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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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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시스는 동방 기독교의 핵심적인 구원 사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과 자유 의지의 협력을 통해 신과 연합하여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시작되어,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우리가 신이 되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다"라고 언급하며 테오시스 사상을 강조했다. 막시무스 콘페소르는 인간의 신격화를 희망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확실한 보증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을 통해 제공된다고 기록했다. 테오시스는 단순히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넘어, 인간이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테오시스에 도달하기 위해 실천(praxis), 특히 수도원주의, 마음의 기도, 성례전 참여 등이 강조되며, 서방 교회에서는 테오시스에 대한 입장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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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시스
기본 정보
유형기독교 신학
기원동방 기독교
주요 개념신과의 합일
관련 개념구원론, 성화 (기독교), 신비주의
신학적 의미
정의신의 본성에 참여, 신과 인간의 연합
강조점인간의 변화와 신과의 친교
핵심 요소기도, 금식, 성사 참여, 이타적인 사랑
역사적 맥락
초기 기독교교부들의 가르침에서 기원
동방 교회주요 교리로 발전, 특히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의 영향
서방 교회유사한 개념 존재, 신비주의 전통에서 나타남
주요 인물
동방 교회아타나시오, 바실리오, 그레고리오스 나지안조스,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
서방 교회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실천
방법헤시카즘 (침묵기도)
목표성령과의 일치, 신의 은총 체험
결과인간의 변화 (성화), 신과의 사랑 안에서 성장
기타
관련 용어성화 (기독교), 신비주의, 합일
참고 서적다양한 신학 서적 및 교부들의 저술

2. 역사

신화(神化, 테오시스)는 동방 기독교 구원 사상의 핵심 개념으로, 초대 그리스 교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아시아 출신으로 리옹의 주교였던 이레네오스(130년경-202년)가 처음으로 신화 사상을 본격적으로 논하기 시작했으며, 그 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 등 알렉산드리아 학파 교부들과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이 논의를 이어갔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 체계적인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테오시스"라는 용어 자체도 신화 사상의 핵심어로 자리 잡지 못했다.

모든 존재와 현실 자체는 신의 내재적 에너지, 즉 ''에네르게이아''로 구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에네르게이아는 신의 현실태, 즉 그의 내재성이므로 신의 존재로부터 신의 ''에네르게이아'' 또는 활동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교리는 범신론을 피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신플라톤주의의 용어와 일반적인 개념, 즉 그 본질을 받아들인다(플로티노스 참조).[1]

새로운 신학자 시메온 (949-1022)은 신의 빛을 보는 개인적인 신비 체험을 통해 "테오시스"를 "관상"과 함께 논하는 신화 사상을 확립했다. 14세기의 신학자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1296-1359)는 신의 빛에 참여하는 체험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는 신화로 보았으며, 그 이론적 근거인 신 안에 있는 "본질"과 "작용"의 구별에 관한 동방 고유의 신학을 완성했다.

2. 1. 초대 교회

베드로후서 1장 4절에는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κοινωνοὶ θείας φύσεωςgrc, 코이노노이 테이아스 퓌세오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테오시스 사상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는 직접적인 근거로 여겨진다.[6]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말했는데,[8] 이는 테오시스에 대한 이해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6] 이레네우스 역시 소아시아 출신으로 리옹의 주교로 있으면서 테오시스 사상을 본격적으로 논하기 시작했다.

막시무스 콘페소르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1]

> 인간 본성의 신격화를 희망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확실한 보증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을 통해 제공되는데, 이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신 것과 같은 정도로 인간을 하나님으로 만든다. ...우리 자신 안에 아무것도 세속적인 것을 담지 않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며 신이 되자. 이는 죄 없이 인간이 되신 분(참조 히브리서 4:15)은 인간 본성을 신성한 본성으로 바꾸지 않고 신성화시키시며, 인간을 위해 자신을 낮추신 것과 같은 정도로 인간을 위해 높이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 바울이 "오는 여러 세대에 걸쳐 그의 은혜의 넘치는 풍성함을 나타내려 하심이라"(에베소서 2:7)라고 신비롭게 가르치는 내용이다.

많은 교부들에게 ''테오시스''는 단순히 사람들을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넘어선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인간성과 신성을 결합했기 때문에, 이제 사람은 아담과 이브가 처음 에덴 동산에서 경험했던 것보다 더 가까운 하느님과의 친교를 경험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아담과 이브가 그 당시보다 더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일부 비잔틴 기독교 신학자들은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성육신하셨을 것이라고 말한다.

