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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왕국 (1920년~19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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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 (1920년~1946년)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로 부활한 입헌군주국이다. 1920년 호르티 미클로시가 섭정으로 선출되어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으며, 트리아농 조약으로 인한 영토 상실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930년대 대공황과 독일과의 관계 강화 속에서 파시즘의 영향을 받아 반유대주의 정책을 펼쳤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추축국에 가담하여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전쟁 말기 소련의 점령으로 헝가리 왕국은 해체되고 헝가리 제2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1949년 헝가리 인민 공화국으로 전환되며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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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왕국 (1920년~1946년)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1942년의 헝가리 왕국
1942년의 헝가리 왕국
기본 정보
공식 명칭헝가리 왕국
국호헝가리
표어Regnum Mariae Patrona Hungariae
표어 (번역)마리아의 왕국, 헝가리의 보호자
국가찬칭
수도부다페스트
가장 큰 도시부다페스트
공용어헝가리어
인정된 지역 언어루신어 (카르파티아 루테니아에서)
사용 언어루마니아어
독일어
슬로바키아어
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
이디시어
슬로베니아어
롬어
민족 구성 (1941년)헝가리인: 80.9%
헝가리의 루마니아인: 7.2%
루신인: 3.7%
헝가리의 독일인: 3.6%
헝가리의 슬로바키아인: 1.2%
헝가리의 세르비아인: 1.1%
헝가리의 유대인: 1%
헝가리의 크로아티아인: 0.5%
헝가리의 로마인: 0.5%
헝가리의 슬로베니아인: 0.1%
기타: 0.2%
종교 (1941년)로마 가톨릭: 55%
칼뱅주의: 19%
동방 정교회: 11.6%
루터교: 5%
유대교: 4.9%
동방 가톨릭: 3.8%
기타: 0.7%
통화헝가리 코로나 (1920년~1927년)
헝가리 펭괴 (1927년~1946년)
시간대CET (+1)
서머 타임CEST (+2)
정치
정치 체제 (1920년~1944년)단일제 의회 입헌군주국, 권위주의 섭정 통치
정치 체제 (1944년~1945년)단일제 헝가리스트 전체주의 국가
정치 체제 (1944년~1946년)단일제 과도 정부, 연립 정부
국왕공석
국가 원수 (1920년–1944년)호르티 미클로시 (섭정)
국가 원수 (1944년–1945년)살러시 페렌츠 (국민 지도자)
국가 원수 (1944년–1946년)고등 국민 평의회 (집단 통치)
총리 (1920년)후사르 카로이
총리 (1945년–1946년)틸디 졸탄
의회의회
상원페뢰하즈
하원케피셀뢰하즈
역사
성립왕정 복고 (1920년 2월 29일)
주요 사건트리아농 조약 (1920년 6월 4일)
부활절 위기 (1921년 3월 26일)
부다페스트 행진 (1921년 10월 21일)
제1차 빈 중재 (1938년 11월 2일)
카르파티아 침공 (1939년 3월 14일)
제2차 빈 중재 (1940년 8월 30일)
유고슬라비아 침공 (1941년 4월 11일)
소련 침공 (1941년 6월 27일)
독일 점령 (1944년 3월 19일)
헝가리스트 정권 장악 (1944년 10월 16일)
해체왕정 폐지 (1946년 2월 1일)
통계
면적 (1920년)92,833 km²
인구 (1920년)7,980,143명
면적 (1930년)93,073 km²
인구 (1930년)8,688,319명
면적 (1941년)172,149 km²
인구 (1941년)14,669,100명

2. 역사적 배경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구성국이었던 헝가리 왕국합스부르크가(합스부르크-로렌 가문) 군주가 오스트리아 황제와 헝가리 국왕을 겸임하며 통치하는 형태였다.

헝가리 왕국은 성 이슈트반의 왕관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명분상 가지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슬로바키아, 트란실바니아 등을 빼앗긴 헝가리는 잃어버린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헝가리 왕국'''"이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을 국왕으로 추대하는 것은 연합국과 주변 국가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헝가리는 국왕 없이 의회가 지명한 섭정이 통치하는 "왕국" 형태를 유지했다.

