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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투스의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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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키투스의 예수는 로마 제정 시대의 역사가인 타키투스가 저술한 《연대기》에 등장하는 예수와 초기 기독교에 대한 기록을 의미한다. 《연대기》 15권 44장에는 64년 로마 대화재 이후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내용이 묘사되어 있으며, 이 과정에서 예수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타키투스는 예수를 '크리스투스'로 지칭하며, 그가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고, 그의 추종자들이 박해를 받았음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예수의 실존과 초기 기독교의 확산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역사적 가치와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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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투스의 예수
타키투스의 예수
이름예수
로마자 표기Iesu
언급 매체연대기
시기서기 116년경
언급 내용예수티베리우스 치세에 유대 총독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당했다.
"키레스티아누스(Chrestianos)"라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그리스도인들(Chrestianos)은 극심한 미신으로 기소되었다.
추가 정보
역사적 가치예수의 역사성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비기독교 자료 중 하나로 여겨진다.
타키투스가 예수의 존재와 처형을 독립적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
논쟁일부 학자들은 타키투스가 기독교인들에게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타키투스 언급의 진위성에 대한 논쟁도 존재한다.

2. 타키투스와 《연대기》

11세기 필사본에서 발췌한 부분으로, 『연대기』 중 기독교인에 대한 언급이 있는 페이지(15.44.3–8)(피렌체,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Plut. 68.2, f. 38''r'')


로마 카피톨리노 박물관에 있는 네로의 흉상


타키투스는 로마 제정 초기의 역사가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다. 그의 대표작인 《연대기》는 로마 대화재를 비롯한 주요 사건들과 네로 황제의 기독교인 박해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으며, 학계에서 많은 분석이 이루어졌다.[6]

《연대기》의 원본 필사본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사본은 "메디치 필사본"으로 알려진 두 개의 주요 필사본에서 유래한다. 이 필사본들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9] 그 중 두 번째 필사본(Plut. 68.2)은 11세기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인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기독교인에 대한 묘사가 담긴 구절의 가장 오래된 증거를 제공한다.[10]

2. 1. 《연대기》의 내용

타키투스의 《연대기》는 로마 제정 초기부터 네로 황제까지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이다. 타키투스는 이 책에서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면서, 황제들과 권력자들의 행동과 그 이면에 숨겨진 동기를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그는 권력의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로마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고 있다.

타키투스는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를 사용하여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깊이 있게 파고든다. 그의 역사 서술 방식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을 넘어, 인간의 본성과 권력의 속성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1]

3. 《연대기》 15.44의 내용과 맥락

학계에서 많은 분석이 이루어진 『연대기』 15권 44장은 64년 7월 로마를 휩쓴 로마 대화재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6] 화재는 6일 동안 계속되었고, 도시의 상당 부분을 태웠다. 타키투스는 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구절은 로마 대화재와 네로의 기독교인 박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와 기독교인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타키투스는 네로가 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음을 암시한다.[6]

『연대기』의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현존하는 사본은 메디치 필사본으로 알려진 두 개의 주요 필사본에서 유래한다.[9] 이 필사본들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9] 기독교인에 대한 묘사가 담긴 구절은 11세기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두 번째 필사본(Plut. 68.2)에서 발견된다.[10]

3. 1. 기독교인 박해



로마 대화재 이후, 로마 시민들은 네로가 직접 불을 질렀다고 의심하였다.[6] 이러한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화재의 범인으로 지목하고 박해를 시작하였다.[6][7] 이는 로마에서 기독교인과 당국 간의 최초의 기록된 대립이었다.[6]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네로가 기독교인들에게 가한 잔혹한 고문과 처형 방식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짐승의 가죽을 쓴 채로 개에게 찢겨 죽거나, 십자가형을 당하거나, 불에 타 밤을 밝히는 조명으로 사용되는 등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네로는 이러한 광경을 위해 자신의 정원을 제공하고, 전차 경기사 복장으로 군중과 섞이거나 전차 위에서 쇼를 벌이기도 했다. 타키투스는 이러한 박해가 공공의 이익이 아닌, 네로 개인의 잔혹함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비판하며, 극단적인 처벌을 받아 마땅한 범죄자들에게조차 동정심이 생겨났다고 기록했다.[7]

