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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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영 관계는 대한민국과 영국의 외교 관계를 설명한다. 1797년 영국 함선의 조선 근해 항해를 시작으로, 1883년 우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1949년 대한민국이 영국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고, 한국 전쟁 참전 및 재건 지원을 통해 관계가 강화되었다. 2023년에는 글로벌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으며, 경제, 국방,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증진하고 있다. 두 나라는 대사관을 상호 설치하고 있으며, 정상 및 주요 인사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한영 자유 무역 협정을 통해 경제적 교류를 확대하고 있으며, 한국 축구 선수들의 영국 진출, 문화 교류, 항공 노선 운항 등 다양한 분야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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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 관계 | |
---|---|
양국 관계 개요 | |
국가 | 영국 대한민국 |
외교 관계 | 수교: 1883년 11월 26일 (조영수호통상조약) |
주영국 대한민국 대사 | 윤여철 |
주한 영국 대사 | 콜린 크룩스 |
영국 대사관 | 주한 영국 대사관 |
대한민국 대사관 | 주영국 대한민국 대사관 |
정치 | |
관계 | 영국은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 양국은 강력한 외교적, 경제적, 문화적 관계를 유지 대한민국은 영국의 중요한 파트너 국가 중 하나 양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강화 |
경제 | |
교역 | 2022년 기준, 양국 교역액은 155억 달러를 기록 대한민국은 영국의 9번째로 큰 교역 파트너 영국은 대한민국의 22번째로 큰 교역 파트너 |
투자 | 영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주요 투자국 중 하나 대한민국 기업들의 영국 투자 증가 추세 |
문화 | |
교류 | 활발한 인적 교류 다양한 문화 교류 프로그램 운영 한류의 영국 내 인기 증가 |
여론 | |
영국인의 한국에 대한 인식 | 긍정적인 인식 (BBC World Service 조사) |
기타 | |
관련 문서 | 주한 영국 대사 주영국 대한민국 대사 |
외부 링크 | |
대한민국 외교부 유럽 지역 국가 정보 | 대한민국 외교부 - 영국 |
영국 정부 - 대한민국 | 영국 정부 - 대한민국 |
그레샴 칼리지 강연 | 영국과 한국의 관계: 개인적인 관점 |
BBC World Service 여론 조사 | BBC World Service - 부정적인 러시아에 대한 시각 증가: 국제 여론 조사 |
2. 역사
영국과 한국의 관계는 18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1797년(정조 21년) 영국 왕실 해군 윌리엄 로버트 브로우턴이 이끄는 프로비던스호가 원산 근해를 항해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영국 선박들이 조선을 방문하여 통상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다.
광복 이전까지 한동안 교류가 없었다가 1946년 주한 영국 총영사관이 다시 설치되었다. 1949년 1월 18일, 영국 정부는 대한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고,[20] 양국 간의 국교가 수립되었다. 1957년 양국은 상호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하기로 합의하였다.[23]
1960년대에도 영국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한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철도 신호 시설 도입을 위한 차관 계약을 맺기도 했다.[26]
2010년 한국과 유럽연합이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영국과의 교역도 자연스럽게 증가했다. 2016년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자 한국과 영국은 양자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시작하여 2019년 한영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28]
2. 1. 조선 말기 ~ 일제강점기

1797년(정조) 윌리엄 로버트 브로우턴이 이끄는 영국 왕실 해군 프로비던스호가 원산 근해를 항해했다. 1832년(순조 32) 7월에는 로드 애머스트(The Lord Amherst)호가 충청도 홍주군 고대도 뒷바다에 한 달 정도 머물면서 조선 관리들과 한자로 통상 · 수호를 논의했으나 실패했다. 이 배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 간첩 휴 해밀튼 린제이가 타고 있었는데, 그는 카를 귀츨라프와 함께 광동 이북 무역 확장을 위해 청나라 해안 항구들을 다니며 지형 측량, 제도, 정치·경제·군사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18][19] 흥선대원군 집권기(1863년~)에는 로나 호가 충청도와 경기도 연안에서, 셔먼호는 평양에서 통상 요구를 했으나 실패했다.
1845년 영국 해군이 거문도에 상륙한 것이 영국인의 첫 방한(訪韓)이었다. 1882년 음력 4월 21일, 조미 수호 통상 조약과 같은 내용으로 14개조의 조영 수호 통상 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한일 수호 통상 장정과 다르다는 이유로 비준을 보류했고, 1883년 11월 26일 조선과 영국 간 우호 통상 조약 및 부속장정이 조인되었다. 1884년 4월 4일, 영국 공사 해리 스미스 파크스가 비준서를 교환하고 주한 영국 총영사로 상주했다.
