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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천의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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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치천의 군(治天の君)은 헤이안 시대 후기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걸쳐 존재했던, 일본 천황의 지위를 넘어서는 실질적인 군주를 의미하는 칭호이다. 인세이(院政)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여, 상황(上皇) 또는 법황(法皇)이 천황에게 양위한 후에도 권력을 유지하며 정치를 주도하는 형태를 나타냈다. 치천은 즉위 경험이 있고 현직 천황의 직계 존속이어야 한다는 자격 요건을 가졌으며, 왕실의 경제적 기반인 장원을 총괄하는 권한을 행사했다. 호겐의 난과 같은 권력 다툼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는 예외적인 경우도 나타났다.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그 권력이 약화되었고, 메이지 시대에 태상천황 및 양위 제도가 폐지되면서 치천의 군이라는 개념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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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천의 군
치천의 군
치천의 군 (治天の君)일본 역사에서 천황을 대신하여 정무를 맡았던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상세 정보치천의 군은 섭정과 관백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 경우 '섭관 치천의 군'이라고 불렸다.
또한 태상천황, 법황, 여원 등의 상황이 치천의 군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역할치천의 군은 천황의 대리인으로서 정치적 권력을 행사했다.
천황의 명령을 받아 정책을 결정하고 관리를 임명하는 등 국정 전반에 관여했다.
역사
시작헤이안 시대 초기, 후지와라 북가의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처음으로 섭정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후지와라 씨가 대대로 섭관직을 독점하면서 치천의 군의 지위도 확립되었다.
전성기헤이안 시대 중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까지 섭관 정치가 전성기를 맞으면서 치천의 군의 권력도 강화되었다.
특히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와 후지와라노 요리미치 부자는 50년 이상 섭관직을 맡으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쇠퇴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이후 천황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치천의 군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쇼군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치천의 군은 명목상의 존재로 전락했다.
종말에도 막부 시대에는 막부가 천황과 공가를 통제하면서 치천의 군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치 체제가 확립되면서 치천의 군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관련 용어
섭정 (摂政, Sesshō)천황이 어릴 때 천황을 대신하여 정무를 맡았던 관직
관백 (関白, Kanpaku)천황이 성인이 된 후 천황을 보좌하여 정무를 맡았던 관직
태상천황 (太上天皇, Daijō-tennō)천황의 자리에서 물러난 천황
법황 (法皇, Hōō)출가한 태상천황
여원 (女院, Nyoin)천황의 어머니나 아내 등 여성 황족에게 주어지는 칭호

2. 성립과 의미

'치천'이라는 용어는 원래 일본 신화에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제외한 4위(位)의 신들이 군주의 칭호로 사용했다는 기록[22]이 있다. 그 후, 5세기 후반까지 천황이나 왕족의 경칭으로 「치천하대왕(あめのしたしろしめすおおきみ)」이 사용되었으나, 율령 정비 이후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 후기, 섭관정치를 대신하여 상황이 직접 정치 실권을 쥐는 원정(院政)이 시작되면서 '치천'이라는 말이 다시 등장했다. 헤이안 중기에서 후기 무렵부터 특정 관직을 하나의 가계가 담당하는 것이 일본 귀족 사회에서 점차 일반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풍조가 왕실에까지 영향을 주어 왕실의 당주가 본래 천황의 권한을 집행하게 되었고, 이 왕실 당주가 '치천'으로 불렸다.

'치천'은 복수의 상황 중 단 한 명만이 될 수 있었으며, 이 자리를 놓고 상황과 천황 사이에 항쟁이 벌어지기도 했다(호겐의 난). 치천이 될 수 있는 자격 요건은 크게 두 가지였다. 즉위한 적이 있는 자여야 하고, 현직 천황의 직계 존속이어야 했다. 그러나 가마쿠라 시대에 접어들면서 즉위한 적도 없는 고타카쿠라인(後高倉院)이 치천이 되거나, 고묘 천황(光明天皇)의 직계 존속도 아닌 고곤 상황(光厳上皇)이 치천이 되는 등 예외적인 경우도 나타났다.

