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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환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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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직환전쟁은 1920년 중화민국 북양 정부 시기, 직예파와 안휘파 군벌 간에 벌어진 무력 충돌이다. 원세개 사후 북양군벌 간 권력 다툼, 부원지쟁, 5.4 운동 등을 거치며 직예파와 안휘파의 갈등이 심화된 것이 주요 원인이다. 1920년 7월, 직예파가 안휘파를 공격하며 시작되었으며, 봉천파의 개입으로 안휘파가 패배하고 돤치루이는 사직했다. 이 전쟁으로 직예파의 조곤과 오페이푸가 세력을 확장했으며, 1차 월계전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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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환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직환 전쟁
직환 전쟁에서 승리한 직봉 연합군 장령 합영
직환 전쟁에서 승리한 직봉 연합군 장령 합영
날짜1920년 7월 14일 - 7월 23일
장소중화민국 경조, 천진, 고비점, 경한철로 지역
결과직계 승리 및 북양정부 통치권 탈취, 환계 패배 및 와해
교전 세력
교전국 1직계
봉계
교전국 2환계
지휘관
직계/봉계차오쿤
우페이푸
왕청빈
옌샹원
수야오난
차오잉
펑서우신
둥정궈
상더취안
거수핑
쑨위에
왕잔위안
펑위샹
장쭤린
장징후이
청치엔
자오헝티
환계돤치루이
쉬수정
돤즈구이
취통펑
천원윈
웨이종한
리진차이
리우쉰
쑹쯔양
우광신
병력 규모
직군50,000명
봉군70,000명
몽고변방군40,000명
안무군40,000명 (중립 유지)
강남군50,000명 (중립)
기타 정보
참고 자료直皖戰爭

2. 원인

1916년 6월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사망한 후, 중화민국북양군벌 간의 권력 투쟁 시대로 접어들었다. 중화민국임시약법에 따라 부총통 리위안훙(黎元洪)이 대총통직을 계승했지만 실권은 없었고, 국무총리 돤치루이(段祺瑞)와 부총통이 된 펑궈장(馮國璋) 등 군부 실력자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북양군은 돤치루이를 중심으로 한 환계(皖系)와 펑궈장을 중심으로 한 직계(直系)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중앙 정부의 권력 공백과 군벌 간의 대립은 총통부와 국무원 간의 갈등인 부원지쟁(府院之爭)으로 표출되었다. 제1차 부원지쟁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문제를 둘러싼 리위안훙과 돤치루이의 대립이었으며, 이는 장쉰(장훈)(張勳)의 복벽 시도와 돤치루이의 재집권으로 이어졌다. 이후 펑궈장이 총통 대리가 되었으나, 평화 통일을 주장하는 펑궈장(직계)과 무력 통일 및 호법운동 세력 토벌을 주장하는 돤치루이(환계) 사이에 제2차 부원지쟁이 발생하며 두 파벌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돤치루이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심복을 요직에 앉히는 등 노골적인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우페이푸(吳佩孚)를 비롯한 직계 군관들은 명령 불복종과 독자 행동으로 맞섰다. 1919년 5.4운동 당시 직계는 시위를 암암리에 지원하며 환계 정부에 타격을 입히려 시도하는 등 갈등은 전방위로 확산되었다.

결정적으로 1919년 12월, 직계의 지도자였던 펑궈장이 병사하자 차오쿤(曹錕)과 우페이푸가 직계를 이끌게 되었다. 이들은 '환계 타도(倒皖)'를 내세우며 돤치루이의 핵심 측근인 쉬수정(徐樹錚)과 안복계(安福系) 세력 제거를 목표로 삼았다. 이처럼 위안스카이 사후 지속된 권력 투쟁과 북양군벌의 분열, 두 차례의 부원지쟁을 거치며 격화된 직계와 환계의 대립은 결국 무력 충돌인 직환전쟁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2. 1. 제1차 부원지쟁

