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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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시대에는 기독교가 다신교적 로마 종교와 충돌하여 여러 차례 박해를 받았다. 초기 기독교 박해는 네로 황제 시대에 시작되어,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에 걸쳐 산발적이고 지역적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박해는 기독교인들의 황제 숭배 거부, 로마의 종교적 관습 거부, 사회 문화적 요인, 그리고 로마법의 모호성 등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했다. 기독교 박해의 규모와 정도, 순교자 수, 그리고 자발적 순교의 개념 등에 대한 역사적 논쟁이 존재하며, 초기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의 성장과 로마 제국의 종교 정책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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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 |
---|---|
박해 대상 | |
대상 | 기독교인 |
장소 | |
위치 | 로마 제국 |
기간 | |
기간 | 서기 64년 ~ 313년 |
원인 | |
원인 | 기독교 신앙 로마 국교 거부 기독교인에 대한 대중의 불신 |
성격 | |
성격 | 간헐적 지역적 제국 전체에 걸친 박해 |
주요 박해자 | |
박해자 | 네로 황제 (54–6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161–180) 데키우스 황제 (249–251) 갈루스 황제 (251–253) 발레리아누스 황제 (253–260)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270–275) 클라우디우스 황제 (268–270)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284–305) 갈레리우스 황제 (305–311) 막시미누스 다이아 황제 (310–313) 리키니우스 황제 (308–324) |
결과 | |
결과 | 기독교인의 순교와 투옥 기독교 재산 파괴 기독교 숭배 금지 기독교의 확산과 공고화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한 기독교 공인 (313년 밀라노 칙령)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한 기독교 국교화 |
2. 로마 제국의 종교
로마 제국 초(기원전 27년-476년)의 로마 종교는 다신교적이며 지역적이었다. 각 도시는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하여 로마화된 자체적인 신과 여신들을 숭배했다.[2] 이 폴리스 종교는 "고대 도시의 일반적인 구조 안에 내재되어 있었고 분리될 수 없었으며, 정치적 또는 시민적 정체성과 분리된 종교적 정체성은 없었으며, 종교의 본질은 신념보다는 의식에 있었다"는 특징을 보였다.[3] 종교는 로마인이 되는 데 핵심적인 요소였으며, 그 관행은 널리 퍼져 있었고 정치와 얽혀 있었다.[4][5] 사적인 종교와 그 공공적 관행은 주로 원로원을 포함한 공직자들의 통제를 받았다.[4]
기원전 1세기 경, 전통적인 로마 다신교에 대한 지지는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당시의 여러 작가들과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것은 공허하고 무력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6] 전쟁과 침략과 같은 외부 요인과 전통 종교의 형식적인 성격과 정치적 조작과 같은 내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다신교의 점진적인 쇠퇴를 야기했다고 한다.[3] 이는 사람들의 사생활에 공백을 남겼고, 그들은 이를 황제 숭배, 다양한 신비주의 종교, 수입된 동방 종교, 그리고 기독교와 같은 다른 형태의 숭배로 채웠다.[7][3]
로마의 제국 건설 방식은 외국인이 그 일부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문화적 투과성을 포함했지만, 로마 종교가 외국의 신과 관습을 그들의 판테온에 받아들이는 방식은 모든 신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많은 신들이 로마로 옮겨져 로마 국가 종교의 일부가 되었지만, 훨씬 더 많은 신들은 그렇지 않았다".[8] 램지 맥멀렌은 로마 제국이 확장 과정에서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완전히 관대했다"고 말했지만, 즉시 "그 [관용]은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했다"고 덧붙였다.[9]
맥멀렌은 로마 종교로부터 '관용' 또는 '불관용'을 받을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 종교가 "조상 관습에 따라" 자신의 신을 존중하는지 여부였다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에 뿌리를 둔 조상들의 종교를 버렸기 때문에 좋지 않게 여겨졌다.[9] 그러나 종교가 어떻게 행해졌는지도 요인이 되었다. 로마 관리들은 기원전 186년에 이미 디오니소스 숭배자들과 그들의 박카날리아 관행에 대해 "밤에 일어났다"는 이유로 의심을 품게 되었다.[4] 사적인 점, 점성술, 그리고 '칼데아 관습'은 밤 숭배와 관련된 마법이었으며, 이 때문에 초기 제국 시대부터 추방과 처형의 위협을 안고 있었다.[10][11] 고고학자 루크 라반은 밤 숭배가 사적이고 은밀하며 황제에 대한 반역과 은밀한 음모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12] 박카스 협회는 해체되었고,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여성은 종교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는 것이 금지되었고, 로마 시민은 사제가 될 수 없었으며, 이후 종교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확립되었다.[4]
로마 국가는 종교적 위협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한 대응 방식은 이러했다.[4] 서기 1세기에 "점성가, 철학자, 심지어 수사학 교사, 유대인, 그리고... 이시스 숭배에 대한 정기적인 추방"이 있었다.[4] 드루이드교도 역시 같은 대우를 받았고, 기독교인도 마찬가지였다.[13][4]
2. 1. 로마 다신교의 쇠퇴
2. 2. 다양한 종교의 등장
2. 3. 로마의 종교적 관용과 불관용
로마 제국 초기의 종교는 다신교적이며 지역적인 특성을 띠었다. 각 도시는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고유의 신들을 숭배했다.[2] 종교는 로마인의 정체성에 핵심적인 요소였으며, 정치와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4][5] 그러나 기원전 1세기경부터 전통적인 로마 다신교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황제 숭배, 신비주의 종교, 동방 종교, 기독교 등으로 눈을 돌렸다.[7][3]로마는 문화적 투과성을 통해 외국인이 제국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하였지만, 모든 외래 종교가 로마 판테온에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8] 램지 맥멀렌은 로마의 종교적 관용과 불관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해당 종교가 '조상 관습'을 따르는지 여부였다고 설명한다.[9] 예를 들어, 로마 관리들은 디오니소스 숭배와 그들의 박카날리아 관행이 밤에 이루어진다는 이유로 의심했다.[4] 밤 숭배는 사적이고 은밀하며 황제에 대한 반역, 은밀한 음모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12] 결국 박카스 협회는 해체되고 지도자들은 처형되었으며, 종교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확립되었다.[4]
이러한 방식은 종교적 위협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한 로마 국가의 전형적인 대응이었다.[4] 서기 1세기에는 점성가, 철학자, 유대인, 이시스 숭배자, 드루이드교에 대한 추방이 있었고, 기독교인도 마찬가지였다.[4][13]
3.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초기 기독교 박해는 시작부터 산발적으로, 그리고 지역적으로 일어났다. 로마 정부가 조직한 최초의 기독교 박해는 로마 대화재 이후 서기 64년 황제 네로 치하에서 있었으며, 로마 시내에서만 발생했다. 서기 311년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가 발표한 세르디카 칙령은 동방에서 기독교에 대한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를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서기 313년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면서 로마 국가의 기독교 박해는 중단되었다.[55] 이러한 박해로 인해 목숨을 잃은 기독교인의 총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초기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이러한 사건의 유일한 자료인데, 그는 "수많은 사람들" 또는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한다. 발터 바우어는 유세비우스를 비판했지만, 로버트 그랜트는 독자들이 이러한 과장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이는 요세푸스와 당시 다른 역사가들에게 흔한 일이었다고 말한다.[56][55]
2세기 중반 무렵에는 폭도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경쟁 종파에 의해 동기 부여를 받았을 것이다. 리옹 박해 (서기 177년)에 앞서 폭력 사태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폭행, 강도, 투석 등이 포함되었다.[57] 루키아노스는 폰토스와 파플라고니아에서 길들인 뱀을 사용하여 아스클레피오스의 "예언자"가 꾸민 정교하고 성공적인 사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사기가 드러날 조짐이 보이자, 재치 있는 에세이 작가는 그의 신랄한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197년 작품인 ''변론서''는 표면적으로 박해받는 기독교인을 옹호하고 로마 총독에게 보낸 것이었다.[58]
서기 250년, 데키우스 황제는 공개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칙령을 발표했는데, 이는 황제와 기존 질서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는 것과 같았다. 이 칙령이 기독교인을 겨냥한 것이라는 증거는 없지만, 충성 서약의 한 형태였다. 데키우스는 도시와 마을을 방문하여 희생을 감독하고 이를 수행한 모든 시민에게 서면 증명서를 전달하는 순회 위원회를 승인했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공개적으로 로마 신에게 희생을 바치거나 향을 태움으로써 더 이상의 처벌을 피할 기회를 받았으며, 거부했을 때 로마인들은 그들을 불경하다고 비난했다. 거부하면 체포, 투옥, 고문, 처형으로 처벌받았다. 기독교인들은 시골의 안전한 은신처로 도망갔고, 일부는 ''리벨리''라고 불리는 증명서를 구입했다. 카르타고에서 열린 여러 공의회에서 공동체가 이러한 배교 기독교인을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논의했다.
