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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바탄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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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탄 죽음의 행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 4월, 일본군이 필리핀 바탄 반도에서 포로로 잡은 7만 6천 명의 미국군과 필리핀군을 수용소까지 강제 이송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포로들은 구타, 굶주림, 고문, 즉결 처형을 당했으며, 7천 명에서 1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일본의 전쟁 범죄로 규정되었으며, 관련자들은 전후 전범 재판에서 처벌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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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바탄 행진 - [전쟁]에 관한 문서
바탄 죽음의 행진
미국 및 필리핀 포로들이 임시 들것을 사용하여 전우들을 옮기는 사진, 1942년
바탄 죽음의 행진 후, 1942년 카파스, 타를라크의 캠프 오도넬에서 미국 및 필리핀 전쟁 포로들이 임시 들것을 사용하여 쓰러진 전우들을 옮기고 있다.
일부바탄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날짜
기간1942년 4월 9일 – 1942년 4월 17일
장소
위치마리벨레스, 바탄
바가크, 바탄
카파스, 타를라크, 루손 섬, 필리핀
결과
결과정확한 수치는 알려지지 않음. 추정치는 5,500명에서 18,650명의 포로 사망자를 포함함.
명칭
기타

2. 배경

에드워드 P. 킹 장군이 바탄 전투 종식을 위한 항복 조건을 일본군 장교들과 논의하는 모습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현역 복귀 당시 오렌지 작전 계획 3 (WPO-3)에 기반한 필리핀 방어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마닐라 만 입구를 사수하고 일본 해군이 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2] 만약 일본군이 승리할 경우, 미국군은 바탄 반도로 후퇴하여 "마지막 극한까지" 방어해야 했다.[3]

하지만 맥아더는 1941년 7월 연합군 사령관직을 맡으면서 WPO-3를 패배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군도 전체를 포함하는 해안 방어 전략을 권고했고, 그의 의견은 승인된 계획에 반영되었다.[4][5]

1941년 12월 22일, 호마 마사하루 장군의 제14군 주력부대가 링가옌 만에 상륙했다. 방어군은 해변을 사수하지 못했고, 일본군은 대부분의 목표를 확보하며 중앙 평야로 진출했다. 조나단 와인라이트 장군은 아그노 강 뒤로 철수를 요청했고, 맥아더는 자신의 방어 계획을 포기하고 WPO-3로 복귀하기로 결정했다.[6] 12월 24일, 맥아더는 마누엘 케손 대통령, 프랜시스 B. 세이어 고등판무관 등과 함께 코레히도르로 이동했다.[6] 12월 26일, 마닐라는 공식적으로 개방 도시로 선포되었다.[7]

바탄 전투는 1942년 1월 7일에 시작되어 4월 9일 극동 미군 사령관 에드워드 P. 킹 소장이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11] 킹 소장은 "여러분은 항복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제 명령에 복종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항복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졌다.[8]

2. 1. 연합군 항복

혼마 마사하루와 그의 참모들은 예상보다 거의 두 배나 많은 포로들을 맞닥뜨렸고, 이는 엄청난 물류적 과제를 야기했다. 굶주리고 병들고 부상당하고 쇠약해진 6만 명이 넘는 포로들과 전투에 휘말린 3만 8천 명이 넘는, 마찬가지로 쇠약해진 민간인 비전투원들을 수송하고 이동시켜야 했다. 혼마는 포로들과 난민들을 북쪽으로 이동시켜 자신의 코레히도르 최종 공격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했지만, 부상당하고 병들고 쇠약해진 대규모 인원을 수송할 기계화된 운송 수단이 부족했다.[15]

1941년 12월 23일, 타이완에서 파견된 필리핀 공략 주력 부대인 혼마 마사하루 중장이 이끄는 제14군이 루손섬 링가옌 만에 상륙했다. 더글러스 맥아더가 이끄는 미국 극동군(미·필리핀군)은 필리핀 방위 임무를 맡고 있었다. 맥아더는 12월 24일 마닐라를 무방비 도시로 선언한 후 마닐라에서 철수하여 바탄반도와 코레히도르 요새에 고립되었다. 일본군은 이듬해 1942년 1월 2일에 마닐라를 무혈 점령했다. 그 후 일본군은 코레히도르 요새를 공격했고, 3월 12일 맥아더는 코레히도르섬을 탈출했다.

