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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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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탄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제국이 필리핀을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투로, 1942년 4월 9일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 이후 필리핀을 전진 기지로 확보하기 위해 침공을 시작했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하에 미군과 필리핀군은 바탄 반도에서 방어전을 펼쳤다. 그러나 보급 부족과 열세한 전력으로 인해 결국 항복했고, 약 7만 5천 명의 포로들은 바탄 죽음의 행군을 겪었다. 바탄 전투는 일본군의 필리핀 점령을 가져왔지만, 연합군에게는 시간을 벌어주는 결과를 낳았으며, 필리핀에서는 용기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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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바탄 전투
전체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날짜1942년 1월 7일 – 1942년 4월 9일 (3개월 2일)
장소필리핀 루손 섬의 마닐라 만 근처 바탄 반도
결과일본군의 승리, 바탄 죽음의 행진으로 이어짐
교전 세력
교전국 1
지휘관
지휘관 1더글러스 맥아더
조나단 M. 웨인라이트
조지 M. 파커
에드워드 P. 킹
앨버트 M. 존스
윌리엄 브로허
클리퍼드 블루멜
클라이드 A. 셀렉
클린턴 피어스
루터 R. 스티븐스
비센테 림
마테오 카핀핀
피델 세군도
기예르모 B. 프란시스코
지휘관 2혼마 마사하루
모리오카 스스무
키타지마 키네오
나가노 카메이치로
쓰치하시 유이치
하마사키 다케시
병력 규모
병력 1미국 및 필리핀군 120,000명
병력 2일본군 75,000명
사상자 및 피해 규모
사상자 1106,000명
10,000명 사망
20,000명 부상
76,000명 포로
사상자 28,406–22,250명
3,107명 사망
230명 실종
5,069명 부상
관련 정보
관련 전투필리핀 전역 (1941-42)의 일부
죽음의 행진
기타 정보
필리핀 제도 일본 탱크 전체
루손의 바탄 반도에서 진격하는 일본군 탱크 부대

2. 전투 배경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의 일부인 바탄 전투는 일본 제국필리핀 침공 과정에서 벌어진 중요한 전투이다. 1936년부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 방어 준비를 이끌었으나, 1941년 12월 일본의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당시 필리핀 방어를 위해 수립된 기본 계획은 WPO-3으로, 유사시 마닐라 만 입구를 사수하고 일본 해군의 접근을 막는 것이 핵심이었다. 만약 적의 공세가 거셀 경우, 방어군은 마닐라 만 장악의 전략적 요충지인 바탄 반도로 철수하여 최후까지 항전하도록 되어 있었다.[8]

그러나 맥아더는 이 계획을 수정하여 필리핀 군도 전체를 방어하는 보다 적극적인 전략을 추진했다.[9][8] 하지만 일본군의 예상보다 빠른 진격과 제공권 상실로 인해 초기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결국 기존 계획대로 주력 부대를 바탄 반도로 철수시키는 결정이 내려졌다.[6] 이 급작스러운 철수 과정에서 병력과 물자 이동에 혼선이 발생했으며, 특히 바탄 반도에서 장기전을 대비하기 위한 식량 및 보급품 확보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10][6] 이러한 배경 속에서 미군과 필리핀군은 열악한 조건 아래 바탄 반도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

2. 1. 맥아더 장군의 필리핀 방어 계획

1936년, 더글러스 맥아더필리핀군 원수로 임명되어 1946년 독립 전까지 효과적인 방어군을 개발하는 임무를 맡았다. 미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 장군은 필리핀을 방어 가능한 지역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여 참전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맥아더는 1942년 4월까지 전투 준비가 된 병력을 훈련하고 장비를 갖출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1941년 7월 26일, 맥아더는 미국 육군으로 복귀하여 중장 계급을 받았다. 같은 해 8월, 맥아더는 10개 예비 사단 각각에서 1개 연대씩을 소집하여 미군에 편입시켰다. 11월 27일에는 일본과의 적대 행위 가능성에 대한 통보를 받았다. 적대 행위가 시작된 지 10일 후인 12월 18일, 맥아더는 나머지 예비군을 소집했다. 당시 필리핀군은 약 12만 명이었고, 이 중 7만 6,750명이 루손에 주둔했다.

맥아더가 현역으로 복귀했을 당시 필리핀 방어를 위한 최신 계획은 1941년 4월에 완료된 WPO-3이었다. 이는 1938년 육군-해군 합동 오렌지 작전 계획에 기반한 것으로, 미국과 일본 간의 전쟁 발발을 상정한 계획이었다.[8] WPO-3에 따라 필리핀 주둔군은 마닐라 만 입구를 사수하여 일본 해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막고, 지상군은 적의 상륙을 저지해야 했다. 만약 적에게 밀릴 경우, 마닐라 만 장악의 핵심인 바탄 반도로 철수하여 "마지막 극한까지" 방어하도록 되어 있었다.[8] 방어는 정규 미군 병력 외에도 맥아더 장군이 조직하고 훈련시킨 필리핀 육군에 의존했다.[8] 그러나 1941년 4월, 미 해군은 태평양 함대가 태평양을 건너 지원하는 데 최소 2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고, 육군 계획자들 역시 6개월 이내에 보급품이 고갈되어 주둔군이 함락될 것으로 보았다.[8]

맥아더는 1941년 7월 연합군 사령관직을 맡으면서 WPO-3을 패배주의적이라며 거부하고, 더 공격적인 방어 전략을 선호했다.[9] 그는 필리핀 군도 전체를 방어하는 해안 방어 전략을 제안했고, 이는 워싱턴의 승인을 받아 레인보우 5 작전 계획으로 채택되었다.[8] 이 계획은 전 군도를 방어하고, 예상 상륙 지점 후방에 보급품을 분산 배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이후 오렌지 작전 계획 3으로 복귀하면서, 바탄으로 철수할 경우를 대비한 6개월 치의 충분한 보급품을 확보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10]

1941년 12월 24일, 호마 마사하루 장군이 이끄는 일본 제14방면군이 진격하고 조나단 M. 웨인라이트 장군의 북루손 부대가 후퇴하자, 맥아더는 자신의 극동 공군 사령부를 바탄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이로 인해 루이스 H. 브레레톤은 클라크 공군기지, 니콜스 기지, 윌리엄 맥킨리 요새, 닐슨 기지를 포기하고 필라르, 바탄 비행장, 캅카벤, 마리벨레스의 자갈 활주로로 옮겨갔다. 연말까지 바탄에는 미군 1만 5,000명, 필리핀군 6만 5,000명, 그리고 난민 2만 6,000명이 모였다. 군수품은 충분히 저장되거나 운송되었지만, 식량은 약 2개월 치만 확보되어 전쟁 전 계획했던 6개월 치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6] 극동 공군의 마지막 조정된 작전에서 미군 항공기는 일본 수송선 2척과 구축함 1척에 피해를 입히고 기뢰 제거함 1척을 격침시켰으나, 이러한 공습과 해상 작전은 일본군의 공격을 크게 지연시키지는 못했다.[7]

3. 전투 경과

1941년 12월, 일본군필리핀 침공을 개시하여 루손섬 곳곳에 상륙했다.[8] 초기 방어 계획을 고수하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일본군의 예상보다 강력한 공세와 신속한 진격에 직면하자, 기존의 해안 방어 계획을 포기하고 오렌지 계획(WPO-3)에 따라 바탄 반도로 후퇴하여 장기 방어전을 준비하기로 결정했다.[8] 이에 따라 웨인라이트 장군의 북루손 부대와 파커 장군의 남루손 부대는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며 질서정연하게 바탄 반도로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마닐라는 파괴를 막기 위해 12월 26일 개방 도시로 선포되었고, 마누엘 L. 케손 대통령과 정부는 코레히도르 섬으로 이전했다.[8]