1885년 봄,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한 우려로 영국은 조선과 협의 없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다가 조선의 강력한 항의로 철수했다. (거문도 사건) 1900년 주한 영국 총영사관이 공사관으로 격상되었고, 1901년 주영국 공사관이 개설되어 민영돈 초대 공사가 런던에 부임했다. 을사조약 체결 후 1906년 공사관은 총영사관으로 격하되었으며, 1910년 한일 합병 이후에도 총영사관은 유지되었다.
2. 2. 대한민국 수립 이후
1949년 1월 18일, 영국은 미국, 중화민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대한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고 한영 양국 간 국교를 수립하였다.[20]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영국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큰 규모의 UN군을 파견하였다. 특히 임진강 전투에서 영국군은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영국군 600명이 한국의 임진강을 건너는 3만 명의 중국군과 맞섰고, 전투가 끝날 무렵 1만 명의 중국군이 사망했으며, 영국군의 손실은 59명에 불과했다. 이 전투는 전쟁의 전환점으로 여겨진다.[5][6] 글로스터 계곡 전투 기념비는 대한민국 설마리에서 전사한 영국 군인을 위한 기념물이며, 1,078명의 영국 군인이 한국 전쟁에서 사망했다.[5][6]
한국 전쟁 후 영국 정부는 한국 재건을 위해 2600만달러를 제공하였다.[22] 1957년 6월 13일, 양국은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하기로 합의하였다.[23] 대한민국에는 주한영국대사관이, 런던에는 주영한국대사관이 있다.[3][7]
1999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이는 영국 왕족의 첫 한국 방문이었다.[27] 2012년 양국은 포괄적·창조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하였으며, 2023년에는 글로벌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였다.[29]
3. 외교 관계
1946년 주한 영국 총영사관이 재개설되면서 양국 관계가 다시 시작되었다. 1949년 1월 18일, 영국은 미국, 중화민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대한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고,[20] 양국 간의 국교가 수립되었다. 1949년 3월 17일, 비비안 홀트(Vyvian Holt) 주한 영국 공사의 신임장이 제정되고, 주한 영국공사관이 설립되었다. 1949년 12월 31일에는 초대 주영공사로 윤치창이 임명되었고 1950년 2월 17일 공사관이 개설되었다.
1950년 6월 6일, 비비안 홀트가 주한 영국공사로 취임하였는데, 한국 전쟁 때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영국은 한국전쟁 때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큰 규모의 UN 소속의 UN군을 파견하였다. 대한민국은 1953년 6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에 백두진 국무총리 서리 등 사절단을 파견하였다.[21] 한국 전쟁 후 영국 정부는 한국 재건을 위해 2600만달러를 제공하였다.
1957년 3월 4일, 영국이 단독으로 대 중국 금수 조치의 일부 완화를 선언하자, 한국 정부는 이것이 북한에 대한 이적행위라는 점에서 항의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은 완화 조치가 비전략물자(非戰略物資)에 한정된 것이라 밝히고, 유엔 한국문제·통일문제 등에서 계속 한국을 지지하였다.[22]
1957년 6월 13일, 양국은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하기로 합의하였고, 1957년 6월 28일, 허버트 에반스(Hubert J. Evans) 주한 영국공사가 초대공사로 승진하여 신임장을 제정하였다.[23] 1957년 주영국 초대 대사에 임명된 김용우가 10월 28일 영국 런던에 도착하였다.[24] 1958년 5월 14일, 한국 정부는 김용우 대사를 해임하였는데, 이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해양법회의에서 미국안(案)에 반대표를 던진 김용우 수석대표에 대한 문책이었다고 추측된다.
