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세르비아 왕국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중세 세르비아 왕국은 1217년 스테판 네마니치의 왕위 즉위로 시작되었으며, 이전 세르비아 통치자들의 왕국 전통을 계승했다. 11세기에는 두클랴가 세르비아 왕국의 중심지였으며, 라슈카는 부카노비치 왕조의 지배하에 세르비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부상했다. 스테판 네마냐는 라슈카를 재통일하고 아들 부칸에게 두클랴를 통치하게 했으며, 스테판 네마니치는 교황으로부터 왕의 인정을 받아 세르비아 왕국의 건국자가 되었다. 세르비아는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획득하고 네마니치 왕조는 스테판 데찬스키, 스테판 두샨을 거치며 영토를 확장했다. 두샨은 제국을 선포하고 두샨 법전을 제정하며 번성했으나, 그의 사후 제국은 쇠퇴하고 네마니치 왕조는 단절되었다.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1459년 스메데레보가 함락되면서 중세 세르비아는 멸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중세 세르비아 왕국 - 라슈카 (지역)
라슈카는 세르비아 남서부의 역사적인 지역으로, 중세 시대에는 세르비아 대공국의 수도로서 세르비아 국가를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걸쳐 있다. - 세르비아의 역사 - 세르비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은 19세기 세르비아의 독립 운동으로 성립되어 발칸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중 해체되고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에 통합되었다. - 세르비아의 역사 -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은 1804년 시작되어 나폴레옹 전쟁과 1848년 혁명을 거치며 유럽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나,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 패배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전환되었다. - 유럽사 - 나치 독일
나치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통치한 1933년부터 1945년까지의 독일을 가리키며,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전체주의를 바탕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홀로코스트를 포함한 대량 학살과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 - 유럽사 - 제1차 체첸 전쟁
제1차 체첸 전쟁은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러시아 연방과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간의 무력 분쟁으로, 독립 선언, 정치적 불안정, 그리고 조약 미체결이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러시아군의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게릴라전과 인권 침해로 인해 장기화되어 결국 러시아군의 철수와 사실상 독립을 가져왔지만, 제2차 체첸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중세 세르비아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 | |
![]() | |
일반 명칭 | 세르비아 |
공식 명칭 | 세르비아 왕국 |
로마자 표기 | Kraljevina Srbija |
다른 표기 | 스릅스코 크랄예브스트보 / Srpsko kraljevstvo |
![]() | |
정치 | |
정치 체제 | 봉건군주제 |
수도 | 라스 데브르크 베오그라드 스코페 프리즈렌 |
주요 통치자 | 스테판 네마니치 (대공 → 국왕) 스테판 라도슬라브 스테판 블라디슬라브 스테판 우로시 1세 스테판 드라구틴 스테판 밀루틴 스테판 데찬스키 두샨 네마니치 (국왕 → 황제) |
입법부 | 교회-국가 의회 |
종교 및 문화 | |
종교 | 세르비아 정교회 |
공용어 | 고대 교회 슬라브어, 세르비아어 |
역사 | |
성립 | 1217년, 스테판 네마니치의 대관식 |
세르비아 교회의 독립 | 1219년, 성 사바에 의해 세르비아 교회가 독립됨 (세르비아인의 대주교) |
멸망 | 1346년 4월 16일, 스테판 두샨의 대관식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 |
이전 및 이후 | |
이전 국가 | 콤네노스 왕조의 비잔티움 제국 세르비아 대공국 |
계승 국가 | 세르비아 제국 |
기타 | |
현재 국가 | 세르비아 |
주민 | 세르비아인, 세르브인 |
2. 역사적 배경
스테판 네마니치가 1217년에 왕위에 오른 것은 두클랴(11세기)를 중심으로 한 오랜 왕국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건은 아니었다. 네마니치 시대에 두클랴의 이전 세르비아 왕국은 "우리 조상들의 옛 왕국"으로 불렸으며, 이는 스테판 네마니치와 그 후계자들의 왕실 칭호에 반영되어, 그들은 두클랴를 포함한 모든 세르비아 영토의 왕이라고 칭했다.
스테판 네마냐는 왕실 유산의 중요성을 깨닫고 장남 부칸 네마니치에게 왕의 칭호와 함께 두클랴 통치를 맡겼다. 당시 두클랴의 "옛 왕국"과 보이슬라블레비치 왕조 출신 이전 통치자들(왕 미하일로, 콘스탄틴 보딘)은 라슈카의 부카노비치 왕조에서 분기된 네마니치 왕조의 왕실 선조로 여겨졌다.
