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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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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는 엘살바도르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1931년부터 1944년까지 엘살바도르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군 경력을 쌓아 준장까지 진급했으며, 1931년 부통령으로 선출된 후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마르티네스는 1930년대 대공황 시기 경제 정책을 펼쳤으며, 1932년 공산주의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라 마탄사'로 알려진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헌법 개정을 통해 장기 집권을 시도했으며,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숭배하고 추축국에 동조하는 등 논란을 일으켰다. 1944년 총파업으로 인해 사임하고 망명했으며, 이후 온두라스에서 암살당했다. 그의 통치는 엘살바도르 역사에서 독재 시기의 시작으로 평가받으며, 현재까지도 엘살바도르 사회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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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원어 이름Maximiliano Hernández Martínez
존칭준장
출생일1882년 10월 21일
출생지산마티아스, 엘살바도르
사망일1966년 5월 15일
사망지하마스트란, 온두라스
사망 원인암살 (칼에 찔림)
배우자콘셉시온 몬테아구도
자녀8명
직업군인, 정치인
서명[[파일:Signature of Maximiliano Hernandez Martinez.jpg|서명]]
20세기 초중반 군복을 입고 약간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의 흑백 상반신 사진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정치
정당국민 조국당
대통령 임기 (1)1935년 3월 1일 ~ 1944년 5월 9일
대통령 임기 (2)1931년 12월 4일 ~ 1934년 8월 28일 (임시 대통령)
부통령 임기1931년 3월 1일 ~ 1934년 8월 28일
국방부 장관 임기1931년 3월 1일 ~ 1931년 12월 1일
이전 대통령 (1)안드레스 이그나시오 메넨데스
다음 대통령 (1)안드레스 이그나시오 메넨데스
이전 대통령 (2)아르투로 아라우호
다음 대통령 (2)안드레스 이그나시오 메넨데스
이전 부통령구스타보 비데스
다음 부통령마누엘 아드리아노 빌라노바
이전 국방부 장관피오 로메로 보스케
다음 국방부 장관살바도르 로페스 로차크
군사
소속엘살바도르 육군
계급준장
참전 전투제3차 토토포스테 전쟁
1931년 엘살바도르 쿠데타

종려 주일 쿠데타
무기력 시위
학력
모교
엘살바도르 대학교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는 1882년 10월 21일 엘살바도르 산 마티아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라임운도 에르난데스와 페트로닐라 마르티네스였다.[1] 엘살바도르에서는 아버지의 성(姓)인 에르난데스 대신 어머니의 성인 마르티네스를 사용하여 '마르티네스 장군'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2] 산살바도르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후, 과테말라 공과대학에 입학하여 소위 계급을 받았다. 엘살바도르로 돌아와 엘살바도르 대학교 법학 및 사회과학부에 다녔지만, 군 경력을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

엘살바도르 군사 박물관에 있는 마르티네스의 군 신분증


마르티네스는 1903년 11월 17일 중위, 1906년 8월 23일 대위로 진급했다. 그는 1906년 과테말라와의 제3차 토토포스테 전쟁에서 대위로 참전하여 전 엘살바도르 대통령 토마스 레갈라도 로메로 준장 휘하에서 싸웠다. 1909년 5월 6일 중령, 1914년 6월 15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1919년 7월 14일 엘살바도르 입법 의회는 마르티네스를 준장으로 진급시켰고, 호르헤 멜렌데스 대통령이 9월 17일 이를 승인했다. 이후 헤라르도 바리오스 장군 사관학교 교수로 일했으며, 군대 내 여러 직책을 거쳐 1930년 군사학교장이 되었다.

3. 1931년 선거와 부통령 취임

1931년 엘살바도르 대통령 선거는 피오 로메로 보스케 대통령의 결정으로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마르티네스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1930년 5월 28일 육군 제2감찰관직에서 사퇴했다. 그는 사회주의적 입장을 내세웠지만, 국민 공화당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낮았다.

