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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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지신보는 1882년 후쿠자와 유키치가 창간한 일본의 신문이다. 창간 당시 국권 옹호와 경제 중시를 내세웠으며, 만화 게재와 요리 레시피 소개 등 획기적인 구성을 선보였다. 로이터 통신과의 독점 계약, 특파원의 특종 보도로 영향력을 확대했고, 도쿄 5대 신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간토 대지진 이후 실적 악화, 도쿄니치니치 신문과의 합병, 복간, 산케이 신문으로의 합병 등 변화를 겪었다. 지지신보는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제국주의적 성향을 보였다는 부정적 평가를 함께 받으며, 대한민국과의 관계에서도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모두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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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신보 - [회사]에 관한 문서 | |
---|---|
일반 정보 | |
![]() | |
유형 | 일간지 |
크기 | 블랭킷판 |
언어 | 일본어 |
창간 | 1882년 3월 1일 |
폐간 | 1955년 10월 31일 |
전신 | 민간 잡지 공포일지 |
사업자 | |
본사 | |
임원진 | |
대표이사 사장 | 스즈키 다카토시 (대표 이사 사장 겸 산케이신문사 고문) |
주식 정보 | |
자본금 | 7,000만 엔 |
가격 정보 (1887년 기준) | |
1부 | 2전 |
월 구독료 | 50전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후쿠자와 유키치 |
추가 정보 | |
비고 | (이후에는 산케이신문도쿄 본사판에 합동) |
2. 역사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정부 요인의 요청으로 친정부 성향의 신문을 창간할 계획이었으나, 1881년 메이지 14년의 정변으로 오쿠마 시게노부 파벌이 실각하면서 계획이 좌절되었다. 게이오기주쿠 출판국은 독자적으로 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정, 1882년 3월 1일 지지신보를 창간했다.
지지신보는 국제 정세에 관한 기사를 많이 다루었으며, 국권론(国権論)을 주장하며 조선과 중국에 관한 논설을 자주 다루었다. 조약 개정 문제, 오사카 사건, 조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지지신보는 대외 강경론을 주장했다. 창간 당시부터 "국권황장(國權皇張)", "불편부당(不偏不黨)"을 내세우며, 정치 중심의 다른 신문과 달리 경제를 중시했다.
1896년, 지지신보는 로이터 통신과 독점 계약을 체결하여 국제 뉴스를 보도하고 영향력을 확대했다. 1921년 파리 강화 회담과 워싱턴 군축 회의에서 특파원 이토 마사노리가 세계적인 특종을 보도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메이지 말기에는 신문 업계 대표 2명 중 1명을 지지신보에서 선출할 정도로 업계 내 지위가 높아졌다. 다이쇼 중기에는 "일본 제일의 지지신보"라는 평가를 받으며 도쿄니치니치 신문, 호치 신문, 국민 신문, 도쿄 아사히 신문과 함께 "도쿄 5대 신문" 중 하나로 불렸다.
간토 대지진의 영향으로 실적이 악화되기도 했으나, 1932년 무토 산지가 경영권을 획득하고 재계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기사를 연재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그러나 무토 산지가 암살되고, 제인 사건 관련자들이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지지신보의 실적은 다시 악화되었다.
1936년, 지지신보는 도쿄니치니치 신문(현 마이니치 신문)에 합병되었다. 1943년 도쿄니치니치 신문이 오사카마이니치 신문과 제호를 통일하여 마이니치 신문이 되기 전까지 약 7년간 도쿄니치니치 신문 제호 아래에 '지지신보 합동(合同)'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1945년 종전 후, 1946년 1월 1일 지지신보가 복간되었으나, 1955년 산케이 신문과 합병하여 '''산케이 지지'''(산케이 지지)로 제호를 변경했다. 이후 산케이 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면서, 현재 "지지신보"의 제호 등의 권리 일체는 '''주식회사 지지신보사'''(2대)가 보유하고 있다. 2대 법인은 2024년 9월 11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회사 해산을 결의했고, 2025년 2월까지 청산을 완료하고 등기부가 폐쇄될 예정이다.[3]
2. 1. 창간과 초기 활동 (1882년 ~ 1890년대)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정부 요인의 요청으로 친정부 성향의 신문을 창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881년 메이지 14년의 정변으로 오쿠마 시게노부 파벌이 실각하면서 계획이 좌절되었다. 이미 기자와 인쇄 기계를 준비했던 게이오기주쿠 출판국(현 게이오기주쿠 대학 출판회)은 독자적으로 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정, 1882년 3월 1일 지지신보를 창간했다.[16]지지신보는 일본 신문 최초로 만화를 게재하고 요리 레시피를 싣는 등 획기적인 구성을 선보였다.[16] 창간 당시부터 "국권황장(國權皇張)", "불편부당(不偏不黨)"을 내세우며, 정치 중심의 다른 신문과 달리 경제를 중시했다. 발행 부수는 초기 1,500부에서 2년 후 5,000부로 성장했다.[20]
지지신보는 국제 정세 관련 기사가 많았다. 후쿠자와는 국권론(国権論)을 주장하며, 조선과 중국에 관한 논설을 자주 다루었다.[17] 미토번 출신 게이오 동창인 다카하시 요시오, 와타나베 오사무, 이사카 나오모토, 이시카와 간메이 등이 국권론을 지지했으며, 미토중학 출신 마쓰키 나오미도 협력했다.[18] 조약 개정 문제, 오사카 사건, 조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지지신보는 대외 강경론을 주장했다.
