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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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378년 훈족의 침입으로 로마 제국 영토로 이주한 고트족과 동로마 황제 발렌스가 이끄는 로마군 사이의 전투이다. 발렌스는 그라티아누스의 증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고트족을 공격했으나, 고트족의 기병대에 포위되어 로마군은 참패했다. 이 전투에서 발렌스 황제가 전사하고 동로마 군대의 핵심 세력이 파괴되면서 로마의 군사적 권위는 실추되었으며, 로마 제국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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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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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고트족, 알란족 |
교전국 2 | 동로마 제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국 1 지휘관 | 프리티게른, 알라테우스, 사파렉스 |
교전국 2 지휘관 | 황제 발렌스, 세바스티아누스, 트라야누스, 빅토르, 리코메르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20,000명 |
교전국 2 병력 | 30,000명 |
사상자 및 피해 | |
교전국 1 사상자 | 알려지지 않음 |
교전국 2 사상자 | 10,000–15,000명 또는 20,000명 (로마군 병력의 약 2/3) |
시각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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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376년 훈족의 침입으로 위협받은 고트족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스에게 로마 제국의 영토로 이주를 허가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발렌스는 트라키아로 이주를 허가하고 지방 정부에 그들의 정착을 도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트라키아의 총독 루키피누스는 도나우강을 건너온 고트족의 재산을 빼앗고 거처를 마련해 주지 않아 이들은 거의 기아 상태에 빠졌다.
377년 여름, 고트족 난민들은 마르키아노폴리스로 몰려가 루키피누스와 면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루키피누스는 군대로 이들을 해산하려다 패배했다.[8] 발렌스는 서로마 제국 황제 그라티아누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동서 로마 제국의 대규모 증원군에도 고트족과 로마군은 2년 동안 뚜렷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378년 봄, 발렌스는 군대를 이끌고 발칸반도로 향했고,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출발해 5월 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그라티아누스는 증원군을 보냈으나 알레마니족이 라인강을 넘어 쳐들어오자 병력을 다시 불러들였다. 갈리아에서 알레마니족을 격퇴한 후, 발렌스는 아드리아노폴리스까지 진군하여 상당한 규모의 고트족을 격퇴하고 서방의 증원군을 기다렸다.
8월 6일, 정찰대는 약 10,000명의 고트족이 북쪽 25km 지점에서 아드리아노플로 진격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했고, 발렌스는 참호와 성벽으로 진지를 요새화했다. 그라티아누스가 보낸 리코메르는 발렌스에게 증원군을 기다리라고 요청했고, 발렌스의 장교들도 동의했으나, 발렌스는 전투를 결정했다.
8월 8일, 프리티게른은 로마 영토와 교환하여 평화와 동맹을 제안하는 사절을 보냈다. 발렌스는 수적 우위를 확신하여 제안을 거부했다.[13] 그러나 발렌스의 병력 추산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먼 거리를 간 고트족 기병대의 일부를 고려하지 않았다.[14]
2. 1. 훈족의 침입과 고트족의 이동
376년 훈족의 침입으로 위협받은 고트족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스에게 로마 제국의 영토로 이주를 허가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발렌스는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트라키아로 이주를 허가하고 지방 정부에 그들의 정착을 도우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로마의 동맹 부족이 되어 정착해 안정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다.[8] 그러나 트라키아의 총독 루키피누스는 황제가 명령했는데도 도나우강을 건너온 고트족의 재산을 빼앗고 거처를 마련해 주지 않아 이들은 거의 기아 상태에 빠졌다.[8]4세기 중반, 동고트족은 동방에서 들이닥친 훈족에게 쫓겨나 정착해 있던 흑해 연안에서 로마 제국 국경 부근의 다뉴브강 유역까지 이동했다. 그곳에는 3세기 무렵부터 서고트족이 정착해 있었지만, 동고트족의 이동으로 거주지를 빼앗긴 서고트족은 무장을 해제한 후 도나우강 남안으로 이주하는 대신 군무에 적합한 남자를 보조병(아욱실리아)으로 로마 제국에 제공하고, 제국 내에서 농경할 것을 제안했다.
서고트족의 제안은 약화되고 있던 로마군을 증강하고, 도나우강 유역 일대를 다시 농경 지대로 만들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발렌스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주지로 트라키아를 준비했다.
376년 가을, Fritigern영어 등이 이끄는 서고트족은 도나우강 도하를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부족들도 편승했기 때문에, 당초 제국 측에 전해진 규모(약 10만 명)를 훨씬 넘는 30만 명이 이주해 왔다. 이주한 계절이 수확기인 가을이었기 때문에, 트라키아 지방의 행정관은 다음 해 수확 시기까지 1년 동안의 식량과 생활 필수품을 이주해 온 부족에게 지급해야 했다. 그러나, 행정관은 생활상의 보상을 하지 않았고, 보상되더라도 양도 적고 품질도 낮았기 때문에, 서고트족은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그리스 북부에서 약탈을 시작했다.