마르티네스가 부통령 겸 전쟁장관으로 섬겼던 아르투로 아라우호


결국 마르티네스는 노동당의 아르투로 아라우호를 지지하고 부통령직을 약속받았다. 아라우호는 106,777표(46.7%)를 얻어 선거에서 승리했고, 마르티네스의 지지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라우호는 마르티네스를 부통령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마르티네스가 자신의 정책을 지지할 것이라는 믿음과 육군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한, 아라우호는 마르티네스에게 콘셉시온 "콘차" 몬테아구도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아라우호와 마르티네스는 1931년 3월 1일에 취임했다. 마르티네스는 부통령 겸 전쟁, 해군 및 항공 장관(전쟁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취임 후 군 지도부를 숙청하고 자신과 정부에 충성하는 장교들을 승진시켰다. 아라우호 정부는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문제와 사회 불안에 직면했고, 마르티네스는 전쟁 장관직을 이용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4. 권력 장악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는 1931년 쿠데타로 아르투로 아라우호 대통령을 축출하고 권력을 잡았다. 아라우호 정부는 군 예산 삭감을 시도했고, 군 장교들에게 급여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다. 1931년 12월, 마르티네스는 전쟁 장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이에 불만을 품은 하급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라우호를 축출했다.[1][2]

쿠데타 이후 시민위원회(Civic Directory)가 설립되었고, 마르티네스는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12월 4일, 시민위원회는 해산하고 마르티네스를 공식적으로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마르티네스가 쿠데타에 직접 가담했는지는 논란이 있지만, 그는 군부의 지지를 받으며 권력을 장악했다.

1923년 중앙아메리카 평화 및 우호 조약에 따라 코스타리카,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 미국은 처음에는 마르티네스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2년 9월,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이 마르티네스 정부를 인정했고, 1934년에는 코스타리카,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도 마르티네스 정부를 인정했다. 미국은 1935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르티네스가 승리한 후 그의 정부를 인정했다.

4. 1. 1931년 쿠데타와 대통령 취임

1931년 말, 아르투로 아라우호 정부는 재정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군 예산을 삭감하려 했으나, 군 장교들은 이에 반발했다. 아라우호 정부는 몇 달 동안 군 장교와 병사들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못했고, 1931년 12월 1일 아라우호는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의 충성심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를 전쟁 장관직에서 해임하고 자신의 매제인 살바도르 로페스 로차크를 임명했다. 12월 2일, 정부의 군 월급 지급 실패와 마르티네스의 해임으로 인해 하급 장교들은 아라우호를 축출하고 과테말라로 망명하게 했으며, 많은 고위 장교들을 체포했다.[1][2]

1931년 12월 시민위원회(Civic Directory); 마르티네스는 왼쪽에서 여섯 번째이다.


쿠데타 주도 세력은 시민위원회(Civic Directory)를 설립했고, 오스민 아기레 이 살리나스 대령(로페스 로차크를 대신하여 전쟁 장관에 임명됨)과 호아킨 발데스 대령이 시민위원회의 공동 의장직을 맡았다. 시민위원회는 육군, 엘살바도르 공군(Salvadoran Air Force), 엘살바도르 국가경비대(National Guard (El Salvador)) 출신의 12명의 군 장교로 구성되었다. 시민위원회는 마르티네스에게 접근하여 그를 엘살바도르 대통령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고, 마르티네스는 이를 수락했다. 12월 4일, 시민위원회는 스스로 해산하고 아라우호가 대통령직을 버렸다고 선포했으며, 부통령직을 수행 중이던 마르티네스를 공식적으로 국가의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마르티네스는 임시 대통령으로서 권력을 강화했지만, 전쟁 장관직은 복귀하지 않고 발데스를 임명했다.

