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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말레이국민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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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은 1946년 창당된 말레이시아의 주요 정당으로, 말레이시아 독립 전후 시기부터 오랫동안 집권 여당의 역할을 해왔다. UMNO는 말레이인과 무슬림의 권익을 대변하며, 헌법 153조에 명시된 말레이인 특권 유지를 핵심 이념으로 삼고 있다. 1950년대 툰쿠 압둘 라만 시대에 말레이시아 독립을 주도했고, 이후 국민전선(BN)을 결성하여 다양한 정당들과 연합하여 집권했다. 마하티르 모하마드,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 나집 라작 시대를 거치며 2018년 총선에서 야당 연합에 패배, 정권 교체를 겪었다. UMNO는 독재, 인종차별, 부정선거 등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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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말레이국민조직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정당 이름통일말레이국민조직
로마자 표기Pertubuhan Kebangsaan Melayu Bersatu
영어 이름United Malays National Organisation
약칭UMNO
통일말레이국민조직 로고
당 로고
통일말레이국민조직 로고
당 로고
통일말레이국민조직 당기
당기
당 색상빨간색
흰색
창당일1946년 5월 11일
본부말레이시아
슬로건'단결, 충성, 봉사' (United, Loyal, In Service)
'베르사투, 베르세티아, 베르크히마트' (Bersatu, Bersetia, Berkhidmat)
당가'베르사투, 베르세티아, 베르크히마트' (Bersatu, Bersetia, Berkhidmat)
통일말레이국민조직 상징
상징
통일말레이국민조직 상징
상징
웹사이트UMNO 말레이시아 공식 웹사이트
UMNO 말레이시아 공식 뉴스 웹사이트
회원 수 (2018년 7월 기준)약 400만 명
정치 성향 및 이념
정치적 위치우익
이념사회보수주의
주요 인물
총재아흐마드 자히드 하미디 (Ahmad Zahid Hamidi)
의회 의석 (2023년 기준)
대의원37석/222석
원로원19석/70석
기타
소속 정당 연합바리산 나시오날 (Barisan Nasional)

2. 역사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은 1987년 헌법 위기 때 위헌정당으로 해산된 적이 있다.[1] 그 후 'UMNO Baru'(신 UMNO)를 창당했으며, 'Baru'를 제거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1]

UMNO는 독재, 인종차별, 부정선거 등으로 비판받고 있다.[1]

2. 1. 독립 전야 (1945년 ~ 1957년)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현재 말레이시아라 불리는 지역(말라야)은 다시 영국식민지(말라야 연합)가 되었다. 그러나 말라야 연합은 많은 반대에 직면했다. 1946년 5월 11일, 조호르바루에서 다토 온을 당수로 하여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이 창당되었다. UMNO는 말라야 연합에 강경하게 반대했지만, 이 단계에서는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1948년, 말라야 연합이 말라야 연방으로 이행되자, UMNO는 정권 탈취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1951년, 다토 온이 말라야 독립당을 결성하자, 툰쿠 압둘 라만이 UMNO 당수가 되었다. 같은 해, 페낭 조지타운 의회 선거에서 급진 세력(중국 공산 혁명의 영향이 큰)이 승리하자, 말레이시아 화교협회(MCA)와 제휴를 맺고 쿠알라룸푸르 의회 선거에서도 같은 상황을 피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UMNO-MCA 연합은 12석 중 9석을 획득하여 말라야 독립당을 해체로 몰아넣었다. 또한 각지에서 실시된 의회 선거에서도 이 연합은 성공을 거두었다.

1954년 주 단위 선거에서 연합은 268석 중 226석을 획득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툰쿠 압둘 라만은 영국에 독립을 위한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영국은 그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1955년 말레이시아 최초의 총선거(1955년 총선거)에서 인도계 세력을 대표하는 말레이시아 인도인 의회(MIC)와 연합하여 현재의 국민전선 정권의 원형이 완성되었다. 이 선거에서 1959년까지의 말라야 연방 독립, 모든 어린이에 대한 초등 교육 실시, 말레이인 특권 보호 유지를 공약으로 내걸고, UMNO 단독으로 34석, 연합 전체로 52석 중 51석을 획득했다(나머지 1석은 전말레이시아 이슬람당, PAS). 그 결과, 툰쿠 압둘 라만이 말라야 연방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1956년, 툰쿠 압둘 라만은 다시 영국에 독립을 위한 사절단을 파견했다. 1957년 8월 31일, 독립을 위해 준비된 말라야 연방 헌법 시행과 함께 말라야 연방의 독립을 쟁취했다. 연합 정부는 말라야에 있는 영국 및 기타 외국 자본의 자산 몰수를 하지 않고, 영국군의 말라야 주둔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윌리엄 레이드 경이 이끄는 레이드 위원회가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연방주의·입헌군주제와 같은 개념이 헌법에 도입된 동시에 말레이인 특권의 인정(헌법 3조, 152조, 153조에 규정됨)과 이슬람이 국교임이 명기되었다. 말레이어가 국어가 되었지만, 중국어·타밀어 교육도 실시하는 것이 규정되었다.