1942년 4월 9일, 일본군은 바탄반도를 점령하면서 사망자 130명, 부상자 6808명의 손실을 냈다. 에드워드 P. 킹 소장이 이끄는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은 항복했고, 약 7만 6천 명이라는 많은 수의 포로가 발생했다. 이는 일본 측의 포로 수 예상(2만 5천 명)을 크게 웃도는 것이었다. 코레히도르 요새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농성전을 이어갔다.

2. 2. 츠지 마사노부의 개입

辻政信|쓰지 마사노부일본어는 이 전쟁을 인종 간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필리핀인들은 동포인 아시아인을 배신하고 백인 식민지주의자인 미국인 편에 섰으니 처형하라"면서 독단적으로 "대본영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위조된 포로 처형 명령을 내렸다.[63] 마츠나가 우메이치의 증언에 따르면, 辻政信|쓰지 마사노부일본어가 전화로 이마이 타케오에게 포로 처형 명령을 구두로 전달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64] 辻|쓰지일본어로부터 위조 명령을 받은 제65여단 참모들은 직통 전화로 연대장들에게 명령을 전파했고, 일부에서는 실제로 포로 처형이 발생했다.

이마이 타케오 대좌는 4월 10일 오전 11시경 제65여단 사령부 고급 참모 마츠나가 우메이치 중좌로부터 직통 전화로 "일본군은 미·필 군의 항복을 전면적으로 승낙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필 군의 투항자는 아직 정식으로 포로로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각 부대는 수중에 있는 미·필 군 투항자를 일괄적으로 사살해야 한다"는 대본영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명령을 받았지만, 이마이는 이를 거부하기로 결심하고, 서면 명령을 요구하면서 즉시 1000명 이상의 포로를 모두 석방했다. 제10독립수비대 대장 이쿠타 토라오 소장도 유사한 명령을 전달받았지만, 부하와 협의 중 부하가 이 명령이 위조임을 확인했기 때문에 실행을 중지했다.[65] 호마 중장은 이러한 명령에 대해 죽을 때까지 알지 못했고, 그의 참모장도 전후에야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63]

하지만, 이러한 위조 명령에 의한 학살을 기획한 辻政信|쓰지 마사노부일본어는 #전범재판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전범으로 체포·기소되지 않았다.[66]

3. 강제 행진

1942년 4월 9일 필리핀 바탄반도 남쪽 끝 마리벨레스에서 산페르난도까지 88km, 다시 카파스부터 오도널 수용소까지 13km를 강제로 행진하게 하였다. 전쟁 포로 70,000명이 행진 과정 중 구타를 당했고, 식량 부족으로 굶주림을 겪었으며, 행진에서 이탈한 낙오자는 총검으로 찔려 죽음을 당했다. 결국 7,000명~10,000명의 전쟁 포로들이 행진 도중에 사망했고 7만 명 중 54,000명만 수용소에 도착했으며, 나머지는 정글 속으로 도망쳤다.[92][93][94]



행군 중 촬영된 포로들. 그들은 손이 뒤로 묶여 있다.


판팅간 강 학살 현장을 강조한 바탄 매장지 발굴 지도의 일부


산 페르난도 역(팜팡가) 1942년 4월 기념비

3. 1. 일본군의 포로 호송 계획과 실태

1942년 4월 9일, 일본 제국필리핀 바탄반도 남쪽 끝 마리벨레스에서 산페르난도까지 약 88km, 다시 카파스에서 오도넬 수용소까지 13km를 강제 행진시켰다. 이 과정에서 7만 명의 전쟁 포로들은 구타와 굶주림에 시달렸고, 낙오자는 총검으로 살해당했다. 7천~1만 명이 행진 중 사망하고, 5만 4천 명만이 수용소에 도착했다.[92][93][94]

호마 마사하루 장군의 제14군은 당초 포로 수를 2만 5천 명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약 7만 6천 명의 미군 및 필리핀군 포로가 발생했다. 이는 일본군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숫자였다.[67] 일본군은 포로 수송 계획을 총공격 10일 전에 제출했지만, 포로들의 상태와 수는 예상과 크게 달랐다. 포로들은 1일치 식량만 소지했고, 중간 기착지인 발랑가까지는 하루면 도착할 것으로 예상되어 식량 보급이 필요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최대 3일이 소요되었다.

