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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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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칼로얀은 1197년부터 1207년까지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였다. 본명은 이반이며, "뛰어난 요한"을 뜻하는 칼로얀은 별칭이다. 그는 형제 페터르 4세와 이반 아센 1세의 뒤를 이어 불가리아의 차르가 되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에 대항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교황 인노첸티우스 3세와 외교 관계를 맺어 가톨릭과의 연합을 시도했으나, 황제의 칭호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후에는 라틴 제국과 대립했으며,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는 1207년 테살로니키 포위 중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정황은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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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칼로얀
다른 이름요아니차 (Иоаница)
출생1170년 경
사망1207년 10월
사망 장소테살로니키
통치
칭호불가리아 황제
통치 기간1196년 – 1207년
즉위1196년
선임자이반 아센 1세
계승자보릴
공동 통치자페터르 2세 (1196년 – 1197년)
다른 칭호불가리아인과 블라흐인의 왕 (1204년 – 1207년)
대관식1204년 11월 8일
가족
왕조아센 왕조
배우자쿠만카타
자녀마리아

2. 이름

칼로얀의 본명은 '이반'이었다. '칼로얀'(Caloiohannesla)은 "뛰어난 요한", "잘생긴 요한"이란 뜻으로 그리스어 Kaloiōannēs에서 유래되었고, 콤네노스 왕조 이후 요한네스란 이름을 가진 비잔티움 황제의 일반적인 별칭이었다. 다른 별명으로는 "요한" 혹은 "이반"이란 이름의 변형인 요안니차(Йоаница) 혹은 이반니차(Иваница)가 있었다. 루마니아 역사가들은 ''Ioniţă Caloian''란 이름을 사용했다.[18]

"칼로얀(Калоянbg 라틴어: Caloiohannes)"이라는 이름은 "선량한 요한" 또는 "관대한 요한"을 의미하며, 그리스어 'Kaloiōannēs'에서 파생되었다. 콤네노스 왕조의 요한 2세 등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도 이 이름을 사용했다. 칼로얀은 "이반", "요안"[9]의 지소사인 "요아니차(Ioannitsa)"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현대 루마니아의 역사가들은 'Ioniţă Caloian'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표기하고 있다.[10]

3. 생애

칼로얀은 1168년에서 1169년 경에 페터르 4세와 이반 아센 1세의 막내동생으로 태어났다. 118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1189년 탈출하여 불가리아로 돌아왔다. 형들이 귀족들에게 살해된 후, 칼로얀은 불가리아의 차르가 되었다.

칼로얀은 형들의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팽창 정책을 계승하여 1201년 트라키아의 콘스탄테이아(현재의 시메오노프그라드)와 바르나를 정복하였고, 1202년에는 마케도니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1202년 헝가리의 임레 왕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베오그라드, 브라니체보, 니쉬를 점령하였으나, 1203년 칼로얀은 이를 다시 되찾아 세르비아의 스테판 네마니치에게 돌려주었다. 헝가리와 불가리아 간의 대립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중재 때까지 계속되었다.

1199년부터 인노켄티우스 3세는 칼로얀에게 편지를 써서 로마 가톨릭교회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칼로얀은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1202년 이에 답변하였다. 그는 가톨릭 세력과 연합하는 조건으로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시메온 1세, 페터르 1세, 사무일이 가졌던 황제의 관과 권장을 수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불가리아 교회의 총대주교(Patriarch) 지위를 인정받기를 원하였다.[19] 교황은 이러한 양보를 하기 원치 않았고, 그의 사절인 추기경 레오는 터르노보의 대주교 바실리에게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의 수석 주교(Primate)' 지위만을 주었다. 칼로얀은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의 왕'으로서 황제가 아닌 귀일 교회(Uniate)의 왕관을 받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칼로얀은 교황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황제' 대관과 '총대주교' 임명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또한 교황에게 이 협정을 통해 가톨릭 예식을 따르겠다고 약속하였다.[19]