4. 용어에 대한 고찰



타키투스의 『연대기』(15.44)에는 '크리스티아니'(Christiani)와 '크레스티아니'(Chrestiani)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 두 용어의 정확한 의미와 차이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1902년 게오르크 안드레센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연대기》 사본(11세기)에서 '크리스티아니'(Christianos)의 첫 번째 'i'와 그 뒤의 간격에 주목하여, 원래 'i' 대신 'e'가 있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11] 자외선 검사 결과, 실제로 글자가 수정된 것이 확인되었지만, 누가 'e'를 'i'로 변경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12]

이 수정이 알려진 이후, 타키투스가 의도적으로 '크레스티아니'라는 용어를 사용했는지, 아니면 중세 시대 필사자의 실수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다. 로마 일반 대중은 초기 기독교인을 지칭할 때 '크리스티아니'와 '크레스티아니' 두 용어를 모두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13] 로버트 E. 반 부르스트는 많은 자료에서 '크레스티아니'라는 용어가 2세기까지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 사이에서도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고 언급한다.

아돌프 폰 하르나크는 '크레스티아니'가 원래 표현이었고, 타키투스가 일반 대중과 비교하여 자신의 우월한 지식을 보여주기 위해 바로 뒤에 의도적으로 '그리스도'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로버트 레네한은 로마인들이 발음이 같은 두 단어를 혼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연대기》의 원래 단어는 '크레스티아노스'였으며 필사자의 오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14][15]

타키투스가 어떤 용어를 사용했든, 이 구절의 진정성이나 의미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4. 1. 크리스티아니(Christiani) vs 크레스티아니(Chrestiani)

《연대기》 15권 44장 4절의 내용을 담은 코덱스 라우렌티아누스 메디체우스 68.2 (f. 38''r'') 페이지의 세부 사항: 'Christianos'라는 단어에서 'i'와 's' 사이의 간격이 강조 표시되어 있음


1902년 게오르크 안드레센은 피렌체에 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연대기》 사본(11세기)에서 첫 번째 'i' 뒤에 간격이 있는 것을 보고, 텍스트가 수정되어 원래는 'i' 대신 'e'가 있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11] 자외선 검사 결과, 수정된 것이 확실하게 드러났지만, 누가 'e'를 'i'로 변경했는지는 알 수 없다.[12] 이 수정이 알려진 후, 타키투스가 의도적으로 "크레스티안"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지, 아니면 중세 시대 필사자의 실수였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이 있었다. 로마 일반 대중은 초기 기독교인을 지칭할 때 기독교인과 크레스티안이라는 용어를 모두 사용했다고 한다.[13]

로버트 E. 반 부르스트는 많은 자료에서 크레스티안이라는 용어가 2세기까지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 사이에서도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기독교인이라는 용어는 신약 성경에 세 번만 나타나며, 첫 번째 사용(사도행전 11:26)에서 이 용어의 기원을 설명한다. 세 경우 모두 수정되지 않은 그리스어 시나이 사본은 '크레스티아노이'로 기록되어 있다. 프리기아의 여러 장례 석비에는 크레스티안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으며, 한 석비에서는 "''기독교인들을 위한 크레스티안''"과 같이 두 용어를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아돌프 폰 하르나크는 크레스티안이 원래 표현이었고, 타키투스가 일반 대중과 비교하여 자신의 우월한 지식을 보여주기 위해 바로 뒤에 의도적으로 ''그리스도''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로버트 레네한은 로마인들이 발음이 같은 두 단어를 혼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연대기》의 원래 단어는 크레스티아노스였으며 필사자의 오류가 아니라고 언급했다.[14][15] 반 부르스트는 타키투스가 그들을 "수치스러운 행위로 인해 미움을 받았다"고 언급했기 때문에, 타키투스 자신이 기독교인을 "유용한 자들"을 뜻하는 크레스티아노스라고 칭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에디와 보이드는 타키투스가 어떤 용어를 사용했든 이 구절의 진정성이나 의미에 큰 영향은 없다고 본다.

