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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페를라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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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르조 페를라스카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헝가리에서 유대인들을 구출한 인물이다. 그는 파시즘 지지자였으나, 나치즘과의 동맹에 환멸을 느껴 스페인 외교관으로 위장하여 헝가리에서 유대인 구출 활동을 펼쳤다. 1944년 12월부터 1945년 1월까지 약 5,000명 이상의 유대인을 구출했으며, 부다페스트 게토 파괴 시도를 막는 데 기여했다. 전쟁 후 그의 업적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나, 1987년 발견되어 훈장과 명예 시민 자격을 얻었으며, 그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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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페를라스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르조 페를라스카
직업사업가, 외교관
알려진 업적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5,218명의 유대인을 강제 수용소에서 구출
개인 정보
출생일1910년 1월 31일
출생지코모, 이탈리아
사망일1992년 8월 15일
사망지파도바, 이탈리아
수상

2. 제2차 세계 대전 전의 삶

조르조 페를라스카는 코모에서 태어나 파도바현의 마세라에서 자랐다. 1920년대에 파시즘 편에 서서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 스페인 내전 참전 공적으로 프란시스코 프랑코로부터 스페인 외교 공관의 도움과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나치즘과 동맹을 맺고 1938년 이탈리아 인종 법을 시행하면서 파시즘에 환멸을 느꼈다.

2. 1. 초기 생애

조르조 페를라스카는 코모에서 태어나 파도바현의 마세라에서 자랐다. 1920년대에 그는 파시즘을 지지하여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세운 공으로 프란시스코 프랑코로부터 스페인 외교 공관의 도움과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그 후 나치즘과의 연합, 그리고 1938년부터 효력을 발휘한 반유대주의 법으로 인해 파시즘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되었다.

2. 2. 파시즘 지지와 참전

페를라스카는 코모에서 태어나 파도바현의 마세라에서 자랐다. 1920년대에 파시즘을 지지하여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 스페인 내전 참전 공적으로 프란시스코 프랑코로부터 스페인 외교 공관의 도움과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나치즘과 동맹을 맺고 1938년 이탈리아 인종 법을 채택하면서 파시즘에 환멸을 느꼈다.

2. 3. 파시즘에 대한 환멸

페를라스카는 코모에서 태어났으며 파도바현의 마세라에서 자랐다. 1920년대 페를라스카는 파시즘을 지지하여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1] 스페인 내전에서 공을 세운 페를라스카는 프란시스코 프랑코로부터 스페인 외교 공관의 도움과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1] 그 후 베니토 무솔리니나치즘과 동맹을 맺고 1938년부터 이탈리아 인종 법을 시행하면서, 페를라스카는 파시즘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1]

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페를라스카는 발칸반도에서 이탈리아군의 군수품 조달을 담당했다. 1943년 가을, 이탈리아연합국에 항복하자 나치는 헝가리 정부에 압력을 가해 페를라스카를 성에 구금했다. 몇 달 후, 페를라스카는 요양을 이유로 불가리아로 떠나는 척하다 도망쳐, 이전에 받은 허가증을 이용해 스페인 외무 공관에 망명했다. 이후 '호르헤 페를라스카'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국민과 동등한 권리를 얻었다.[23]

페를라스카는 스페인 대리대사 앙헬 산스 브리스와 여러 중립국 대사들과 함께 유대인 구출에 나섰다. 보호문서를 받은 유대인을 중립국으로 보내거나,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위한 보호 가옥을 마련하는 일을 했다.[23]

1944년 11월, 산스 브리스가 스위스로 떠나자 페를라스카는 그가 곧 돌아올 것이며 자신을 대리인으로 지명했다는 거짓 발표를 했다.[2] 그해 겨울, 페를라스카는 수천 명의 유대인을 보호하고 먹여 살렸다. 그는 자신이 보호하는 유대인들이 스파라딤이며, 1924년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준 스페인 법령에 따라 보호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1944년 12월, 페를라스카는 수용소행 열차에서 두 유대인 소년을 구출하며 아돌프 아이히만과 다투기도 했다. 라울 발렌베리는 후에 그 무장친위대 소령이 아이히만이었다고 알려주었다. 1944년 12월 1일부터 1945년 1월 16일까지 45일 동안 페를라스카는 5,000명 이상의 유대인을 구출했다.[20][4]


