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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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남운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로, 유물사관에 입각해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을 비판하며 조선 사회경제사를 연구했다. 1894년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태어나 도쿄고등상업학교와 도쿄상과대학(현 히토쓰바시 대학)을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하며 '조선사회경제사'(1933), '조선봉건사회경제사'(1937) 등을 저술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학술원 원장, 경성대학교 교수를 지내며 정치 활동을 병행, 남조선신민당 대표를 거쳐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이후 북한에서 초대 교육상,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역임하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으로 활동하다 197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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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백남운 |
출생일 | 1894년 2월 11일 |
출생지 | 북함경남도, 한국 |
사망일 | 1979년 6월 12일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출생지(한자) | 전라북도 고창군 |
사망지 | 평양 |
로마자 표기 | Paek Nam-un |
한자 표기 | 白南雲 |
일본어 가타카나 표기 | ペク・ナムン |
일본어 히라가나 표기 | はくなんうん |
조선어 표기 | 백남운 |
직책 | |
최고인민회의 의장 | term_start: 1967년 12월 16일 term_end: 1972년 12월 28일 predecessor: 최원택 successor: 한덕수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 convocation: 3기 term_start: 1962년 10월 23일 term_end: 1967년 12월 16일 alongside: 박정애, 홍명희, 강양욱, 박금철, 이용호 chairman: 최용건 convocation: 2기 term_start: 1961년 3월 25일 term_end: 1962년 10월 23일 alongside: 현칠종, 김원봉, 한설야, 강양욱 chairman: 최용건 |
교육상 | term_start: 1948년 9월 9일 term_end: 1956년 1월 16일 premier: 김일성 predecessor: 직책 신설 successor: 김창만 |
군사 정보 | |
교육 | |
모교 | 공산주의 동방노력자 대학 |
출신 학교 | 도쿄 상과대학 (현 히토쓰바시대학교) |
수상 | |
소속 정당 | |
정당 | 조선로동당 |
기타 정보 |
2. 생애
1894년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 백씨이다.[3] 1911년 결혼 후, 조선총독부 부속 수원농림학교(현 서울대학교 농생명과학대학)에 입학하여 농업정책을 전공하고 1915년 졸업하였다. 강화 공립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1918년부터 도쿄로 유학, 1919년 3월 도쿄고등상업학교(구제)(현 히토쓰바시 대학)에 입학하였다. 1925년 도쿄상과대학(구제)(현 히토쓰바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대학에서 고다 마사마(高田保馬)에게 배웠다. 유학 중에는 당시 일본 지식인층에 널리 퍼져 있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925년부터 1938년까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상과 교수로 재직하며 조선 사회경제사 연구를 하였다.[4] 최남선, 신채호, 후쿠다 도쿠조(福田徳三), 이누야마 젠이치(猪谷善一)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1933년 원시고대 조선의 사회경제사 연구인 『조선사회경제사』를 출판하였다. 1937년에는 고려 시대를 다룬 속편인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출판하였으나,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사회주의 활동을 이유로 대일본제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투옥으로 대학에서 사직하고 신용금고에 근무하였으나, 일본 항복 후 1945년 9월 조선학술원을 조직하고 원장에 취임하였다. 동시에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에 대해 미군정과의 협상을 통해 학부 독립과 교수회 자치 확립을 이끌어내어 민족적인 대학으로 개편하는 데 힘썼다. 1945년 12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정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1946년 경성대학교 법문학부 재정학 교수를 거쳐 통합된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대학 교수와 함께,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 독립신보 고문 등 정치 활동도 병행하였다. 1946년 2월 조선독립동맹(후의 신민당 전신 중 하나) 경성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취임, 같은 해 6월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여운형과 좌익 정당인 건국준비위원회(후의 남조선로동당 전신 중 하나)를 설립하고 부위원장을 역임, 여운형 사후에는 당을 이끌었다.
제1차 총선거를 비판하고, 1948년 4월 평양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서 김일성, 박헌영에 이어 연설, 3일차에는 사회를 맡았다. 회의 후 평양에 남아 수십 명의 한국 학자들을 월북시켜 김광진에게 소개, 김일성종합대학 설립에 기여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과 함께,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같은 해 9월 초대 교육상에 취임하였다. 1952년부터 조선사회과학원 원장을 겸임하였다. 이후 남조선로동당 출신 다수가 숙청·처형되는 가운데 살아남아, 1961년부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69년부터 최고인민회의 의장, 1974년부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등 요직을 역임하다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재임 중이던 1979년 사망하였다. 향년 86세.
