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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부르시오 안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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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부르시오 카리아스 안디노는 온두라스의 군인, 정치인으로, 1933년부터 1949년까지 온두라스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1907년 군에 입대하여 리사파 전투에서 장군으로 진급했으며, 1919년과 1924년 내전에서 군사 지도자로 활약했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16년간 장기 집권하며,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고, 파시즘에 동조하는 등 논란을 낳았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경제가 개선되고 군대가 현대화되었지만, 민주주의는 위축되고 인권 침해가 발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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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부르시오 안디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직함제38대 온두라스 대통령
임기 시작1932년 11월 16일
임기 종료1949년 1월 1일
부통령아브라함 윌리암스 칼데론
이전 대통령비센테 메히아 콜린드레스
다음 대통령후안 마누엘 갈베스
직함 (헌법)온두라스 대통령
임기 시작 (헌법)1924년 4월 27일
임기 종료 (헌법)1924년 4월 30일
이전 대통령 (헌법)프란시스코 부에소
다음 대통령 (헌법)비센테 토스타
1936년의 카리아스 안디노
1936년의 카리아스 안디노
개인 정보
출생일1876년 3월 5일
출생지테구시갈파, 온두라스
사망일1969년 12월 23일
사망지테구시갈파, 온두라스

2. 생애

티부르시오 카리아스 안디노는 1876년 3월 15일 온두라스에서 칼릭스토 카리아스 갈린도와 사라 프란시스카 안디노 리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1] 어린 시절 소년 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엘 포르베니르"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수학을 가르쳤다. 고등학교 졸업 후 온두라스 중앙 대학교 법학 및 정치학부에서 형법을 공부했다. 1905년 2월 15일, 티부르시오 카리아스 안디노는 병원 건물 완공까지 ''오시덴테 병원'' 프로젝트에 참여했다.[1] 이 병원 건립에는 라몬 로페스 코보스, 시로 모라, 프란시스코 부에소 쿠에야르, 필라델포 부에소 박사, J. J. 존스 박사, 라몬 로페스 코보스 박사, 헤수스 H. 메디나 박사, 헤로니모 J. 레이나, 빈센테 메히아 콜린드레스 박사, 독일 시민 카를로스 가우겔, 엔지니어 마누엘 부에소 피네다, 몬시뇰 에밀리오 모랄레스 로케, 훌리오 C. 부에소 카세레스 박사 등이 참여했다.[1] 이 병원은 1940년까지 공공 및 민간 기부자들의 기여로 운영되었다.[1]

1907년, 카리아스는 자유 세력과 함께 싸웠으며, 리사파 전투에서 장군으로 진급했다. 미겔 R. 다빌라 쿠에야르는 공화국 대통령직을 맡았고, 1907년부터 1908년까지 카리아스를 코판 주 주지사로 임명했다. 1908년 4월 5일, 카리아스는 장으로서 장인 협회 "엘 포르베니르"를 설립했다. 1912년 5월 26일, 이 단체는 코파네카 노동자 협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912년, 마누엘 보닐라 치리노스 장군이 온두라스 대통령직을 두 번째로 맡았지만, 이념은 같았지만 카리아스와는 적대 관계였다.

카리아스는 1919년과 1924년의 온두라스 내전 동안 군사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장군으로 진급했다. 1924년의 "정당한 혁명" 동안 그는 여러 군사 공격을 이끌었다. 제2차 내전 이후 그는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온두라스 대통령직을 맡았지만, 카리아스 안디노 장군은 "혁명의 수장"으로 임명되어 1924년 3월 24일부터 4월 28일까지 두 번째로 잠시 권력을 잡았다.

순양함 "USS 덴버"에서 혁명가와 정부 간의 협상이 시작되었고, 그 후 비센테 토스타 카라스코 장군이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정권 하에서 그레고리오 페레라 장군이 무기를 들었다. 내전이 끝나자 그는 이미 전장에서 뛰어난 군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온두라스 정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권력을 잡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10년 동안 온두라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카리아스는 1924년 제2차 내전에 참전하여 장군이 되었다.[2] 1923년 온두라스 총선에서 카리아스는 분열된 자유당에 맞서 온두라스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다수표를 얻는 데 그쳤다. 그 결과 교착 상태가 발생했고, 이듬해 선거에서 국민당의 미겔 파스 바라오나가 당선되었지만, 카리아스는 바라오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928년 온두라스 총선에서 카리아스는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자유당의 비센테 메히아 콜린드레스에게 패했다. 그는 비교적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결과에 승복했는데, 이는 당시 두 주요 정당 간의 보기 드문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의미했다. 그는 1926년부터 1929년까지, 그리고 1930년부터 1931년까지 온두라스 국회 의장을 역임했다.[4]

1933년 2월 1일, 그는 다시 온두라스 대통령이 되었고, 이번에는 16년 동안 재임했다. 1932년 온두라스 대통령 선거는 불안이 고조되고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평화롭고 공정하게 치러졌다.[5] 평화로운 권력 이양은 놀라운 일이었는데, 대공황의 시작으로 온두라스보다 훨씬 강력한 민주주의 전통을 가진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에서 정부가 쿠데타로 전복되었기 때문이다.[5] 그러나 비센테 메히아 콜린드레스는 온두라스 자유당 후보인 호세 앙헬 수니가 우에테에게 유리하도록 선거 결과를 조작하라는 자신의 당의 압력에 저항했다.[5] 그 결과, 온두라스 국민당 후보인 카리아스가 약 2만 표 차이로 선거에서 승리했다.[5] 1932년 11월 16일, 카리아스는 취임하여 온두라스 역사상 개인의 최장기 연속 통치를 시작했다.[5]

카리아스 행정부가 이전의 대부분의 행정부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는 즉각적인 징후는 없었다.[5] 카리아스 취임 직전, 비센테 메히아 콜린드레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온두라스 자유당의 반체제 인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5] 카리아스는 정부군을 지휘하여 엘살바도르로부터 총기를 확보하고 단시간에 봉기를 진압했다.[5] 카리아스의 첫 임기는 재정 붕괴를 막고 군대를 개선하며 제한적인 도로 건설 계획을 추진하고 권력을 연장하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데 헌신했다.[5] 군 출신이면서도 선거를 통한 통치를 존중했다.

