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는 4세기의 기독교 신학자이자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였다. 그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참여하여 아리우스 논쟁을 겪었으며, 328년 대주교가 된 후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평생을 그와 싸웠다. 콘스탄티누스 1세와 콘스탄티우스 2세 등 여러 황제들의 박해로 다섯 번이나 추방당했지만,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지지와 교황의 도움으로 복권되기도 했다. 그는 오늘날 신약성서로 사용되는 27권의 목록을 처음으로 제시했으며, 그의 주장은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받아들여져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확립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373년 사망 - 시리아의 에프렘
시리아의 에프렘은 4세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활동하며 아람어로 찬송가와 성경 주석을 저술하여 시리아 기독교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기독교 신학자, 시인, 작가이다. - 373년 사망 - 환온
환온은 동진 시대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군사적 능력으로 공을 세우고 북벌을 추진했으나, 권력욕을 드러내 찬탈을 시도했으며, 사후 아들에 의해 황제로 추존되었다. - 4세기 이집트 사람 -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는 막센티우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한 기독교 성녀로, 황제의 유혹을 거절하고 이교도 학자들과의 논쟁에서 승리했으나 순교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역사적 실존 여부는 논란이 있지만 중세 이후 널리 숭배받으며 학문과 순교의 상징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 4세기 이집트 사람 - 파울루스 알렉산드리누스
파울루스 알렉산드리누스는 로마 제국 후기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점성술사로, 헬레니즘 점성술의 주요 개념을 다룬 《입문》을 저술하여 후대 점성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 4세기 대주교 -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4세기 카파도키아 출신의 기독교 신학자, 주교, 시인으로, 대 바실리오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와 함께 카파도키아 교부 중 한 명이며 삼위일체 교리 발전에 기여,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를 역임했고, 동방 정교회에서 '신학자'로 존경받는다. - 4세기 대주교 - 마르티누스 투로넨시스
마르티누스 투로넨시스는 4세기 로마 제국 시대의 기독교 성직자이자 투르의 주교로, 군 복무 거부, 리구제 수도원 설립, 사후 유럽 전역에서 숭배받은 인물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성 아타나시오스 |
출생일 | 293년 |
사망일 | 373년 3월 2일 |
축일 | 5월 15일 (콥트 교회) |
축일 | 5월 2일 (서방 교회) |
축일 | 1월 18일 (동방 교회) |
교파 | 보편교회 |
출생지 | 로마 제국 알렉산드리아 |
사망지 | 로마 제국 알렉산드리아 |
직업 | 주교, 교부 |
수호 | 주교, 증거자 |
2. 행적
아타나시오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철학과 신학 교육을 받고, 325년 부제 자격으로 알렉산드로스 주교를 수행,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 논쟁을 목격했다.[1] 328년 알렉산드로스 대주교 사후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직을 계승했다.[1]
대주교가 된 후 이집트와 리비아 지역을 방문, 나일강 유역 콥트 교회 수도사들과 파코미우스와 인연을 맺었다.[1] 그는 멜레티우스와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공격하며 평생을 투쟁했고, 이 때문에 다섯 번이나 주교직을 박탈당하고 망명했다.[1]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주의에 우호적이었기에 아타나시오스를 박해하였다.[1] 335년 아리우스파는 아타나시오스의 총대주교직 박탈을 결의했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를 티레로 추방했다.[1] 337년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복권되었다.[1] 339년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를 비롯한 아리우스파는 안티오키아 교회회의에서 아타나시오스를 해임했다. 로마로 간 아타나시오스는 교황 율리오 1세의 지지를 받았다.[1] 343년 사르디카 교회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유일한 주교로 선언되었고, 345년 황제 콘스탄스의 비호 아래 복권되었다.[1]
350년 콘스탄스가 죽자, 상황은 다시 아리우스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1] 356년 군대가 성 테오나시오 교회를 급습, 아타나시오스는 탈출하여 수도사에게 피신했다.[1] 율리아누스 황제 즉위 후 도피가 끝났다.[1] 율리아누스는 362년 아타나시오스를 다시 추방하였다.[1] 발렌스 황제 즉위 후 복권되었으나, 365년 다시 추방되었다.[1]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봉기로 366년 복권되었다.[1] 373년 5월 2일 사망할 때까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지냈다.[1]
아타나시오스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27권 신약성서 체제 목록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367년 부활절에 교구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외경을 언급하며, 정경(the canon)에 들어갈 책들의 목록 제시의 중요성을 언급했다.[1] 그가 만든 27권 목록은 383년 교황 다마소 1세 주도의 로마 공의회에서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인용되었고,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받아들여졌다.[1]