2. 1. 생애 초기
1894년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 백씨이다.[3] 1911년에 결혼하였다. 같은 해 조선총독부 부속 수원농림학교(현 서울대학교 농생명과학대학)에 입학하여 농업정책을 배웠다.2. 1. 1. 수학 시절
1912년 19세 나이에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수업료가 무료였고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었던데다 백남운은 학비보조까지 받았기 때문에 학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 1915년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의무 규정에 따라 강화보통학교의 교원으로 발령받아 근무하였다.[6]이 학교에서 2년간 근무한 뒤 강화군 삼림조합의 기술자로 전보 발령을 받아 다시 1년을 근무했다. 그는 이 시기 미래에 대해 고뇌하면서 방황했고 새로운 지적 욕구를 위해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1918년 일본으로 유학, 도쿄 고등상업학교와 도쿄상과대학(현재의 히토쓰바시 대학)을 졸업하였다.[6]
그가 일본에 유학 중일 무렵 일본의 지식인 계층에서는 마르크시즘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도쿄상대에는 사회주의 경제학자들이 많았다. 이때부터 백남운은 자연스럽게 마르크시즘에 기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6]
2. 2. 교육, 경제학자 활동
1912년, 19세의 나이에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했다. 수업료 면제와 기숙사 생활이 가능했고, 장학금까지 받아 학업에 전념했다. 1915년 졸업 후 강화사범학교 교사로 2년간 근무하고, 강화군 산림조합 기술직원으로 1년간 근무했다. 이후 일본 유학을 결심,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고등상업학교와 도쿄상과대학(현 히토쓰바시대학)을 졸업했다.1925년 도쿄상대를 졸업하고 귀국,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경제학자로서 명성이 알려지면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아졌고, '경제연구회'라는 사회주의 계열 학생 동아리를 이끌었다.
2. 2. 1. 일제 강점기 후반
1925년 도쿄상대를 졸업하고 귀국,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가 되었다. 이 시기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창당됐다.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에도 이미 공산주의는 들어와 있었는데, 조선공산당의 창당과 1920년대 국학운동등을 계기로 일제 총독부는 지속적으로 공산주의 운동탄압과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조선사를 식민사관의 관점에 진행시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는 항일운동과 연결되면서 끈질기게 확산되어갔다.그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과 계급투쟁론의 입장에 서서 조선역사를 강의하여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을 정면으로 비판,반박하였으며, 강의활동과 함께 1933년 조선사회경제사를, 1937년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각각 펴냈다.[6] 한편, 백남운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민족개량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치론을 비판하는 글들을 여러편 발표하자, 자치운동 벌이는 인사들의 집중적 공격을 받았다. 이 일로 그는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경제학자로서 명성이 알려지면서 그를 따르는 학생들이 많아져 백남운은 경제연구회 라는 사회주의적 학생동아리를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것을 빌미로 그를 잡아들여 2년여 남짓 투옥시켰다. 1940년 석방되었고, 그는 그 뒤 학자들과 교류하는 것 이외에 은둔 생활을 보냈다.[6]
2. 3. 광복 이후
해방 후 백남운은 조선학술원을 설립하고 경성제국대학 법학부 교수가 되었다. 그는 진보적, 사회주의적 학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 건설 이론을 지지하는 데 힘썼다.[1]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가 발표되자 백남운은 조선학원 원장의 이름으로 먼저 귀국을 선언하고 강연을 통해 이를 주장했으나, 이후 입장을 바꿔 찬탁을 지지했다.
백남운은 조선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으며, 김두봉의 동의를 얻어 남조선신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1946년 2월에는 남조선신민당을 중심으로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했다.
그는 남조선신민당 대표로 38선 이북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또한 미군 주둔 상황 속에서 한국 군부는 통일을 위한 운동을 벌였다.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로동당을 결성하였다. 1946년 2월 15일 그는 민족주의민족전선(민전) 공동위원장으로 초청받았다.[2] 박헌영이 이끄는 남로당에 가담하지 않고 거리를 두었고, 이를 통해 박헌영과 갈등과 대립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회의감을 느끼고 현실의 장벽 앞에서 사퇴를 선언했다. 그 후 그는 국민문화연구소를 조직하고 문화운동에 참여했다.