1960년대에도 영국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한국의 경제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한국과의 사이에 철도신호시설 도입을 위한 차관계약을 하였다.[26]
1999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이는 영국 왕족의 첫 한국 방문이었다.[27]
2010년 한국과 유럽연합이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영국과 교역도 자연스럽게 증가하게 되었다. 2016년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였을 때 한국과 영국은 양자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시작하여 2019년에 한영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28]
2012년 한국과 영국은 포괄적·창조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하였으며, 2023년에는 글로벌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였다.[29]
3. 1. 상호 공관 설치
대한민국은 런던에 주영국 대한민국 대사관을, 영국은 서울에 주한 영국 대사관을 두고 있다.[3][7]
3. 2. 외교관 목록
대수 | 이름 | 임기 |
---|---|---|
공사 | 민영돈 | 1901년 7월 ~ 1910년 8월 |
(임시 공사) | 윤치창 | 1948년 8월 ~ 1950년 2월 |
공사 | 윤치창 | 1950년 2월 ~ 1951년 5월 |
공사 | 이묘묵 | 1951년 8월 |
공사 | 김용우 | 1951년 11월 ~ 1957년 11월 |
제1대 대사 | 김용우 | 1957년 11월 ~ 1958년 5월 14일 |
제2대 대사 | 김유택 | 1958년 11월 ~ 1960년 5월 |
제3대 대사 | 김용식 | 1961년 7월 ~ 1962년 8월[30] |
제4대 대사 | 이형근 | 1962년 11월[30] ~ 1967년 9월 |
제5대 대사 | 배의환 | 1967년 9월 16일 임명[31], 1968년 2월 ~ 1971년 7월 |
제6대 대사 | 최경록 | 1971년 10월 ~ 1974년 10월 |
제7대 대사 | 김용식 | 1975년 2월 ~ 1977년 2월 |
제8대 대사 | 한표욱 | 1977년 6월 ~ 1980년 12월 |
제9대 대사 | 강영훈 | 1981년 2월 ~ 1984년 12월 |
제10대 대사 | 김영주 | 1984년 12월 ~ 1987년 11월 |
제11대 대사 | 오재희 | 1987년 11월 ~ 1991년 3월 |
제12대 대사 | 이홍구 | 1991년 3월 ~ 1993년 4월 |
제13대 대사 | 노창희 | 1993년 4월 ~ 1996년 3월 |
제14대 대사 | 최동건 | 1996년 3월 ~ 1999년 3월 |
제15대 대사 | 최성홍 | 1999년 3월 ~ 2001년 4월 |
제16대 대사 | 라종일 | 2001년 5월 신임장 제정 |
제17대 대사 | 이태식 | 2003년 6월 ~ 2005년 1월(2003년 7월 19일 신임장 제정) |
제18대 대사 | 조윤제 | 2005년 2월 ~ 2008년 2월 (2005년 6월 10일 신임장 제정) |
제19대 대사 | 천영우 | 2008년 5월 신임장 제정 |
제20대 대사 | 추규호 | 2010년 2월 신임장 제정 |
제21대 대사 | 박석환 | 2012년 9월 신임장 제정 |
제22대 대사 | 임성남 | 2013년 6월 신임장 제정 |
제23대 대사 | 황준국 | 2016년 6월 신임장 제정 |
제24대 대사 | 박은하 | 2018년 3월 신임장 제정 |
제25대 대사 | 김건 | 2021년 7월 신임장 제정 |
제26대 대사 | 윤여철 | 2022년 10월 신임장 제정 |
직위 | 이름 | 임기 |
---|---|---|
영사 | 윌리엄 조지 애스턴 | 1884년~1885년[32] |
영사 | 월터 힐리어(Walter Hillier) 경 | 1889년~1896년[33] |
공사 | 해리 스미스 파크스 경 | 1884년[34] |
공사 | 존 월샴 (John Walsham, 2nd Baronet) 경 | 1885년[35] |
공사 | Nicholas Roderick OConor 경 | 1892년[34] |
공사 | Claude Maxwell MacDonald 경 | 1896년[34] |
공사 | John Newell Jordan 경 | 1901년-1906년[36] |
공사 | Vyvyan Holt 대령 | 1949년-1954년[37] |
공사 | Andrew Charles Stewart | 1954년~1956년[37] |
특명전권공사 | Hubert Evans | - |
대사 | Hubert Evans | 1957년 |
대사 | Sir Walter Godfrey | 1961년~1966년 |
대사 | 사이먼 스미스 | 2018년~2022년 |
대사 | 콜린 크룩스 | 2022년~ |
3. 3. 협력 강화
2023년 11월 20일, 대한민국과 영국은 양국 간 군사 협력을 대폭 증진하는 다우닝가 합의를 체결했다.[10] 양국은 다우닝가 합의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영일 상호 접근 협정을 모델로 한 제도화된 협정을 체결하는 방안을 제안했다.[11]4. 경제 관계
영국은 대한민국의 주요 교역 파트너 중 하나이다. 영국이 유럽 연합(EU) 회원국 시절에는 한EU 자유 무역 협정에 속해 있었고,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 이후에는 별도로 한영 자유 무역 협정을 체결하였다.[12]
대한민국과 영국은 2019년 8월 22일 한-EU 자유 무역 협정을 기반으로 한 지속적 무역 협정에 서명했으며, 이 협정은 2021년 1월 1일에 발효되었다.[13][14] 2022년 대한민국의 영국과의 무역 가치는 183.49억파운드에 달했다.[15]
양국은 기존 대한민국-영국 자유 무역 협정을 업데이트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16][17]
5. 문화 및 인적 교류
손흥민과 황희찬 등 한국 축구 선수들이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며 양국 간 스포츠 교류에 기여하고 있다. 2015년 9월 기준, 영국에는 40,263명(재외국민 31,787명, 시민권자 8,476명)의 한민족이 거주하고 있으며,[3] 여기에는 북한이탈주민도 포함된다. 2011년에는 약 17,000명의 한국인이 영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공군은 2016년 11월 영국 왕립 공군 및 미국 공군과 함께 국내 공중전 기동 훈련을 실시했는데,[8][9] 이는 미국 이외의 외국과의 첫 번째 훈련이었다.