2. 1.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아타나시오스는 어린 시절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철학과 신학 교육을 받으며 보냈고, 325년 부제 자격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스를 수행하여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리우스 논쟁의 현장을 목격했다.[1] 328년 알렉산드로스 대주교가 사망하자, 약간의 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30세 정도의 젊은 나이에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직을 계승했다.[1]대주교가 된 후 처음 몇 년 동안은 이집트와 리비아의 모든 지역을 포함한 자신의 광범위한 대주교구를 직접 방문하는 데 전념했다.[1] 이 기간 동안 나일강 유역의 콥트 교회 수도사들과 그들의 지도자인 파코미우스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1] 그 때부터 리코포리스의 주교인 멜레티우스와 아리우스주의의 이론을 이단으로 공격하며 평생을 그 투쟁으로 보냈다.[1] 이 때문에 아타나시오스는 그의 인생에서 다섯 번이나 주교직을 박탈당하고 망명자로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1]
2. 2. 박해와 5번의 추방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그의 뒤를 이은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는 대체로 아리우스주의에 우호적이었고, 아리우스의 가장 큰 적인 아타나시오스를 박해하였다.[1]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는 아리우스주의가 더 우세했기 때문이다.[1]니케아 공의회 이후, 아리우스파는 335년 아타나시오스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직 박탈을 결의했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를 티레(오늘날의 레바논)로 추방시켰다.[1] 이것이 아타나시오스가 다섯 번에 걸쳐 주교직에서 박탈당하고 추방당하는 역사의 시작이었다.[1]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자, 그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아타나시오스는 다시 복권되었다.[1]
339년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를 비롯한 아리우스파는 안티오키아에서 교회회의를 열고 알렉산드리아 주교 자리에 그레고리우스라는 인물을 임명하고 아타나시오스를 해임하고 추방했다.[1] 아타나시오스는 로마로 가서 교황 율리오 1세의 열렬한 지지와 도움을 받았고, 343년 이탈리아반도의 주교 50명이 모인 사르디카 교회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그를 알렉산드리아의 유일한 주교로 선언하였다.[1] 또한 당시 이탈리아를 담당하던 황제 콘스탄스를 직접 만나 그의 신임을 얻고, 345년 그레고리우스가 죽자 황제 콘스탄스의 비호 아래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복권되었다.[1] 이때 콘스탄스는 형인 콘스탄티우스 2세와의 일전을 불사하며 아타나시오스를 옹호하였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굴욕적으로 아타나시오스를 복귀시킬 수밖에 없었다.[1] 콘스탄티우스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아타나시오스는 이집트의 영웅으로 위대한 개선장군처럼 알렉산드리아로 복귀한다.[1]
350년 아타나시오스의 옹호자였던 황제 콘스탄스가 죽자, 상황은 다시 아리우스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1] 콘스탄티우스와 아리우스파는 다시 아타나시오스를 제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이집트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그를 숙청하기는 쉽지 않았다.[1] 급기야 356년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아타나시오스가 미사를 집전하고 있던 성 테오나시오 교회를 급습하고 수많은 신도들을 죽이는 유혈사태까지 발생했다.[1] 아타나시오스는 거의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이집트의 사막에 있는 수도사에게로 피신했다.[1] 약 6년간 계속된 도피는 박해자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고 율리아누스 황제가 즉위하자 끝났다.[1]
율리아누스의 전통 로마 종교에 대한 옹호에 맞서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긴급 회의를 열어 기독교 교리의 오해를 해소하고 일치점을 찾으려 하였다.[1] 그러나 기독교의 일치를 원치 않았던 율리아누스 황제는 362년에 아타나시오스를 다시 추방하였다.[1] 그 후 율리아누스가 사산조 페르시아와 싸우다가 전사하고 발렌스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자, 아타나시오스는 다시 복권되었다.[1] 하지만 아리우스파였던 발렌스 황제는 365년 아타나시오스를 다시 추방하였다.[1]
이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키자, 황제는 결국 366년에 아타나시오스를 다시 복권시켰다.[1] 약 4개월 만에 복권된 것이다.[1] 그 후 아타나시오스는 373년 5월 2일까지 78세의 고령으로 죽기까지 평온하게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지냈다.[1]
2. 3. 27권 신약성서의 확립
아타나시오스는 오늘날 거의 모든 기독교에서 신약성서로 사용하는 27권 신약성서 체제의 목록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367년 부활절, 그는 모든 박해와 망명에서 벗어나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주교직에 복귀한 직후, 교구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목록을 처음 발표하였다. 당시에는 신약성서로 정해진 성서가 없었고, 수많은 복음서와 바울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편지가 교우들에게 성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1]아타나시오스는 367년 부활절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1]
::''…많은 사람들이 외경적이라고 규정 지을 수 있는 책들을 가지고 와서 근사하게 장난질을 쳐서 하느님의 영감을 받는 성서와 혼동시키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들에게 하느님의 것으로 고백되고 우리들에게 전승되어 온 정경(the canon)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책들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그가 만든 27권 목록은 383년 교황 다마소 1세의 주도로 열린 로마 공의회에서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인용되었고,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받아들여져 공포되었다. 이후로도 아타나시오스 주교가 주장한 신약성서 27권의 목록은 그의 주장대로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확립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