1942년 1월 초, 미군과 필리핀군으로 구성된 USAFFE 병력은 바탄 반도에 집결하여 아부카이 방어선과 마우반 방어선을 구축했다.[6] 일본군 제14군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의 지휘 아래 바탄 반도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1월 9일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공세는 나라 아키라 중장이 이끄는 제65여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연합군은 격렬하게 저항했다.[6] 특히 아부카이 방어선과 마우반 방어선, 그리고 이후 벌어진 "포인트 전투"와 "포켓 전투" 등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6] 연합군은 알렉산더 R. 니닌저 중위, 나르시소 오르틸라노 병장, 윌리벌드 C. 비앙키 중위 등 많은 장병들의 용맹한 분전에도 불구하고[14][18] 점차 방어선이 돌파당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예상외의 완강한 저항과 지형적 어려움, 그리고 일본군 자체의 보급 문제와 질병, 병력 손실 누적으로 인해 일본군의 초기 공세는 큰 피해를 입고 2월 말경 교착 상태에 빠졌다. 혼마 장군은 공세를 일시 중단하고 증원 병력과 보급을 기다리며 전열을 재정비해야 했다.[6]

3. 1. 일본군의 상륙과 초기 공세

1941년 12월 10일과 12일, 일본군루손섬의 남북 양 끝에 첫 상륙을 시도했다.[8] 당시 필리핀 방어를 총괄하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이 상륙이 주력 공격이 아니라, 추후 작전을 위한 비행장 확보 목적의 사전 작업이라고 정확히 판단했다. 그는 일본군이 이들 교두보에서 마닐라로 직접 진격할 의도는 없다고 보았기에, 해안에서 총력 방어로 맞선다는 기존의 방어 계획을 고수했다.[8]

12월 20일, 미 해군 잠수함 USS 스팅레이(SS-186)는 호마 마사하루 중장이 지휘하는 대규모 일본군 상륙 부대를 발견했다. 이 부대는 수송선 85척, 전함 2척, 순양함 6척, 구축함 24척으로 구성된 강력한 함대였다.[11] 미 해군은 스팅레이, 소리(SS-189), 샐먼(SS-182) 등 세 척의 잠수함을 동원해 이 함대를 요격하려 했다. 여러 발의 어뢰를 발사했지만, 당시 미 해군이 사용하던 마크 14 어뢰의 신관 결함 문제로 대부분의 어뢰가 목표물에 명중하고도 폭발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 구축함의 추격으로 미 잠수함들은 후퇴해야 했으며, 이 공격으로 침몰시킨 일본 수송선은 단 두 척에 불과했다.[11]

한편, 미국 육군 항공대극동 공군(Far East Air Force)은 마지막으로 조직적인 공습 작전을 펼쳐 일본군 수송선 2척과 구축함 1척에 손상을 입히고 기뢰 제거함 1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미군의 공중 및 해상에서의 제한적인 반격은 일본군의 상륙 작전을 지연시키거나 저지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7] 일본 제14방면군은 예정대로 루손섬에 상륙하여 진격을 개시했다.[6]

3. 2. 바탄 반도로의 후퇴

1942년 1월 2일, 일본군이 마닐라를 점령하고 도시 파괴를 막기 위해 개방 도시로 선포함.


더글러스 맥아더는 자신의 부대가 장비와 보급품을 가지고 방어 위치로 질서정연하게 이동하기를 원했다. 그는 웨인라이트 사령관 휘하의 북루손 부대에게 주요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바탄으로 가는 도로를 남루손 부대(조지 M. 파커 소장)가 사용할 수 있도록 유지하라고 명령했다. 남루손 부대는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질서정연하고 빠르게 이동했다. 이를 위해 웨인라이트는 WPO-3에 따라 5개의 방어선을 배치했다.

웨인라이트의 방어선 (WPO-3)
방어선위치
D1아길라르 ~ 산 카를로스 ~ 우르다네타
D2아그노 강(Agno River)
D3산타 이그나시오(Santa Ignacia) ~ 헤로나 ~ 구임바(Guimba) ~ 산호세
D4타를락(Tarlac) ~ 카바나투안(Cabanatuan)
D5밤반(Bamban) ~ 시불 스프링스(Sibul Springs)



2차 세계 대전 제1방어선 기념비(필리핀)]]
혼마의 제14군 주력 부대는 12월 22일 아침 링가옌 만(Lingayen Gulf)에 상륙했다. 방어군은 해변을 지키지 못했다. 그날이 끝날 무렵, 일본군은 대부분의 목표를 확보하고 중앙 평야로 진출할 위치를 확보했다.[8] 혼마의 부대와 맞선 것은 제21사단, 제71사단, 제11사단, 제91사단의 네 개 필리핀 사단과 몇 대의 탱크 지원을 받는 필리핀 스카우트 대대였다.[11] 마닐라로 직접 이어지는 3번 국도를 따라 일본군은 곧 필리핀 제71사단과 접촉했다.[11] 이 시점에서 미군 포병의 공격이 일본군의 공격을 잠시 저지했으나, 일본군의 전투기와 탱크가 투입되면서 필리핀 보병은 격파되었고 포병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8] 두 번째 일본 사단이 12월 23일 마닐라 남쪽의 라몬 만(Lamon Bay)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진격했다.[12]

웨인라이트는 일본군의 진격을 더 이상 막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12월 23일 오후 늦게 웨인라이트는 마닐라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링가옌 해변의 추가 방어가 "실행 불가능하다"고 알렸다. 그는 아그노 강 뒤로 후퇴할 허가를 요청했고 이를 받았다.[8] 맥아더는 아그노 강 방어선에서 필리핀 사단을 투입해 반격하거나, 계획된 단계에 따라 바탄까지 완전히 후퇴하는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는 결국 후자를 선택하여 기존 방어 계획(WPO-3)을 포기하고 구식 오렌지 계획으로 되돌아갔다. 바탄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한 맥아더는 12월 23일 밤 모든 부대 사령관에게 "WPO-3가 발효된다"고 통보했다.[8]

한편, 필리핀 공화국의 대통령인 마누엘 케손은 가족과 정부 직원들과 함께 12월 24일 밤 맥아더의 극동 주둔 미국 육군(USAFFE) 사령부와 함께 코레히도르(Corregidor)로 대피했고, 모든 USAFFE 군사 인원은 주요 도시 지역에서 철수했다. 12월 26일 마닐라는 공식적으로 개방 도시로 선포되었고, 맥아더의 선포는 신문에 발표되고 라디오로 방송되었다. 일본은 공식적으로 이 선포에 대해 통보받지 못했지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다음날부터 일본군은 바탄과 코레히도르로 보급품이 수송되고 있는 항구 지역을 폭격하기 시작했다.[8]

1942년 1월 2일~6일, 바탄으로 가는 라야크 교차로 접근로 방어


맥아더가 남루손 부대를 바탄 반도에 집중시키고 방어 위치를 준비하는 동안, 북루손 부대는 북쪽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일본 제14군의 주력 6만 명은 마닐라 점령에 집중했다. 따라서 바탄으로 직접 진격한 것은 강화된 일본 연대 두 개, 즉 제9보병 연대와 제2포르모사 보병 연대뿐이었다.[6]

역사적 표지석 (1942년 1월 6일)