2. 1.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해체되면서, 1918년 헝가리 민주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19년에는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잠시 선포되었다. 벨러 쿤이 이끈 공산주의 정부는 이른바 "적색 공포"를 일으켜 헝가리를 루마니아와의 전쟁으로 이끌었다. 1920년, 헝가리는 내전 상태에 빠졌고, 헝가리 반공주의자들과 군주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 좌익 지식인, 그리고 특히 유대인을 포함하여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폭력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이 시기는 "백색 공포"로 알려져 있다. 1920년 마지막 루마니아 점령군이 철수하면서 헝가리 왕국이 다시 세워졌다.[17]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후, 1918년 11월 16일 헝가리 최초의 공화국인 헝가리 민주 공화국이 이중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곧바로 북부 헝가리(슬로바키아, 카르파토-루테니아)는 체코슬로바키아 군에게, 트란실바니아루마니아 왕국에게 점령당했다. 사회 민주당 계열의 대통령 카로이 미하이(Károly Mihály)는 불안정한 국내에서 헝가리 공산당의 성장을 막지 못했고, 한때 연립을 구성했지만, 1919년 3월에는 쿤 벨러 등이 헝가리 혁명을 일으켜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다.

쿤의 소비에트 정부는 국내에서 적색 테러를 일으켰고, 더 나아가 슬로바키아 회복을 목표로 체코슬로바키아를 공격했다(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 전쟁). 이 때문에 보수적인 헝가리인, 프랑스나 루마니아와 같은 주변국의 지지도 잃었다. 4월에는 루마니아가 헝가리를 침공하여 헝가리-루마니아 전쟁이 발발했다.

6월, 이중 제국 해군 총사령관이었던 호르티 미클로시가 헝가리 국민군을 이끌고 전국에서 봉기했다. 8월에는 루마니아군이 부다페스트를 점령하고 헝가리 소비에트 정부가 무너지면서 헝가리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3. 헝가리 왕국의 성립과 정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헝가리는 혼란에 빠졌다. 1918년 이전의 헝가리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구성국 중 하나였으며, 합스부르크가(합스부르크-로렌 가문) 군주가 오스트리아 황제와 헝가리 국왕을 겸하며 헝가리 정부를 통치했다. 헝가리는 잃어버린 영토의 통치권을 주장하기 위해 "'''헝가리 왕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했다.

1920년 2월 29일, 우익 정치 세력 연합은 헝가리를 입헌 군주국으로 되돌렸다. 그러나 연합국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복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스스로 섭정으로 선언했지만, 연합국이 그를 인정하지 않자 2주 만에 물러났다.

기마하는 호르티 미클로시(1919년 10월 16일)


부다페스트에 입성한 국민군은 임시 정부를 대신할 정식 정부를 준비했다. 그러나 국민군이 옹립한 요제프 아우구스트는 합스부르크가 일원이었기 때문에[50], 연합국과 루마니아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1920년 1월 의회 선거와 2월 국민 투표를 거쳐 공화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이행이 결정되었다. 1920년 3월 1일, "공화국 의회"에서 개칭된 "헝가리 국민 의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재건의 첫걸음으로 "'''헝가리 왕국'''" 성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국왕 추대는 연합국에 의해 부정되었고, 헝가리는 국왕 부재 상황에 놓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국민 의회는 호르티 미클로시를 "헝가리 왕국 섭정"으로 선출했다.

호르티는 처음에는 섭정직을 사양했지만, 요제프 아우구스트의 요청으로 섭정 취임을 수락했다.

