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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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년학파는 1820년대부터 20세기 초까지 프랑스 해군을 중심으로 발전한 해군 전략 사상으로, 기존의 전함 중심의 해군력 건설에 반대하며 소형 함정, 어뢰, 잠수함 등의 신기술을 활용한 통상파괴전을 강조했다. 앙리 조세프 펙상의 작렬탄, 루이 앙뜨와느 뤼실 그리벨 대령의 통상파괴 전략, 테오필 오브 제독의 소형 함정 중심 해군 건설 주장이 핵심 내용을 이룬다. 청년학파는 어뢰정 구축함, 구축함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일본 제국 해군과 존 피셔 경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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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학파 | |
|---|---|
| 개요 | |
| 명칭 | 주네 에콜 (프랑스어: Jeune École) |
| 번역 | 청년 학파 |
| 설명 | 19세기 후반 프랑스 해군의 전략 이론 |
| 배경 | |
| 시기 | 19세기 후반 |
| 국가 | 프랑스 |
| 분야 | 해군 전략 |
| 핵심 개념 | |
| 전략 | 소수의 고속정과 어뢰정을 이용한 기습 전략 전함을 공격하여 제해권을 장악 |
| 기술 | 어뢰 기술의 발전 고속정 개발 |
| 목표 | 해상 봉쇄 통상 파괴 |
| 주요 인물 | |
| 인물 | 테오필 오브 루이 에밀 베르탱 가브리엘 샤르메 |
| 영향 | |
| 영향 | 프랑스 해군 정책에 영향 다른 나라 해군에도 영향 (일부) |
| 비판 | |
| 내용 | 전함의 중요성 간과 실제 해전에서의 효과 미흡 |
2. 역사적 배경
19세기 후반, 프랑스 해군 내에서는 테오필 오브 제독을 중심으로 기존의 대함대 결전 사상에 반대하는 새로운 해군 전략 사상인 '청년학파(Jeune École)'가 등장했다. 이러한 사상의 등장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있었다.
1861년 2월, 쉘부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툴롱까지 길이 33m 정도의 어뢰정을 항해하는 실험이 있었는데, 이는 공해 항해의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같은 해 5월과 6월에는 8척의 전함으로 구성된 공격측을 20여 척의 어뢰정(순양함 3척과 해방전함 1척 지원)으로 저지하는 연습이 실시되었다. 공격측은 툴롱 함포 사격에는 성공했지만, 대부분 격침 판정을 받으면서 대형함에 의한 근접 봉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러한 실험 및 연습 결과를 바탕으로, 1886년 12월 오브는 다음과 같은 전략 변경을 제시했다.[13]
2. 1. 청년학파의 등장
1820년대에 앙리 조세프 펙상은 작렬탄을 발사할 수 있는 함포인 벡상포를 개발했다. 그는 이 강력한 포를 다수의 소형 증기 군함에 탑재함으로써 더 큰 전열함을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13] 미국 남북 전쟁에서 남군의 ‘사략선 알라바마’의 활약은 통상파괴의 효과를 나타낸 것이었다.청년학파의 선조라고도 말할 수 있는 프랑스 해군의 루이 앙뜨와느 뤼실 그리벨 대령은 1869년에 출판된 책에서 “신병기의 개발과 통상파괴가 대 영국의 전략에 유효하다”고 발표했다. 이 사상은 이후 청년학파의 지도자적 입장이 된 테오필 오브 제독에게 이어졌다. 오브는 전쟁의 목적은 ‘적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는 것’이며 ‘적의 함대를 격멸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기존의 생각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그의 일파는 ‘주네 에콜’(청년학파)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13]
이미 어뢰나 외장 어뢰정은 실현되고 있었으며, 자주식 어뢰를 발명하여 이론은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오브 제독은 1882년 《해군 전쟁과 프랑스의 군항》이라는 제목의 책자를 발간했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기술의 개발, 예를 들어 어뢰를 이용하여 적의 해상 봉쇄를 해제할 수 있다. 따라서, 해안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전함을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어뢰정, 연안경비함, 충각함 등의 작은 함정이 있어야 한다. 공격에 관해서는 순양함을 이용한 통상파괴를 실시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고속의 함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3] 1883년에서 1885년까지 벌어진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 해군의 승리는 기존 해군에 대한 어뢰정의 가능성을 실증한 것으로 생각되었다.[13]