3. 1. 이탈리아군 물자 조달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페를라스카는 발칸반도에서 이탈리아군의 물자 조달을 담당했다. 이후 그는 외교적 지위를 가진 이탈리아 정부의 공식 대표로 임명되어, 러시아 전선에서 싸우는 이탈리아군을 위해 고기를 구매하는 임무를 맡고 동유럽으로 파견되었다.[1] 1943년 9월 8일, 바돌리오 선언으로 이탈리아연합국에 항복했다. 이때 이탈리아인들은 파시스트인 무솔리니가 새로 결성한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에 합류할지, 아니면 국왕에게 충성을 다하며 연합국 편에 설지 선택해야 했는데, 페를라스카는 후자를 선택했다.[1]

3. 2. 이탈리아 항복과 선택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는 바돌리오 선언을 통해 연합국에 항복했다. 이탈리아인들은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세력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에 합류하거나, 국왕에게 충성하며 연합국 편에 서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페를라스카는 국왕에게 충성하는 쪽을 선택했다.[1]

이후 부다페스트에서 체포되어 외교관 전용 성에 구금되었으나, 몇 달 후 헝가리 내에서 여행이 가능한 의료 통행증을 얻게 되었다. 페를라스카는 이를 이용하여 스페인 대사관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스페인 내전 참전 용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호르헤"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스페인이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1]

3. 3. 체포와 망명

1943년 가을,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하자 페를라스카는 나치의 압력으로 헝가리 정부에 의해 성에 구금되었다.[23] 몇 달 후, 요양을 이유로 불가리아로 떠날 수 있게 되었고, 여행 중 도망쳐 이전에 받은 허가증을 이용하여 스페인 외무 공관에 망명했다.[23] 그는 '호르헤'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국민과 동일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23]

페를라스카는 스페인 임시 대리 대사 앙헬 산스 브리스와 중립국의 다른 외교관들과 함께 헝가리에서 유대인을 밀반출하는 데 협력했다.[1] 그는 유대인들이 다양한 대사관의 통제를 받는 보호된 집에서 피난처를 찾도록 도왔는데, 이 대사관들은 주권과 동등한 치외법권 협약을 가지고 있었고, 유대인에게 망명을 제공할 수 있었다.[2][7]

1944년 11월, 산스 브리스가 헝가리를 떠나면서 페를라스카에게 함께 떠날 것을 권유했으나, 페를라스카는 헝가리에 남기로 결정했다.[3] 헝가리 정부는 스페인 대사관 건물과 유대인들이 피난처로 삼았던 치외법권 주택들을 비우도록 명령했다. 페를라스카는 산스 브리스가 곧 돌아올 예정이며, 그동안 자신이 임시 대리 대사로 임명되었다는 거짓 발표를 했다.[2]

그해 겨울, 페를라스카는 부다페스트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을 숨기고 보호하며 먹이는 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1924년 스페인 법령에 근거하여 세파르딤 출신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던 것을 이용하여 안전 통행증을 계속 발급했다.[7]

1944년 12월, 페를라스카는 라울 발렌베리아돌프 아이히만이라고 알려준 독일 중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물 열차에 실리려는 두 소년을 구출했다.[20][4] 1944년 12월 1일부터 1945년 1월 16일까지 45일 동안, 페를라스카는 5,000명 이상의 유대인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20][4]