타키투스가 어떤 표현을 사용했든, 네로 시대의 박해에 대한 또 다른 고대 자료인 수에토니우스는 분명히 "기독교인"에 대해 언급한다. "수에토니우스의 ''네로 16.2''에서 'christiani|italic=nola'가 원래의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12]

4. 2. 본시오 빌라도의 직책

이스라엘 박물관에 소장된 빌라도 비석


본시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재직했을 당시의 직위는 빌라도 비석의 라틴어 비문에는 총독으로 나타나 있지만, 타키투스의 이 구절에서는 집정관으로 묘사되어 있다.[16][17] 요세푸스는 빌라도를 일반적인 그리스어 용어 ἡγεμώνgrc (), 즉 총독으로 지칭한다.[18][19] 타키투스는 클라우디우스가 집정관에게 통치 권한을 부여한 통치자였다고 기록한다. AD 44년 헤로데 아그리파의 죽음 이후, 유대 지역이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면서, 클라우디우스는 집정관에게 유대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했다.[30]

타키투스가 빌라도가 총독이었음을 나타내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음에도 "집정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 다양한 이론이 제시되었다.

  • 제리 바르다만은 빌라도의 직함이 유대 지역에 머무는 동안 변경되었으며, 빌라도 비석이 그의 통치 초기에 제작되었다고 주장한다.[20]
  • 바루크 리프시츠는 비문에 원래 "집정관"이라는 직함과 함께 "총독"이 언급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21]
  • S.G.F. 브랜든은 두 직위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제안한다.[23]
  • 존 도미닉 크로산은 타키투스가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사용되던 집정관이라는 직함을 빌라도 시대에 소급 적용했다고 말한다.[24]


브루스 칠턴, 크레이그 에반스와 반 부어스트는 타키투스가 자신의 저술 당시 더 흔하게 사용되었던 "집정관"이라는 직함을 사용했으며, 이러한 직함 사용의 차이는 타키투스가 제공하는 정보의 정확성을 의심하는 근거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22] 워렌 카터는 "총독"이라는 용어가 군사적 함의를 가지는 반면, "집정관"은 민간적 함의를 가지기 때문에, 군사, 행정 및 재정적 책임을 모두 가진 통치자에게는 두 용어 모두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루이 펠드먼은 필로 (AD 50년 사망)와 요세푸스 역시 빌라도를 지칭할 때 "집정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필로와 요세푸스 모두 그리스어로 글을 썼기 때문에, 실제로 "집정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집정관"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단어 ἐπίτροποςgrc ()를 사용했다. 필로는 또한 이 그리스어 용어를 이집트의 총독 (총독), 아시아의 총독 (집정관), 시리아의 총독 (레가투스)에게 사용했다.[25] 베르너 에크는 요세푸스의 저서에 나오는 유대 총독에 대한 용어 목록에서, 초기 저작인 《유대 전쟁》에서 요세푸스가 ''epitropos''를 덜 일관되게 사용했지만, 《유대 고대사》에서 이 용어로 언급된 첫 번째 총독은 쿠스피우스 파두스 (AD 44–46년 재임)였다고 보여준다.[26] 펠드먼은 필로, 요세푸스, 타키투스가 직함의 시기를 연대기적으로 혼동했을 수 있으며, 총독에서 집정관으로 변경되었다고 지적한다. 펠드먼은 또한 직함의 사용이 엄격하지 않았을 수 있으며, 요세푸스는 쿠스피우스 파두스를 "총독"과 "집정관"으로 모두 언급한다고 언급한다.