1886년 1월 7일에 오브는 해군 장관에 임명되었지만, 이것은 오브의 사상을 인정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해군장관이 된 오브는 재빠르게 그의 사상을 실현하려 했다.[13]

프랑스는 또한 잠수함의 개발에도 적극적이었다. 이것 또한 영국 해군 전함에 대한 숫적 열세를 기술 개발로 대항하려는 것이었다. 해군 장관 취임 후 3개월 만에 오브는 최초의 전지 추진 잠수함인 짐 노트의 건조를 승인했다. 20세기 초까지 프랑스 해군은 ‘의심할 여지없이 실용적인 잠수함 전력을 가진 최초의 해군’이 되었다.[13]
또한, 어뢰정에서 대형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어뢰정 구축함’을 고안하다가, 이내 어뢰정 구축함 자체가 어뢰를 장착한 ‘구축함’이 탄생했다. 그 최초의 사례가 스페인 해군의 디스트럭터였다. 구축함은 어느 정도의 원양 항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외양에서도 어뢰 공격이 가능하게 되었다.[13]
2. 2. 청년학파의 부상과 쇠퇴
1820년대에 앙리 조세프 펙상은 작렬탄을 발사할 수 있는 함포인 벡상포를 개발했다. 그는 이 강력한 포를 다수의 소형 증기 군함에 탑재함으로써 더 큰 전열함을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13] 미국 남북 전쟁에서 남군의 ‘사략선 알라바마’의 활약은 통상파괴의 효과를 나타낸 것이었다.청년학파의 선조라고도 할 수 있는 프랑스 해군의 루이 앙뜨와느 뤼실 그리벨 대령은 1869년에 출판된 책에서 “신병기의 개발과 통상파괴가 대 영국의 전략에 유효하다”고 발표했다. 이 사상은 이후 청년학파의 지도자적 입장이 된 테오필 오브 제독에게 이어졌다. 오브는 전쟁의 목적은 ‘적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는 것’이며 ‘적의 함대를 격멸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기존의 생각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그의 일파는 ‘주네 에콜’(청년학파)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13]
이미 어뢰나 외장 어뢰정은 실현되고 있었으며, 자주식 어뢰를 발명하여 이론은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오브 제독은 1882년 《해군 전쟁과 프랑스의 군항》이라는 제목의 책자를 발간했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기술의 개발, 예를 들어 어뢰를 이용하여 적의 해상 봉쇄를 해제할 수 있다. 따라서, 해안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전함을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어뢰정, 연안경비함, 충각함 등의 작은 함정이 있어야 한다. 공격에 관해서는 순양함을 이용한 통상파괴를 실시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고속의 함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3] 1883년에서 1885년까지 벌어진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 해군의 승리는 기존 해군에 대한 어뢰정의 가능성을 실증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곧 청년학파는 정치인과 언론도 말려들며 논란을 불러왔다. 1886년 1월 7일에 오브는 해군 장관에 임명되었지만, 이것은 오브의 사상을 인정한 것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해군장관이 된 오브는 재빠르게 그의 사상을 실현하려 했다. 1861년 2월에는 쉘부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서 툴롱까지 어뢰정을 항해시켰는데, 길이 33m 정도의 어뢰정으로 공해를 항해하는 것은 어려웠다. 같은 해 5월과 6월에는 8척의 전함으로 이루어진 공격측을 20척 남짓의 어뢰정(순양함 3척과 해방전함 1척이 지원)으로 저지하는 연습을 했다. 공격측은 툴롱을 함포 사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부분이 격침 판정을 받았다. 이로 인해 대형함에 의한 근접 봉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같은 해 12월, 오브는 다음과 같이 전략을 변경했다.[13]
프랑스는 또한 잠수함의 개발에도 적극적이었다. 이것 또한 영국 해군 전함에 대한 숫적 열세를 기술 개발로 대항하려는 것이었다. 해군 장관 취임 후 3개월 만에 오브는 최초의 전지 추진 잠수함인 짐 노트의 건조를 승인했다. 20세기 초까지 프랑스 해군은 ‘의심할 여지없이 실용적인 잠수함 전력을 가진 최초의 해군’이 되었다.[13]
또한, 어뢰정에서 대형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어뢰정 구축함’을 고안하다가, 이내 어뢰정 구축함 자체가 어뢰를 장착한 ‘구축함’이 탄생했다. 그 최초의 사례가 스페인 해군의 디스트럭터였다. 구축함은 어느 정도의 원양 항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외양에서도 어뢰 공격이 가능하게 되었다.