페를라스카는 스페인 영사로 위장하여 SS와 극우 헝가리 화살십자당이 부다페스트 게토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막기도 했다. 그는 헝가리 내무부 장관 가보르 바이나에게 직접 면담을 요청하여, 페를라스카가 스페인 거주자로 선언한 "3,000명의 헝가리 시민"에 대한 법적 및 경제적 조치를 위협하며 바이나가 계획을 철회하도록 요구했다.[3]

3. 4. 유대인 구출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페를라스카는 발칸반도에서 이탈리아 군의 군수품 조달을 담당했다. 1943년 가을,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하자 헝가리 정부는 페를라스카를 구금했다. 몇 달 후, 페를라스카는 불가리아로 떠나는 척하다 도망쳐 스페인 외무 공관에 망명, '호르헤 페를라스카'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국민과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되었다.[23]

페를라스카는 스페인 대리대사 앙헬 산스 브리스 등 중립국 대사들과 함께 유대인 구출에 나섰다. 그는 보호문서를 받은 유대인을 중립국으로 보내거나,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위한 보호 가옥을 마련하는 일을 했다.[23]

1944년 11월, 산스 브리스가 스위스로 떠나자 페를라스카는 그가 곧 돌아올 것이며 자신을 대리인으로 지명했다는 거짓 발표를 했다. 그해 겨울, 페를라스카는 수천 명의 유대인을 보호하고 먹여 살렸다. 그는 자신이 보호하는 유대인들이 스파라딤이며, 1924년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준 스페인 법령에 따라 보호받고 있다고 주장했다.[23]

1944년 12월, 페를라스카는 수용소행 열차에서 두 유대인 소년을 구출하며 아돌프 아이히만과 다투기도 했다. 라울 발렌베리는 후에 그 무장친위대 소령이 아이히만이었다고 알려주었다. 1944년 12월 1일부터 1945년 1월 16일까지 45일 동안 페를라스카는 5,000명 이상의 유대인을 구출했다.[20][4]

페를라스카는 스페인 영사로 위장, SS와 헝가리 화살십자당이 부다페스트 게토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막기도 했다. 그는 헝가리 내무장관 가보르 바이나에게 면담을 요청, 자신이 스페인 거주자로 선언한 "3,000명의 헝가리 시민"에 대한 법적, 경제적 조치를 위협하며 계획 철회를 요구했다.[3]

3. 5. 스페인 대리 대사 행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발칸반도에서 이탈리아군의 군수품 조달을 담당했던 페를라스카는 1943년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하자 파시즘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나치의 압력으로 헝가리 정부에 의해 성에 구금되었다.[23] 몇 달 후, 요양을 이유로 불가리아로 떠나게 된 페를라스카는 도중에 도망쳐 스페인 외무 공관으로 망명, '호르헤 페를라스카'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국민과 동일한 권리를 얻게 되었다.[23]

이후 페를라스카는 스페인 대리대사였던 앙헬 산스 브리스와 함께 유대인 구출에 힘썼다. 그는 보호문서를 받은 유대인을 중립국으로 보내거나,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위한 보호 가옥을 만드는 일을 했다.[23]

1944년 11월, 산스 브리스가 스위스로 떠나면서 페를라스카에게 함께 갈 것을 권했지만, 페를라스카는 헝가리에 남았다. 헝가리 정부가 스페인 대사관과 보호 가옥에 있는 유대인들을 내보내라고 명령하자, 페를라스카는 산스 브리스가 곧 돌아오며 자신을 대리인으로 지명했다는 거짓 발표를 했다.[2]

그해 겨울, 페를라스카는 수천 명의 유대인을 보호하고 먹여 살렸다. 그는 자신이 보호하는 유대인들이 스파라딤이며, 1924년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준 스페인 법령에 따라 보호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1944년 12월, 페를라스카는 수용소로 가는 죽음의 열차에서 두 명의 유대인 소년을 구하면서 무장친위대 소령과 다툼을 벌였는데, 라울 발렌베리는 그 소령이 아돌프 아이히만이라고 알려주었다. 1944년 12월 1일부터 1945년 1월 16일까지 45일 동안 페를라스카는 수천 명의 유대인을 구출했다.[20][4]