마르티네스의 쿠데타 가담 여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의 지지자들은 시민위원회가 헌법 규정에 따라 대통령을 대체하는 조항에 의거하여 그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반대자들은 마르티네스가 쿠데타를 직접 조직했다고 주장했다. 찰스 B. 커티스 미국 엘살바도르 대사는 쿠데타 주모자들이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마르티네스를 명목상의 인물로 임명했다고 믿었다. 호아킨 카스트로 카니살레스는 토마스 P. 앤더슨에게 마르티네스가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지 못했지만 많은 군 장교들이 아라우호 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4. 2. 국제사회의 승인

1923년 중앙아메리카 평화 및 우호 조약 제2조는 모든 서명국이 쿠데타와 같은 비민주적인 수단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정부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시했다. 이 조약 때문에 코스타리카,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 미국은 마르티네스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1932년 9월, 마르티네스 정부는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으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1932년 12월 26일, 마르티네스는 코스타리카가 같은 조치를 취한 지 사흘 후에 1923년 조약을 폐기했다. 1934년 1월 3일, 코스타리카는 마르티네스 정부를 인정했고, 1월 24일에는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가 마르티네스 정부를 인정했다. 미국은 1935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르티네스가 승리하고 1923년 조약의 모든 서명국이 그의 정부를 인정한 후인 1월 26일에 마르티네스 정부를 인정했다.

5. 대통령 재임

1931년 마르티네스는 부통령 겸 국방장관이 되었다. 당시 세계 대공황으로 커피 가격이 폭락하여 국가 수입과 노동자 임금이 크게 줄고 재정이 붕괴되었다. 정부의 부패가 심해지자 엘살바도르 공산당의 영향력이 커졌다. 아르투로 아라우호 대통령은 마르티네스를 후임 대통령으로 지명했고, 마르티네스는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1932년 1월 지방 선거에서 공산당 후보들이 많이 당선되었지만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1월 22일 봉기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파라분도 마르티 등 공산당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산타 아나, 아우아차판, 손소나테의 농민들은 마체테를 들고 무장 봉기했다. 이후 군부의 보복으로 손소나테주 이살코 지역을 중심으로 3만 명이 희생되는 마탄사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마르티네스 시대에는 커피 보호법을 제정하고 도로 건설 등의 공공 사업을 추진하여 인프라가 정비되었다. 부패도 비교적 줄었고, 외국 차관을 억제하여 국내 통화인 콜론의 가치도 안정되었다.

엘살바도르는 1934년 5월 19일 만주국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승인했다(실질적으로는 최초의 승인국).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이 참전하자, 미국의 압력으로 연합국에 가담했다.

1944년 4월 자발적인 총파업으로 경제가 마비되고 지식인과 학생들이 파업을 지지함으로써 광범위한 반정부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듬해 5월 마르티네스는 사임하고 망명했다.

5. 1. 라 마탄사 (La Matanza)

마르티네스의 반란 관련 선언문, ''Diario Oficial'' 정부 신문에 게재됨


1931년 세계 대공황으로 커피 가격이 폭락하면서 국가 수입과 노동자 임금이 크게 줄고 재정이 붕괴되었다. 정부의 부패가 심해지자 이를 비난하는 엘살바도르 공산당의 영향력이 커졌다. 아르투로 아라우호 대통령은 마르티네스를 후임 대통령으로 지명했고, 마르티네스는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1932년 1월 지방 선거에서 공산당 후보들이 많이 당선되었지만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1]

공산당은 1월 22일 봉기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파라분도 마르티 등 공산당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지도자를 잃은 산타 아나, 아우아차판, 손소나테의 농민들은 마체테를 들고 무장 봉기했다.[1] 1932년 1월 22일, 서부 엘살바도르에서 프란시스코 산체스|프란시스코 "치코" 산체스es가 이끄는 수천 명의 농민들이 막대기, 마체테, "질이 낮은" 화기로 무장하여 마르티네스 정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2] 펠리시아노 아마가 이끄는 피필족은 공산주의 반군에 합류했는데, 공산주의 이념에 동조했고 승리가 확실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와 피필 반군은 콜론, 하야케, 후아유아, 이살코, 나우이살코, 살코아티탄, 손사카테, 타쿠바, 테오테페케 마을과 도시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반군은 여러 정치인, 군 장교, 지주를 살해하고, 여러 건물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점령한 마을에서 아우아차판, 산타 아나, 손소나테 도시로 가는 군사 통신을 두절시키려고 시도했다. 초기 반란으로 약 50~70명의 반군, 5명의 군인, 10명의 경찰관이 사망했다.

