돤치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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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돤치루이(段祺瑞)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중국의 군벌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회군 출신으로 북양무비학당에서 포병을 전공하고 독일에서 유학하며 군사적 역량을 키웠다. 위안스카이의 심복으로 북양군에서 두각을 나타내 '북양삼걸'로 불렸으며, 중화민국 건국 후 육군총장, 국무총리 대리 등을 역임하며 위안스카이 타도와 신해혁명 진압에 기여했다. 이후 북양정권을 수립하고 안휘파 군벌의 수장이 되었으나, 권력 투쟁과 군벌 간의 갈등 속에서 여러 차례 정권을 장악하고 잃는 과정을 반복했다. 1924년 임시집정으로 복귀했지만, 3·18 사태의 책임을 지고 실각한 후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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돤치루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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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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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단기서 (段祺瑞) |
로마자 표기 | Duan Qirui |
한어 병음 | Duàn Qíruì |
웨이드-자일스 표기법 | Tuan Ch'i-jui |
출생일 | 1865년 3월 6일 |
출생지 | 청나라 안후이성 허페이시 |
사망일 | 1936년 11월 2일 |
사망지 | 중화민국 상하이시 |
국적 | 중국 |
자녀 | 딸 4명 |
소속 정당 | 안후이 군벌 |
교육 | 톈진 군사 학교 |
직업 | 군인, 정치인 |
충성 | 청나라 중화민국 (1912–1949) 안후이 군벌 |
군대 | 북양군 안후이 군벌 |
복무 기간 | 1885년–1920년 |
계급 | 장성 |
지휘 | 안후이 군벌 |
수상 | 질서공훈장 보광가화장 문호장 |
참전 | 의화단 운동 신해혁명 제2차 혁명 백랑의 난 만주 복고 호법 운동 직환 전쟁 |
정치 경력 | |
직책 | 중화민국 임시 집정 |
임기 시작 | 1924년 11월 24일 |
임기 종료 | 1926년 4월 20일 |
총리 | 쉬스잉 자더야오 |
전임자 | 황푸 (대행) |
후임자 | 후웨이더 (대행) |
직책 | 중화민국 국무총리 |
임기 시작 | 1916년 6월 26일 |
임기 종료 | 1917년 5월 23일 |
대통령 | 리위안훙 |
전임자 | 쉬스창 |
후임자 | 우팅팡 (대행) |
임기 시작 | 1917년 7월 14일 |
임기 종료 | 1917년 11월 22일 |
대통령 | 펑궈장 (대행) |
전임자 | 리징시 |
후임자 | 왕다셰 (대행) |
임기 시작 | 1918년 3월 23일 |
임기 종료 | 1918년 10월 10일 |
대통령 | 펑궈장 (대행) |
전임자 | 첸넝쉰 |
후임자 | 첸넝쉰 |
직책 | 중화민국 국무총리 대행 |
대통령 | 위안스카이 |
임기 시작 | 1913년 7월 19일 |
임기 종료 | 1913년 7월 31일 |
전임자 | 자오빙쥔 |
후임자 | 슝시링 |
직책 | 중화민국 육군부 장관 |
임기 시작 | 1912년 |
임기 종료 | 1915년 |
총리 | 탕사오이 루정샹 자오빙쥔 본인 (대행) 슝시링 쑨바오치 (대행) 쉬스창 |
전임자 | 신해혁명으로 직책 신설 |
후임자 | 저우쯔치 |
직책 | 참모총장 |
임기 시작 | 1916년 3월 |
임기 종료 | 1916년 4월 |
총리 | 쉬스창 |
전임자 | 펑궈장 |
후임자 | 왕스전 |
직책 | 육군부 장관 |
임기 시작 | 1916년 4월 |
임기 종료 | 1917년 5월 |
총리 | 돤치루이 |
전임자 | 왕스전 |
후임자 | 왕스전 |
총리 | 쉬스창 |
임기 시작 | 1915년 5월 |
임기 종료 | 1915년 8월 |
전임자 | 왕스전 (대행) |
후임자 | 슝시링 |
총리 | 쉬스창 |
임기 시작 | 1914년 5월 |
임기 종료 | 1915년 5월 |
전임자 | 자오빙쥔 |
후임자 | 왕스전 (대행) |
총리 | 탕사오이, 루정샹, 자오빙쥔 |
임기 시작 | 1912년 3월 |
임기 종료 | 1913년 12월 |
전임자 | (신설) |
후임자 | 저우쯔치 |
직책 | 육군부 장관 대행 |
총리 | 돤치루이 |
임기 시작 | 1917년 7월 |
임기 종료 | 1917년 11월 |
전임자 | 왕스전 |
후임자 | 왕스전 |
직책 | 허난성 도독 대행 |
임기 시작 | 1914년 2월 |
임기 종료 | 1914년 4월 |
전임자 | 장전팡 |
후임자 | 톈원례 |
직책 | 후베이성 도독 대행 |
임기 시작 | 1913년 12월 |
임기 종료 | 1914년 2월 |
전임자 | 리위안훙 |
후임자 | 돤즈구이 |
소속 국가 | 청나라 |
직책 | 호광총독 |
임기 시작 | 1911년 |
임기 종료 | 1912년 |
전임자 | 웨이광다오 |
후임자 | (폐지) |
2. 생애 초기