페를라스카는 부다페스트 게토를 파괴하려는 나치와 극우 헝가리 화살십자당의 계획을 막는데 기여했다고 한다.[5][6][7][3] 그는 스페인 영사로 위장, 헝가리 내무부 장관 가보르 바이나에게 면담을 요청하여 자신이 스페인 거주자로 선언한 "3,000명의 헝가리 시민"(실제로는 훨씬 적은 수)에 대한 법적 및 경제적 조치를 위협하며 바이나가 계획을 철회하도록 요구했다. 이후 부다페스트 게토를 파괴하려는 계획은 취소되었다.[3]

3. 6. 아돌프 아이히만과의 대면

1944년 12월, 페를라스카는 화물 열차에 실리려던 두 소년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현장에 있던 독일군 중령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스웨덴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는 페를라스카에게 자신을 막아섰던 장교가 아돌프 아이히만이라고 알려주었다.[20][4]

3. 7. 부다페스트 게토 파괴 저지

페를라스카는 스페인 영사로 위장하여 SS와 극우 헝가리 화살십자당이 부다페스트 게토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막았다.[5][6][7][3] 그는 헝가리 내무부 장관 가보르 바이나와 면담을 요청했고, 자신이 스페인 거주자로 선언한 "3,000명의 헝가리 시민"(실제로는 훨씬 적은 수)에 대한 법적 및 경제적 조치를 위협하며 바이나가 계획을 철회하도록 요구했다. 그 결과, 부다페스트 게토를 파괴하려는 계획은 취소되었다.[3]

4. 전쟁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조르조 페를라스카는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전쟁 중 헝가리에서 유대인들을 구출한 자신의 영웅적인 행동을 오랫동안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1987년 그가 구한 헝가리계 유대인들이 그를 찾아내면서 그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23]

페를라스카는 이탈리아, 헝가리, 스페인에서 훈장을 받았고, 이스라엘로부터 세계의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페를라스카 - 이탈리아의 영웅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92년 심근 경색으로 사망하였다.

4. 1. 귀국과 침묵

전쟁이 끝나고 페를라스카는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1987년 헝가리계 유대인이 그를 찾기 전까지 가족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23] 귀국한 페를라스카는 1945년 10월 13일자로 사건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마드리드 주재 스페인 외무 장관과 이탈리아 정부에 보냈고, 자신을 위해 사본을 보관했다.[8][10] 그는 또한 부다페스트에서 자신이 대신했던 대사인 산스 브리스에게 편지를 썼는데, 산스 브리스는 페를라스카에게 그의 노력에 대한 인정을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간결한 답장을 보냈다.[9]

페를라스카는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나 가족에게조차 하지 않고,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가 편지를 보낸 몇몇 기관들은 외교적, 정치적 이유 또는 단순한 무관심으로 인해 그를 무시했다.[8][7] 1946년에 페를라스카의 보고서 사본을 요청하고 그의 이름을 알리는 데 기여한 유대인 역사학자 제뇌 레바이조차도 정치적 이유로 추정되는 그의 저서인 ''검은 책''에서 페를라스카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다.[11]

1961년, 아이히만 재판을 둘러싼 언론의 소동이 일어났을 때, 레스토 델 카를리노 신문은 주세페 체라토가 페를라스카의 이야기를 보도한 첫 기사를 게재했지만 반향을 얻지 못했고, 1960년대 말 라 스탐파에 푸리오 콜롬보가 기사를 게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12][13][9]

페를라스카는 명성을 갈망하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명시적으로 숨기지 않았다. 그는 단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을 뿐, 그 후 자신의 삶을 살았다.[8] 1980년에 페를라스카가 뇌졸중을 겪은 후, 그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척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 비로소 그의 가족은 그가 작성한 보고서를 알게 되었지만, 회복 후에도 계속해서 비공개로 유지했다. 그의 가족은 결국 1987년에 이 이야기가 공개되었을 때 보고서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10]