3. 역사

지쇼·겐랴쿠 연간(1180년대) 지쇼·주에이의 난 결과, 가마쿠라 막부가 도고쿠에 성립되어 조정과는 별개의 독자적인 지배권을 획득했지만, 치천으로서 전제 정치를 지향하는 고토바인에게 막부의 존재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23]

조큐 3년(1221년), 고토바인은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암살로 쇼군 부재 상태가 된 막부의 체제를 불안정하다고 보고 막부의 무력 배제를 시도했지만, 오히려 막부군에 패배했다(조큐의 난). 고토바인 및 그 직계의 상황·천황은 모조리 유배 및 폐위되었고, 고토바인의 혈통에 해당하지 않고 세속에 있는 왕자 가운데 당시 10세의 시게히토 왕이 고호리카와 천황으로 즉위했다. 고호리카와 천황의 아버지 모리사다 친왕이 치천에 취임하게 되는데, 이미 출가해 있었으므로 치천의 자격 요건이 부족했음에도 긴급 사태임을 감안하여 특별히 치천이 되었고, 사실상의 법황으로서 인세이를 행하였다.[23]

그러나 조큐의 난 당시 고토바인의 혈통에 해당하지 않으면서 세속에 있었던 종실 남성은 시게히토 왕 외에도 가타노노미야 구니타카 왕이 있었다. 하지만 구니타카 왕의 아버지는 조큐의 난 발발 한 달 전에 병으로 사망하여 치천이 되어 줄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다.[23]

조큐의 난 이후 치천은 이전과 동등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고, 중요 사항은 막부와의 협의를 거쳐 결정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시조 천황이 12세로 붕어하고 다음 천황을 지명할 치천이 존재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자, 준토쿠 천황의 아들인 다다나리 왕을 옹립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막부는 쓰치미카도 천황의 아들 구니히토 왕을 고사가 천황으로 즉위시켰다. 이는 천황의 지명에는 막부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선례가 되어, 치천의 권위가 저하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치천의 권한마저도 그 일부를 막부가 장악하기에 이르렀다.[24]

고사가인 말년에는 다음 치천의 자리를 놓고 고후카쿠사 천황 계통(지묘인 왕통)과 가메야마 천황 계통(다이카쿠지 왕통)이 대립했다. 고사가 천황은 사망 직전에 쓴 양장(譲状)에는 장강당령 이외의 장원 상속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왕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20] 막부는 오미야노인에게 자문을 구했고, 오미야노인은 고사가 천황의 뜻은 가메야마 천황에게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가메야마 천황이 치천이 되었지만, 고후카쿠사계는 이에 반발하여 막부에 조정을 요청했다. 그 결과 쌍방이 교대로 치천의 지위에 오른다는 양통질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분포 2년(1318년)에 즉위한 고다이고 천황 치세에서는 아버지이자 치천인 고우다인겐코 원년(1321년)에 자발적으로 인세이를 정지하고, 고다이고에 의한 친정이 시작되었다.

겐코 3년(1333년)에 시작된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은 수년 만에 실패했고,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막부 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다카우지는 고곤인을 치천으로, 그 동생인 고묘 천황을 즉위시켜, 스스로는 정이대장군으로 취임한다.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고곤 상황의 치천으로서의 권위만이 무로마치 막부의 정치적 정통성을 보장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쇼헤이 7년/ 간노 3년(1352년), 북조·막부와 대립하고 있던 남조는, 간노의 소란을 틈타 북조측의 치천·천황·황태자를 모조리 납치했다. 고코곤 천황을 세우고, 고기몬인이 치천으로서의 권능을 행사하는 것으로 남조에 맞섰다. 여성이고, 국모도 아닌 자가 치천이 되는 것은 이례적인 사태였지만, 북조는 가까스로 존속할 수 있었다.

고엔유인이 치천이 되었고, 고코마쓰 천황겐추 9년/메이토쿠 3년(1392년)에 남북조 합일을 실현해 쇼코 천황에게 양위하고 인세이를 행하였다. 쇼초 원년(1428년)에 쇼코 천황이 붕어하여 왕통이 끊어지자 후시미노미야로부터 종실을 데려다 고하나조노 천황으로 즉위시키고 인세이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에이쿄 5년(1433년)에 고코마쓰인이 죽고 인세이는 사실상 종말을 맞이했다. 동시에 치천의 군이라는 존재도 자연 소멸하게 된다.

3. 1. 헤이안 시대

1086년 시라카와 천황이 아들 호리카와 천황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원정을 시작하면서 실질적인 치천의 군 제도가 시작되었다.[9] 호리카와 천황 재위 기간에도 정치 실무는 시라카와 상황이 맡았다.[10] 호리카와 천황 사후, 아들 도바 천황이 즉위한 후에도 시라카와 법황이 정무를 담당했다.[10]

시라카와 법황 사후, 스토쿠 천황에게 양위한 도바 상황이 치천이 되어 인세를 시작했다. 시라카와 법황과 도바 법황의 인세는 모두 적극적인 정책 전개로 전제적인 인세의 전형이자 최성기로 평가받는다.