안휘성 출신으로 증국번과 이홍장이 지휘하던 회군에서 복무했던 단종문(段從文)과 그의 아내 범씨(范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리홍장과 같은 고향 출신이며, 조부인 단배(段佩)가 회군 장교였던 덕분에 고급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2] 그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안휘성 출신 돤치루이는 증국번과 이홍장이 지휘하던 회군에서 복무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885년 북양무비학당에 입학하여 포병을 전공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1889년 해외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 제국에서 2년간 군사학을 공부했다.[2] 귀국 후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에 들어가 그의 심복이 되었으며, 펑궈장, 왕스천과 함께 "북양삼걸"로 불렸다.
위안스카이의 측근으로 권력을 잡은 돤치루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문제로 인해 위안스카이와 갈등을 겪었다. 돤치루이가 전쟁부 장관으로서 북양군벌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 위안스카이의 군대 장악력을 약화시킨 것이 주요 문제였다. 돤치루이는 점차 독립적으로 행동하며 군사 인사 및 개혁 문제로 위안스카이와 대립했고, 결국 위안스카이는 돤치루이의 부상을 막기 시작했다. 1914년 말 돤치루이가 병에 걸리자, 1915년 5월 전쟁부 장관직에서 해임되었다.[19]
1917년 국무총리 재직 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둘러싸고 총통이었던 리위안훙(黎元洪)과 이른바 "부원지쟁(府院之爭)"이라는 권력 투쟁을 벌였다.[8] 이때 세력 공백을 이용하여 복고파 군벌인 장쉰(張勳)이 청나라의 선통제(宣統帝)를 복위하는 소동을 벌였으나, 20일 후에 돤치루이에게 진압되었다.[9] 돤치루이 정권이 국회와 임시 약법을 폐기하려고 하자, 쑨원은 이에 반대하며 호법운동을 펼칠 것을 주장했다.(1917년 7월)[19]
돤치루이는 안휘성 출신으로, 증국번과 이홍장이 지휘하던 회군(淮軍)에서 복무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85년 북양무비학당에서 포병을 전공하고, 1889년에는 독일 제국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에 들어가 그의 심복이 되었으며, 펑궈장, 왕스천과 함께 "북양삼걸"로 불렸다.[19]
1924년 펑위샹이 베이징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부정선거로 당선된 직계군벌의 수괴 차오쿤을 타도하고 돤치루이에게 복귀하여 북양정부의 임시집정에 취임할 것을 요청하였다.[15] 돤치루이는 1924년 11월 24일 임시집정으로 복귀했다. 돤치루이의 새 정부는 직예파에 의해 마지못해 수용되었는데, 돤치루이 자신이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중립적인 선택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대통령" 대신 "최고 책임자"로 불리면서 그 직책이 임시적이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약하다는 것을 암시했다. 돤치루이는 남쪽의 쑨원과 중국국민당에게 국가 통일을 위한 협상을 재개할 것을 촉구했다. 쑨원은 외세와의 "불평등 조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국민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다. 여론의 압력에 굴복한 돤치루이는 석 달 안에 새로운 국민회의를 약속했지만, 외세가 그의 정권에 대한 공식적인 승인을 바로 그 조약들을 존중하는 것을 조건으로 했기 때문에 "불평등 조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할 수는 없었다. 쑨원은 1925년 3월 12일에 사망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1933년 장제스는 일본군이 돤치루이를 이용할 것을 우려하여 그를 초청했고, 돤치루이도 이에 응하여 상하이로 이주했다.[17] 1935년 국민정부 위원에 임명되었으나, 실제로 취임하지는 않았다.[17]
돤치루이는 강경하고 권위적인 인물로 알려졌지만, 공직에는 큰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불교적 성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고독을 즐겼다.[19] 부하들에게 큰 권한을 위임하고 그들의 결정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군인 훈련이었으며, 정부 형태로는 원세개가 선호했던 일인 독재나 쑨원이 제안한 개방적이고 협의적인 형태보다는 소수의 강력한 인물들이 결정을 내리는 내각제를 선호했다.