1942년 1월 초, 윌리엄 E. 브로어 준장이 이끄는 제11사단과 마테오 카핀핀 준장이 이끄는 제21사단은 제26기병연대(필리핀 스카우트)의 지원을 받아 구아구아(Guagua)-포락(Porac) 방어선에서 지연 작전을 수행했다. 1월 2일 오후부터 일본군 제9보병사단이 포락에서 제21사단을 남쪽으로 밀어붙였고, 제21사단은 1월 4일까지 구마인 강(Gumain River) 남쪽의 새로운 방어선까지 후퇴해야 했다. 1월 3일부터 일본군 제2대만보병사단이 구아구아에서 제11사단을 남쪽으로 밀어붙여 루바오(Lubao)를 거쳐 1월 5일까지 구마인 강까지 후퇴시켰다. 1월 5일과 6일, 제21사단과 제11사단은 쿨로 강(Culo River)을 건너 바탄(Bataan)으로 들어갔다.[6]

클라이드 A. 셀렉 준장은 라야크 교차로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는 아부카이 방어선을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수일 동안 해당 위치를 사수해야 하는 중요한 임무였다. 셀렉은 이 임무를 위해 미군 제31보병연대와 스카우트 제26기병연대(필리핀 스카우트), 그리고 제71사단 소속 필리핀 제71, 72보병연대 등 4개 연대를 배속받았다. 이 부대들은 1월 3일에 그 위치를 점령했고, 1월 6일에는 이마이 히후미가 지휘하는 이마이 부대의 공격을 받았다. 그날 일본군 병력이 증강되자, 셀렉은 파커의 허가를 받아 야간에 철수했다.[6]

3. 3. 바탄 방어전

1942년 1월 9일~23일 아부카이 방어선


바탄 반도에는 두 개의 주요 방어선이 구축되었다. 서쪽에는 제1 필리핀 군단이 방어하는 약 약 7315.20m 길이의 마우반 방어선이 있었고, 동쪽에는 제2 필리핀 군단이 방어하는 약 약 13716.00m 길이의 아부카이 방어선이 있었다. 웨인라이트는 22,5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제1 필리핀 군단을 지휘했으며, 이 군단은 피델 세군도(Fidel Segundo) 장군의 제1 정규 사단, 클리포드 블루멜(Clifford Bluemel) 준장의 제31사단, 루터 R. 스티븐스(Luther R. Stevens) 준장의 제91사단, 그리고 제26기병대 (PS)로 구성되었다. 조지 M. 파커 주니어(George M. Parker Jr.)는 25,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제2 필리핀 군단을 지휘했으며, 여기에는 제11사단과 제21사단, 비센테 림(Vicente Lim) 준장의 제41사단, 앨버트 M. 존스(Albert M. Jones) 준장의 제51사단, 그리고 제57 보병 연대 (PS)가 포함되었다. 고사포 방어는 제515 해안포병대와 제200 보병 연대가, 전차 지원은 제192 전차 대대와 제194 전차 대대가 맡았다. 반도 중앙에는 나티브 산(Mount Natib) [약 약 1286.87m]과 실라나간 산(Mount Silanganan) [약 약 1103.38m]이 솟아 있어 두 군단을 분리시켰다. 지휘관들은 이 험준한 산악 지형을 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두 군단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을 유지하지 않았는데, 이는 방어상의 심각한 약점으로 작용했다.[6]

연합군은 나라 아키라 중장이 이끄는 제65 여단과 맞섰다. 원래 제48사단이 자바로 파병되면서 제65 여단은 주둔 임무만 맡을 예정이었으나, 예상과 달리 바탄 공격의 주력이 되었다. 일본군은 바탄에 약 23,222명의 병력을 투입했으며, 이에 맞서는 연합군은 약 1만 5천 명의 미군과 6만 5천 명의 필리핀군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월 10일, 더글러스 맥아더는 리마이에서 아부카이까지 이어지는 동쪽 도로를 따라 바탄의 병력을 방문하여 사기를 높이고자 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여기 누구든지 부활절까지 마닐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데 50달러를 걸고 싶은 사람 있습니까?"라고 말하며 격려했다.[6] 나라 중장의 제2 군단 공격 계획은 동쪽 날개에 제141 보병 연대를 배치하여 제57 보병 연대 (PS)를 상대하고, 서쪽 측면에는 제9 보병 연대를 배치하여 제2 군단의 좌익을 압도하려는 것이었다. 예비대로는 제142 보병 연대를 두었다.[6]

upright


1942년 1월 18일~25일 마우반 방어선 위치


1월 9일, 나라는 제57 보병 연대 (PS)에 대한 집중 공격을 시작하여 1월 11일에는 주 저항선에 도달했다. 1월 12일까지 파커는 예비 부대인 제21 보병 연대를 투입하여 제57 보병 연대 (PS)를 지원해야 했다. 같은 날, 비르힐리오 N. 코르데로 주니어(Virgilio N. Cordero Jr.) 준장의 제52 보병 연대는 제51사단 우익에 발생한 방어선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전진 배치되었다. 1월 14일에는 블루멜의 제31사단이 웨인라이트의 제1군단에서 파커의 제2군단으로 이동하여 제41사단을 지원하려 시도했다. 마리벨레스산의 시그널 힐에 주둔한 맥아더의 참모차장 리처드 J. 마샬은 제1군단과 제2군단 사이의 간격을 우려하여, 스카우트 제45 보병 연대 (PS)와 미군 제31 보병 연대로 구성된 맥슨 S. 로프 준장의 필리핀 사단을 최전선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6]

1월 12일, 격렬한 전투 중 제57 보병 연대 (PS) 소대장이었던 알렉산더 R. 니닌저 중위는 소총과 수류탄만으로 적 참호로 돌격하여 부대가 아부카이 하시엔다를 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 과정에서 전사했다. 그의 용맹한 행동으로 사후에 명예훈장이 수여되었다. 필리핀 병사 나르시소 오르틸라노(Narciso Ortilano) 역시 뛰어난 용기를 보여주었다.[14] 그는 수냉식 중기관총을 운용하던 중, 갈대밭에서 만세 돌격을 감행하는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했다. 기관총이 고장나자 콜트 .45 권총으로 5명을 더 사살했고, 일본군 병사가 총검으로 찌르려 하자 총을 붙잡는 과정에서 엄지손가락이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적의 가슴을 찔렀다. 또 다른 일본군 병사가 총검으로 공격하자 소총으로 사살했다. 오르틸라노는 이 공로로 수훈십자장을 받았다.[14][6]

1월 15일, 맥아더는 부대에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에서 지원군이 오고 있다. 수천 명의 병력과 수백 대의 항공기가 파견되고 있다. 이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우리 부대가 버티는 것이 필수적이다.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다."[6]

1월 16일, 존스의 제51사단은 파커의 명령에 따라 반격을 시도했지만, 일본군 제141 보병 연대의 정면 공격과 좌익의 제9 보병 연대 공격에 직면하여 실패했다. 아부카이 방어선에 구멍이 뚫렸으나 일본군은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대신 제141 보병 연대는 방향을 바꿔 제41사단을 공격했고, 제9 보병 연대는 나티브 산으로 후퇴했다. 제51사단 좌익에 있던 존 R. 보트라이트(John R. Boatwright)의 제53 보병 연대는 남쪽으로 후퇴하여 제1군단과 접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날 제51사단은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했지만, 림의 제41사단은 방어선을 굳건히 지켰다. 1월 18일까지 일본군은 공격을 중단했고, 나라의 제7 전차 연대와 4개 포병 대대가 그의 지휘에서 벗어났다.[6]

1월 17일, 맥아더는 워싱턴에 "여기 식량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무전을 보냈다. 같은 날, 제31 보병 연대는 주 방어선을 복구한 후 제11사단과 교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45 보병 연대 (PS)는 다음 날 공격에 가담했지만, 두 연대 모두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는 동안 일본군의 공세는 강화되었다. 양측의 피해가 커졌고, 1월 22일까지 필리핀 사단은 1월 19일의 위치로 후퇴했다. 더 심각한 상황은 일본군 제9 보병 연대가 나티브 산 측면을 따라 진격하여 제2군단 후방의 구이톨(Guitol)까지 내려왔다는 점이었다.[6]