6세기 초, 위(僞) 디오니시오스는 처음으로 테오시스라는 단어의 정의를 제시했다. 그의 영향으로 테오시스는 신학적 논의의 독립된 주제로서 더욱 조직적으로 고찰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방 정교회의 하나의 기본 원리가 되었다. 7세기의 비잔틴 신학자 성(聖) 막시모스는 이 노선을 더욱 발전시켜, 영성 전체가 신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주장했다. 이 두 사람의 공헌으로 비잔틴의 신화 사상은 정착하게 되었다.

2. 2. 동방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그분은 우리가 신이 되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다"라고 기록했다.[1] 타락하고 죄 많은 인간이 신처럼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육신을 입은 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해졌다.

막시무스 콘페소르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인간 본성의 신격화를 희망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확실한 보증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을 통해 제공되는데, 이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신 것과 같은 정도로 인간을 하나님으로 만든다. ...우리 자신 안에 아무것도 세속적인 것을 담지 않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며 신이 되자. 이는 죄 없이 인간이 되신 분(참조 히브리서 4:15)은 인간 본성을 신성한 본성으로 바꾸지 않고 신성화시키시며, 인간을 위해 자신을 낮추신 것과 같은 정도로 인간을 위해 높이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 바울이 "오는 여러 세대에 걸쳐 그의 은혜의 넘치는 풍성함을 나타내려 하심이라"(에베소서 2:7)라고 신비롭게 가르치는 내용이다.

많은 교부들에게, ''테오시스''는 단순히 사람들을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넘어선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인간성과 신성을 결합했기 때문에, 이제 사람은 아담과 이브가 처음 에덴 동산에서 경험했던 것보다 더 가까운 하느님과의 친교를 경험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아담과 이브가 그 당시보다 더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여자에게서 태어나시고, 죄로 인한 고통도 스스로 겪으셨기 때문에(그러나 스스로 죄가 없으시며, 본질상 변치 않으시는 하느님이시다), 모든 인류는 인간의 완전한 잠재력으로 완전히 회복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두 본성은 두 인격이 아니라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인류와 하느님 사이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원칙적으로 연합이 이루어진다.

이 화해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순응하려는 투쟁을 통해 현실화된다. 그 투쟁, 즉 실천이 없이는 진정한 믿음이 없다. 믿음은 행동으로 이어지고, 행동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자신의 의지, 생각, 행동을 하느님의 뜻, 그분의 생각, 그분의 행동과 일치시켜야 한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참된 모습인 거울로 만들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단순히 유사한 관계를 넘어 진정한 연합을 이루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삶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삶과의 연합이다.

그리스 교부들이 제시한 ''테오시스''의 흔한 비유는 불에 들어가는 금속의 비유이다. 금속은 불의 모든 속성(열, 빛)을 얻는 동시에 그 본질은 금속으로 남는다. 사도 바울의 머리와 몸의 비유를 사용하여, 그리스도가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머리가 있는 곳에 몸도 있다. 머리와 몸 사이에는 분리될 간격이 없다. 만약 분리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몸이 아니고, 더 이상 머리가 아닐 것이다."

신화(神化, 테오시스)는 동방 기독교의 구원 사상의 핵심어이며, 이는 초대 그리스 교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화 사상을 본격적으로 논하기 시작한 것은 소아시아 출신으로 리옹의 주교였던 이레네오스(130년경-202년)이며, 그 후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교부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 등)과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이 논의를 전개했다. 다만, 당시에는 아직 체계적인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테오시스"라는 말도 신화 사상의 핵심어로는 정착되지 않았다.

이 단어의 정의를 처음 제시한 것은 6세기 초의 위(僞) 디오니시오스였다. 그의 영향 아래, 테오시스는 신학적 논의의 독립된 주제로서 더욱 조직적으로 고찰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방 정교회의 하나의 기본 원리가 되었다. 또한 7세기의 비잔틴 신학자 성(聖) 막시모스(580년경-662년)는 이 노선을 더욱 발전시켜, 영성 전체가 신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주장했다. 이 두 사람의 공헌으로 비잔틴의 신화 사상은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새로운 신학자 시메온 (949-1022)은 신의 빛의 관조라는 개인적인 신비 체험을 통해 "테오시스"를 "관상"과 함께 논하는 신화 사상을 확립했다. 또한 14세기의 신학자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1296-1359)는 신의 빛에 참여하는 체험을 이 세상에서의 신화의 선취(先取)로 강조했으며, 그 이론적 근거인 신 안에 있는 "본질"과 "작용"의 구별에 관한 동방 고유의 신학을 완성했다.