3. 1. 섭정 체제

호르티 미클로시는 1920년 3월 1일 헝가리의 섭정으로 선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복귀가 연합국에 의해 거부되면서 헝가리는 왕이 없는 왕국이 되었고, 이에 따라 섭정 체제가 시작되었다.[18] 호르티는 1944년까지 섭정직을 유지하며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18]

호르티 미클로시


호르티의 통치는 독재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의 권한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헝가리 국왕의 헌법적 권한을 연장한 것이었다.[19] 섭정으로서 호르티는 의회를 해산하거나 휴회할 수 있었고, 총리를 임명할 권한을 가졌다.[20]

헝가리 섭정의 기


호르티는 집권 초기 헝가리 내 소수민족, 특히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1920년 ''수치 제한'' 법은 대학 내 소수민족 학생 수를 제한하고 성인에 대한 체벌을 합법화했다. 이 법은 표면적으로는 모든 소수민족에게 적용되었지만, 실제로는 반유대주의 정책을 은폐하는 역할을 했다.[21] 1928년에 제한이 완화되어 인종적 기준 대신 사회적 기준이 도입되었고, 공무원, 참전 용사, 소규모 토지 소유자, 장인, 산업가, 상인 계급 등 다섯 개의 범주가 설정되었다.[22][23]

베틀렌 이스트반 총리 시절에는 선거 제도가 변경되어 부다페스트와 그 주변 지역, 현의 시가 있는 도시 외에서는 공개 투표 제도가 재도입되었다.[24] 베틀렌의 통일당은 계속해서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베틀렌은 트리아농 조약의 개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1929년부터 1931년까지 헝가리 경제가 붕괴되면서 베틀렌은 총리직에서 사임해야 했다.[24]

사회적 조건은 개선되지 않았고, 소수의 인구가 국가 재산의 대부분을 통제했다. 유대인들은 헝가리 주류 문화에 동화되도록 압력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르티는 극우 정치인 굄뵈시 죄르지를 총리로 임명했다. 굄뵈시는 파시스트 이탈리아나치 독일과 같은 일당 정부를 추구했지만, 나치 독일의 압력으로 반유대주의 정책을 강화했다. "유대인 법"에 따라 유대인은 특정 직업에서 20%를 넘지 못하게 되었고, 헝가리 경제 실패의 희생양이 되었다.

다라니 칼만은 몇몇 직종에서 유대인의 비율을 20%로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임레디 벨러 총리 시기에는 우파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졌고, 텔레키 팔 총리 하의 1939년 총선에서는 화살십자당이 제2당으로 부상했다.

3. 2. 카를 4세의 왕위 복귀 시도

카를 1세는 1921년에 헝가리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으려 시도했다.[18] 카알 4세의 왕위 찬탈 시도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카를 1세가 반군과 함께 부다페스트로 진격하려 했지만, 헝가리 왕립군 대다수가 호르티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카를 1세는 체포되어 마데이라로 유배되었다.[18]

1921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카를 1세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로 귀국했다. 그는 호르티에게 오스트리아 침공과 헝가리 국왕 카로이 4세로서의 즉위를 요구했다. 호르티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협상국과의 분쟁을 우려한 국민 의회가 반대했다. 호르티는 합스부르크가에 충성했지만, 오스트리아 침공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카를 1세에게 오스트리아를 포기하면 국왕으로 추대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카를 1세는 호르티가 자신의 복위를 위해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3월 28일, 주변 국가들이 합스부르크가의 부활에 반발했다. 소 협상을 맺은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카를 1세의 즉위는 개전 이유가 된다고 경고했다. 국민 의회도 호르티 섭정의 통치 지속과 카를 1세 체포를 요구하는 결의를 가결했다. 결국 카를 1세는 4월 6일에 스위스로 돌아갔다.

10월 21일, 카를 1세와 그의 아내 치타는 다시 헝가리로 입국했고, 일부 헝가리 왕국군이 합류하여 내전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헝가리 왕국군은 대체로 호르티에게 충성했고, 호르티는 카를 1세 부부의 체포를 명령했다. 카를 1세는 체포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외무 장관은 합스부르크가의 완전한 폐위를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했다.

결국 11월, 국민 의회는 1713년 국사 조서[51]의 효력을 무효로 하는 법안을 가결하여 카를 1세의 왕위 계승권을 부정했다. 카를 1세는 복위를 단념하고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으로 망명했다.