1885년 1월 18일, 오이 겐타로 일파가 주도한 우에노 공원 전국 유지 대운동회에서 3,000여 명이 시가지를 행진한 뒤 지지신보사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반대 논조를 가진 조야신문사 앞에서 방화 위협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 출동으로 큰 문제는 없었다.[19]
2. 2. 국권론과 제국주의 (1890년대 ~ 1910년대)
지지신보는 국제 정세에 관한 기사를 많이 다루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조카이자 초대 사장 겸 주필인 나카가와 히코지로는 사설을 통해 국권론을 주장했으며, 조선과 중국에 관한 다양한 동양 정략을 논했다.[17] 미토번 출신의 게이오 동창인 다카하시 요시오, 와타나베 오사무, 이사카 나오모토, 이시카와 간메이가 국권론을 이어받았고, 미토 중학교(현재의 이바라키현립 미토 제1고등학교) 출신 마쓰키 나오미도 협력했다.[18] 조약 개정 문제, 오사카 사건, 임오군란 등 조선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지지신보는 대외 강경론을 주장했다.1885년 1월 18일, 오이 겐타로 일파가 이끄는 우에노 공원 전국 유지 대운동회 참가자 3,000여 명이 시가지를 행진한 뒤 지지신보사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반대 논조를 가진 조야 신문사 앞에서 방화 위협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 출동으로 큰 문제는 없었지만, 이는 지지신보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19]
지지신보는 창간 당시부터 '국권 앙양', '불편부당'을 내세우며 정치를 중시했던 다른 신문과 달리 경제를 중시했다. 이러한 특징 덕분에 발행 부수는 2년 만에 1,500부에서 5,000부로 크게 증가했다.[20]
1896년, 지지신보는 로이터 통신과 독점 계약을 체결하여 국제 뉴스를 보도하고 영향력을 확대했다. 1921년 파리 강화 회담과 워싱턴 군축 회의에서 특파원 이토 마사노리가 세계적인 특종을 보도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메이지 말기에는 신문 업계 대표 2명 중 1명을 지지신보에서 선출할 정도로 업계 내 지위가 높아졌다.[21] 다이쇼 중기에는 도쿄니치니치 신문(현: 마이니치 신문도쿄 본사판), 호치 신문(현: 스포츠 호치), 국민신문(현: 도쿄 신문), 도쿄 아사히 신문(현: 아사히 신문도쿄 본사판)과 함께 "도쿄 5대 신문" 중 하나로 불리며 "일본 제일의 지지신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05년에는 오사카에도 진출했다.
2. 3. 다이쇼 시대와 언론 경쟁 (1910년대 ~ 1930년대)
1896년 로이터 통신과 독점 계약을 체결하여 1921년의 파리 강화 회의, 1922년의 워싱턴 회담에서 특파원 이토 마사노리가 세계적인 특종을 보도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다이쇼 중기에는 도쿄니치니치 신문, 호치 신문, 국민 신문, 도쿄 아사히 신문과 함께 도쿄 5대 신문으로 불렸다.1905년 오사카에 진출했으며, 메이지 말기에는 신문업계 대표 2명을 선출할 때 한 명은 지지신보에서, 나머지 한 명은 추첨으로 결정하여 지지신보의 업계 내 지위가 높아졌다.[21] 하지만 간토 대지진의 영향으로 실적이 악화되어 부수가 감소했다.