1947년 4월, 정계 은퇴 6개월 만에 정계에 복귀했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 성명을 발표한 후 여운형과 협력하여 조선인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1947년 5월 조선인민당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당하자 더 이상 조직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1947년 8월 좌익 검거의 물결이 일면서 백남운은 당과 함께 체포될 위기에 처해 체포되었다. 결국 백남운은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위협에 직면하여 가족을 먼저 북한으로 보냈다.
thumb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회' 사진. 왼쪽부터 백남운, 허헌, 박헌영, 홍명희.]]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총선거를 앞두고 남북 어느 쪽에 참여할지 갈림길에 섰다. 백남운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5·10 총선거를 비판하며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하는 길을 택했다. 1948년 4월 평양 남북협상에 참석했다. 이 회담에서 그는 김일성, 박헌영에 이어 두 번째로 연설을 했고, 세 번째 회담에서는 사회자를 맡기도 했다.
그는 12번째이자 마지막 남북협상 참여를 위해 북으로 간 인물이었다. 그 후 남북협상 이후 평양에 정착했다.[1]
2. 3. 1. 남조선신민당 활동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가 발표되었을 때 백남운은 처음에 조선학술원 원장 이름으로 반탁을 선언하고 강연을 통해 이를 주장했으나, 나중에는 입장을 찬탁으로 선회하고 찬탁을 지지했다.[6]이때부터 백남운은 정치일선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중국 옌안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38선 이북으로 귀국한 한글학자 김두봉, 조선독립동맹의 최창익, 허정숙 등과 일정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백남운은 조선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는 김두봉의 동의하에 남조선신민당을 창당하고 발전적으로 개편해 당대표가 되었다. 김두봉, 허정숙, 최창익 등과 연결되어 1946년 2월 민족주의민주전선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남조선신민당 대표자격으로 38선 이북에 두 번 다녀왔다. 그리고 정당 사회단체가 난립했던 미군정기에 통일전선운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이 합당해 남조선로동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1946년 2월 15일, 민족주의민족전선(민전)의 공동의장에 추대되었다.[7]
2. 4. 남북협상 참여와 북한에서의 활동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결정되자, 백남운은 김구와 함께 남북 협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5·10 총선거를 비판하였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여 김일성, 박헌영에 이어 연설하였고, 사흘째 회의에서는 사회자를 맡았다.[6]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한 백남운은 이후 평양에 정착하였다.[6] 그는 1948년 8∼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및 초대 내각 교육상을 시작으로,[8] 1961∼62년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마르크스 레닌주의방송대학 총장, 1967년 최고인민회의 의장, 1974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6]
백남운은 남한의 많은 지식인들을 월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6년 1월 첫 북행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과학자, 예술인, 교수 등의 월북을 주선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서울로 돌아와, 김석형, 박시형, 계응상, 도상록, 최재우, 강영창, 문예봉, 황철, 박영신 등 여러 분야의 지식인과 예술인들의 월북을 주선하였다.[6]
2. 5. 최후
백남운은 홍명희처럼 북한에서 예외적으로 순탄한 경력을 쌓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에서 교육상으로 임명되어 8년간 재직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원장을 겸임했다. 1961년 김두봉, 최창익 등이 숙청될 때도 연안파와 거리를 두어 무사했다.[1]1961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1967년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1972년까지 5년간 재임했다. 이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으로 활동하다 1979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1946년 1월 북한을 처음 방문했을 때, 북한은 백남운에게 남한 과학자와 예술가들을 북한의 교수로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서울로 돌아와 사학자 김석형과 박시형, 섬유산업 권위자 물리학자 도상록, 공학자 최재우와 강영창, 그리고 예술가 문열봉, 황철환, 박영신 등의 지식인들을 초청하여 주선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초대 교육상에 취임하였다. 1952년부터 조선사회과학원 원장을 겸임하였다. 그 후에도 남조선노동당 출신자의 다수가 숙청·처형되는 가운데 살아남아, 1961년부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69년부터 최고인민회의 의장, 1974년부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등 요직을 역임하다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재임 중이던 1979년에 사망하였다.
