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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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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뮐러는 1900년에 태어나 1945년 실종된 독일의 경찰이자 나치 친위대(SS)의 고위 간부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바이에른 경찰에 입대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뮌헨 정치 경찰청장으로 활동했다. 나치 정권 하에서 게슈타포의 수장으로서 유대인 학살에 깊이 관여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스파이 및 방첩 활동을 지휘했다. 1945년 5월 1일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행방불명되었으며, 사망 시기와 장소에 대한 다양한 추측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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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뮐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하인리히 뮐러
하인리히 뮐러 (1941년)
별칭게슈타포 뮐러
출생일1900년 4월 28일
출생지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뮌헨
사망일1945년 5월 (추정)
사망지베를린 (추정)
소속 정당나치당 (1939–1945)
바이에른 인민당 (1933년까지)
훈장황금 당 배지
경력
충성독일 제국, 나치 독일
복무독일 제국군 (1917–18)
뮌헨 경찰 (1919–33)
게슈타포 (1933–45)
복무 기간1917–18 (군 복무)
1933–45 (친위대)
계급친위대 집단지도자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수상
훈장검이 달린 전쟁 공로 십자 기사 철십자장
철십자 훈장 1급 (1939년 약장)
바이에른 군사 공로 훈장 2급 (검 포함)
1914/1918년 세계 대전 명예 십자장
관직
직책게슈타포 국장
임기 시작1939년 9월 27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1일
임명하인리히 힘러
이전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이후없음 (사무실 폐지)

2. 초기 생애 및 경력

뮐러는 1900년 4월 28일 뮌헨에서 가톨릭 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방 경찰 공무원이었다. 뮐러는 국민학교(Volksschule)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 항공기 정비공 견습 과정을 마쳤다. 전쟁 마지막 해에는 포병 관측 부대의 조종사로 공군(Luftstreitkräfte)에서 복무했다. 그는 용맹성을 인정받아 철십자 훈장 1급 및 2급 등 여러 훈장을 받았다. 1919년 바이에른 경찰에 보조 요원으로 입대하여, 전후 초기에 공산주의 봉기를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 당시 뮌헨에서 혁명적인 "적군"에 의한 인질 총격을 목격한 후, 공산주의에 대한 평생의 증오심을 갖게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뮌헨 정치 경찰청의 수장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2. 1. 출생 및 성장 배경

뮐러는 1900년 4월 28일 뮌헨에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방 경찰 공무원이었다.[1] 뮐러는 국민학교(Volksschule)를 졸업했다.[1]

역사가 리처드 J. 에반스에 따르면, "뮐러는 의무와 훈련을 엄격하게 준수하며, 맡겨진 일을 군사 작전처럼 취급했다"라고 한다. 그는 일 중독자였고 전혀 휴가를 가지 않았으며, 어떤 정치 체제를 취하든 상관없이 독일 국가에 봉사하려 결심하고, 의문을 품지 않고 국가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독일인으로서의 의무라고 믿었던 듯하다. 힘러의 전기 작가 피터 패드필드는 뮐러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정함, 조직력을 언급하며 "전형적인 중간 관리직"이라고 평가했다. 동료와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의 과묵함과 수수께끼 같은 태도로 인해 "스핑크스"라고 불렸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Volksschulede를 졸업하고 항공기 정비공 견습 과정을 마친 뮐러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독일 공군(Luftstreitkräfte)에서 복무했다. 그는 뛰어난 용맹함으로 철십자 훈장 1급 및 2급 등 여러 훈장을 받았다.

2. 3. 경찰 경력 시작

뮐러는 1919년 바이에른 경찰에 보조 요원으로 입대했다. 프라이코르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전후 초기에 공산주의 봉기를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 당시 뮌헨에서 혁명적인 "적군"에 의한 인질 총격을 목격한 후, 공산주의에 대한 평생의 증오심을 갖게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뮌헨 정치 경찰청의 수장이었으며, 그의 활발한 노력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1929년에 바이에른 경찰 서기관이 되어, 경찰 간부가 될 길이 열렸다.

