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총독 (중국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총독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여러 성(省)을 관할하며 군사 및 행정 권한을 행사한 고위 관직이다. 명나라는 1441년 운남 반란을 계기로 총독 제도를 시작하여 15세기 말부터 빈번하게 임명했으며, 몽골족과 왜구, 만주족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쑤안다 총독, 저지 총독 등을 설치했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제도를 계승하여 9개의 지방 총독을 두었으며, 직례 총독을 최고로 여겼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 말기에는 한족 총독의 비중이 증가하며, 태평천국 운동, 양무운동 등 격변의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청나라의 총독 - 양광총독
    양광총독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에 광동과 광서를 관할하던 총독으로, 1734년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광동 무역 체제를 통해 유럽 상인과의 교역을 관리했다.
  • 청나라의 총독 - 직례총독
    직례총독은 청나라 시대에 직례 지역을 관할하며 황하 관리, 치수, 통상, 외국 교섭 등을 담당했고 북양함대를 지휘하기도 했던 최고위 지방관직이었다.
  • 중국의 관직과 칭호 - 관찰사
    관찰사는 중국, 한국, 일본에서 지방 행정 감찰관직으로, 당나라 채방처치사에서 시작되어 관찰처치사로 개칭되며 명칭이 유래되었고, 한국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정착하여 각 도에 파견된 종2품 문관직으로 지방 행정 전반에 걸쳐 권한을 행사했다.
  • 중국의 관직과 칭호 - 태위
    태위는 동아시아의 삼공 중 하나로, 주로 군사 지휘를 담당하는 최고위 관직이었으며 시대와 국가에 따라 역할과 권한에 차이가 있었다.
총독 (중국사)
총독 (중국사)
청나라 시기의 총독
청나라 시기의 총독
관직 정보
관직명총독
원어zh-t: 總督
zh-s: 总督
zh-w: Tsung³-tu¹
zh-p: Zǒngdū
만주어uheri kadalara amban
몽골어ᠤᠾᠡᠷᠢ ᠺᠠᠯᠠᠳᠠᠷᠠ ᠠᠮᠪᠠᠨ
상세 정보
유형지방 장관
임명 시기명나라청나라
역할여러 성의 군사와 민정을 감독

2. 명나라 시대

명나라는 지방 통치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총독 제도를 활용했다. 초기에는 임시직이었으나 점차 상설화되었으며, 특히 군사적 요충지나 반란 지역에 총독이 파견되었다.

16세기 중반,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이를 막기 위해 저지 총독이 설치되었다.[4]

17세기 초, 만주족이 강성해지면서 명나라는 북방 방어에 어려움을 겪었다.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녕원 전투에서 원숭환이 활약하였다.[5] 그러나 원숭환은 랴오 총독에 임명된 후,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혐의로 처형당했다.

한편, 명나라 내부에서는 이자성의 난 등 농민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섬감 총독 홍승주와 5개 성 총독 륙상생 등이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륙상생은 만주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6][7] 홍승주는 송금 전투 패배 후 청나라에 투항했다.

결국 1644년, 이자성의 군대가 베이징을 함락시키자 숭정제는 자결하고 명나라는 멸망했다.[8]

2. 1. 총독 제도의 시작

주원장은 명나라(1368년 ~ 1644년)를 세우고 원나라의 지방 제도를 이어받았지만, 중앙 정부의 정책을 펼치기 위해 행성을 13개의 승선 부정사 사로 나누었다.[1] 그러나 이후 명나라는 여러 지방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거나 반란을 진압할 조정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

총독 제도는 정통 연간 6년(1441년)에 병부 상서가 운남의 반란에 대처하기 위해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 15세기 말부터 명나라 중앙 정부는 점차 총독을 더 자주 임명했다. 성화 5년(1469년)에는 양광(광둥과 광시) 총독이 상설 직책으로 임명되었다.[3]

총독은 내각의 서기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정덕 8년(1510년)에는 쑤안다 총독이 매년 북원 몽골족의 침략에 대비하여 만리장성을 방어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가정 33년(1550년)에는 일본 왜구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저지 총독이 설치되었다.[4]

2. 2. 군사적 중요성 증대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원나라의 지방 제도를 계승했지만, 중앙 정부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행성을 13개의 승선포정사사로 나누었다.[1] 그러나 명나라는 여러 지방 간의 갈등을 조정하거나 반란을 진압할 조정관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2]

정통 6년(1441년), 병부 상서가 운남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임명되면서 총독 제도가 시작되었다. 15세기 말부터 명나라 중앙 정부는 총독을 점차 자주 임명했으며, 성화 5년(1469년)에는 양광(광둥과 광시) 총독이 상설 직책으로 임명되었다.[3] 총독은 내각의 서기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정덕 8년(1510년)에는 쑤안다 총독이 북원 몽골족의 침략에 대비하여 만리장성을 방어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가정 33년(1550년)에는 일본 왜구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저지 총독이 설치되었다.[4]