19세기 말까지 프랑스 해군은 이 전투 시스템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다. 1898년 파쇼다 사건에서 청년학파에 근거한 프랑스 해군은 무기력함을 드러냈고, 따라서 1900년에는 새로운 전함의 건조를 포함한 기존의 함대 건설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902년 카미유 뻬르땅이 해군 장관에 취임하면서 카미유 뻬르땅이 건조와 설계에 참여한 일본 제국 해군과 함정이 청일 전쟁에서 활약한 것이나, 전함 보빗을 기뢰로 유실한 것 등을 근거로 다시 청년학파가 부활했다. 이 사상을 버릴 수 있게 된 것은 러일 전쟁에서 전함의 유용성이 확인된 훨씬 이후의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해군은 전함 수에 있어서 독일보다 뒤떨어져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대부분 활약하지 못했다.[13]
3. 청년학파의 주요 내용
청년학파는 어뢰와 어뢰정 같은 새로운 무기 기술을 활용하여 적의 해상 봉쇄를 무력화하고, 전함 대신 소형 함정을 중심으로 해군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적의 상선을 공격하여 무역과 경제를 위축시키는 통상파괴 전략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1898년 파쇼다 사건에서 청년학파에 기반한 프랑스 해군은 무기력함을 드러냈고, 1902년 카미유 뻬르땅이 해군 장관에 취임하면서 청년학파가 다시 부활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일 전쟁에서 전함의 유용성이 확인되면서 청년학파는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프랑스 해군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청년학파는 적의 통상과 경제를 축소시키기 위해 일반 상선을 공격하는 통상파괴 전술을 영국에 대항할 주요 전략으로 보았다. 이를 위해 듀푸이 드 롬므와 같은 강습함이 설계되었다. 장갑순양함인 듀푸이 드 롬므는 1888년에 착공되었고, 통상 파괴를 위해 23노트의 속력으로 적 상선을 습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3. 1. 소형함 중심 해군 건설
1820년대에 앙리 조세프 펙상은 작렬탄을 발사할 수 있는 함포인 펙상포를 개발했다. 그는 이 강력한 포를 다수의 소형 증기 군함에 탑재함으로써 더 큰 전열함을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1] 미국 남북 전쟁에서 남군의 사략선 앨라배마의 활약은 통상파괴의 효과를 보여준 것이었다.프랑스 해군의 루이 앙뜨와느 뤼실 그리벨 대령(1827년 – 1883년)은 1869년에 출판된 책에서 “신병기의 개발과 통상파괴가 대영국 전략에 유효하다”고 발표했다.[2] 이 사상은 이후 청년학파의 지도적 입장이 된 테오필 오브 제독에게 이어졌다. 오브는 전쟁의 목적은 ‘적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는 것’이며 ‘적의 함대를 격멸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기존의 생각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그의 일파는 '주네 에콜'(청년학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3]
이미 어뢰나 외장 어뢰정은 실현되고 있었으며, 자주식 어뢰를 발명하여 이론은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오브 제독은 1882년 《해군 전쟁과 프랑스의 군항》(''La guerre maritime et les ports militaires de la France'')이라는 제목의 38 페이지 분량의 책자를 발간했다.[4]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기술의 개발, 예를 들어 어뢰를 이용하여 적의 해상 봉쇄를 해제할 수 있다. 따라서, 해안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전함을 만드는 것보다[5] 더 많은 어뢰정, 연안경비함, 충각함 등의 작은 함정이 있어야 한다. 공격에 관해서는 순양함을 이용한 통상파괴를 실시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고속의 함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883년에서 1885년까지 벌어진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 해군의 승리는 기존 해군에 대한 어뢰정의 가능성을 실증한 것으로 생각되었다.[6]
1886년 1월 7일에 오브는 해군 장관에 임명되었지만, 이것은 오브의 사상을 인정한 것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7] 해군장관이 된 오브는 재빠르게 그의 사상의 실현하려 했다. 1861년 2월에는 쉘부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서 툴롱까지 어뢰정을 항해시켰는데, 길이 33m 정도의 어뢰정으로 공해를 항해하는 것은 어려웠다. 같은 해 5월과 6월에는 8척의 전함으로 이루어진 공격측을 20척 남짓의 어뢰정(순양함 3척과 해방전함 1척이 지원)으로 저지하는 연습을 했다. 공격측은 툴롱을 함포 사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부분이 격침 판정을 받았다. 이로 인해 대형함에 의한 근접 봉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같은 해 12월, 오브는 다음과 같이 전략을 변경했다.[8]
