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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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는 1세기 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다.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에서 태어나 로마 원로원 가문 출신으로, 군사 호민관으로 시작하여 브리타니아에서 복무했다. 그는 네 명의 황제의 해에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며 브리타니아 주둔 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브리타니아 총독으로서 로마의 지배를 확장했다. 특히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에서 칼레도니아인들을 격파하고 로마화 정책을 펼쳤으며, 85년 브리타니아에서 소환된 후 93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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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
| 로마자 표기 | Gnaeus Julius Agricola |
| 출생 | 40년 6월 13일 |
| 출생지 |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포룸 율리이 (현재의 프레쥐, 프랑스) |
| 사망 | 93년 8월 23일 |
| 사망지 |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현재의 랑그도크 및 프로방스, 프랑스) |
| 군사 경력 | |
| 복무 기간 | 58년–85년 |
| 소속 | 로마 제국 |
| 계급 | 프로콘술 |
| 지휘 | 레기오 XX 발레리아 빅트릭스 |
| 전투 | 와틀링 가도 전투 |
| 훈장 | 오르나멘타 트리움팔리아 |
2. 초기 생애와 경력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의 포룸 율리(현재 프랑스 프레쥐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 원로원 의원이었으나 칼리굴라 황제에 의해 처형되었고, 이후 어머니 슬하에서 교육받으며 성장했다.
아그리콜라의 공직 경력은 58년 브리타니아에서 군사 호민관으로 복무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총독의 참모로 활동했으며, 61년 부디카가 이끈 반란 진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62년 로마로 돌아와 도미티아 데키디아나와 결혼했으며, 이후 로마의 관직 경력을 쌓아나갔다. 64년 재무관(콰이스토르)으로 선출되어 아시아 속주에서 근무했고, 66년에는 평민 호민관, 68년에는 법무관(프라이토르)을 역임했다.
2. 1. 출생과 가문
아그리콜라는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에 위치한 포룸 율리(Forum Julii, 현재 프랑스 프레쥐스)의 로마 식민지(''콜로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로마 원로원과 연관된 유력한 정치 가문 출신이었으며, 양가 할아버지 모두 황제 총독으로 복무하며 제국 행정에 관여했다.아버지 루키우스 율리우스 그라에키누스는 프라이토르를 역임했으며, 아그리콜라가 태어난 해에 로마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그는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도 알려졌다. 그러나 40년 8월에서 41년 1월 사이에, 황제 칼리굴라가 자신의 사촌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기소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그라에키누스가 이를 거부하자 처형당했다.[3]
어머니는 율리아 프로킬라였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녀를 아들에 대한 애정이 깊고 "탁월한 덕을 지닌 여인"이라고 묘사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아그리콜라는 어머니 슬하에서 마실리아(현재 마르세유)에서 교육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철학에 관심을 보였는데, 타키투스는 이를 두고 당시 로마 사회의 일반적인 시각을 반영하여 다소 과도한 관심으로 여기기도 했다.
2. 2. 초기 군 경력
아그리콜라의 공직 경력은 군사 호민관으로서 브리타니아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58년부터 62년까지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총독 휘하에서 복무했다. 소속 부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아마도 ''제2 아우구스타 군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수에토니우스의 참모로 발탁되었으며[4], 61년에 일어난 부디카 여왕이 주도한 대규모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62년, 브리타니아에서의 복무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아그리콜라는 유력 가문 출신의 여성인 도미티아 데키디아나와 결혼했다. 부부 사이에서 첫 아이로 아들이 태어났으나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후 아그리콜라는 로마의 관직 경력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64년에는 재무관(퀘스토르)으로 선출되어 아시아 속주에서 근무했는데, 당시 속주 총독은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였다. 아시아 속주에 머무는 동안 딸 율리아 아그리콜라가 태어났다. 66년에는 평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호민관으로 선출되었고, 68년 6월에는 법무관(프라에토르)이 되었다. 법무관 시절에는 당시 스페인 총독이었던 갈바의 명령을 받아 신전의 재산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2. 3. 로마 정계 진출
58년부터 62년까지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휘하에서 군사 호민관으로 복무하며 브리타니아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아마도 ''제2 아우구스타 군단''에 배속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수에토니우스의 참모로 발탁되어[4] 61년 부디카가 이끈 반란 진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62년 로마로 돌아온 아그리콜라는 귀족 가문의 여성인 도미티아 데키디아나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요절했다.