역사가 리처드 J. 에반스는 "뮐러는 의무와 훈련을 엄격하게 준수하며, 맡겨진 일을 군사 작전처럼 취급했다"라고 썼다. 이 무렵부터 그는 일 중독자였고 전혀 휴가를 가지 않았으며, 어떤 정치 체제를 취하든 상관없이 독일 국가에 봉사하려 결심하고, 의문을 품지 않고 국가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독일인으로서의 의무라고 믿었던 듯하다. 힘러의 전기 작가 피터 패드필드는 뮐러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정함, 조직력을 언급하며 "전형적인 중간 관리직"이라고 평가했다. 동료와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의 과묵함과 수수께끼 같은 태도로 인해 "스핑크스"라고 불렸다.

3. 나치 정권 하의 경력

1934년 친위대(SS)에 입대하여, 1936년에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게슈타포의 수장이 되면서 뮐러는 작전 책임자가 되었다. 1937년 1월 4일, 가우 뮌헨-상 바이에른의 나치당 부 ''가울라이터''는 뮐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형사 경찰 감찰관 하인리히 뮐러는 당원이 아니다. 그는 또한 당 또는 그 부속 조직 중 하나에서 활동적으로 일한 적이 없다...
권력 장악 전에 뮐러는 경찰 본부의 정치 부서에서 일했다. 그는 악명 높은 경찰청장 코흐 [1929–33 뮌헨 경찰청장 율리우스 코흐]와 노르츠, 만텔의 지시하에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의 활동 영역은 좌익 운동을 감독하고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에 매우 격렬하게 맞섰고, 때로는 법적 조항과 규정을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뮐러가 오른쪽 세력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했을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그의 엄청난 야망과 두드러진 추진력으로 그는 상관의 승인을 얻었을 것이다... 그의 정치적 견해와 관련하여... 그의 입장은 독일 민족 인민당과 바이에른 인민당 사이에서 다양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국가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성격적 자질과 관련하여, 이것들은 그의 정치적 자질보다 더 좋지 않게 여겨진다. 그는 무자비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효율성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지만 모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린다.
바이에른 정치 경찰의 관리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는 자신보다 직급이 낮거나 능력 면에서 열등한 관리를 제안하는 데 매우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경쟁자를 저지할 수 있었다. 관리를 선택할 때 그는 정치적 고려 사항을 고려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표만을 염두에 두었다...
따라서 뮌헨-상 바이에른의 가우 지도부는 뮐러가 국가 봉기에 아무런 공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뮐러의 조기 승진을 추천할 수 없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하이드리히는 뮐러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승진을 지원했다. 뮐러는 1937년에 ''대령'' 계급으로 승진했다. 그는 관료주의와 통계에 몰두하는 타고난 행정가였으며, 게슈타포의 고발, 고문, 비밀 처형에 대한 보고서를 "행정적 양식"으로 변환했다.

에드워드 크랭쇼는 뮐러를 "개인적 권력을 사랑하고 권위, 즉 국가에 헌신하는 전형적인 비정치적 실무자"라고 묘사했다. 발터 도른베르거 장군은 뮐러를 "기억에 개인적인 인상을 남기지 않는 눈에 띄지 않는 유형의 경찰 관리"라고 평가하면서도, 그의 "꿰뚫어 보는 회청색 눈"과 "차가운 호기심과 극도의 과묵함"을 언급했다. 윌리엄 L. 쉬러는 뮐러를 "세련된 모습의 남자"이자 "냉정하고 냉혹한 살인자"라고 묘사했다.

1939년 2월 베를린: 메이저 v. 슈바이니헨; Dr. 보어; 뮐러


1938년 안슐루스 이후 오스트리아 전체의 보안 경찰 감찰관이 되었으며, 그의 절친한 친구 프란츠 요제프 후버가 빈의 게슈타포 사무실을 맡았다. 뮐러는 수정의 밤 포그롬 당시 20,000명에서 30,000명의 유대인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1939년에는 유대인 이민을 처리하기 위한 중앙 조직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뮐러는 승진 기회를 높이기 위해 1939년 나치당에 입당했다.

역사가 로버트 겔라틀리는 뮐러가 스탈린주의 체제를 나치즘보다 우월하다고 칭찬했다는 발터 쉘렌베르크의 주장을 인용하며, 뮐러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뮐러는 소련 경찰을 칭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이드리히가 유대인 이민 중앙 사무소의 수장이었지만, 뮐러가 사무소의 행정 세부 사항을 처리했다. 전쟁 시작으로 유대인 이민의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사무소는 해체되었다.