1957년 8월 31일, 툰쿠 압둘 라만에 의해 말라야 연방의 독립 선언이 이루어졌다. --

2. 2. 툰쿠 압둘 라만 시대 (1957년 ~ 1970년)

1959년 총선에서 UMNO는 내부 갈등에도 불구하고 104석 중 52석을 획득하여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1] 연합 전체는 MCA 19석, MIC 3석을 포함하여 총 74석을 차지했다.[1] 이는 정부 개편과 헌법 개정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의회 3분의 2 이상의 의석이었지만, MCA가 40석을 요구하며 일부가 연합을 탈퇴하는 등 내부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

1961년, 툰쿠 압둘 라만은 말레이시아 계획을 추진하여 말레이아 연방싱가포르, 사바, 사라왁 등 영국의 식민지를 편입하려 했다.[2] 이는 싱가포르의 공산주의 활동을 단속하고, 화교 인구 비율을 조절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2] 싱가포르가 단독으로 독립할 경우 말레이아의 군주제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했다.[2]

많은 협상 끝에 1963년 7월, 브루나이를 제외한 주들이 참여하여 말레이시아가 성립되었다.[3] 그러나 필리핀인도네시아는 이에 반발했다.[4] 인도네시아는 신식민지주의라고 비난했고, 필리핀은 사바주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했다.[4] 유엔의 조정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는 말레이시아와의 대결 자세를 강화하고 동말레이시아에 군대를 파병하기도 했다.[4]

1963년 싱가포르 주 의회 선거에서 연합은 싱가포르 연합을 통해 리콴유PAP과 대립했다.[5] UMNO는 싱가포르 내 말레이인들이 PAP 아래에서 2류 시민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선거 운동을 펼쳤지만, UMNO의 지원을 받은 후보들은 모두 패배했다.[5]

1964년, 싱가포르에서 민족 폭동이 발생했다.[6] 이는 UMNO와 PAP 간 갈등의 결과였다.[6] 리콴유는 부미푸트라 특권에 반대하며 말레이시아의 일체성에 도전했고, 툰쿠 압둘 라만은 싱가포르의 탈퇴를 결정했다.[7]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서 탈퇴하여 독립했다.[8]

싱가포르 탈퇴 이후, UMNO는 말레이계 특권 정책 유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말레이어 국어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민주행동당(DAP)은 부미푸트라 특권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969년 총선 직후, 5·13 사건이 발생하여 말레이시아 역사상 최악의 민족 갈등을 겪었다. 국왕은 의회 개회를 연기했고, 툰쿠 압둘 라만은 총리직을 유지했으나 압둘 라작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마하티르 등은 툰쿠 압둘 라만을 비판하며 UMNO에서 축출되었다.

1970년, 연기되었던 동말레이시아 선거가 실시되어 연립 여당은 다시 의회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했다. 같은 해 8월 31일, 툰쿠 압둘 라만의 정계 은퇴와 압둘 라작에게의 권력 이양이 발표되었다.

2. 3. 압둘 라작 시대 (1970년 ~ 1976년)

압둘 라작은 1970년에 툰쿠 압둘 라만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고,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의 지도력을 강화했다.[1] 1971년에는 신경제 계획(New Economic Policy)을 선포하여 말레이계의 경제적 점유율을 높이고 빈곤 퇴치를 목표로 했다.[1] 이 계획의 구체적인 수치 목표는 1990년까지 말레이계의 경제적 점유율을 30%까지 높이는 것이었다.[1]

압둘 라작은 국민전선(BN)으로 여러 야당을 끌어들여 정치적 안정을 추구했다.[1] 말레이시아 인민운동당(그라칸), People's Progressive Party (Malaysia)|인민진보당영어(PPP), 전말레이시아 이슬람당(PAS), 동말레이시아의 여러 정당에 연합 참여를 촉구하여 1974년에 국민전선이 공식 출범했다.[1]

1974년 총선에서 국민전선은 154석 중 135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두었으나, 선거구 분할이 민주행동당(DAP)에 불리하게 조작된 게리맨더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 DAP가 도시 거주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1]

2. 4. 마하티르 시대 (1981년 ~ 2003년)