동안 군대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의 시체


1932년 1월 23일, 마르티네스는 정부 공식 신문인 ''Diario Oficial''에 반란에 관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강력한 손으로 [반군을] 질식시키는 것"(sofocarlos con mano fuertees)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평화와 헌법 질서를 회복할 것을 약속했다. 다음 날,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군대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1월 25일까지 반란은 진압되었고, 군대는 반군이 점령한 모든 도시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반란 진압 후, 군대는 서부 엘살바도르 농민, 특히 피필족을 표적으로 보복 학살을 시작했다. 정부가 해당 지역이 충분히 "평정"되었다고 판단한 1932년 2월 중순까지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살해가 계속되었다. 군부의 보복으로 손소나테주 이살코 지역을 중심으로 3만 명이 희생되는 라 마탄사(La Matanza)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살해가 피필 인구에 불균형적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이 사건을 민족말살 또는 집단학살이라고 언급했다. 이렇게 13년에 걸친 마르티네스의 독재 시대가 시작되었다.[1]

총 1만~4만 명이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 사건은 라 마탄사es(스페인어로 "대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

5. 2. 경제 정책

마르티네스 정부는 경제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1932년, 국가 채무 지급 유예를 선언하고 공무원 임금을 삭감했다.[1] 1934년, 엘살바도르 중앙은행을 설립하여 통화 발행을 통제하고 콜론미국 달러에 고정했다.[1] 1935년, 주택 금융 은행을 설립하여 커피 회사에 대한 대출을 지원했다.[1]

당시 엘살바도르는 세계 대공황으로 커피 가격이 폭락하여 국가 수입이 급감하고 재정이 붕괴되는 어려움을 겪었다.[2]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티네스는 커피 보호법을 제정하고 도로 건설 등의 공공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인프라를 정비했다.[2] 또한, 부패를 줄이고 외국 차관을 억제하여 국내 통화인 콜론의 가치를 비교적 안정시켰다.[2]

엘살바도르 경제는 커피 생산과 수출에 크게 의존했으며, 미국과의 무역 관계가 중요했다.[1]

5. 3. 선거와 헌법 개정

국민 애국당(National Pro Patria Party)의 상징


1933년 6월, 마르티네스는 1935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밝혔다. 그는 선거 운동을 위해 국민 애국당(National Pro Patria Party) (공식 명칭 "조국을 위한 국민당")을 창당했다.[1] 1932년 2월, 군, 경찰, 정보 기관 내에 국민 애국단(National Pro Patria Legion)이라는 정보원 네트워크를 구축했는데,[2] 이들은 orejases (스페인어로 "귀"라는 뜻)로 알려졌다. 정보원들은 정부 인사들을 포함한 잠재적 정치적 반대파들을 감시했다. 1937년 국민 애국단은 시민 경비대로 이름이 바뀌었다.[2] 1941년, 마르티네스는 국민 애국당 내 민병대 조직을 지원했다. 국민 애국당은 엘살바도르의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으며, 선출직 또는 임명직 공직자는 모두 당원이었다.[1]

마르티네스는 대통령 선거 운동에 집중하기 위해 1934년 8월 28일 대통령직과 부통령직에서 사임했으며, 안드레스 이냐시오 메넨데스가 임시로 그 뒤를 이었다. 메넨데스는 마르티네스가 임명한 전쟁 장관이었으며 마르티네스의 가장 가까운 동맹 중 한 명이었다. 선거에서 마르티네스는 단독 후보로 출마하여 329,555표를 모두 얻었다. 마르티네스는 1935년 3월 1일에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1938년 8월, 마르티네스는 세 번째 임기를 위해 대통령직에 다시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여러 정부 관리들이 마르티네스의 발표에 항의하며 사임했고, 그를 continuismoes(장기 집권)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결국 야당에 합류했다. 일부 군 장교들은 마르티네스를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지만, 정부는 1939년 1월에 이 음모를 발각하고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나중에 다른 야당 지도자들과 함께 멕시코로 추방되었다.