1987년, 페를라스카가 구한 헝가리 유대인 그룹이 42년 동안 스페인에서 그를 찾은 끝에 마침내 그를 찾아냈다. 당시 이 사건에 대한 광범위한 홍보가 있었고, 페를라스카는 그의 영웅적인 행위로 주목받게 되었다. 엔리코 데아글리오는 그의 놀라운 영웅담을 담은 "선의의 평범함"(2002)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4] 이 책은 RAI 국영 텔레비전에서 제작된 텔레비전 영화 ''페를라스카 - 이탈리아의 영웅''(2005)으로 각색되었다. 1989년, 페를라스카는 헝가리 의회 본회의에서 최고 국가 훈장을 받았다.[7] 이듬해 페를라스카는 미국에서 찬사를 받았고,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그를 "열방의 의인"으로 선정했을 때 워싱턴에서 수십 명의 기자들과 일부 생존자(에바 랑, 아브람 로나이)의 환영을 받았다.[15][16]

1991년 10월, 페를라스카는 이탈리아 공화국의 그랜드 오피치알레 칭호를 받았고, 상원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저명한 이탈리아 고령 시민에게 종신 연금을 지급하는 것을 승인했지만, 페를라스카는 이 보조금을 거절했다.[12]

페를라스카는 1992년 8월 15일 파도바에서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4. 2. 발견과 인정

전쟁이 끝나고 페를라스카는 이탈리아로 돌아왔지만, 1987년 헝가리계 유대인들이 그를 찾기 전까지는 가족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자신이 한 일을 밝히지 않았다.[23] 그 후 페를라스카는 이탈리아, 헝가리, 스페인으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이스라엘로부터 세계의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페를라스카 - 이탈리아의 영웅'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페를라스카는 1945년 8월에야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1945년 10월 13일자로 사건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마드리드 주재 스페인 외무 장관과 이탈리아 정부에 보냈고, 자신을 위해 사본을 보관했다.[8][10] 또한 부다페스트에서 자신이 대신했던 대사인 산스 브리스에게 편지를 썼는데, 산스 브리스는 페를라스카에게 그의 노력에 대한 인정을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간결한 답장을 보냈다.[9]

페를라스카는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나 가족에게조차 하지 않고,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가 편지를 보낸 몇몇 기관들은 외교적, 정치적 이유 또는 단순한 무관심으로 인해 그를 무시했다.[8][7] 1946년에 페를라스카의 보고서 사본을 요청하고 그의 이름을 알리는 데 기여한 유대인 역사학자 제뇌 레바이조차도 정치적 이유로 추정되는 그의 저서인 ''검은 책''에서 페를라스카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다.[11]

1961년, 아이히만 재판을 둘러싼 언론의 소동이 일어났을 때, 레스토 델 카를리노 신문은 주세페 체라토가 페를라스카의 이야기를 보도한 첫 기사를 게재했지만 반향을 얻지 못했고, 1960년대 말 라 스탐파에 푸리오 콜롬보가 기사를 게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12][13][9]

1987년, 페를라스카가 구한 헝가리 유대인 그룹이 42년 동안 스페인에서 그를 찾은 끝에 마침내 그를 찾아냈다. 당시 이 사건에 대한 광범위한 홍보가 있었고, 페를라스카는 그의 영웅적인 행위로 주목받게 되었다. 엔리코 데아글리오는 그의 놀라운 영웅담을 담은 "선의의 평범함"(2002)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4] 1989년, 페를라스카는 헝가리 의회 본회의에서 최고 국가 훈장을 받았다.[7] 이듬해 페를라스카는 미국에서 찬사를 받았고,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그를 "세계의 의인"으로 선정했을 때 워싱턴에서 수십 명의 기자들과 일부 생존자(에바 랑, 아브람 로나이)의 환영을 받았다.[15][16]

1991년 10월, 페를라스카는 이탈리아 공화국의 그랜드 오피치알레 칭호를 받았다.