1916년 6월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자, 중화민국 임시 약법에 따른 법통을 회복한다는 명분 아래 부총통이었던 리위안훙이 중화민국 대총통직을 계승하였고, 펑궈장이 부총통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실권은 돤치루이와 펑궈장 등 북양군벌 실력자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리위안훙은 명목상의 총통에 불과했다.[1]

1917년, 국무총리였던 돤치루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대독일 선전포고)을 강하게 주장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반면 리위안훙 총통은 참전에 반대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깊어졌는데, 이를 제1차 부원지쟁(府院之爭, 총통부와 국무원의 대립)이라고 부른다.[1]

정치적 위기에 몰린 리위안훙은 당시 독군단의 맹주였던 장쉰에게 변군(돤치루이에 반대하는 군벌 세력)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와서 중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장쉰은 1917년 7월 1일, 오히려 군대를 이용해 리위안훙을 축출하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복위시키는 장훈복벽을 일으켰다.[1]

이에 돤치루이는 '토역군(討逆軍, 역도를 토벌하는 군대)'을 조직하여 신속하게 장쉰의 복벽 세력을 진압했다. 복벽 사건은 불과 12일 만에 실패로 끝났지만, 이 과정에서 돤치루이는 리위안훙마저 축출하고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후 펑궈장이 총통 대리로 취임하고 돤치루이는 다시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자리에 올라 실권을 장악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양군은 펑궈장을 중심으로 한 직계(直系)와 돤치루이를 중심으로 한 환계(皖系)로 본격적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1]

2. 2. 제2차 부원지쟁

1917년 7월, 단기서(돤치루이)는 장훈복벽을 진압하고 여원홍(리위안훙)마저 축출한 뒤, 풍국장(펑궈장)을 대총통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다시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북양군은 풍국장을 중심으로 한 직계(直系)와 단기서를 중심으로 한 환계(皖系)로 분화되었다.

총통이 된 풍국장은 평화적인 방식으로 남북 통일을 이루고자 했으나, 실권을 쥔 단기서는 임시약법 폐기, 국회 해산, 무력 통일을 강하게 주장했다. 특히 단기서는 파병을 통해 남방에서 손문(쑨원), 당계요(탕지야오)],

2. 3. 직예파와 안휘파의 갈등 심화

1916년 원세개 사후 북양군은 풍국장을 중심으로 한 직계와 단기서를 중심으로 한 환계로 나뉘었다. 풍국장은 평화적인 통일을 주장한 반면, 단기서는 중화민국임시약법을 폐기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무력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손문 등이 이끄는 남방의 호법운동 세력을 토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노선 차이는 결국 제2차 부원지쟁으로 이어지며 두 파벌 간의 갈등을 키웠다.

1917년 8월, 단기서는 자신의 심복인 부량좌를 호남독군으로 임명하여 환계의 세력을 넓히려 시도했다. 이에 반발한 직계 군관들은 파병을 중단하고 전쟁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직계와 환계의 갈등은 수면 위로 드러났다.

갈등은 1918년 8월 직계의 주요 장군인 오패부가 독자적으로 전쟁 중단을 선언하고 군대를 북쪽으로 돌리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같은 해 9월, 서세창이 새로운 총통으로 선출되었고, 풍국장과 단기서는 표면적으로 함께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단기서는 여전히 막후에서 국무원을 통제하며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1919년 5.4 운동이 발발하자, 직계는 은밀하게 산둥성후베이성 등지에서 일어난 시위를 지원했다. 이는 단기서 정부에 정치적 타격을 주고 민심을 직계 쪽으로 돌리려는 계산이었다. 같은 해 12월, 직계의 지도자였던 풍국장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직계와 환계의 대립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풍국장의 뒤를 이어 직계를 이끌게 된 조곤오패부는 환계를 타도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특히 환계의 핵심 인물인 서수쟁과 안복계 세력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갈등의 격화는 결국 직환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3. 과정

1920년 4월, 직계의 조곤은 보정에서 직례성, 강소성, 강서성, 호북성, 하남성, 봉천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8개 성 군벌 대표 회의를 소집하여 환계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하였다. 5월에는 오패부가 이끄는 직군(直軍)이 형양에서 북상하여 보정에 집결하며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7월 들어 직계는 총통 서세창에게 환계의 핵심 인물인 서수쟁의 서북변방총사령 직위를 해제시키도록 강요했다. 이에 단기서는 격분하여 7월 8일, 서세창에게 반대로 오패부의 직무 해제를 명령하게 만들면서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해졌고, 총동원 태세에 돌입하였다.