이러한 박해는 3세기 말과 4세기 초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에 의해 절정에 달했다. 그들의 반기독교적 행위는 가장 규모가 컸으며, 마지막 주요 로마 이교도적 행동으로 여겨졌다. 세르디카 칙령은 갈레리우스의 관용 칙령이라고도 불리며, 311년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에 의해 세르디카 (오늘날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발표되어 동방의 기독교에 대한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를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곧 권력을 잡았고 313년에 기독교를 완전히 합법화했다. 하지만 4세기 후반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이르러서야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
3. 1. 초기 기독교 박해 (서기 49년 ~ 250년)
초기 기독교 박해는 시작부터 산발적으로, 그리고 지역적으로 일어났다. 로마 정부가 조직한 최초의 기독교 박해는 로마 대화재 이후 서기 64년 황제 네로 치하에서 있었으며, 로마 시내에서만 발생했다. 서기 311년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가 발표한 세르디카 칙령은 동방에서 기독교에 대한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를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서기 313년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면서 로마 국가의 기독교 박해는 중단되었다.[55] 이러한 박해로 인해 목숨을 잃은 기독교인의 총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초기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이러한 사건의 유일한 자료인데, 그는 "수많은 사람들" 또는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한다. 발터 바우어는 유세비우스를 비판했지만, 로버트 그랜트는 독자들이 이러한 과장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이는 요세푸스와 당시 다른 역사가들에게 흔한 일이었다고 말한다.[56][55]2세기 중반 무렵에는 폭도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경쟁 종파에 의해 동기 부여를 받았을 것이다. 리옹 박해 (서기 177년)에 앞서 폭력 사태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폭행, 강도, 투석 등이 포함되었다.[57] 루키아노스는 폰토스와 파플라고니아에서 길들인 뱀을 사용하여 아스클레피오스의 "예언자"가 꾸민 정교하고 성공적인 사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사기가 드러날 조짐이 보이자, 재치 있는 에세이 작가는 그의 신랄한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 그는 그들을 겁주기 위해 칙령을 발표했는데, 폰토스에는 그를 가장 비열하게 모욕하는 무신론자와 기독교인들로 가득 차 있으며, 신의 은총을 얻고 싶다면 돌로 그들을 몰아내라고 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197년 작품인 ''변론서''는 표면적으로 박해받는 기독교인을 옹호하고 로마 총독에게 보낸 것이었다.[58]
에 있는 로마 총독의 궁전 재건
서기 250년, 데키우스 황제는 공개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칙령을 발표했는데, 이는 황제와 기존 질서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는 것과 같았다. 이 칙령이 기독교인을 겨냥한 것이라는 증거는 없지만, 충성 서약의 한 형태였다. 데키우스는 도시와 마을을 방문하여 희생을 감독하고 이를 수행한 모든 시민에게 서면 증명서를 전달하는 순회 위원회를 승인했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공개적으로 로마 신에게 희생을 바치거나 향을 태움으로써 더 이상의 처벌을 피할 기회를 받았으며, 거부했을 때 로마인들은 그들을 불경하다고 비난했다. 거부하면 체포, 투옥, 고문, 처형으로 처벌받았다. 기독교인들은 시골의 안전한 은신처로 도망갔고, 일부는 ''리벨리''라고 불리는 증명서를 구입했다. 카르타고에서 열린 여러 공의회에서 공동체가 이러한 배교 기독교인을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논의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8:2-3)에 따르면, 유대인 아굴라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소개되는데, 이들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유대인들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최근 이탈리아에서 왔다고 한다. 에드 리처드슨은 로마의 회당에서 불화로 인해 거리에서 폭력이 발생하여 클라우디우스가 관련된 사람들을 추방했지만, 이것은 또한 클라우디우스가 로마 의식을 회복하고 외래 종교를 억압하려는 캠페인을 벌였던 서기 47년에서 52년 사이의 기간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59] 수에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가 서기 49년에 "유대인들"을 추방했다고 기록했지만, 리처드슨은 "주로 기독교 선교사들과 개종자들이 추방되었다"고 말하며, 즉 ''크레스투스''라는 이름으로 불린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지칭한다.[59] "왜곡된 ''크레스투스''는 로마 유대인 공동체 내에 기독교인들이 존재했다는 증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59]
리처드슨은 "기독교인"이라는 용어가 "70년 이후에야 문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지적하며, 그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유대인에 전적으로 속한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말한다.[59] 수에토니우스와 타키투스는 이러한 사건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미신"과 "불경스러운[독실하지 않은] 의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유대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적용되었다. 로마 제국은 "유대교 의식의 방해받지 않는 준수"를 보장하는 여러 정책을 통해 유대인을 보호했다.[59] 리처드슨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클라우디우스가 추방하려 했던 '유대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59]
일반적으로 네로 황제 시대부터 데키우스가 250년에 광범위한 조치를 취할 때까지 기독교 박해는 고립되고 국지적이었다는 데 동의한다.[28] 기독교인들이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고 자주 주장하지만, 기독교인에 대한 일반적인 반감은 그들이 로마의 신들을 숭배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생겨났을 가능성이 높으며, 많은 황제들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주장하거나 희생에 참여했는데, 이는 로마 제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것이었다.[28] 유대인들도 이러한 행동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자신들만의 유대교 의례법을 따랐고 그들의 종교는 조상적 특성으로 인해 정당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용납되었다.[60] 반면에 로마인들은 기이한 의식과 야간 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겨진 기독교인들이 위험하고 미신적인 종파를 숭배한다고 믿었다.[60]
이 기간 동안 반기독교 활동은 비난적이었으며, 탐문적이지 않았다.[28] 총독들이 황제들보다 더 큰 역할을 했지만, 기독교인들은 총독들에게 쫓겨 다니지 않았고, 대신 ''코그니티오 엑스트라 오르디넴''이라는 과정을 통해 기소되고 처벌받았다. 증거에 따르면 재판과 처벌은 매우 다양했으며, 형량은 무죄에서 사형까지 다양했다.[61]
3. 1. 1. 네로의 박해



타키투스와 후기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네로는 64년 로마 대화재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다.[28] 이로 인해 도시의 일부가 파괴되고 로마 시민들이 경제적으로 황폐화되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타키투스의 이 구절은 네로가 로마 대화재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돌렸다는 유일한 독립적인 증언이며, 일반적으로 진실된 것으로 여겨진다.[64][65][66] 타키투스와 거의 동시대인인 수에토니우스는 네로 전기 16장에서 "새롭고 유해한 미신에 빠진 부류인 기독교인들에게 처벌이 가해졌다"고 썼지만, 처벌의 원인을 명시하지 않았다.[1] 요한계시록의 짐승의 수가 666으로 나타나는 것은 네로 카이사르의 이름을 게마트리아로 계산한 것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네로가 최근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사악한 인물로 여겨졌음을 나타낸다는 데 널리 동의한다.[67]
몇몇 기독교 자료는 사도 바울과 성 베드로가 모두 네로의 박해 기간에 사망했다고 보고한다.[74][75][76][77] 오리게네스와 고린토의 디오니시우스, 유세비우스에 의해 인용된 이들은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혔고 바울은 참수당했으며 두 사람이 같은 시기에 죽었다고 더 자세히 설명한다.[78][79]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클레멘스의 편지는 (서기 95년) 베드로, 바울 및 기타 기독교인들이 순교했다고 명시하고 있다.[81]