3. 1. 나치와의 초기 관계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하인리히 힘러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포함한 많은 나치당원들과 알게 되었다.[1]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 기간 동안 바이에른 인민당을 지지했으며, 1933년 3월 9일 나치의 쿠데타 동안 상관들에게 나치에 맞서 무력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역사학자 리처드 J. 에반스는 뮐러가 의무와 규율에 철저했으며, 그가 맡은 임무를 군사적 명령처럼 처리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에반스는 뮐러가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야망 때문에 나치 정권에 봉사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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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친위대(SS) 입대 및 게슈타포 지휘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보안국(SD)의 수장으로서 뮐러를 영입했다. 뮐러는 1934년 친위대(SS)에 입대했고, 1936년 하이드리히가 게슈타포의 수장이 되면서 뮐러는 작전 책임자가 되었다. 1939년 9월, 게슈타포와 다른 경찰 조직이 국가보안본부(RSHA)로 통합되면서 뮐러는 RSHA "Amt IV"(4과), 즉 게슈타포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몇몇 동명이인의 지도자와 구별하기 위해 "게슈타포 뮐러"로 알려졌다.

뮐러는 게슈타포 국장으로서 1935년까지 독일 공산당과 독일 사회 민주당의 하부 조직에 잠입하여 파괴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나치 정권 안정에 기여했다. 빌헬름 카나리스 해군 대장의 정보 기관과 경쟁했으며, 공산주의 스파이 조직인 "붉은 오케스트라"에 스파이를 침투시켜 소련에 허위 정보를 유포하는 데 성공했다.

괴벨스하인리히 힘러가 담당했던 "유대인 정책"에도 깊이 관여하여, 1939년까지 유대인 이주 전국 본부의 소장이었다. 그의 부하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 지위를 계승했다. 뮐러는 홀로코스트에서 전체 계획자인 힘러와 실행 사무를 담당하는 아이히만 사이의 위치를 차지했다. 주요 업무는 독일 국내 경찰이었지만, 유대인 이주·절멸에 관련된 방침을 전달하고 그 세부 진행 상황 및 정보를 아이히만으로부터 보고받았다. 1941년에 아이히만에게 독일의 소련 점령 지구를 시찰하게 하여, 1년 동안 유대인 약 140만 명을 살해한 특무 기관인 아인자츠그루펜의 소행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아이히만의 인상으로는 "뮐러는 육체적 절멸과 같은 야만적인 일은 제안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아이히만의 보고는 뮐러에게 거의 이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아마도 소련 공격의 6월 이전에 히틀러가 "유대인의 육체적 말살"을 명령했다는 것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며,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결정한 1942년의 반제 회의에도 참석했다.

3. 3. 나치 정권에 대한 기여

뮐러는 나치 정권에 대한 모든 형태의 저항을 탐지하고 진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좌익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지하 조직과 같이 나치에 반대하는 단체를 침투하고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1938년 수정의 밤 포그롬 당시, 20,000명에서 30,000명의 유대인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3. 4. 제2차 세계 대전 중 활동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친위대 보안부(SD)의 수장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소련 경찰 제도에 대한 권위자로 여겨지던 뮐러와 그의 부하들을 조직에 영입했다. 1934년 친위대(SS)에 가입한 뮐러는 빠르게 승진하여 1939년에는 SS 중장이 되었다. 1939년 9월, 게슈타포와 다른 경찰 조직이 국가 보안 본부로 통합되었을 때, 뮐러는 국가 보안 본부 제4국 국장이 되었으며, 다른 동명이인 지도자들과 구별하기 위해 "게슈타포 뮐러"로 불렸다.

게슈타포 국장으로서 뮐러는 1935년까지 독일 공산당과 독일 사회 민주당의 하부 조직에 잠입하여 파괴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나치 정권 안정에 기여했다. 정보 기관으로는 빌헬름 카나리스 해군 대장의 기관과 경쟁했으며, 공산주의 스파이 조직인 "붉은 오케스트라"에 스파이를 침투시켜 허위 정보를 소련에 유포하는 데 성공했다.

4.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에서의 역할

1988년 7월, 작가 이언 세이어는 익명의 개인으로부터 427페이지 분량의 문서를 받았다. 이 문서는 미국 육군 방첩대(CIC) 파일의 복사본으로, 미국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실수로 유출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하인리히 뮐러는 전쟁에서 살아남아 CIC에 정보 고문으로 고용되었다.