1156년 도바 상황이 사망하자 스토쿠 상황고시라카와 천황 형제가 치천의 자리를 두고 다투었고, 고시라카와 천황이 승리했다(호겐의 난).[4] 고시라카와 천황은 2년 후인 1158년에 양위하고 인세를 시작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의해 인세가 정지되고 다카쿠라 인세가 시작되면서 치천의 지위에서 쫓겨나기도 했지만, 기요모리 사후 다카쿠라 상황이 붕어하면서 부활했고, 1192년 붕어할 때까지 치천의 지위를 유지했다.

한편, 시라카와 원정 후기부터 왕실은 막대한 장원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 장원들은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별도로 상속되었다. 예를 들어 도바 천황이 황녀 하치조인에게 상속한 하치조인령, 고시라카와가 쵸코도라는 사원에 기진한 쵸코도령 등이 있다. 치천의 군은 왕실 당주로서 이 방대한 장원군을 총괄하는 권한을 가졌다.

3. 2. 가마쿠라 시대

고시라카와 법황 사후, 그의 손자인 고토바 천황이 치천이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어 독자적인 지배권을 획득했지만, 치천으로서 전제를 지향하는 고토바 상황에게는 막부의 존재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13]

조큐 3년(1221년), 고토바 상황은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암살로 인해 쇼군 부재 상태가 된 막부의 체제를 불안정하다고 보고 막부의 무력 배제를 시도했지만, 막부군에 패배하였다. (조큐의 난) 이로 인해 고토바 상황 및 그 직계의 상황·천황은 추방되었고, 고토바 상황의 혈통에 없고 세속에 있는 황자는 고토바 상황의 조카이자 다카쿠라 천황의 손자에 해당하는 당시 10세의 시게히토 왕뿐이었다. 막부는 시게히토 왕을 고호리카와 천황으로 즉위시켰다. 고호리카와 천황의 아버지 교스케 입도 친왕이 천황가의 가독자로서 치천에 취임하게 되었지만, 교스케 입도 친왕은 천황위에 오른 적이 없고 이미 출가했기 때문에 치천의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긴급 사태임을 고려하여 특별히 치천이 되어, 사실상의 법황(천황의 예에 따라 붕어 후에 "고다카쿠라인"의 인호)으로서 원정을 펼쳤다. 이것은 이미 치천의 존재가 불가결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13]

조큐의 난 당시, 고토바 상황의 혈통에 없고 세속에 있는 황자가 시게히토 왕 외에 한 명 더 존재했다. 그 인물은 시게히토 왕과 마찬가지로 고토바 상황의 조카이며 다카쿠라 천황의 손자에 해당하는 구니타카 왕 (가타노 궁)이었다. 그러나 구니타카 왕의 아버지이며 교스케 입도 친왕의 동생에 해당하는 세이엔 입도 친왕은 난의 1개월 전에 병사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치천이 될 수 없어 본인이 요건을 충족하고 있으면서도 황위 계승에서 제외된 것으로 생각된다.[13]

조큐의 난 이후, 치천은 이전과 동등한 권력을 갖지 못하고, 중요 사항은 막부와 협의한 후에 결정하는 것이 상례화되었다. 고호리카와 상황의 붕어 후, 시조 천황도 12세로 붕어하자, 차대의 천황을 지명해야 할 치천이 존재하지 않는 사태를 초래했다. 공가 사이에서는 준토쿠 천황의 황자 다다나리 왕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막부는 도바 천황의 황자 구니히토 왕을 지명했고, 그 결과 구니히토 왕이 고사가 천황으로 즉위했다. 이것은 천황의 지명에는 막부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선례가 되었고, 치천의 권위가 저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치천의 권한 일부를 막부가 장악하게 되었다.[14]

고사가 원정 말년에는 차대 치천의 자리를 놓고 고후카쿠사 천황의 계통(지묘인통)과 가메야마 천황의 계통(다이카쿠지통)이 대립했다. 고사가 법황은 붕어 직전에 손수 양위장을 썼지만, 명기된 것은 조코도령 이외의 장원의 상속이었고, 황통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적지 않고 "로쿠쇼지 및 도바노미야 이하의 것은 치천하에 의거하여 그 사단이 있을 것"(로쿠쇼지 및 도바 이궁을 다음 치천의 군에게 준다)이라고만 적혀 있었다.[5] 막부는 중궁이었던 다이미인에게 문의하자, 다이미인은 고사가 천황의 의사는 가메야마 천황 계에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가메야마 천황이 치천이 되어 정무를 맡게 되었지만, 고후카쿠사 천황 계는 이에 반발하여 막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막부의 조정 결과, 쌍방이 교대로 치천의 지위에 오르는 양통迭立이 행해지게 되었다. 동시에 조코도령은 지묘인통에, 하치조인령은 다이카쿠지통에 상속되게 되었고, 경제면에서도 양통은 동등한 실력을 갖게 되었다.