3. 신학적 이해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그분은 우리가 신이 되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다"(Αὐτὸς γὰρ ἐνηνθρώπησεν, ἵνα ἡμεῖς θεοποιηθῶμενgrc|아우토스 가르 에난드로페센, 히나 헤메이스 테오포이에토멘}})라고 기록했다.[8] 타락한 인간이 신처럼 거룩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육신을 입은 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해졌다. 막시무스 콘페소르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을 통해 인간이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증을 받았다고 기록했다.[1]

이레네우스는 저서 ''이단 반박''에서 "초월적인 사랑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그분 자신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가 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많은 교부들은 ''테오시스''가 단순히 사람들을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넘어선다고 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인간성과 신성을 결합했기 때문에, 이제 사람은 아담과 이브가 처음 에덴 동산에서 경험했던 것보다 더 가까운 하느님과의 친교를 경험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아담과 이브가 그 당시보다 더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화해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순응하려는 투쟁, 즉 실천을 통해 현실화된다. 자신의 의지, 생각, 행동을 하느님의 뜻과 일치시켜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여러분의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이 바라고 행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라고 하였다. (빌립보서 2:13)

''테오리아''(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조명 또는 직접적인 경험)를 통해, 인간은 완전히 인간이 된다는 것, 즉 하느님의 창조된 형상이라는 것을 알고 경험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 하느님은 인간과 자신을 나누어 지식, 의, 거룩함에 있어서 그들을 하느님과 일치시키려 한다.

정교회에서는 신화(神化)를 사람이 하느님을 닮아가고,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베드로의 둘째 편지 1장 4절의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신약성서에서의 직접적인 근거로 여겨진다.[6]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라는 말로 신화를 집약했다.[6],[8]

3. 1. 삼위일체와 그리스도론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그분은 우리가 신이 되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다"라고 하였다.[8] 이처럼 정통 삼위일체그리스도론 교리는 테오시스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정통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아들 하느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강생)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일반적인 인간이 신성을 획득한 존재가 아니라, 처음부터 하느님으로 여겨진다.[9]

예수는 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인간성 전체를 취하였다.[10]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결합하거나 혼합되지 않고, 하나의 위격 안에서 완전한 하느님이자 완전한 인간으로 존재한다.[11] 이때 예수 그리스도가 취한 인간성은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의도했던 완벽한 모습이며, 신격화(Deification)된 상태였다.[6]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느님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멸의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죽음과 땅으로 돌아가는 인간성을 하느님과의 교제를 통해 승천하는 인간성으로 바꾸어 구원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12] 인간은 신앙생활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감으로써,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신격화한, 더욱 참된 인간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신화(테오시스)라고 부른다.[6][13][14]

3. 2. 하나님의 본성과 에너지

동방 정교회 신학에서는 하느님의 본질(우시아, ousia)과 에너지(에네르게이아, energeia)를 구분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본질에는 참여할 수 없지만, 하느님의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하느님의 에너지는 하느님의 활동이자 현실태이며, 테오시스(신화)는 이러한 하느님의 에너지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막시무스 콘페소르는 "인간 본성의 신격화를 희망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확실한 보증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을 통해 제공되는데, 이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신 것과 같은 정도로 인간을 하나님으로 만든다."라고 기록했다.[1]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그분(하느님)은 우리가 신이 되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다"라고 하였다.

교부들은 테오시스가 단순히 사람들을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넘어,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경험했던 것보다 더 가까운 하느님과의 친교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화해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순응하려는 실천을 통해 현실화된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참된 모습인 거울로 만들어, 하느님 자신의 삶과 연합해야 한다. 그리스 교부들은 불에 들어가는 금속의 비유를 통해 테오시스를 설명하는데, 금속은 불의 속성을 얻지만 본질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처럼, 인간도 하느님의 에너지에 참여하여 신성을 얻지만 본성은 유지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머리가 있는 곳에 몸도 있다. 머리와 몸 사이에는 분리될 간격이 없다."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한다.