5. 타키투스 구절의 진위 논쟁



학계에서는 『연대기』 15.44 구절의 진위 여부를 두고 논쟁이 있었다. 이 구절은 64년 로마 대화재에 대한 묘사 뒤에 나오는데, 황제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박해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6] 이는 로마 당국과 기독교인 간의 최초의 기록된 대립이었다.[7]

타키투스의 원본 필사본은 남아있지 않으며, 현존하는 사본은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에 보관된 두 개의 "메디치 필사본"에서 유래한다.[9] 이 중 두 번째 필사본(Plut. 68.2)은 11세기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기독교인에 대한 언급이 있는 유일한 필사본이다.[10]

해당 구절이 완전한 위조일 가능성은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거부되며, 필사자가 이 구절을 삽입했을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29]

5. 1. 진본성 주장

엠폴리(이탈리아)에 보관된 타키투스 저작 1598년 판 표지


대부분의 학자들은 해당 구절이 진본이며 타키투스가 저자라고 여긴다.[27] 고전학자들은 라틴어 학자들이 이 구절에 대한 최근 평가에서 만장일치로 진본으로 간주하고, 타키투스 연구의 권위자 중 누구도 이 구절이 삽입된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언급했다.[28]

이 구절이 완전한 위조일 수 있다는 주장은 학자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거부되었다. 존 P. 메이어는 필사자가 이 구절을 텍스트에 삽입했을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29] 브루스 칠턴, 크레이그 에반스, 폴 에디, 그리고 그레고리 보이드는 존 메이어의 "이 텍스트가 타키투스에 대한 기독교적 삽입이라는 몇몇 미미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명백히 진본이다"라는 진술에 동의한다.[30]

타키투스는 애국적인 로마 원로원이었다.[31][32] 그의 저술에는 기독교인에 대한 동정심이나 그들의 지도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지식이 나타나지 않는다.[33] 그가 "기독교적 혐오"라고 묘사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성찬례 의식 동안 그들의 신의 몸을 먹고 피를 마셨다는 로마의 소문을 바탕으로 했을 수 있으며, 의식을 식인 풍습으로 해석한 것이다.[33][34]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는 이 구절이 기독교인 필사자가 작성하기에는 기독교인에 대한 어조가 너무 부정적이라고 말한다.[35] 반 보어스트 역시 기독교에 대한 경멸적인 언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구절이 기독교 위조일 가능성은 낮다고 말한다.

타키투스는 로마 대화재 당시 약 7세였으며, 성장하면서 다른 로마인들처럼 도시 대부분을 파괴한 화재와 네로의 기독교인에 대한 비난에 대해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타키투스가 자신의 기록을 쓸 당시 그는 아시아 속주의 총독이었으며, 로마의 핵심 인물로서 화재와 기독교인에 대한 공식 입장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윌리엄 L. 포티어는 타키투스, 요세푸스, 그리고 플리니우스가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와 기독교인에 대한 언급이 일치하며, 이는 세 기록의 타당성을 재확인한다고 말했다.

5. 2. 위조 가능성 제기

대부분의 학자들은 해당 구절이 진본이며 타키투스가 저자라고 여긴다.[27] 고전학자들은 라틴어 학자들이 이 구절에 대한 최근 평가에서 만장일치로 진본으로 간주하며, 타키투스 연구의 권위자 중 누구도 이 구절이 삽입된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언급했다.[28]

이 구절이 완전한 위조일 수 있다는 주장은 학자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거부되었다. 존 P. 메이어는 필사자가 이 구절을 텍스트에 삽입했을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29] 브루스 칠턴, 크레이그 에반스, 폴 에디, 그리고 그레고리 보이드는 "이 텍스트가 타키투스에 대한 기독교적 삽입이라는 몇몇 미미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명백히 진본이다"라는 존 메이어의 진술에 동의한다.[30]