칼로얀 치하(1197-1207)의 불가리아.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였다. 보두앵 1세는 황제를 선언하였고 칼로얀의 연합 제의를 거절하였던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과 그 이웃 국가들을 정복할 의도를 드러내었다. 이에 1205년 트라키아의 비잔티움 귀족들이 반발하여 침략자들에게 대항하는 한편 칼로얀에게 복종을 약속하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1205년 4월 14일, 칼로얀은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십자군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보두앵 1세는 포로로 잡혔고 태자 루이 1세는 살해당하였다. 보두앵은 터르노보의 감옥에 투옥되어 그곳에서 죽었거나 혹은 이후에 1205년 처형당하였다. 같은 해인 1205년 칼로얀은 세레스에서 라틴 군을 섬멸하고 플로브디프를 점령하였고, 라틴 제국 하의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벨리코터르노보의 성 40 순교자 성당.


처음에 칼로얀의 승리를 환영하였던 비잔티움 귀족들은 그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칼로얀은 진로를 바꾸어 비잔티움인들을 공격하였고, 바실레이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불가르인의 학살자)에서 유래된 '로마녹토노스'(로마인 학살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14] 1206년 1월 31일 칼로얀은 루시옹 전투에서 라틴 군을 격파하였고, 디디모티호를 점령하러 나섰다. 불가리아는 다시 한번 트라키아를 유린하였고, 로도스토(현재의 테키르다)와 같은 도시의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

3. 1. 초기 생애

1168년에서 1169년 경에 페터르 4세와 이반 아센 1세의 막내동생으로 칼로얀이 태어났다. 그의 형제들의 기원에 있어서는 논란이 있다.[19] 1187년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내졌고, 1189년 그곳에서 탈출하여 불가리아로 돌아왔다.[19] 그의 형들이 이반코 등의 귀족들에게 살해된 후, 칼로얀은 공모자들보다 유리한 상황에서 불가리아의 차르가 되었다.

칼로얀은 1170년경에 태어났을 것이고, 1188년에 아직 10대였다. 그는 이반(또는 요한)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이반이 그의 형 아센의 세례명이기도 했기 때문에 요한니차("작은 이반")라고 불렸다. 칼로얀은 '잘생긴 요한'을 뜻하는 그리스어 표현에서 유래했다. 그의 그리스 적들은 또한 그를 '스킬로요안네스'( "개 요한")라고 불렀으며, 이는 드라갈레프치 수도원과 수체비차 수도원의 프레스코화에서 '차르 스칼로얀' 또는 '스칼루이안'에 대한 언급으로 이어졌다.

비잔틴 제국이 아센의 아내를 붙잡은 후, 칼로얀은 1188년 봄에 그녀와 교환하기 위해 인질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다. 그의 석방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가 탈출한 1189년경이라고도 한다. 그는 보야르 이반코가 1196년 타르노보에서 아센을 살해했을 때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반코는 비잔틴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차지하려 했지만, 테오도르-페테르가 그를 비잔틴 제국으로 도망가게 했다.

3. 2. 비잔티움 제국과의 갈등

칼로얀은 그의 형들의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팽창 정책을 계승하였다. 1196년 비잔티움에 항복하여 플로브디프를 통치하던 이반코와 동맹을 맺을 정도였다. 스트루미차를 통치하는 도브로미르 흐리즈도 그의 동맹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이반코와 도브로미르 흐리즈를 굴복시킴으로써 이 연합은 빠르게 무너졌지만, 칼로얀은 1201년 트라키아의 콘스탄테이아(현재의 시메오노프그라드)와 바르나를 정복하였고, 1202년에는 마케도니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19]

1202년 헝가리의 임레 왕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 니쉬를 점령하였다. 1203년 칼로얀은 이를 다시 되찾아 세르비아의 스테판 네마니치에게 돌려주었다. 헝가리와 불가리아 간의 대립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중재 때까지 계속되었다.[19]