2. 2. 로마 제국의 수용 정책과 고트족의 불만
376년 훈족의 침입으로 위협받은 고트족은 발렌스 황제에게 로마 제국의 영토로 이주를 요청하였다. 발렌스는 이를 허락하고 트라키아로 이주를 명하며 지방 정부에 정착을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고트족은 로마의 동맹 부족이 되어 안정적인 정착 생활을 기대했으나, 트라키아 총독 루피치누스는 황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고트족의 재산을 빼앗고 거처를 마련해주지 않아 이들을 기아 상태로 몰아넣었다.[8]377년 여름, 생존을 위해 저항하기 시작한 고트족 난민들은 마르키아노폴리스로 몰려가 루피치누스와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오히려 루피치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해산하려 시도했으나 패배하였다.
4세기 중반, 동고트족은 동쪽에서 온 훈족에게 쫓겨 흑해 연안에서 도나우강 유역까지 이동했다. 그곳에는 서고트족이 정착해 있었지만, 동고트족의 이동으로 거주지를 빼앗긴 서고트족은 무장을 해제하고 도나우강 남쪽으로 이주하는 대신 군 복무에 적합한 남자를 보조병으로 로마 제국에 제공하고, 제국 내에서 농경할 것을 제안했다.
서고트족의 제안은 약화되던 로마군을 보강하고 도나우강 유역을 다시 농경지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발렌스에게 받아들여졌다. 발렌스는 이주지로 트라키아를 준비했다.
376년 가을, Fritigern영어 등이 이끄는 서고트족은 도나우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부족들도 함께 이주하여 당초 예상보다 훨씬 많은 30만 명이 이주해 왔다. 이주 시기가 수확기인 가을이었기 때문에 트라키아 지방 행정관은 다음 해 수확 때까지 1년 동안 식량과 생필품을 지급해야 했다. 그러나 행정관은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았고, 지원하더라도 양이 적고 품질이 낮아 서고트족은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그리스 북부에서 약탈을 시작했다.
2. 3. 로마 제국의 대응과 발렌스의 참전
377년 여름, 고트족 난민들은 마리아노폴리스에서 루키피누스와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루키피누스는 군대로 이들을 해산하려다 패배했다.[8] 발렌스는 서로마 제국 황제 그라티아누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8] 그라티아누스는 장군 프리게리두스와 경비대 지도자 리코메르를 보냈으나, 이후 2년간 양측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8]378년, 발렌스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기로 결정하고 시리아에서 병력을 소집했다.[9] 그는 안티오크를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고, 5월 30일에 도착했다.[6][10][11] 발렌스는 세바스티아누스를 트라키아의 로마군 재편성에 임명하고, 세바스티아누스는 군단병 2,000명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진군하여 고트족 소규모 부대를 매복 공격했다.[6][10][11] 고트족 지도자 프리티게른은 니코폴리스와 베로에에 병력을 집결시켰다.[6][10][11]
같은 해 봄, 발렌스는 안티오키아(현재: 안타키아)에서 도나우강 남쪽에 가까운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 이스탄불)을 향해 출발했지만, 군대를 모으면서 행군하여 5월 말에 도착했다.
당시 그라티아누스 군대는 판노니아에서 알레마니족의 일부인 렌티엔세스의 공격을 받았으나, 아르젠타리아 근처(현재 프랑스 콜마르 근처)에서 승리하고 동쪽으로 이동했다.[6][12]
세바스티아누스와 그라티아누스의 승전 소식을 들은 발렌스는 멜란티아스에서 아드리아노플로 이동했다.[13] 8월 6일, 정찰대는 약 10,000명의 고트족이 북쪽 25km 지점에서 아드리아노플로 진격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했고, 발렌스는 참호와 성벽으로 진지를 요새화했다.[13]
그라티아누스가 보낸 리코메르는 발렌스에게 증원군을 기다리라고 요청했고, 발렌스의 장교들도 동의했으나, 발렌스는 기다리지 않고 전투를 결정했다.[13]
3. 전투의 경과
378년 8월 9일,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가 벌어졌다. 그라티아누스가 보낸 증원군의 사령관 리코메레스는 발렌스에게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대규모 전투를 자제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발렌스는 이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정보망을 통해 적군이 1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판단, 휘하 장군 세바스티아누스의 즉각 공격 주장에 동의하여 공격에 나섰다.