한편, 서부 바탄에서는 1월 10일 일본군이 올롱가포와 그란데 섬을 점령했다. 1월 15일, 혼마는 서부 바탄의 작전 책임을 나오키 키무라 소장에게 넘겼다. 키무라 부대는 서쪽 도로를 따라 배치된 제122 보병 연대와 실라나간 산 내륙 측면에 배치된 제20 보병 연대로 구성되었다. 제31사단이 제2군단으로 이동한 후, 웨인라이트는 제1사단, 제91사단, 제26기병대 (PS)를 지휘했다. 1월 16일, 일본군은 모롱을 공격했고, 웨인라이트는 주요 방어선 뒤쪽 필라르-바가크 도로에 제72 보병 연대를 배치해야 했다. 1월 20일, 일본군 제122 보병 연대가 제1사단을 공격하는 동안 제20 보병 연대는 웨인라이트의 동쪽 측면을 돌파하여 1월 21일까지 서쪽 도로에 도로 차단선을 설치했다. 이로 인해 차단선 북쪽의 부대는 식량과 탄약 보급이 끊겼다.[6]

1월 22일, 맥아더는 "주요 전투 지역 중앙을 통한 적의 돌파"를 이유로 필라르-바가크 도로로의 철수를 명령했다. 1월 25일, 제1군단은 후퇴를 시작했다. 케네스 베리(Kenneth Berry) 대령의 지휘 아래 도로 차단선 북쪽에 있던 병력은 해안선을 따라 바가크로 이동했지만, 트럭과 포병 장비를 버려야 했다.[6]

1942년 1월 22일부터 2월 1일까지 바탄에서 이루어진 일본군 상륙 작전


이후 바탄 남서부 해안에서는 일본군의 상륙 시도와 이를 저지하려는 연합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를 "포인트 전투(Battle of the Points)"라고 부른다. 롱고스카와얀 포인트(1월 22일~2월 1일), 키나우안 포인트(1월 22일~2월 8일), 실라임-아냐산(1월 27일~2월 13일)에서 벌어진 이 전투들은 결국 일본군 제20 보병 연대 제1대대와 제2대대의 완전한 궤멸로 끝났다.[6]

제1군단의 측면을 돌파하고 USAFFE 부사령관 앨런 C. 맥브라이드(Allan C. McBride) 준장이 지휘하는 서비스 사령부 지역을 고립시키기 위해, 나리요시 츠네히로(Nariyoshi Tsunehiro) 대좌가 이끄는 제16사단 제20 보병 연대 제2대대 소속 일본군 900명이 1월 22일 밤 바탄 남부 서해안에 상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어뢰정 PT-34의 공격으로 상륙정 두 척이 침몰하고 나머지는 흩어져 목표 지점인 카이보보 포인트에 상륙하지 못했다. 약 300명은 롱고스카와얀 포인트에, 600명은 키나우안 포인트에 상륙했다. 이들은 필리핀 경찰(Philippine Constabulary) 연대, 프랜시스 J. 브리짓(Francis J. Bridget) 중령의 해군 대대, 기어리 포대의 포격, USS ''퀘일''의 지원, 제192 전차 대대의 전차, 그리고 제34 추격 비행대대 및 제21 추격 비행대대 소속 인원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클린턴 A. 피어스(Clinton A. Pierce), 마리아노 카스타녜다(Mariano Castañeda), 펠라지오 크루즈(Pelagio Cruz), 에드 다이에스(Ed Dyess), 레이 C. 헌트(Ray C. Hunt) 등이 이 전투에 참여했다. 제57 보병 연대 (PS)와 제45 보병 연대 (PS) 부대의 지원으로 일본군의 상륙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15][16][6]

해군 보병대는 제10 정찰 비행단 지상 승무원 150명, 카비테 해군 탄약고 수병 80명, USS ''캐노퍼스'' 수병 130명, 카비테, 올롱가포, 마리벨레스 기지 시설 수병 120명, 그리고 대공포대 해병 120명으로 구성되었다. 수병들은 USS ''캐노퍼스''의 기계 공장을 이용해 파손된 항공기에서 회수한 기관총을 위한 임시 거치대를 제작했다. 해병들은 여러 부대에 분산 배치되었고, 수병들은 "해병들을 지켜보고 그들이 하는 대로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수병들은 커피 가루로 흰색 제복을 염색하여 정글 전투에 적합하게 만들려 했으나, 결과는 카키색보다는 노란색에 가까웠다. 전사한 일본군 장교의 일기에는 이들을 "밝은 색 유니폼을 입고 큰 소리로 말하며 적의 위치를 드러내려는 자살 특공대"라고 묘사했다.[17]

1월 25일, 혼마는 제16사단장 모리오카 스스무 중장에게 키나우안 포인트 교두보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 200명을 파견하라고 명령했다. 1월 27일, 이 병력 역시 상륙 지점을 벗어나 아냐산(Anyasan) 강과 실라임(Silaiim) 강 사이에 상륙했다. 그들은 제17 추격 비행대대와 제2 경찰 대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1월 29일, 제45 보병 연대 (PS) 부대가 지원을 위해 도착했다. 2월 1일, 기무라 미쓰오(Mitsuo Kimura) 소좌의 제20 보병 연대 제1대대가 키나우안 포인트로 파견되어 마리벨레스 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월 2일, 기뢰부설함 ''야에야마''의 지원을 받은 상륙정에 탑승한 그의 병력 500명은 P-40 전투기, 어뢰정 PT-32, 그리고 육상 포병의 공격을 받았다. 생존자들은 실라임 포인트에 상륙하여 후퇴했다. 에드먼드 J. 릴리(Edmund J. Lilly) 중령과 해럴드 K. 존슨 중령이 제12 보병 연대와 제57 보병 연대 (PS) 부대, 그리고 제192 전차 대대 전차를 포함한 저지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2월 7일 이후 해상으로 탈출하려는 일본군의 여러 시도는 실패했으며, 마지막으로 포인트 북쪽으로 200명의 일본군이 필사적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이 역시 실패했다.[6]

1월 26일, 나라의 제65여단은 후퇴하는 필리핀군과 미군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라는 다음 방어선이 리마이(Limay)에서 마리벨레스산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오리온-바가크 방어선을 외곽 방어선으로 간주하며 진격했다. 그의 목표는 트레일 2(Trail 2)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한 후 사마트산(Mount Samat) 동쪽 기슭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었다. 나라와 맞선 것은 블루멜이 지휘하는 부대였다. 1월 27일, 나라는 제9 보병 연대와 제141 보병 연대를 이용하여 필라르 강(Pilar River) 남쪽의 제51 보병 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월 28일, 제41 보병 연대가 제51 보병 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도착했다. 전투는 며칠간 계속되었고, 1월 29일 나라는 제9 보병 연대를 제16사단으로 복귀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블루멜은 2월 2일 제41 보병 연대, 제51 전투단, 제31 공병 대대를 주력으로 반격을 결정했으며, 좌측에는 제21사단, 우측에는 제32 보병 연대의 지원을 받았다. 2월 8일, 제65여단의 공세가 막대한 손실을 입고 실패로 돌아가자, 나라는 필라르-바가크 도로 북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6]