4. 경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헝가리 왕국은 트리아농 조약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중요한 영토를 잃고 경제적 쇠퇴, 재정 적자, 높은 인플레이션을 겪었다.[29] 이슈트반 베틀렌 총리는 해외 차관을 통해 통화 안정을 이루고 1927년 펭괴를 도입하여[30] 1920년대에는 번영을 누렸으나,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는 다시 위기에 빠졌다.[31]

1930년대 중반부터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무역에서 혜택을 보았지만, 이는 헝가리 경제를 독일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헝가리의 민족주의자들은 트리아농 조약으로 빼앗긴 영토 회복을 목표로 하였고, 굄뵈스 죄르와 같은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헝가리는 이탈리아 왕국나치 독일과 협력 관계를 맺고, 1927년 4월 5일에는 이탈리아와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임시 정부 시기에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1946년1월 1일에는 "아도 펭괴"(adópengőhu→"세금의" 펭괴)라는 납세 용도의 화폐가 발행되었고, 5월 9일에는 법정 통화로 인정되었다. 1아도 펭괴는 2×1021(20해) 펭괴의 가치를 지니기도 했으나, 인플레이션을 막지는 못했다. 1946년8월 1일 신 통화 포린트가 도입되면서 헝가리 경제는 안정을 되찾았다.

4. 1.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의 경제 위기

제1차 세계 대전 패배로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받은 헝가리는 격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코로너의 가치는 폭락했고, 국내 경제는 불안정해졌다.[29] 트리아농 조약으로 영토를 잃으면서 농업 및 산업 기반이 약화되었고, 이는 경제 쇠퇴, 재정 적자,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이슈트반 베틀렌 총리는 대규모 해외 차관을 통해 1920년대 초 통화 안정을 이루어냈고, 1927년에는 새로운 통화인 펭괴를 도입했다.[30] 산업과 농업 생산량이 빠르게 증가하고 대외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1920년대 대부분 기간 동안 헝가리는 번영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으로 번영은 급격히 붕괴되었고, 특히 오스트리아 외스터라이히셰 크레디탄슈탈트 은행의 파산이 큰 영향을 미쳤다.[31]

4. 2. 대공황의 영향

이슈트반 베틀렌 총리 정부는 대규모 해외 차관을 통해 1920년대 초 통화 안정을 달성하고, 1927년 새 통화인 ''펭괴''를 도입했다.[30] 산업 및 농장 생산량이 빠르게 증가하여 1920년대 대부분 기간 동안 대외 무역에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번영은 급격히 붕괴되었으며, 특히 오스트리아 에 있는 ''Österreichische Creditanstalt'' 은행의 파산이 큰 영향을 미쳤다.[31]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까지 독일과의 관계 개선으로 헝가리 경제는 무역에서 혜택을 보았고, 독일 경제에 의존하게 되었다.

4. 3. 독일과의 경제 관계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헝가리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에 있는 ''Österreichische Creditanstalt'' 은행의 파산은 헝가리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31]

이후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까지 독일과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헝가리 경제는 무역에서 혜택을 보았다. 그러나 이는 헝가리 경제가 독일 경제에 의존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5. 외교 관계

이슈트반 베틀렌, 헝가리 총리


헝가리 왕국은 호르티 섭정 초기에는 민족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나, 추가 분쟁을 피하고자 1920년 6월 4일 트리아농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루마니아에, 상헝가리 상당 지역을 체코슬로바키아에, 보이보디나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이후 유고슬라비아)에 할양하고, 피우메 자유시가 설치되었다.[32]

이후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총리들이 집권하면서 트리아농 조약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헝가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국경 변화에 반대하는 독일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1927년 4월 5일 헝가리와 우호 조약을 체결하며 관계를 강화했다.[32] 죄르지 굄뵈스는 파시스트 지도자들을 숭배하고,[33]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간 삼각 동맹을 구축하려 했다.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 동맹에 '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이들은 로마-베를린 축을 결성했다.[33] 뮌헨 협정 이후 제1차 빈 중재로 체코슬로바키아 남부 지역이 헝가리에 할당되고, 카르파토-우크라이나가 합병되었다.