8월 8일 발렌스는 고트족의 족장 프리티게른이 로마군의 정황을 파악하고서 제안한 협상을, 아군의 수를 기준으로 하는 우세를 믿고 거절했다.[40]
전투 당일, 하드리아노폴리스의 성문을 나선 로마군은 적을 발견하자마자 급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열이 갖추어지기도 전에 공격을 시작한 탓에 로마군은 처음부터 밀릴 수밖에 없었다.
로마군은 피로와 탈진 상태로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은 고트족 야영지를 마주했다. 고트족은 기병을 제외하고, 가족과 재산이 있는 수레 원형 방어선을 방어했다. 프리티게른은 로마군을 지연시켜 시간을 벌고자 했다. 밭은 고트족에 의해 불태워져 연기로 로마군을 지연시키고 괴롭혔으며, 인질 교환 협상이 시작되었다. 협상은 로마 병사들을 격분시켰지만, 프리티게른에게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일부 로마 부대는 명령 없이 전투를 시작했는데,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고, 고트족에게 복수하려는 열망이 컸을 것이다. 이베리아의 왕자 바쿠리우스가 지휘하는 황실 방패 궁병의 스콜라에가 공격했지만, 지원이 부족하여 쉽게 밀려났다.
로마군은 전투 단위와 명령 체계가 분명했지만, 부족 단위로 전투한 고트족군은 짐수레를 둥글게 둘러싸고 방어진을 구축,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려고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로마군은 전투 단위마다 기능에 따라 유효하게 응대하는 전략을 취하지 못하고 고트족군에게 격퇴당했으며, 상대를 야만족이라고 얕보던 발렌스는 전투 경험이 없었다.
결국, 로마군은 고트족 기병에 밀려 대대장 35명[39]과 군단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했다. 로마군 총사령관 세바스티아누스와 부사령관 트라야누스는 전사했다.
3. 1. 발렌스의 오판과 성급한 공격
발렌스는 고트족의 병력을 1만 명 정도로 과소평가하고, 그라티아누스의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공격을 결정했다. 378년 8월 8일, 프리티게른이 로마군의 정황을 파악하고 제안한 평화 협상을, 아군의 수를 기준으로 하는 우세를 믿고 거절하였다.[40]8월 9일 아침,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출발한 로마군은 남하하는 서고트족을 찾아 북서쪽으로 진격했다. 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 선두에 있던 우익이 원진을 쳐 방어하고 있던 고트족의 일부를 발견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로마군은 우익, 중앙, 좌익에 기병대를 배치하는 전형적인 로마군 포진, 즉 회전 방식을 취했지만, 여러 부족의 집합체였던 서고트족 측은 각 부족이 독립적으로 공격해 오는 진형으로 공격했기 때문에 로마군은 의도한 포위전 형태로 만들지 못하고 각 군이 따로따로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다.
3. 2. 전투 시작과 로마군의 혼란
378년 8월 9일,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출발한 로마군은 서고트족을 찾아 북서쪽으로 진격했다. 로마군은 전열을 갖추기도 전에 성급하게 공격을 시작했다.[40] 로마군은 우익, 중앙, 좌익에 기병대를 배치하는 전형적인 로마군 진형을 취했지만, 여러 부족의 집합체였던 서고트족은 각 부족이 독립적으로 공격해 오는 진형이었기 때문에 로마군은 의도한 포위전 형태를 만들지 못하고 각 군이 따로따로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다.고트족은 짐수레를 둥글게 둘러싸 수레 원형 방어선을 구축하고, 그 안에 가족과 재산을 넣어 보호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40]
3. 3. 고트족 기병대의 반격과 로마군의 패배
프리티게른이 이끄는 고트족은 수레 원형 방어선을 치고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며 방어하고 있었다. 로마군 좌익이 이 방어선에 도달했을 때, 식량 조달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고트족 기병대가 도착하여 로마군을 포위 공격하였다.[40] 로마군은 무거운 갑옷과 긴 방패 때문에 기동하기 어려웠고, 고트족 기병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 과정에서 로마군은 대대장 35명[39]과 군단 전체의 3분의 2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40]패주 과정에서 발렌스 황제는 경비병에게 버려졌다. 그의 최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화살에 맞아 죽었다거나, 농가의 오두막에 숨었다가 고트족에게 불에 타 죽었다고 전해진다.[40]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4. 전투의 결과
에데사 전투 이후 최악의 로마 패배이자, 3세기 위기의 최저점이었던 이 전투는 후기 제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동로마 군대의 핵심 세력이 파괴되고, 귀중한 행정가들이 죽었으며, 전투 이후 다뉴브 지방의 거의 모든 무기고가 파괴되었다. 군대 예비군 부족은 징집 위기를 악화시켰다.[37] 이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가 로마 제국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제국의 군사력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을 뿐이었다.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의 패배는 로마를 위해 또는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는 야만족들이 강력한 적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고트족은 발렌스의 후계자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부분적으로 길들여졌지만(그는 그들을 다시 동맹 부족으로 받아들였다), 결코 추방되거나, 멸종되거나, 동화되지 않았다. 그들은 제국 국경 내에서 별개의 존재로 남아, 몇 년 동안 동맹으로, 이후 반독립 또는 완전 독립 상태로, 또는 종종 적대적으로 존재했다.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가 전쟁 기술에 미친 장기적인 영향은 논쟁의 대상이다. 찰스 오만은 1960년에 이 전투가 군사사의 전환점을 나타내며, 중기병이 로마 보병을 압도하고 중세 기사의 시대를 열었다고 썼다.[37] T. S. 번스는 1973년 저서를 통해 이를 반박하며, 고트족 군대의 기병대는 비교적 작았고, 실제 발렌스가 더 많은 기병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프리티게른의 기병대의 역할이 그의 승리에 결정적이었지만, 이 전투는 주로 보병 대 보병의 싸움이었다고 주장했다. 중세 기사는 아드리아노폴리스 이후 수 세기 동안 부상하지 않았다.[38]