1932년 온두라스 대통령 선거는 불안이 고조되고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평화롭고 공정하게 치러졌다.[5] 평화로운 권력 이양은 놀라운 일이었는데, 대공황의 시작으로 온두라스보다 훨씬 강력한 민주주의 전통을 가진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에서 정부가 쿠데타로 전복되었기 때문이다.[5] 그러나 비센테 메히아 콜린드레스는 온두라스 자유당 후보인 호세 앙헬 수니가 우에테에게 유리하도록 선거 결과를 조작하라는 자신의 당의 압력에 저항했다.[5] 그 결과, 온두라스 국민당 후보인 카리아스가 약 2만 표 차이로 선거에서 승리했다.[5] 1932년 11월 16일, 카리아스는 취임하여 온두라스 역사상 개인의 최장기 연속 통치를 시작했다.[5]

그러나 카리아스 행정부가 이전의 대부분의 행정부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는 즉각적인 징후는 없었다.[5] 카리아스 취임 직전, 비센테 메히아 콜린드레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온두라스 자유당의 반체제 인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5] 카리아스는 정부군을 지휘하여 엘살바도르로부터 총기를 확보하고 단시간에 봉기를 진압했다.[5] 카리아스의 첫 임기는 재정 붕괴를 막고 군대를 개선하며 제한적인 도로 건설 계획을 추진하고 권력을 연장하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데 헌신했다.[5]

1930년대 내내 경제 상황은 극도로 나빴다.[5] 대공황으로 인한 바나나 수출의 급격한 감소 외에도, 바나나 생산 지역에서 1935년 파나마병과 검은 시가토카병의 유행이 발생하여 과일 산업은 더욱 위협받았다.[5] 1년 이내에, 국가 생산량의 대부분이 위협받게 되었다.[5] 트루히요 주변을 포함한 넓은 지역이 버려졌고, 수천 명의 온두라스인이 일자리를 잃었다.[5] 1937년까지 질병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발견되었지만, 온두라스가 이전에 점유했던 시장의 상당 부분이 다른 국가로 이전되었기 때문에 많은 피해 지역이 여전히 생산을 중단했다.[5]

카리아스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군대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5] 일단 취임하자, 그러한 개선을 지속하고 확대하려는 그의 능력과 동기가 증가했다.[5] 그는 신생 공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1934년에 [https://web.archive.org/web/20090505220142/http://www.aeroflight.co.uk/waf/americas/honduras/Honduras-af-home.htm 군사 항공 학교]를 설립하고, 미국 대령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5]

몇 달이 지나면서, 카리아스는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그는 파업 및 기타 노동 분쟁에 반대함으로써 바나나 회사들의 지지를 얻었다.[5] 보수적인 경제 정책을 통해 국내외 금융계와의 관계를 강화했다.[5] 대공황의 절정기에도 그는 온두라스 부채에 대한 정기적인 지불을 계속했으며, 영국 채권자들과의 약정을 엄격히 준수하고 다른 채권자들을 만족시켰다.[5] 1935년에는 두 개의 소액 대출이 완전히 상환되었다.[5]

1935년, 카리아스 치하에서 정치적 통제가 서서히 시작되었다.[5] 온두라스 공산당은 불법화되었지만, 자유당은 계속 활동했으며, 심지어 1935년의 소규모 봉기의 지도자들에게 해외 망명에서 온두라스로 돌아오고 싶다면 무료 항공편을 제공하기도 했다.[5] 그러나 1935년 말, 카리아스는 평화와 내부 질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야당 언론과 정치 활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5] 한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은 카리아스의 집권 연장만이 국가에 지속적인 평화와 질서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선전을 시작했다.[5] 그러나 헌법은 대통령의 즉각적인 재선을 금지했다.[5]

카리아스가 임기를 연장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새 헌법을 작성하고 그 문서에 따라 첫 번째 대통령 임기를 수행할 인물을 선출할 제헌 의회를 소집하는 것이었다.[5] 대통령이 집권을 연장하려는 욕망을 제외하면, 국가의 기본 헌장을 변경할 이유는 거의 없었다.[5] 앞서 제헌 의회들은 13개의 헌법을 작성했고 (그중 10개만 발효되었다), 가장 최근 헌법은 1924년에 채택되었다.[5] 1936년의 선출된 제헌 의회는 1924년 문서의 30개 조항을 1936년 헌법에 통합했다.[5] 주요 변경 사항은 대통령과 부통령의 즉각적인 재선 금지를 폐지하고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한 것이었다.[5] 다른 변경 사항으로는 사형 부활, 입법부 권한 축소, 여성의 시민권 박탈 및 따라서 선거권 박탈이 있었다.[5] 마지막으로, 새 헌법에는 현직 대통령과 부통령이 1943년까지 직무를 유지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실상 독재자였던 카리아스는 더 많은 것을 원했고, 1939년 국민당이 완전히 장악한 입법부는 그의 임기를 6년 더 연장했다(1949년까지).[5]

자유당과 정부의 다른 반대자들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카리아스 전복을 시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5] 1936년과 1937년에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국민당의 반대자들을 더욱 약화시키는 데에만 성공했다.[5] 1930년대 말까지 국민당은 국가에서 유일하게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정당이었다.[5] 수많은 야당 지도자들이 투옥되었고, 일부는 사슬에 묶여 테구시갈파 거리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고 전해진다.[5] 자유당의 지도자인 앙헬 수니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망명했다.[5]

카리아스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과테말라의 호르헤 우비코, 엘살바도르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니카라과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장군과 같은 중앙 아메리카의 동료 독재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5] 우비코와의 관계는 특히 긴밀하여, 카리아스가 비밀 경찰을 재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과테말라 영토를 침범하는 실수를 저지른 온두라스 봉기의 지도자를 체포하여 사살하기도 했다.[5] 니카라과와의 관계는 계속되는 국경 분쟁으로 인해 다소 긴장되었지만, 카리아스와 소모사는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이 분쟁을 통제했다.[5]

카리아스(Carías)의 지휘 아래 정치적 통제가 점차 제도화되었고, 대대적인 반공산주의 운동이 벌어져 온두라스 공산당은 불법으로 선언되었다. 하지만 자유당은 계속 활동했으며, 1935년 봉기의 지도자들은 망명 상태에 있었는데, 해외에 있는 그들에게 원한다면 항공편을 통해 귀국할 수 있도록 무료 항공권을 제공했다. 그러나 1935년 말, 정부에 대한 정치 활동을 진정시키고 국가의 내부 평화를 유지하려던 카리아스 정권은 신문, 언론인, 정치 지도자들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검열했다.