정교회에서는 신화(神化)를 사람이 하느님을 닮아가고,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베드로의 둘째 편지 1장 4절의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신약성서에서의 직접적인 근거로 여겨진다.[6]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의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라는 말은 신화에 대한 이해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6],[8]

3. 3. 인간의 역할과 자유의지

테오시스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 의지가 함께 작용하는 협력(synergy)의 과정이다. 막시무스 콘페소르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을 통해 인간이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증을 받았다고 기록했다.[1] 인간은 정화(katharsis), 조명(theoria), 일치(theosis)의 단계를 거쳐 테오시스에 이른다. 이레네우스는 그의 저서 ''이단 반박''에서 "초월적인 사랑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그분 자신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가 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많은 교부들은 테오시스가 단순히 사람들을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넘어, 그리스도가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인간성과 신성을 결합했기 때문에, 이제 사람은 아담과 이브가 처음 에덴 동산에서 경험했던 것보다 더 가까운 하느님과의 친교를 경험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아담과 이브가 그 당시보다 더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화해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순응하려는 투쟁을 통해 현실화된다. 자신의 의지, 생각, 행동을 하느님의 뜻과 일치시켜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여러분의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이 바라고 행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라고 하였다. (빌립보서 2:13)

그리스 교부들이 제시한 테오시스의 흔한 비유는 불에 들어가는 금속의 비유이다. 금속은 불의 모든 속성(열, 빛)을 얻는 동시에 그 본질은 금속으로 남는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머리가 있는 곳에 몸도 있다. 머리와 몸 사이에는 분리될 간격이 없다. 만약 분리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몸이 아니고, 더 이상 머리가 아닐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교회에서는 사람이 하느님을 닮아가고, 하느님의 성품(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을 신화(神化)라고 한다. 베드로의 둘째 편지 1장 4절에 있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는 말이 신약성서에서의 직접적인 근거로 여겨진다.[6]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라는 말로 신화를 집약했다.[8]

4. 실천 (Praxis)

테오시스는 정화(''카타르시스''), 조명(''테오리아''), 성화(''테오시스'')의 세 단계로 이해된다.[2] 테오시스는 전체 과정과 그 목표를 설명하며, 사람이 하느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화를 통해 사람은 ''테오리아''에 이르고, 다음으로 ''테오시스''에 이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신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거룩한 삶은 테오시스의 세 단계를 통해 나타난다. 이는 이 세상에서의 투쟁으로 시작하여 하느님에 대한 지식의 경험 속에서 증가하며, 신자의 부활에서 완성된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형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하느님의 두려움, 죄, 죽음에 대한 승리가 신자에게 영원히 나타난다.[2]

신격화의 "행위자"는 성령이며, 인간은 실천과 기도를 통해 이 변화시키는 은혜를 받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성령과 결합한다.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는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 금욕주의를 통해 성령의 타보르의 빛으로 채워지면서 신격화된다고 가르친다. 신격화는 하느님의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과 진보된 기독교인 사이의 사랑의 협력(시너지)이다.[5]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시너지는 인류가 헤노시스와 같은 초기 이교도 형태의 신격화에서 가르쳐진 것처럼 하느님에게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 자와 창조주 사이의 상호 보완적인 본성에서 통일성을 표현한다. 성령을 얻는 것이 핵심이며, 이는 자기 실현으로 이어진다.[6]

4. 1. 수도 생활과 헤시카즘

테오시스로 가는 여정에는 여러 형태의 실천이 포함되며, 가장 분명한 것은 수도원주의와 성직이다.[2] 수도원 전통에서 헤시카즘 실천은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2] 성찬례를 포함한 성례전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교회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2] 또한,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17에서 권면하는 바와 같이 "마음의 기도"를 함양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다.[2] 이 끊임없는 마음의 기도는 교부들의 저술, 특히 ''필로칼리아''에 수집된 저술에서 지배적인 주제이다.[2] 흠 없는 기독교적 삶 없이는, 충실하고 따뜻하며 궁극적으로는 침묵하는 지속적인 마음의 기도로 정점을 찍지 않고서는 누구도 테오시스에 도달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2]