1199년부터 인노켄티우스 3세는 칼로얀에게 편지를 써서 로마 가톨릭교회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권위, 부,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던 칼로얀은 1202년 이에 답변하였다. 그는 가톨릭 세력과 연합하는 조건으로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시메온 1세, 페터르 1세, 사무일이 가졌던 황제의 관과 권장을 수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불가리아 교회의 총대주교(Patriarch) 지위를 인정받기를 원하였다.[19] 교황은 이러한 양보를 하고 싶지 않았고, 그의 사절인 추기경 레오는 터르노보의 대주교 바실리에게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의 수석 주교(Primate)' 지위만을 주었다. 칼로얀은 'rex Bulgarorum et Blachorum'(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의 왕) 혹은 rex Bulgarie et Blachie(불가리아와 왈라키아의 왕)으로서 황제가 아닌 귀일 교회(Uniate)의 왕관을 받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칼로얀은 교황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황제' 대관과 '총대주교' 임명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또한 교황에게 이 협정을 통해 가톨릭의 예식을 따르겠다고 약속하였다.[19]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였다. 보두앵 1세는 황제를 선언하였고 칼로얀의 연합 제의를 거절하였던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과 그 이웃 국가들을 정복할 의도를 드러내었다. 1205년 트라키아의 비잔티움 귀족들이 반발하여 침략자들에게 대항하는 한편 칼로얀에게 복종을 약속하면서 도움을 요청했다.[13][14]

라틴 제국의 황제 보두앵 1세는 비잔티움 도시들을 점령하고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하였다. 십자군의 연대기 작가였던 빌라르두엥은 ''"왈라키아의 왕 요안니차는 대군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폴리스를 구원하려 왔다. 왈라키아인과 불가리아인, 개종하지 않은 14,000명의 쿠만족들이 그를 따랐다."''[20]라고 적었다. 1205년 4월 14일, 칼로얀의 쿠만족 부대는 십자군의 중장기병을 아군이 매복해 있던 아드리아노폴리스 북쪽의 습지로 유인하였고, 그곳에서 칼로얀은 그들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보두앵 1세는 포로로 잡혔고 태자 루이 1세는 살해당하였다. 보두앵은 터르노보의 감옥에 투옥되어 그곳에서 죽었거나 혹은 이후에 1205년 처형당하였다.[15] 같은 해인 1205년 칼로얀은 세레스에서 라틴 군을 섬멸하고 플로브디프를 점령하였고, 라틴 제국 하의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점령하였다.[15]

처음에 칼로얀의 승리를 환영하였던 비잔티움 귀족들은 그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칼로얀은 진로를 바꾸어 비잔티움인들을 공격하였고, 바실리우스 2세 불가록토노스(불가르인의 학살자)에서 유래된 '로마녹토노스'(로마인 학살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14] 1206년 1월 31일 칼로얀은 루시옹 전투에서 라틴 군을 격파하였고, 디디모티호를 점령하러 나섰다. 불가리아는 다시 한번 헤라클레이아와 카에노프루리온과 같은 주요 도시를 포함하여 트라키아를 유린하였고, 로도스토(현재의 테키르다)와 같은 도시의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 초기의 칼로얀의 잔혹함은 그의 적들을 뛰어 넘지 않았던 반면 후기에는 점령한 도시의 주민들을 불가리아의 먼 지역으로 이주시켰다.[14]

3. 3. 헝가리와의 분쟁

1202년 헝가리의 임레 왕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베오그라드, 브라니체보, 니쉬를 점령하였다.[19] 1203년 칼로얀은 이 지역을 되찾아 세르비아의 스테판 네마니치에게 돌려주었다. 헝가리와 불가리아 간의 대립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중재가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3. 4.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

119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칼로얀을 로마 가톨릭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편지를 보냈다.[19]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권위, 부, 영토 회복을 원했던 칼로얀은 1202년 답신했다. 그는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시메온 1세, 페터르 1세, 사무일이 가졌던 황제의 관과 권장을 수여해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불가리아 교회의 총대주교 지위 인정을 원했다.[19]