1610년대만주족이 중국 북동부에서 세력을 키우면서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천계 6년(1626년), 원숭환은 녕원 전투에서 누르하치를 격파하고 녕원을 방어했다. 원숭환은 랴오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숭정 3년(1630년) 명나라를 배신한 혐의로 처형되었다.[5] 같은 시기, 섬감 총독 홍승주는 중국 북서부에서 이자성 등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임명되었다.[6] 명나라는 농민 반란 진압을 위해 하남, 산서, 섬서, 호광, 사천 등 5개 성의 총독을 설치하고 륙상생을 임명했다. 륙상생은 농민 반란군을 격파했으나, 숭정 11년(1638년) 만주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7]

1639년1641년 사이에 기료 총독이었던 홍승주는 송금 전투에서 패배한 후 청나라에 항복했다. 1644년, 이자성이 북경으로 진격하자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결했다.[8] 1840년, 양광 총독 임칙서가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제거한 후 아편 전쟁이 발발했다. 청나라 해군은 영국 증기 군함에 대항할 수 없었고, 난징 조약을 통해 홍콩을 할양하는 등 불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맺어야 했다.

아편 전쟁 패배 이후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났다. 청나라는 증국번을 양강 총독으로 임명하고 상군을 조직하여 반란에 대응했다. 한족 총독의 수가 증가하면서 청나라 중앙 정부의 쇠퇴가 나타났다. 좌종당상군을 이끌고 태평천국을 진압하고, 념군을 진압했으며, 양무운동을 추진하여 서구의 기술을 도입했다. 직례 총독 이홍장회군을 창설하고 북양 함대를 건설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청일 전쟁에서 패배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면서 요동 반도, 타이완, 펑후 제도 등을 일본에 할양해야 했다.

1900년의화단 운동 당시, 동남 중국의 한족 총독들은 중립을 유지했다. 위안스카이는 신군을 조직하고 무술변법에서 서태후를 보호하는 등 권력을 강화했다. 1904년, 양강 총독 장지동은 중앙 정부를 무시하고 황하 보존 사업을 계획했다. 1911년 신해혁명 당시, 북양군은 청나라 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위안스카이의 복귀를 요구했다. 위안스카이는 푸이를 퇴위시키고 중화민국 대총통 자리에 올랐다.

2. 3. 왜구 방어

1550년(가정 33년) 왜구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저지 총독이 설치되었다.[4]

2. 4. 명나라 말기의 혼란과 총독

정통 6년(1441년), 병부 상서가 운남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총독 제도가 시작되었다.[2] 15세기 말부터 명나라 중앙 정부는 총독을 점차 자주 임명하였다. 성화 5년(1469년)에는 양광(광둥과 광시) 총독이 상설 직책으로 임명되었다.[3]

정덕 8년(1510년), 쑤안다 총독이 북원 몽골족의 침략에 대비하여 만리장성을 방어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가정 33년(1550년)에는 일본 왜구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저지 총독이 설치되었다.[4]

1600년대에 만주족이 중국 북동부에서 세력을 키우면서, 누르하치는 1610년에 명나라에 대한 반란을 선포했다. 천계 6년(1626년), 원숭환은 녕원 전투에서 누르하치를 격파하고 녕원을 방어했다. 누르하치는 몇 달 후 사망했고, 원숭환은 랴오 총독이 되었다.[5] 숭정 3년(1630년), 원숭환은 명나라를 배신한 죄로 처형되었다.

같은 시기, 섬감 총독 홍승주는 이자성 등이 이끄는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임명되었다.[6] 명나라는 농민 반란 진압을 위해 하남, 산서, 섬서, 호광, 사천 등 5개 성의 총독을 설치하고, 륙상생을 임명하여 반란군을 격파했다.[7] 그러나 륙상생은 잔당을 완전히 진압하기 전에 쑤안다 총독으로 임명되어 만주족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1639년과 1641년 동안 기료 총독이었던 홍승주는 송금 전투에서 패배한 후 청나라에 항복했다. 1644년, 이자성이 북경으로 진격하자 숭정제는 자결했다.[8]

3. 청나라 시대

청나라 시대의 총독 제도는 명나라의 제도를 기본적으로 따랐으며, 18개의 성을 2~3개씩 묶어 총독의 관할 구역을 형성했다. 명나라와 달리 청나라의 총독은 군사적 확장 과정에 따라 창설되었다.[9] 순치제 5년(1649년)에는 직례총독부가 설치되어 직례, 산동성, 하남성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홍승주는 운귀총독, 호광총독, 양광총독으로 임명되어 남명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 주유랑을 처형하는 등 청나라에 저항하는 세력을 진압했다. 강희제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동녕 왕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민절총독 요계성과 장군 시랑을 활용했다.[9]

청나라 시대에는 8개의 주요 총독이 있었으며, 각 총독은 특정 지역을 관할했다.

총독관할 지역
직례총독직례
양강총독강소, 강서, 안휘
민절총독복건, 절강, 타이완
호광총독호남, 호북
섬감총독섬서, 감숙
양광총독광동, 광서
운귀총독운남, 귀주
사천총독사천
동3성총독봉천, 길림, 흑룡강



1840년 양광 총독 임칙서가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제거하면서 아편 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태평천국 운동 진압 과정에서 증국번좌종당이 활약했고, 양무운동을 통해 서구의 기술을 도입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후, 신축 조약 체결과 위안스카이의 부상 등 청나라 말기에는 여러 변화가 있었다.