'카리아토(Cariato)' 정권은 매우 국가주의적이고 군사 독재적인 특징을 보였으며, 온두라스 시민 모델에 대한 이상이 강조되었다.

카리아스 장군은 파시즘에 동조하여 파시스트 이탈리아나치 독일을 흠모했으며, 1938년부터 이 두 정권이 그의 정부를 후원했다.[6][7] 카리아스는 1936년 독일 제국과 온두라스 공화국 간의 외교 관계가 정상화된 후 아돌프 히틀러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는 1937년 일본 천황 히로히토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다.[8] 유럽의 파시스트 운동과 유사하게, 카리아스는 신화적이고 이상화된 과거에 기반한 국가 정체성을 만들고자 했으며, 이 경우 온두라스 메스티소 정체성을 마야 문명의 후예로 칭송했다. 그 결과,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코판과 엘 푸엔테(마야 유적지)의 도시 발굴이 시작되었다.

1940년대에 티부르시오 안디노 장군은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일본 제국과 외교 관계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1941년 진주만 공격 이후 추축국에 전쟁을 선포해야 했다. 이로써 온두라스는 미국의 동맹국인 라틴 아메리카 국가 중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미군 기지 공격 이후, 북부 국가는 "독일-일본 추축국"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온두라스도 병력과 해병대를 파병하고, 온두라스 공군도 독일 잠수함을 찾기 위해 멕시코 인근 카리브해 해안을 순찰했다. 이 외에도 카리아스 안디노 박사 겸 장군은 독일 영사 크리스티안 진서를 "중앙 아메리카의 제5열이자 게슈타포와 연계된 인물"로 간주하며 온두라스에서 추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5]

1944년에는 카리아스 정부와 인근 독재 정권 간의 유대 관계의 가치가 과테말라엘살바도르에서 우비코와 에르난데스를 몰아낸 대중 봉기로 인해 다소 의문시되었다.[5] 잠시 동안 혁명의 전염이 온두라스에도 퍼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5] 일부 군 장교와 야당 시민들이 연루된 음모가 1943년 말에 이미 발각되어 진압되었다.[5] 1944년 5월, 한 무리의 여성들이 테구시갈파의 온두라스 대통령 궁 밖에서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했다.[5] 강력한 정부 조치에도 불구하고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고, 결국 카리아스는 일부 수감자를 석방해야 했다.[5] 이 제스처는 야당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반정부 시위는 계속 확산되었다.[5] 7월에는 여러 시위대가 산페드로술라에서 군대에 의해 사망했다.[5] 10월에는 망명한 엘살바도르인들이 온두라스를 침공했지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5] 군대는 충성을 유지했고 카리아스는 계속 재임했다.[5]

이 지역의 추가적인 혼란을 억제하기를 열망한 미국은 카리아스에게 퇴진하여 임기가 만료될 때 자유 선거를 허용할 것을 촉구하기 시작했다.[5] 당시 70대 초반이었던 카리아스는 결국 이러한 압력에 굴복하여 1948년 10월 선거를 발표했고, 그는 후보로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5]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권력을 사용할 방법을 찾았다.[5] 국민당은 1933년부터 전쟁부 장관을 지낸 후안 마누엘 갈베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5] 망명한 야당 인물들의 온두라스 귀국이 허용되었고, 수년간의 무활동과 분열을 극복하려던 온두라스 자유당은 1932년에 카리아스에게 패배했던 앙헬 수니가를 지명했다.[5] 자유당은 자신들이 승리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빠르게 확신하게 되었고, 정부의 선거 과정 조작을 비난하며 선거를 보이콧했다.[5] 이로 인해 갈베스는 사실상 무투표로 승리했으며, 1949년 1월에 대통령직을 수행했다.[5]

1954년 온두라스 총선에서 현직 대통령 갈베스는 물러나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허용하려 했다. 카리아스는 대통령직에 복귀하려 했지만, 그의 출마는 집권 국민당 내에서 분열을 야기했다. 자유당 후보 라몬 빌레다 모랄레스가 다수표를 얻었지만 과반수를 얻지 못해 (1902년과 1923년 선거의 결과와 유사) 교착 상태에 빠졌다. 부통령 훌리오 로자노 디아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온두라스의 30년간의 안정된 정부를 갑작스럽게 종식시켰으며, 카리아스는 그 중 16년 동안 대통령이었다.

카리아스 안디노 장군의 독재 정권은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의 인권 침해를 저질렀다.[9] 엘 카리아토는 언론에 대한 강력한 검열로 특징지어졌으며, 정부는 언론과 라디오를 감시했고,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에 대한 군대의 잔혹 행위가 있었다.[9] 이 기간 동안 부과된 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민족 집단 중 하나는 가리푸나 공동체였으며, 군대에 의해 끊임없이 침묵당하고 공격을 받았다.[9] 카리아스 자신이 명령한 가리푸나 인구에 대한 1937년 텔라 학살이 두드러진다.[9]

1944년 학살의 시체


또 다른 기억에 남는 범죄는 1944년 7월 6일에 발생한 이른바 "산 페드로 술라 학살"로, 군대가 사임을 요구하며 도시의 거리에서 시위를 시작한 무장하지 않은 산 페드로 시민들을 잔혹한 행위로 진압한 사건이다.[9] 70명 이상이 사망했고, 노인과 여성을 포함하여 수백 명의 부상자가 군의 진압으로 발생했지만, 그 수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9]

군대에 의한 여러 감옥에서의 고문이 있었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반대자였던 수감자들은 그의 임기 중 한 시점에서 수감자로 가득 찼다.[10] 농장과 광산의 많은 노동자들은 전기, 물, 충분한 음식도 없이 인간 이하의 환경에서 살았고, 그들의 노동은 노예와 같은 조건이었으며, 그들은 농장이나 광산 센터라기보다는 강제 수용소나 강제 노동과 더 유사했다.[10] 일부 수감자들은 형벌 센터에 머무는 대신 대안으로 이러한 지역으로 보내져 일하기도 했다.[10] 또한, 국가 인프라의 상당 부분이 주로 정치 및 시민 반대자였던 수감자들의 노동으로 건설되었다.