46년 정신당이 UMNO(말레이시아 통합국민기구)에서 분열된 원인은 마하티르의 독단적인 정책 운영에 대한 당내 비판 때문이다. 마하티르는 1982년 총선에서 의회 내 지반을 확고히 했다(국민전선 122석, PAS 5석, DAP 8석, 기타/무소속 9석). 그 결과 술탄의 권한 약화, 정부계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처리를 강행하게 되었는데, 반대파는 이러한 정책 운영을 독단적이라고 비판했다.[1]

말레이시아 언론은 마하티르가 속한 진영을 “팀 A”, 마하티르를 비판하는 진영(재무장관 라자레이 함자, 부총리 무사 히탐 포함)을 “팀 B”라고 불렀다. “팀 B”의 마하티르 비판의 핵심은 신경제 계획이 가난한 말레이시아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1]

마하티르는 “팀 B”의 비판이 근거 없으며, 말레이시아인들의 단결을 해치고, 욕망에만 동기 부여된 것이라고 반박했다.[1]

1987년 4월 당대회에서는 마하티르와 라자레이가 당수 자리를 놓고 경쟁하여 761대 718의 근소한 차이로 마하티르의 재선이 결정되었다. 마하티르는 반대파를 중요 직책에서 배제했다.[1]

결과적으로 라자레이, 무사 히탐, 압둘라 아흐마드 바다위 등 마하티르에 반대하는 인물들이 UMNO를 탈퇴하고 46년 정신당을 결성했다.[1]

마하티르의 두 번째 정치 위기는 1997년 발생한 아시아 외환 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 운영을 둘러싸고 당시 부총리 겸 재무장관이었던 안와르 이브라힘과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1]

아시아 외환 위기의 원인은 해외로부터 대량의 자금이 유입되어 경제가 활성화된 데 있다. 이에 대해서는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유사한 경제 운영을 하고 있었고, 아시아 신흥 공업국(NIEs)(한국, 싱가포르, 홍콩, 타이완)에 이은 지역으로서 동남아시아가 고도 경제 성장을 달성한 적도 있으므로, 해외 자금 유입 정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러나 과제로 부각된 점은 충분한 투자처 확보가 미흡했던 점(결과적으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이전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투자 자금은 부동산이나 관광·리조트업에 투자되었다)과 외화 보유액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던 것이다.[1]

말레이시아에서 아시아 외환 위기의 결과는 1998년 -7%의 경제 성장이라는 수치로 나타났지만, 마하티르가 채택한 정책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독특했다. 白石隆의 지적에 따르면, 말레이시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경제 성장률이 3% 이하로 떨어지면 인종 간 긴장감이 고조된다. 삶이 실제로 나아지지 않고, 마음에 드는 직업이 없다는 이유로 화교와 말레이인의 경제적 격차가 강하게 의식된다[1]” 마하티르는 5·13 사건 이후 최대의 말레이시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태국, 한국, 인도네시아가 고정 환율제를 포기한 반면, 말레이시아가 채택한 정책은 1998년 예산을 전년 대비 18% 감축하는 긴축 예산 편성, 투자 자금의 해외송금 금지(외화 유출을 막기 위한 정책), 그리고 1998년 9월 1일에 실시된 1US달러=3.8링깃 고정 환율제로의 이행이었다. IMF가 태국, 한국, 인도네시아에서 채택한 정책이 모두 실패한 가운데, 말레이시아만이 “세계적인 통화 혼란으로부터의 일시적인 안전지대”에 있었던 것이다.[2]

1999년 가을에는 투자 자금의 해외송금 금지가 무조건 해제되는 등 마하티르의 경제 운영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게 되지만, IMF식 경제 정책을 말레이시아에도 도입하려 했던 안와르 이브라힘과의 대립은 명확해졌고, 1998년 4월에는 안와르의 부총리 겸 재무장관 해임, 9월의 이슬람법에 따른 체포(부정부패 및 동성애 혐의)를 통해 반대파를 UMNO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1]

마하티르는 자신의 후계자로 안와르가 아닌 라자레이와 마하티르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 부총리 아브둘라 아흐마드 바다위를 지명함으로써 자신의 임기를 마무리했다.[1]

2. 5.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 시대 (2003년 ~ 2009년)

2003년 10월 31일,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가 말레이시아의 총리가 되었다. 마하티르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압둘라는 국민들에게 호감을 받았고, 2004년 3월 21일 총선에서 국민전선(BN)은 90%에 달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야당과 무소속은 분열로 인해 고작 21석에 그쳤다.

