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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오메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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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르 오메트르는 1837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866년 한국에서 순교한 프랑스 출신 가톨릭 사제이다. 그는 1862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1863년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펼쳤다.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했으며, 1968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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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오메트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오메트르 베드로
출생일1837년 4월 8일
사망일1866년 3월 30일
축일9월 20일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오메트르 베드로
오메트르 베드로
출생지프랑스 앙굴렘 에젝
사망지한국 충청도 갈매못
직업순교자
시복일1968년 10월 6일
시복자교황 바오로 6세
시성일1984년 5월 6일
시성자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매장지절두산 순교성지
프랑스어 이름Pierre Aumaître

2. 생애

2. 1. 출생과 성장

피에르 오메트르는 1837년 4월 8일앙굴렘 교구 소속의 에젝 마을에 있는 한 가정에서 5형제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소농이자 제화공이었다. 오메르트의 부모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어린 오메트르는 매우 착한 소년이었지만, 영리하지 못하였고 기억력 또한 형편 없었다.

오메트르는 사제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의 본당 신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본당 신부가 교체되었는데, 새로 부임한 신부 또한 그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오메트르는 매일 아침마다 4 킬로미터 거리에 사는 한 평신도 교사를 찾아가 라틴어를 배웠다. 그의 본당 신부는 오메트르의 근면함에 감복하여 1852년주교에게 그를 리슈몽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토록 추천하였다. 오메르트는 머리가 나빴지만, 강한 의지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매우 열심히 공부하여 우등생이 되었다.

2. 2. 사제 서품과 조선 선교

1857년 앙굴렘에 있는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상급자들도 그의 모범적인 생활에 감복하였다. 오메트르는 완전히 순종적이었다. 그는 철학 수업 첫 해에, 교수에게 자신이 선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1859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약 3년 간의 사제 수업을 마치고, 1862년 6월 14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63년 6월 23일 조선에 입국하여 수원 인근의 샘골에서 조선어를 공부했고,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다블뤼 주교와 함께 선교활동을 하였다. 모든 천주교인들은 오메트르 신부를 사랑하였고 그의 선량함과 친절함에 감복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오메트르 신부에 대해 "이 작은 사제는 사람들에게 성체와 동정 마리아에 대한 헌신을 훌륭히 가르치며 작은 기적을 이뤄내고 있다."라고 기록했다.

2. 3. 박해와 순교

1866년 병인박해가 발발하자, 오메트르 신부는 교우들에게 비천주교인들에게 공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고백할 시간이 왔다고 말하였다. 그는 다블뤼 주교가 활동하던 마을로 가서 포도청자수하였다. 그는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와 함께 홍주를 거쳐 한양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가혹한 심문고문을 모두 견뎌냈다. 1866년 3월 30일충청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오메르트 신부는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 장주기 요셉 그리고 황석두 루카 등과 함께 참수되고 군문효수되었다. 그는 처형되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오메르트 신부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30세였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순교자들의 시신은 장례식 때까지 썩지 않았으며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3. 시복 · 시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1968년 10월 6일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3]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4] 1984년 5월 6일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3. 1. 시복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1968년 10월 6일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3]

3. 2. 시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는 1968년 10월 6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3]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4]

참조

[1] 웹사이트 http://newsaints.fai[...]
[2] 웹사이트 절두산 순교성지 성인유해실 http://www.jeoldusan[...]
[3]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5-01-04
[4] 뉴스 "[교황 방한] 1925년·1968년·2014년…로마에서 서울까지 3번의 시복식" http://news1.kr/arti[...] 뉴스1 201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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