다이쇼 후기에서 쇼와 전기에 걸쳐 도쿄의 신문 점유율은 호치 신문(후의 요미우리 신문), 도쿄니치니치 신문(후의 마이니치 신문), 도쿄 아사히 신문(후의 아사히 신문) 3사가 상위를 차지하고, 지지신보와 국민 신문이 뒤쫓는 형태였다. 또한 『만조보』 이하의 작은 신문들은 부수 경쟁에서 탈락해 갔다.
2. 4. 제인 사건과 도쿄니치니치 신문과의 합병 (1930년대 ~ 1945년)
1932년, 가네보 방적 사장이자 정계에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무토 산지가 지지신보의 경영권을 획득했다. 무토 산지는 1934년 1월 17일부터 당시 일본 재계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특집 기사 "반초회를 폭로한다"를 연재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8] 이는 제인 사건으로 이어져, 적자에 시달리던 지지신보의 실적을 흑자로 전환시키고 부수도 크게 늘리는 계기가 되었다.그러나 무토 산지가 괴한에게 사살되면서 반초회에 대한 추궁은 중단되었고, 제인 사건으로 검거된 사람들은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는 사이토 마코토 내각을 무너뜨리는 정치적 음모에 이용되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지신보의 실적은 다시 악화되었다.
경영 개선을 위해 게이오기주쿠 출신으로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정치부장이었던 다카이시 신고로에게 경영 지원을 요청했지만, 도쿄니치니치 신문의 경영난으로 인해 거절당했다. 대신 마에다 히사키치가 추천되어 1935년 11월부터 지지신보 경영에 참여했지만, 경영 방식의 차이로 인해 실적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1936년 12월 25일, 다카이시는 책임을 지고 지지신보를 도쿄니치니치 신문(현 마이니치 신문)에 합병시켰다.[9] 1943년 1월 1일, 도쿄니치니치 신문은 오사카마이니치 신문과 제호를 통일하여 『마이니치 신문』이 되었는데, 그 이전까지 약 7년간 도쿄니치니치 신문 제호 아래에 '지지신보 합동(合同)'이라는 문구가 표기되어 있었다.
2. 5. 복간과 산케이 신문으로의 합병 (1945년 ~ 1955년)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GHQ의 점령 하에서 일본신문연맹 등의 용지 할당 기능이 정지되었다가 신문 및 출판 용지 할당위원회가 조직되어 신문 발행이 가능해졌다.1946년 1월 1일, 전전의 지지신보에서 주필로 근무하던 이타쿠라 다쿠조와 산케이 신문을 이끌던 마에다 히사키치 등에 의해 지지신보가 복간되었다.[22][23][24] 그러나 복간 후 마에다가 공직추방당하면서 지지신보사와 산케이 신문사의 경영에서 잠시 손을 떼게 되었다.
복간 당시에는 신흥지 붐으로 명문 부활이라는 칭송을 받았으나, 다른 신문들의 반격으로 곧 실적이 떨어졌다.
1950년 마에다 히사키치는 산케이 신문의 전국지화를 목표로 도쿄에 진출하여 이타쿠라 다쿠조의 후임으로 지지신보의 경영을 담당했다. 이때부터 산케이 신문과 형제 관계가 되었고, 1955년 결국 산케이 신문에 합병된다. 도쿄에서 발행하던 산케이 신문은 산케이지지(産経時事)로 제호를 바꿨다.
이후 지지신보는 오사카 본사와 제호를 맞춰 현재의 산케이 신문이 되었다. 처음에는 세로로 쓰인 제호 아래에 '지지신보 합동'이라는 문자를 병기했으나 1969년 가타카나로 제호를 고치면서 이 문자도 사라졌다.[25] 다만, 지지신보의 제호 및 저작권에 관한 일체의 권리는 여전히 산케이 신문사가 가지고 있다.
3. 오사카 지지신보
1905년(메이지 38년) 3월 15일 오사카에서 '''오사카 지지신보'''가 창간되었다. 처음에는 오사카 지지신보사라는 별도 법인에서 발행했지만, 1920년(다이쇼 9년) 6월 도쿄의 시사신보사에 흡수 합병되었다. 그러나 1923년(다이쇼 12년) 8월 다시 분리 독립했으나 경영 부진으로 1930년(쇼와 5년) 3월 고베 신문사에 인수되었다. 1931년(쇼와 6년) 8월 1일, 교토 일일 신문사와 함께 고베 신문사에 흡수 합병되어, 게이한신(京阪神) 지역 신문 연합인 '''산토고도 신문'''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오사카 지지신보는 산토고도 신문 오사카 본사에서 계속 발행되었다.