3. 1. 2.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일부 역사가들에 따르면,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도미티아누스 통치 말기(89–96)에 심하게 박해를 받았다.[83] 요한 계시록은 순교의 사례(계 2:13, 6:9 비교)를 언급하며, 많은 학자들은 도미티아누스 통치 기간에 쓰여진 것으로 보고, 계 17:10-11에서 그를 여덟 번째 왕으로 본다.[84] R. H. Charles에 따르면, 요한 계시록은 네로의 ''재림'' 신화(네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를 반영한다.[85] 초기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는 요한 계시록이 묘사하는 사회적 갈등이 도미티아누스가 조직한 과도하고 잔인한 기독교인 추방 및 처형을 반영한다고 기록했지만, 이러한 주장은 과장되거나 거짓일 수 있다.[86] 락탄티우스의 ''박해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관하여'' 3장에는 도미티아누스의 폭정에 대한 특징 없는 언급이 있다.[87]Barnes에 따르면, "멜리토, 테르툴리아누스, 브루티우스는 도미티아누스가 기독교인을 박해했다고 진술했다. 멜리토와 브루티우스는 세부 사항을 보증하지 않고, 테르툴리아누스는 도미티아누스가 곧 마음을 바꿔 추방했던 사람들을 소환했을 뿐이다".[88] 소수의 역사가들은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반기독교 활동이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89][90][91] 도미티아누스 통치 기간의 박해 정도에 대한 역사가들의 합의가 부족한 이유는 박해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만, 이 기록들이 간략하거나 신뢰성에 대한 논쟁이 있기 때문이다.[1]
흔히 로마 집정관이자 황제의 사촌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의 처형과 그의 아내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판다테리아 섬으로의 추방이 언급된다. 유세비우스는 플라비아 도미틸라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추방되었다고 기록했다.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67.14.1-2)에서는 그녀가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무신론과 유대교에 대한 동정을 범했다고만 보고한다.[1] 수에토니우스는 추방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1] Keresztes에 따르면, 그들은 유대교를 실천하는 모든 사람에게 부과된 세금인 유대인 세금 납부를 피하려던 개종자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84] 앨런 브렌트는 플리니우스 더 영거가 도미티아누스 통치 기간에 기독교인들이 배교하도록 압력을 받았다고 보고했다고 언급한다. 어쨌든, 도미티아누스 통치 기간의 반기독교 활동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법적 조항을 언급하지 않는다.[1]
3. 1. 3. 트라야누스의 정책
트라야누스 황제는 대 플리니우스와 폰토스의 기독교도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 서신을 주고받았다. 신학자 에드워드 버튼은 이 서신에서 당시 기독교인을 정죄하는 법이 없었다고 썼다. "외국의 미신을 억압하는 데 대한 풍부한 선례(관습법)"는 있었지만, "재판의 형식이나 처벌을 규정하는 일반적인 법"은 없었으며, "기독교를 범죄로 규정하는 특별한 법령"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리니우스는 기독교인에 대한 재판이 드물지 않았음을 암시하며, 자신의 관할 구역 내 기독교인들이 강도나 간음과 같은 불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고, 어떤 법적 권한도 없이 사람들을 죽였고", 황제가 자신의 행동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다.트라야누스는 그렇게 했고, 제한적인 승인을 보냈다. 그는 플리니우스에게 기독교인을 계속 기소하라고 말했지만, 정의를 위해, 그리고 "시대 정신"에 따라 익명의 고발은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기독교인임을 자백하고 개종을 거부한 비시민권자는 "완고함" 때문에 처형해야 했다. 시민권자는 재판을 위해 로마로 보내졌다.[92]
바네스는 이것이 기독교를 "다른 모든 범죄와 완전히 다른 범주에 놓았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불법인 것이다"라고 말한다.[93] 이것은 버튼이 기독교에 대한 '첫 번째 칙령'이라고 부른 공식 칙령이 되었고, 셔윈-화이트는 이것이 "일반법과 같은 최종적인 효과를 가졌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트라야누스를 미덕 있는 이교도로 여겼다.[94]
3. 1. 4. 하드리아누스의 관용
황제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는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지방 총독의 자문 요청에 응하여 기독교인들에게 더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하드리아누스는 단순히 기독교인이라는 사실만으로는 그들을 처벌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그들이 어떤 불법적인 행위를 저질러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기독교인에 대한 "비방적인 공격"은 용납되지 않았다. 이는 기독교인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으나 실패한 사람은 처벌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3. 1. 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부터 막시미누스 트락스까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부터 막시미누스 트락스 시대까지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이 시기에는 총독들이 황제보다 박해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1] 3세기 전반기에도 황제의 정책과 기독교인에 대한 현장의 관계는 이전과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즉, 황제가 주도하기보다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문제를 야기했고, 공식적인 태도는 특정 사건에 대응하여 활성화될 때까지 소극적이었으며, 이러한 활성화는 지방 및 지역 수준에 국한되었다.[95] 배교를 상징하는 제물은 기독교인을 자유롭게 하는 데 계속해서 충분한 역할을 했다.[1] 초기 재판 후 기독교인을 투옥하고 압력을 가하며 철회할 기회를 주는 것이 표준 관행이었다.[95]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박해의 수와 심각성이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마두라의 순교자들과 스킬리탄 순교자가 그의 재임 기간에 처형되었다.[96]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러한 박해를 직접 지시, 장려, 인식했는지 여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다.[97]


아우렐리우스 통치 기간 동안 가장 주목할 만한 박해는 177년 루그두눔(현재 프랑스 리옹)에서 발생한 리옹 박해이다. 이 박해는 시장과 목욕탕 같은 공공장소에서 기독교인을 배척하려는 비공식적인 움직임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공식적인 조치로 이어졌다. 기독교인들은 체포되어 포럼에서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98] 그들은 짐승에게 먹이로 던져지고, 고문을 당하고, 열악한 투옥 생활을 하는 등 다양한 형벌을 받았다. 기독교인에게 속한 노예들은 그들의 주인이 근친상간과 식인 행위에 참여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 박해는 배교 후에도 기소된 기독교인에 대한 한 가지 예로 언급된다.[1]
에우세비우스는 177년에 이레네우스가 순교를 기다리는 리옹 교회의 특정 회원들로부터 교황 엘레우테리우스에게 보낸 편지를 가지고 파견되었다고 언급한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그의 저서 ''"순교자의 영광의 책"''에서 이 사건을 다루는데, 이 책은 거의 전적으로 로마의 박해로 인해 갈리아에서 이루어진 기적들을 다루고 있다.[99]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 통치 기간에도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인에 대한 많은 박해가 발생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이 시기에 대해 "우리는 매일 화형, 말뚝형, 참수형을 당하는 순교자들을 우리 눈앞에 제시했다."라고 기록했다.[100] 전통적인 견해는 세베루스가 유대교와 기독교로의 개종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했다는 것이지만, 이 법령은 신뢰성이 부족한 ''아우구스타 열전''이라는 한 사료에서만 알려져 있다.[101][102] 초기 교회 역사가 에우세비우스는 세베루스를 박해자로 묘사하지만, 기독교 변증학의 테르툴리아누스는 세베루스가 기독교인에게 호의적이었고, 기독교인을 개인 주치의로 고용했으며, 여러 귀족 기독교인들을 "폭도"로부터 구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개입했다고 진술한다.[102] 일부 역사가들은 세베루스가 통치 초기에 기독교인에 대해 호의적인 정책을 취했지만 나중에 바뀌었고, 통치 10년째에 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103] 또는 에우세비우스의 설명은 단순히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페르페투아와 펠리시타스를 포함한 많은 박해가 발생했기 때문일 수 있으며, 이는 세베루스의 제국 전체의 행동이나 법령이라기보다는 지역 박해의 결과였을 것이다.[102]
데키우스 통치 이전에는 박해 사례가 있었지만, 215년 이후부터는 기록이 줄어들었다. 이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 감소 또는 사용 가능한 출처의 부족을 반영할 수 있다.[1] 세베루스 이후의 박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막시미누스 트락스(재위 235-238)에게 기인하는 것이다.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235년 막시미누스가 교회 지도자들을 상대로 시작한 박해로 인해 로마의 히폴리투스와 교황 폰티아누스가 사르데냐로 추방되었다. 오리게네스는 또한 막시미누스 통치 기간 동안 기독교인에 대한 공개 처형이 있었다고 언급했다.[104] 그러나 다른 증거에 따르면 235년의 박해는 카파도키아와 폰투스와 같은 지방에 국한되었으며 황제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95]

신들을 기리기 위한 의식을 거부하고 개종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심한 처벌을 받았다. 로마 시민권자들은 유배되거나 참수형을 당했고, 노예, 외국 태생 거주자, 하층 계급은 공개적인 구경거리로 야생 짐승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105] 키스 홉킨스는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기독교인들이 처형되었는지 여부는 아직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106] 그러나 노버트 브록만은 ''성스러운 장소 백과사전''에서 제국 시대에 콜로세움에서 공개 처형이 열렸으며 기독교인들이 그곳에서 처형된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썼다. 성 이그나티우스는 107년 트라야누스에 의해 "짐승에게 보내졌다". 그 직후, 115명의 기독교인들이 궁수들에게 살해당했다. 2세기 후반에 기독교인들이 역병의 종식을 위해 신들에게 기도하기를 거부했을 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콜로세움에서 수천 명을 신성 모독죄로 처형했다.[107][108]