두 왕조(보이슬라블레비치 / 부카노비치)와 두 지역(두클랴 / 라슈카)은 이전부터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 1083년, 두클랴의 콘스탄틴 보딘 왕은 조카 부칸과 마르코를 라슈카의 봉신으로 임명했다. 각 지방은 자체 귀족과 제도를 가졌고, 보이슬라블레비치 왕조의 구성원이나 친척을 ''주판''으로 임명하여 통치했다. 1089년에서 1091년 사이, 비잔틴 제국의 두클랴 원정으로 내전이 발생하여 두클랴가 약화되었다. 라슈카의 부칸은 이 기회를 틈타 ''세르비아 대공'' 칭호를 요구하며 독립했다.
11세기 말까지 두클랴는 세르비아 왕국의 중심지이자 비잔틴에 저항하는 주요 국가였다. 이후 라슈카는 부카노비치 왕조 아래에서 가장 강력한 세르비아 국가가 되었고, 12세기 내내 그 지위를 유지했다. 라슈카는 비잔틴 제국의 주요 적대국으로서 두클랴를 대체했다. 부칸의 계승자 시대에 비잔틴은 여러 차례 라슈카 정복을 시도했지만, 저항과 헝가리 왕국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세르비아 공국은 독립을 유지했다. 스테판 네마냐가 라슈카의 ''대주판''이 되었을 때(1166년경), 옛 두클랴는 비잔틴에 의해 절반이 정복당해 작은 공국으로 축소되었다. 1180년 직후, 스테판 네마냐는 두클랴를 해방하여 세르비아 영토를 재통일했고, 아들 부칸에게 전통적인 왕의 칭호와 함께 두클랴를 통치하도록 했다. 네마냐의 둘째 아들 스테판이 1196년에 ''대주판''이 되면서 형제간 경쟁이 발생했고, 1202년 스테판이 전복되면서 경쟁은 절정에 달했다.
2. 1. 초기 세르비아인의 정착과 발전
7세기 초, 남슬라브족의 일파인 세르비아인들은 발칸 반도 서부로 이주해왔다. 9세기 후반, 이들은 동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아 정교회를 받아들였다. 오랫동안 세르비아인들은 주파(župa)라고 불리는 부족 공동체 단위로 흩어져 살았다. 그러나 12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스테판 네마냐가 1168년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세르비아 후작이 되었다. 이후 세력을 확장한 그는 1171년 국왕으로 즉위하여 '''네마니치 왕조'''를 열었다.스테판 네마냐의 아들 스테판 네마니치(스테판 1세 대관왕)는 1217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에게 왕관을 받아 "왕국"의 지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로써 그는 실질적인 세르비아 왕국의 건국자가 되었다.
두클랴 (11세기)의 통치자들 사이에서도 왕국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스테판 네마니치의 왕위 즉위(1217년)는 세르비아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건은 아니었다. 네마니치 시대에 두클랴의 이전 세르비아 왕국은 "우리 조상들의 옛 왕국"으로 불렸고, 스테판 네마니치와 그 후계자들은 두클랴를 포함한 모든 세르비아 영토의 왕으로 칭해졌다.
스테판 네마냐는 왕실 유산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장남 부칸 네마니치에게 왕의 칭호와 함께 두클랴 통치를 맡겼다. 당시 두클랴의 "옛 왕국"과 보이슬라블레비치 왕조 출신 이전 통치자들(왕 미하일로, 콘스탄틴 보딘)은 라슈카의 부카노비치 왕조에서 갈라져 나온 네마니치 왕조의 왕실 선조로 여겨졌다.
두 왕조(보이슬라블레비치 / 부카노비치)와 두 지역(두클랴 / 라슈카)은 이전부터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083년, 두클랴의 콘스탄틴 보딘 왕은 자신의 영토 내 지방 중 하나인 라슈카의 봉신으로 조카 부칸과 마르코를 임명했다. 각 지방은 자체 귀족과 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보이슬라블레비치 왕조의 구성원이나 친척을 ''주판''으로 임명하여 통치했다. 1089년에서 1091년 사이, 비잔틴 제국이 두클랴를 공격했다. 보딘의 친척들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 두클랴는 크게 약화되었다. 라슈카의 부칸은 이 기회를 틈타 ''세르비아 대공'' 칭호를 요구하며 독립했다.