프랑스는 또한 잠수함의 개발에도 적극적이었다. 이것 또한 영국 해군 전함에 대한 숫적 열세를 기술 개발로 대항하려는 것이었다. 해군 장관 취임 후 3개월 만에 오브는 최초의 전지 추진 잠수함인 짐 노트의 건조를 승인했다. 20세기 초까지 프랑스 해군은 ‘의심할 여지없이 실용적인 잠수함 전력을 가진 최초의 해군’이 되었다.[9]
또한, 어뢰정에서 대형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어뢰정 구축함’을 고안하다가, 이내 어뢰정 구축함 자체가 어뢰를 장착한 ‘구축함’이 탄생했다. 그 최초의 사례가 스페인 해군의 디스트럭터(Destructor)였다. 구축함은 어느 정도의 원양 항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외양에서도 어뢰 공격이 가능하게 되었다.
19세기 말까지 프랑스 해군은 이 전투 시스템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다.[10]
3. 2. 통상파괴전
1820년대에 앙리 조세프 펙상(Henri-Joseph Paixhans)은 작렬탄을 발사할 수 있는 펙상포를 개발했다. 그는 이 강력한 포를 다수의 소형 증기 군함에 탑재함으로써 더 큰 전열함을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 남북 전쟁에서 남군의 ‘사략선 알라바마’(CSS ''Alabama'')의 활약은 통상파괴의 효과를 보여준 사례였다.[1]청년학파의 선조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해군의 루이 앙뜨와느 뤼실 그리벨 대령(Louis-Antoine-Richild Grivel, 1827년 – 1883년)은 1869년에 출판된 책에서 “신병기의 개발과 통상파괴가 대영국 전략에 유효하다”고 발표했다.[2] 이 사상은 이후 청년학파의 지도적 입장이 된 테오필 오브 제독에게 이어졌다. 오브는 전쟁의 목적은 ‘적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는 것’이며 ‘적의 함대를 격멸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3]
어뢰나 외장 어뢰정은 이미 실현되고 있었으며, 자주식 어뢰의 발명으로 이론은 더욱 정교해졌다. 오브 제독은 1882년 《해군 전쟁과 프랑스의 군항》(''La guerre maritime et les ports militaires de la France'')이라는 38페이지 분량의 책자를 발간했다.[4] 그는 이 책에서 “새로운 기술의 개발, 예를 들어 어뢰를 이용하여 적의 해상 봉쇄를 해제할 수 있다. 따라서 해안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전함을 만드는 것보다[5] 더 많은 어뢰정, 연안경비함, 충각함 등의 작은 함정이 있어야 한다. 공격에 관해서는 순양함을 이용한 통상파괴를 실시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고속 함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883년에서 1885년까지 벌어진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 해군의 승리는 기존 해군에 대한 어뢰정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되었다.[6]
청년학파는 정치인과 언론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886년 1월 7일 오브는 해군 장관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오브의 사상을 인정했다기보다는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7] 해군 장관이 된 오브는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려 했다. 1861년 2월, 쉘부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툴롱까지 어뢰정을 항해시켰으나, 길이 33m 정도의 어뢰정으로 공해를 항해하는 것은 어려웠다. 같은 해 5월과 6월에는 8척의 전함으로 구성된 공격 측을 20여 척의 어뢰정(순양함 3척과 해방전함 1척 지원)으로 저지하는 연습을 했다. 공격 측은 툴롱을 함포 사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부분 격침 판정을 받았다. 이로써 대형함에 의한 근접 봉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같은 해 12월, 오브는 다음과 같은 전략을 세웠다.[8]
프랑스는 잠수함 개발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는 영국 해군 전함에 대한 숫적 열세를 기술 개발로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해군 장관 취임 후 3개월 만에 오브는 최초의 전지 추진 잠수함인 짐노트의 건조를 승인했다. 20세기 초, 프랑스 해군은 ‘의심할 여지없이 실용적인 잠수함 전력을 가진 최초의 해군’이 되었다.[9]
듀푸이 드 롬므(Dupuy de Lôme)와 같은 강습함은 이러한 통상파괴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장갑순양함인 듀푸이 드 롬므는 1888년에 착공되었고, 23노트의 속력으로 적 상선을 습격하도록 설계되었다.