3. 2. 데키우스의 박해 (250년)
3세기 데키우스(Decius) 통치 기간 동안 기독교에 대한 최초의 제국 전체 차원의 공식적인 박해가 발생했다.[109] 서기 250년, 데키우스 황제는 칙령을 발표하여 제국 내 모든 사람(유대인 제외)에게 로마 치안 판사 앞에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서명 및 증인이 있는 증명서인 리벨루스(libellus)를 발급받을 것을 요구했다.[111] 이 칙령은 전통적인 로마의 가치를 회복하려는 데키우스의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기독교인을 특별히 겨냥했다는 증거는 없다.[112]
이집트에서 발견된 한 증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 테아델피아 마을의 제물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페테레스의 딸 아우렐리아 벨리아스와 그녀의 딸 카피니스로부터. 우리는 항상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데 변함이 없었으며, 이제 당신들 앞에서 규정에 따라, 나는 술을 부어 제물을 바치고 시식을 하였으니, 이 사실을 아래에 증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계속 번창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사람의 필체) 우리, 아우렐리우스 세레누스와 아우렐리우스 헤르마스는 당신이 제물을 바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 번째 사람의 필체) 나, 헤르마스는 증명합니다. 황제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아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피우스 펠릭스 아우구스투스의 첫 해, 파우니 27일.[39]
이 칙령으로 인해 제국 전역의 기독교인들은 종교와 생존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았으며,[39] 교황 파비아누스, 안티오키아의 바빌라스, 예루살렘의 알렉산더를 포함한 많은 저명한 기독교인들이 제물을 바치기를 거부한 결과로 사망했다.[111] 많은 수의 기독교인이 배교했고 의식을 수행했으며, 카르타고(Carthage)의 주교인 키프리아누스(Cyprian)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숨어 지냈다.[39] 칙령의 시행 기간은 약 18개월에 불과했지만, 그때까지 평온하게 살았던 많은 기독교 공동체에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혔고, 끔찍한 폭정의 쓰라린 기억을 남겼다.[114]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배교자(lapsi (Christianity))가 성찬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일부 아프리카 교구는 그들의 재입교를 거부했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는 직접적으로 노바티아누스주의로 이어졌는데, 이 분파 운동의 지지자들은 박해 속에서 신앙 고백을 유지하지 못한 배교자들에 대한 파문을 유지하고자 했다.[110]
3. 3. 발레리아누스의 박해 (253년 ~ 260년)
발레리아누스는 253년에 즉위하여 254년부터 페르시아와 싸우기 위해 로마를 떠났으며, 260년에 포로로 잡혀 갇혀 죽었다.[39] 그는 기독교인에 관한 두 통의 편지를 원로원에 보냈는데, 257년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모든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로마 신들에게 희생을 바치도록 명령하고, 기독교인들이 묘지에서 모임을 갖는 것을 금지했다.[39] 258년에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는 주교와 다른 고위 성직자들을 처형하고, 기독교인이었던 원로원 의원과 기사들의 직위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배교하지 않는 로마 귀부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될 것이며, 희생을 거부하는 공무원들과 황실 직원 및 가신들은 노예로 전락하여 황실 영지에서 일하도록 보내질 것이었다.[60]
발레리아누스 치하에서 키프리아누스, 식스토 2세와 그의 부제들, 성 라우렌시오 등이 처형되었다.[60]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의 집정관인 갈레리우스 막시무스가 키프리아누스를 공개 심문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60] 심문에서 갈레리우스는 키프리아누스에게 로마 의식에 따를 것을 명령했으나 키프리아누스는 거부했다. 결국 갈레리우스는 키프리아누스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키프리아누스는 즉시 처형 장소로 끌려가 참수되었다. 이 판결은 로마 국가가 기독교를 종교가 아닌 범죄 조직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준다.
256년 2월 28일에 작성된 기독교인 체포 영장이 옥시린쿠스 파피루스 (''P. Oxy'' 3035)에서 발견되었으나, 체포 사유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발레리아누스는 253년 10월 22일 황제가 되자마자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를 카이사르이자 동료로 임명했다. 그의 통치 초기에 유럽의 상황은 악화되었고, 서방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동방에서는 안티오크가 사산 왕조의 봉신에게 넘어갔고, 아르메니아는 샤푸르 1세가 점령했다.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는 제국의 문제를 분담하여 아들은 서방을, 아버지는 동방으로 향했다.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갈리에누스가 260년에 황제가 되자, 이 법령은 철회되었고 박해는 종식되었다. 갈리에누스 즉위부터 다음 대규모 박해까지의 상대적인 관용의 기간을 교회의 작은 평화라고 부른다.
3. 4.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의 박해 (303년 ~ 311년/313년)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즉위는 즉각적인 기독교 탄압을 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공식적인 태도의 변화를 예고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즉위 후 15년 동안 군대에서 기독교인을 숙청하고, 마니교 신자들을 처형했으며, 기독교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자들로 주변을 채웠다.[149] 독재 정부를 선호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과거 로마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했고, 이는 로마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박해를 예고했다.[149]
302년 겨울,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기독교인에 대한 전반적인 박해를 시작하도록 촉구했다.[149]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신중하게 아폴로 신전에 지침을 구했고, 신탁의 대답은 갈레리우스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303년 2월 24일에 전반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149] 최근 연구에 따르면, 303년부터 312년까지 기독교에 대항하는 황제의 명령이 최소 9건이나 발령되었다.[149]
로마 지배 계층 내에서 박해에 대한 지지가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 갈레리우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열렬한 박해자였지만,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열의가 없었다. 모든 주민에게 로마 신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을 포함한 후기 박해 칙령은 그의 영토에는 적용되지 않았다.[149]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는 306년에 황제가 되자 기독교인에게 완전한 법적 평등을 회복하고 박해 중에 몰수된 재산을 돌려주었다. 306년 이탈리아에서 찬탈자 막센티우스는 세베루스를 몰아내고 완전한 종교적 관용을 약속했다. 갈레리우스는 311년에 동방에서의 박해를 끝냈지만, 그의 후계자인 막시미누스 2세에 의해 이집트, 팔레스타인, 소아시아에서 재개되었다.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에 서명하여, 갈레리우스의 칙령보다 더 포괄적인 기독교 수용을 제공했다.[149] 리키니우스는 313년에 막시미누스를 몰아내고 동방에서의 박해를 종식시켰다.
박해는 교회의 성장을 막지 못했다. 324년까지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고, 기독교는 그가 가장 선호하는 종교가 되었다. 박해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이 죽음, 고문, 투옥 또는 이탈을 겪었지만, 제국 기독교인의 대다수는 처벌을 피했다. 그러나 박해는 제국 권위에 복종한 자들(''lapsi'')과 굳건히 버틴 자들 사이에서 많은 교회들이 분열되는 결과를 낳았다.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와 이집트의 멜레티우스파와 같은 특정 분열은 박해 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피터 브라운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의 실패는 이교 제국의 순응주의에 대한 오랜 종교적 자기 주장의 확인으로 간주되었다.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신념을 주장할 자유가 획득되었고 유지되었다."라고 언급하며, "'기독교 교회와 국가가 나중에 종교적 강압으로 죄를 범했을지라도, 로마 박해의 순교는 자유의 역사에 속한다.' 그리고 이 혁명에서... 쟁점은 단지 한 지방의 지역적 불만 사항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에서 종교의 위치에 다름 아니었다."라고 평가했다.[115]
4. 기독교 박해의 원인
A. N. 셔윈-화이트(A. N. Sherwin-White)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이유에 대한 논의가 1890년에 시작되어 세 가지 주요 의견으로 나뉘었다고 기록했다.