7월 14일, 마침내 전쟁이 발발하여 양군은 경한철로와 진경철로 일대에서 격돌하였다. 초기에는 환군의 공세가 있었으나, 오패부가 이끄는 직군이 봉군과 연합하여 반격에 성공하면서 전세는 급격히 직계-봉천 연합군 측에 유리하게 기울었다.

결국 7월 19일, 단기서는 사임을 발표했고, 5일간의 짧은 전쟁은 환계의 대패로 끝났다. 환계의 주력인 변방군은 절반 이상 와해되었다. 7월 23일, 승리한 직군과 봉군은 북경에 입성하여 안복국회를 해산시키고, 왕읍당, 서수쟁, 단지귀 등 환계 핵심 인물 10명에게 수배령을 내렸다. 서수쟁 등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7월 26일, 서세창 총통은 오패부에 대한 직무 해제 처분을 공식적으로 취소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로 안휘파는 몰락하고 직예파와 봉천파가 중앙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3. 1. 전투의 전개

1920년 7월 1일, 조곤과 오패부는 '직군장사고변방군장사서(直軍將士告邊防軍將士書)'를 발표하며 환계(皖系)에 대한 공세의 포문을 열었다. 7월 4일, 직계(直系)는 총통 서세창에게 압력을 넣어 서수쟁의 서북변방총사령(西北邊防總司令) 직위를 해제시키고 명목상의 직책인 '원위장군(遠威將軍)'만을 남기도록 강요했다. 이에 단기서는 크게 분노하여 7월 8일, 서세창에게 반대로 오패부의 직무를 해제하라는 명령을 내리도록 압박했다. 이로써 직계와 환계 양측은 전면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총동원 태세에 돌입하였다.

7월 14일, 마침내 직환전쟁이 발발하였다. 양측 군대는 경한철로(京漢鐵路) 노선의 탁주(涿州), 고비점(高碑店), 유리하(琉璃河) 일대와 진경철로(津京鐵路) 노선에서 격돌하였다.

직군은 스스로를 '토역군(討逆軍)'이라 칭하며 두 개의 전선으로 나뉘어 공격을 개시했다. 주력 부대는 북경에서 보정에 이르는 경한철로를 따라 형성된 서로(西路)에 배치되었으며, 오패부가 전적지휘부총사령(前敵指揮部總司令)과 서로총지휘(西路總指揮)를 겸임했다. 동로총지휘(東路總指揮)는 조영(曹瑛)이 맡았고, 제1혼성여단장 왕승빈은 정주에 주둔하며 후로총지휘(後路總指揮)로서 후방을 담당했다.

환군은 '정국군(定國軍)'을 표방하며 단기서가 총사령(總司令), 서수쟁이 부총사령(副總司令) 겸 참모장(參謀長), 단지귀가 전적지휘부총사령(前敵指揮部總司令)을 맡았다. 전쟁 초기에는 환군의 공세가 매서웠다. 환군 서로 제1사단장 곡동풍이 이끄는 부대가 직군을 맹렬히 공격하여 직군은 고비점까지 후퇴해야 했다. 환군 동로에서는 서수쟁이 서북변방군 4개 독립여단을 이끌고 장장(張莊), 채촌(蔡村), 양촌(楊村) 방면으로 진격했다.

7월 15일, 상해의 114개 단체가 전보를 통해 오패부 지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며 직군에 힘을 실어주었다.