마르티네스는 1886년 엘살바도르 헌법을 폐지했고, 입법 의회는 1939년 3월 1일에 새 헌법을 비준했다. 1886년 헌법과 마찬가지로 마르티네스의 1939년 헌법은 대통령의 재선을 금지했지만, 마르티네스에게는 재선을 추구할 수 있는 예외 조항을 명시했다. 또한 그의 직계 가족이 공직에 출마하거나 그의 뒤를 잇는 것을 금지했다. 새 헌법이 비준된 அதே 날, 입법 의회는 국민 투표를 통한 재선 대신 마르티네스를 5년 임기로 재선하는 투표를 했다. 1944년 3월 1일, 네 번째 임기를 허용하기 위해 또 다른 새 헌법이 비준되었고, 1939년과 마찬가지로 입법 의회는 국민 투표 대신 그를 네 번째 임기로 재선했다. 그의 네 번째 임기는 1950년까지 지속될 예정이었다. 마르티네스는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이 2024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할 때까지 엘살바도르 역사상 재선된 마지막 대통령이었다.

5. 4. 사회 정책

1934년, 마르티네스는 엘살바도르 내 아랍계, 중국계, 그리고 원주민 소수 민족을 차별하는 법률을 시행했다. 1939년에는 아랍계, 중국계, 레바논계 소수 민족이 참여할 수 있는 활동과 일할 수 있는 곳을 제한하는 더욱 차별적인 법률들이 시행되었다. 1943년에는 아랍계와 중국계 소수 민족을 차별하는 추가적인 법률들이 시행되었고, 흑인들의 입국도 금지되었다.

1939년 엘살바도르 헌법은 시민의 자유에 대한 여러 새로운 법률과 제한을 시행했다. 헌법은 총기, 폭발물, 탄약의 소지, 알코올 음료와 담배의 소비, 성냥 및 모든 종류의 화석 연료 사용을 금지했다. 또한 정부가 새로운 고속도로 건설 또는 군사 목적으로 사전 통지 없이 사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국가 내 모든 라디오 방송에 대한 정부 독점을 의무화했다.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다른 법률들 또한 여러 시민의 자유를 금지했다. 트럼프, 주사위, 리본, 엄지손가락을 이용한 게임, 룰렛과 모든 운이나 무작위적인 우연에 의존하는 게임들이 금지되었다. 당구는 허용되었지만, 어린이, 학생, 그리고 하인은 당구를 칠 수 없었고, 노동자들은 오후 6시 이후가 아니면 평일에 당구를 칠 수 없었다. 직업 훈련을 장려하기 위해 신발 및 기타 의류 제조에 기계 사용이 금지되었다.

1932년, 마르티네스는 엘살바도르 대학교에 부여되었던 자치권을 박탈하고, 대학교를 직접적인 정부 통제 하에 두었다. 그의 조치는 학생들과 교수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934년 정부는 대학교의 자치권을 회복시켰다. 1938년에 마르티네스는 다시 대학교의 자치권을 박탈했고, 이는 학생들의 파업과 수업 거부로 이어졌다. 이러한 시위는 1939년 큰 저항 없이 진압되었고, 학생들은 결국 대학교로 돌아왔다.

5. 5. 이념과 외교 관계

마르티네스는 파시즘전체주의를 숭배했으며, 독일아돌프 히틀러이탈리아베니토 무솔리니를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그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스트 운동을 개인적으로 존경했으며, 협동조합주의가 이상적인 정부 시스템이며 엘살바도르에 시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세 사람 모두 공산주의로부터 자신의 나라를 구했다고 믿으며 자신을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비교하기도 했다.

