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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미아의 에라스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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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미아의 에라스무스는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기독교 박해를 피해 은둔 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일리리쿰에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으며, 뱃사람의 수호성인으로 숭배받는다. 6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에라스무스의 성유물이 포르미아에 보존되어 있다고 기록했으며, 포르미아와 가에타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15세기에는 고난 구제 성인으로 다양하게 묘사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여러 지역에 안치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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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미아의 에라스무스
기본 정보
존칭 접두사
이름엘모 (포르미아의 에라스무스)
출생 연도3세기
사망 연도약 303년
기념일6월 2일
공경하는 교회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성 엘모, 메스키르히의 거장, 약 1530년
사망 장소일리리아 (현재의 크로아티아)
상징자신의 창자가 윈드라스에 감겨 있는 모습
도르래나 윈드라스를 들고 있는 주교 복장을 한 모습
수호선원
가에타
산테라모 인 콜레
포르미아
어린이 산통
장 질환
경련
출산의 고통을 겪는 여성
소 전염병
세인트 엘모 요새 (몰타)

2. 생애와 순교

포르미아의 에라스무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막시미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기독교 박해를 받던 시기의 이탈리아 주교였다. 그는 교구를 떠나 리바누스 산에서 7년 동안 숨어 지냈는데, 천사가 나타나 도시로 돌아가라고 조언했다고 전해진다.[5]

에라스무스는 안티오크로 가는 길에 병사들에게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밝혔다. 병사들은 그를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데려가 재판을 받게 했다. 끔찍한 고문을 당한 후 사슬에 묶여 감옥에 던져졌지만, 천사가 나타나 탈출을 도왔다.[5] 이후 리키아에서 한 시민의 아들을 살려내 많은 사람들을 세례받게 했다. 이는 서로마 제국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에라스무스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에라스무스는 신앙을 고백했고, 분노한 막시미아누스는 튀어나온 가시가 가득한 통에 에라스무스를 가두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뜨렸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천사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5]

야고보 데 보라지네가 저술한 황금 전설에 따르면, 에라스무스는 포르미아의 주교였으며, 산 채로 창자가 뽑히는 고문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에라스무스가 기도를 올리면 낙뢰로부터 보호받았다는 전설에 따라, 뱃사람들은 벼락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에라스무스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는 뱃사람의 수호성인이 되었다.[6]

니콜라 푸생의 작품 ''에라스무스 성인의 순교''

2. 1. 초기 생애

에라스무스는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를 피해 레바논 산 속에 숨었다.[1] 그는 그곳에서 7년 동안 독수생활을 하면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했다.[1] 숨어 지내던 그는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관리들에게 매질당하고 불타는 석탄 속에서 고문을 당했다.[1] 감옥에 투옥된 그는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을 빠져나와 일리리쿰까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1] 그곳에서 에라스무스는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1] 그러나 그는 다시 체포되어 앙묘기(권양기)로 배에서 내장을 뽑아내는 고문을 당했으며 마침내 처형되었다.[1] 그러한 연유로 복통을 치료하는 성인이 되었다.[1]

2. 2. 체포와 고문

에라스무스는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를 피해 레바논 산 속에 숨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독수생활을 하면서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음식으로 연명했다. 숨어 지내던 그는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관리들에 의해 매질당하고 불타는 석탄 속에서 고문을 당했다.[5] 감옥에 투옥된 그는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을 빠져나와 일리리쿰까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그는 가는 길에 그를 심문한 병사들을 만났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인정했고 그들은 그를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앞에서 안티오크로 데려가 재판을 받게 했다. 끔찍한 고문을 겪은 후 그는 사슬에 묶여 감옥에 던져졌지만, 한 천사가 나타나 그가 탈출하도록 도왔다.[5]

그는 리키아를 지나 유명한 시민의 아들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많은 세례가 이루어졌고, 이는 서로마 제국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관심을 끌었는데, 바라기네에 따르면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보다 훨씬 더 악랄했다." 막시미아누스는 그를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에라스무스는 계속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5]

분노한 막시미아누스는 에라스무스를 튀어나온 가시가 가득한 통에 가두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뜨렸다. 그의 생존은 천사의 개입의 결과라고 주장된다.

그는 여러 이교도들을 설교하고 기독교로 개종시킨 후 로마 일리리쿰 속주에서 다시 붙잡혀 고문을 받았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그는 내장을 꺼내졌는데,[6] 그의 복부가 갈라지고 그의 내장이 도르래에 감겨졌다. 이 버전은 그를 도르래와 함께 보여주는 아이콘을 해석하면서 개발되었을 수 있으며, 이는 그의 선원 후원을 의미한다.[7]

2. 3. 선교 활동과 재체포

에라스무스는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를 피해 레바논 산 속에 숨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독수생활을 하면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했다. 숨어 지내던 그는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관리들에 의해 매질당하고 불타는 석탄 속에서 고문을 당했다.[5] 감옥에 투옥된 그는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을 빠져나와 일리리쿰까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에라스무스는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5]

그는 리키아를 지나 유명한 시민의 아들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많은 세례가 이루어졌고, 이는 서로마 제국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관심을 끌었다. 막시미아누스는 그를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에라스무스는 계속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5]

2. 4. 순교 이후

에라스무스는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를 피해 레바논 산 속에 숨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독수생활을 하면서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음식으로 연명했다. 숨어 지내던 그는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관리들에 의해 매질당하고 불타는 석탄 속에서 고문을 당했다. 감옥에 투옥된 그는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을 빠져나와 일리리쿰까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에라스무스는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그러나 그는 다시 체포되어 앙묘기(권양기)로 배에서 내장을 뽑아내는 고문을 당했으며 마침내 처형되었다.[5] 이러한 연유로 복통을 치료하는 성인이 되었다.