64년에는 재무관(콰이스토르)으로 임명되어 프로콘술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아래에서 아시아 속주에서 근무했다. 이 시기에 딸 율리아 아그리콜라가 태어났다. 66년에는 평민 호민관으로 선출되었고, 68년 6월에는 법무관(프라이토르)이 되었다. 법무관 시절 갈바 황제의 명으로 신전 보물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3. 네 황제의 해와 베스파시아누스 지지
68년 6월, 황제 네로가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어 자살하자, 네 명의 황제의 해로 알려진 내전 기간이 시작되었다.[4] 당시 프라이토르였던 아그리콜라는 네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갈바의 명령으로 신전의 재산 목록을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69년 초, 갈바는 오토에게 살해당하고 오토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이 혼란기에 아그리콜라의 어머니는 리구리아에 있는 영지에서 오토의 약탈적인 군단병들에게 살해당했으며, 영지 또한 약탈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토 역시 비텔리우스에게 패배한 후 자살했다.
원로원 의원 출신이었지만 능력 부족으로 평가받던 비텔리우스 황제에 대한 민심이 악화되면서, 유대 속주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있던 유능한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그리콜라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제위를 노린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그를 지지했다. 결국 비텔리우스는 살해되었고,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의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을 지지한 아그리콜라에게 보답하는 차원에서, 브리타니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마르쿠스 로시우스 켈리우스의 후임으로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의 사령관(Legatus Legionis|레가투스 레기오니스la)으로 임명했다. 당시 브리타니아는 내전 기간 동안 혼란을 겪었으며, 총독 마르쿠스 베티우스 볼라누스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통치를 하고 있었다. 아그리콜라는 부임 후 군단에 규율을 다시 세우고 로마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4. 브리타니아 원정
아그리콜라는 77년 세 번째로 브리타니아에 부임하여 총독직을 수행했다. 당시 브리타니아는 네 명의 황제의 해 이후 계속된 반란으로 불안정한 상태였고, 전임 총독 마르쿠스 베티우스 볼라티누스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4] 아그리콜라는 부임 직후 웨일스 북부의 오르도비체스족을 격파하고 앵글시 섬을 정복하며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6] 이후 북쪽으로 진군하여 칼레도니아(현재의 스코틀랜드)까지 로마의 지배력을 확장했으며, 84년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에서 칼가쿠스가 이끄는 칼레도니아 부족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3][14][15] 이 전투 이후 함대를 북쪽 해안으로 보내 브리타니아가 섬임을 확인하기도 했다.[20] 그는 군사 활동과 더불어 로마식 도시 건설 장려, 귀족 자제 교육 등 로마화 정책을 추진하여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6] 그의 브리타니아 통치와 군사 활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사위인 역사가 타키투스의 기록을 통해 주로 전해진다.
4. 1. 브리타니아 총독 부임 초기
75년 파트리키 신분으로 승격되어 갈리아 아퀴타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77년 로마로 돌아와 보결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여름 브리타니아 총독으로 부임하였고,[6] 이듬해에는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아그리콜라가 77년 여름 브리타니아에 도착했을 때, 북웨일스의 오르도비체스족이 자신들의 영토에 주둔한 로마 기병대를 거의 전멸시킨 상태였다.[6] 그는 즉시 이들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이후 78년 여름, 아그리콜라는 북웨일스 원정을 계속하여 앵글시 섬(당시 모나 섬)에 상륙했다. 이 섬은 61년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정복을 시도했으나 부디카의 반란으로 인해 철수했던 곳으로, 이후 브리타니아인들이 다시 차지하고 있었다.[6] 아그리콜라는 이 섬을 성공적으로 정복했다.
군사적 성공과 더불어 아그리콜라는 행정에서도 능력을 보였다. 그는 로마식 도시 건설을 장려하고, 브리타니아 귀족 자제들에게 로마식 교육을 제공하는 등 로마화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부패가 심했던 곡물 징수 방식을 개혁하여 속주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기도 했다.[6] 다만 그의 사위인 타키투스는 이러한 로마화 정책이 브리타니아인들을 로마의 지배에 순응시키려는 의도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6]
79년 여름, 아그리콜라는 군대를 북쪽으로 진군시켜 칼레도니아(현재의 스코틀랜드)의 테이 강 어귀(타우스 강)까지 도달했으며, 그곳에 요새를 건설했다.[6] 이 과정에서 큰 저항은 받지 않았다.