이로 인해 서고트족은 무력을 유지한 채 로마 제국 내에 머물게 되었다. 제국 중앙부 침입을 허용했기 때문에 동서 로마의 분열은 결정적이 되었고, 마침내 로마 제국의 야만족화가 진행되었다.
이 전투에서의 로마군의 패배는 문화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전 로마군인이자 역사가인 아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타키투스 저작 이후(네르바 황제 이후)의 로마사를 기술한 『역사』를 발렌스 황제의 전사로 끝맺게 된다.
4. 1. 아드리아노폴리스 공방전과 고트족의 약탈
고트족은 로마 병사들이 값나가는 물건을 두고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드리아노폴리스를 공략하려 했다. 그러나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패잔병들이 아드리아노폴리스로 도망쳐 방어에 앞장섰다. 결국 고트족은 공략을 단념하고 로마 가도를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목표로 남동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로마 제국 동방의 수도였고,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트족은 이 대도시 공략도 일찌감치 단념했다.[41]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고트족이 즉시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진격하여 점령을 시도했다고 기록했다. 암미아누스는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벽 아래에서 고트족을 포위한 로마 군인들에 대해 언급했다. 로마군의 3분의 1이 후퇴에 성공했지만, 피해는 헤아릴 수 없었다. 에데사 전투 이후 최악의 로마 패배이자, 3세기 위기의 최저점이었던 이 전투에서 세바스티아누스 장군을 포함한 많은 장교들이 사망했다. 이 전투는 후기 제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동로마 군대의 핵심 세력 파괴, 귀중한 행정가들의 죽음, 그리고 전투 이후 다뉴브 지방의 거의 모든 무기고 파괴를 초래했다. 군대의 예비군 부족은 징집 위기를 악화시켰다.
5. 전투의 영향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의 패배는 로마군이 더 이상 무적이 아니며, 야만족에게 압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로마인들에게 각인시켰다. 이전에도 황제가 전사하거나 로마군이 패배한 사례는 있었지만, 로마는 항상 복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전투의 패배는 끝내 설욕되지 못했고, 로마의 게르만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37]
이 전투가 전쟁 기술에 미친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찰스 오만은 중기병이 로마 보병을 압도하고 중세 기사의 시대를 열었다고 주장했지만,[37] T. S. 번스는 고트족 기병대는 소규모였고, 전투는 주로 보병 간의 싸움이었으며, 중세 기사는 수 세기 후에야 등장했다고 반박했다.[38]
5. 1. 로마 제국의 군사적 권위 실추
이 전투의 패배는 로마인들에게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로마군은 더 이상 천하무적이 아니며, 야만족에게 압도당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황제가 전사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로마군이 게르만족에게 참패한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예전의 패배는 곧 로마군이 복수했었다. 그러나 이 전투의 패배는 설욕되지 못했다. 로마의 게르만화는 마침내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37]발렌스를 계승해 동로마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계속해서 밀려오는 고트족을 로마 영토 내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고트족은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부분적으로 동맹 부족(포에데라티)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추방되거나, 멸종되거나, 동화되지 않았다. 그들은 제국 국경 내에서 별개의 존재로 남아, 동맹, 반독립, 완전 독립, 또는 종종 적대적인 상태로 존재했다.[38]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고트족은 즉시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진격하여 점령을 시도했다. 암미아누스는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벽 아래에서 포위한 고트족과 싸운 수많은 로마 군인들을 언급한다. 로마군의 3분의 1이 후퇴에 성공했지만, 피해는 헤아릴 수 없었다. 에데사 전투 이후 최악의 로마 패배로, 3세기 위기의 최저점이었던 이 전투에서 세바스티아누스 장군을 포함한 많은 장교들이 사망했다. 이 전투는 후기 제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동로마 군대의 핵심 세력 파괴, 귀중한 행정가들의 죽음, 그리고 전투 이후 다뉴브 지방의 거의 모든 무기고 파괴를 초래했다. 군대의 예비군 부족은 징집 위기를 악화시켰다. 이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로마 제국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제국의 군사력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38]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의 패배는 로마를 위해 또는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는 야만족들이 강력한 적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로 인해 서고트족은 무력을 유지한 채 로마 제국 내에 머물게 되었다. 제국 중앙부 침입을 허용했기 때문에 동서 로마의 분열은 결정적이 되었고, 마침내 로마 제국의 야만족화가 진행되었다.