야코부스 데 보라기네의 『황금 전설』에 따르면, 포르미아의 주교였던 에라스무스는 산 채로 창자를 뽑히는 고문을 받고 순교했다. 축일은 6월 2일이다. 에라스무스가 기도를 올리면 낙뢰로부터 보호받았다는 전설에서, 뱃사람들이 벼락으로부터 지켜달라고 중재를 부탁하여 뱃사람의 수호성인이 되었다.[6]

6세기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에라스무스의 성유물이 포르미아에 보존되어 있다고 기록했다. 842년에 포르미아가 사라센인에게 습격당하자 성유물은 가에타로 옮겨졌다. 그 때문에, 에라스무스는 포르미아와 가에타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고난 구제 성인 중 한 명으로 15세기에는 다양하게 묘사되었다. 성인의 성유물은 추기경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에 의해 독일 할레 근교의 교회에 전해졌고, 마티아스 그뤼네발트1521년부터 1523년에 걸쳐 이 추기경을 모델로 호화로운 의상을 입은 등신대 성인상을 그렸다.

3. 성인으로서의 공경

에라스무스는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박해를 피해 레바논 산 속에 숨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독수생활을 하면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했다. 숨어 지내던 그는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관리들에 의해 매질당하고 불타는 석탄 속에서 고문을 당했다. 감옥에 투옥된 그는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을 빠져나와 일리리쿰까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에라스무스는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그러나 그는 다시 체포되어 앙묘기(권양기)로 배에서 내장을 뽑아내는 고문을 당했으며 마침내 처형되었다. 그러한 연유로 복통을 치료하는 성인이 되었다.

항해자의 수호성인이기도 한 에라스무스는 불을 밝힌 일곱 개의 초를 들고 스스로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선원들에게 위험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신호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야고부스 데 보라기네의 『황금 전설』에 따르면, 포르미아주교였다고 한다. 산 채로 창자를 뽑히는 고문을 받고 순교했다. 축일은 6월 2일이다.

3. 1. 수호성인

에라스무스는 벼락이 그의 옆 땅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설교를 했다고 전해져 선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갑작스러운 폭풍과 번개에 위험에 처한 선원들은 그의 기도를 요청하게 되었다. 배의 돛대 꼭대기에서 발생하는 방전 현상은 그의 보호 징표로 여겨졌고, "성 엘모의 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8][9]

842년 옛 ''포르미아''가 사라센족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 에라스무스 숭배는 가에타로 옮겨졌다. 그는 현재 가에타, 산테라모 인 콜레 및 포르미아의 수호성인이다.

선원들의 수호 외에도 에라스무스는 어린이의 배앓이, 복통, 장 질환, 경련, 산모의 고통[6], 그리고 가축 해충으로부터 보호하는 성인으로도 숭배된다.

3. 2. 유해와 성유물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6세기에 에라스무스의 유해가 포르미아 대성당에 보존되어 있다고 기록했다. 옛 ''포르미아''가 842년 사라센족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 에라스무스 숭배는 가에타로 옮겨졌다. 그는 현재 가에타, 산테라모 인 콜레 및 포르미아의 수호성인이다.[10]

성 베드로 대성당 북쪽 익랑에는 에라스무스에게 바쳐진 제단이 있다.[10] 니콜라 푸생의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 사본이 제단화 역할을 한다.[7]

유물로 존경받는 성 에라스무스의 두개골은 독일 뮌헨의 성 베드로 교회에 있다고 전해진다.[11]

3. 3. 예술 작품 속의 에라스무스

디에릭 바우츠,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 루벤 성 피터 교회, 벨기에, c. 1464


가에타에 있는 성 에라스무스 대성당의 종탑


성 엘모의 순교, 네덜란드의 익명의 화가, 1474


15세기에는 고난 구제 성인 중 한 명으로 다양하게 묘사되었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1521년부터 1523년에 걸쳐 추기경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를 모델로 호화로운 의상을 입은 등신대 성인상을 그렸다.

참조

[1] 서적 Martyrologium Romanum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1
[2] 웹사이트 Saint of the Day, June 2: Erasmus of Formia http://www.saintpatr[...] 2012-03-07
[3] 웹사이트 Saint Erasmus http://saints.sqpn.c[...] 2012-03-07
[4] 서적 Erasmus of Gaeta https://books.google[...] Liturgical Press 2004
[5] 웹사이트 Hieromartyr Erasmus the Bishop of Formia in Campania http://oca.org/saint[...]
[6] 웹사이트 St. Erasmus https://faith.nd.edu[...]
[7] 웹사이트 "Poussin, the martyrdom of St. Erasmus", Department of Art History and Architecture, Columbia University http://www.learn.col[...] 2013-04-06
[8] 서적 Don't Shoot the Albatross!: Nautical Myths and Superstitions A&C Black, London, UK 2011
[9] 웹사이트 St. Erasmus (St. Elmo) http://www.catholic.[...] 2012-03-07
[10] 웹사이트 Altar of St. Erasmus - St. Peter's Basilica http://saintpetersba[...]
[11] 웹사이트 The Bejeweled Skeleton of Saint Munditia is on Public Display https://www.thevinta[...] 2023-10-05
[12] 웹사이트 御聖体と聖母の使徒 http://hushiginomeda[...]
[13] 서적 Reclams Lexikon der Heiligen und der biblischen Gestalten Reclam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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