4. 2. 성례전과 교회 생활

많은 교부들은 ''테오시스''가 단순히 사람들을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넘어선다고 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인간성과 신성을 결합했기 때문에, 이제 사람은 아담과 이브가 처음 에덴 동산에서 경험했던 것보다 더 가까운 하느님과의 친교를 경험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아담과 이브가 그 당시보다 더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1]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여자에게서 태어나시고, 죄로 인한 고통도 스스로 겪으셨지만(스스로 죄가 없으시며, 본질상 변치 않으시는 하느님이시다), 모든 인류는 인간의 완전한 잠재력으로 완전히 회복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두 본성은 두 인격이 아니라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인류와 하느님 사이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원칙적으로 연합이 이루어진다. 거룩하신 하느님과 죄 많은 인류는 죄 없으신 한 분의 인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원칙적으로 화해된다. (요한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 참조).[2]

이 화해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순응하려는 투쟁을 통해 현실화된다. 그 투쟁, 즉 실천이 없이는 진정한 믿음이 없다. 믿음은 행동으로 이어지고, 행동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자신의 의지, 생각, 행동을 하느님의 뜻, 그분의 생각, 그분의 행동과 일치시켜야 한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참된 모습인 거울로 만들어야 한다. 하느님과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단순히 유사한 관계를 넘어 진정한 연합을 이루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삶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삶과의 연합이다.

그리스 교부들이 제시한 ''테오시스''의 흔한 비유는 불에 들어가는 금속의 비유이다. 금속은 불의 모든 속성(열, 빛)을 얻는 동시에 그 본질은 금속으로 남는다.[3] 사도 바울의 머리와 몸의 비유를 사용하여, 그리스도가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머리가 있는 곳에 몸도 있다. 머리와 몸 사이에는 분리될 간격이 없다. 만약 분리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몸이 아니고, 더 이상 머리가 아닐 것이다."라고 말한다.[4]

4. 3. 마음의 기도와 끊임없는 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예수 기도는 마음의 기도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끊임없는 기도는 테살로니카전서 5장 17절("쉬지 말고 기도하라")에 근거한 실천이다.[2] 필로칼리아에 수집된 교부들의 저술에서 끊임없는 마음의 기도는 지배적인 주제이다.[2]

5. 서방 교회의 태도

서방 교회는 전통적으로 테오시스(신화)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비잔틴 신학에서 말하는 신화 방식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최근 신학적 논의에서는 이러한 입장이 바뀌어, 여러 서방 신학자들이 테오시스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1]

동방 정교회와 비잔틴 가톨릭 교회에서는 헤시카즘이라는 금욕적 기도 수행을 통해 인간의 깨달음이나 신격화(테오시스)를 추구한다.[2] 헤시카즘은 단순히 자연적인 삶에 머무르지 않고 신격화를 목표로 한다.[5]

과거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헤시카즘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그레고리 팔라마스의 가르침은 서방에서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6] 바르라암의 불신론적인 태도가 서방 신학자들 사이에서 우세했다. 1910년 아드리안 포르테스큐는 가톨릭 백과사전에서 헤시카즘을 다루며, 그리스어 단어 ἥσυχος (헤시코스)와 ἡσυχαστής (헤시카스테스)를 "고요한"과 "고요주의자"로 번역했다.[7] 같은 시기 에드워드 페이스는 고요주의에 관한 논문에서, 고요주의는 엄밀히 말하면 미겔 데 몰리노스가 제시한 17세기의 교리이지만, 이 용어가 인도 종교와 에드워드 페이스가 "헤시카즘의 변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괄하기 위해 더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고 언급하며, 헤시카즘에 대한 포르테스큐와 같은 편견을 드러냈다.[8] 또한 시메옹 바일헤는 팔라마스의 가르침의 일부를 "괴물 같은 오류", "이단"이라고 묘사하고 다신론의 부활이라고 칭했으며, 완벽한 관상에 도달하기 위한 헤시카스트적 방법을 "단순한 형태의 자기 암시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9] 동방과 중세 서방에는 "자연 관상"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이 존재했다.[10]

20세기에는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의 팔라마스에 대한 태도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그의 "재활"로 인해 서방 교회의 많은 이들이 그를 성인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아직 시성되지는 않았다.[11] 일부 서구 학자들은 팔라마스의 가르침과 로마 가톨릭 사상 사이에 갈등이 없다고 주장한다.[12] G. 필립스에 따르면, 본질-에너지 구분은 로마 가톨릭 교도권과 양립할 수 있는 "완벽하게 허용 가능한 신학적 다원주의의 전형적인 예"이다.[12] 제프리 D. 핀치는 "동서 화해의 미래는 신스콜라주의와 신팔라미즘의 현대 논쟁을 극복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13] 일부 서구 신학자들은 팔라마스의 신학을 자신의 사상에 통합하기도 했다.[1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 신자들이 "동방 교회의 존경스럽고 고대적인 전통"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 전통의 보물 중 특히 신화에 대한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가르침을 언급하며, 이는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도록 인간에게로 오셨다"는 성 이레네우스의 말로 요약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신화 신학은 비잔틴 기독교 사상에 특히 소중한 성과로 남아 있다.[3]