발랑가에서 산페르난도의 산페르난도역까지는 트럭 200대로 모든 포로를 수송할 계획이었으나, 대부분의 트럭이 수리 중이었고, 노획한 트럭도 코레히도르 요새 공략을 위한 물자 수송에 사용되어야 했다. 결국 마리벨레스에서 산페르난도까지 83km 구간을 장군을 포함한 절반 이상의 포로가 3일 동안 도보로 행군해야 했다. 이 구간이 바로 ''''죽음의 행진''''으로 불리게 된 구간이다.

항복 당시 미군 병사들은 이미 50%가 전상이나 말라리아로 의사의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68] 게다가 뎅기열, 이질도 만연했고, 식량도 부족했다. 미군, 필리핀군, 일본군의 식생활 차이도 문제였다. 폭염 속에서 30kg의 중무장을 한 일본군 병사들도 감시를 위해 함께 행군했지만, 약 42km의 길에서 많은 포로들이 쓰러졌다. 당시 사망자 대부분은 말라리아 감염자였다고 한다.

일본군의 초기 포로 수송 계획[69]
구간거리비고
1. 마리벨레스~발랑가약 30km도보
2. 발랑가~산페르난도약 53km트럭 200대 수송(일부만)
3. 산페르난도~카파스약 48km철도 수송
4. 카파스~오도넬약 12km도보



원래 계획대로라면 포로들은 1구간과 4구간만 걸으면 되었고, 발랑가와 산페르난도에는 야전병원을 설치하고, 그 외 몇 킬로미터마다 구호소와 휴식소를 설치하여 부상병을 치료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포로가 발생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결국 오도넬 포로 수용소에서도 열악한 환경, 식량, 의약품, 물 부족으로 수만 명(미군은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이는 전후 재판의 대상이 되었다.

3. 2. 포로에 대한 대우

1942년 4월 9일, 필리핀 바탄반도가 일본군에 함락된 후, 포로들은 마리벨레스와 바가크 마을에 집결되어 소지품을 넘겨주도록 강요받았다. 미군 중위 커밋 레이는 일본군이 포로들을 논밭으로 끌고 가 수색했으며, 이 과정에서 보석을 빼앗고 폭행을 가했다고 회고했다. 또한 일본 기념품과 돈을 소지한 장교와 병사 두 명을 총살했다고 증언했다.[13]:37

포로들 사이에서는 일본군에게 빼앗길 것을 우려하여 일본 돈이나 기념품을 숨기거나 파괴해야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13]:37 미군 병사 버트 뱅크는 일본군이 포로의 반지를 빼앗으려다 실패하자 마체테로 손목을 자르고, 저항하는 포로를 총검으로 찔렀다고 증언했다.[14]

포로들은 4월 10일 마리벨레스, 4월 11일 바가크에서 출발하여 필라르(바탄)에서 합류, 산 페르난도 철도역으로 향했다. 각 그룹은 100명씩, 일본군 경비병 4명과 함께 배치되었다.[8] 초기에는 일본 장교와 병사들이 음식과 담배를 나눠주고 소지품 보관을 허용하는 등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노터데임 대학교 출신 미식축구 선수의 반지를 빼앗았던 일본군 경비병이, 나중에 USC 출신 일본 장교가 그의 운동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돌려준 일도 있었다. 그러나 곧 잔혹 행위, 절도, 금니를 뽑는 행위 등이 이어졌는데, 이는 바탄 전투에서 고통받았던 일본군 병사들이 포로에 대한 혐오와 증오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15]

츠지 마사노부 대령[16]은 필리핀 장교와 부사관 약 350~400명을 즉결처형 (판팅간 강 학살)했으며,[30][17] 혼마 장군의 뜻에 반하여 모든 미국 "포로"들을 즉결처형하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다.[15] 일부 일본 장교들은 명령을 무시했지만, 다른 장교들은 전쟁 포로들을 살해하는 데 동의했다.[18]

행군 중 포로들은 음식과 물을 거의 받지 못했고, 심한 신체적 학대를 당했다.[4][24][19] "햇볕 쬐기" 고문이 일반적이었는데, 포로들은 모자 없이 직사광선 아래 앉아 있어야 했다. 물을 요구하면 총살당했고, 옷을 벗거나 시원한 물 근처에 앉도록 강요받기도 했다.[13]:40 트럭이 쓰러진 사람들을 짓밟았고,[20][21][22] "청소반"이 약해진 사람들을 죽였다.[4][23]