11세기 말까지 두클랴는 세르비아 왕국의 중심지이자 비잔틴에 저항하는 주요 국가였다. 이후 라슈카는 부카노비치 왕조 아래에서 가장 강력한 세르비아 국가가 되었고, 12세기 내내 그 지위를 유지했다. 라슈카는 비잔틴 제국의 주요 적대국으로서 두클랴를 대체했다. 보딘의 상속자들은 비잔틴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고, 두클랴와 트라부니아의 작은 영토만을 소유했다. 부칸의 계승자 시대에 비잔틴은 여러 차례 라슈카 정복을 시도했지만, 저항과 헝가리 왕국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세르비아 공국은 독립을 유지했다. 스테판 네마냐가 라슈카의 ''대주판''이 되었을 때(1166년경), 옛 두클랴는 비잔틴에 절반이 정복당해 작은 공국으로 축소되었다. 1180년 직후, 스테판 네마냐는 두클랴를 해방하여 세르비아 영토를 재통일했고, 아들 부칸에게 전통적인 왕의 칭호와 함께 두클랴 통치를 맡겼다. 네마냐의 둘째 아들 스테판이 1196년에 ''대주판''이 되면서 형제간 경쟁이 발생했고, 1202년 스테판이 전복되면서 경쟁은 절정에 달했다.
2. 2. 네마니치 왕조의 성립
스테판 네마냐는 1168년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세르비아 후작이 되면서 세르비아는 통일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후 확대된 세력을 바탕으로 1171년에는 국왕으로 즉위하여 '''네마니치 왕조'''를 열었다. 왕조의 이름은 시조인 "네마냐"에서 유래했지만, 2대 이후에는 지소어 -ić를 붙여 "네마니치" (Nemanjić)라고 불렀기 때문에 왕조의 이름도 "네마니치 왕조"가 되었다.이전 세르비아 통치자들 사이에는 두클랴를 중심으로 한 오랜 왕국 전통(11세기)이 있었다. 네마니치 시대에 두클랴의 이전 세르비아 왕국은 "우리 조상들의 옛 왕국"으로 불렸으며, 이는 스테판 네마니치와 그 계승자들의 왕실 칭호에도 반영되어 그들은 두클랴를 포함한 모든 세르비아 영토의 왕이라고 칭했다. 스테판 네마냐는 왕실 유산의 중요성을 깨닫고 장남 부칸 네마니치에게 왕의 칭호와 함께 두클랴를 통치하도록 했다.
당시 두클랴의 "옛 왕국"과 보이슬라블레비치 왕조 출신 이전 통치자들(왕 미하일로와 콘스탄틴 보딘)은 라슈카의 부카노비치 왕조에서 분기된 네마니치 왕조의 왕실 선조로 여겨졌다. 1083년, 두클랴의 콘스탄틴 보딘 왕은 조카 부칸과 마르코를 라슈카의 봉신으로 임명했다. 각 지방은 자체 귀족과 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보이슬라블레비치 왕조의 구성원이나 친척을 ''주판''으로 임명하여 통치했다. 1089년에서 1091년 사이, 비잔틴 제국의 두클랴 원정으로 내전이 발생하여 두클랴가 크게 약화되었고, 라슈카의 부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세르비아 대공'' 칭호를 요구하며 독립했다.
11세기 말까지 두클랴는 세르비아 왕국의 중심지이자 비잔틴에 저항하는 주요 국가였다. 이후 라슈카는 부카노비치 왕조의 통치하에 가장 강력한 세르비아 국가가 되었고, 12세기 내내 그 지위를 유지했다. 라슈카는 비잔틴 제국의 주요 적대국으로서 두클랴를 대체했다. 부칸의 계승자 시대 동안, 비잔틴은 여러 차례 라슈카를 정복하려 했지만, 저항과 헝가리 왕국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세르비아 공국은 독립을 유지했다. 스테판 네마냐가 라슈카의 ''대주판''이 되었을 때(1166년경), 옛 두클랴는 비잔틴에 의해 절반이 정복당해 작은 공국으로 축소되었다. 1180년 직후, 스테판 네마냐는 두클랴를 해방하여 세르비아 영토를 재통일했고, 그의 아들 부칸에게 전통적인 왕의 칭호와 함께 두클랴를 통치하도록 했다. 네마냐의 둘째 아들 스테판이 1196년에 ''대주판''이 되면서 형제간의 경쟁이 발생했고, 1202년 스테판이 전복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스테판 네마니치 (스테판 1세 대관왕)는 1217년에 교황 호노리우스 3세로부터 왕관을 수여받아 "왕국"으로서의 지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실질적인 세르비아 왕국의 건국자가 되었다.