4. 3. 죽음과 유산

전쟁이 끝나고 페를라스카는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1987년 헝가리계 유대인이 그를 찾기 전까지 가족을 포함한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 후 페를라스카는 이탈리아, 헝가리, 스페인으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이스라엘로부터 세계의 의인이란 칭호를 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Perlasca, un Eroe Italiano"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92년 심장 질환으로 사망하였다.[23]

페를라스카는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나 가족에게조차 하지 않고,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가 편지를 보낸 몇몇 기관들은 외교적, 정치적 이유 또는 단순한 무관심으로 인해 그를 무시했다.[8][7] 1946년에 페를라스카의 보고서 사본을 요청하고 그의 이름을 알리는 데 기여한 유대인 역사학자 제뇌 레바이조차도 정치적 이유로 추정되는 그의 저서인 ''검은 책''에서 페를라스카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다.[11]

1987년, 페를라스카가 구한 헝가리 유대인 그룹이 42년 동안 스페인에서 그를 찾은 끝에 마침내 그를 찾아냈다. 당시 이 사건에 대한 광범위한 홍보가 있었고, 페를라스카는 그의 영웅적인 행위로 주목받게 되었다. 엔리코 데아글리오는 그의 놀라운 영웅담을 담은 "선의의 평범함"(2002)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4] 이 책은 RAI 국영 텔레비전에서 제작된 텔레비전 영화 ''페를라스카 - 이탈리아의 영웅''(2005)으로 각색되었다. 1989년, 페를라스카는 헝가리 의회 본회의에서 최고 국가 훈장을 받았다.[7]

1991년 10월, 페를라스카는 이탈리아 공화국의 그랜드 오피치알레 칭호를 받았다.

페를라스카는 1992년 8월 15일 파도바에서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5. 훈장 및 영예

연도국가훈장 및 영예
1987년이스라엘명예 시민,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 기념비 및 10,000그루의 숲[17][18]
1989년이스라엘야드 바셈 열방의 의인 지정
1989년헝가리헝가리 공로 훈장
1989년이스라엘크네세트 훈장
1989년이탈리아파도바 시 훈장
1990년미국발렌베리 메달
1990년미국미국 홀로코스트 기념 위원회 추모 훈장
1990년미국워싱턴 홀로코스트 박물관 첫 번째 돌 기증
1991년스페인이사벨라 가톨릭 기사단 대십자 훈장
1991년이탈리아이탈리아 공로 훈장 기사단 대십자 훈장 1등급
1992년이탈리아시민 용감성 금메달
해당사항 없음헝가리, 부다페스트페를라스카 흉상 설치[19]
2014년이스라엘, 라아나나라아나나 심포니 오케스트라, 모셰 조르만 작곡 "그의 가장 훌륭한 시간" 초연 (페를라스카의 아들 프랑코와 며느리 루치아나 아마디아 참석)[20]



조르조 페를라스카를 기리는 야드 바셈 박물관의 예루살렘 기념비.

6. 기념



페를라스카는 다양한 기관 및 국가로부터 다음과 같은 상과 훈장을 받았다.

연도수여 기관/국가내용
1987년이스라엘명예 시민 선정,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 기념비 및 10,000그루의 숲 헌정[17][18]
1989년야드 바셈열방의 의인 지정
1989년헝가리공로 훈장
1989년이스라엘크네세트 훈장
1989년이탈리아 파도바 시훈장
1990년미국발렌베리 메달
1990년미국홀로코스트 기념 위원회 추모 훈장
1990년미국워싱턴 홀로코스트 박물관의 첫 번째 돌 기증
1991년스페인이사벨라 가톨릭 기사단 대십자 훈장
1991년이탈리아이탈리아 공로 훈장 기사단 대십자 훈장 1등급
1992년이탈리아시민 용감성 금메달
해당사항 없음헝가리 부다페스트페를라스카 흉상 건립[19]
2014년라아나나 심포니 오케스트라작곡가 모셰 조르만에게 페를라스카 기념 오케스트라 곡 "그의 가장 훌륭한 시간" 의뢰 (2014년 12월 10일 초연, 페를라스카 아들/며느리 참석)[20]
해당사항 없음헝가리 부다페스트라울 발렌베리 추모 정원 (도하니 거리 2) 내부에 기념
해당사항 없음해당사항 없음조르조 페를라스카 상업 및 환대 전문 고등학교 설립