첫째, 프랑스 및 벨기에 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금지하는 제국 전체에 유효한 법령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법령은 네로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으며, '관습법' 이론으로 발전했다. 네로는 새로운 종교 도입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고, 기독교인에게는 로마 국가 승인 없이 새로운 ''미신''을 도입하는 것은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원칙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14] 그러나 셔윈-화이트는 이 이론이 로마에서의 박해는 설명할 수 있지만, 지방에서의 박해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14]
둘째, 독일 학자들은 ''강압'' (제한) 이론을 주장했다. 이 이론은 기독교인들이 "외국 컬트가 '국가 배교'를 유발하고 전통적인 로마 종교를 포기하게 했다"고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기독교를 기성 질서에 대한 혐오와 권위에 대한 불복종으로 간주했다. 이 학파는 박해를 종교 재판, 체포 및 처벌과 같은 경찰 행동으로 보았다.[14]
셋째, 기독교인들이 아동 살해, 근친상간, 마법, 불법 집회, 반역 등의 범죄로 기소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로마 황제의 신성 숭배 거부와 관련이 있다. 셔윈-화이트는 이 의견이 강압 이론과 결합되기도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모든 박해를 단일 범죄 혐의, 특히 반역, 불법 집회 또는 외국 컬트 도입으로 돌렸다고 말한다.[14] 악의적인 소문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은 이후 학문에서 가장 검증되지 않았다.[14]
4. 1. 이념적 갈등
조셉 플레시아(Joseph Plescia)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이념적 갈등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말한다.[15] 카이사르는 신으로 여겨졌으나,[16] 기독교인들은 유일신 사상을 믿었기에 카이사르를 신으로 숭배할 수 없었다.[17][18] 케언스(Cairns)는 "그리스도의 배타적인 주권은 카이사르의 배타적인 주권 주장과 충돌했다"고 묘사한다.[19]이러한 이념적 충돌 속에서 평범한 기독교인들은 고발의 위협과 사형에 처해질 가능성에 놓여 있었다.[20][21] 기독교인들은 종교를 숨기고 로마인다움을 가장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세상과의 단절이 그들의 신앙의 한 측면이었기 때문이다.[22] 기독교인들은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악한 자'와의 접촉을 피했다.[22]
로마 시민들은 일 년 내내 수많은 축제와 제의에 참여함으로써 로마에 대한 충성을 증명해야 했다.[23][24]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종교 의식에 참여할 수 없었기에 반사회적이고 파괴적인 불법 종교에 속한 것으로 여겨졌다.[19]
4. 2. 사회문화적 요인
기독교는 로마 사회의 기존 질서와 가치관에 도전하는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 사유화 경향 ====
맥도날드는 종교의 사유화가 박해의 또 다른 요인이었다고 설명하며, "그리스도인들이 활동 무대를 거리에서 주택, 상점, 여성의 아파트와 같은 더욱 은밀한 영역으로 옮기면서 종교, 전통, 도시 및 국가와 같은 공공 기관 사이의 정상적인 유대 관계를 단절했다"고 말한다.
맥도날드는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때때로 "밤에, 은밀하게 만났으며, 이는 종교를 공적인 행사로 여겼던 이교도들 사이에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소문이 무성하게 퍼져 그리스도인들이 'flagitia', 'scelera', 'maleficia'—"경악스러운 범죄", "악행", "사악한 행위", 특히, 인육 섭취와 근친상간 ('티에스테스의 연회' 및 '오이디푸스적 성교'라고 함)—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먹는다는 소문과 서로를 "형제"와 "자매"라고 칭하는 행위 때문에 저질렀다고 한다."
==== 포용성과 배타성 ====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적 계층화 및 기타 사회적 범주 면에서 로마 제국의 자발적 결사체보다 훨씬 포용적이었습니다.[29] 동질성과 이질성은 사도 바울이 형성한 집단의 특징이었으며, 여성의 역할은 당시 존재했던 유대교나 이교도 형태보다 훨씬 컸습니다.[29] 초기 기독교인들은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았으며, 모든 계층의 기독교인들은 서로를 "형제"와 "수녀"라고 불렀습니다.[29] 이러한 다양한 사회 계층과 배경을 포용하는 것은 복음의 기준에 따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 선교 활동을 수행하여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개종시키려는 초기 기독교 신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6:15-16, 갈라디아서 5:16-26''). 이는 기독교의 반대자들에게 "로마 사회의 전통적인 계층/성별 기반 질서에 대한 파괴적이고, 가장 중요한 경쟁적 위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기독교 개종자들이 가족과 조국을 버리는 경향(그리고 임박한 재앙에 대한 잦은 예측)이 이교도 이웃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었다고 주장했다.[30]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복음의 믿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인들은 부자연스럽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관습과 교육의 신성한 유대를 끊고, 조국의 종교적 제도를 위반했으며, 선조들이 진실이라고 믿거나 신성하게 존경했던 모든 것을 주제넘게 경멸했다.[31]
==== 이교 거부 ====
많은 이교도들은 기존의 이교 신들에게 적절한 제물을 바치고 경배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믿었다.[32][33] 2세기 말, 기독교 변증가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독교인들이 신들이 인류에게 가져오는 모든 재앙의 원인이라는 광범위한 인식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34]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모든 공공 재앙, 백성들이 겪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티베르 강이 도시 성벽까지 범람하면, 나일 강이 들판을 적시지 않으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지진이 나면, 기근이나 역병이 돌면, 즉시 '기독교인들을 사자에게 던져라!'고 외친다."[34]
==== 로마 정체성과의 충돌 ====
로마 종교는 대체로 '로마성'을 결정하는 요소였다.[35] 기독교인들이 로마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는 이러한 문화적, 정치적 특성과 로마 자체의 본질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졌다. 맥멀렌은 유세비우스가 이교도들이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그리고 우리가 가장 큰 불경을 저지른다고 완전히 확신했다"라고 썼다고 인용한다.[9] 윌켄에 따르면 "로마인들의 다신교적 세계관은 국가 신들에게, 심지어 상징적으로라도, 숭배를 거부하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지 않았다."[36] 맥멀렌은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끊임없이 방어적인 입장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이 철학과 이성에 호소하고 '타 파트리아'(조상들의 관습)에 반하는 모든 것을 제시하며 대응했지만, 로마 종교를 실천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종교에 충성을 다할 수는 없었다고 설명한다.[9] 아벨 비블리오비츠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편견이 너무나 본능적이어서 결국, '기독교인'이라는 이름만 고백해도 처형의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37]
4. 2. 1. 사유화 경향
맥도날드는 종교의 사유화가 박해의 또 다른 요인이었다고 설명하며, "그리스도인들이 활동 무대를 거리에서 주택, 상점, 여성의 아파트와 같은 더욱 은밀한 영역으로 옮기면서 종교, 전통, 도시 및 국가와 같은 공공 기관 사이의 정상적인 유대 관계를 단절했다"고 말한다.맥도날드는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때때로 "밤에, 은밀하게 만났으며, 이는 종교를 공적인 행사로 여겼던 이교도들 사이에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소문이 무성하게 퍼져 그리스도인들이 'flagitia', 'scelera', 'maleficia'—"경악스러운 범죄", "악행", "사악한 행위", 특히, 인육 섭취와 근친상간 ('티에스테스의 연회' 및 '오이디푸스적 성교'라고 함)—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먹는다는 소문과 서로를 "형제"와 "자매"라고 칭하는 행위 때문에 저질렀다고 한다."