3. 세르비아 왕국 (1217-1346)
스테판 데찬스키는 니시와 주변 지역을 정복하고 마케도니아 지역을 획득하여 왕국을 동쪽으로 확장했다. 그는 메토히야에 비소키 데차니 수도원을 건설했는데, 이는 세르비아 중세 건축의 가장 기념비적인 예로, 그에게 "데찬스키(데차니 출신)"라는 별명을 부여했다. 1330년 벨버즈드 전투에서 불가리아인을 격파했다.
1322년에서 1326년 사이 세르비아가 훔 지역을 보스니아 반국에 잃었고, 비딘 차르국은 미하일 시쉬만 통치하에 세르비아의 종주권에서 벗어나 제2 불가리아 제국으로 돌아갔다. 1323년 시쉬만은 불가리아 차르가 되었다. 비잔티움은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습격에 어려움을 겪었고, 불가리아인이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를, 세르비아가 안드로니코스(장로)를 지지하며 내전이 발발했다. 안드로니코스(젊은)가 승리했지만, 비잔틴 내전이 끝날 무렵 세르비아가 발칸 반도의 지배 세력이 되었다. 세르비아는 패배한 측을 지원했음에도 마케도니아로 세력을 확장했다. 비잔틴과 불가리아는 데찬스키를 위협으로 여겨 1330년 세르비아를 공격하며 반세르비아 조약을 맺었다. 안드로니코스는 세르비아가 점령한 마케도니아 지역을 공격했고, 불가리아는 큐스텐딜(벨부즈드) 근처에서 전투를 벌였다. 불가리아군은 궤멸되었고, 미하일 시쉬만은 치명상을 입었다. 안드로니코스는 철수했다.
벨버즈드 전투 이후, 불가리아는 군사적으로 무력화되었고 정치적으로 세르비아에 종속되었다. 불가리아의 새 차르인 이반 알렉산더는 독립적인 불가리아 정책을 수행할 능력이 제한되었다.
데찬스키는 1331년에 마케도니아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안드로니코스는 1334년에 평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비잔티움은 내전에 휩싸여 세르비아가 더 많은 권력과 영토를 얻고 발칸 반도에서 패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세르비아 귀족들은 비잔틴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했지만, 데찬스키는 다른 결정을 내렸다. 그의 아들 스테판 두샨은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폐위시켰다.
국왕 | 재위 기간 | 비고 |
---|---|---|
![]() 데차니의 | 1321–1331 |
3. 1. 스테판 네마니치의 통치 (1217-1228)
스테판 네마니치는 1204년 라슈카에서 통치를 되찾았고, 1208년에 사망한 그의 형 부칸과 화해했다. 자후믈레의 전직 공작이었던 그의 막내 동생 라스트코는 통치를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어 사바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백성들 사이에서 동방 정교회를 전파하는 데 모든 노력을 쏟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미 동남유럽에도 영향력을 확산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스테판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교황으로부터 왕으로서의 인정을 받아 1217년 세르비아 왕이 되었다. 비잔티움에서 사바는 세르비아 정교회의 자동 수장제(독립)를 확보했으며, 1219년 최초의 세르비아 대주교가 되었다. 같은 해 사바는 세르비아에서 최초의 헌법인 성 사바의 노모카논(세르비아어: Zakonopravilo|자코노프라빌로sr)을 발표했다. 노모카논은 로마법에 기초한 민법과 공의회에 기초한 교회법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그 기본적인 목적은 젊은 세르비아 왕국과 세르비아 정교회의 기능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세르비아인들은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모두 획득했다. 1220년, 지차 수도원에서 왕국의 대규모 회의가 열렸고, 스테판은 정교회 의식에 따라 대관식을 치렀으며, 대관식은 사바 대주교가 집전했다. 이 행위는 모든 후계자들에게 선례가 되었으며, 네마니치 왕조의 모든 세르비아 왕들은 지차에서 세르비아 대주교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다.국왕 | 재위 기간 | 비고 |
---|---|---|
![]() | 1217–1228 |
3. 2. 스테판 라도슬라브, 블라디슬라브, 우로시 1세의 통치 (1228-1276)