이 전투에서의 로마군의 패배는 문화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전 로마군인이자 역사가인 아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타키투스 저작 이후(네르바 황제 이후)의 로마사를 기술한 『역사』를 발렌스 황제의 전사로 끝맺게 된다.[37]
5. 2. 로마 제국의 게르만화 가속화
테오도시우스 1세는 발렌스의 뒤를 이어 동로마 황제가 되었으나, 계속해서 밀려오는 고트족을 로마 영토 내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37] 고트족은 제국 국경 내에서 별개의 존재로 남아, 몇 년 동안은 로마의 동맹으로, 이후에는 반독립 또는 완전 독립 상태로, 때로는 적대적으로 존재했다. 이로 인해 서고트족은 무력을 유지한 채 로마 제국 내에 머물게 되었다. 제국 중앙부 침입을 허용했기 때문에 동서 로마의 분열은 결정적이 되었고, 마침내 로마 제국의 야만족화가 가속화되었다.5. 3. 군사 전략의 변화 (논쟁)
찰스 오만은 1960년에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가 군사사의 전환점을 나타내며, 중기병이 로마 보병을 압도하고 중세 기사의 시대를 열었다고 주장했다.[37] 그러나 T. S. 번스는 1973년 저서를 통해 이를 반박했는데, 고트족 군대의 기병대는 비교적 작았고, 실제 발렌스가 더 많은 기병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프리티게른의 기병대의 역할이 그의 승리에 결정적이었지만, 이 전투는 주로 보병 대 보병의 싸움이었다고 주장했다. 번스는 중세 기사가 아드리아노폴리스 이후 수 세기 동안 부상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38]5. 4. 한국 역사학계의 관점
국내 학계에서는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를 통해 로마 제국이 군사적 주도권을 상실하고 방어적인 입장으로 전환하게 된 점에 주목한다. 이는 훗날 서로마 제국의 붕괴로 이어지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로마군은 더 이상 천하무적의 군대가 아니었으며, 게르만족에게 참패한 이 전투의 패배는 설욕되지 않았다. 결국 로마의 게르만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되었다.[37][38]강대국의 쇠퇴와 몰락은 외부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요인, 즉 제국의 관리 능력 부재와 소수 민족에 대한 차별 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국민의힘과 같은 보수 정당은 강경한 외교 정책과 군사력 증강을 통해 국가 안보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의 사례는 무분별한 군사력 사용과 소수 집단에 대한 억압이 오히려 제국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계속해서 밀려오는 고트족을 로마 영토 내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고트족은 제국 국경 내에서 별개의 존재로 남아, 때로는 동맹으로, 때로는 반독립 또는 완전 독립 상태로, 종종 적대적으로 존재했다.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고트족은 즉시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진격하여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 전투는 후기 로마 제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동로마 군대 핵심 세력의 파괴, 귀중한 행정가들의 죽음, 다뉴브 지방의 거의 모든 무기고 파괴를 초래했다. 군대의 예비군 부족은 징집 위기를 악화시켰다.