발랑가에 도착한 포로들은 과밀하고 열악한 위생 상태로 인해 이질 등 질병이 확산되었다. 일본군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았고, 미군 의료진은 물품 부족 상태에서 환자와 부상자를 돌봤다.[24] 산 페르난도 철도역에서 포로들은 섭씨 약 43.3°C의 더위 속에서 카파스까지 1시간 동안 금속 짐칸에 갇혀 이동했다. 짐칸에는 최소 100명의 포로들이 밀어 넣어졌고, 위생 시설도 없어 질병이 심각했다. 알프 라르손 상사는 사람들이 기차 안에서 죽어갔다고 증언했다.[13]:45

카파스 기차역에서 캠프 오도넬까지 약 14.48km를 걸어가야 했다.[24] 캠프 오도넬에서도 하루에 수백 명씩 사망하여 최대 2만 명의 미국인과 필리핀인이 사망했다.[25] 대부분은 철조망 뒤에 판 대규모 무덤에 매장되었다.[26] 약 8만 명의 전쟁포로 중 5만 4천 명만이 캠프 오도넬에 도착했다.[27]

마리벨레스에서 산 페르난도, 카파스에서 캠프 오도넬까지 행군의 총 거리는 약 96.56km 에서 약 112.01km 로 추정된다.[11][27][31][28] 이 강제행군은 연합국 군사 위원회에 의해 일본 전쟁 범죄로 판결되었다.[19]

辻정신은 이 전쟁을 인종 간 전쟁으로 규정하고, 필리핀인들이 아시아인을 배신하고 미국 편에 섰다며 처형하라는 위조 명령을 내렸다.[63] 이마이 타케오 대좌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포로들을 석방했지만,[65] 다른 부대에서는 포로 처형이 발생했다.

일본군의 포로 수송 계획은 예상과 크게 달랐다. 포로들은 1일치 식량만 휴대했고, 발랑가까지 1일 이동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최장 3일이 걸렸다. 트럭 부족으로 포로들은 마리벨레스에서 산페르난도까지 83km를 도보로 행군해야 했다.

미군 병사들은 항복 당시 이미 지쳐 있었고, 말라리아, 뎅기열, 적리가 만연했다. 식량 부족과 폭염 속 행군으로 많은 포로들이 쓰러졌다.

초기 포로 수송 계획
구간거리비고
1. 마리벨레스~발랑가약 30km
2. 발랑가~산페르난도약 53km트럭 200대 수송(일부만)
3. 산페르난도~카파스약 48km철도 수송
4. 카파스~오도넬약 12km



일본군은 포로를 경멸하는 사상을 가졌고,[70] 부하에 대한 폭력적인 처벌이 관습이었기 때문에 포로에게도 폭력을 휘두르고 살해했다.[71] 포로들은 식량과 물 부족, 과밀한 수용 환경, 용변 문제 등으로 고통받았다.[73]

약 7만 6천 명의 포로 중 약 5만 4천 명만이 수용소에 도착했고, 약 7천 명에서 1만 명이 사망했다. 미군 사망자는 2300명으로 기록되었다.

4. 전후

미국 정부는 1944년 1월 27일 탈출한 군 장교들의 진술을 공개하며 바탄 죽음의 행진에 대해 대중에게 알렸다.[36] 라이프 잡지에 관련 기사가 실리면서,[37][38] 이 사건과 일본군의 만행은 미국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39] 조지 마셜 장군은 일본의 야만성을 비판하며, 일본 국민의 미래는 그들의 야만적인 본능 극복 여부에 달려있다고 경고했다.[40]

바탄 사망 행군 소식은 이 포스터처럼 미국에서 공분을 일으켰다.


1942년 4월 9일자 신문에 보도된 바탄 함락 후 캘리포니아주 헤이워드의 신문 가판대


일본군은 ''마닐라 타임스(The Manila Times)''를 통해 수감자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했으며, 사망률은 미군 지휘관들의 책임이라고 반박했다.[41]

2010년 9월 13일, 오카다 가쓰야 일본 외무대신은 레스터 테니와 로버트 로젠달을 포함한 6명의 전직 미군 포로들에게 사과했다.[51]