스테판 쁘르보벤차니의 아들들인 라도슬라브, 블라디슬라브, 우로시 1세의 통치 시기 세르비아는 국가 구조의 정체기를 겪었다. 이들은 비잔티움 제국, 불가리아, 헝가리 등 주변 국가에 어느 정도 의존했다. 우로시 1세의 아들 드라구틴이 헝가리 공주와 결혼하면서 헝가리와의 관계가 중요해졌다.국왕 | 재위 기간 | 비고 |
---|---|---|
![]() | 1228–1233 | |
![]() | 1233–1243 | |
![]() | 1243–1276 |
3. 3. 스테판 드라구틴의 통치 (1276-1282)

3. 4. 스테판 밀루틴의 통치 (1282-1321)
드라구틴의 동생인 밀루틴 왕 치하에서 세르비아는 세 개의 전선에서 가끔 전쟁을 벌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강해졌다. 밀루틴 왕은 중세 시대의 관례적인 외교와 왕실 결혼을 활용하는 데 능숙한 외교관이었다. 그는 헝가리, 불가리아, 비잔틴 공주와 다섯 번 결혼했다. 그는 또한 코소보의 그라차니차 수도원, 아토스 산의 힐란다르 수도원 대성당, 예루살렘의 성 아치엔젤 교회 등 중세 세르비아 건축의 가장 훌륭한 사례 중 일부인 교회를 건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격동적인 삶에도 불구하고 밀루틴 왕은 기증으로 인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스테판이 왕위에 올랐으며, 나중에 스테판 데찬스키로 불렸다.밀루틴은 세르비아의 중앙 왕권을 회복했다. 권력을 잡은 후 그는 비잔틴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장기간 공격을 시작하여 스코페를 포함한 상당한 영토를 획득했는데, 이 움직임은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마케도니아 지역은 오랫동안 비잔틴, 불가리아, 세르비아 사이에서 분쟁의 대상이었다. 이 지역으로의 확장은 발칸 반도에서 세르비아의 지배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를 통해 세르비아의 정책은 원래의 북서부 아드리아-다뉴브 중심에서 비잔틴 중심의 남중앙 발칸 반도로 이동했다. 스코페를 획득함으로써 밀루틴 왕국은 광대한 영토 국가의 수도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새 도시를 소유하게 되었다. 중요한 바르다르 강-모라바 상업로에 위치한 지리 전략적 중심지는 이곳을 자연스러운 새로운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로 만들었다. 스코페의 이점은 세르비아의 번성하는 광업 및 무역 자원과 결합되어 밀루틴에게 발칸 문제의 주요 세력으로서의 지위를 보장했다.
주요 사건들이 남부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밀루틴은 북부의 세르비아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폐위된 형제 드라구틴이 베오그라드 지역을 통치하면서 두 형제는 군사적 동맹으로 함께 행동하여 드라구틴은 남부에서 밀루틴을 돕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1290년대 초에 세르비아는 비딘 인근으로 확장되었다. 세르비아의 확장에 위협을 느낀 비딘의 쉬쉬만은 형제들의 군대를 격퇴하는 데 실패했고 세르비아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남부에서 밀루틴은 비잔틴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로부터 마케도니아와 북부 알바니아에서 영토를 얻었다. 안드로니코스가 내부 및 외부의 압력에 시달리면서 밀루틴과의 평화를 모색했고, 1299년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결과 밀루틴은 정복한 모든 영토를 유지했고, 스코페는 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비잔틴 공주 시모니스와 결혼했는데, 결혼식은 그해 테살로니키에서 열렸다. 당시 5세였던 시모니스는 남편이 결혼을 완성하기 전에 몇 년 동안 왕실 유치원에서 지냈다. 시모니스는 많은 수행원을 세르비아로 데려왔고, 그녀의 도착과 함께 세르비아는 비잔틴 문화의 대대적인 유입을 받았다. 비잔틴 스타일의 궁정 의식과 복장이 채택되었고, 비잔틴 기능 및 명예 칭호가 등장했으며, 궁정 관직이 개명되었고, 비잔틴 행정, 재정 및 법률 제도가 복사되었다. 비잔틴화는 밀루틴이 이전 비잔틴 정치, 사회, 문화 활동을 모두 유지했던 세르비아의 새롭게 획득한 인구가 많은 그리스어 사용 지역으로 더욱 확장되었다.