  • 군 출신이면서도 선거를 통한 통치를 존중했다. 성격은 근엄하고 성실했으며,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 온두라스 역사상 최장기 집권으로 그 평가는 다양하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티부르시오 카리아스 안디노는 1876년 3월 15일 온두라스에서 칼릭스토 카리아스 갈린도와 사라 프란시스카 안디노 리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1] 어린 시절 소년 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엘 포르베니르"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수학을 가르쳤다. 고등학교 졸업 후 온두라스 중앙 대학교 법학 및 정치학부에서 형법을 공부했다. 1905년 2월 15일, 티부르시오 카리아스 안디노는 병원 건물 완공까지 ''오시덴테 병원'' 프로젝트에 참여했다.[1] 이 병원 건립에는 라몬 로페스 코보스, 시로 모라, 프란시스코 부에소 쿠에야르, 필라델포 부에소 박사, J. J. 존스 박사, 라몬 로페스 코보스 박사, 헤수스 H. 메디나 박사, 헤로니모 J. 레이나, 빈센테 메히아 콜린드레스 박사, 독일 시민 카를로스 가우겔, 엔지니어 마누엘 부에소 피네다, 몬시뇰 에밀리오 모랄레스 로케, 훌리오 C. 부에소 카세레스 박사 등이 참여했다.[1] 이 병원은 1940년까지 공공 및 민간 기부자들의 기여로 운영되었다.[1]

2. 2. 군 경력

1907년, 카리아스는 자유 세력과 함께 싸웠으며, 리사파 전투에서 장군으로 진급했다. 미겔 R. 다빌라 쿠에야르는 공화국 대통령직을 맡았고, 1907년부터 1908년까지 카리아스를 코판 주 주지사로 임명했다. 1908년 4월 5일, 카리아스는 장으로서 장인 협회 "엘 포르베니르"를 설립했다. 1912년 5월 26일, 이 단체는 코파네카 노동자 협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912년, 마누엘 보닐라 치리노스 장군이 온두라스 대통령직을 두 번째로 맡았지만, 이념은 같았지만 카리아스와는 적대 관계였다.

카리아스는 1919년과 1924년의 온두라스 내전 동안 군사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장군으로 진급했다. 1924년의 "정당한 혁명" 동안 그는 여러 군사 공격을 이끌었다. 제2차 내전 이후 그는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온두라스 대통령직을 맡았지만, 카리아스 안디노 장군은 "혁명의 수장"으로 임명되어 1924년 3월 24일부터 4월 28일까지 두 번째로 잠시 권력을 잡았다.

순양함 "USS 덴버"에서 혁명가와 정부 간의 협상이 시작되었고, 그 후 비센테 토스타 카라스코 장군이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정권 하에서 그레고리오 페레라 장군이 무기를 들었다. 내전이 끝나자 그는 이미 전장에서 뛰어난 군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온두라스 정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권력을 잡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10년 동안 온두라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2. 3. 정치 경력

카리아스는 1924년 제2차 내전에 참전하여 장군이 되었다.[2] 1923년 온두라스 총선에서 카리아스는 분열된 자유당에 맞서 온두라스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다수표를 얻는 데 그쳤다. 그 결과 교착 상태가 발생했고, 이듬해 선거에서 국민당의 미겔 파스 바라오나가 당선되었지만, 카리아스는 바라오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928년 온두라스 총선에서 카리아스는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자유당의 비센테 메히아 콜린드레스에게 패했다. 그는 비교적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결과에 승복했는데, 이는 당시 두 주요 정당 간의 보기 드문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의미했다. 그는 1926년부터 1929년까지, 그리고 1930년부터 1931년까지 온두라스 국회 의장을 역임했다.[4]

1933년 2월 1일, 그는 다시 온두라스 대통령이 되었고, 이번에는 16년 동안 재임했다. 1932년 온두라스 대통령 선거는 불안이 고조되고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평화롭고 공정하게 치러졌다.[5] 평화로운 권력 이양은 놀라운 일이었는데, 대공황의 시작으로 온두라스보다 훨씬 강력한 민주주의 전통을 가진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에서 정부가 쿠데타로 전복되었기 때문이다.[5] 그러나 비센테 메히아 콜린드레스는 온두라스 자유당 후보인 호세 앙헬 수니가 우에테에게 유리하도록 선거 결과를 조작하라는 자신의 당의 압력에 저항했다.[5] 그 결과, 온두라스 국민당 후보인 카리아스가 약 2만 표 차이로 선거에서 승리했다.[5] 1932년 11월 16일, 카리아스는 취임하여 온두라스 역사상 개인의 최장기 연속 통치를 시작했다.[5]

카리아스 행정부가 이전의 대부분의 행정부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는 즉각적인 징후는 없었다.[5] 카리아스 취임 직전, 비센테 메히아 콜린드레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온두라스 자유당의 반체제 인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5] 카리아스는 정부군을 지휘하여 엘살바도르로부터 총기를 확보하고 단시간에 봉기를 진압했다.[5] 카리아스의 첫 임기는 재정 붕괴를 막고 군대를 개선하며 제한적인 도로 건설 계획을 추진하고 권력을 연장하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데 헌신했다.[5] 군 출신이면서도 선거를 통한 통치를 존중했다.