4. 2. 2. 포용성과 배타성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적 계층화 및 기타 사회적 범주 면에서 로마 제국의 자발적 결사체보다 훨씬 포용적이었습니다.[29] 동질성과 이질성은 사도 바울이 형성한 집단의 특징이었으며, 여성의 역할은 당시 존재했던 유대교나 이교도 형태보다 훨씬 컸습니다.[29] 초기 기독교인들은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았으며, 모든 계층의 기독교인들은 서로를 "형제"와 "수녀"라고 불렀습니다.[29] 이러한 다양한 사회 계층과 배경을 포용하는 것은 복음의 기준에 따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 선교 활동을 수행하여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개종시키려는 초기 기독교 신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6:15-16, 갈라디아서 5:16-26''). 이는 기독교의 반대자들에게 "로마 사회의 전통적인 계층/성별 기반 질서에 대한 파괴적이고, 가장 중요한 경쟁적 위협"으로 인식되었습니다.에드워드 기번은 기독교 개종자들이 가족과 조국을 버리는 경향(그리고 임박한 재앙에 대한 잦은 예측)이 이교도 이웃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었다고 주장했다.[30]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복음의 믿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인들은 부자연스럽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관습과 교육의 신성한 유대를 끊고, 조국의 종교적 제도를 위반했으며, 선조들이 진실이라고 믿거나 신성하게 존경했던 모든 것을 주제넘게 경멸했다.[31]
4. 2. 3. 이교 거부
많은 이교도들은 기존의 이교 신들에게 적절한 제물을 바치고 경배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믿었다.[32][33] 2세기 말, 기독교 변증가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독교인들이 신들이 인류에게 가져오는 모든 재앙의 원인이라는 광범위한 인식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34]"그들은 기독교인들이 모든 공공 재앙, 백성들이 겪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티베르 강이 도시 성벽까지 범람하면, 나일 강이 들판을 적시지 않으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지진이 나면, 기근이나 역병이 돌면, 즉시 '기독교인들을 사자에게 던져라!'고 외친다."[34]
4. 2. 4. 로마 정체성과의 충돌
로마 종교는 대체로 '로마성'을 결정하는 요소였다.[35] 기독교인들이 로마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는 이러한 문화적, 정치적 특성과 로마 자체의 본질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졌다. 맥멀렌은 유세비우스가 이교도들이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그리고 우리가 가장 큰 불경을 저지른다고 완전히 확신했다"라고 썼다고 인용한다.[9] 윌켄에 따르면 "로마인들의 다신교적 세계관은 국가 신들에게, 심지어 상징적으로라도, 숭배를 거부하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지 않았다."[36] 맥멀렌은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끊임없이 방어적인 입장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이 철학과 이성에 호소하고 '타 파트리아'(조상들의 관습)에 반하는 모든 것을 제시하며 대응했지만, 로마 종교를 실천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종교에 충성을 다할 수는 없었다고 설명한다.[9] 아벨 비블리오비츠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편견이 너무나 본능적이어서 결국, '기독교인'이라는 이름만 고백해도 처형의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37]4. 3. 로마 법 체계
로마법은 기독교인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지만, 총독의 재량에 따라 기독교인을 처벌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28][43] 역사학자 조이스 E. 솔즈베리는 64년부터 203년까지 이어진 박해의 무작위적인 성격으로 인해 박해의 법적 근거가 모호하다고 지적한다.[38] 칸디다 모스는 로마법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순교에 대한 증거가 "미미하다"고 말한다.[39]
로마법은 주로 재산권에 관한 것이었으며, 형법 및 공법에는 많은 틈이 있었다.[28] 이러한 법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코그니티오 엑스트라 오르디넴''("특별 조사") 절차가 활용되었으며, 모든 속주 총독은 속주에서 자신의 ''임페리움''의 일부로 이러한 방식으로 재판을 진행할 권한을 가졌다.[28]
''코그니티오 엑스트라 오르디넴''에서 ''델라토르''(고발자)는 특정 범죄, 즉 기독교인이라는 혐의로 개인을 총독에게 데려갔다. 총독은 사건 심리 여부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었으며, 심리하기로 결정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재판을 감독하고 평결과 형을 선고했다.[28] 기독교인들은 때때로 스스로 처벌을 자청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자원 순교자들의 심리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사건의 결과는 총독의 개인적인 의견에 크게 좌우되었다. 일부 총독들은 선례나 황실의 의견에 의존하려 했지만,[44] 그러한 지침은 종종 없었다.[45]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근무하는 총독들은 자신의 본능과 지식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했다.
데키우스 시대의 반기독교 정책 이전에는 기독교인에 대한 제국 차원의 칙령이 없었고, 유일한 확실한 선례는 트라야누스가 플리니우스에게 보낸 답변이었다. 즉, "기독교인"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처벌을 받기에 충분했고, 기독교인을 정부가 찾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이 반역죄로 정죄받았다는 추측도 있지만, 증거는 엇갈린다.[28] 사르디스의 멜리토는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적절한 재판 없이 기독교인을 처형하지 않도록 명령했다고 주장했다.[1]
기독교 옹호론자 터툴리아누스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일부 총독들은 기독교인 피고인들이 무죄를 확보하도록 돕거나 재판에 회부하는 것을 거부했다.[28] 아시아의 한 속주 총독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는 자원 순교자 그룹에 직면했을 때, 몇 명을 처형하라고 보냈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너희 불쌍한 것들아, 죽고 싶으면 밧줄이나 낭떠러지를 이용하라"고 소리쳤다.[28]
대박해 동안, 총독들은 황제로부터 직접 칙령을 받았다. 기독교 교회와 문서가 파괴되고, 기독교 예배를 위한 모임이 금지되었으며, 철회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은 법적 권리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칙령에 의해 구체적인 처벌이 규정되지 않았고, 총독들은 여전히 재량권을 가졌다.[46] 락탄티우스는 일부 총독들이 기독교인의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47] 다른 사람들은 칙령 회피를 눈감아주거나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만 시행했다는 증거가 있다.
4. 4. 정부의 동기
로마 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공공 종교 숭배 지도자들이었으며, 로마의 종교는 공공 의식과 제사에 집중되었다.[48] 전통을 올바른 방식으로 존중하는 ''경건''이 안정과 성공의 핵심이었다.[48] 따라서 로마인들은 그들의 통치하에 있는 공동체가 행하는 종교 숭배의 완전성을 보호했으며, 조상의 전통을 존중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옳다고 보았다.[28]총독은 한 지방에 파견될 때 그 지방을 ''평온하고 질서 있게'' 유지해야 하는 책임을 졌으며[28], 그의 주된 관심사는 백성을 행복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28]
칼리굴라 시대의 위기"(37-41년)는 로마와 유대인 사이의 "첫 번째 공개적인 단절"이었다.[49] 제1차 유대-로마 전쟁 (66-73년) 이후, 유대인들은 유대인 세금을 납부하는 한 공식적으로 종교를 실천하는 것이 허용되었다.[50] 96년에 네르바가 세금을 수정하기 전에는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의 한 종파로 간주했는지에 대해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으나, 그 이후 유대교인들은 세금을 납부했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아 공식적인 구별이 이루어졌다는 명확한 증거가 제시되었다.[50]
유대교와 구별되면서, 기독교는 더 이상 낡고 존경받는 종교의 이상한 종파로 여겨지지 않았고 ''미신''으로 간주되었다.[28] 미신은 로마인들에게 사회에 파괴적이고, "인간의 정신을 교란하여 실제로 미치게 만들고" 인류애(humanitas)를 잃게 만드는 종교적 관행을 의미했다.[52] 로마 역사에서 "미신적인" 종파에 대한 박해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53] 기원전 428년에는 가뭄 동안 이름 없는 외국 숭배가 박해를 받았고, 기원전 186년에는 바쿠스 숭배의 일부 추종자들이 처형되었으며, 초기 원수정 시대에는 켈트족 드루이드에 대항하는 조치가 취해졌다.[53]
3세기에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포르피리오스는 기독교를 조상들의 관습에서 벗어나 모든 국가와 도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라 비판하며, "신에 대항하는 자들"이라고 칭했다.[51]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많은 정부 관리들에게 호감을 사지 못했는데, 그들은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를 숭배했고, 황제의 권능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그들의 성서에서 로마를 심하게 비판했고, 의식을 은밀하게 수행했기 때문이다.[54] 3세기 초의 한 치안 판사는 "나는 로마의 종교 방식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의 말조차 들을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54]
5. 기독교 박해 관련 논쟁
로마 제국 시대의 기독교 순교와 관련하여 이견과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117] 신학자 폴 미들턴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순교에 대한 기록은 논쟁적인 이야기이다. 순교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없으며, 이는 불가피하게 영웅과 악당을 만들어낸다... 심지어 초기 교회에서도 순교는 항상 논쟁의 대상이었다. 더욱이, 진정한 순교와 거짓된 순교를 객관적으로 구별하려는 시도는 본질적으로 편집자, 이야기꾼, 심지어 편집자의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이다."[116]
### 순교 기록의 진위
이 "오랫동안 지속된 논쟁"은 기번(Gibbon)과 바워소크(Bowersock)와 같은 역사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가 패트리샤 크래덕(Patricia Craddock)에 따르면,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History)는 그의 편견이 그의 방법에 영향을 미쳐 "역사가의 역할을 검사 역할로 버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걸작이다.[119][118][119] 따라서 기번 자신도 이 오랜 논쟁의 한 측면이 되었다.[120][119]
기번은 기독교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박해의 규모와 잔혹성을 과장했다고 주장했다. 후대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유대교와 로마의 정체성과 분리된 ''기독교'' 정체성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에서 "순교자 숭배"를 만들어내기 위해 과장이 필요했다고 주장했다.[121][122] 과장과 위조는 실제로 발생했으며, 주로 중세 시대에 발생했지만, 순교자들은 초기 기독교 정체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베다니 신학교와 시카고 신학교의 학장 겸 신학 교수인 그레이든 F. 스나이더(Graydon F. Snyder)는 고대 텍스트와 고고학적 증거("문학적이지 않은 모든 증거: ...존재하는 건물, 건축 형태, 상징, 예술, 장례 관행, 비문, 편지, 기록, 심지어 음악")를 사용하여 순교자 숭배가 콘스탄티누스 이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초기 기록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23]
현대 작가들의 다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대박해의 심각성에 대해 기번보다 덜 회의적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역사가 스티븐 윌리엄스(Stephen Williams)는 1985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과장된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남아있는 것은 충분히 끔찍하다. 기번과는 달리,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러한 보고에 대한 문명화된 의심의 미소가 얼마나 근거가 없는지 알고 있다. 최악의 상상만큼이나 나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래왔다."[124]
초기 기독교 순교에 대한 진정한 기록, 역사,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이전 시대의 다른 증거의 수는 격렬하게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순교록(라틴어: ''Acta Martyrum'')은 초기 수 세기의 순교자들의 체포, 심문, 유죄 판결, 처형, 매장 등에 대한 모든 다양한 기록(acta, gesta, passiones, martyria, and legenda)을 포함한다.[125] 이 기록들은 그들이 묘사하는 사건들보다 훨씬 후에 쓰여졌기 때문에 역사적 정확성이 다양하다.[126] 이폴리트 들라예의 분류 기준은 텍스트를 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게 한다.