세이어와 더글러스 보팅은 CIC에 대한 역사를 집필하고 있었는데, 이 문서의 존재는 미국 법무부 특별수사국의 관심을 끌었다. 특별수사국은 세이어에게 문서의 진실성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익명의 개인(이후 그레고리 더글러스)은 타임 잡지와 더 타임스 신문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이 문서의 주장은 히틀러의 죽음에 대한 음모론(가짜 시신 관련)을 포함하며, 안톤 요아힘스탈러와 루크 데일리-그로브스와 같은 역사가들은 이를 조작된 "신화"로 간주한다.

뮐러는 유대인 학살에서 하인리히 힘러아돌프 아이히만 사이의 위치에서 학살 계획 실행에 긴밀하게 관여했다. 1942년 반제 회의에 참석하여 '최종 해결'을 결정하였고, 이후 학살 은폐를 시도했다.

4. 1. 유대인 이주 및 추방

(요약 및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관련 내용 없음)

4. 2. 학살 계획 및 실행

뮐러는 유대인 학살의 전체 계획자인 하인리히 힘러와 실행 사무를 담당한 아돌프 아이히만 사이의 위치에 있었다. 주요 업무는 독일 국내 경찰이었지만, 유대인 이주·절멸 관련 방침을 전달하고 세부 진행 상황 및 정보를 아이히만에게 보고받는 입장이었다. 1941년 아이히만에게 독일의 소련 점령 지구를 시찰하게 하여, 1년 동안 유대인 약 140만 명을 살해한 특무 기관 아인자츠그루펜의 보고를 받았다. 아이히만의 인상으로는 "뮐러는 육체적 절멸과 같은 야만적인 일은 제안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며, 아이히만의 보고는 뮐러에게 거의 이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아마도 소련 공격 6월 이전에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의 육체적 말살"을 명령했다는 것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며,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결정한 1942년 반제 회의에도 참석했다.

4. 3. 학살 은폐 시도

1942년 가을과 겨울 동안 독일인에 의한 대량 살인에 대한 비난이 연합군 언론에 터지자, 하인리히 힘러는 하인리히 뮐러에게 "모든 시체를 묻거나 태우도록" 지시했다.

5. 전후 행적 및 사망

1945년 5월 1일, 총통 벙커에서 뮐러가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히틀러의 전속 파일럿이었던 한스 바우어는 뮐러가 "나는 러시아의 방식을 알고 있다. 포로가 될 생각은 없다"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1] 그날 이후, 뮐러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그의 운명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뮐러의 행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추측이 있었다.[1]

# 베를린 함락의 혼란 속에서 살해되거나 자살했다.

# 베를린을 탈출하여 남아메리카로 도망쳤다.

# 미국이나 구 소련에 첩보원으로 고용되었다.

2001년 미국에서 정보공개법이 시행되어 뮐러에 관한 CIA의 파일이 공개되면서 미국이 뮐러를 이용했다는 가능성은 부정되었다. CIA는 오히려 뮐러를 전쟁 범죄자로 탐색했지만, SS 중장에 동명이인이 있어서 수색에 어려움을 겪었다. 1960년 이스라엘에 의해 체포된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뮐러의 남미 도주를 증언하여 그의 소재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그러나 아이히만에 대한 심문과 서독 정부의 조사에서는 명확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1]

뮐러가 매장되었다는 정보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서로 모순되어 신뢰성이 떨어졌다. 국민돌격대원 발터 뤼더스 (Walter Lüders)는 뮐러의 유해가 제국 총리 관저(총통 관저)의 정원에서 발견되었고 SS 장교임이 확인되었으며, 소련 점령 지역의 Große Hamburger Straße|그로세 함부르거 슈트라세de에 있는 Jüdischer Friedhof Berlin-Mitte|베를린=미테 유대인 묘지|유대인 공동묘지de에 매장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 묘지의 위치는 1961년 당시 동베를린에 있었기 때문에 서독 정부는 조사를 할 수 없었다.[1]

2013년, 베를린의 Gedenkstätte Deutscher Widerstand|독일 저항 운동 기념관de의 Johannes Tuchel|요하네스 투헬de 소장은 뮐러의 유해가 1945년 8월에 발견되어 유대인 묘지에 매장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1]

5. 1. 베를린 최후의 날

1945년 4월, 붉은 군대가 베를린 시내로 진입하면서 뮐러는 총통 벙커에 모인 마지막 나치 충성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하인리히 힘러히틀러 몰래 서방 연합국과 평화 협상을 시도했을 때, 힘러의 SS 연락 장교인 헤르만 페겔라인을 심문하는 임무를 맡았다. 페겔라인은 히틀러의 처제 에바 브라운의 의붓 동생이기도 했다.