1940년(쇼와 15년) 7월 30일 산토고도 신문사가 해체되면서 오사카 지지신보는 다시 독립 회사인 오사카 지지신보사로 재출범했다. 얼마 후 요미우리 신문사(현 요미우리 신문 그룹 본사)가 주식을 매입하여 경영에 참여했으나, 1941년(쇼와 16년) 12월 8일 "석간 오사카 신문"과 합병하여 '''오사카 신문'''으로 바뀌며 폐간되었다.
1946년(쇼와 21년) 2월 1일, 마에다에 의해 복간되었지만, 1951년(쇼와 26년) 6월 다시 오사카 신문에 합병되어 폐간되었다. 이후 오사카 신문은 2002년(헤이세이 14년) 산케이 신문 오사카 본사판에 합병되어 폐간되었다.
4. 경제 지지신보
일본경제신문사는 전시통제로 1942년에 일본산업경제(현 일본경제신문)가 탄생할 때, 전신인 중외상업신보가 도쿄에서 발행되던 '''경제지지신보'''라는 신문을 합병했다고 사사(社史)에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문에 지지신보사가 관여했는지 등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1]
5. 주요 인물
이름 | 역할 및 활동 |
---|---|
후쿠자와 유키치 | 창립자이자 초대 사주 |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 창간 당시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신문 창간을 요청한 인물들 |
오쿠마 시게노부 | 메이지 14년의 정변으로 실각한 정치가 |
오이 겐타로 | 오이 겐타로 사건 주동 인물 |
이토 마사노리 | 파리 강화 회의, 워싱턴 회담 등에서 특종을 보도한 기자 |
무토 산지 | 제인 사건을 보도한 사장 |
다카이시 신고로 | 도쿄니치니치 신문과의 합병을 주도한 인물 |
마에다 히사키치 | 도쿄니치니치 신문 합병과 산케이 신문과의 합병에 관여한 인물 |
이타쿠라 다쿠조 | 전후 지지신보 복간 당시 사장 |
6. 평가와 영향
후쿠자와 유키치가 창간한 지지신보는 국권황장(国権皇張)과 불편부당(不偏不党)을 내세워 다른 신문과 달리 경제를 중시했다. 발행 부수는 1,500부에서 2년 만에 5,000부로 늘었다.[20] 1896년 로이터 통신과 독점 계약을 맺고 1921년 파리 강화회담, 1922년 워싱턴 회담에서 특종을 보도하여 주목받았다. 이후 도쿄니치니치 신문, 호치 신문, 국민 신문, 도쿄 아사히 신문과 함께 도쿄 5대 신문으로 불렸다.
1905년 오사카에 진출했고, 메이지 말기에는 신문업계 대표 2명 중 1명을 지지신보에서 선출할 정도로 업계 내 지위가 높았다.[21] 그러나 간토 대지진으로 실적이 악화되어 부수가 줄었다. 다이쇼 후기에서 쇼와 전기에는 호치 신문(요미우리 신문), 도쿄니치니치 신문(마이니치 신문), 도쿄 아사히 신문(아사히 신문) 3사가 도쿄 신문 점유율 상위를 차지하고, 지지신보와 국민 신문이 뒤쫓았다.
1934년 무토 산지 사장의 「반초회(番町会)를 파헤치다」는 재계 부정을 규탄하는 특집기사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제인 사건에도 영향을 미쳐 지지신보의 실적을 개선하고 부수를 늘렸다. 그러나 무토 사장이 피살되면서 시리즈는 종료되었고, 1936년 도쿄니치니치 신문에 합병되어 지지신보사 법인은 해산되었다.
6. 1. 부정적 평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창간한 지지신보는 국권론(国権論)을 주장하며 조선과 중국에 대한 논설을 자주 다루었다.[17] 이는 제국주의 일본의 팽창 정책을 옹호하고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는 등 시대적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불편부당(不偏不党)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특정 정파나 이익 집단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비판도 있다.6. 2. 대한민국과의 관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는 등 긍정적인 관계를 맺었다.[17] 하지만 일본 제국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고, 을사늑약 체결을 지지하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1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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