1936년, 엘살바도르 정부는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스페인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한 최초의 국가 중 하나였다. 또한, 만주국의 독립을 인정하여 일본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추축국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1938년, 엘살바도르 공군은 이탈리아로부터 카프로니 폭격기 4대를 구입했는데, 이때 커피를 지불 수단으로 사용했다. 또한, 엘살바도르는 이탈리아에 조종사 4명을 파견하여 토리노 전쟁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게 했으며, 이탈리아로부터 75mm 포 32문을 구입하기도 했다.

마르티네스는 여러 나치 동조자들을 정부 및 군의 주요 직책에 임명했다. 저당은행을 설립하면서 독일 은행가인 빌헬름 폰 훈델하우젠 남작을 은행장으로 임명했고, 그의 지인인 헥토르 에레라를 은행장으로 임명했다. 1938년 4월에는 독일의 에버하르트 보흐슈테트 소장을 헤라르도 바리오스 장군 군사학교 교장, 교관, 군사 고문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이 참전하자, 엘살바도르는 미국의 압력으로 연합국에 가담했다.

5. 6. 제2차 세계 대전

엘살바도르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보도하는 ''Diario de Occidente''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엘살바도르는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고, 이어 12월 12일 독일이탈리아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했다.[1]

엘살바도르는 파나마 운하 유지를 위해 파나마 운하 지역에 노동자들을 파견했지만, 추축국에 직접 맞서 싸우기 위해 병사를 파견하지는 않았다.[1] 마르티네스는 엘살바도르를 연합국과 연대시켰지만, 비밀리에 추축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랐다는 주장이 있다.[1]

6. 권력 상실

세계 대공황으로 커피 가격이 폭락하면서 엘살바도르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엘살바도르 공산당은 정부를 비난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931년 아르투로 아라우호 대통령은 마르티네스를 후임 대통령으로 지명했다. 마르티네스는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는 한편, 1932년 1월 지방 선거를 약속했으나, 공산당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었음에도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공산당은 1932년 1월 22일 봉기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파라분도 마르티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지도자를 잃은 농민들은 마체테를 들고 무장 봉기했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라 마탄사로 불리는 대학살을 자행했고, 이로 인해 3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후 13년간 이어진 마르티네스의 독재 시대에 엘살바도르는 만주국을 승인하기도 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에는 연합국 측에 가담했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마르티네스를 축출하기 위한 쿠데타 시도가 다섯 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1944년 4월, 자발적인 총파업으로 경제가 마비되고 지식인과 학생들이 파업을 지지하면서 광범위한 반정부 운동이 일어났다. 결국 1944년 5월, 마르티네스는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망명했다.

6. 1. 종려주일 쿠데타 (Palm Sunday Coup)

1944년 4월 2일 종려주일에 제1, 제5 보병사단과 제2 포병연대가 마르티네스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했다. 이 쿠데타는 1943년 쿠데타 시도를 계획했던 일부 군 장교와 정치인들이 주도했다.[1] 반란 군부는 산살바도르와 다른 주요 도시의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고 공군과 YSP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했다.[2] 국가경찰, 국가경비대와 나머지 군대는 마르티네스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쿠데타는 지도력 부재[1]와 반란군이 마르티네스를 체포하지 못해[2] 실패했다.