3. 역사관과 비판
백남운은 마르크스의 유물사관과 계급투쟁론의 입장에 서서 조선의 역사를 강의하며 식민지 수탈론의 ‘동일성 이론’을 비판하고 반박하였다.[1]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국민개조론자들의 자치론을 여러 차례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면서 자치 운동 세력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1]
경제학자로서 명성이 알려지면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아졌고, ‘경제연구회’라는 사회주의 계열 학생 동아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일제는 그를 체포하여 2년 이상 투옥하였다. 1940년 석방된 그는 이후 학자들과 교류하는 외에도 은둔 생활을 하였다.
3. 1. 역사관
백남운은 유물사관에 입각해 '한민족의 역사가 원시 씨족 공동 사회에서 출발해 삼국시대의 노예 경제 사회를 거쳐 통일신라와 고려의 아시아적 봉건 사회에 이르렀으며, 현재에 와서 상품 생산제 사회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았으며,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1]그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과 계급투쟁론의 입장에 서서 조선의 역사를 강의하며 식민지 수탈론의 ‘동일성 이론’을 비판하고 반박하였으며, 강의 활동과 함께 1933년 『조선 사회경제사』, 1937년 『조선 봉건사회』 등 경제사 관련 저서를 집필하였다.[1] 한편, 백남운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국민개조론자들의 자치론을 여러 차례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면서 자치 운동 세력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1]
3. 2. 비판
일제강점기 이재유를 비롯한 정통파 공산주의자들은 백남운이 유물론적 관점에서 저술한 《조선사회경제사》에 대해 "사민주의적이고, 민족개량주의적 성향"이라며 부정적 견해를 드러내기도 했었다.[9]4. 저서
- 《조선사회경제사》
- 《조선봉건사회경제사》
- 《조선민족해방투쟁사》
- 《조선력사교재의》
- 《3국시대 사회구성체 논쟁》 편찬에 참가
- 〈조선 민족의 진로〉
- 経済学全集 第61巻: 朝鮮社会経済史|교오자이가쿠젠슈 다이로쿠주익칸 조센샤카이케이자이시일본어 (개조사, 1933)
- 朝鮮社会経済史 第2巻: 朝鮮封建社会経済史 上 高麗の部|조센샤카이케이자이시 다이니칸 조센호켄샤카이케이자이시 조오 코오라이노부일본어 (개조사, 1937)
- 1946-55년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경제 및 문화발전|센큐햐쿠욘주로쿠 고주고넨도 조센민슈슈기진민쿄와코쿠노 진민케이자이오요비 분카하츠텐일본어 (정우택(鄭雨沢) 역),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研究会) 편, 조선의 경제|조센노 케에자이일본어 동양경제신보사(東洋経済新報社), 1956년
- 오늘의 조선과 내일의 조선|교오노 조센토 아스노 조센일본어 전위(前衛)|젠에이일본어 (통권 203) 1962년 11월
5. 가족
백남운은 전라북도 고창군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수원 백씨이다.[3] 1911년에 결혼하였다.
2011년 9월 13일, 일본 이시카와현 와지마시 앞바다에서 탈북자들이 탄 소형 목선을 일본 어부가 발견했다. 탈북자들의 리더인 40대 남성은 백남운의 손자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아버지(백남운의 딸의 배우자)는 조선로동당 중간 간부로 대남공작기관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나중에 숙청되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고 진술했다.[5]
참조
[1]
뉴스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22-02-00 #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으므로 00으로 표시
[2]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3]
웹사이트
스카이데일리, 박정희 구명 32세 육참총장 백선엽 ‘당나라 핏줄’
https://www.skyedail[...]
2016-08-10
[4]
서적
朝鮮人物事典
[5]
웹사이트
「祖父は議長、父は韓国人拉致を指揮」韓国移送の脱北者詳述(MSN.産経ニュース2011年10月4日22:43)
https://web.archive.[...]
2011-10-15 # access-date
[6]
뉴스
동암 백남운/김학준 정치학박사(해방공간의 주역:15)
http://www.donga.com[...]
donga.com
[7]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8]
뉴스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48-09-11
[9]
서적
박헌영 평전
실천문학사
[10]
뉴스
서울 온 탈북자 "부친, 한국인 100명 납치해…"
http://joongang.join[...]
중앙일보
2011-10-06 #웨이백머신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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