청년학파의 또 다른 구성 요소는 적의 상선을 습격하여 무역과 경제를 위축시키는 것이었으며, 이는 특히 대영제국을 상대로 고안된 전술이었다.
3. 3. 어뢰정 구축함의 등장
어뢰와 외장 어뢰정은 이미 실현되고 있었으며, 자주식 어뢰의 발명으로 청년학파 이론은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1882년 테오필 오브 제독은 《해군 전쟁과 프랑스의 군항》(''La guerre maritime et les ports militaires de la France'')이라는 책자에서 어뢰와 같은 신기술을 이용하여 적의 해상 봉쇄를 해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해안선 보호를 위해 전함보다 어뢰정, 연안경비함, 충각함 등 소형 함정을 더 많이 건조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공격 시에는 순양함을 이용한 통상파괴를 실시해야 하며, 이를 위해 고속 함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4]1883년에서 1885년까지 벌어진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 해군의 승리는 기존 해군에 대한 어뢰정의 가능성을 실증한 것으로 평가되었다.[6]
1886년 해군 장관이 된 오브는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려 했다. 쉘부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툴롱까지 어뢰정 항해를 시도했으나, 길이 33m 정도의 어뢰정으로는 공해 항해가 어려웠다. 같은 해 5월과 6월에는 8척의 전함으로 이루어진 공격 측을 20척 남짓의 어뢰정(순양함 3척과 해방전함 1척 지원)으로 저지하는 연습을 실시했다. 공격 측은 툴롱 함포 사격에는 성공했지만, 대부분 격침 판정을 받으면서 대형함에 의한 근접 봉쇄가 불가능함을 입증했다.
프랑스는 잠수함 개발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는 영국 해군 전함에 대한 수적 열세를 기술 개발로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오브는 최초의 전지 추진 잠수함인 짐노트 건조를 승인했으며, 20세기 초 프랑스 해군은 실용적인 잠수함 전력을 갖춘 최초의 해군이 되었다.[13]
한편, 어뢰정으로부터 대형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어뢰정 구축함’이 고안되었고, 이는 곧 어뢰를 장착한 ‘구축함’으로 발전했다. 그 최초의 사례는 스페인 해군의 디스트럭터(Destructor)였다. 구축함은 원양 항해 능력을 갖추고 외양에서도 어뢰 공격이 가능하게 되었다.
1890년대 중반부터 영국 해군은 하복을 시작으로 수뢰정 구축함 정비를 시작했다. 수관 보일러 발명으로 경량 고출력 기관이 실용화되면서, 선체 구조와 기관 모두 수뢰정을 기반으로 확대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형 함형의 항양성과 고속력을 양립시켰다. 이들은 수뢰정 격퇴를 위한 속사포와 뇌격을 위한 수뢰 무기를 갖추었으며, 이는 훗날 구축함의 초석이 되었다.[12]
4. 청년학파의 영향
청년학파는 19세기 약소국 해군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해군 전략 사상 발전에도 기여했다. 특히 일본 제국 해군은 루이 에밀 베르탕의 영향으로 청년학파에 기반한 함대를 정비하여 청일 전쟁에서 승리했다.[1] 청년학파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룬다.