# 공식 기록과 직접 증언 기록.
# 첫 번째 그룹에 속하는 문서 또는 적어도 상당수의 안전한 역사적 요소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
# 훨씬 나중에 쓰여진 소설이나 성인전 환상.[127]
첫 번째 범주는 대체로 역사적이고 세 번째 범주는 비역사적 소설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며, 논쟁은 두 번째 범주에 집중된다.[128] 피에르 마라발에 따르면, 이 텍스트 중 많은 부분이 영적으로 "독자들을 교화하기 위해 쓰여졌으며, 그들의 주된 의도는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증언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다.[129] 마라발은 계속해서 ''Acta''와 ''Passiones''가 현대 독자가 박해의 현실과 그들의 공동체가 그것을 느낀 방식을 깨닫게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진정한 역사적 데이터를 보존했다고 말한다.[129]
유세비우스의 진정성 또한 이 오랜 논쟁의 한 측면이었다. 유세비우스는 편향되어 있으며, 반스에 따르면 유세비우스는 특히 연대기에서 (그리고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과도한 헌신을 통해) 실수를 범하지만, 그의 주장의 많은 부분은 현재는 사라진 원본 소스에서 신중하게 인용한 포괄적인 발췌문을 포함하는 그의 방법론 덕분에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130][56][131] 예를 들어, 유세비우스는 "마르쿠스가 피우스와 황제의 권력을 공유하는 동안 [138년부터 161년까지] 피우스는 [기독교인이라는 범죄적 성격에 관하여] 라리사, 테살로니카, 아테네의 도시들과 모든 그리스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유세비우스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멜리토의 변증''을 인용하고, 유스티노의 변증서 필사본은 텍스트에 약간의 변형만 있을 뿐 동일한 제국 서신을 제시한다.
기독교인이 ''당연히'' 범죄자라는 원칙은 161년 직후의 몇 년 동안 잘 증명되었다. 이는 갈리아 기독교인에 관한 제국 서신에서 가정되었고, 멜리토에 의해 그의 변증에서 공격받았으며, 유스티누스와 그의 동료들이 161년과 168년 사이에 재판을 받고 처형된 혐의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반스에 따르면, 유세비우스는 그가 말하는 것의 많은 부분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뒷받침된다.
### 순교자 수
기독교 박해로 인한 순교자 수에 대한 추정치는 학자마다 다르다. 이러한 논쟁은 에드워드 기번과 G.W. 바워소크와 같은 역사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119][118] 기번은 그의 저서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기독교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박해의 규모와 잔혹성을 과장했다고 주장했다.[120][119] 후대 학자들은 "순교자 숭배"를 만들어내기 위해 과장이 필요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21][122] 그러나 그레이든 F. 스나이더는 고대 텍스트와 고고학적 증거를 사용하여 순교자 숭배가 콘스탄티누스 이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초기 기록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23]
현대 작가들은 대박해의 심각성에 대해 기번보다 덜 회의적인 경우가 많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역사가 스티븐 윌리엄스는 "과장된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남아있는 것은 충분히 끔찍하다"라고 썼다.[124]
순교자 총 수에 대한 추정치는 유세비우스의 저서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에 대한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137][60] 스테. 크루아는 유세비우스가 자신의 관할 구역에 있는 순교자들에 대한 전체 기록을 작성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138] 티모시 반스는 유세비우스의 의도가 모든 순교자에 대한 포괄적인 기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이었는지 묘사하는 예시를 제공하는 것이었다고 반박한다.[1][139] 얀 브레머는 유세비우스가 언급하지 않은 많은 순교자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유세비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순교자를 텍스트에 포함시킬 것이라고 기대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140]
에드워드 기번은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에 나열된 인원수를 바탕으로 대박해에서 순교한 사람들의 수를 2천 명 미만으로 추정했다.[144][145] 그러나 이 추정치는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에 있는 순교자들의 수가 완전하지 않고, 인구에 대한 이해와 제국 전역에 걸친 고른 분포를 가정했기 때문에 부정확하다는 비판을 받았다.[146] 윌리엄 휴 클리포드 프렌드는 대박해에서 3,000~3,500명의 기독교인이 살해되었다고 추정했고,[148] 신민석은 23,500명 이상의 기독교인이 순교했다고 추정한다.[149]
스테. 크루아는 "단순한 순교 통계는 기독교인 전체의 고통에 대한 신뢰할 만한 지표가 전혀 아니다"라고 결론 내렸다.[150]
### 자발적 순교
G. E. M. 드 스테. 크루아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누었는데, 순교를 자원한 사람들, 자원하지 않았지만 순교를 초래한 행동을 한 사람들, 아무런 행동 없이 당국에 의해 추적당한 사람들이다.[132] 스테. 크루아는 유세비우스가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에서 언급한 91명의 팔레스타인 순교자 중 47명에 대해서만 분류가 가능했고, 그중 13명은 자원자, 18명은 "스스로 주목을 받았"고, 16명은 "찾아다녔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스테. 크루아는 처음 두 범주를 "자발적 순교"라는 정의로 결합했다.[133]
허버트 무수릴로는 스테. 크루아가 "초기 ''행전''에서는 증거가 거의 없는 기독교 순교의 자발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비판했다.[43] 앨런 빈셀레트는 스테. 크루아의 자발적 순교 분류가 너무 광범위하다는 데 동의하며, 4세기까지의 자료를 보면 자발적 순교가 실제로 존재했지만, 스테. 크루아가 주장한 75%가 아닌 전체 순교자의 약 12%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134]
G.W. 바워스톡은 자발적 순교가 2세기 말에 교회 당국이 이를 억제하려 할 정도로 널리 퍼졌으며, 3세기와 4세기에는 "순교의 면류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엄격하게 구분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135]
칸디다 모스는 자발적 순교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별개의 범주로 인식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순교 유형을 구분하는 텍스트에서만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136] 폴 미들턴은 "원시 정통 기독교 순교"의 하위 집합으로서 자발적 순교의 타당성을 주장하며, ''성 키프리아누스 행전''이나 ''페르페투아의 수난기''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116] 테르툴리아누스는 아시아 총독 아리우스 안토니우스에게 순교를 요구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응답하면서 자발적인 체포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116] 모스와 미들턴에 따르면, 자발주의는 후기 기독교에서 비판을 받았지만,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는 순교자로 존경받은 급진적인 형태의 순교로 볼 수 있다.[116]
5. 1. 순교 기록의 진위
이 "오랫동안 지속된 논쟁"은 기번(Gibbon)과 바워소크(Bowersock)와 같은 역사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가 패트리샤 크래덕(Patricia Craddock)에 따르면,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History)는 그의 편견이 그의 방법에 영향을 미쳐 "역사가의 역할을 검사 역할로 버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걸작이다.[119][118][119] 따라서 기번 자신도 이 오랜 논쟁의 한 측면이 되었다.[120][119]기번은 기독교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박해의 규모와 잔혹성을 과장했다고 주장했다. 후대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유대교와 로마의 정체성과 분리된 ''기독교'' 정체성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에서 "순교자 숭배"를 만들어내기 위해 과장이 필요했다고 주장했다.[121][122] 과장과 위조는 실제로 발생했으며, 주로 중세 시대에 발생했지만, 순교자들은 초기 기독교 정체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베다니 신학교와 시카고 신학교의 학장 겸 신학 교수인 그레이든 F. 스나이더(Graydon F. Snyder)는 고대 텍스트와 고고학적 증거( "문학적이지 않은 모든 증거: ...존재하는 건물, 건축 형태, 상징, 예술, 장례 관행, 비문, 편지, 기록, 심지어 음악")를 사용하여 순교자 숭배가 콘스탄티누스 이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초기 기록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23]
현대 작가들의 다수는 대박해의 심각성에 대해 기번보다 덜 회의적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역사가 스티븐 윌리엄스(Stephen Williams)는 1985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과장된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남아있는 것은 충분히 끔찍하다. 기번과는 달리,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러한 보고에 대한 문명화된 의심의 미소가 얼마나 근거가 없는지 알고 있다. 최악의 상상만큼이나 나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래왔다."[124]
초기 기독교 순교에 대한 진정한 기록, 역사,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이전 시대의 다른 증거의 수는 격렬하게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순교록(라틴어: ''Acta Martyrum'')은 초기 수 세기의 순교자들의 체포, 심문, 유죄 판결, 처형, 매장 등에 대한 모든 다양한 기록(acta, gesta, passiones, martyria, and legenda)을 포함한다.[125] 이 기록들은 그들이 묘사하는 사건들보다 훨씬 후에 쓰여졌기 때문에 역사적 정확성이 다양하다.[126] 이폴리트 들라예의 분류 기준은 텍스트를 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게 한다.