2. 4. 대통령 재임 (1933년 ~ 1949년)

1932년 온두라스 대통령 선거는 불안이 고조되고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평화롭고 공정하게 치러졌다.[5] 평화로운 권력 이양은 놀라운 일이었는데, 대공황의 시작으로 온두라스보다 훨씬 강력한 민주주의 전통을 가진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에서 정부가 쿠데타로 전복되었기 때문이다.[5] 그러나 비센테 메히아 콜린드레스는 온두라스 자유당 후보인 호세 앙헬 수니가 우에테에게 유리하도록 선거 결과를 조작하라는 자신의 당의 압력에 저항했다.[5] 그 결과, 온두라스 국민당 후보인 카리아스가 약 2만 표 차이로 선거에서 승리했다.[5] 1932년 11월 16일, 카리아스는 취임하여 온두라스 역사상 개인의 최장기 연속 통치를 시작했다.[5]

그러나 카리아스 행정부가 이전의 대부분의 행정부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는 즉각적인 징후는 없었다.[5] 카리아스 취임 직전, 비센테 메히아 콜린드레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온두라스 자유당의 반체제 인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5] 카리아스는 정부군을 지휘하여 엘살바도르로부터 총기를 확보하고 단시간에 봉기를 진압했다.[5] 카리아스의 첫 임기는 재정 붕괴를 막고 군대를 개선하며 제한적인 도로 건설 계획을 추진하고 권력을 연장하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데 헌신했다.[5]

1930년대 내내 경제 상황은 극도로 나빴다.[5] 대공황으로 인한 바나나 수출의 급격한 감소 외에도, 바나나 생산 지역에서 1935년 파나마병과 검은 시가토카병의 유행이 발생하여 과일 산업은 더욱 위협받았다.[5] 1년 이내에, 국가 생산량의 대부분이 위협받게 되었다.[5] 트루히요 주변을 포함한 넓은 지역이 버려졌고, 수천 명의 온두라스인이 일자리를 잃었다.[5] 1937년까지 질병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발견되었지만, 온두라스가 이전에 점유했던 시장의 상당 부분이 다른 국가로 이전되었기 때문에 많은 피해 지역이 여전히 생산을 중단했다.[5]

카리아스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군대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5] 일단 취임하자, 그러한 개선을 지속하고 확대하려는 그의 능력과 동기가 증가했다.[5] 그는 신생 공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1934년에 [https://web.archive.org/web/20090505220142/http://www.aeroflight.co.uk/waf/americas/honduras/Honduras-af-home.htm 군사 항공 학교]를 설립하고, 미국 대령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5]

몇 달이 지나면서, 카리아스는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그는 파업 및 기타 노동 분쟁에 반대함으로써 바나나 회사들의 지지를 얻었다.[5] 보수적인 경제 정책을 통해 국내외 금융계와의 관계를 강화했다.[5] 대공황의 절정기에도 그는 온두라스 부채에 대한 정기적인 지불을 계속했으며, 영국 채권자들과의 약정을 엄격히 준수하고 다른 채권자들을 만족시켰다.[5] 1935년에는 두 개의 소액 대출이 완전히 상환되었다.[5]

== 권위주의 통치 강화 ==

1935년, 카리아스 치하에서 정치적 통제가 서서히 시작되었다.[5] 온두라스 공산당은 불법화되었지만, 자유당은 계속 활동했으며, 심지어 1935년의 소규모 봉기의 지도자들에게 해외 망명에서 온두라스로 돌아오고 싶다면 무료 항공편을 제공하기도 했다.[5] 그러나 1935년 말, 카리아스는 평화와 내부 질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야당 언론과 정치 활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5] 한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은 카리아스의 집권 연장만이 국가에 지속적인 평화와 질서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선전을 시작했다.[5] 그러나 헌법은 대통령의 즉각적인 재선을 금지했다.[5]

카리아스가 임기를 연장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새 헌법을 작성하고 그 문서에 따라 첫 번째 대통령 임기를 수행할 인물을 선출할 제헌 의회를 소집하는 것이었다.[5] 대통령이 집권을 연장하려는 욕망을 제외하면, 국가의 기본 헌장을 변경할 이유는 거의 없었다.[5] 앞서 제헌 의회들은 13개의 헌법을 작성했고 (그중 10개만 발효되었다), 가장 최근 헌법은 1924년에 채택되었다.[5] 1936년의 선출된 제헌 의회는 1924년 문서의 30개 조항을 1936년 헌법에 통합했다.[5] 주요 변경 사항은 대통령과 부통령의 즉각적인 재선 금지를 폐지하고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한 것이었다.[5] 다른 변경 사항으로는 사형 부활, 입법부 권한 축소, 여성의 시민권 박탈 및 따라서 선거권 박탈이 있었다.[5] 마지막으로, 새 헌법에는 현직 대통령과 부통령이 1943년까지 직무를 유지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실상 독재자였던 카리아스는 더 많은 것을 원했고, 1939년 국민당이 완전히 장악한 입법부는 그의 임기를 6년 더 연장했다(1949년까지).[5]

자유당과 정부의 다른 반대자들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카리아스 전복을 시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5] 1936년과 1937년에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국민당의 반대자들을 더욱 약화시키는 데에만 성공했다.[5] 1930년대 말까지 국민당은 국가에서 유일하게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정당이었다.[5] 수많은 야당 지도자들이 투옥되었고, 일부는 사슬에 묶여 테구시갈파 거리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고 전해진다.[5] 자유당의 지도자인 앙헬 수니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망명했다.[5]

카리아스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과테말라의 호르헤 우비코, 엘살바도르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니카라과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장군과 같은 중앙 아메리카의 동료 독재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5] 우비코와의 관계는 특히 긴밀하여, 카리아스가 비밀 경찰을 재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과테말라 영토를 침범하는 실수를 저지른 온두라스 봉기의 지도자를 체포하여 사살하기도 했다.[5] 니카라과와의 관계는 계속되는 국경 분쟁으로 인해 다소 긴장되었지만, 카리아스와 소모사는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이 분쟁을 통제했다.[5]

카리아스(Carías)의 지휘 아래 정치적 통제가 점차 제도화되었고, 대대적인 반공산주의 운동이 벌어져 온두라스 공산당은 불법으로 선언되었다. 하지만 자유당은 계속 활동했으며, 1935년 봉기의 지도자들은 망명 상태에 있었는데, 해외에 있는 그들에게 원한다면 항공편을 통해 귀국할 수 있도록 무료 항공권을 제공했다. 그러나 1935년 말, 정부에 대한 정치 활동을 진정시키고 국가의 내부 평화를 유지하려던 카리아스 정권은 신문, 언론인, 정치 지도자들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검열했다.