6. 로마군
발렌스 황제의 군대는 트라키아 군대, 황제의 근위대 제1군, 황제의 근위대 제2군을 포함했을 가능성이 있다. 트라키아 군대는 동부 발칸에 주둔하며 376~377년에 큰 손실을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황제의 근위대 양군은 평화 시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둔했지만, 376년에는 페르시아 국경에 투입되었고 377~378년에는 서쪽으로 파견되었다.[15][16]
발렌스의 군대는 전쟁에 익숙한 베테랑 부대를 포함했다. 전체 병력은 7개의 군단[17]으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는 제1 ''막시미아나'' 군단과 황실 보조 부대가 포함되어 있으며 각 군단은 700~1000명으로 구성되었다. 기병대는 기마 궁수(''사기타리'')와 ''Scholae''(황실 근위대)로 구성되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발렌스 군대의 규모를 추정하려 시도했다. 워렌 트레드골드는 395년경 트라키아 군단에 24,500명의 병사가 있었고, 황제 곁의 제1군과 제2군에 각각 21,000명씩 있었다고 추정한다.[18] 그러나 마르키아노폴리스와 다른 위협받는 도시들을 보호하기 위해 병력이 필요했으므로, 세 군대가 모두 함께 싸웠을 가능성은 낮다.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로마군의 실제 병력을 보병 10,000명과 기병 5,000명으로, 최대 15,000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19]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당시 로마군의 부대를 정확히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일한 자료는 전투를 묘사했지만 부대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은 암미아누스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테오도시우스 이후의 로마군 부대를 열거한 동방의 노티티아 디그니타툼la이다.
6. 1. 구성
발렌스의 군대는 전쟁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부대를 포함하여 7개의 군단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군단은 700~1000명 규모였다. 여기에는 제1 ''막시미아나'' 군단과 황실 보조 부대가 포함되었다.[17] 기병대는 기마 궁수(''사기타리'')와 황실 근위대(''Scholae'')로 구성되었다.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발렌스 휘하의 다음과 같은 병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란키아리''와 ''마티아리'' 군단: Notitia Dignitatum|노티티아 디그니타툼la에는 둘 다 ''팔라티나 군단''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부에서는 ''마티아리''가 동맹군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곤봉으로 무장한 보병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발렌스는 란키아리와 마티아리와 함께 보호를 구하려 했으나, 결국 고트족을 막지 못했다.[19]
- 바타비아인 대대: 예비대로 유지되었으나 도망쳤다. 빅토르라는 ''코메스''가 이들을 전투에 투입하려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 ''스쿠타리''(방패 기병)와 궁수: 이베리아의 바쿠리우스의 지휘하에 있었으며, 캅카스 이베리아 (현대 조지아)에서 온 동맹 보조 부대였을 가능성이 있다.
암미아누스는 또한 다음과 같은 장교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름 | 직책 | 비고 |
---|---|---|
리코머 | 코메스 (황궁 주둔 황제 호위대) | 376년 발렌스를 돕기 위해 파견된 그라티아누스의 도메스티치 출신 프랑크족. 협상을 위해 인질 역할을 자청, 전투에서 생존. |
세바스티아누스 | 발렌스의 장군 | 이탈리아에서 도착. 전투에서 사망. |
빅토르 | 기병 최고 사령관 | 사르마티아 출신. 그라티아누스를 기다리라고 조언. |
에퀴티우스 | 호민관, 궁정 고위 집사 | 발렌스의 친척. 디발툼에서 고트족 포로였다가 탈출, 복수를 두려워해 인질 역할 거부. 전투에서 사망. |
바쿠리우스 | 궁수 및/또는 스쿠타리 지휘관 | 이베리아 출신. 명령 없이 공격. |
트라이아누스 | 로마군 지휘관 (발렌스 지휘권 이전) | 전투에서 사망. 란키아리와 마티아리에게 피신했을 때 생존. |
빅토르 | 코메스 | 바타비아 예비 대대를 전투에 투입하려 함. |
카시오 | 궁수 및/또는 스쿠타리 지휘관 | 리코머가 인질로 데려옴. |
사투르니누스 | 마기스테르 밀리툼 바칸스 | 퇴각하여 생존. |
발레리아누스 | 마굿간 장관 | 전투에서 사망. |
포텐티우스 | 프로모티 (기병대) 호민관 | 전 군대 사령관 우르시치누스의 아들. 젊은 나이에 사망. |
(이름 불명) | 35명의 호민관 | 부대원과 참모원 포함, 사망. 생존자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 |
현대 역사가들은 발렌스 군대의 규모를 다르게 추정한다. 워렌 트레드골드는 395년경 트라키아 군단에 24,500명, 황제 곁의 제1군과 제2군에 각각 21,000명이 있었다고 추정한다.[18] 그러나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로마군의 실제 병력을 보병 10,000명과 기병 5,000명으로, 최대 15,000명으로 추정한다.[19]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당시 로마군 부대를 정확히 열거하는 것은 어렵다. 전투를 묘사한 암미아누스의 기록과 테오도시우스 이후 로마군 부대를 열거한 동방의 Notitia Dignitatum|노티티아 디그니타툼la이 유일한 자료이다. 발칸 반도에 열거된 많은 부대는 아드리아노폴리스 이후 창설되었거나 이동되었으며, 일부는 손실로 인해 합병 또는 해산되었을 수 있다.