분포 2년(1318년)에 즉위한 다이카쿠지통의 고다이고 천황 치세에서는, 아버지이자 치천이기도 한 고우다 상황이 겐쿄 1년(1321년)에 자발적으로 원정을 정지하고, 고다이고에 의한 친정이 시작되었다. 고다이고가 도막을 꾀했던 이유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자신의 계통에 황위를 계승시키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3. 3. 무로마치 시대와 남북조 시대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지묘인 왕통의 고곤 상황을 치천으로 삼고, 그의 동생인 고묘 천황을 즉위시켜 막부 정권을 수립했다.[3] 아시카가 타다요시는 고곤 상황의 치천으로서의 권위가 막부의 정치적 정통성을 보장한다고 이해했다.[3]

1352년, 남조는 간오의 혼란을 틈타 북조 측의 치천, 천황, 황태자를 납치했다.[4] 막부 및 북조 측은 고고곤 천황을 즉위시키고, 코기몬인(고후시미 천황의 비(妃)이자 고곤·고묘의 생모)이 치천의 권능을 행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4]

이후 고고곤의 아들인 고엔유 상황이 치천이 되었다.[5] 고코마쓰 천황1392년 남북조 합일을 실현하고, 쇼코 천황에게 양위하여 인세이를 행했다.[5] 1428년 쇼코 천황이 붕어하자, 후시미노미야 가문에서 고하나조노 천황을 세워 인세이를 이어갔다.[5]

1433년 고코마츠 상황이 붕어하면서 인세이는 사실상 종언을 맞이했고, 치천의 군이라는 존재도 자연 소멸하게 되었다.[6]

3. 4.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시대에 구 황실 전범이 제정되면서 태상천황양위 제도가 모두 폐지되었고, 치천의 군이라는 개념도 함께 소멸되었다.[1]

2019년 (헤이세이 31년/레이와 원년), 천황의 퇴위 등에 관한 황실 전범 특례법(천황 퇴위 특례법)에 따라 아키히토가 퇴위하고 나루히토가 즉위하였다.[1] 그러나 과거 치천의 군과 천황이 대립했던 역사를 고려하여, 퇴위 후 아키히토의 칭호는 '태상천황'이 아닌 '상황'으로 정해졌다.[1]

4. 역대 치천의 군

治天の君일본어 목록은 다음과 같다.

治天の君일본어연수천황관계비고
시라카와 상황오토쿠 3년(1086년)호리카와 천황황자
가조 2년(1107년)도바 천황손자
호안 4년(1123년)스토쿠 천황증손자
도바 상황다이지 4년(1129년)황자
에이지 원년(1141년)고노에 천황황자
규쥬 2년(1155년)고시라카와 천황황자
고시라카와 천황규쥬 3년(1156년)-친정
고시라카와 상황니조 천황호겐 3년(1158년)니조 천황황자니조 천황 시기는 고시라카와인의 인세이와 니조 천황의 친정이 병존했기 때문에 治天일본어의 지위에 대해서는 의론의 여지가 있다.[19]
고시라카와 상황에이호 원년(1165년)로쿠조 천황손자
닌난 3년(1168년)다카쿠라 천황황자
다카쿠라 천황/상황지쇼 3년(1179년)다카쿠라 천황-지쇼 3년의 정변으로 고시라카와 인세이가 정지되고 다카쿠라 천황에 의한 친정.
지쇼 4년(1180년)안토쿠 천황황자
고시라카와 상황지쇼 5년(1181년)손자
주에이 2년(1183년)고토바 천황손자
고토바 천황/상황겐큐 3년(1192년)-친정
겐큐 9년(1198년)쓰치미카도 천황황자
조겐 4년(1210년)준토쿠 천황황자
조큐 3년(1221년)주쿄 천황손자조큐의 난으로 인세이가 정지되었다.
고다카쿠라인조큐 3년(1221년)고호리카와 천황황자
고호리카와 천황/상황조큐 5년(1223년)-친정
조에이 원년(1232년)시조 천황황자
고사가 천황/상황닌지 3년(1242년)고사가 천황-친정
간겐 4년(1246년)고후카쿠사 천황황자
쇼겐 원년(1259년)가메야마 천황황자