오리온-바가크 방어선의 포켓 전투


1월 28일, 나카니시 히로시(Hiroshi Nakanishi) 소령이 지휘하는 제3대대와 요시오카 요리마사(Yorimasa Yoshioka) 소령이 지휘하는 제20 보병 연대가 제1군단의 오리온-바가크 방어선을 공격하여 투올 강(Tuol River)을 따라 제1사단 후방으로 돌파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두 개의 포켓(pocket)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약 1개 중대 규모의 소규모 포켓(Little Pocket)이었고, 다른 하나는 1,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대규모 포켓(Big Pocket)이었다. 2월 5일까지 웨인라이트는 이 포켓들을 제거하기 위해 제1사단 5개 중대, 제92 보병 대대 2개 대대, 정찰 대대 1개 대대, 경찰 대대 1개 대대, 제192 전차 대대의 전차, 그리고 제24 야전 포병 연대의 포병을 투입했다. 2월 6일, 제122 보병 연대와 제33 보병 연대 제2대대가 대규모 포켓에서 약 731.52m 이내까지 침투하면서 상부 포켓(Upper Pocket)이라는 새로운 돌출부가 형성되었다. 2월 7일, 제1사단은 소규모 포켓을 포위했고, 2월 9일까지 소탕했다. 이후 대규모 포켓 공격에 집중하여 2월 10일까지 7번 도로(Trail 7)를 확보했다. 2월 11일, 요시오카는 바탄 전역에서 제14군의 전반적인 철수와 연계하여 북쪽으로 돌파를 시도했다. 2월 15일, 377명의 일본군만이 아군 방어선에 도달했고, 상부 포켓은 버려졌다. 2월 26일, 일본군 제20 보병 연대가 제거되면서 제1군단의 방어선은 복구되었다.[6]

2월 3일, 필리핀 스카우트 제45 보병 연대 (PS)의 윌리벌드 C. 비앙키 중위는 증강된 소대를 이끌고 적의 기관총 진지 두 곳을 수류탄으로 제압했다. 그는 가슴에 두 발의 총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 기관총을 조작하다가 세 번째 총상을 입고 전차에서 떨어졌다. 그의 용맹한 행동으로 명예훈장이 수여되었다.[18][6]

오리온-바가크 방어선의 진지에 대한 일본군 화염방사기 공격

4. 바탄 전투의 결과

일본군 병사들이 미군과 필리핀군 포로들을 감시하고 있다.


싱가포르동인도 제도가 함락되는 상황 속에서도 바탄에서의 연합국 저항은 계속되었고, 이는 연합국 국민들에게 희망적인 소식이었다. 하지만 방어로 얻은 시간은 대부분 제48사단이 위기의 순간에 호마의 군대에서 이동되었기 때문이며, 남은 약화된 부대의 고갈 때문이었다. 말레이와 싱가포르섬을 점령하는 데 강력한 일본군이 소모한 실제 전투 일수는 호마가 바탄과 코레히도르를 점령하는 데 소모한 일수와 같았다.[21]

바탄의 항복은 한 달 후 코레히도르의 함락을 앞당겼다. 결국 6만 명이 넘는 필리핀인과 1만 5천 명의 미군 포로들이 바탄 사망 행군을 강요당했다.[5]

바탄 저항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맥아더의 정보 장교였던 윌로비는 전쟁 후 바탄과 코레히도르에서의 대규모 작전이 전쟁의 최종 승리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으며, 일본군의 시간표를 "결정적으로 증명될 방식으로" 혼란시켰고, "바탄 때문에 일본군은 과달카날을 확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병력, 항공기, 함선, 물자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21] 일부에서는 만약 바탄에서의 저항이 없었다면 일본군이 태평양의 모든 미군 기지를 신속하게 점령하고 호주를 침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22]

그러나 필리핀 역사가 테오도로 아곤실로는 이 전투가 "소중한 목숨을 낭비했다는 점에서 불필요했으며,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호주 침략을 생각한 것은 야마시타뿐이었고, 도조는 이를 지지하지 않았다. 호마에 따르면 USAFFE는 수적으로 우세했으며 마닐라를 쉽게 탈환할 수 있었다.[23]

바탄과 코레히도르에서의 최후의 저항으로 일본군의 전체 시간표(잘 계획되고 신속하게 진행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작전은 제외)가 크게 지연되었는데, 이는 대본영이 바탄과 코레히도르 전투의 느린 속도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으로 입증된다. 일본군은 애초에 2월 중순까지 USAFFE 부대를 격파하고 필리핀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으로 예상했다. 1941년 12월 말 필리핀에서 아시아 함대가 철수하고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함대가 필리핀을 버림으로써 일본군은 맥아더의 부대가 한 달 안에 갑작스럽게 붕괴되어 항복할 것이라는 높은 기대를 품었다. 호마는 1942년 6월 필리핀에서 마지막 연합군이 항복한 후 지휘관직에서 해임되었으며, 일본군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킨 이 사건으로 굴욕을 당하고 희생양이 되었다.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에서 무력한 예비 장교로 근무했다.[24]

바탄 사망 행군에서 약 1만~1만 2천 명이 탈출하여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부대를 구성하여 일본 점령군을 묶어두었다. 1944년 9월 7일 일본 선박 ''시뇨 마루''가 USS ''패들''에 의해 침몰되었는데, ''시뇨 마루''에는 미군 포로들이 타고 있었고, 668명이 사망하고 82명이 생존했다.

태평양에서 2년 이상의 전투가 계속된 후 맥아더는 1942년에 떠났던 국가로 돌아온다는 약속을 지키며 필리핀 해방 작전을 시작했다. 이 작전의 일환으로 바탄 탈환 전투는 침략한 일본군에게 항복했던 USAFFE의 항복에 대한 복수가 되었다.

5. 바탄 죽음의 행진



바탄에서의 항복 이후, 6만 명이 넘는 필리핀인과 1만 5천 명의 미군 포로들은 바탄 사망 행군을 강요당했다.[5] 이들 중 약 1만 명에서 1만 2천 명은 행군 도중 탈출하여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했고, 이는 일본 점령군을 묶어두는 역할을 했다.

1944년 9월 7일에는 미군 포로들을 수송하던 일본 선박 ''시뇨 마루''가 USS ''패들''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었다. 이 사건으로 ''시뇨 마루''에 타고 있던 미군 포로 668명이 사망하고 82명이 생존했다.

6. 전투의 유산 및 기념



싱가포르동인도 제도가 함락된 후에도 바탄에서 연합군이 저항을 이어간 것은 연합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하지만 이 방어로 얻은 시간은 주로 일본군 제48사단이 결정적인 순간에 호마의 군대에서 이동되었기 때문이며, 남은 약화된 부대의 소모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강력한 일본군이 말레이와 싱가포르섬을 점령하는 데 소요된 전투 일수는 호마가 바탄과 코레히도르를 점령하는 데 걸린 시간과 비슷했다.[21]

바탄의 항복은 한 달 뒤 코레히도르의 함락으로 이어졌다. 일각에서는 바탄에서의 저항이 없었다면 일본군이 태평양의 모든 미군 기지를 빠르게 점령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침공까지 감행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22] 맥아더의 정보 장교였던 윌로우비는 바탄과 코레히도르에서의 작전이 전쟁 승리에 결정적이었으며, 일본군의 시간표를 혼란시켜 과달카날 확보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충분히 모으지 못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역사가 게빈 롱은 일본군이 루손에서의 작전 지연을 감수하기보다는 동인도 제도 정복을 가속화했으며, 코레히도르 함락 후 3개월 동안 남태평양에서 전력을 증강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고 반박했다.[21]

역사가 테오도로 아곤실로는 이 전투가 "소중한 목숨을 낭비했을 뿐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며, 호주 침략 구상은 야마시타 개인의 생각이었고 도조는 이를 지지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호마 자신도 USAFFE가 수적으로 우세하여 마닐라를 쉽게 탈환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탄과 코레히도르에서의 저항은 일본군의 전체 작전 시간표를 상당히 지연시켰다. 이는 대본영이 전투 진행 속도에 불만을 가졌다는 사실로도 확인된다. 일본군은 당초 1942년 2월 중순까지 필리핀 전역을 장악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예상보다 길어진 저항은 일본군의 체면을 손상시켰다. 결국 호마 마사하루는 1942년 6월 필리핀에서 마지막 연합군이 항복한 후 지휘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예비역으로 남게 되었다.[24]

전투 후, 약 6만 명 이상의 필리핀인과 1만 5천 명의 미군 포로들이 악명 높은 바탄 죽음의 행진을 강요당했다.[5] 이 과정에서 약 1만에서 1만 2천 명의 포로가 탈출하여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 일본 점령군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다. 1944년 9월 7일에는 미군 포로를 수송하던 일본 선박 ''SS 시뇨 마루''가 미 해군 잠수함 USS ''패들''에 의해 격침되어 포로 668명이 사망하고 82명만이 생존하는 비극도 발생했다.