5. 2. 실종

뮐러는 1945년 5월 1일 저녁, 총통 벙커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히틀러의 전속 파일럿이었던 한스 바우어는 뮐러가 "나는 러시아의 방식을 알고 있다. 포로가 될 생각은 없다"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1] 그날 이후, 뮐러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그의 운명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뮐러의 행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추측이 있었다.[1]

# 베를린 함락의 혼란 속에서 살해되거나 자살했다.

# 베를린을 탈출하여 남아메리카로 도망쳤다.

# 미국이나 구 소련에 첩보원으로 고용되었다.

2001년 미국에서 정보공개법이 시행되어 뮐러에 관한 CIA의 파일이 공개되면서 미국이 뮐러를 이용했다는 가능성은 부정되었다. CIA는 오히려 뮐러를 전쟁 범죄자로 탐색했지만, SS 중장에 동명이인이 있어서 수색에 어려움을 겪었다. 1960년 이스라엘에 의해 체포된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뮐러의 남미 도주를 증언하여 그의 소재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그러나 아이히만에 대한 심문은 새로운 정보를 가져오지 못했고, 서독 정부의 조사 역시 명확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1]

뮐러가 매장되었다는 정보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서로 모순되어 신뢰성이 떨어졌다. 그중 국민돌격대원 발터 뤼더스 (Walter Lüders)는 뮐러의 유해가 제국 총리 관저(총통 관저)의 정원에서 발견되었고 SS 장교임이 확인되었으며, 소련 점령 지역의 Große Hamburger Straße|그로세 함부르거 슈트라세de에 있는 Jüdischer Friedhof Berlin-Mitte|베를린=미테 유대인 묘지|유대인 공동묘지de에 매장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 묘지의 위치는 1961년 당시 동베를린에 있었기 때문에 서독 정부는 조사를 할 수 없었다.[1]

2013년, 베를린의 Gedenkstätte Deutscher Widerstand|독일 저항 운동 기념관de의 Johannes Tuchel|요하네스 투헬de 소장은 뮐러의 유해가 1945년 8월에 발견되어 유대인 묘지에 매장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1]

5. 3. 사망 추정 및 논란

뮐러는 1945년 5월 1일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세 가지 추측이 있었다. 첫째는 베를린 함락 중에 사망했거나 자살했다는 설, 둘째는 남아메리카로 도망쳤다는 설, 셋째는 미국이나 소련에 첩보원으로 고용되었다는 설이다.[1]

2001년, 미국에서 정보공개법이 시행되면서 뮐러에 관한 CIA 파일이 공개되었고, 미국이 뮐러를 이용했다는 가능성은 부정되었다. CIA는 오히려 뮐러를 전쟁 범죄자로 찾고 있었지만, 동명이인이 있어 수색에 어려움을 겪었다. 수사관들은 뮐러의 전쟁 중 연인이었던 안나 슈미트를 심문했지만, 뮐러의 생존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했다.[1]

1960년 이스라엘에 체포된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뮐러의 남미 도주를 증언하여 그의 소재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아이히만은 뮐러의 생존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심문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서독 정부는 뮐러의 가족과 비서를 감시하고 소련에 고용되었을 가능성을 조사했지만, 명확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1]

뮐러가 매장되었다는 정보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서로 모순되고 신뢰성이 떨어졌다. 그중 전 국민돌격대원 발터 뤼더스의 증언에 따르면, 뮐러의 유해는 총통 관저 정원에서 발견되었고, SS 장교임이 확인되었으며, Große Hamburger Straße|그로세 함부르거 슈트라세de에 있는 유대인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묘지는 1961년 당시 동베를린에 있었기 때문에 서독 정부는 조사할 수 없었다.[1]

2013년, 베를린의 Gedenkstätte Deutscher Widerstand|독일 저항 기념관de의 Johannes Tuchel|요하네스 투헬de 소장은 여러 공문서를 통해 뮐러의 유해가 1945년 8월에 발견되어 위 유대인 묘지에 매장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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