1885년 북양무비학당에 입학하여 포병과를 전공하였고, 1889년 졸업 후 해외유학생으로 선발되어 2년간 독일 제국에서 군사학을 유학하였다. 중국에 돌아와서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던 북양군에 들어갔고, 톈진에서 병사들을 지휘감독하였다. 이 때, 위안의 심복이 되었으며, 펑궈장, 왕스천과 함께 "북양삼걸"로 불렸다.[2]
1896년 위안스카이의 신설 육군에 합류하여 포병대 통대 겸 수영학당 감독으로 군대의 근대화를 담당했다. 1901년 위안스카이가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이 되자, 그를 따라 보정으로 이동했다. 1903년 위안스카이가 련병처 회변대신에 취임하자, 위안스카이의 추천으로 돤치루이가 련병처 군령사 정사가 되었고, 부도통의 지위도 받았다. 돤치루이 등이 "북양삼걸"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다.[2]
1906년 초 제3진 통제 서리로 옮겨 북양무비학당 督理도 겸임했다. 이후 돤치루이의 제자들이 속속 북양군에 보충되면서 북양군에서 그의 영향력은 점차 커지게 되었다.
3. 군 경력
1896년 위안스카이의 신군에 합류하여 군대의 근대화를 담당했고, 1899년 산둥성으로 가서 의화단 운동 진압에 참여했다. 의화단 운동에서 산둥성에서 위안스카이를 보좌하며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06년에는 보정군관학당 총변에 임명되어 자신의 충성스러운 젊은 장교들을 양성했다.[3]
1911년 신해혁명 발발 후, 양샤 전투에서 혁명군에 맞서 한커우와 한양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위안스카이가 황제의 퇴위를 강요하자 그를 지지했고, 그 대가로 후난성과 후베이성의 군사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912년 위안스카이 내각에 전쟁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913년에는 총리직을 맡았다.[4]
4. 정치 활동
1915년 말,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는 시도에 반대한 돤치루이는 여러 성이 위안스카이 정부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자, 국가보호전쟁에서 반란군과 위안스카이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려고 했다. 돤치루이가 총리직을 맡은 후에도, 위안스카이가 총리직의 권한을 축소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우정은 회복되지 않았다. 돤치루이는 1913년부터 1918년까지 여러 정부에서 총리직을 임시로 역임했다.[19]
1916년, 위안스카이는 임종 직전 돤치루이를 포함한 정부 주요 인사들을 불러 유언을 남겼다. "헌법"이라는 두 단어만 남겨 그 의미는 아무도 해석할 수 없었다. 위안스카이의 1914년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사망 시 후계자 후보 3명의 명단을 적은 상자를 남겨 사망 후 그중 한 명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19]
상자를 열자 돤치루이, 리위안훙, 쉬스창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돤치루이는 북중국 고위 군사 지휘관들과 상의하여 리위안훙이 가장 약하고 인기가 없어 조종하기 쉽다는 이유로 대통령직을 맡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돤치루이는 리위안훙 휘하 총리로 재직했지만, 그를 장악하고 반독립적인 군벌들의 도전을 받으며 북중국의 실질적인 독재자로 통치했다. 돤치루이와 리위안훙 모두 리위안훙의 대통령 임명을 의회나 총선거에 제출하지 않았다.[19]
돤치루이는 총리로 임명되면서 1912년 헌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리위안훙 대통령과 부통령 펑궈장의 반대에 직면했다. 1917년 6월 15일, 중국 제1함대 사령관 리팅신을 비롯한 중국 최고위 해군 지휘관들은 1912년 헌법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헌법이 복원되지 않으면 베이징의 명령을 무시하겠다고 위협하며, 남서부 "국가보호군"과의 연대를 선언했다. 결국 펑궈장은 돤치루이를 설득하여 양보하게 했고, 남부 반정부 세력은 의회가 소집되자 해산하는 데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회와 국가는 여전히 남북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돤치루이와 다른 북양 지도자들은 쑨원의 광둥 기반 국민당 당원들로 구성되고 북양군의 통제를 벗어난 남부 군대의 지원을 받는 남부 의원들의 지시를 거부했다. 돤치루이는 남부 군 지휘관들을 다른 보직으로 재배치하여 그들의 통제력을 깨뜨리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호남성의 국민당 지지 군 지휘관을 축출하기로 결정했지만, 그의 내각은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돤치루이의 오른팔 쉬수정은 자체적으로 호남성 공격 명령을 내렸다.[19]