4. 2. 칼레도니아 원정과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
78년 여름, 아그리콜라는 로마 기병을 전멸시킨 오르도비케스족을 토벌하기 위해 북웨일스로 원정을 떠나 북상하여 모나 섬에 상륙했다. 이곳은 61년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철수한 이후 브리타니아 현지인들이 다시 점령한 상태였다. 아그리콜라는 이 지역을 로마화하는 정책을 펼쳐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칼레도니아에도 원정하여 로마군을 테이 강 북쪽까지 진군시키고 요새를 구축했다.82년에는 "처음으로 배로 항해하여 로마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민족을 격파했다"고 전해지는데, 정확히 어느 지역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나뉜다. 다수는 클라이드 강 하구로 보지만, 일각에서는 아일랜드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아그리콜라가 아일랜드와 마주한 브리타니아 해안에 요새를 건설했다는 점이다. 타키투스는 아그리콜라가 1개 군단과 현지 보조병만으로도 아일랜드를 정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기록했지만, 구체적인 정복 시도는 확인되지 않았다.
83년, 아그리콜라는 칼레도니아 원정을 위해 다시 군대를 소집했다. 이에 대다수 칼레도니아 부족들이 로마에 저항하며 제9 히스파나 군단의 야영지를 야간에 공격했다. 아그리콜라는 기병을 동원하여 이들을 격퇴하고 로마군을 북쪽으로 더욱 진격시켰다. 이 해에 아그리콜라에게 아들이 태어났으나,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84년 여름, 아그리콜라는 칼가쿠스가 이끄는 칼레도니아 연합군과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에서 맞붙었다.[13] 타키투스는 칼레도니아 군대의 규모를 3만 명 이상으로 추산했다.[14] 아그리콜라는 보조군을 전열에 배치하고 군단병을 예비대로 두었으며, 칼레도니아인들이 긴 칼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근접전을 유도했다.[15] 전투는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고, 칼레도니아 측은 약 1만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로마 측 사상자는 약 360명이었다고 타키투스는 기록했다. 패배에도 불구하고 칼레도니아 군대의 상당수는 타키투스가 "길 없는 황무지"라고 묘사한 고지대로 후퇴하여 숨을 수 있었다.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람피안 산맥의 마운스(Mounth) 지역에서 북해가 보이는 곳으로 추정하며,[16] 특히 로이(Roy),[17] 수렌느(Surenne), 와트(Watt), 호간(Hogan)[18] 등은 켐스톤 언덕(Kempstone Hill), 메그레이 언덕(Megray Hill) 또는 레이디크스(Raedykes) 로마 야영지 인근의 언덕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지역은 고대 통행로인 엘식 마운스(Elsick Mounth)와 가깝다. 그러나 1975년 두르노(Durno)에서 로마 야영지가 발견된 이후, 많은 학자들은 전투가 애버딘셔의 베나키(Bennachie) 근처에서 벌어졌다고 보고 있다.[19]
승리 후 아그리콜라는 칼레도니아 부족들로부터 인질을 받았으며, 군대를 브리타니아 북부 해안까지 진군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인버네스 근처 코더(Cawdor)에서 로마 요새 유적이 발견된 점으로 뒷받침된다.[20] 또한 그는 함대 사령관에게 브리타니아 북부 해안을 항해하도록 지시하여, 브리타니아가 섬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했다.
2019년, 이라야 아라바올라자(Iraia Arabaolaza)가 이끄는 GUARD 고고학팀은 스코틀랜드 에어(Ayr)에서 아그리콜라 군대가 침공 당시 사용했던 서기 1세기의 행군 야영지를 발굴했다. 이곳에서는 점토 돔 형태의 오븐과 서기 77년에서 86년 및 90년 사이의 연소 물질을 포함한 26개의 화덕이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유적지가 에어셔 정복을 위한 로마의 전략적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4. 3. 브리타니아 섬 확인
84년 여름,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에서 칼가쿠스가 이끄는 칼레도니아인들의 대규모 군대를 격파한 아그리콜라는 로마에 대항하던 세력을 대부분 진압했다고 판단했다.[13][14][15] 타키투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칼레도니아 측은 약 10,000명, 로마 측은 360명의 사상자를 냈다.승리 이후 아그리콜라는 칼레도니아 부족들로부터 인질을 확보하고, 군대를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동시에 그는 로마 함대의 지휘관에게 브리타니아 북부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조사할 것을 명령했다.[20] 이 항해를 통해 브리타니아가 실제로는 섬이라는 사실이 로마인들에게 처음으로 확인되었다고 전해진다.