7. 미디어


  • 페를라스카 - 이탈리아 영웅(2005)
  • 부다페스트의 천사
  • 샌디 캐시: ''조르조 페를라스카''[21]
  • 데이비드 벤 레우벤: ''구조자들''[22]
  • 실비아 델 프란치아 & 루카 코그놀라토, ''보이지 않는 영웅''
  • 조르조 페를라스카, ''사기꾼'', 2007, 일 물리노. (페를라스카의 사후 출판된 회고록)
  • 엔리코 데아글리오, ''선의 평범함. 조르조 페를라스카의 이야기'', 1991, 펠트리넬리.

참조

[1] 웹사이트 Perlasca, the great pretender http://www.raoulwall[...] The International Raoul Wallenberg Foundation 2014-08-25
[2] 웹사이트 Giorgio Perlasca http://db.yadvashem.[...]
[3] 웹사이트 Oral history interview with Giorgio Perlasca https://collections.[...] 1990-09-05
[4] 뉴스 This Day in Jewish History {{!}} 1992: A Fake Diplomat Who Saved 5,200 Jews Dies https://www.haaretz.[...] 2024-02-16
[5] 뉴스 Gli uomini giusti muoiono di sabato http://www.varesenew[...] VareseNews 2010-05-22
[6] 인터뷰 Giorgio Perlasca - il mixer israeliano in ebraico 1990
[7] 인터뷰 Giorgio Perlasca 1990
[8] 간행물 La documentazione spagnola su Giorgio Perlasca e la sua opera umanitaria in favore degli ebrei 2006-12-21
[9] 문서 l'impossibile si poteva fare. Ad esempio, Perlasca, Il Riformista 1944
[10] 웹사이트 Il liceo 'Carducci' ricorda Giorgio Perlasca http://www.estense.c[...]
[11] 뉴스 Gli uomini giusti muoiono di sabato VareseNews
[12] 문서 Giorgio Perlasca Istituto dell'Enciclopedia Italiana 2015
[13] 뉴스 "L'ideologia non conta nulla di fronte alla sofferenza umana" VareseNews 2010-01-31
[14] 서적 La banalità del bene Feltrinelli
[15] Youtube 1990, Giorgio Perlasca negli Stati Uniti https://www.youtube.[...] Fondazione Giorgio Perlasca
[16] 뉴스 Hero Refused to Turn Away From Persecuted : Holocaust: After more than four decades of obscurity, Giorgio Perlasca has been honored for protecting thousands of Jews in Budapest https://www.latimes.[...] Los Angeles Times 1990
[17] 뉴스 Giorgio Perlasca, 82; Helped Jews Flee Nazis https://www.nytimes.[...] 1992-08-22
[18] 뉴스 Perlasca Forest: Remembering the Righteous of the Nations http://www.jpost.com[...]
[19] 웹사이트 Giorgio Perlasca (1910–1992) http://jhungary.com/[...] 2011-02-25
[20] 뉴스 Israeli orchestra honors Italian who saved 5,000 Jews from Nazis http://www.timesofis[...]
[21] Youtube Sandy Cash: Giorgio ("Jorje") Perlasca https://www.youtube.[...]
[22] Youtube David Ben Reuven: The Rescuer https://www.youtube.[...]
[23] 웹사이트 http://www.raoul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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