교황은 이러한 양보를 원치 않았고, 그의 사절 추기경 레오는 불가리아 수도 터르노보에 도착하여 터르노보 대주교 바실리에게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의 수석 주교' 지위만을 부여했다. 칼로얀은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의 왕(rex Bulgarorum et Blachorum)' 혹은 '불가리아와 왈라키아의 왕(rex Bulgarie et Blachie)'으로서 황제가 아닌 귀일 교회(Uniate)의 왕관만을 받았다. 하지만 칼로얀은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황제' 대관과 '총대주교' 임명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또한 교황에게 이 협정을 통해 가톨릭 예식을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인노첸시오 3세의 사절은 1199년 12월 말 불가리아에 도착하여 교황이 칼로얀에게 보낸 편지를 전달했다. 인노첸시오는 칼로얀의 조상들이 "로마 시"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고대 교회 슬라브어로 쓰인 칼로얀의 답변은 보존되지 않았지만, 그의 성좌와의 이후 서신을 토대로 내용을 재구성할 수 있다. 칼로얀은 스스로를 "불가리아와 블라흐의 황제"라고 칭하며, 자신이 제1차 불가리아 제국 통치자들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교황에게 황제 왕관을 요구하고, 불가리아 정교회를 교황의 관할 하에 두기를 희망했다.

칼로얀이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알렉시오스 3세 역시 그에게 황제 왕관을 보내고 불가리아 교회의 자치 교회 지위를 인정할 의향이 있었다.

3. 5. 라틴 제국과의 전쟁

칼로얀은 그의 형인 페터르 4세와 이반 아센 1세의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팽창 정책을 계승했다. 심지어 1196년 비잔티움에 항복하여 플로프디프를 통치하던 이반코와 동맹을 맺을 정도였다. 스트루미차를 통치하는 도브로미르 흐리즈도 그의 동맹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이반코와 도브로미르 흐리즈를 굴복시키면서 이 연합은 빠르게 무너졌지만, 칼로얀은 1201년 트라키아의 콘스탄테이아(현재의 시메오노프그라드)와 바르나를 정복하였고, 1202년에는 마케도니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19]

1202년 헝가리의 임레 왕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베오그라드, 브라니체보, 니쉬를 점령하였다. 1203년 칼로얀은 이를 다시 되찾아 세르비아의 스테판 네마니치에게 돌려주었다. 헝가리와 불가리아 간의 대립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중재 때까지 계속되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였다. 보두앵 1세가 황제를 선언하였고 칼로얀의 연합 제의를 거절하였던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과 그 이웃 국가들을 정복할 의도를 드러내었다. 이에 트라키아의 비잔티움 귀족들이 반발하여 침략자들에게 대항하는 한편 1205년 칼로얀에게 복종을 약속하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라틴 제국의 황제 보두앵 1세는 비잔티움 도시들을 점령하고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하였다. 십자군의 연대기 작가였던 빌라르두엥은 ''"왈라키아의 왕 요안니차는 대군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폴리스를 구원하려 왔다. 왈라키아인과 불가리아인, 개종하지 않은 14,000명의 쿠만족들이 그를 따랐다."''[20]라고 적었다. 1205년 4월 14일, 칼로얀의 쿠만족 부대는 십자군의 중장기병을 아군이 매복해 있던 아드리아노폴리스 북쪽의 습지로 유인하였고, 그곳에서 칼로얀은 그들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보두앵 1세는 포로로 잡혔고 태자 루이 1세는 살해당하였다. 보두앵은 터르노보의 감옥에 투옥되어 그곳에서 죽었거나 혹은 이후에 1205년 처형당하였다. 같은 해인 1205년 칼로얀은 세레스에서 라틴 군을 섬멸하고 플로프디프를 점령하였고, 라틴 제국 하의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처음에 칼로얀의 승리를 환영하였던 비잔티움 귀족들은 그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칼로얀은 진로를 바꾸어 비잔티움인들을 공격하였고, 바실레이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불가르인의 학살자)에서 유래된 '로마녹토노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206년 1월 31일 칼로얀은 루시온 전투에서 라틴 군을 격파하였고, 디모티키아를 점령하러 나섰다. 불가리아는 다시 한번 헤라클레이아와 카에노프루리온과 같은 주요 도시를 포함하여 트라키아를 유린하였고, 로도스토와 같은 도시의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 초기의 칼로얀의 잔혹함은 그의 적들을 뛰어 넘지 않았던 반면 후기에는 점령한 도시의 주민들을 불가리아의 먼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3. 6. 죽음