# 공식 기록과 직접 증언 기록.
# 첫 번째 그룹에 속하는 문서 또는 적어도 상당수의 안전한 역사적 요소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
# 훨씬 나중에 쓰여진 소설이나 성인전 환상.[127]
첫 번째 범주는 대체로 역사적이고 세 번째 범주는 비역사적 소설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며, 논쟁은 두 번째 범주에 집중된다.[128] 피에르 마라발에 따르면, 이 텍스트 중 많은 부분이 영적으로 "독자들을 교화하기 위해 쓰여졌으며, 그들의 주된 의도는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증언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다.[129] 마라발은 계속해서 ''Acta''와 ''Passiones''가 현대 독자가 박해의 현실과 그들의 공동체가 그것을 느낀 방식을 깨닫게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진정한 역사적 데이터를 보존했다고 말한다.[129]
유세비우스의 진정성 또한 이 오랜 논쟁의 한 측면이었다. 유세비우스는 편향되어 있으며, 반스에 따르면 유세비우스는 특히 연대기에서 (그리고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과도한 헌신을 통해) 실수를 범하지만, 그의 주장의 많은 부분은 현재는 사라진 원본 소스에서 신중하게 인용한 포괄적인 발췌문을 포함하는 그의 방법론 덕분에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130][56][131] 예를 들어, 유세비우스는 "마르쿠스가 [피우스]와 황제의 권력을 공유하는 동안 [138년부터 161년까지] 피우스는 [기독교인이라는 범죄적 성격에 관하여] 라리사, 테살로니카, 아테네의 도시들과 모든 그리스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유세비우스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멜리토의 변증''을 인용하고, 유스티누스의 변증서 필사본은 텍스트에 약간의 변형만 있을 뿐 동일한 제국 서신을 제시한다.
기독교인이 ''당연히'' 범죄자라는 원칙은 161년 직후의 몇 년 동안 잘 증명되었다. 이는 갈리아 기독교인에 관한 제국 서신에서 가정되었고, 멜리토에 의해 그의 변증에서 공격받았으며, 유스티누스와 그의 동료들이 161년과 168년 사이에 재판을 받고 처형된 혐의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반스에 따르면, 유세비우스는 그가 말하는 것의 많은 부분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뒷받침된다.
5. 2. 순교자 수
기독교 박해로 인한 순교자 수에 대한 추정치는 학자마다 다르다. 이러한 논쟁은 에드워드 기번과 G.W. 바워소크와 같은 역사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119][118] 기번은 그의 저서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기독교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박해의 규모와 잔혹성을 과장했다고 주장했다.[120][119] 후대 학자들은 "순교자 숭배"를 만들어내기 위해 과장이 필요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21][122] 그러나 그레이든 F. 스나이더는 고대 텍스트와 고고학적 증거를 사용하여 순교자 숭배가 콘스탄티누스 이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초기 기록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23]현대 작가들은 대박해의 심각성에 대해 기번보다 덜 회의적인 경우가 많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역사가 스티븐 윌리엄스는 "과장된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남아있는 것은 충분히 끔찍하다"라고 썼다.[124]
순교자 총 수에 대한 추정치는 유세비우스의 저서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에 대한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137][60] 스테. 크루아는 유세비우스가 자신의 관할 구역에 있는 순교자들에 대한 전체 기록을 작성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138] 티모시 반스는 유세비우스의 의도가 모든 순교자에 대한 포괄적인 기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이었는지 묘사하는 예시를 제공하는 것이었다고 반박한다.[1][139] 얀 브레머는 유세비우스가 언급하지 않은 많은 순교자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유세비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순교자를 텍스트에 포함시킬 것이라고 기대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140]
에드워드 기번은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에 나열된 인원수를 바탕으로 대박해에서 순교한 사람들의 수를 2천 명 미만으로 추정했다.[144][145] 그러나 이 추정치는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에 있는 순교자들의 수가 완전하지 않고, 인구에 대한 이해와 제국 전역에 걸친 고른 분포를 가정했기 때문에 부정확하다는 비판을 받았다.[146] 윌리엄 휴 클리포드 프렌드는 대박해에서 3,000~3,500명의 기독교인이 살해되었다고 추정했고,[148] 신민석은 23,500명 이상의 기독교인이 순교했다고 추정한다.[149]
스테. 크루아는 "단순한 순교 통계는 기독교인 전체의 고통에 대한 신뢰할 만한 지표가 전혀 아니다"라고 결론 내렸다.[150]
5. 3. 자발적 순교
G. E. M. 드 스테. 크루아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누었는데, 순교를 자원한 사람들, 자원하지 않았지만 순교를 초래한 행동을 한 사람들, 아무런 행동 없이 당국에 의해 추적당한 사람들이다.[132] 스테. 크루아는 유세비우스가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에서 언급한 91명의 팔레스타인 순교자 중 47명에 대해서만 분류가 가능했고, 그중 13명은 자원자, 18명은 "스스로 주목을 받았"고, 16명은 "찾아다녔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스테. 크루아는 처음 두 범주를 "자발적 순교"라는 정의로 결합했다.[133]허버트 무수릴로는 스테. 크루아가 "초기 ''행전''에서는 증거가 거의 없는 기독교 순교의 자발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비판했다.[43] 앨런 빈셀레트는 스테. 크루아의 자발적 순교 분류가 너무 광범위하다는 데 동의하며, 4세기까지의 자료를 보면 자발적 순교가 실제로 존재했지만, 스테. 크루아가 주장한 75%가 아닌 전체 순교자의 약 12%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134]
G.W. 바워스톡은 자발적 순교가 2세기 말에 교회 당국이 이를 억제하려 할 정도로 널리 퍼졌으며, 3세기와 4세기에는 "순교의 면류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엄격하게 구분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135]
칸디다 모스는 자발적 순교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별개의 범주로 인식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순교 유형을 구분하는 텍스트에서만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136] 폴 미들턴은 "원시 정통 기독교 순교"의 하위 집합으로서 자발적 순교의 타당성을 주장하며, ''성 키프리아누스 행전''이나 ''페르페투아의 수난기''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116] 테르툴리아누스는 아시아 총독 아리우스 안토니우스에게 순교를 요구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응답하면서 자발적인 체포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116] 모스와 미들턴에 따르면, 자발주의는 후기 기독교에서 비판을 받았지만,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는 순교자로 존경받은 급진적인 형태의 순교로 볼 수 있다.[116]
6. 한국과 기독교 박해
6. 1. 조선 시대 천주교 박해
6. 2.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강요
7.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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