타키투스는 애국적인 로마 원로원 의원이었다.[31][32] 그의 저술에는 기독교인에 대한 동정심이나 그들의 지도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지식이 나타나지 않는다.[33] 그가 "기독교적 혐오"라고 묘사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성찬례 의식 동안 그들의 신의 몸을 먹고 피를 마셨다는 로마의 소문을 바탕으로 했을 수 있으며, 의식을 식인 풍습으로 해석한 것이다.[33][34]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는 이 구절이 기독교인 필사자가 작성하기에는 기독교인에 대한 어조가 너무 부정적이라고 말한다.[35] 반 보어스트 역시 기독교에 대한 경멸적인 언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구절이 기독교 위조일 가능성은 낮다고 말한다.

타키투스는 로마 대화재 당시 약 7세였으며, 성장하면서 다른 로마인들처럼 도시 대부분을 파괴한 화재와 네로의 기독교인에 대한 비난에 대해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타키투스가 자신의 기록을 쓸 당시 그는 아시아 속주의 총독이었으며, 로마의 핵심 인물로서 화재와 기독교인에 대한 공식 입장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윌리엄 L. 포티어는 타키투스, 요세푸스, 그리고 플리니우스 (젊은 대 플리니우스)가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와 기독교인에 대한 언급이 일치하며, 이는 세 기록의 타당성을 재확인한다고 말했다.

6. 타키투스가 사용한 자료

대다수의 학자들은 타키투스가 쓴 구절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정보의 출처를 밝히지 않아 일부 학자들은 이 구절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왔다.[36] 타키투스가 기독교인에 대한 정보를 어디에서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로마 기록 보관소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빌라도를 '총독'이 아닌 '집정관'으로 잘못 표기했다는 반론도 있다. 기독교인들의 소문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므로 사료로서 가치가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타키투스는 출처를 확인하는 신중한 역사가였기에 소문을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반박도 존재한다.[36]

6. 1. 로마 기록 보관소

게르트 타이센과 안네트 메르츠는 타키투스가 당시에는 사라진 이전의 역사 저술을 때때로 참고했으며, 이 경우 로마 기록 보관소의 공식 자료를 사용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타키투스가 공식 자료를 베꼈다면, 일부 학자들은 그가 빌라도를 '총독'이 아닌 '집정관'으로 정확하게 표기했을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37] 타이센과 메르츠는 타키투스가 기독교에 대한 광범위한 편견과 "크리스투스"와 기독교에 대한 몇 가지 정확한 세부 사항을 제공하며, 그 출처는 불분명하다고 언급한다.[37] 그러나 폴 에디는 상원 의원으로서 타키투스가 당시의 로마 공식 문서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다른 출처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37]

학자들은 또한 타키투스의 언급에 나오는 소문에 대한 문제도 논쟁해 왔다. 샤를 기뉴베르는 "타키투스가 단순히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한, 이 구절은 전혀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38] R. T. 프랑스는 타키투스의 구절이 기껏해야 타키투스가 기독교인들을 통해 들었던 말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39] 그러나 폴 에디는 로마의 저명한 역사가인 타키투스가 일반적으로 자신의 출처를 확인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소문을 전하는 습관은 없었다고 말했다.[39]

타키투스는 로마의 외국 종교 숭배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은 사제단인 ''십오인 위원회''의 일원이었으며, 반 포르스트가 지적했듯이, 그가 이 단체에서 일하면서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지식을 얻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40]

6. 2. 기독교 관련 소문

게르트 타이센과 안네트 메르츠는 타키투스가 당시에는 사라진 이전의 역사 저술을 때때로 참고했으며, 이 경우 로마 기록 보관소의 공식 자료를 사용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타키투스가 공식 자료를 베꼈다면, 일부 학자들은 그가 빌라도를 '총독'이 아닌 '집정관'으로 정확하게 표기했을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37] 타이센과 메르츠는 타키투스가 기독교에 대한 광범위한 편견과 "크리스투스"와 기독교에 대한 몇 가지 정확한 세부 사항을 제공하며, 그 출처는 불분명하다고 언급한다.[37] 그러나 폴 에디는 상원 의원으로서 타키투스가 당시의 로마 공식 문서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다른 출처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36]