연수지묘인 왕통다이카쿠지 왕통비고
治天일본어천황관계治天일본어천황관계
분에이 9년(1272년)-가메야마 천황/상황가메야마 천황-친정
분에이 11년(1274년)고우다 천황황자
고안 10년(1287년)고후카쿠사 상황후시미 천황황자-
쇼오 3년(1290년)후시미 천황/상황-친정
에이닌 6년(1298년)고후시미 천황황자
쇼안 3년(1301년)-가메야마 상황고니조 천황손자
가겐 3년(1305년)고우다 상황황자
도쿠지 3년(1308년)후시미 상황하나조노 천황황자-
분포 원년(1317년)고후시미 상황동생 (유자)
분포 2년(1318년)-고우다 상황고다이고 천황황자
겐쿄 원년(1321년)고다이고 천황-친정(고우다 천황은 겐쿄 4년(1324년) 세상을 떠났다)
겐토쿠 3년(1331년)고후시미 상황고곤 천황황자-
겐코 3년(1333년)-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
겐무 3년(1336년)고곤 상황고묘 천황동생 (유자)
랴쿠오 2년/엔겐 4년(1339년)고무라카미 천황-
조와 4년/쇼헤이 3년(1348년)스코 천황황자
쇼헤이 6년(1351년)-쇼헤이 일통
분나 원년/쇼헤이 7년(1352년)(고기몬인)고코곤 천황-治天일본어인 고곤 상황이 남조에 납치되었기 때문에 대신 治天일본어의 정무를 맡았다. 덧붙여 고기몬인을 治天일본어의 군으로 하는 것에는 이의(닛타 이치로[25] 등)도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엔분 2년/쇼헤이 12년(1357년)고코곤 천황/상황
오안 원년/쇼헤이 23년(1368년)조케이 천황-
오안 4년/겐토쿠 2년(1371년)고엔유 천황황자
오안 7년/분추 3년(1374년)고엔유 천황/상황-
에이토쿠 2년/고와 2년(1382년)고코마쓰 천황황자
에이토쿠 3년/고와 3년(1383년)고카메야마 천황-조케이 상황이 인세이를 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론도 있다.



治天의 군일본어연수천황관계비고
고엔유 상황메이토쿠 3년(1392년)고코마쓰 천황황자메이토쿠 화약으로 남북조 합일이 이루어졌다.
고코마쓰 천황/상황메이토쿠 4년(1393년)-친정
오에이 19년(1412년)쇼코 천황황자
쇼초 원년(1428년)고하나조노 천황칠친등(七親等)


참조

[1] 서적 治天の君 小学館 2000-09
[2] 서적 治天の君 山川出版社 1997-10
[3] 서적 治天の君 岩波書店 1999-10
[4] 서적 院政―もう一つの天皇制― 中公新書 2006
[5] 서적 日本の歴史 蒙古襲来 中公文庫 1974
[6] 사전 治天の君 吉川弘文館
[7] 서적 本朝皇胤紹運録
[8] 서적 王朝時代の実像15 中世の王家と宮家 臨川書店 2023
[9] 서적 王朝時代の実像15 中世の王家と宮家 臨川書店 2023
[10] 서적 王朝日記論 法政大学出版局 2006
[11] 서적 王朝時代の実像15 中世の王家と宮家 臨川書店 2023
[12] 논문 「保安元年の政変」と鳥羽天皇の後宮 吉川弘文館 2018
[13] 논문 鎌倉期王家における皇統の断絶と在俗皇子 同成社 2018
[14] 서적 武家政権について 吉川弘文館 2020
[15] 서적 天皇と中世の武家 講談社 2018
[16] 서적 治天の君 小学館 2000-09
[17] 서적 治天の君 山川出版社 1997-10
[18] 서적 治天の君 岩波書店 1999-10
[19] 서적 院政―もう一つの天皇制― 中公新書 2006
[20] 서적 日本の歴史 蒙古襲来 中公文庫 1974
[21] 사전 治天の君 吉川弘文館
[22] 서적 본조황윤소운록
[23] 논문 鎌倉期王家における皇統の断絶と在俗皇子 同成社 2018
[24] 서적 武家政権について 吉川弘文館 2020
[25] 서적 天皇と中世の武家 講談社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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