5. 1. 트리아농 조약 개정 노력



호르티 정권 초기, 헝가리는 추가적인 분쟁을 막기 위해 1920년 6월 4일 트리아농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으로 헝가리 영토는 대폭 축소되어 트란실바니아 전체가 루마니아에, 상헝가리 상당 부분이 체코슬로바키아에, 보이보디나는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1929년 이후 유고슬라비아)에 할당되었으며, 피우메 자유시가 창설되었다.[32]

이후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총리들이 잇따라 집권하면서, 헝가리는 점차 트리아농 조약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헝가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국경 변화에 반대하는 독일이탈리아 등 파시스트 국가들과 제휴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1927년 4월 5일 헝가리와 이탈리아 간 우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헝가리와 긴밀한 관계를 모색했다.[32] 죄르지 굄뵈스는 파시스트 지도자들을 공개적으로 숭배했으며,[33] 1934년 오스트리아 독립 문제로 갈등하던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며 양국과 헝가리 간 삼각 연대를 구축하려 했다. 굄뵈스는 무솔리니가 1930년대 후반 오스트리아 합병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으며,[32] 독일과 이탈리아 동맹 구축에 "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두 나라는 동맹을 로마-베를린 축이라 칭했다.[33]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헝가리는 뮌헨 협정을 통해 독일 및 이탈리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체코슬로바키아와 영토 분쟁을 협상으로 해결해야 했다. 제1차 빈 중재로 체코슬로바키아 남부 지역이 헝가리에 재할당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직후 헝가리는 카르파토-우크라이나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 합병했다.

5. 2. 이탈리아, 독일과의 관계

지리학자이자 왕국의 총리였던 텔레키 팔이 1910년에 제작한 민족 분포 지도. 빨간색은 마자르인의 거주지이며, 헝가리 왕국의 경계 밖에도 많이 존재한다.


이탈리아베니토 무솔리니는 1927년 4월 5일 헝가리와 우호 조약을 체결하며 헝가리와의 긴밀한 관계를 추구했다.[32] 죄르지 굄뵈스는 파시스트 지도자들을 공개적으로 존경했으며,[33]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간의 긴밀한 삼각 동맹을 구축하려 했다.[32]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동맹 구축을 위해 "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 두 국가는 로마-베를린 축을 결성했다.[33]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으로 상실한 영토 회복을 목표로 삼았고, 이는 미수복 이탈리아 문제를 주장하는 이탈리아 및 나치 정권과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특히 헝가리는 대 유고슬라비아 문제에서 이탈리아와, 대 체코슬로바키아 문제에서 독일과 협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헝가리는 뮌헨 협정을 통해 독일 및 이탈리아와의 긴밀한 관계에서 이익을 얻었다. 제1차 빈 중재로 체코슬로바키아 남부 지역이 헝가리에 반환되었고, 이후 헝가리는 카르파토-우크라이나를 점령, 합병했다.

5. 3. 추축국 가입

1920년 당시 영토는 노란색, 1941년까지 획득한 영토는 연두색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트리아농 조약으로 헝가리는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트란실바니아루마니아에, 상헝가리 일부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보이보디나는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이후 유고슬라비아)에 귀속되었다. 이러한 영토 상실은 헝가리 내에서 큰 불만을 야기했다.

헝가리는 점차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화하며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파시즘 국가들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1927년 헝가리와 우호 조약을 체결하며 관계를 강화했다.[32] 죄르지 굄뵈스 총리는 파시스트 지도자들을 공개적으로 숭배하며,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간의 삼각 동맹을 구축하려 했다.[33]

뮌헨 협정 이후 제1차 빈 중재를 통해 헝가리는 체코슬로바키아 남부 지역을 되찾았고, 카르파토-우크라이나를 합병했다. 이러한 영토 확장은 헝가리의 추축국 가입을 더욱 가속화했다.