== 파시즘 동조 논란 ==

카리아스 장군은 파시즘에 동조하여 파시스트 이탈리아나치 독일을 흠모했으며, 1938년부터 이 두 정권이 그의 정부를 후원했다.[6][7] 카리아스는 1936년 독일 제국과 온두라스 공화국 간의 외교 관계가 정상화된 후 아돌프 히틀러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는 1937년 일본 천황 히로히토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다.[8] 유럽의 파시스트 운동과 유사하게, 카리아스는 신화적이고 이상화된 과거에 기반한 국가 정체성을 만들고자 했으며, 이 경우 온두라스 메스티소 정체성을 마야 문명의 후예로 칭송했다. 그 결과,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코판과 엘 푸엔테(마야 유적지)의 도시 발굴이 시작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

1940년대에 티부르시오 안디노 장군은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일본 제국과 외교 관계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1941년 진주만 공격 이후 추축국에 전쟁을 선포해야 했다. 이로써 온두라스는 미국의 동맹국인 라틴 아메리카 국가 중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미군 기지 공격 이후, 북부 국가는 "독일-일본 추축국"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온두라스도 병력과 해병대를 파병하고, 온두라스 공군도 독일 잠수함을 찾기 위해 멕시코 인근 카리브해 해안을 순찰했다. 이 외에도 카리아스 안디노 박사 겸 장군은 독일 영사 크리스티안 진서를 "중앙 아메리카의 제5열이자 게슈타포와 연계된 인물"로 간주하며 온두라스에서 추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5]

== 퇴임 ==

1944년에는 카리아스 정부와 인근 독재 정권 간의 유대 관계의 가치가 과테말라엘살바도르에서 우비코와 에르난데스를 몰아낸 대중 봉기로 인해 다소 의문시되었다.[5] 잠시 동안 혁명의 전염이 온두라스에도 퍼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5] 일부 군 장교와 야당 시민들이 연루된 음모가 1943년 말에 이미 발각되어 진압되었다.[5] 1944년 5월, 한 무리의 여성들이 테구시갈파의 온두라스 대통령 궁 밖에서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했다.[5] 강력한 정부 조치에도 불구하고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고, 결국 카리아스는 일부 수감자를 석방해야 했다.[5] 이 제스처는 야당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반정부 시위는 계속 확산되었다.[5] 7월에는 여러 시위대가 산페드로술라에서 군대에 의해 사망했다.[5] 10월에는 망명한 엘살바도르인들이 온두라스를 침공했지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5] 군대는 충성을 유지했고 카리아스는 계속 재임했다.[5]

이 지역의 추가적인 혼란을 억제하기를 열망한 미국은 카리아스에게 퇴진하여 임기가 만료될 때 자유 선거를 허용할 것을 촉구하기 시작했다.[5] 당시 70대 초반이었던 카리아스는 결국 이러한 압력에 굴복하여 1948년 10월 선거를 발표했고, 그는 후보로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5]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권력을 사용할 방법을 찾았다.[5] 국민당은 1933년부터 전쟁부 장관을 지낸 후안 마누엘 갈베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5] 망명한 야당 인물들의 온두라스 귀국이 허용되었고, 수년간의 무활동과 분열을 극복하려던 온두라스 자유당은 1932년에 카리아스에게 패배했던 앙헬 수니가를 지명했다.[5] 자유당은 자신들이 승리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빠르게 확신하게 되었고, 정부의 선거 과정 조작을 비난하며 선거를 보이콧했다.[5] 이로 인해 갈베스는 사실상 무투표로 승리했으며, 1949년 1월에 대통령직을 수행했다.[5]

1954년 온두라스 총선에서 현직 대통령 갈베스는 물러나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허용하려 했다. 카리아스는 대통령직에 복귀하려 했지만, 그의 출마는 집권 국민당 내에서 분열을 야기했다. 자유당 후보 라몬 빌레다 모랄레스가 다수표를 얻었지만 과반수를 얻지 못해 (1902년과 1923년 선거의 결과와 유사) 교착 상태에 빠졌다. 부통령 훌리오 로자노 디아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온두라스의 30년간의 안정된 정부를 갑작스럽게 종식시켰으며, 카리아스는 그 중 16년 동안 대통령이었다.

2. 4. 1. 권위주의 통치 강화

1935년, 카리아스 치하에서 정치적 통제가 서서히 시작되었다.[5] 온두라스 공산당은 불법화되었지만, 자유당은 계속 활동했으며, 심지어 1935년의 소규모 봉기의 지도자들에게 해외 망명에서 온두라스로 돌아오고 싶다면 무료 항공편을 제공하기도 했다.[5] 그러나 1935년 말, 카리아스는 평화와 내부 질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야당 언론과 정치 활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5] 한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은 카리아스의 집권 연장만이 국가에 지속적인 평화와 질서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선전을 시작했다.[5] 그러나 헌법은 대통령의 즉각적인 재선을 금지했다.[5]

카리아스가 임기를 연장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새 헌법을 작성하고 그 문서에 따라 첫 번째 대통령 임기를 수행할 인물을 선출할 제헌 의회를 소집하는 것이었다.[5] 대통령이 집권을 연장하려는 욕망을 제외하면, 국가의 기본 헌장을 변경할 이유는 거의 없었다.[5] 앞서 제헌 의회들은 13개의 헌법을 작성했고 (그중 10개만 발효되었다), 가장 최근 헌법은 1924년에 채택되었다.[5] 1936년의 선출된 제헌 의회는 1924년 문서의 30개 조항을 1936년 헌법에 통합했다.[5] 주요 변경 사항은 대통령과 부통령의 즉각적인 재선 금지를 폐지하고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한 것이었다.[5] 다른 변경 사항으로는 사형 부활, 입법부 권한 축소, 여성의 시민권 박탈 및 따라서 선거권 박탈이 있었다.[5] 마지막으로, 새 헌법에는 현직 대통령과 부통령이 1943년까지 직무를 유지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실상 독재자였던 카리아스는 더 많은 것을 원했고, 1939년 국민당이 완전히 장악한 입법부는 그의 임기를 6년 더 연장했다(1949년까지).[5]