3. 1. 초기 청나라의 총독 제도

초기 청나라 통치자(1644년부터 1912년까지)는 기본적으로 명나라의 제도를 따라 안정적인 성의 경계를 확립했다. 그들은 18개의 성을 만들었고 그 중 2~3개가 총독의 관할 구역을 형성했다. 명나라와 달리 청나라의 총독은 군사적 확장 과정에 따라 창설되었다.[9] 순치제 5년(1649년)에 직례총독부가 설치되어 직례, 산동성, 하남성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동시에, 중국 남서부에서 명나라의 위협이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홍승주(洪承疇)는 운귀총독, 호광총독, 양광총독으로 임명되었고,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청나라에 굴복하기를 거부한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남명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 주유랑은 미얀마로 쫓겨났고, 결국 평서왕 오삼계에 의해 처형되었다. 청나라가 중국 본토에서 명나라 잔당을 제거한 후, 중앙 정부는 삼번의 권력을 줄이려고 했다. 운귀총독 감문곤(甘文焜)은 평서왕 오삼계를 제거하기 위해 배치되었지만, 오삼계가 다른 두 번왕과 함께 청나라에 반란을 선포했을 때 체포되어 살해되었고, 삼번의 난이 시작되었다. 청나라가 오삼계의 반란을 진압한 후, 강희제는 명나라의 잔당인 동녕 왕국을 점령하려 했고, 민절총독 요계성(姚啟聖)과 장군 시랑(施琅)이 1683년 강희제 22년에 이 임무를 완수했다.[9]

3. 2. 팔도 총독

청나라 시대 지방 총독과 그 관할 지역은 다음과 같다.

총독관할 지역
직례총독직례
양강총독강소, 강서, 안휘
민절총독복건, 절강, 타이완
호광총독호남, 호북
섬감총독섬서, 감숙
양광총독광동, 광서
운귀총독운남, 귀주
사천총독사천
동3성총독봉천, 길림, 흑룡강



중국 역사가들은 직례 총독을 가장 명예롭고 강력한 직위로, 양강 총독을 여덟 총독 중 가장 부유한 직위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9] 산서성, 산동성, 하남성은 지방 총독의 관할을 받지 않았다.

3. 3. 특수 총독

수로를 관리하는 남하총독과 동하총독과 같은 특별 총독도 있었다.

3. 4. 청나라 말기의 변화

1840년 양광 총독 임칙서가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제거하자, 영국은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며 아편 전쟁이 발발했다. 청나라 해군은 영국 증기 군함에 대항할 수 없었고, 영국군은 난징으로 진격하여 양강 총독 이기산에게 난징 조약을 강요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영국에 600만 은화를 지불하고, 4개의 무역항을 개방하며, 홍콩을 할양했다.[1]

제1차 아편 전쟁 패배 이후,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났다. 청나라는 증국번을 양강 총독으로 임명하고 상군을 훈련시켜 반란에 대처했다. 한족 총독의 수가 만주족 총독의 수를 넘어선 것은 청나라 중앙 정부의 쇠퇴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2] 좌종당증국번과 함께 태평천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반란을 진압했다.[3] 이후 좌종당은 섬감 총독으로 임명되어 념군을 진압하고, 신장으로 진격하여 야곱 백의 반군을 격파하고 러시아군을 이리에서 몰아냈다. 좌종당은 양무운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복주 해군 학교와 마미 병창을 건설하여 서구의 첨단 장비를 배웠다.[2] 직례 총독 이홍장회군을 창설하고 북양 함대를 창설하여 청나라를 지원했다.[2]

1886년 청불 전쟁 이후, 이홍장은 청일 전쟁에서 패배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에 8000000kg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요동 반도, 타이완, 펑후 제도를 할양했다.[4] 1900년대, 의화단 운동 당시 동남 중국의 한족 총독들은 중립을 유지했고, 이홍장은 신축 조약을 체결할 중국 수석 협상가로 임명되었다.[5] 청일 전쟁 당시, 서태후위안스카이를 신임하여 무술변법에서 변법파를 체포하고 처형하게 했다. 위안스카이는 1901년 이홍장의 뒤를 이어 직례 총독이 되었다.[6]

1900년대 초, 위안스카이는 신군을 조직하도록 요청받았으며,[7] 1908년 모든 직책에서 해임될 때까지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인정받았다.[8] 1904년, 양강 총독 장지동은 황하 보존 사업을 독자적으로 계획하며 중앙 정부를 무시했다.[9] 1911년 무창 봉기가 발생하자, 북양군은 청나라 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위안스카이의 복귀를 요구했다. 위안스카이는 푸이 황제의 퇴위를 주선하고 중화민국 대총통 자리를 얻었다.

참조

[1] 서적
[2] 논문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웹사이트 清朝九大总督之最:谁权势最重?谁最有钱?谁地位最低? https://www.sohu.com[...] 2023-11-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