1940년 11월 20일, 헝가리는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1941년 4월에는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참여하여 보이보디나, 바치카 등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

1941년 6월,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며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하자, 헝가리도 독일에 대한 선전 포고를 통해 참전했다. 헝가리군은 독일군을 지원하며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여했지만, 큰 손실을 입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호르티 섭정은 독일과의 관계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1942년에는 화살십자당을 금지하고, 친독 성향의 총리를 해임하며 연합국과의 비밀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독일에 발각되었고, 1944년 3월 독일은 마르가레테 작전을 통해 헝가리를 점령했다. 호르티는 연금되었고, 친독 성향의 스토야이 되메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6.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 헝가리 왕국


제2차 빈 중재를 통해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할양받은 헝가리 왕국은 추축국에 가입했다. 히틀러는 헝가리 정부에 독일의 군사 및 인종 정책을 따를 것을 요구했다. 1944년, 히틀러에 의해 호르티가 축출되기 전, 헝가리 정부는 헝가리의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수십만 명의 유대인을 강제 수용소로 이송하는 데 나치 독일을 도왔다.[26]

헝가리는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독소 전쟁에 참전하여 독일을 지원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헝가리 제2군이 괴멸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1944년, 헝가리는 영국과 미국에 비밀리에 접촉하여 연합국과의 휴전을 시도했지만, 독일의 마르게테 작전으로 저지되었다. 이후 판저파우스트 작전으로 화살십자당살러시 페렌츠가 정권을 잡고 국민 통일 정부를 수립, 추축국 편에서 전쟁을 계속했다.

살러시 정권 하에서 유대인 박해는 더욱 심해졌으나, 붉은 군대가 부다페스트에 진입하면서 부다페스트 포위전이 시작되었고, 살러시는 도주했다. 1944년 12월, 데브레첸에서 헝가리 임시 의회가 열려 벨러 미클로시를 수장으로 하는 임시 정부를 선출했다. 이 정부는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연합국과 휴전을 체결했다.

6. 1.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영토 확장

1941년 4월, 헝가리는 독일 국방군이 자국 영토에 진입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독일과 이탈리아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지원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선포된 후, 헝가리는 군사 작전에 참여하여 헝가리인이 다수인 바치카 지역을 합병했고, 프레크무르예와 메지무르예 지역 또한 병합했다.[26] 이 지역에는 각각 상당수의 슬로베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소수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6. 2. 독소 전쟁 참전

1941년 4월, 헝가리는 독일 국방군이 자국 영토에 진입하는 것을 허용하여 독일과 이탈리아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지원했다.[52]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선포된 후, 헝가리는 군사 작전에 참여하여 헝가리인이 다수인 바치카 (바츠카) 지역을 합병했고, 프레크무르예와 메지무르예 지역 또한 병합했다. 이 지역에는 각각 상당수의 슬로베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소수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1941년 6월 27일, 라슬로 바르도시는 소련에 전쟁을 선포했다.[52] 헝가리 정부는 바르바로사 작전 동안 독일의 전쟁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무장 부대를 파견했다. 헝가리 왕립 육군의 거의 모든 제2군단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손실되었다.

1944년 8월, 헝가리 장갑차와 보병의 후퇴


1944년 초, 소련군이 동쪽에서 빠르게 진격해 오면서 헝가리는 전쟁에서 탈출하여 연합국과 휴전을 맺기 위해 영국과 미국에 비밀리에 접촉하려다 발각되었다. 1944년 3월 19일, 독일은 마르게테 작전으로 헝가리를 침공하여 대응했다. 독일군은 헝가리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요 지역을 점령했다. 그들은 호르티를 가택 연금에 처하고, 미클로시 칼로이 총리를 더 유순한 후임자로 교체했다.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인 되메 스토여이가 새로운 헝가리 총리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헝가리인들은 다시 전쟁을 끝내려고 시도하다 발각되었고, 독일은 판저파우스트 작전을 시작했다. 그들은 호르티를 화살십자 지도자인 페렌츠 셜러시로 교체했다. 국민 통일 정부가 선포되었고, 추축국 측에서 전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새로운 괴뢰 정부는 오래가지 못했고, 1944년 11월 적군이 이미 부다페스트에 도착하여 부다페스트 포위전이 시작되었고, 셜러시는 수도에서 도망쳤다. 1944년 12월 21일, 헝가리 "임시 의회"가 소련의 승인을 받아 데브레첸에서 열렸다. 이 의회는 헝가리 제1군의 전 사령관인 벨라 미클로시를 수장으로 하는 임시 대정부를 선출했다.