같은 해 6월,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자 리위안훙이 후임 대총통에 취임하고, 돤치루이는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이후 북경정부에서는 돤치루이가 이끄는 안휘파와 펑궈장이 이끄는 직예파로 파벌이 형성되었다. 직예파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안휘파는 일본의 지원을 받았다.[7] 1917년 12월 24일, 돤치루이는 일본의 지원을 얻고자 일본 총리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파견한 니시하라 가메조와 회담했다.[7]
북군 지도자를 자처한 돤치루이는 북양 출신이 아닌 리위안훙 휘하에 있기를 거부하여, 두 사람은 곧 극심한 대립(복원의 쟁)으로 치달았다. 이 대립은 쉬스창의 중재로 일시 수습되었지만, 1917년 봄 대독일 선전 문제로 다시 대립했다. 일본의 지원을 받아 대독일 선전을 모의한 돤치루이에 대해, 국회의원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리위안훙은 반대했다. 돤치루이는 자신을 지지하는 각 성의 독군들로 "독군단"을 조직하는 등 무력 사용도 시사하며 선전을 강행하려 했다.[8]
그러나 국내 여론의 반발을 배경으로 한 리위안훙을 돤치루이는 압도할 수 없었다. 오히려 1917년 5월 23일 리위안훙에 의해 돤치루이가 국무총리에서 파면되었다. 분노한 돤치루이는 톈진으로 이동하여, 안후이 독군 장쉰 등을 포함한 독군단을 선동하여 "독립" 선언을 하도록 부추겨 리위안훙을 사임으로 몰아넣으려 했다. 궁지에 몰린 리위안훙은 장쉰을 초빙하여 회유하여 돤치루이에 저항하려 한다. 그러나 장쉰은 7월 1일 북경에 진입하자 즉시 리위안훙을 사퇴시키고 청나라 복벽(장훈복벽)을 감행했다. 돤치루이는 즉시 장쉰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토벌할 것을 선언, 같은 달 14일 장쉰을 축출하고 북경을 탈환했다. 리위안훙의 후임 대총통에는 직예파의 펑궈장이 취임하고, 돤치루이는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으로서 북경정부 내에서 실권을 장악했다. 1917년 8월 14일에는 대독일 선전도 완료했다.[9]
5. 북양정부 시기
돤치루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통해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톈진에 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조계를 탈환했다.[9] 전쟁 참전을 통해 돤치루이는 과거 중국이 체결한 많은 배상금과 치외법권을 취소하는 등 새로운 동맹국들로부터 이익을 얻고,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기를 기대했다.[9]
돤치루이의 전략은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 니시하라 차관()을 받는 것이었다. 1917년 9월 29일 일본과 비밀리에 첫 번째 니시하라 차관 협상을 벌였다.[9] 대가로 그는 일본에 산둥성(山東省)에 군대 주둔권과 두 개의 새로운 산둥 철도 건설 및 운영권을 제공했다. 이 협상은 나중에 5·4 운동과 같은 큰 정치적 대가를 치르게 되었지만, 그 당시 돤치루이는 군대를 위한 자금을 확보했다. 이는 후에 산둥 문제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9]
6. 안휘파 군벌 형성
돤치루이는 위안스카이의 측근으로 권력을 잡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문제로 인해 두 사람 사이는 멀어졌다. 돤치루이가 전쟁부 장관으로서 북양군벌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면서 위안스카이의 군대 장악력이 약화되었고, 돤치루이는 군사 인사 및 개혁 문제로 대통령과 점차 대립했다. 결국 1915년 5월, 위안스카이는 돤치루이를 전쟁부 장관직에서 해임했다. 같은 해 말, 돤치루이는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는 시도에 반대했다.
1917년 국무총리 재직 시, 돤치루이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둘러싸고 총통 리위안훙과 권력 투쟁을 벌였다. 이 권력 공백기에 복고파 군벌 장쉰이 선통제를 복위시키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돤치루이에 의해 진압되었다. 돤치루이 정권이 국회와 임시 약법을 폐기하려 하자, 쑨원은 호법운동을 펼쳤다.[19]
펑궈장이 총통으로 재직하던 시기, 돤치루이는 국민당이 지배하던 남북 분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펑궈장과 대립하여 제2차 "부원지쟁"이 일어났다. 1918년 펑궈장의 임기가 만료되자, 쉬스창이 총통으로 선출되었다. 돤치루이는 펑궈장과 공동으로 하야할 것을 약속했지만, 자신의 파벌인 안푸계(安福系)의 지지를 얻어 막후에서 권력을 유지했다.