6. 2. 주요 부대 및 지휘관
발렌스 황제의 군대는 7개의 군단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군단은 700~1000명 규모였다. 여기에는 제1 ''막시미아나'' 군단과 황실 보조 부대가 포함되었다. 기병대는 기마 궁수(''사기타리'')와 황실 근위대(Scholae)로 구성되었다.[17] 이들은 전쟁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들이었다. 발렌스 군대는 트라키아 군대(동부 발칸에 주둔하며 376~377년에 큰 손실을 입었을 가능성이 있음), 황제 근위대 제1군, 황제 근위대 제2군을 포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 근위대 양군은 평상시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둔했지만, 376년 페르시아 국경에 투입되었다가 377~378년에 서쪽으로 파견되었다.[15][16]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발렌스 휘하의 부대들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란키아리''' 와 '''마티아리''' 군단: 두 군단 모두 ''팔라티나 군단''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마티아리가 동맹군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마티아리''는 곤봉으로 무장한 보병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마테아''는 라틴어로 곤봉을 의미). 발렌스는 로마군이 붕괴되자 란키아리와 마티아리에게 피신하려 했으나, 결국 고트족을 막지 못했다.
- '''바타비아인 대대''': 예비대로 대기하다가 도주했다. 빅토르라는 ''코메스''가 이들을 전투에 투입하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 '''스쿠타리'''(방패 기병)와 궁수: 이베리아의 바쿠리우스가 지휘한 부대로, 로마군이 아닌 캅카스 이베리아(현재 조지아) 출신 동맹 보조 부대였을 가능성이 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다음 장교들도 언급했다.
이름 | 직책 | 비고 |
---|---|---|
리코머 |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도메스티치 (황궁 주둔 황제 호위대) 소속 프랑크족 코메스 | 376년 발렌스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에퀴티우스가 거절하자 협상을 위해 인질을 자처했고, 이후 퇴각하여 전투에서 살아남았다. |
세바스티아누스 | 발렌스의 장군 | 이탈리아에서 도착했으며, 전투에서 사망했다. |
빅토르 | 기병 최고 사령관 | 사르마티아 출신으로, 그라티아누스를 기다리라고 조언한 장교들을 이끌었다. |
에퀴티우스 | 발렌스의 친척, 호민관, 궁정 고위 집사 | 디발툼에서 고트족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했으나, 복수가 두려워 인질 역할을 거부했다. 전투에서 사망했다. |
바쿠리우스 | (로마화된 이름으로 추정) 이베리아 출신, 궁수 및/또는 스쿠타리 지휘 | 리코머가 인질로 데려온 카시오와 함께 부대를 지휘했으며, 명령 없이 공격을 감행했다. |
트라이아누스 | 발렌스가 지휘권을 넘겨받기 전 로마군 지휘 |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큰 손실로 묘사되었다. 발렌스가 란키아리와 마티아리에게 피신했을 때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
빅토르 | 코메스 | 바타비아 예비 대대를 전투에 투입하려 시도했다. |
카시오 | 궁수 및/또는 스쿠타리 지휘 | 리코머가 인질로 데려왔다. |
사투르니누스 | 마기스테르 밀리툼 바칸스 | 퇴각하여 살아남았다. |
발레리아누스 | 마굿간 관리 장관 | 전투에서 사망했다. |
포텐티우스 | 프로모티 기병대 호민관, 전 군대 사령관 우르시치누스의 아들 | "덕망 있는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로, 젊은 나이에 쓰러졌다." |
35명의 호민관 | 부대원, 참모 | 사망. 생존자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
7. 고트족
고트족과 반달족의 전쟁도 참고
고트족 군대는 주로 보병으로 구성되었지만,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기병대도 일부 있었다. 초기 연구에서는 고트족의 압도적인 병력, 기병대, 그리고 등자 사용이 승리의 원인으로 분석되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양측 군대 규모는 비슷했고, 고트족 보병이 더 결정적이었으며, 6세기까지 로마군과 고트족 모두 등자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데 동의한다. 등자는 아바르족에 의해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로마 정찰병들은 고트족 병력을 10,000명으로 추산했지만, 이는 알라테우스와 사프락스의 병력이 제외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대 역사가들은 고트족 군대의 규모를 12,000~15,000명으로 추정한다.
7. 1. 구성
고트족과 반달족의 전쟁도 참고다뉴브강 남쪽에는 아마도 두 개의 주요 고트족 군대가 있었을 것이다. 프리티게른은 주로 테르빙기 망명자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었고, 알라테우스와 사프락스는 주로 그루퉁기 망명자들로 구성된 또 다른 군대를 이끌었다.