학자들은 또한 타키투스의 언급에 나오는 소문에 대한 문제도 논쟁해 왔다. 샤를 기뉴베르는 "타키투스가 단순히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한, 이 구절은 전혀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38] R. T. 프랑스는 타키투스의 구절이 기껏해야 타키투스가 기독교인들을 통해 들었던 말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39] 그러나 폴 에디는 로마의 저명한 역사가인 타키투스가 일반적으로 자신의 출처를 확인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소문을 전하는 습관은 없었다고 말했다.[36]

타키투스는 로마의 외국 종교 숭배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은 사제단인 십오인 위원회의 일원이었으며, 반 포르스트가 지적했듯이, 그가 이 단체에서 일하면서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지식을 얻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40]

6. 3. 십오인 위원회

타키투스는 로마의 외국 종교 숭배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은 사제단인 십오인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반 포르스트는 타키투스가 이 단체에서 일하면서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지식을 얻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40]

7. 역사적 가치 평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연대기』의 해당 구절이 진본이며 타키투스가 직접 작성했다고 본다.[27] 고전학자들은 최근 평가에서 이 구절을 만장일치로 진본으로 간주하며, 타키투스 연구 권위자 중 누구도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28] 존 P. 메이어는 필사자가 이 구절을 삽입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29] 브루스 칠턴, 크레이그 에반스 등도 이 구절이 진본이라는 데 동의한다.[30]

타키투스는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그의 저술에는 기독교인에 대한 동정심이 나타나지 않는다.[31][32] 그는 기독교인들이 성찬례 의식에서 신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로마의 소문을 바탕으로 그들을 비판했을 수 있다.[33][34]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는 이 구절의 어조가 기독교인이 작성하기에는 너무 부정적이라고 지적하며,[35] 반 보어스트 역시 기독교에 대한 경멸적인 표현 때문에 위조 가능성이 낮다고 말한다.[39]

타키투스는 로마 대화재 당시 어린아이였지만, 성장하면서 화재와 네로의 기독교인 박해에 대해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30] 그는 로마의 핵심 인물로서 화재와 기독교인에 대한 공식 입장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30] 윌리엄 L. 포티어는 타키투스, 요세푸스, 플리니우스 (젊은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이 일치하여 그 타당성을 재확인한다고 말한다.[4]

7. 1. 예수의 존재와 십자가형

반 부어스트(Van Voorst)는 "모든 로마 작가들 중에서 타키투스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말한다.[41] 크로산(Crossan)은 이 구절이 예수의 존재와 십자가형에 처해졌음을 확립하는 데 중요하다고 여기며,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있는 한 확실하다. 요세푸스와 타키투스가... 적어도 그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 기독교 기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41] 에디(Eddy)와 보이드(Boyd)는 타키투스가 예수의 십자가형에 대한 비기독교적 확인을 제공한다는 것이 이제 "확고하게 정립되었다"고 말한다.[42] 바트 D. 어만은 "타키투스의 보고서는 우리가 다른 출처에서 알고 있는 바를 확인해준다. 즉 예수는 티베리우스 통치 기간 동안 유대 총독 본시오 빌라도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라고 썼다.[42]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타키투스가 예수의 죽음 이후 25년 후에 태어났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 구절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한다.[39]

7. 2. 초기 기독교 공동체

제임스 D. G. 던은 타키투스의 기록이 초기 기독교인에 대한 사실을 확립하는 데 유용하다고 본다. 그는 이 기록을 통해 서기 60년경 로마에 상당수의 기독교인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유대교와는 구별되는 집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43] 레이먼드 E. 브라운과 존 P. 메이어는 타키투스의 구절이 로마 내 기독교인의 존재뿐 아니라, 서기 60년경 이미 기독교인과 유대인이 명확히 구분되었고, 심지어 이교도들조차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정보를 제공한다고 말한다.[43]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타키투스의 언급을 다른 역사적 기록과 일치하는 독립적인 로마 출처로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한다.[3][4]