새로운 정부는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연합국과 휴전을 체결했으며, 1945년 1월 전쟁 범죄 혐의자들을 기소하기 위한 인민 재판소를 설치했다.

6. 3. 연합국과의 비밀 협상

1944년 초, 소련군이 동쪽에서 빠르게 진격해 오면서, 헝가리는 전쟁에서 벗어나 연합국과 휴전을 맺기 위해 영국과 미국에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독일에게 발각되었고, 1944년 3월 19일 독일은 마르게테 작전으로 헝가리를 침공했다.[26] 독일군은 헝가리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요 지역을 점령했고, 호르티가택 연금하고 미클로시 칼로이 총리를 더 유순한 후임자로 교체했다.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인 되메 스토여이가 새로운 헝가리 총리가 되었다.[26] 그는 반유대주의 및 친나치 화살십자당을 합법화하고, 헝가리 유대인을 대량으로 독일로 추방하기 시작했으며, 자유주의 및 좌익 야당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을 시작했다.[26]

같은 해 8월, 소련군이 헝가리 국경 지대에 접근하자 호르티는 다시 연합국과의 강화 교섭에 나섰다. 8월 29일, 호르티는 스토여이를 해임하고 친영미파인 러커토시 게저를 총리로 임명했다. 9월 9일, 소련군은 요충지 주클라 고개를 돌파했다. 다음 날 각의에서 호르티는 "전쟁의 지속은 불가능해졌다. (연합국 측에) 휴전 조건을 타진하는 단계에 도달했다"[53]라고 발언했고, 각료 전원이 동의했다. 9월 15일, 호르티는 이탈리아 주둔 영국군에 사절을 보내 강화 교섭을 신청했지만, 영국은 소련군과 교섭해야 한다고 전달하며 거절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독일 측에 알려졌다. 히틀러는 호르티의 제거와 화살십자당에 의한 헝가리 정부 장악을 결의하고, 쿠데타 발동을 준비했다. 10월 8일, 모스크바에서 헝가리 사절단은 소련 외상 몰로토프와 면회하고, 독일에 대한 즉시 선전 포고를 조건으로 하는 휴전에 합의했다.

6. 4. 화살십자당 정권

부다 궁전을 점령한 무장친위대


1944년 10월, 독일군은 판처파우스트 작전을 통해 호르티 섭정을 축출하고 화살십자당살러시 페렌츠를 권좌에 앉혔다. 국민 통일 정부가 수립되었고, 헝가리는 추축국 편에서 전쟁을 계속했다. 살러시는 섭정이 아닌, 새로운 "헝가리주의 국가"의 "국가지도자"("''Nemzetvezető"'') 겸 총리로 임명되었다.[34][35]

살러시 정권 하에서 반유대주의 박해와 학살은 더욱 심해졌다. 살러시의 민병대는 1만 명에서 1만 5천 명의 헝가리 유대인을 살해하는 데 직접적인 책임이 있었다.[36]

연행되는 유대인. 1944년 10월, 부다페스트


호르티 실각 후, 화살십자당 정권 하에서 유대인 학살은 본격화되었다. 독일에서 아돌프 아이히만 친위대 중령이 파견되어 유대인의 강제 수용소 이송이 시작되었다. 1941년 당시 헝가리에는 80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으나, 종전 후에는 20만 명으로 감소했다. 이 기간 동안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들을 구출하려 한 인물 중 하나는 스웨덴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였다. 발렌베리는 유대인들에게 스웨덴 보호 증서를 발급하여 10만 명의 유대인을 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괴뢰 정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1944년 11월, 붉은 군대가 이미 부다페스트에 도착하여 부다페스트 포위전이 시작되었고, 살러시는 수도에서 도망쳤다.[37] 1945년 2월, 부다페스트는 함락되었고, 헝가리 국토 대부분이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화살십자당 정부는 서부 국경 지대에서 저항을 계속했지만,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하면서 해산되었다.