돤치루이는 자신의 파벌인 "안휘파"를 결성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그는 니시하라 차관 자금을 사용하여 군대를 증강하고 일본 장교들을 고용하여 군대를 훈련시켰다.[13] 1918년에는 일본에서 약 1억 4500만 엔의 차관(서원차관)을 확보하여, 안복구락부(安福倶楽部)와 참전군(参戦軍)을 조직했다.[9]
1917년 9월, 쑨원 등이 호법군정부(護法軍政府)를 조직하고 호법운동(護法運動)을 시작하자, 돤치루이는 무력으로 “남북 통일”을 추진했다. 그러나 펑궈장을 중심으로 한 직예파(直隷派)는 “평화 통일”을 주장하며 반발했다.[10] 결국 돤치루이는 1917년 11월 16일에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직에서 사퇴했다.[10] 이후, 돤치루이는 자신의 파벌을 통해 다시 권력을 잡으려 시도했으나,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 조인을 시도했지만, 5·4 운동이 일어나면서 안휘파는 위신을 잃게 되었다.[13]
1920년 7월, 돤치루이 파벌인 환계 군벌과 우페이푸, 차오쿤의 직계 군벌이 싸운 안직전쟁에서 패배한 후 톈진으로 은퇴하였다.[14]
7. 임시집정 복귀 및 몰락
1926년 학생의 애국시위를 유혈진압한 3.18 사태의 책임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이것은 펑위샹이 막후에서 지휘한 것이다.[16] 1926년 3월 18일, 중국 주권에 대한 외세의 지속적인 침해와 일본 군함이 관련된 최근 톈진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 행진이 열렸다. 돤치루이는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군경을 파견했고, 그 결과 47명의 시위대가 사망하고 리다자오를 포함한 2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삼일팔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4월 펑위샹에 의해 다시 권력에서 축출되었고,[16] 다시 톈진의 일본 조계로 망명하여 불교에 심취했다. 직예파의 군사력이 붕괴되면서 돤치루이 정부는 펑위샹과 장쭤린에게 절망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는 은밀히 한쪽을 이용해 다른 쪽을 제압하려고 했다. 장쭤린은 그의 이중 행각에 지쳐 베이징을 탈환한 후에도 그를 복권시키기를 거부했다. 안휘파의 대부분은 이미 장쭤린에게 붙었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인과 교류를 끊었고 1933년 상하이로 이주했다.[17] 1935년 국민정부위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17] 1936년 11월 상하이에서 사망하였고,[18] 완안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8. 만년
1936년 11월 2일, 톈진에서 이주한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칩거 중 병사했다. 향년 73세.[18]
9. 개인적인 삶
돤치루이는 바둑 애호가이자 후원자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보통 바둑에서 이겼는데, 상대방이 그를 이기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위는 예외적으로 장인을 이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돤치루이는 정계 은퇴 후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어 집 안에 예배당을 짓고 매일 아침 기도했다. 많은 전 부하들이 그와 함께 기도하러 오곤 했다. 음력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사찰에 가서 불교 행사에 참여했다. 삼일팔사건 이후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두부치를 좋아하여 매끼니마다 먹었으며, 달걀을 얻기 위해 집에서 닭을 키웠지만, 수정되지 않은 달걀은 채식주의자라고 주장하며 수탉은 키우지 않았다.
돤은 바둑을 좋아하여 왕윈펑(汪雲峰), 구수루(顧水如), 류디화이(劉棣懐), 궈티성(過惕生), 우칭위안(呉清源) 등을 지원했다. 또한 우칭위안의 호인 "청원(清源)"을 지어준 사람도 돤이다.
10.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1차 득표율 1차 득표수 2차 득표율 2차 득표수 3차 득표율 3차 득표수 결과 당락 1916년 선거 중화민국 부총통 2대 무소속 -% 6표 colspan="4"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7위 낙선 1918년 선거 중화민국 대총통 2대 환계 군벌 1.15% 5표 colspan="4"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2위 낙선
11. 대중 문화
12. 참고 문헌
- Bangsbo, Jens. "Science and Football III". *Journal of Sports Sciences*, 17권 10호, 1996, 755–756쪽. Taylor & Francis, doi:10.1080/026404199365489, ISBN 978-0-419-22160-9, PMID 10573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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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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狭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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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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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元北洋軍閥の巨頭、死去
東京朝日新聞
1936-11-03
[19]
서적
중국문명대시야 4/완결 (中华文明大视野)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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