일부 루터교는 테오시스가 루터교 신학과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4]

6. 한국적 맥락에서의 테오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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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 타 종교와의 대화

테오시스는 테오리아(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조명 또는 직접적인 경험)를 통해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본성을 회복하고, 나아가 하느님과의 더 깊은 친교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레네우스는 ''이단 반박''에서 "초월적인 사랑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그분 자신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가 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많은 교부들은 테오시스가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전 상태로의 회복을 넘어,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경험했던 것보다 더 가까운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능하게 한다고 가르친다. 일부 비잔틴 기독교 신학자들은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두 본성은 하나로 연합되므로,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연합을 이룰 수 있다. 이러한 화해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순응하려는 실천, 즉 실천을 통해 현실화된다. 사도 바울은 머리와 몸의 비유를 사용하여, 그리스도가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한다고 설명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머리가 있는 곳에 몸도 있다. 머리와 몸 사이에는 분리될 간격이 없다. 만약 분리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몸이 아니고, 더 이상 머리가 아닐 것이다."라고 말한다.[3]

6. 2. 사회 참여와 실천

테오시스는 단순한 내면적 변화를 넘어, 사회 참여와 정의 실현을 위한 실천으로 이어진다. 많은 교부들은 테오시스가 사람들을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넘어선다고 보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성과 신성을 결합했기 때문에, 이제 사람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경험했던 것보다 더 가까운 하느님과의 친교를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1]

이러한 화해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순응하려는 투쟁, 즉 실천을 통해 현실화된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며,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자신의 의지, 생각, 행동을 하느님의 뜻과 일치시켜야 하며, 기독교인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참된 모습인 거울로 만들어야 한다. 하느님과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연합을 이루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삶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삶과의 연합이다.[2]

그리스 교부들이 제시한 테오시스의 비유는 불에 들어가는 금속과 같다. 금속은 불의 모든 속성(열, 빛)을 얻지만, 그 본질은 금속으로 남는다.[3] 사도 바울의 머리와 몸의 비유처럼, 그리스도가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머리가 있는 곳에 몸도 있다. 머리와 몸 사이에는 분리될 간격이 없다. 만약 분리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몸이 아니고, 더 이상 머리가 아닐 것이다."라고 말한다.[4]

참조

[1] 문서 PHILOKALIA
[2] 웹사이트 Unceasing Prayer http://www.orthodoxy[...] 2017-01-10
[3] 웹사이트 Pope John Paul II, Orientale Lumen https://w2.vatican.v[...] vatican.va 2018-01-16
[4] 서적 Christification: A Lutheran Approach to Theosis https://books.google[...] Wipf and Stock Publishers 2014-07-18
[5] 문서 用語出典:世界観(日本正教会公式サイト)、正教の教義と特色(長司祭長屋房夫による)、正教会用語集(日本正教会公式サイト)、正教会Q&A(北関東正教会のページ:司祭 桝田尚による)、その他の慣習(日本正教会公式サイト)、十字架挙栄祭の聖像(名古屋正教会:司祭 松島雄一による)、正教のカテヒジス(長司祭 長屋房夫による)、ラドネヂの奇蹟者セルギイの祭日(祈祷書 (正教会)|祈祷書)
[6] 서적 The Blackwell Dictionary of Eastern Christianity Wiley-Blackwell 2001-12-05
[7] 서적 正教会の手引 日本ハリストス正教会全国宣教委員会 2004-11
[8] 웹사이트 世界観-人間 http://www.orthodoxj[...] 日本正教会公式サイト
[9] 서적 信仰の機密 東京復活大聖堂教会(ニコライ堂) 2004
[10] 서적 信仰の機密
[11] 서적 信仰の機密
[12] 서적 ギリシャ正教 講談社学術文庫 1980
[13] 웹사이트 世界観-人間 http://www.orthodoxj[...] 日本正教会公式サイト
[14] 웹사이트 正教のカテヒジス http://www.geocities[...]
[15] 문서 ギリシア教父における神化思想 http://jsmp.jpn.org/[...] 2018-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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