밀루틴 통치의 마지막 20년은 형제 드라구틴 및 지역 귀족들과의 내전, 그리고 북부에서 헝가리에게 영토를 상실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밀루틴은 또한 사생아 아들 스테판 데찬스키와도 문제를 겪었는데, 그는 아버지가 적자 남동생 콘스탄틴을 편애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밀루틴이 유언을 남기지 않고 죽자 데찬스키, 콘스탄틴, 그리고 그들의 사촌 블라디슬라프 2세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데찬스키가 승리했고,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로 즉위했다.
3. 5. 스테판 데찬스키의 통치 (1321-1331)
스테판 우로시 3세는 스테판 데찬스키로 알려졌으며, 니시와 주변 지역을 정복하고 마케도니아 지역을 획득하여 왕국을 동쪽으로 확장시켰다. 그는 메토히야에 비소키 데차니 수도원을 건설했는데, 이는 세르비아 중세 건축의 가장 기념비적인 예로, 그에게 "데찬스키(데차니 출신)"라는 별명을 부여했다. 스테판 왕은 1330년 벨버즈드 전투에서 불가리아인을 격파했다.1322년에서 1326년 사이 세르비아가 훔 지역을 보스니아 반국에 잃으면서 상황은 좋지 않게 시작되었다. 동시에 비딘 차르국은 미하일 시쉬만 통치하에 세르비아의 종주권에서 벗어나 제2 불가리아 제국으로 돌아갔다. 시쉬만은 1323년 불가리아 차르가 되었다. 한편 비잔티움은 주기적인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습격에 시달리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불가리아인이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를 지지하고, 세르비아가 안드로니코스(장로) 편을 들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비잔틴 내부 권력 투쟁에서 안드로니코스(젊은)가 승리했지만, 비잔틴 내전이 끝날 무렵 세르비아가 발칸 반도의 지배 세력이 되었다. 세르비아는 패배한 측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세 국 사이의 분쟁의 씨앗이었던 마케도니아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비잔틴과 불가리아는 데찬스키를 위협으로 여겼고, 1330년 세르비아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며 반세르비아 조약을 맺었다. 안드로니코스는 세르비아가 점령한 마케도니아 지역을 공격했고, 불가리아는 동부 마케도니아의 큐스텐딜(벨부즈드) 근처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벌였다. 불가리아군은 그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불가리아 차르 미하일 시쉬만은 치명상을 입었다. 안드로니코스는 이 소식을 듣고 재빨리 철수했다.
벨버즈드 전투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패배 이후, 불가리아는 군사적으로 무력화되었고 정치적으로 세르비아의 이익에 종속되었다. 불가리아 전체가 세르비아의 봉신이 되었는지, 일부 지역이 그랬는지, 아니면 기술적으로 공식적으로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출처는 다르지만, 불가리아의 새 차르인 이반 알렉산더는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서 독립적인 불가리아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되었다.
데찬스키는 1331년에 마케도니아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안드로니코스는 1334년에 평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비잔티움은 또 다른 내전에 휩싸이면서 세르비아가 더 많은 권력과 영토를 얻고 발칸 반도에서 패권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세르비아 귀족들은 비잔틴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했지만, 데찬스키는 다른 결정을 내렸다. 그의 아들 스테판 두샨은 이러한 세르비아 귀족들의 소외를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폐위시켰다.
국왕 | 재위 기간 | 비고 |
---|---|---|
스테판 데찬스키 데차니의 | 1321–1331 |
4. 세르비아 제국 (1346-1371)
스테판 데찬스키는 1331년 아들 스테판 두샨에 의해 폐위되었다. 스테판 두샨은 1341~1347년 비잔틴 내전을 틈타 비잔틴 제국을 희생시키며 남쪽, 남동쪽,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왕국의 규모를 두 배로 늘렸다. 그는 펠로폰네소스반도와 섬들을 제외한 현재 그리스 영토 거의 전체를 정복했다. 세레스를 정복한 후, 1346년 4월 16일 스코플레(구 불가리아 수도)에서 세르비아 총대주교에 의해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로 즉위했다. 이 선포는 불가리아 제국과 차르 이반 알렉산더의 지지를 받았는데, 불가리아 총대주교 시메온이 페치 세르비아 총대주교 창설과 스테판 우로쉬 4세 두샨의 황제 대관식에 모두 참여했기 때문이다. 두샨은 이반 알렉산더와 결혼 동맹을 맺어 누이 헬레나와 결혼함으로써 동쪽 국경에 대한 걱정을 덜었다. 스테판 두샨의 목표는 비잔틴 황제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었고, 투르크족에 맞서 교황과 함께 십자군을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테살로니키로 국경을 밀어붙였지만 도시의 강력한 성벽에 막혔다. 1334년 두샨은 안드로니코스의 평화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1341년 안드로니코스가 사망하자 비잔틴에서 내전이 재개되었다. 요한 6세 칸타쿠제노스는 두샨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세르비아에서 망명을 허가받았다. 그러나 테살리아 총독이 칸타쿠제노스를 황제로 인정하자 두샨은 지원을 중단하고 입장을 바꿨다. 이때 칸타쿠제노스는 셀주크 투르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투르크족은 처음으로 유럽 땅에 발을 들였다.