7. 3. 네로 황제의 박해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타키투스의 언급을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거로 받아들인다.[44] 그러나 이 구절의 역사적 가치와 박해의 실제 규모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위버(Weaver)는 타키투스가 기독교인 박해를 언급했지만, 다른 기독교 작가들은 100년 동안 이 박해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의문을 제기한다.[45] 브렌트 쇼는 타키투스가 기독교와 유대교 전설에 의존하여 네로가 기독교인을 박해했다고 묘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실제로는 네로 치하에서 박해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구절이 텍스트가 쓰여진 당시의 기독교 세계를 반영하기 위해 "사실의 일부 현대화 또는 업데이트"를 나타내는지 의문을 제기했다.[46]

그러나 쇼의 견해는 학계의 일반적인 합의와는 거리가 멀며, 강한 비판을 받았다.[44] 하버드 대학교의 크리스토퍼 P. 존스는 타키투스의 반기독교적 입장이 그가 기독교 출처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낮춘다고 반박한다. 또한 사도 바울의 로마서가 50년대에 로마에 분명하고 뚜렷한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음을 명확히 보여주며, 수에토니우스의 ''카이사르 열전''에서도 박해가 언급됨을 지적한다.[47] 래리 허타도 역시 쇼의 주장을 "모호하고 흐릿하다"고 비판했다.[48]

브리짓 반 데르 란스와 얀 N. 브레머는 네로의 박해는 히브리서, 요한 계시록, 외경인 이사야의 승천, 베드로전서, 요한복음 및 클레멘트 1서와 같은 많은 1세기 기독교 저술에 기록되어 있다고 지적하며 쇼의 주장을 반박한다. 또한 ''크레스티아누스(Chrestianus), 크리스티아누스(Christianus)'' 및 ''Χριστιανός(크리스티아노스|크리스티아노스grc)''는 50년대에 로마인들이 발명한 용어이며, 기독교인 스스로가 채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49] 존 그레인저 쿡은 ''크레스티아누스(Chrestianus), 크리스티아누스(Christianus)'' 및 ''Χριστιανός(크리스티아노스|크리스티아노스grc)''가 2세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로마 관리들은 60년대에 ''크레스티아니(Chrestiani)''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쇼의 주장을 비난했다.[50] 배리 S. 스트라우스 역시 쇼의 주장을 거부한다.[51]

8. 다른 초기 자료와의 비교

타키투스는 예수와 초기 기독교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비기독교 작가는 아니었다. 타키투스 외에도 요세푸스, 플리니우스, 수에토니우스와 같은 동시대 작가들의 기록이 존재한다.

타키투스가 『연대기』에서 네로 황제의 기독교인 박해에 대해 언급한 것은 플리니우스가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편지를 쓴 서기 111년경보다 몇 년 뒤인 서기 115년경으로,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에 쓰여졌다.

8. 1. 요세푸스의 기록

기독교에 대한 가장 초기의 알려진 언급은 유대인 역사가 티투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인 서기 93~94년경에 저술한 20권의 저서인 ''유대 고대사''에서 발견된다. 현재 이 책에는 예수와 기독교인에 대한 두 가지 언급(제18권 3장 및 제20권 9장)과 세례 요한에 대한 언급(제18권 5장)이 포함되어 있다.

8. 2. 플리니우스의 편지

비티니아와 폰투스의 로마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인 서기 111년경에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편지를 썼다.[1] 이 편지는 당시 그가 진행하던 재판에서 혐의를 받는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지침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1]

8. 3. 수에토니우스의 기록

수에토니우스하드리아누스 황제 시기인 서기 122년경에 ''12명의 카이사르의 생애''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수에토니우스는 유대계 기독교도들이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에서 추방된 이유와 클라우디우스의 후계자인 네로의 기독교인 박해를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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