뉴멕시코주 라스 크루세스의 재향군인 기념공원에 있는 필리핀과 미국 군인들을 기리는 바탄 사망 행군 기념비

4. 1. 전범 재판

1945년 9월, 혼마 마사하루는 연합군에 체포되어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42] 그는 43개의 별개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판결은 이를 구분하지 않아 그가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는지 여부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43] 혼마는 자신의 부하들이 "잔혹한 잔학 행위 및 기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허용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44] 바탄 함락코레히도르 점령에 힘썼던 혼마 장군은 바탄 죽음의 행진의 높은 사망자 수를 사건 두 달 후까지 알지 못했다고 변호했다.[45] 혼마에 대한 유죄 판결은 ''상관책임'' 원칙에 근거했지만, 후자는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책임 기준이 적용되었다.[46] 그는 1946년 2월 26일 사형(총살)을 선고받고 4월 3일 마닐라 외곽에서 처형되었다.[42]

마닐라 일본 전범 재판, 1945


포로 학살을 직접 명령했던 츠지 마사노스케는 전쟁이 끝나자 영국 당국을 피해 태국에서 중국으로 도망쳤다.[47] 혼마의 부하 두 명, 가와네 요시타카 소장과 히라노 쿠라타로 대령은 1948년 혼마 재판에서 제출된 증거를 사용하여 요코하마의 미군 군사위원회에서 기소되었다. 그들은 사형(교수형)을 선고받고 1949년 6월 12일 스가모 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48][49][50]

제2차 세계 대전 후 마닐라 군사재판과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제14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와 포로 수송 책임자였던 제14군 병참감 가와네 요시아키 소장은 죽음의 행진 책임자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바탄 함락 후 포로에 대한 인도적인 대우를 명령했고, 인도주의자로서 미국 측 기록에도 인정되었던 혼마였지만,[75] 전시 중 부하들의 포로에 대한 가혹한 대우와 잔혹 행위를 몰랐다는 것은 사실이며, 군사재판에서 처음으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허위 살해 명령을 내려 학살을 저질렀다고 알려진 쓰지 마사노부 중좌는 종전 시 방콕에서 승려로 변장하여 잠적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중화민국을 거쳐 1948년 5월 일본에 귀국, 몇몇 전 고급 장교들에게 숨겨져 전쟁 범죄 추적을 피했다. GHQ는 츠지를 전범 용의자 체포 명단에서 삭제하고, 츠지를 GHQ 참모 제2부(G2)의 에이전트로 이용하여, 결국 츠지가 전범으로 체포·기소되는 일은 없었다.[76]

4. 2. 일본 측의 반론과 생존자들의 반박

미국 정부는 1944년 1월 27일이 되어서야 탈출한 군 장교들의 진술을 공개하며 이 행군에 대해 대중에게 알렸다.[36] 얼마 후, 이 장교들의 이야기는 라이프 잡지에 실렸다.[37][38] 바탄 사망 행군과 일본군의 다른 만행은 미국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는 데 이용되었다.[39]

이에 맞서 일본군은 ''마닐라 타임스(The Manila Times)''에 수감자들이 인도적으로 대우받았고, 사망률은 미군 지휘관들의 완고함 때문이라고 보도했다.[41]

다음은 일본 측의 반론과 이에 대한 생존자들의 반박이다.

  • 미국이 식량 여유가 있었음에도 항복하지 않은 것이 문제이며, 일본은 최선을 다해 포로 대책을 실시했다.[77]
  • 포로들을 비교적 식량 보급이 용이한 지역으로 도보 이동시켜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즉 살리기 위한 행군이었다.[78]
  • "포로의 수가 너무 많았다"[79], "일본군도 전투로 지쳐 무거운 짐을 지고 행군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많은 미국인 포로들이 쓰러진 것은 "방종"[80]·"군의 상식 차이"[81] 때문이다.
  • "행군 거리는 하루 평균 14km로 그다지 장거리가 아니다"[82]라는 의견이 있다. 저널리스트 사사 유키에는 영양실조 상태였던 자신(여성)이 실제로 같은 경로를 수일간 걸어서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을 근거로 들며, 『문예춘추』에 「바탄 사망 행진」 혼자서 완주」라는 르포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 르포에 대해 당시 행군에 참여했던 미국인 생존자 레스터 테니는 같은 『문예춘추』에 "전제 조건의 차이"·"사실의 잘못된 인식"에 대해 강력한 반론을 제기했다. 사사는 건강이 완전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숙박·식사 모두 충분한 조건이었던 사사와 달리 당시 포로들은 건강 상태가 매우 심각했고, 식사, 휴식, 수면 등이 혹독한 상황이었으며, 수분 보충도 충분히 할 수 없었고, 물을 마시려고 하다가 살해당한 사람도 있었다고 반박하며, 자신들이 일본군에게 받았던 격렬한 폭력에 대해서도 언급했다.[84]
  • 일본군이 티타임까지 제공하며 행군을 했고, 진료 행위도 실시했다[85]는 점에서 인도적이었다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이 차와 식량 배급에 대한 이야기는 미국 측 증언에도 있지만, 오히려 충분하지 않았던 예로 기록되어 있다.[86]
  • 땡볕 아래서 걷다가 지친 포로들을 본 일본군은 이에 동정하여 적지만 죽을 쑤어 나눠주었고, 호마 마사하루 중장은 가능한 한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포로들을 저녁과 새벽에만 이동시키는 등의 배려가 이루어졌고, 일본군과 포로들은 거의 같은 식사를 했다.[87]