프리티게른은 전투에 거의 모든 병력을 투입했으며, 로마군이 처음 마주한 부대를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알라테우스와 사프락스는 로마군을 향해 "벼락처럼 쏟아져 내리며" 기병대를 투입했다. 이 병력에는 알란족도 포함되었다.
고트족 군대는 주로 보병이었으며,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기병대도 일부 있었다. 일부 구작에서는 고트족의 압도적인 병력, 고트족 기병대, 그리고 때로는 고트족의 등자 사용으로 고트족의 승리를 설명한다. 보다 최근의 학술 연구에서는 대부분 군대의 규모가 비슷했고, 고트족 보병대가 기병대보다 더 결정적이었으며, 로마군이나 고트족 모두 6세기까지 등자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한다. 아마도 아바르족에 의해 도입되었을 것이다.
아미아누스는 로마 정찰병들이 고트족 병력을 10,000명으로 추산했지만, 아미아누스는 이를 과소평가라고 일축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로마 정찰병들이 전투 전에 고트족 병력을 추산할 때 알라테우스와 사프락스의 병력이 부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러 현대 역사가들은 고트족 군대의 규모를 12,000~15,000명으로 추정했다.
아미아누스는 고트족 기병대의 중요한 역할을 언급했다. 찰스 오먼은 기병대가 고트족 병력의 대다수라고 믿고, 아드리아노플 전투를 이후 천 년 동안 기병대가 보병을 지배하는 시대의 시작으로 해석했다. 다른 일부 역사가들도 같은 견해를 취했다. T. S. 번스 및 기타 최근 역사가들은 보병이 고트족 병력의 대다수였으며, 이 전투가 보병과 기병의 관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7. 2. 병력 규모 논쟁
고트족과 반달족의 전쟁도 참고다뉴브강 남쪽에는 아마도 두 개의 주요 고트족 군대가 있었을 것이다. 프리티게른은 주로 테르빙기 망명자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었고, 알라테우스와 사프락스는 주로 그루퉁기 망명자들로 구성된 또 다른 군대를 이끌었다.
프리티게른은 전투에 거의 모든 병력을 투입했으며, 로마군이 처음 마주한 부대를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알라테우스와 사프락스는 로마군을 향해 "벼락처럼 쏟아져 내리며" 기병대를 투입했다. 이 병력에는 알란족도 포함되었다.
고트족 군대는 주로 보병이었으며,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기병대도 일부 있었다. 일부 구작에서는 고트족의 압도적인 병력, 고트족 기병대, 그리고 때로는 고트족의 등자 사용으로 고트족의 승리를 설명한다. 보다 최근의 학술 연구에서는 대부분 군대의 규모가 비슷했고, 고트족 보병대가 기병대보다 더 결정적이었으며, 로마군이나 고트족 모두 6세기까지 등자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한다. 아마도 아바르족에 의해 도입되었을 것이다.
아미아누스는 로마 정찰병들이 고트족 병력을 10,000명으로 추산했지만, 아미아누스는 이를 과소평가라고 일축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로마 정찰병들이 전투 전에 고트족 병력을 추산할 때 알라테우스와 사프락스의 병력이 부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러 현대 역사가들은 고트족 군대의 규모를 12,000~15,000명으로 추정했다.
아미아누스는 고트족 기병대의 중요한 역할을 언급했다. 찰스 오먼은 기병대가 고트족 병력의 대다수라고 믿고, 아드리아노플 전투를 이후 천 년 동안 기병대가 보병을 지배하는 시대의 시작으로 해석했다. 다른 일부 역사가들도 같은 견해를 취했다. T. S. 번스 및 기타 최근 역사가들은 보병이 고트족 병력의 대다수였으며, 이 전투가 보병과 기병의 관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8. 전투 위치
전투는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몇 시간 행군 거리에 있는 곳에서 벌어졌지만, 정확한 위치는 불확실하다. 현대 역사학에서 전투의 가능한 세 가지 위치가 논의되었다.
- 한 가설은 고트족의 진영과 전투장이 아드리아노폴리스 북쪽, 톤조스 강 서쪽, 헤브로스 강 동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28][29]
- 다른 가설은 전투장을 도시 북쪽, 톤조스 강 동쪽, 현대 터키 마을 무라트찰르 근처에 위치시킨다.[30][31]
- 세 번째 가설은 도시 동쪽, 현대 터키 마을 데미르한르 근처에 위치한다고 본다. 즉, 발렌스가 아드리아노폴리스 성벽에서 출발하여 정확히 동쪽으로 행군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32][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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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로마인 이야기 14권: 그리스도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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