7월 17일, 전세가 급변했다. 오패부는 정예 병력을 이끌고 송림점(松林店)을 기습 공격하여 환군 서로 사령관인 곡동풍을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로 인해 환군 서로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직군은 기세를 몰아 탁주를 점령하고 장신점(長辛店)까지 추격했다. 한편, 동로에서는 서수쟁의 부대가 직군을 밀어내고 북창(北倉)과 이가취(李家嘴) 일대까지 진출했으나, 이때 봉군(奉軍)의 대규모 병력이 국경 지대로 이동하여 직군과 연합하면서 환군은 동로에서도 패배하게 되었다.

7월 19일,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단기서는 사임을 발표했다. 전쟁은 불과 5일 만에 환군의 참패로 끝났으며, 단기서가 야심차게 창설했던 수만 명 규모의 변방군(邊防軍)은 절반 이상이 와해되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7월 23일, 승리한 직군과 봉군은 북경으로 입성하여 남북원영방(南北苑營房)을 접수했다. 이들은 즉시 안복국회의 해산을 명령하고, 환계의 핵심 인물인 왕읍당, 서수쟁, 단지귀 등 10명에게 수배령을 내렸다. 서수쟁 등 주요 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7월 26일, 서세창은 앞서 단기서의 압력으로 내렸던 오패부에 대한 처분을 공식적으로 취소하였다.

3. 2. 안휘파의 패배

7월 17일, 오패부는 군대를 이끌고 송림점(松林店)을 기습하여 안휘파 서로 제1사 사단장 곡동풍(취통펑)을 생포하였고, 안휘파 서부 전선은 궤멸하였다. 직예파 군대는 탁주를 점령하고 장신점까지 추격하였다. 한편, 동부 전선에서는 안휘파 서수쟁 부대가 직예파 군대를 몰아내고 북창(北倉)과 이가취(李家嘴) 일대까지 진격했으나, 이때 봉천군(奉軍) 대군이 변경을 압박하여 직예파 군대와 합류하면서 전세는 다시 직예-봉천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돌아섰다.

7월 19일, 압박을 받고 단기서는 사직하였다. 이 전쟁은 5일 동안 벌어졌으며 안휘파는 대패하였고, 새로 조직했던 변방군(邊防軍) 수만 명 중 절반 이상을 잃었다.

7월 23일, 직예파와 봉천파 군대는 북경으로 돌아와 남북원영방(南北苑營房)을 접수하였다. 연합군은 안복국회(安福國會)의 해산을 명령하고 왕읍당(왕이탕), 서수쟁, 단지귀(돤즈구이) 등 10명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다.

인물조치
왕읍당(왕이탕)수배
서수쟁수배, 일본 망명
단지귀(돤즈구이)수배
기타 7명수배



서수쟁 등 일부 인물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7월 26일, 총통 서세창은 이전에 단기서의 강요로 내렸던 오패부에 대한 처분을 취소하였다.

4. 결과 및 영향

이 전쟁에서 양측의 사상자는 200여 명에 달했다.[1] 전쟁 후 조곤은 서세창에 의해 직례(直隷)·산동(山東)·하남(河南) 3성의 순열사(巡閱使), 즉 직로예삼성순열사(直魯豫三省巡閱使)로 임명되었고, 오패부는 부사(副使)가 되어 직로예순열부사서(直魯豫巡閱副使署)를 세우는 등 직계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1]

4. 1. 제1차 월계전쟁과의 관계

직환전쟁 이후, 직계 군벌은 구계계(舊桂系) 군벌 육영정과 연합하였다. 이들은 북경에서 환계 군벌 단기서를 몰아내는 동시에, 광둥(廣東)에서는 손문(孫文)의 세력을 축출하기로 약속했다. 이러한 합의에 따라 직환전쟁이 끝난 직후인 1920년 8월 11일, 구계계 부대는 광둥 조산(潮汕)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진형명(陳炯明) 휘하의 건국월군(建國粤軍) (또는 국민혁명군 제4군)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월계전쟁(第一次粤桂戰爭)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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