자유당과 정부의 다른 반대자들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카리아스 전복을 시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5] 1936년과 1937년에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국민당의 반대자들을 더욱 약화시키는 데에만 성공했다.[5] 1930년대 말까지 국민당은 국가에서 유일하게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정당이었다.[5] 수많은 야당 지도자들이 투옥되었고, 일부는 사슬에 묶여 테구시갈파 거리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고 전해진다.[5] 자유당의 지도자인 앙헬 수니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망명했다.[5]

카리아스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과테말라의 호르헤 우비코, 엘살바도르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니카라과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장군과 같은 중앙 아메리카의 동료 독재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5] 우비코와의 관계는 특히 긴밀하여, 카리아스가 비밀 경찰을 재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과테말라 영토를 침범하는 실수를 저지른 온두라스 봉기의 지도자를 체포하여 사살하기도 했다.[5] 니카라과와의 관계는 계속되는 국경 분쟁으로 인해 다소 긴장되었지만, 카리아스와 소모사는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이 분쟁을 통제했다.[5]

카리아스(Carías)의 지휘 아래 정치적 통제가 점차 제도화되었고, 대대적인 반공산주의 운동이 벌어져 온두라스 공산당은 불법으로 선언되었다. 하지만 자유당은 계속 활동했으며, 1935년 봉기의 지도자들은 망명 상태에 있었는데, 해외에 있는 그들에게 원한다면 항공편을 통해 귀국할 수 있도록 무료 항공권을 제공했다. 그러나 1935년 말, 정부에 대한 정치 활동을 진정시키고 국가의 내부 평화를 유지하려던 카리아스 정권은 신문, 언론인, 정치 지도자들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검열했다.

'카리아토(Cariato)' 정권은 매우 국가주의적이고 군사 독재적인 특징을 보였으며, 온두라스 시민 모델에 대한 이상이 강조되었다. 카리아스 장군은 파시즘에 동조했으며 파시스트 이탈리아나치 독일을 흠모하여, 1938년부터 두 정권이 그의 정부의 후원자 역할을 할 정도였다.[6][7] 카리아스는 1936년 독일 제국과 온두라스 공화국 간의 외교 관계가 정상화된 후 아돌프 히틀러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는 1937년 일본 천황 히로히토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다.[8] 유럽의 파시스트 운동과 유사하게, 카리아스는 신화적이고 이상화된 과거에 기반한 국가 정체성을 만들고자 했으며, 이 경우 온두라스 메스티소 정체성을 마야 문명의 후예로 칭송했다. 그 결과,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코판과 엘 푸엔테(마야 유적지)의 도시 발굴이 시작되었다.

2. 4. 2. 파시즘 동조 논란

카리아스 장군은 파시즘에 동조하여 파시스트 이탈리아나치 독일을 흠모했으며, 1938년부터 이 두 정권이 그의 정부를 후원했다.[6][7] 카리아스는 1936년 독일 제국과 온두라스 공화국 간의 외교 관계가 정상화된 후 아돌프 히틀러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는 1937년 일본 천황 히로히토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다.[8] 유럽의 파시스트 운동과 유사하게, 카리아스는 신화적이고 이상화된 과거에 기반한 국가 정체성을 만들고자 했으며, 이 경우 온두라스 메스티소 정체성을 마야 문명의 후예로 칭송했다. 그 결과,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코판과 엘 푸엔테(마야 유적지)의 도시 발굴이 시작되었다.

2. 4. 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40년대에 티부르시오 안디노 장군은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일본 제국과 외교 관계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1941년 진주만 공격 이후 추축국에 전쟁을 선포해야 했다. 이로써 온두라스는 미국의 동맹국인 라틴 아메리카 국가 중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미군 기지 공격 이후, 북부 국가는 "독일-일본 추축국"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온두라스도 병력과 해병대를 파병하고, 온두라스 공군도 독일 잠수함을 찾기 위해 멕시코 인근 카리브해 해안을 순찰했다. 이 외에도 카리아스 안디노 박사 겸 장군은 독일 영사 크리스티안 진서를 "중앙 아메리카의 제5열이자 게슈타포와 연계된 인물"로 간주하며 온두라스에서 추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5]

2. 4. 4. 퇴임

1940년대에 티부르시오 안디노 장군은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일본 제국과 외교 관계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1941년 진주만 공격 이후 추축국에 전쟁을 선포해야 했다. 이로써 온두라스는 미국의 동맹국인 라틴 아메리카 국가 중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미군 기지 공격 이후, 북부 국가는 "독일-일본 추축국"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온두라스도 병력과 해병대를 파병하고, 온두라스 공군도 독일 잠수함을 찾기 위해 멕시코 인근 카리브해 해안을 순찰했다. 이 외에도 카리아스 안디노 박사 겸 장군은 독일 영사 크리스티안 진서를 "중앙 아메리카의 제5열이자 게슈타포와 연계된 인물"로 간주하며 온두라스에서 추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1944년에는 카리아스 정부와 인근 독재 정권 간의 유대 관계의 가치가 과테말라엘살바도르에서 유비코와 에르난데스를 몰아낸 대중 봉기로 인해 다소 의문시되었다.[5] 잠시 동안 혁명의 전염이 온두라스에도 퍼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5] 일부 군 장교와 야당 시민들이 연루된 음모가 1943년 말에 이미 발각되어 진압되었다.[5] 1944년 5월, 한 무리의 여성들이 테구시갈파의 온두라스 대통령 궁 밖에서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했다.[5] 강력한 정부 조치에도 불구하고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고, 결국 카리아스는 일부 수감자를 석방해야 했다.[5] 이 제스처는 야당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반정부 시위는 계속 확산되었다.[5] 7월에는 여러 시위대가 산페드로술라에서 군대에 의해 사망했다.[5] 10월에는 망명한 엘살바도르인들이 온두라스를 침공했지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5] 군대는 충성을 유지했고 카리아스는 계속 재임했다.[5]