태평양 전쟁이 2년 이상 지속된 후, 맥아더는 "나는 돌아올 것이다"라는 약속을 지키며 필리핀 해방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의 일환으로 벌어진 1945년 바탄 전투는 1942년의 항복에 대한 복수의 의미를 가졌다.

바탄 함락 기념비, 바탄 주청사


바탄이 함락된 4월 9일은 필리핀의 국경일로 지정되었다.[25] 처음에는 '바탄의 날'로 불렸으나, 현재는 '용기의 날(Araw ng Kagitingan)'로 명칭이 변경되어 바탄과 코레히도르 함락을 함께 기린다. 사마트 산(Mount Samat) 정상에는 전쟁 기념비인 '담바나 응 카기팅간'(Dambana ng Kagitingan, 용기의 사당)이 세워졌다. 이곳에는 제단, 광장, 박물관이 있는 콜로네이드가 있으며, 정상에는 약 약 94.79m 높이의 기념 십자가가 서 있다.

미국 해군은 바탄 전투를 기리기 위해 함선 이름을 명명했다. 와스프급 강습상륙함인 USS ''배탄'' (LHD-5)은 1997년 9월 20일에 취역했으며, "태평양에서 자유를 위해 필리핀에서 봉사하고 희생한 이들을 기념한다". 인디펜던스급 항공모함이었던 USS ''배탄'' (CVL-29)은 1943년 11월 17일에 취역하여 1954년 4월 9일 퇴역할 때까지 같은 목적으로 운용되었다.

미국 뉴멕시코주 라스크루세스에는 2001년 4월, 바탄 죽음의 행진 희생자들을 기리는 미국 연방 정부 지원의 유일한 기념비인 '바탄 사망 행군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기념비는 현지 예술가 켈리 헤스터가 디자인하고 조각했으며, 로드러너 파크웨이의 재향군인 공원에 위치한다.[26]

미국 시카고의 시카고 강을 가로지르는 스테이트 스트리트의 도개교는 '바탄-코레히도르 기념 다리'로 명명되었다. 1949년에 건설된 이 다리는 1998년 4월 9일, 용기의 날과 필리핀 독립 선언 100주년을 기념하여 재헌정되었다.[27]

바탄 전투는 여러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소재가 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로버트 테일러 주연의 "바탄"(Bataan, 1943), 존 웨인, 로버트 몽고메리, 도나 리드 주연 및 존 포드 감독의 "그들은 소모품이었다"(They Were Expendable, 1945), 웨인과 앤서니 퀸 주연의 "바탄으로 돌아가다"(Back to Bataan, 1945) 등이 있다. 또한 바탄에서 활동했던 간호사들을 다룬 "우리가 이토록 자랑스럽게 외치다!"(So Proudly We Hail!, 1943)와 "대혼란"(Cry 'Havoc', 1943)도 제작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역시 다수 제작되었는데, "영웅들의 유산: 바탄과 코레히도르 이야기"(A Legacy of Heroes: The Story of Bataan and Corregidor, 2003), "바탄의 유령"(Ghosts of Bataan, 2005) 등이 있으며, 히스토리 채널의 시리즈 "총격전"(Shootout) 중 "바탄 사형수 수용소 습격"(Raid on the Bataan Death Camp, 2006) 에피소드도 바탄 전투를 다루었다. 이 에피소드는 주로 1945년 카바나투안 습격에 초점을 맞추지만, 1942년 전투, 특히 마바탕(Mabatang)에서의 제57보병연대(PS)의 저항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노래 "내가 사는 집"(The House I Live In)에서는 바탄 전투가 미국의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언급된다. 이 노래는 이후 폴 로브슨 등 여러 가수에 의해 불렸으며, 가사에는 "콩코드의 작은 다리, 자유의 싸움이 시작된 곳 / 우리의 게티즈버그와 미드웨이, 그리고 바탄의 이야기"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7. 주요 인물

바탄 전투에는 미국필리핀 연합군, 그리고 일본군 양측에서 여러 주요 인물들이 참여했다.

연합군 측에서는 초기 필리핀 주둔 미군 극동사령부(USAFFE)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전투를 지휘했으나, 이후 호주로 탈출했다.[6] 맥아더의 뒤를 이어 조나단 M. 웨인라이트 4세 장군이 필리핀 주둔 연합군(USFIP) 사령관이 되었고,[6] 바탄 반도의 루손군은 에드워드 P. 킹 주니어 소장이 지휘하다가 최종적으로 항복했다.[6] 필리핀 측에서는 마누엘 L. 케손 대통령과[6] 비센테 림 장군 등이 주요 역할을 했다.[6]

일본군 측에서는 제14방면군 사령관인 혼마 마사하루 중장이 필리핀 침공 작전과 바탄 전투를 총지휘했다.[6] 그의 지휘 아래 나라 아키라 소장, 기타노 겐조 중장 등이 예하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다.[6]

7. 1. 연합군 측



1월 9일, 나라 소장이 이끄는 일본군이 57보병연대에 집중 공격을 시작하여 1월 11일 주 저항선에 도달했다. 1월 12일까지 파커 소장은 57보병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예비 부대인 21보병연대를 투입해야 했다. 같은 날, 비르힐리오 N. 코르데로 주니어 준장의 52보병연대("비콜의 자랑")가 51사단 우익의 틈을 메우기 위해 전진 배치되었다. 1월 14일, 블루멜 준장의 31사단은 웨인라이트의 제1군단에서 파커의 제2군단으로 이동하여 41사단을 지원하려 했다. 마리벨레스산의 시그널 힐에 있던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차장 리처드 J. 마샬은 제1군단과 제2군단 사이의 간격을 우려하여, 스카우트 45보병연대와 미군 31보병연대로 구성된 맥슨 S. 로프 준장의 필리핀 사단을 최전선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6]

1월 12일, 격렬한 전투 중 57보병연대 소대장이었던 알렉산더 R. 니닌저 중위는 소총과 수류탄만으로 적 참호로 돌격하여 부대가 아부카이(Abucay) 하시엔다를 탈환하는 데 기여했고, 이 공로로 사후에 명예훈장을 받았다. 필리핀 병사 나르시소 오르틸라노 역시 극적인 용기를 보여주었다.[14] 그는 수냉식 중기관총을 운용하던 중 일본군이 갈대밭에서 만세 돌격을 감행하자 수십 명을 사살했다. 기관총이 고장 나자 콜트 .45 권총으로 5명을 더 사살했고, 이후 총검으로 공격해 온 일본군 병사들과 격투를 벌이며 그들을 제압했다. 나르시소는 이 공로로 수훈십자장을 받았다.[14][6]

1월 15일, 맥아더는 "미국에서 지원군이 오고 있다. 수천 명의 병력과 수백 대의 항공기가 파견되고 있다. 이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우리 부대가 버티는 것이 필수적이다.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부대의 사기를 높이려 했다.[6]