1944년 4월 내내 쿠데타 주모자 중 많은 이들이 쿠데타 시도에 대한 여러 범죄 혐의를 받았다. 지도자 20명이 처형되었고,[1][2] 체포를 피한 다른 지도자들은 해외로 도피하거나 외국 대사관에 피신했다.[1]

6. 2. 무기력 파업 (Strike of Fallen Arms)

1944년 4월, 엘살바도르 대학교 학생들과 산살바도르 병원 의사들은 마르티네스 정부의 처형에 항의하며 파업을 선언했다. 대학원생, 고등학생, 초등학생들도 이에 동참했다. 이어진 시위에서 군인들은 100명이 넘는 학생들을 살해했고, 이에 노동자, 은행가, 사업주, 교수들이 항의에 가세하여 국가 경제를 마비시키는 총파업을 선언했다. 4월의 쿠데타 시도 이후 처형된 여러 군 장교와 정치인들은 곧 마르티네스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다른 반대파들에게 순교자로 여겨지기 시작했다.[1]

5월 7일, 경찰은 미국 시민인 호세 라이트를 살해했다. 미국 엘살바도르 대사가 라이트의 죽음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자, 로돌포 모랄레스 내무장관이 사임했다. 대사는 나중에 마르티네스의 사퇴를 요구했다. 5월 8일, 마르티네스는 대통령직 사퇴 의사를 발표했고, 5월 9일 사임했다.[2]

7. 사망

1944년 5월, 마르티네스는 과테말라를 거쳐 온두라스로 망명했다.[1] 1966년 5월 15일, 온두라스에 있는 자신의 농장(하시엔다 하마스트란)에서 노동 분쟁 중이던 노동자에게 살해당했다. 향년 83세였다.

8. 개인적인 삶

마르티네스는 신지학 신봉자로서 영매술오컬트를 믿었고, 자신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부적회를 열었다. 40세에 채식주의자가 되어 물만 마셨으며, 색유리 병을 통해 비추는 햇빛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산살바도르에서 천연두가 유행했을 때, 마르티네스는 도시에 색깔 있는 조명을 걸어 유행병을 치료하려 했다. 또한, 막내아들이 충수염으로 아팠을 때 외과의의 수술 대신 햇빛을 받은 파란색 병에 담긴 물로 치료하려 했으나, 결국 아들은 사망했다.

마르티네스는 윤회를 믿었으며, "개미를 죽이는 것이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죄이다. 사람은 죽으면 윤회하지만 개미는 영원히 죽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생 동안 자신의 신념과 관련된 관행을 고수했으며, 비판자들은 그를 "엘 브루호"(스페인어로 "마녀" 또는 "마법사")라고 불렀다.

1944년 4월, 산살바도르 대주교 루이스 차베스 이 곤살레스가 혁명가들의 처형 중단을 요청했을 때, 마르티네스는 "나는 엘살바도르의 하느님이다"라고 응답했다. 그러나 후에 아내의 권유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940년대 마르티네스가 해골 더미 위에 앉아 있는 풍자화

8. 1. 가족

마르티네스는 아라우호 전 대통령의 애인이었던 콘셉시온 몬테아구도와 결혼했는데, 이는 그가 부통령이 되는 조건으로 아라우호와 합의한 내용 중 하나였다.[1] 두 사람 사이에는 알베르토, 카르멘, 에스페란사, 마리나, 에두아르도, 로사, 글로리아, 맥시밀리아노 등 여덟 명의 자녀가 있었다.[1]