6. 5. 헝가리 임시 국민 정부

1944년 12월 21일, 소련군의 지원 아래 데브레첸에서 Ideiglenes Nemzetgyűlés|임시 국민 의회hu가 개최되었다. 이 의회는 헝가리 공산당, 독립 소농업자당, 국가 농민당, 헝가리 사회민주당, 헝가리 민주당으로 구성되었으며, 230석 규모였다. Hungarian parliamentary election, 1944|1944년 헝가리 의회 선거|label=의회 선거영어를 통해 성립되었다.[56] 다음 날인 22일, 헝가리 임시 국민 정부와 국가 원수의 권한을 대행하는 High National Council|고등 국민 평의회|label=고등 국민 평의회영어가 수립되었다. 헝가리 제1군 사령관이었던 달노키 미클로시 벨러가 총리로 선출되었고, 임시 국민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승인되었다.

달노키는 화살십자당 정권 및 독일군 협력자들을 체포하여 소련에 인도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1945년 1월 25일 인민 법원을 설치하여 수십만 명의 헝가리인이 박해를 받았다. 또한, 같은 해 여름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을 폐지했다.[56] 임시 정부에서 헝가리 거의 전역을 지배한 소련군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7. 헝가리 왕국의 해체

소련 점령 하에서 헝가리 왕국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고등 국가 평의회가 국가의 집단 원수로 임명되었고, 1946년 2월 1일 군주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섭정 체제는 제2 헝가리 공화국으로 대체되었으며, 이는 곧 헝가리 인민 공화국 수립으로 이어졌다.

7. 1. 소련의 점령과 공산화

소련 점령하에서 헝가리 왕국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1946년 2월 1일 군주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고등 국가 평의회가 국가의 집단 원수로 임명되었다. 섭정 체제는 제2 헝가리 공화국으로 대체되었으며, 이는 곧 헝가리 인민 공화국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8. 역사적 평가

1930년대와 1940년대의 헝가리 왕국을 파시스트 국가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다. 리처드 그리피스는 정권의 독일 의존성 심화, 반유대주의 법안 통과, 지역 유대인 학살 참여 등이 국제 파시즘의 영역에 속한다고 평가했다.[39]

8. 1. 파시즘 논쟁

1930년대와 1940년대의 헝가리 왕국을 파시스트 국가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다. 리처드 그리피스에 따르면, 정권의 독일 의존성 심화, 반유대주의 법안 통과, 그리고 지역 유대인 학살 참여 등 모든 것이 국제 파시즘의 영역에 속한다.[3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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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문서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카를 1세(카롤이 4세)가 1922년 이후에는 오토 폰 하프스부르크가 왕위 계승자로서 헝가리 왕을 자칭했다. 1921년까지는 카를 1세의 복귀 운동도 있었다.
[42] 문서 호르티 미클로시는 헝가리 섭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43] 문서 사라시 페렌츠는 국민 지도자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44] 문서 국가 원수의 기능을 수행하는 합의체
[45] 간행물 Magyar törvénytár (Corpus Juris Hungarici): 1920. évi törvénycikkek Révai Testvérek Irodalmi Intézet Részvénytársaság
[46] 백과사전 Magyarország Hasonmás Kiadó
[47] 백과사전 Magyarország Hasonmás Kiadó
[48] 백과사전 Magyarország Hasonmás Kiadó
[49] 문서 1945년에 폐지
[50] 문서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동생이자 헝가리 부왕이었던 요제프 안톤 대공의 손자였으며,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재종조카였다. 또한, 아내 아우구스테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차녀 기젤라의 딸이었다.
[51] 문서 이 국사 조서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6세가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권을 인정한 것이며, 이 조서의 효력이 무효가 되면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손인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헝가리 왕위 계승권이 상실된다는 것이었다.
[52] 학술지 New Twist to an Old Riddle: The Bombing of Kassa (Košice), June 26, 1941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53] 서적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의 전쟁
[54] 문서 "망명"한 호르티는 독일 국내 별장에 감금되었다.
[55] 웹사이트 Horthy’s memoirs http://www.hungarian[...]
[56] 웹사이트 Makai Ágnes: A Katonai Mária Terézia Rend újabb emlékei http://jam.nyirbone.[...]
[57] 웹사이트 http://www.jewishgen[...] 2008-01-06
[58] 서적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의 전쟁 文春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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