1월 16일, 존스의 51사단은 파커의 명령에 따라 반격을 시도했으나, 일본군 제141보병연대의 정면 공격과 제9보병연대의 측면 공격에 직면하여 실패했다. 아부카이 방어선에 돌파구가 생겼지만, 일본군은 이를 즉시 활용하지는 못했다. 51사단 좌익에 있던 존 R. 보트라이트의 53보병연대는 남쪽으로 후퇴하여 제1군단과 접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날 51사단은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림의 41사단은 방어선을 유지했다. 1월 18일까지 일본군은 공격을 중단했다.[6]

1월 17일, 맥아더는 워싱턴에 "여기 식량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같은 날, 31보병연대는 주 방어선을 복구한 후 11사단과 교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45보병연대도 다음 날 공격에 가담했지만, 두 연대 모두 거의 진전을 보지 못했고 일본군의 공세는 강화되었다. 양측의 피해가 커졌고, 1월 22일까지 필리핀 사단은 1월 19일 위치로 후퇴했다. 더 심각한 상황은 일본군 제9보병연대가 나티브산을 우회하여 제2군단 후방인 구이톨(Guitol)로 진출한 것이었다.[6]

1942년 1월 27일경 미군의 위치를 보여주는 오리온-바가크 방어선


2월 8일, 호마 중장은 바탄에 가용 보병 대대가 3개밖에 남지 않았음을 인지하고 추가 공격 중단을 명령하며 증원을 기다렸다. 일본군 참모진은 바탄에서의 저항이 길어지는 것이 일본 내에서도 우려를 낳았으며, 필리핀인들에게는 미국이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바탄 주둔군은 실제로 기아에 시달리는 포위된 상태였다.[6]

2월 20일, 필리핀 대통령 마누엘 케손, 그의 가족, 부통령 세르히오 오스메냐, 대법원장 호세 아바드 산토스, 그리고 필리핀 육군 장교 3명이 잠수함 스워드피시호를 타고 코레히도르를 탈출했다. 2월 22일, 맥아더에게도 필리핀을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웨인라이트는 루손군 사령관이 되었고, 3월 21일에는 필리핀 주둔 연합군(USFIP) 사령관으로 승격되어 호주에 있는 맥아더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P. 킹 소장이 루손군 사령관직을 이어받았다. 존스는 제1군단, 파커는 제2군단을 계속 지휘했으며, 루이스 C. 비비는 맥아더의 참모차장이 되었다.[6]

3월 12일 밤, 맥아더와 그의 가족, 그리고 여러 USAFFE 참모 장교들은 존 D. 벌클리 중위가 지휘하는 4척의 PT 보트를 타고 코레히도르를 떠나 민다나오로 향했다. 이 탈출 작전과 다른 공로로 벌클리는 명예훈장, 해군 십자훈장, 수훈십자장 등을 받았다. 맥아더는 이후 호주로 이동하여 필리핀 국민들에게 "나는 돌아오겠다(I shall return)"는 유명한 약속을 했다.

3월 17일, 워싱턴은 웨인라이트에게 맥아더의 무사 도착을 알리며 봉쇄 돌파를 통한 물자 보급 및 P-40 전투기 지원 계획을 전달했다. 그러나 마사야호, 마타갈파호 등 계획된 봉쇄 돌파선 대부분과 돈 이시드로호, 코스트 파머호 등의 다른 시도들은 제한적인 성공에 그쳤다. 시울프호, 트라우트호 등 잠수함을 통한 보급 역시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2월 말에는 이미 쌀과 밀가루가 바닥난 상태였다.[6]

3월 22일, 킹 소장은 영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함락을 언급하며 항복을 권유하는 일본의 제안을 거부했다.[6]

4월 3일 기준, 킹의 루손군은 약 79,000명의 병력(제1군단 32,600명, 제2군단 28,000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각한 영양실조, 질병, 피로로 인해 실제 전투력은 크게 저하된 상태였다. 항공 전력은 P-40 전투기 2대와 P-35 전투기 2대만이 남아 있었다. 최종 방어선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6]

군단구역담당 부대지휘관
제1군단좌측 구역제91사단, 제1사단루터 스티븐스
우측 구역제11사단, 제2헌병대브로어
제2군단A 구역필리핀 육군 제31보병존 어윈
B 구역임시 항공대어윈 도안
C 구역제32보병, 제51전투팀클리포드 블루멜
D 구역제21사단, 제41사단맥슨 S. 로프
E 구역미군 제31보병, 제57보병기예르모 B. 프란시스코


7. 2. 일본군 측

1942년 5월 6일, 바탄주 카브카벤에서 웨인라이트 장군과 참모들이 혼마 장군과 항복 협상을 하는 모습


1942년 4월 3일 오후 3시, 혼마는 오리온-바가크 방어선 공격 계획을 세웠다. 이 작전은 기타노의 제4사단을 이용하여 사마트 산을 따라 미군 제2군단의 좌익을 돌파한 후, 남동쪽으로 마닐라 만을 향해 진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나라의 제65여단은 기타노의 우익에 배치되었고, 제21사단은 제2군단 우익에 대한 기만 부대 역할을, 제16사단은 미군 제1군단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았다. 혼마는 바탄이 한 달 안에 함락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앞서 3월 23일부터 일본군의 공중 폭격이 시작되었다.[6]

4월 3일 오전 9시, 기시오 키타지마가 지휘하는 196문의 포격이 시작되었고, 동시에 기조 미카마이의 제22항공여단이 150회의 공습을 감행했다. 오후 3시까지 나라의 제65여단은 카타몬 강과 판팅간 강 사이의 29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했고, 구레오 타니구치는 키타노 겐조의 제4사단 우익을 이끌고 6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했다. 이날 림의 필리핀군 제41사단 소속 제42보병연대와 제43보병연대는 후퇴했다.[6]

4월 4일에도 일본군의 포격과 공중 폭격은 계속되었다. 제65여단은 29번 도로를 따라 남진을 계속했고, 제41사단은 후퇴를 이어갔다. 일본군 제4사단의 좌익과 우익 부대는 미군/필리핀군 제21사단의 제21, 22, 23보병연대를 후퇴시켰다. 킹 소장은 D지역의 완전 붕괴를 막기 위해 루손군 예비대를 투입했다.[6]

4월 5일, 일본군 우익 부대는 사마트 산과 제41포병대대를 점령하고 남쪽 비탈길로 진격했다. 이로 인해 C지역의 제51전투단이 공격을 받게 되었다. 코레히도르에서 제2군단 전선을 방문한 웨인라이트는 다음 날 재스퍼 브레이디의 미군 제31보병연대, 제45보병연대, 제57보병연대를 동원한 반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웨인라이트는 맥아더에게 "병사들은 석 달 동안 반 끼니만 먹었고, 지금은 그보다 더 적은 양을 먹고 있어서 체력이 크게 저하되고 질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고 보고하며 병사들의 열악한 상태를 알렸다. 결국 반격 시도는 실패했고, 수비군은 산 비센테 강 동쪽 강둑으로 후퇴해야 했다. 4월 6일이 끝날 무렵, 혼마의 군대는 제21사단과 제41사단, 그리고 제51연대를 파괴했다. 또한 혼마는 제41보병연대와 제45보병연대를 주요 지역에서 고립시키고 D지역 사령부를 부대와 분리시켰다. 이로써 제2군단의 좌익이 무너지고, 두 군단이 분리되었으며, 사마트 산이 함락되고 방어 포병은 거의 무력화되었다. 파커의 제2군단 후방은 일본군의 공격에 취약하게 노출되었다.[6]