배우자콘셉시온 몬테아구도
자녀알베르토, 카르멘, 에스페란사, 마리나, 에두아르도, 로사, 글로리아, 맥시밀리아노


8. 2. 종교 및 개인적 신념

마르티네스는 신지학자이자 프리메이슨이었다.[1] 그는 영매술오컬트를 믿었으며, 정기적으로 자신의 집에서 부적회를 열었다. 1944년 4월, 산살바도르 대주교인 루이스 차베스 이 곤살레스가 마르티네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혁명가들의 처형을 중단하라고 요청했을 때, 마르티네스는 차베스에게 "나는 엘살바도르의 하느님이다"라고 응답했다. 마르티네스는 후에 아내의 권유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마르티네스는 40세에 채식주의자가 되어 물만 마셨다. 그는 색유리 병을 통해 비추는 햇빛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산살바도르에서 천연두가 유행했을 때, 마르티네스는 유행병을 치료하기 위해 도시에 색깔 있는 조명을 걸라고 명령했다. 그의 막내아들이 충수염으로 아팠을 때, 그는 외과의의 수술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르티네스는 햇빛을 받은 파란색 병에 담긴 물이 아들의 병을 치료할 것이라고 믿었고, 그의 아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했다. 마르티네스는 여러 가지 질병과 상황을 치료하는 것으로 알려진 치료법을 팔아 무당으로 명성을 얻었다. 미국인들이 맨발의 엘살바도르 어린이들에게 고무 샌들을 기증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마르티네스는 그들에게 "아이들이 맨발로 다니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지구의 유익한 발산물, 지구의 진동을 더 잘 받을 수 있습니다. 식물과 동물은 신발을 신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마르티네스는 윤회를 믿었다. 엘살바도르 대학교에서 그의 신지학적 믿음에 대한 공개 방송 강의에서 그는 "개미를 죽이는 것이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죽으면 윤회하지만 개미는 영원히 죽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생 동안 자신의 많은 신념과 관련된 관행을 고수했다. 마르티네스의 비판자들은 그의 신념 때문에 그를 "엘 브루호"(스페인어로 "마녀" 또는 "마법사")라고 불렀다.

9. 유산

마르티네스는 엘살바도르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대통령으로, 12년 이상 재임했다.[1] 그의 대통령직은 때때로 Martinatoes라고 불린다. 마르티네스는 엘살바도르의 일련의 군사 독재자 중 첫 번째 인물로, 1979년 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 권력을 잡고 있었다.

마르티네스는 엘살바도르에서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다. 엘살바도르의 시인 로케 달톤은 마르티네스를 비판하는 단편시 '엘 헤네랄 마르티네스'를 썼고, 사후에 쓴 더 긴 시 '라 세구라 마노 데 디오스'(신의 확실한 손)에서도 그를 언급했다.

1948년 초, 엘살바도르 고등학교에서 사용되는 일부 역사 교과서에서는 마르티네스 정부를 "나치식 독재"로 묘사했다. 엘살바도르의 역사가이자 헤라르도 바리오스 원수 군사학교 교수인 호르헤 라르데 이 라린은 그의 저서에서 마르티네스와 그의 정부를 비판하며 그가 영웅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많은 엘살바도르의 보수주의자들은 1944년 4월과 5월에 시위대에 대한 마르티네스의 무력 사용을 비판했다.

최근 역사가들인 헥토르 린도 후엔테스, 에릭 칭, 라파엘 라라 마르티네스는 동일한 보수주의자들이 반공산주의 Matanzaes 당시의 대량 학살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썼다. 1950년대, 마르티네스의 뒤를 이은 엘살바도르 군사 독재 정권은 쿠바 혁명으로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에서 권력을 잡을 때까지 La Matanzaes 전체 사건을 종종 무시했는데, 그 후 정부와 친정부 신문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반공산주의 선전에서 La Matanzaes를 홍보하기 시작했다. 2004년 엘살바도르 군대 웹사이트는 마르티네스를 엘살바도르의 가장 중요한 군사 영웅 중 한 명으로 언급했다.

1979년부터 1992년까지의 엘살바도르 내전 기간 동안, "영광스러운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여단의 엘살바도르 반공산주의 연맹"으로 활동하는 극우 죽음의 분대가 마르티네스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지었다. 이 단체는 여러 기독교 민주당 및 마르크스주의 정치인들의 암살, 1980년 혁명 민주 전선 지도자 6명의 암살, 그리고 1983년의 다른 유사한 살인 사건 등에 대한 책임을 주장했다. 내전 중 여러 죽음의 분대를 설립하고 조정했던 로베르토 다우뷔송 소령은 한때 이 단체를 이끌었고, 중앙정보국은 이 죽음의 분대가 다우뷔송이 설립한 국민 공화 연합 정당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참조

[1] 웹인용 Maximiliano Hernández Martínez http://www.biografia[...]
[2] 웹인용 Maximiliano Hernández Martínez http://www.bi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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