4. 1. 약소국 해군에 대한 영향
청년학파는 아군 전함 전력이 약화된 경우의 대응책으로서 19세기 약소국 해군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1] 일본 제국 해군은 루이 에밀 베르탕의 영향으로 청년학파에 따라 정비된 함대로 청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1]4. 2. 해군 전략 사상의 발전
1820년대에 앙리 조세프 펙상은 작렬탄을 발사할 수 있는 함포인 벡상포를 개발했다. 그는 이 강력한 포를 다수의 소형 증기 군함에 탑재함으로써 더 큰 전열함을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13] 미국 남북 전쟁에서 남군의 ‘사략선 알라바마’(CSS ''Alabama'')의 활약은 통상파괴의 효과를 보여주었다.청년학파의 선조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해군의 루이 앙뜨와느 뤼실 그리벨 대령(1827년 – 1883년)은 1869년에 출판된 책에서 “신병기의 개발과 통상파괴가 대영국 전략에 유효하다”고 발표했다. 이 사상은 이후 청년학파의 지도자가 된 테오필 오브 제독에게 이어졌다. 오브는 전쟁의 목적은 ‘적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는 것’이며 ‘적의 함대를 격멸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생각과 달랐기 때문에 그의 일파는 ‘주네 에콜’(청년학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미 어뢰나 외장 어뢰정은 실현되고 있었으며, 자주식 어뢰를 발명하여 이론은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오브 제독은 1882년 《해군 전쟁과 프랑스의 군항》(''La guerre maritime et les ports militaires de la France'')이라는 책자에서 “새로운 기술의 개발, 예를 들어 어뢰를 이용하여 적의 해상 봉쇄를 해제할 수 있다. 따라서 해안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전함을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어뢰정, 연안경비함, 충각함 등의 작은 함정이 있어야 한다. 공격에 관해서는 순양함을 이용한 통상파괴를 실시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고속의 함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883년에서 1885년까지 벌어진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 해군의 승리는 기존 해군에 대한 어뢰정의 가능성을 실증한 것으로 생각되었다.[13]
청년학파는 정치인과 언론의 논란을 불러왔다. 1886년 1월 7일에 오브는 해군 장관에 임명되었지만, 이것은 오브의 사상을 인정했다기보다는 정치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해군장관이 된 오브는 그의 사상을 실현하려 했다. 1861년 2월, 쉘부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 툴롱까지 어뢰정을 항해시켰는데, 길이 33m 정도의 어뢰정으로 공해를 항해하는 것은 어려웠다. 같은 해 5월과 6월에는 8척의 전함으로 이루어진 공격측을 20척 남짓의 어뢰정(순양함 3척과 해방전함 1척이 지원)으로 저지하는 연습을 했다. 공격측은 툴롱을 함포 사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부분 격침 판정을 받았다. 이로 인해 대형함에 의한 근접 봉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같은 해 12월, 오브는 다음과 같이 전략을 변경했다.
프랑스는 잠수함 개발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는 영국 해군 전함에 대한 숫적 열세를 기술 개발로 대항하려는 것이었다. 해군 장관 취임 후 3개월 만에 오브는 최초의 전지 추진 잠수함인 짐 노트의 건조를 승인했다. 20세기 초까지 프랑스 해군은 ‘의심할 여지없이 실용적인 잠수함 전력을 가진 최초의 해군’이 되었다.[13]
어뢰정에서 대형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어뢰정 구축함’을 고안하다가, 이내 어뢰정 구축함 자체가 어뢰를 장착한 ‘구축함’이 탄생했다. 그 최초의 사례가 스페인 해군의 디스트럭터(Destructor)였다. 구축함은 어느 정도의 원양 항해 능력을 가지고 있어, 외양에서도 어뢰 공격이 가능하게 되었다.
1898년 파쇼다 사건에서 청년학파에 근거한 프랑스 해군은 무기력함을 드러냈고, 1900년에는 새로운 전함 건조를 포함한 기존의 함대 건설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902년 카미유 뻬르땅이 해군 장관에 취임하면서, 그가 건조와 설계에 참여한 일본 제국 해군 함정이 청일 전쟁에서 활약한 것과 전함 보빗을 기뢰로 유실한 것 등을 근거로 다시 청년학파가 부활했다. 이 사상을 버릴 수 있게 된 것은 러일 전쟁에서 전함의 유용성이 확인된 이후였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해군은 전함 수에 있어서 독일보다 뒤떨어져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대부분 활약하지 못했다.
참조
[1]
문서
Dahl, p113
[2]
문서
Dahl, P114
[3]
문서
Dahl, p114
[4]
서적
"La Guerre maritime et les ports militaires de la France"
Berger-Levrault
1882
[5]
문서
[6]
문서
Bueb, p16
[7]
문서
Dahl, p116
[8]
문서
Dahl, p115-116
[9]
문서
Gardiner and Lambert
[10]
문서
Howe, p281
[11]
문서
Dahl, p118
[12]
문서
中川務
1994
[13]
서적
Steam, Steel & Shellfire: The Steam Warship 1815-1905
http://books.google.[...]
Conway Maritime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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