이 지역의 추가적인 혼란을 억제하기를 열망한 미국은 카리아스에게 퇴진하여 임기가 만료될 때 자유 선거를 허용할 것을 촉구하기 시작했다.[5] 당시 70대 초반이었던 카리아스는 결국 이러한 압력에 굴복하여 1948년 10월 선거를 발표했고, 그는 후보로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5]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권력을 사용할 방법을 찾았다.[5] 국민당은 1933년부터 전쟁부 장관을 지낸 후안 마누엘 갈베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5] 망명한 야당 인물들의 온두라스 귀국이 허용되었고, 수년간의 무활동과 분열을 극복하려던 온두라스 자유당은 1932년에 카리아스에게 패배했던 앙헬 수니가를 지명했다.[5] 자유당은 자신들이 승리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빠르게 확신하게 되었고, 정부의 선거 과정 조작을 비난하며 선거를 보이콧했다.[5] 이로 인해 갈베스는 사실상 무투표로 승리했으며, 1949년 1월에 대통령직을 수행했다.[5]

1954년 온두라스 총선에서 현직 대통령 갈베스는 물러나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허용하려 했다. 카리아스는 대통령직에 복귀하려 했지만, 그의 출마는 집권 국민당 내에서 분열을 야기했다. 자유당 후보 라몬 빌레다 모랄레스가 다수표를 얻었지만 과반수를 얻지 못해 (1902년과 1923년 선거의 결과와 유사) 교착 상태에 빠졌다. 부통령 훌리오 로자노 디아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온두라스의 30년간의 안정된 정부를 갑작스럽게 종식시켰으며, 카리아스는 그 중 16년 동안 대통령이었다.

2. 5. 인권 침해 논란

카리아스 안디노 장군의 독재 정권은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의 인권 침해를 저질렀다.[9] 엘 카리아토는 언론에 대한 강력한 검열로 특징지어졌으며, 정부는 언론과 라디오를 감시했고,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에 대한 군대의 잔혹 행위가 있었다.[9] 이 기간 동안 부과된 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민족 집단 중 하나는 가리푸나 공동체였으며, 군대에 의해 끊임없이 침묵당하고 공격을 받았다.[9] 카리아스 자신이 명령한 가리푸나 인구에 대한 1937년 텔라 학살이 두드러진다.[9] 또 다른 기억에 남는 범죄는 1944년 7월 6일에 발생한 이른바 "산 페드로 술라 학살"로, 군대가 사임을 요구하며 도시의 거리에서 시위를 시작한 무장하지 않은 산 페드로 시민들을 잔혹한 행위로 진압한 사건이다.[9] 70명 이상이 사망했고, 노인과 여성을 포함하여 수백 명의 부상자가 군의 진압으로 발생했지만, 그 수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9]

군대에 의한 여러 감옥에서의 고문이 있었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반대자였던 수감자들은 그의 임기 중 한 시점에서 수감자로 가득 찼다.[10] 농장과 광산의 많은 노동자들은 전기, 물, 충분한 음식도 없이 인간 이하의 환경에서 살았고, 그들의 노동은 노예와 같은 조건이었으며, 그들은 농장이나 광산 센터라기보다는 강제 수용소나 강제 노동과 더 유사했다.[10] 일부 수감자들은 형벌 센터에 머무는 대신 대안으로 이러한 지역으로 보내져 일하기도 했다.[10] 또한, 국가 인프라의 상당 부분이 주로 정치 및 시민 반대자였던 수감자들의 노동으로 건설되었다.

3. 평가 및 유산

카리아스 대통령 재임 기간을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5] 그의 재임 기간은 국가에 절실히 필요한 상대적인 평화와 질서를 제공했다.[5] 국가의 재정 상황이 꾸준히 개선되었고, 교육이 약간 향상되었으며, 도로망이 확장되었고, 군대가 현대화되었다.[5] 동시에, 싹트던 민주주의 제도들은 위축되었고, 야당과 노동 운동이 억압되었으며, 국가적 이익은 때때로 카리아스 또는 주요 외국 세력의 지지자 및 친척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희생되었다.[5]

군 출신이면서도 선거를 통한 통치를 존중했다. 성격은 근엄하고 성실했으며,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온두라스 역사상 최장기 집권으로 그 평가는 다양하다.

3. 1. 긍정적 평가

카리아스 대통령 재임 기간은 국가에 절실히 필요했던 상대적인 평화와 질서를 제공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5] 국가 재정이 꾸준히 개선되었고, 교육이 약간 향상되었으며, 도로망이 확장되었다.[5] 군대가 현대화된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5] 군 출신임에도 선거를 통한 통치를 존중했으며, 근엄하고 성실한 성격으로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는 점도 긍정적인 평가의 요인 중 하나이다.

3. 2. 부정적 평가

카리아스 대통령 재임 기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5] 그의 집권 기간 동안 국가에 절실히 필요했던 상대적인 평화와 질서가 확립되었다.[5] 국가 재정은 꾸준히 개선되었고, 교육이 약간 향상되었으며, 도로망이 확장되고 군대가 현대화되는 성과도 있었다.[5] 그러나 민주주의 제도는 위축되었고, 야당과 노동 운동은 억압받았다.[5] 또한 국가적 이익이 카리아스 대통령 자신이나 주요 외국 세력의 지지자 및 친척들에게 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희생되기도 했다.[5]

그는 군 출신임에도 선거를 통한 통치를 존중하였다. 성격은 근엄하고 성실했으며,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온두라스 역사상 최장기 집권으로 그 평가는 다양하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웹사이트 Presidentes del Congreso Nacional 1900–2014 http://www.xplorhond[...] 2015-08-11
[5] 간행물 Honduras: a country study https://www.loc.gov/[...] Federal Research Division, Library of Congress 1995
[6] 웹사이트 La pasión por Tiburcio Carías Andino - Diario El Heraldo https://www.elherald[...]
[7] 웹사이트 Dictadura cariista: corrupción y narcotráfico - Diario El Heraldo https://www.elherald[...]
[8] 웹사이트 Carta de Hitler al Presidente Carías Andino - Nacer en Honduras https://nacerenhondu[...] 2010-05-25
[9] 웹사이트 LA MASACRE DE GARÍFUNAS EN SAN JUAN EN TELA, 1937 https://elpulso.hn/2[...] 2018-10-20
[10] 웹사이트 LA MASACRE DE SAN PEDRO SULA. 6 DE JULIO 1944 » Criterio.hn https://criterio.hn/[...] 2017-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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