두샨 법전(Dušanov zakonik|두샤노브 자코니크sr)은 1349년에 제정되었고 1354년에 수정되었다. 이 법전은 로마법-비잔틴 법에 기초했으며, 법적 법적 이식은 두샨 법전의 171조와 172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조항들은 비잔틴 법전 바실리카 (7권, 1, 16–17)에서 가져온 것이다. 두샨은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고 국가 경제를 강화했다. 세르비아는 번성하여 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와 문화 중 하나가 되었으며, 높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명성을 얻었다.
1355년 12월, 두샨은 47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스테판 우로시 5세가 즉위했으나, 제국 각지에서 제후들이 자립하면서 제국은 급속도로 쇠퇴했다. 1371년 마리차 전투에서 브카신 므르냐브체비치가 전사하고 같은 해 우로시 5세도 사망하여 네마니치 왕조는 단절되었다.
4. 1. 스테판 두샨의 통치와 제국 선포 (1331-1355)
스테판 데찬스키는 1331년 아들 스테판 두샨에 의해 폐위되었다. 스테판 두샨은 1341~1347년 비잔틴 내전을 틈타 남쪽, 남동쪽,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비잔틴 제국을 희생시키며 왕국의 규모를 두 배로 늘렸다. 그는 펠로폰네소스반도와 섬들을 제외하고 현재 그리스 영토 거의 전체를 정복했다. 그는 도시 세레스를 정복한 후, 1346년 4월 16일 세르비아 총대주교에 의해 스코플레(구 불가리아 수도)에서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로 즉위했다. 비잔틴인들이 분개하며 받아들인 이러한 행동들은 불가리아 제국과 차르 이반 알렉산더에 의해 지지받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불가리아 총대주교 시메온은 페치 세르비아 총대주교의 창설과 스테판 우로쉬 4세 두샨의 황제 대관식에 모두 참여했기 때문이다. 두샨은 불가리아 차르 이반 알렉산더와 결혼 동맹을 맺어 누이 헬레나와 결혼함으로써 동쪽 국경에 대한 걱정을 덜었다. 스테판 두샨의 목표는 비잔틴 황제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었고, 위협적인 투르크족에 맞서 교황과 함께 십자군을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그 후 그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테살로니키로 국경을 밀어붙였지만 도시의 강력한 성벽에 막혔다. 두샨은 1334년 안드로니코스의 평화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안드로니코스가 1341년에 사망하자 비잔틴에서 내전이 재개되었다. 한쪽 편인 요한 6세 칸타쿠제노스는 두샨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세르비아에서 망명을 허가받았다. 그러나 테살리아의 총독이 칸타쿠제노스를 황제로 인정하자 두샨은 지원을 중단하고 입장을 바꿨다. 이때 칸타쿠제노스는 셀주크 투르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투르크족은 처음으로 유럽 땅에 발을 들였다.제국의 헌법인 두샨 법전(Dušanov zakonik|두샤노브 자코니크sr)은 1349년에 제정되었고 1354년에 수정되었다. 이 법전은 로마법-비잔틴 법에 기초했다. 법적 법적 이식은 두샨 법전의 171조와 172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는 사법적 독립을 규정했다. 이 조항들은 비잔틴 법전 바실리카 (7권, 1, 16–17)에서 가져온 것이다. 두샨은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고 국가 경제를 강화했다. 세르비아는 번성하여 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와 문화 중 하나가 되었으며, 높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명성을 얻었다.