4. 4. 로마화 정책
77년 로마에서 보결 집정관을 지낸 아그리콜라는 이듬해 브리타니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브리타니아는 네 황제의 해 이후 계속되는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전임 총독 마르쿠스 베티우스 볼라티누스는 온건한 성향으로 사태를 효과적으로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78년 여름, 아그리콜라는 부임 직후 자신들의 영토에 주둔한 로마 기병대를 거의 전멸시킨 북웨일스의 오르도비체스족을 즉시 공격하여 격파했다. 이후 앵글시 섬(모나 섬)으로 진격하여 섬 전체를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두었다. 이 섬은 61년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정복을 시도했으나 부디카의 반란으로 인해 철수해야 했던 곳이었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은 브리타니아 안정화와 이후 로마화 정책 추진의 기반이 되었다.
아그리콜라는 군사적 역량뿐만 아니라 행정가로서의 능력도 발휘하여 브리타니아의 로마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현지 공동체들이 로마식 도시를 건설하도록 장려했으며, 브리타니아 귀족의 자제들에게 로마식 교육을 제공했다. 이를 통해 로마 문화를 확산시키고 현지 엘리트들을 로마 체제에 편입시키고자 했다. 또한, 광범위하게 부패했던 곡물 징수 제도를 개혁하여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속주민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아그리콜라가 유능한 행정가라는 평가를 받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아그리콜라의 사위이자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이러한 로마화 정책의 이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로마식 생활 방식과 교육의 확산이 결국 브리타니아인들을 로마의 지배에 순응하게 만들고, 그들의 저항 의지를 약화시켜 사실상 노예 상태로 만들려는 의도였다고 지적했다.[6] 이는 로마 제국의 팽창 정책이 피지배 민족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5. 브리타니아 원정 이후
85년 아그리콜라는 이례적으로 길었던 브리타니아 총독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왔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아그리콜라의 업적이 자신의 게르마니아 전쟁 업적을 위협한다고 여겨 그를 소환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 둘 사이의 갈등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아그리콜라는 로마에서 개선식의 영예를 받고 동상이 세워지는 등 후대를 받았으나, 이후 주요 군사 요직은 얻지 못했다. 그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직 제안을 거절하고 93년에 사망했다.
5. 1. 소환과 죽음
85년 아그리콜라는 이례적으로 길었던 브리타니아 총독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소환되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아그리콜라의 군사적 성공이 게르마니아에서 거둔 자신의 승리보다 더 뛰어나다고 여겨 질투심 때문에 그를 소환했다고 주장했다.[1][2] 하지만 실제로 황제와 아그리콜라 사이에 그러한 갈등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1][3] 아그리콜라는 명령에 따라 눈에 띄지 않게 로마로 돌아와 밤에 황궁에 보고했다.[2]도미티아누스와 아그리콜라의 관계는 복합적이었다. 한편으로 아그리콜라는 실제 개선식을 제외하고 군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 개선 장식과 동상을 수여받는 등[1][2][3] 후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뛰어난 군사적 경험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이후 어떤 주요 군사직이나 행정직도 맡지 못했다.[1][2][3] 그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직을 제안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인지 혹은 타키투스가 주장하듯 도미티아누스의 견제 때문인지[2] 이를 거절했다.[1][2][3]
93년 아그리콜라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에 있는 자신의 가족 영지에서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2][3] 당시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보낸 독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2]
6. 평가와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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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 현대의 재조명
2019년, 이라야 아라바올라자(Iraia Arabaolaza)가 이끄는 GUARD 고고학팀은 스코틀랜드 에어에서 중요한 고고학적 발굴을 진행했다. 이들은 로마 제국의 장군 아그리콜라 휘하 로마 군단이 브리타니아 침공 당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서기 1세기 행군 야영지 유적을 발견했다.아라바올라자에 따르면, 발굴된 화덕들은 30m 간격으로 두 개의 평행선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점토로 만든 돔 형태의 오븐과 함께 서기 77년에서 86년 사이, 그리고 서기 90년경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연소 물질과 숯이 담긴 26개의 화덕 유적이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야영지가 당시 로마군이 에어셔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 선택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은 아그리콜라의 브리타니아 원정 경로와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공하며 그의 업적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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