계승되었다. 하지만 천력의 난 이후 카말라의 직계 후손이 끊어지면서 파드마갸르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새로운 진왕은 봉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칭기스 칸의 4대 오르도를 통괄하는' 진왕이라는 칭호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지농'이라는 직책명이 사람의 이름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1] 명나라의 일부 사서에서는 오르도스의 콩타이지이자 우익 3만호의 지농이었던 군빌리크 메르겐을 '길낭(吉囊)'으로 표기하면서, 길낭 또는 지농이 사람 이름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7. 2. 북원

북원 시대의 조농(지논)은 카간의 관직이었다. 주로 황금 가족, 즉 칭기즈 칸의 후손 중에서 임명되었으며, 나중에는 카안의 가까운 남자 친족이 이 직위를 맡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농은 카안 다음가는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오르도스의 족장이 조농직에 임명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1433년에는 톡토아부카 타이순 칸이 자신의 동생 아그바르진 지농을 조농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오이라트의 에센에게 옹립되었던 타이순 칸의 동생 악바르지는 북원 시대에 처음으로 "지논" 칭호를 사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악바르지 지논과 그의 아들 하르구추크는 타이순 칸과 에센이 대립할 때 타이순 칸을 배신하고 에센 편에 섰으나, 결국 부자 모두 에센에게 살해당했다.

하르구추크의 아들 바얀 몽케는 에센의 위협 속에서 할하부의 보라이 등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살아남았다. 성장한 바얀 몽케는 만두울 칸으로부터 '''보르후 지논'''이라는 칭호를 받고 오르도스 지방으로 들어가 유력한 제후로 성장했으며, 그의 이름은 에도 알려졌다. 이 시기에 칭기즈 칸의 묘(廟)도 오르도스 지방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오르도스 시 에제 호로 기에 있는 칭기즈 칸 묘는 이 시기 유적의 후신으로 여겨진다.

보르후 지논은 만두울 칸 사후 유력한 칸 후보였으나, 당시 태사(太師)로서 권력을 쥐고 있던 이스마일에게 살해당했다. 대신 그의 아들 바투 몽케가 칸위에 올랐는데, 이가 바로 다얀 칸이다. 다얀 칸은 자신의 아들 울루스 볼라트를 지논으로 삼아 오르도스부를 통치하게 하려 했으나, 당시 오르도스부를 다스리던 만드라이 아칼라크가 울루스 볼라트를 살해했다. 이에 다얀 칸은 군대를 모아 만드라이 등을 토벌하는 다란 테리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 이후 울루스 볼라트의 동생 바르스 볼라트가 사인 아라크 지논이라 칭하며 오르도스부를 다스리게 되었다. 바르스 볼라트 이후 "지논"은 오르도스 부족장의 칭호로서 세습되었으며, 청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르도스부의 권위 있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청나라 때에는 오르도스의 익자오맹 맹장이 조농직을 겸임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지농을 관직명이 아닌 사람의 이름으로 오해하기도 했다.[1] 명나라의 일부 사서에서도 오르도스의 콩타이지이자 우익 3만호의 지농이었던 군빌리크 메르겐을 길낭(吉囊)으로 기록하면서, 길낭 또는 지농이 사람 이름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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