4월 7일, 일본군의 공세는 블루멜의 C지역을 강타했고, 곧 산 비센테 방어선이 무너졌다. 먼저 마말라 강으로 후퇴했던 블루멜의 제31보병연대와 제57보병연대의 잔여 병력은 결국 알랑간 강에서 제26기병연대와 합류했다. 그들의 우익에는 어윈의 A지역과 B지역의 잔여 병력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제1군단도 비누앙간 강으로 후퇴했다. 혼마는 당초 한 달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세를 불과 5일 만에, 최소한의 손실로 달성했다.[6]

4월 8일, 블루멜은 20번 도로를 따라 라마오 강으로 더 후퇴해야 했다. 그는 다음 날까지 그 방어선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흰 깃발을 단 차량이 동쪽 도로를 통해 새벽에 진격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킹 소장은 "더 이상의 저항은 단지 무의미하게 생명을 낭비할 뿐이다"라고 판단했다. 웨인라이트는 맥아더에게 "병사들은 영양실조로 너무 약해서 저항할 힘이 없다"고 전했다. 제1병원과 제2병원의 간호사들은 코레히도르로 후송되었고, 24,000명의 환자와 부상자들이 남겨졌다. 그날 밤, 군수품 보관소와 창고가 파괴되었고, 마지막 남은 P-40 두 대, P-35 두 대, 그리고 카를로스 P. 로물로를 태운 그러먼 J2F 덕 한 대가 바탄과 카브카벤 비행장에서 남쪽으로 탈출했다. ''듀이'', ''비턴'', ''카노푸스''는 자침되었다.[6] 전선 전체에서 제1군단의 부대와 와해된 제2군단의 잔여 병력은 무너져 후방으로 흩어졌다. 바탄의 지휘관들은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령을 통해서만 부대와 연락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방어전의 마지막 이틀 동안 남쪽 도로는 피난민과 도망치는 병사들로 막혔고, 일부는 마리벨레스 해군 기지에서 ''YAG-4''에 의해 후송되었다.[19]

4월 9일, 킹 소장은 먼저 라마오 강 다리에서 나가노 중좌를 만났다. 나가노는 킹 일행을 인근 실험 농장의 한 집으로 안내했으며, 그곳에서 제14방면군 작전 참모인 나카야마 모토 대령의 도착을 기다렸다. 그러나 나카야마는 바탄 반도의 미군과 필리핀군이라는 제한된 부대의 항복이 아닌, 필리핀 전역에 있는 모든 군대의 항복만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후 킹 소장은 발랑가 초등학교로 끌려가 심문을 받고 사진을 찍혔다. 존 휘트먼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항복 문서가 작성되거나 서명되지 않았으며, 항복을 공식화하려는 노력도 없었다.[6]

'''자유의 목소리 – 말린타 터널 – 코레히도르 – 1942년 4월 9일 라디오 방송:'''

"바탄이 함락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피로 물든 반도에 있는 필리핀-미국군은 무기를 내려놓았습니다. 머리는 피투성이지만 굴하지 않고, 그들은 적의 우세한 병력과 수에 굴복했습니다.

세계는 필리핀과 미국 병사들이 바탄의 정글 깊숙한 곳과 험준한 해안선에서 벌인 서사시적인 투쟁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그들은 석 달 이상 적의 끊임없고 혹독한 포화 속에서 불평 없이 버텼습니다. 육지에서 포위되고 바다에서 봉쇄되어 필리핀과 미국에서 모든 지원을 차단당한 용감한 전사들은 인간의 지구력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이 모든 달의 끊임없는 전투에서 그들을 지탱해준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힘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복할 수 없는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육체적 고난과 역경도 파괴할 수 없는 마음과 영혼 속의 어떤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고향과 그곳이 간직한 모든 소중한 것들에 대한 생각, 자유와 존엄성, 우리 인간의 특권 중 가장 귀중한 것들에 대한 자부심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적은 자신의 힘과 승리에 대한 자부심 속에서 우리 군대를 자신의 군대가 전투에서 보여준 용기와 불굴의 정신에 못지않게 평가할 것입니다. 우리 병사들은 용감하고 치열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전 세계가 그들이 압도적인 역경에 직면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버틴 초인적인 지구력에 증언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은 내려져야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깃발 아래 싸우는 사람들은 살과 피 이상으로 만들어졌지만, 불침강철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결국 살은 굴복해야 하고, 인내심은 사라지며, 전투는 끝나야 합니다.

바탄은 함락되었지만, 그것을 지탱하게 한 정신, 즉 전 세계 모든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등불이 된 정신은 함락될 수 없습니다!"[20]

참조

[1] 웹사이트 The Philippines (Bataan) (1942) https://web.archive.[...] WETA 2005-00-00
[1] 웹사이트 Bataan Death March https://www.britanni[...] 2017-03-06
[1] 뉴스 U.S. salutes Filipino vets https://web.archive.[...] 2017-04-09
[1] 서적 Corregidor: The American Alamo of World War II https://books.google[...] Cooper Square Press 2000-00-00
[1] 서적 War Stories II: Heroism in the Pacific https://books.google[...] Regnery Publishing 2012-00-00
[2] 서적 Senshi Sōsho (戦史叢書) Asagumo Shimbunsha
[3] 서적 Surviving Bataan and Beyond: Colonel Irvin Alexander's Odyssey as a Japanese Prisoner of War https://books.google[...] Stackpole Books 2005-00-00
[3] 서적 Justice in Asia and the Pacific Region, 1945–1952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00-00
[4] 문서 Robertson
[5] 서적 A Democracy at War: America's Fight at Home and Abroad in World War II
[6] 서적 Bataan: Our Last Ditch Hippocrene Books 1990-00-00
[7] 문서 The Bamboo Soldiers
[8] 서적 The Fall of the Philippines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9] 서적 Inside the Bataan Death March: Defeat, Travail and Memory McFarland
[10] 웹사이트 The Decision To Withdraw to Bataan https://web.archive.[...] United States Army 2011-05-22
[11] 서적 Douglas MacArthur: American Warrior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Publishing Group 2016-12-06
[12] 서적 Attack on Pearl Harbor: America Enters World War II https://books.google[...] Rosen Publishing
[13] 웹사이트 Profile:Lieutenant Alexander R. Nininger's Medal of Honor https://www.national[...] The National WWII Museum 2022-01-12
[14] 서적 None More Courageous – American War Heroes of Today https://books.google[...] Stewart H. Holbrook 2007-00-00
[15] 서적 The Dyess Story G.P. Putnam's Sons 1944-00-00
[16] 서적 Behind Japanese Lines: An American Guerrilla in the Philippines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1986-00-00
[17] 간행물 The Navy's Infantry at Bataan 1985-03-00
[18] 웹사이트 World War II (A–F) for Master Sergeant Woodrow Keeble Winner of Medal of Honor for the United States Army https://www.army.mil[...]
[19] 웹사이트 Service Ship Photo Archive YAG-4 http://www.navsource[...] 2020-03-13
[20] 서적 College Writing and Reading https://books.google[...] Rex Bookstore, Inc.
[21] 서적 MacArthur as military commander https://books.google[...] Batsford 1969-00-00
[22] 서적 A Democracy at War: America's Fight at Home and Abroad in World War II
[23] 서적 The fateful years : Japan's adventure in the Philippines, 1941–45 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Press 2001-00-00
[24] 웹사이트 The Fall of the Philippines https://www.history.[...] 2023-09-08
[25] 웹사이트 Republic Act no. 9188 http://www.lawphil.n[...] 2011-03-22
[26] 웹사이트 Bataan Death March Memorial http://www.lascruces[...] 2011-03-20
[27] 웹사이트 Main plaque https://historicb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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