두샨은 1355년 12월 47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국왕 | 재위 기간 | 비고 |
---|---|---|
![]() 강력한 | 1331–1355 |
4. 2. 제국의 쇠퇴와 네마니치 왕조의 단절 (1355-1371)
두샨 황제 사후, 세르비아 제국은 급속도로 쇠퇴한다. 제국 각지에서 제후들이 자립하면서 두샨의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는 황위를 단독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므르냐브체비치 가문의 브카신 므르냐브체비치와 공동 통치를 해야 했다. 브카신은 발칸반도에 상륙한 오스만 제국에 맞섰으나 1371년 마리차 전투에서 전사했다. 같은 해 우로시 5세도 사망하여 네마니치 왕조는 단절되었다. 이후, 제후들이 할거하는 상황 속에서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가 가장 유력한 군주로서 주도적인 입지를 굳혀갔다.
5. 제국 멸망 이후
1371년 마리차 강 전투와 스테판 우로시 5세의 사망으로 네마니치 왕조가 단절된 이후, 세르비아는 여러 군주들이 난립하는 혼란기를 겪었다. 이 시기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가 가장 유력한 군주로 부상했으며,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1세와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전사했다.
라자르 사후, 그의 아들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세르비아 공국을 통치하며 헝가리 왕국과의 균형 외교를 통해 국가를 유지했다. 스테판과 그의 조카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스메데레보를 거점으로 통치했다.
주라지 사후, 세르비아는 내분과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쇠퇴하였고, 1459년 스메데레보가 함락되면서 중세 세르비아 국가는 멸망했다.
5. 1.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와 코소보 전투 (1371-1389)
1371년 마리차 강 전투에서 므르냐브체비치 가문의 브카신이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고, 같은 해 스테판 우로시 5세마저 사망하면서 네마니치 왕조가 단절되었다. 이후 여러 군주들이 난립하는 상황 속에서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가 가장 유력한 군주로 떠올랐다.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1세의 침공에 맞서, 라자르는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군과 격돌했으나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 전투 직후 무라트 1세가 세르비아 귀족 밀로쉬 오빌리치에게 암살당하자, 라자르는 그 보복으로 처형되었다.
5. 2. 오스만 제국의 지배와 세르비아 공국의 멸망 (1389-1459)
라자르 사후, 그의 아들 스테판 라자레비치(1389년 - 1427년)가 뒤를 이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의 전제공 칭호를 사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세르비아 공국의 통치자였다. 라자레비치와 그의 조카 주라지 브란코비치(1427년 - 1456년)는 도나우 강변의 스메데레보를 거점으로, 남쪽의 오스만 제국과 북쪽의 헝가리 왕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펼치며 국가를 유지했다.대수 | 초상 | 이름 | 출생년도 | 재위 | 사망년도 | 비고 |
---|---|---|---|---|---|---|
초대 | -- |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 (Лазар Хребељановић, Lazar Hrebeljanovićsr) | 1329년 | 1371년 - 1389년 | 1389년 | |
제2대 | -- | 스테판 라자레비치 (Стефан Лазаревић, Stefan Lazarevićsr) | 1377년 | 1389년 - 1427년 | 1427년 |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아들 |
주라지 사후, 세르비아에서는 정변이 잇따랐고, 오스만 제국은 이를 틈타 세르비아를 점차 병합해 나갔다. 1459년 6월, 스메데레보는 오스만 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로써 중세 세르비아 국가는 멸망했다.
대수 | 초상 | 이름 | 출생 | 재위 | 사망 | 비고 |
---|---|---|---|---|---|---|
초대 | -- | 주라지 브란코비치(Ђурађ Бранковић, Djuradj Brankovićsr) | 1377년 | 1427년-1456년 | 1456년 |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조카,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의 외손 |
제2대 | -- | 라자르 브란코비치(Лазар Бранковић, Lazar Brankovićsr) | 1421년 | 1456년-1458년 | 1458년 | 주라지 브란코비치의 막내 아들 |
제3대 | -- | 스테판 브란코비치(Стефан Бранковић, Stefan Brankovićsr) | 1417년 | 1458년-1459년 | 1476년 | 라자르 브란코비치의 형 |
제4대 | -- | 스테판 토마셰비치(Стефан - Стјепан Томашевић Котроманић, Stefan- Stjepan Tomašević Kotromanićsr) | 1438년 | 1458년/1459년3월 21일-6월 30일 (보스니아 왕으로서 1461년-1463년) | 1463년 | 보스니아 왕자, 라자르 브란코비치의 사위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