1207년 10월 초, 칼로얀은 쿠만족 동맹군에게 살해당했다.[21] 그의 치세 대부분은 비잔티움 제국 및 라틴 제국과의 대립과 관련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의 잔인함이 드러났다. 몇몇 그의 무자비함은 쿠만족 동맹군이 벌인 일이었고, 칼로얀의 억압 정책은 적의 지배층을 노린 것이었고 평민들은 자비롭게 대해졌다. 보두앵 1세의 죽음과 관련된 전설에서는 그의 아내가 보두앵이 그에게 청혼했었다고 거짓으로 주장하자 분노한 칼로얀이 그의 시신을 훼손하였다고 묘사한다.[21]

칼로얀의 무덤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21] 13세기 말의 ''세르비아의 성 사바 전기''에 따르면, 칼로얀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타르노보로 옮겨졌다. 하지만, 1254년에 기록된 동일한 전설의 더 오래된 버전에서는 이 내용을 언급하지 않는다. 1972년 타르노보의 성 사십인 순교자 교회 근처 무덤에서 발견된 금반지에는 키릴 문자로 ''Kaloianov prăsten''("칼로얀의 반지")이라고 새겨져 있다. 역사학자 이반 두이체프는 이 반지가 1230년에 지어진 교회로 칼로얀의 유해가 옮겨졌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가 14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이 무덤을 칼로얀의 매장지로 식별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또한, 같은 장소에 묻힌 다른 모든 왕족의 무덤은 교회 안에 위치하고 있어, 이 반지가 칼로얀의 소유가 아니라 14세기의 동명이인의 소유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성 사십인 순교자 교회 근처에서 발견된 두개골을 바탕으로 한 얼굴 복원. 두개골의 신원은 논쟁의 대상이다.


같은 무덤에서 발견되어 칼로얀과 관련된 두개골을 바탕으로, 인류학자 요르단 요르다노프는 칼로얀의 얼굴을 복원했다.

4. 유산

칼로얀의 유해는 터르노보로 보내져 성 40인 순교자 교회에 매장되었다.[14] 1972년, 같은 교회 주랑에서 금실로 짠 옷을 입은 칼로얀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었다.[16] 유골 검사 결과, 두개골에 젊은 시절 생긴 상처가 남아 있었는데, 이는 뇌를 압박하는 두통과 간질을 유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칼로얀 사후 800년 가까이 지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불가리아 2 레프 동전에 그의 인장이 사용되었다.[17] 또한, 사우스 셰틀랜드 제도 리빙스턴 섬에는 칼로얀의 이름을 딴 칼로얀 누나타크 공원이 있다.

5. 가족

칼로얀의 아내는 쿠만족 출신이었다.[1] 칼로얀에게는 유일하게 알려진 딸이 있었는데,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2] 칼로얀 사후, 그의 아내는 그의 후계자인 보릴과 결혼했다.[3] 보릴은 1211년에 칼로얀의 딸을 라틴 제국 황제 헨리에게 시집보냈다.[4] 1216년 앙리가 사망했을 때, 마리아는 앙리를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참조

[1] 서적 Bulgaria 1994
[2] 서적 O City of Byzantium, Annals of Niketas Choniates
[3] 서적 O City of Byzantium, Annals of Niketas Choniates
[4] 서적 The History
[5] 서적 O City of Byzantium, Annals of Niketas Choniates
[6] 서적 The History
[7] 서적 The Conquest of Constantinople: Robert of Clari
[8] 서적 ブルガリア 1
[9] 문서 「イヴァン(Ivan)」「ヨアン(Ioan)」いずれの人名も英語の''John''に相当する。
[10] 웹사이트 https://books.google[...]
[11] 서적 ブルガリア 風土と歴史
[12] 서적 Istoria românilor din cele mai vechi timpuri până astăzi Bucharest 1975
[13] 서적 ブルガリア 1
[14] 서적 ブルガリア 1
[15] 서적 ブルガリア 風土と歴史
[16] 간행물 中世のバルカン
[17] 웹사이트 Bulgarian National Bank http://www.bnb.bg 2009-03-26
[18] 웹사이트 Istoria României http://books.google.[...]
[19] 서적 Istoria românilor din cele mai vechi timpuri până astăzi Bucharest 1975
[20] 문서 Villehardouin
[21]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eb.archive.[...] 201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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