기시모토 다카아키는 필리핀에 있었던 구 일본군 병사의 증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88]

제2차 바탄 공략전에 참가했던 구 일본군 병사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79]

제65여단 보병 제141연대장 이마이 타케오는 다음과 같이 당시 일본군의 상황에 대해 증언하며 반론하고 있다.[80]

4. 3. 한일 관계 및 추모

2010년 9월 13일, 일본 외무대신 오카다 가쓰야는 일본군 포로였던 6명의 전직 미국 군인들에게 사과했다. 여기에는 90세의 레스터 테니와 바탄 사망 행군 생존자인 로버트 로젠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6명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사망한 두 명의 군인 가족은 일본 정부의 비용으로 일본을 방문하도록 초청받았다.[51]

일본 민간단체인 POW 연구회는 2002년부터 연합군 포로 대우 실태 조사와 전직 포로들과의 교류를 진행하여 바탄 행진 생존자들의 일본 방문도 성사시켰다.[89] 2009년 5월, 후지사키 이치로 주미대사가 바탄 행진 생존자 단체인 "전미 바탄·코레히도르 방위병회" 연차 총회에 참석하여 일본 정부를 대표하여 바탄 사망 행군에 대해 사죄하였다. 2010년 9월 13일에는 오카다 가쓰야 외무대신이 전직 포로들과 외무성에서 면담하고 사죄하였다.[90]

바탄 사망 행군은 뉴멕시코주에 큰 영향을 미쳤다.[54] 바탄에 있던 많은 미군 병사들이 특히 주방위군 제200 해안포병대와 제515 해안포병대 출신 뉴멕시코 주민이었기 때문이다.[55] 뉴멕시코 주방위군 바탄 기념 박물관은 1941년 필리핀으로 파병되기 전 제200 및 제515 해안포병대 병사들이 집결했던 무기고에 위치해 있다.[56] 뉴멕시코주의 구 주청사 건물은 바탄 기념 건물(Bataan Memorial Building)로 이름이 바뀌었고, 현재 여러 주정부 기관 사무실이 들어서 있다.[57]

매년 이른 봄에는 화이트샌즈 미사일 기지에서 바탄 기념 사망 행군(Bataan Memorial Death March)이라는 마라톤 길이(약 42.2km)의 행군/달리기 행사가 열린다.[58][59] 2017년 3월 19일에는 28회 연례 행사에 6,300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출발선에 줄을 서서 이전 참가 기록을 경신했으며, 지역 식품 저장소에 기증될 비상식량과 기타 자선 물품 또한 이전 기록을 넘어섰다.

제200 및 제515 해안포병대는 총 1,816명의 병력을 보유했으며, 이 중 829명이 전투 중, 포로로 잡힌 후 또는 해방 직후 사망했다. 생존자는 987명이었다.[60] 2017년 3월 기준으로 이들 참전 용사 중 생존자는 단 4명에 불과했다.[61]

디에고가르시아 섬에는 많은 필리핀 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어 매년 추모 행진이 열린다. 날짜는 다르지만, 행진 참가자들은 오전 6시경 마리나에서 보트를 타고 바튼 포인트로 이동하여 남쪽의 농장 유적지까지 행진한다. 추모 행진은 필리핀 노동자들, 영국 왕립 해병대, 영국 왕립 군사 경찰, 그리고 섬 전역의 여러 부대 소속 미국 수병들이 함께 진행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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