그러나 안와르 이브라힘에게 걸렸던 동성애 혐의가 무죄로 판결되면서, 국민전선의 권위주의적 체제에 대한 비판을 계기로 부정부패와 연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다시 강해졌다.[1] 압둘라 또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1] 여기에 2020년까지 선진국 진입을 목표로 하는 "와와산 2020" 계획이 현실적인 목표가 되면서, 국민들 사이, 특히 말레이계와 비말레이계 사이의 격차가 더욱 의식되기 시작했다.[1]

2008년 3월 8일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이러한 비판이 국민전선과 압둘라에게 집중되었다.[2] 또한 안와르는 야당 간의 선거 협력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2] 그 결과, 여당은 5.13사건의 발단이 된 1969년 총선보다도 의석수 비율이 낮았고, 안정적 다수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하원 의석 3분의 2를 잃는 참패를 당했다 (국민전선 총 140석, 그중 UMNO 79석).[2]

2. 6. 나집 라작 시대와 야당으로의 전락 (2009년 ~ 2018년)

2009년 4월 3일, 압둘라 아흐마드 바다위로부터 권력을 이어받은 2대 총리 라작 후세인의 아들 나집 라작 총리는 쿠알라룸푸르를 "이슬람 금융의 런던"으로 만들기 위해 외국계 기업을 유치하는 국제 금융 지구인 "툰 라작 익스체인지(TX)" 건설에 착수했으며(2018년 준공 예정), 최우선 사업으로 국영 투자 회사인 1말레이시아 개발 유한회사(1MDB)를 설립했다. 그러나 2014년 4200억말레이시아 링깃(약 1조 4000억 엔)의 막대한 부채를 떠안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고, 나집 일가와 화교계 거부 조 로(Jho Low)의 부정 의혹도 제기되었다.[3] 2015년 7월에는 1MDB(재무부 관할로 재무장관을 나집이 겸임)에서 나집의 개인 은행 계좌로 약 7억달러(약 850억 엔)의 부정 자금이 유입되었다는 보도가 나왔고,[4][5] 8월에는 총리 사퇴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6] 나집은 내각 개편을 통해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인들을 체포하고, 부정 의혹을 보도한 경제 신문 2곳의 발행을 금지하는 등 강압적인 조치로 대응했다.[7]

이는 국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2018년 5월 9일에 실시된 2018년 총선에서 여당은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총리를 총리 후보로 내세운 야당 연합에 패배했다. 이로써 UMNO는 사상 처음으로 야당이 되었고, 건국 이래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8]

3. 이념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은 말레이시아에 사는 말레이인과 무슬림의 대표라고 자처하고 있다. 동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카다잔, 이반족 등 비말레이계 비무슬림도 참여하고 있지만, 여전히 말레이계와 무슬림의 대표를 자처한다.[1]

UMNO의 이념은 말레이인의 특권을 명시한 헌법 153조 조항을 유지하면서, MCA나 MIC와 같은 비말레이계 정당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민족 간 갈등을 회피하는 데 기본을 두고 있다.[2] 하지만 헌법 153조 조항은 종종 논쟁을 불러일으킨다.[2]

4. 기타

1987년 헌법 위기 이후 위헌정당으로 해산된 적이 있었다. 그 후 신(新) UMNO (UMNO Baru)를 창당했으며, 'Baru'를 제거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1] UMNO는 독재뿐 아니라 인종차별과 부정선거 등으로 비판받고 있다.[2]

참조

[1] 간행물 マハティールこの1年が剣が峰 日経ビジネス 1998-11-23
[2] 서적 アジア型経済システム 中公新書 2000
[3] 뉴스 マレーシア政府系投資会社の巨額不正疑惑が明るみに 23億ドルが消失? ナジブ首相と若き大富豪の不透明な関係(1) http://jbpress.ismed[...] JBpress 2015-03-26
[4] 뉴스 マレーシア首相に汚職疑惑、政府系ファンドから個人口座に https://www.afpbb.co[...] AFP 2015-07-06
[5] 뉴스 マレーシア、ナジブ首相に公金横領疑惑 夫人にも疑惑浮上、国外逃亡の可能性も http://jbpress.ismed[...] JBpress 2015-07-13
[6] 뉴스 マレーシア首都が黄色に、2日連続の首相退陣要求デモ https://www.afpbb.co[...] AFP 2015-08-31
[7] 간행물 マレーシア:スキャンダルに揺れるナジブ政権 https://www.scgr.co.[...] 住友商事グローバルリサーチ 2015-08-07
[8] 웹사이트 マハティール元首相勝利=史上初の政権交代へ-マレーシア総選挙 https://web.archive.[...] 時事通信社 2018-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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